그녀에 대한 백 가지 이야기 



Marlin 作





“백지석, 김은진, 송유리, 우아현."



5학년 4반 담임선생님의 카랑카랑한 부름에 아이들이 한명씩 앞으로 나 갔다. 가장 먼저 이름이 불린 지석은 시험지에 적힌 빨간색 오엑스 표에 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 여간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그에 반면 아현은 시험 점수가 마치 제 목숨이라도 되는 듯 여간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 아니 었다. 한 책상에 나란히 앉아있는 두 사람은 마치 물과 불처럼 정 반대였다.



지석은 작대기 가득한 시험지를 받아들고 점수만 대충 보고서는 반으로 접어 가방 안으로 쑤셔 넣었다. 그래도 우그려 넣는 것이 아닌 것만으로도 양반이었다.



“다행이다…….”



시험지를 받아들고 자리로 돌아온 아현이 중얼거렸다. 지석은 책상위에 놓인 책을 보는 척 하며 아현의 시험지를 흘겼다. 47라는 지석의 붉은 글 씨와 달리 100의 세 글자가 아현의 이름 옆에 똑똑히 적혀있었다.



아현은 점수를 확인하고서야 마음이 놓이는 듯 손톱 물어뜯던 것을 그만 두었다. 지석은 늘 시험에서 100점을 맞으면서도 시험지를 나눠주는 이 순간 마다 저보다 안달복달 못하는 아현이 늘 보기 싫었다.



“잘난 척은.”



차마 대놓고 말 할 정도로 모질지는 않아서 아현이 들릴락 말락 하게 말 했다. 하지만 그런 모기 소리 같은 목소리를 들었는지, 아현은 후다닥 시험지를 집어넣었다.



하나만 틀렸다 해도 자신의 배는 가까이 되는 점수에도 저리 구는 것을 보니 지석은 여간 배알이 꼴렸다.



“부모님께 시험지에 싸인 받아오는 것 다들 잊지 말고. 다음에는 조금 더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 받도록 합시다.”



지석이 불만스레 주머니에 손을 꼽고 엉덩이를 의자 끝에 걸치고 앉아 아현을 노려보고 있었을 때, 시험지 나눠주는 것을 마친 젊은 여자 담임이 입을 열었다.



지석은 이번에는 또 어떻게 아버지의 잔소리를 피해가야하나 하고 고민에 빠져들었다. 지난번 시험도 싸인을 위조했다가 걸려 일주일 넘게 식탁 머리에서 한소리를 듣고는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걱정도 잠시, 곧 있을 체육 시간에 신이나 정신을 팔렸다. 지석은 아직 순간순간의 기쁨에 휘둘리는 어린 아이일 뿐이었다.



이번 시간이 마치는 종이 울리자마자 지석은 누구보다도 빠르게 운동장으로 달려 나갔다. 어린 시절부터 천식으로 고생한터라 그의 부모님은 체육시간에 조심하라 늘 신신 당부했지만, 아직은 그런 걱정 없이 또래와 뛰놀기 좋아하는 남자 아이일 뿐이었다.



누구보다 먼저 나와 철봉에 뒤집혀 매달려 배트맨 놀이에 열광이던 지석도 수업 시작 종소리에 맞춰 2열로 나란히 섰다.



“다음 주에 체육대회 있는 거 다들 알죠?”



여선생의 말에 아이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네’ 라고 외쳤다. 지석과 아현도 그 중 하나였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 반 대표 계주 선수를 뽑을 거예요. 남자 여자 번 호별로 4명씩 줄 다시 서봅시다.”



아이들은 우왕좌왕 거리면서 나란히 천천히 줄을 찾기 시작했고, 비읍이 이름의 시작이었던 지석은 남자 3조에 들어가 있었다. 아현은 여자로 치면 지석의 바로 뒤인 4조였다.



잠시 후 여선생의 구령에 맞춰 남자 일조가 달리기 시작했다. 나머지 아 이들은 호루라기 뒤쪽으로 나란히 앉아 먼저 뛰기 시작한 친구들이 달리 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생쥐같이 조그마한 1번, 누워 구르는 것이 더 빠를 것 같은 2번, 그냥 평범한 두 명. 그저 반대표 한명을 뽑는 것 뿐 이었는데, 올림픽 경기마 냥 열기가 뜨거웠다. 아이들은 저마다 자신과 친한 친구의 아이들의 이름 을 불러 대면서 순위가 엎치락뒤치락 할 때마다 괴성을 질러댔다. 



