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의 도움으로 소개받은 소속사의 서 대표님은 젠틀하신 분이었다. 외모도 태도도.


"왔어요? 앉아요. 어? 도영이도 같이 왔네?"

"오랜만이에요 서 대표님."


내 매니저를 자처한 산타와 함께 들어가자 대표님은 우리의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둘이 사귀어요?"

"네?"

근데 처음 만나자마자 냅다 사귀냐고 직구를 던질 줄은 몰랐는데. 대표님마저 궁금해하는 건가 싶어 당황해하자 대표님은 태연하게 말했다. 


"아. 계약하면 기사 내야 할 것 같아서."


잠잠해질 거라 생각했던 열애설은 식을 줄을 몰랐다. 산타는 이러다 본인이 염려했던 대로 교수-제자 열애설로 번질까 두려워했다.


"반박 기사던 인정 기사던. 내야 할 것 같아." 


대표님의 말에 산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귀는 건 맞는데 인정 기사 내는 건 좀 부담스러워서요."

"내가 보기엔 내면 윈윈일 것 같은데? 지금 여론도 좋고. 둘이 묶어서 출연 같은 것도 할 수 있고."


대표님은 대표님이었다. 묶어서 출연이라니요. 산타는 지금도 밖에 나가면 사진 터질까 집 데이트만 하는 중인데요.


"그렇게 사용 안 하셨음 해서요. 저희 진지하게 만나는 거라."


산타는 그러더니 내 손을 꽉 붙잡는 거였다. 그게 어찌나 힘이 되던지. 학교에서는 교수님이었고 사회에서는 선배임인 애인이라니.


"그래? 그럼 뭐. 도영이 원하는 대로 해줄게."

"시기랑 자세한 건 따로 연락드릴게요. 오늘은 일단 계약서."


산타는 어른은 어른이었다. 딱 잘라 상황을 정리하고 화제를 돌렸다. 서 대표님은 내게 계약서를 가져다주었고 산타는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대표실을 나섰다. 이 또한 사전에 계획된 일이었다. 단 둘이 있으며 대표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고 별로면 계약을 안 해도 된다며 산타에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미리 들었던 거였다.


"도영이 조건보다 훨씬 좋게 모셔 오는 거예요."

"아 감사."

"도영이 제자여서 엄청 챙기는 줄 알았는데 연인이어서 그런 거구나."


계약서를 읽어보자마자 좋은 조건임을 알 수 있었다. 이거 다 산타가 따져서 얻어낸 것임도. 


"...합니다. 김도영씨 소개로 받은 특혜."


그래도 끝까지 다 읽어보고 결정해야 했다. 계약 전에는 내가 갑이라고. 계약 하는 순간 을이 되니까 신중해야 한다는 산타의 말이 떠올라 굽신거리지 않았다.


"연인 맞아요?"

"네?"

"웬 김도영 씨. 내 앞에선 안 그래도 돼요. 도영이 데뷔 때부터 알았고."


근데 서 대표님은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잔뜩 긴장해서 계약서를 읽는 내가 웃겼던 모양이었다.


"김도영이 계약서 읽어보고 나 어떤지 보라고 빠져준 거죠? 그럴 거면 여기까지 왜 왔담."


역시 대표님은 머리 꼭대기 위에 있었다. 아무래도 이쪽 사람들은 오래 일 할수록 능구렁이가 되는 거겠지. 


"진짜... 멋진 사람이죠."


남자친구지만 같은 업계 선배로 배울 것이 참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 이상형이 언제부터 존경할 만한 사람이었던가. 나도 모르게 감탄 하자 서 대표님도 동의하셨다.


"여주님 인생에 도영이 같은 애는 다시 못 만날 거예요. 아 나쁜 의도는 아니에요."


서 대표님이 급하게 붙인 대로 잘못 들으면 기분이 나쁠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완전 동의!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김도영이라는 완벽한 사람에게 저라는 오점을 남기고 싶은 걸요."


어찌됐던 뼈가 되는 조언이었다. 내 말에 서 대표님은 또 깔깔대고 웃으셨다. 


"와우. 여주님 보기보다 훨씬 더 성격 괜찮네요."


그 때 마침 들어온 김도영을 보곤 서 대표님은 똑같은 말씀을 하셨다.


"도영이도 꽉 잡아라. 사랑에 망설이지 마."


들어오던 김도영은 갑작스러운 조언에 당황할 법도 한데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나도. 연애가 내 인생 최고 업적인걸?"


산타가 그렇게 말하자 나는 빨개진 얼굴로 투덜댔다.


"...사돈 남 말 하시네."

"얼씨구?"


서 대표님은 그런 우리가 웃기는지 헛웃음을 지으셨다. 그렇게 소속사가 생기고 열애설 인정 기사까지 내기로 하고 회사를 나오는 길이었다. 


"계약도 했고 저녁은 내가 쏠게요."

"정산 받고 해도 안 늦어."


계약금 받았는데. 산타는 극구 사양했다. 


"우리 집으로 갈까?"


이제는 익숙해진 우리라는 호칭. 그런 산타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조수석의 문을 열고 기다리던 산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냥요. 우리에 내가 포함된 게 좋아서."


그렇게 말하며 조수석에 올라탔다. 그런데 문을 닫아준 산타가 운전석에 올라타자 한숨을 내쉬는 거였다.


"웬 한숨?"

"내일 기사 나면... 부모님 어떻게 보지."


끙끙 앓는 산타가 웃기고 귀여웠다.


"왜요. 제자 만났다고 뭐라고 하실까 봐?"


이제는 자기감정도 꽁꽁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산타가 고마워서 웃음이 나왔다. 내 말에 산타는 눈을 부릅뜨고 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부모님 말고... 도둑놈이라고 경찰에 신고하시면?"