“역전! 역전! 김밥 달려!”



처음에는 조그맣고 비쩍 골은 1번이 치고 나가더니 이내 그 아이보다 머 리 하나는 더 큰 3번에게 금세 역전당하고 말았다. 아이들은 그 3번의 별 명을 불러대며 주먹을 휘둘렀다. 1번은 순발력은 앞섰지만 다리길이가 따라가지 못하는 바였다. 2번은 누구나 예상 했듯 통통 튀어가고 있었다. 경기의 중반부터 벌어지기 시작한 거리는 더 이상 좁혀지지 못한 채 노란 브릿지를 왼쪽에 물들인 아이가 결승점을 통과했다. 



“김밥이 이겼다!”

“돼지는 아직도 저기 있어!”



김밥이라 불리는 아이가 결승점에 통과하고 한참 후에야 헉헉거리면서 동그란 아이가 들어왔다. 지석은 아이들과 함께 그 광경을 보면서 깔깔 거리고 있었지만, 저도 숨 때문에 저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괜한 긴장에 손에 땀을 쥐었다.



곧 여자 1조가 달리기를 시작했고, 아까와 마찬가지로 각각의 응원전이 펼쳐졌다. 여자 팀이니 만큼 아까보다 조금 높은 톤의 비명이 흘러나왔고 작년 4학년 1반의 대표로 이어달리기를 했던 여자애가 1등을 차지했다. 남자 2조, 여자 2조의 달리기도 금방 시작되었고 1등들은 자신들의 별명 이 불려 지며 자리로 돌아왔다.



이내 지석의 차례가 돌아왔고, 그도 출발선에 섰다. 긴장감에 뒷목이 뻣 뻣해지는 것 같았다. 나머지 세 명이 줄을 서는 동안 지석은 손바닥에 흥 건한 땀을 허벅지에 문질렀다. ‘준비’라는 선생의 목소리가 들리고 곧 호루라기 소리가 운동장에 퍼져 흘렀다.



지석은 누구보다 빠르게 몸을 튕겨 나갔다. 나쁘지 않은 출발이었다. 스타트도 좋았고, 다리도 가벼웠다. 이 상태라면 조 1등도 바라볼 수 있을 정도였다. 운동장을 반 정도 돌 때까지 지석은 선두였고 안도감에 입 꼬리가 슬슬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승점을 거의 눈앞에 두고 목에서 가르랑가르랑하는 가래 걸린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숨이 가빠오고 목이 졸 리는 것 같았다. 지석의 다리가 저도 모르게 뒤틀렸고, 머뭇거리는 사이 그의 뒤를 바짝 쫓던 아이에게 금세 선두자리를 내어 주고 말았다. 



“아씨…….”

"백지석 달려라!”



꾸준히 일등을 하다 머뭇거린 지석을 보고 아이들이 입을 모아 그의 이름을 외쳤지만 숨의 공포에 멈추어선 그의 앞으로 차례로 나머지 아이들 이 지나갔다. 아직도 고르지 못한 숨을 내쉬며 그는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얼마 가지 않아 언제 그랬냐는 듯 그의 호흡은 되돌아와 있었다.

 


“짜증나…….”



지석은 터덜터덜 걸어오며 발을 질질 끌어 흙먼지 바람을 만들었다. 그런 미세입자들이 호흡에 좋지 않은 것은 의사인 아버지로부터 들어 누누이 알고 있었지만, 솟아오르는 짜증을 다스리기엔 그는 어렸다.



선생은 아이들을 버려둔 채 급하게 지석에게 뛰어왔다. 



“지석아 왜? 또 호흡이 가빠?”

“아니에요. 이제 괜찮아요.”

“어휴, 안 뛰어도 되었는데……. 그래도 잘 했어. 정말 괜찮니?” 

“네, 그냥 잠깐 놀랐나 봐요.”

“그러면, 다행이다. 양호실 가있을래?” 

“그냥 앉아서 구경할래요.”



선생은 아직도 불안한 표정이었다만, 고른 호흡을 하고 있는 지석을 보자 한편으론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이 운동장 바닥에 앉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석은 발을 질질 끌었다. 먼지바람에 몇몇 여자아이들 이 지석에게 눈을 흘겼다.



달리기 중간에 멈추어 서버린 지석은 이제 대표 뽑기에 완전히 흥미를 잃었다. 자신이 당연 반 결승전에 나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맥없이 예선에서 떨어진 꼴이니 더욱 그랬다.



그는 맨 뒤에 쪼그려 앉아 운동화 끝으로 바닥만 긁고 있었다. 그 사이 호루라기 소리가 두 번 더 울렸고, 세 번의 호루라기 소리만이 남아있었 다.



“저기선 현이가 아마 일등할 걸?” 

“왜 아현이 달리기 잘해?”

“응, 작년에 우리 반 대표였어. 완전 짱이지?” 

“우와, 우리 반에 달리기 대표 2명이나 있네?”



지석의 바로 뒤에서 조잘 거리는 여자아이들의 대화에 지석은 고개를 치 켜들었다. 달리기건 뭐건 관심이 없었는데, 아현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출발선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 까짓게 달려봤자.”



아현은 두 번째 자리에 서있었다. ‘삐’하는 호루라기 소리와 여자아이 넷이 동시에 출발선으로부터 달려 나갔다. 지석의 투덜거림과 달리 아현은 세차게 앞으로 뛰고있다.



지석은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아현의 뒷모습을 따랐다. 처음에는 선두자리를 빼앗기며 시작했지만, 몇 걸음 지나지 않아 금세 1등을 따라잡고 넘어섰다. 지석은 그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아현이 결승점에 들어 오는 순간 질투심이 마음 바닥에서 치켜 올라갔다.



1등으로 들어온 아현은 웃음기 없기 묵묵하게 자리로 돌아왔다. 지석은 전부터 아현의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엇이던지 1등으로 해 내면서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



아현이 지석의 앞을 지나가던 그 순간 시기심에 복받인 지석은 다리 한 쪽을 내밀었다. 아현이 맥없이 그의 다리에 걸려 앞으로 고꾸라졌다. 



“현이 넘어졌다!”



여자 아이들의 새된 비명에 다음 조를 준비시키던 선생이 달려왔다. 



“아현아, 괜찮아?”



아현은 말없이 일어나 손에 뭍은 흙을 털어 냈다. 이렇게 심하게 넘어질 거리고 생각하지 못했던 지석은 일말의 양심은 남아있었는지 곁눈질로 아현을 바라보았다. 무릎 위로 올라와있던 체육복 바지 탓에 양 무릎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바보.”



고작 양 무릎이 조금 까진걸 가지고 많은 사람이 유난스럽게 군다고 생각했다. 어수선한 분위기도 잠시, 먼저 달리기를 끝냈던 반장이 아현을 데리고 양호실로 사라졌다. 아현이 넘어진 것이 지석이 탓인 걸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지만, 저 홀로 양심의 불편함을 느꼈는지 지석은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체육시간을 끝내고 교실로 돌아왔을 때 아현은 지석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라리 왜 발을 걸었냐고 화를 내거나 선생에게 일러바치기라도 했다면 지석의 양심의 가책을 조금이나마 덜어주었을 텐데, 아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써 지석 스스로로 마음을 찔러 반성하게 하는 듯 보였 다.



수업이 끝날 때 까지 2시간 동안 속으로 끙끙 앓던 지석은 방과 후 사과 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린 시기심에 못되게 굴었지만 어린 아이의 순수함으로 그 사이 저 홀로 잔뜩 반성한 셈이다. 차마 친구들 앞에서 말하기는 창피하기라도 하여 아현의 주번활동이 끝날 때 까지 1층 문 앞에 서 서성이고 있었다. 한참을 쪼그려 앉아있었는데도 아현이 나오지 않자 지석은 다시 신발을 갈아 신고 교실로 올라갔다.



“야, 우아현!”



꽤나 패기 있게 교실 문을 열었지만 창가의 커튼만이 펄럭이고 있었다. 



“우, 아, 현?”



교실 안으로 고개를 들이 밀었지만, 아무도 없었다. 결국 지석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탓하면서 계단을 내려왔다.



“우유박스 치우고 나오려면 그 쪽 문으로 나와야 할 텐데…….” 



혹시나 해서 아현이 입고 왔던 분홍색 피케이티를 찾아 훑었지만, 벌써 모두들 하교를 마쳤는지 학교 안은 조용했다.



지석은 내일은 꼭 아현에게 사과를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교문을 나왔다. 아현을 기다리느라 한참의 시간을 낭비하여 늘 가던 큰길로 가면 학원 시간에 늦게 생겼다. 오늘 받은 시험점수도 엉망이었는데 학원까지 지각했다간 또다시 어머니의 잔소리가 시작될 것이 눈에 선했기에 평소에는 가지 않던 아파트 뒷골목 쪽으로 향했다.



“고사리 대사리 꺾자. 나무 대사리 꺾자. 유자꽁 꽁재미나넘자 아장장 장별이여. 꺾자, 꺾자 고사리 대사리 꺾자.”



낮임에도 어두컴컴하고 인적도 드물어서 불량배들이 모여 담배를 피고는 한다는 소문을 떠올리고 지석은 오늘 배웠던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두려움을 노래로 물리치려는 듯 했다.



어느덧 발걸음은 노래처럼 가벼워져 바닥에 깔린 돌 모양을 따라 콩콩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발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지석은 자리 에 멈추어 섰다.



“어이. 꼬마.”



고개를 들자 교복 셔츠를 풀어 헤친 중학생 두 명이 서있었다. 그의 얼 굴에 그늘이 졌다.



사회인이 되어 보면 그들은 그저 꼬마들에게 불과했지만, 초등학생에게 교복을 입은 중학생들은 하늘과 같이 무서운 존재였다. 특히 이런 으스스 한 장소에서 만난 것은 더 그랬다.



지석은 멈추어 서서 천천히 다리를 뒤로 끌었다. 노래로 숨겨 마음 속바짝 엎드려 있던 두려움이 다시 일어났다. 



“돈 좀 있냐?”

“없……없어요…….”

“시발. 너 나오면 10원에 한 대씩인데 알지?” 

“진짜……에요”



지석은 완전히 공포에 휩싸였다. 한명이라면 이 악물고 덤벼보거나 냅다 줄행랑이라도 쳐보겠는데 자기보다 머리통 두 개는 더 큰 형들에게 덤비 기엔 지석은 너무도 소심한 소년이었다. 그 중 한명이 가래침을 내 뱉었다. 지석에게 겁을 주려는 행동이었는지 그저 허세부리는 단순한 행동이 었는지 모르겠지만 전자의 이유라면 확실하게 먹혔다.



가래침을 뱉은 쪽이 갑자기 지석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저 눈빛으로 주먹을 휘두르기라도 하는 듯 지석은 몸을 움츠렸다. 



“아씨.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다 했더니, 저거 파란 지붕 집 애네.”

 “파란 지붕?”



다른 쪽이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목이 부러지는 것 같이 뿌드득 하는 소리가 나서 지석은 더욱 더 겁에 질렸다. 아버지가 손가락 마디를 저렇 게 꺾는 것을 본적은 있었지만 목에서 저런 징그러운 소리를 내는 것은 처음 보았다. 얼마 전에 본 영화에서 주인공의 뒤를 쫓던 좀비 한 마리 같았다.



“그 왜, 우리 동네에 존나 큰 집 있잖아. 존나 잘사는 집.” 

“아! 그 동그라미 네 개 달린 차 끌고 다니는 그 집?” 

“어.”

“그럼 그 집 새끼면 돈도 많겠네. 야. 꼬마 너 가방 내놔봐.” 



가래침의 반대쪽, 키가 좀 더 큰 쪽이 지석에게 다가왔다. 지석은 본능 적으로 몸을 돌려 뛰려 했지만, 한발 늦었는지 가방끈을 잡혔다.



“이 새끼가 어딜 토끼려고 해!”



키다리가 발버둥치는 지석의 무릎 뒤를 찼고 지석은 그대로 무릎을 고꾸 라뜨리면서 넘어졌다. 자기가 아까 아현을 넘어뜨리고 뻔뻔하게 굴어 하느님이 혼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야……. ”



무서움에 목구멍에서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원초적인 아픔은 바로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시발, 가진 것이 많으면 좀 나눠 가지자고.”



가래침이 쓰러진 지석의 옆에 쪼그려 앉아 매고 있던 가방을 끌어당겼 다. 고작 초등학교 5학년의 가방에 뭐 그리 비싼 것이 들어 있겠나만 시답잖게 동네 양아치 흉내나 내고 다니는 아이들에겐 그 가치보다는 껌 좀 씹는 이 행동이 중요한 것이었다.



지석이 가방을 뺏기지 않으려고 팔을 가슴안쪽으로 모았다. 뒤에서 너무 세게 잡아당기는 터라 어깨가 빠지는 것 같았다. 지석이 꿋꿋이 가방을 잡고 있자 키다리가 지석의 머리를 툭툭 내쳤다.



“이 꼬마 꽤나 버티네.” 

“야. 야.”



머리를 치는 손아귀의 힘이 점점 세졌다. 지석은 소리라도 질러보려 했 지만 두려움에 목이 막혀 목소리가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 때 중학생 둘 의 괴롭힘이 멈춘 것은 지석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한 여자아이의 목소리 탓이었다.



“괴롭히지 마요!”

“이건 또 뭐야?”

“내 친구니까 괴롭히지 마요!”



지석의 가방을 잡고 있는 쪽이 그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지석은 바닥 에 납작 엎드려 움직이지도 못한 채 그저 고개만 슬쩍 돌렸다. 두 무릎에 하얀 거즈를 붙이고 서있는 제 또래의 여자아이. 아현이었다. 아마 같은 반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또랑또랑한 그 아이의 목소리를 들어보았다. 키다리는 지석에 곁에 남아있고 가래침이 아현에게 다가갔다. 지석은 ‘도망가’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여전히 그의 말은 목 끝에서 두려움에 막혀 나오지 않고 있다. 아현의 바로 앞에 가래침이 섰다. 아현은 왜소한 체구인 축이라 그런지 가래침이 아직 중학생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어른 앞에 서있는 것 같았다.



“겁도 없네. 이 계집애.”

“…….”

“그 사이 입에 본드를 붙였나? 그러게 덤비긴 왜 덤벼?” 

“아무한테도 안 말할 테니까 그냥 가세요!”

 


아현이 겁도 없이 제 등치에 두 배는 되어 보이는 아이에게 덤벼든다. 가소로운 듯 가래침은 콧방귀로 웃고 있었다.



“미친년. 덤빌 사람한테 덤벼야지.”



가래침이 아현의 이마를 검지로 쿡쿡 밀었다. 아현의 머리는 오뚝이 마 냥 앞뒤로 까닥였다.



“하지 말아요!”



잔뜩 찌푸린 채 가래침을 노려보던 아현이 목소리를 높였다 가래침은 어 이없다는 듯 마구잡이로 욕지거리를 내 뱉었다. 쌍 시옷이 들어가는 욕설 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여전히 아현이 맹랑하게 가래침을 노려보자, 인 내심을 놓아버린 가래침이 아현의 어깨를 세차게 밀었다.



아현은 그대로 주저앉으며 쓰러졌고 가속도 탓에 가방을 깔아뭉개면서 뒤집혔다. 아까 다친 무릎이 바닥에 박았는지 아현의 앓는 소리가 지석에 게까지 들려왔다.



“아직도 이게 동태눈깔이네.”



가래침이 화가 덜 풀렸는지 아현의 머리채를 잡았다. 쓰러져있던 아현이 그 힘에 이끌려 몸을 일으켰다. 다시 넘어지면서 상처가 터졌는지 한쪽 무릎의 거즈가 다시 붉게 물들고 있었다.



아현은 가래침의 손목을 잡아당기면서 바동거렸다. 하지만 이미 사춘기 를 지난 남자아이를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아. 이게 뭐야?”



가래침이 갑자기 아현의 머리채를 내팽개쳤다. 아현이 쓰러져 있던 자리 에 하얀 물웅덩이가 져있었다. 그리고 아현이 매고 있는 가방 끝에서도 하얀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가래침이 다시 걸걸하게 목을 끓이더니 아현의 앞에 침을 뱉었다. 아현 의 운동화 위로 하얀 거품 덩어리가 붙었다.



“아. 똑같은 년놈들이네. 오늘 재수 옴 붙었다. 그냥 가자.”



가래침은 아현을 다시 한 번 밀쳤고, 키다리는 지석의 머리를 한 대 쥐 어박고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현이 제 주먹만 한 물웅덩이 위로 주저 앉았다.



가래침이 주머니에 손을 꼽은 채 껄렁이며 걸어오자 키다리도 곧 그 옆 을 따랐다. 가래침의 퉤퉤 거리는 소리는 점점 작아졌고 어느 순간부터 날라리 두 학생의 발소리도 없어졌다.



지석은 두 사람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 까지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놀란 마음에 몸이 굳어버린 것이다.



두 사람이 사라지자 우두커니 앉아있던 아현이 몸을 일으켰다. 지석도 멍하니 아현만 쳐다보다간 곧 허리를 굽히며 일어났다. 창피한 것인지, 무서운 것인지 혹은 단지 얼굴에 피가 솟구칠 정도로 화가 난 것인지 아현의 얼굴이 몰라보게 벌겠다.



물웅덩이에서 일어나 쪼그린 아현은 매고 있던 가방을 앞으로 내려놓았 다. 푸른색의 가방 천이 흠뻑 젖어 남색으로 물들었다. 지석도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아현은 지석을 본채 만채 하며 가방을 열었다. 입구가 몰라보게 찌그러 진 우유곽이 아현의 가방에서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조금이라도 멀쩡해 보이는 우유는 새지 않는지 흔들어 보기도 하고 이미 터져버린 것은 바닥에 내려놓았다. 학교에서 주는 초록색 바탕의 200미리 우유 세 개가 길거리에 널렸다.



지석이 천천히 아현이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넘어지면서 손바닥이 까져 서 공기에 스칠 때 마다 따끔따끔 했다.



아현의 가까이 오자 우유 비린내가 순식간에 올라왔다. 아현이 고개를 들어 지석을 보았다. 그 큰 두 눈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 다.



“고마워. 그리고……, 아깐 미안해.”



자신의 괴롭힘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에서 당돌하게 외쳤던 아현을 보 니 얄궂게 군 자신이 부끄러워 얼굴에 열이 올랐다. 대꾸 없는 아현에 지석은 그 앞에 서서 머리만 긁적이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아현이 갑자기 가방 지퍼를 닫자, 지석은 그 소 리에 놀라 움찔한다. 아현은 개구리가 튀어 오르기라도 하듯 순식간에 자 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일은 아무한테도 말 하지 마.”



그녀는 그대로 가방을 매고 지석을 등 뒤로 한 채 뛰기 시작했다. 



“저기! 우아현!”

 


지난해 달리기로 반대표를 할 정도라 하더니 양 무릎이 깨졌음에도 불구 하고 순식간의 지석의 앞에서 사라졌다. 얌전히 걷는 것만으로도 상처가 쓰릴 텐데 그만큼 지금 상황이 부끄러웠는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아현을 잡으려는 듯 뻗친 손은 허공에서 민망하게 헛돌았다. 지석은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발 근처에 아현이 버리고 간 터진 우유 3개만이 덩 그러니 놓여있었다.



학원 시간에 쫓겨 이 길을 선택한 것도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채, 지석은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간다. 애초에 지름길라 생각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시간은 경과한다.



방금 전 일어난 일에 너무 놀라 멍한 지석의 표정은 마치 회사에서 잘리 고 세상을 모두 잃은 중년이나 지을 법한 얼굴이었다.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지석의 어머니가 앙칼진 소리를 내며 소파에서 일 어났다.



“백지석! 학원가야 할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어디서 헤매다 들어오는 거야!”



지석은 초점 없는 눈길로 어머니를 한번 쳐다보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 아들이 이상하게 구는 것도 모르고‘학원가게 빨리 준비해’ 라는 목소리 가 지석의 뒤를 따라오며 그의 머리를 콕콕 쑤셨다.



지석은 방안에 들어오자마자 가방을 던져놓고 그대로 침대 위에 누웠다. 늘 몽땅 연필을 볼펜의 빈 통에 끼워서 쓰던 아현의 모습. 아직도 저학년이나 쓰는 만화 그림이 그려진 책가방을 메고 다니는 아현의 모습. 청소시간 마다 모두가 쓰레기 통으로 버리는 먼지 먹은 연필을 줍던 아현의 모습. 그리고 가방 한 가득 우유를 담고 있던 아현의 모습이 떠올랐다. 중학생 형들이 말하던 파란 지붕의 파란색과 아현이 매고 있던 색 바랜 가방의 파란색이 동시에 떠오르면서 저도 모르게 수치스러워졌다. 부족할 것 없이 살아온 지석은 아현을 통해 처음으로 부족함이란 감정을 느껴보 고 있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학원’의 외침을 뒤로 한 채 지석은 눈을 꾹 감았다. 꼭 감은 눈꺼풀 안이 온통 푸르스름하게 물들고 있었다.

헤테로 빙의글을 쓰고있는 말린입니다 다른 글들도 종종 쓰고있습니다 읽으면 행복해지는 글을 쓰고 싶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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