우리 혹시 띠동갑 차이 나나요. 기껏해야 몇살 차이도 안 나는데 또 걱정이 가득했다. 우리 집은 내가 김도영 만난다고 하면 오히려 두 팔 벌려 환영일 텐데. 걱정에 잔뜩 구겨진 볼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그럼 몇 년 징역 살고 나와요. 그래도 기다릴 테니까."


내 말에 산타는 어이없는지 헛웃음을 지었다.


"기사 나기 전에 미리 말씀 드릴 거예요. 자기도 미리 말할 곳 있음 말해요."

"미리 말할 곳?"

"응. 여기는 미리 안 말하면 좀 걱정된다 하는 곳?"


내 말에 산타는 고개를 끄덕거리다 나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왜 봐요."

"생각보다 어른스러워서."


산타는 그러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 믿지?"


여러가지의 의미가 함축된 말이겠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자가 교수를 안 믿으면 어떻게 수업을 들어요. 애인을 안 믿으면 어떻게 연애를 하고.


"믿어요."


내 말에 산타는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사탄이 

어떻게 

산타








기사가 나기 전에 할 일을 다 해야 했다. 예를 들면 서프라이즈로 산타를 만나는 것 같은 거랄까. 그래서인지 발걸음이 가벼웠다. 서프라이즈를 좋아하지 않는 산타였기에 맛있는 빵을 사서 일단 현관 문고리에 걸어두고 가려 했다. 들어와서 같이 먹고 가라고 하면 순순히 들어가려고 했는데. 

그런데 산타의 문 앞에 한 여자가 서 있는 게 아닌가.


"엥 뭐지. 누구세요?"


들어가지도 않고 서 있는 걸 보면 기다리는 건가 싶어 묻자 여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숨이 헉하고 막혔다. 연예인급으로 예쁜 얼굴이어서. 순간 헉하고 놀라는데 여자분이 나를 엄청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누구세요?"


역질문에 쎄한 느낌이 들었다. 저 여자분이 보통내기 아닐 것 같다는 예감과 산타와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 같다는 그런 느낌이.


"저 사... 여기 사는 사람 여자친구인데요."


아 바보 같이 말을 더듬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비웃는 듯한 얼굴로 머리끝부터 발 끝까지 주욱 훑어보는 눈길에 기분이 나빠졌다.


"아 지금 만나시는 분이세요? 생각보다 어리시네."


여자분은 지금에 강조를 하며 말을 했다. 그 말인 즉슨 내 예상대로 그녀가 산타의 과거 여자친구라는 말이었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구겨졌는데 여자분은 내가 현재 여자친구라는 말에도 개의치 않아 하는 얼굴이었다. 꼭 내가 잠깐 스쳐 가는 인연이라고 확신하는 듯.


"도영이가 열애설에 관해 할 말 있다고 저한테 연락이 왔더라고요."


먼저 연락이 왔다고 말하는데 내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사탄이 왜 저 여자에게 연락을 했을까. 우리 열애설이랑 저 여자랑 무슨 연관이 있어서. 그러고 보니 어제 종일 불안해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우리 열애설이랑 무슨 상관이 있으셔서."


불안함을 억누르고 코웃음을 치며 말하자 여자분 역시 심기를 건드린 듯 얼굴이 굳었다.


"아... 제가 도영이랑 결혼하기로 한 사람이어서 아닐까요."


그리고 그 직구에 나는 들고 있던 빵 봉지를 놓쳤다. 아 없어 보이게. 바닥에 떨어진 빵을 줍느라 무릎을 굽히는데 눈가가 후끈해졌다. 뭔 개소리를 하는 거냐며 머리채라도 잡을 걸 그랬나. 근데 백프로 산타가 보게 될 걸 알아서 그랬는지 나도 예의를 차렸다.


"결혼 할 사람에 대해선 들은 바 없는뎅."


빵을 줍고 일어났다. 목이 메여서 요자가 안 나왔지만 그거에 킹 받은 얼굴인 여자분은 붉어진 얼굴로 나를 보았다.


"잘 모르시나 본데. 도영이가 저한테 프러포즈 했었어요. 저랑 잠깐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고 있었던 거예요. 저랑 헤어지고 힘들어서 그 쪽이랑 잠깐 만나고 있는 건데 상처받기 전에 끝내시죠."


자기랑 헤어졌던 그 사이에 잠깐 만나신 분임을 확신하듯 말하는 어조가 퍽 불쾌했다. 누군가와의 대화가 이렇게나 불쾌할 수 있나. 이제는 대화를 끝내고 싶었다.


"그게 무슨... 바람 피우셔서 헤어지셨잖아요. 저 다 알아요."


얼마전에 들은 2 dari가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쿨하게 말하며 아예 산타네 집에 들어갈 생각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여자분은 내 어깨를 붙잡았다. 울분에 찬 여자분의 감정 덕에 어깨가 뽑혀 나갈 듯 아팠다.


"댁도 도영이한테 프러포즈 받으셨나요? 저희 사이에 끼어들지 마세요. 그깟 몇개월 만난 걸로."


그깟 몇개월. 그 말에 나도 멈춰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악에 받친 얼굴이었지만 끝까지 차분한 목소리로 나만 겨우 들릴 듯 속삭였다.


"도영이가 결혼하자고 한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잘 모르시나 본데 걔 되게 현실적이에요. 미래 생각 않고 잠깐 가볍게 만나시는 분은 모르겠지만. 그러니 도영이 인생에 얼룩은 그만 남기시죠?"


미래없이, 잠깐, 가볍게. 그녀가 나를 정의한 단어들 중 아프지 않은 건 하나도 없었다. 상처받은 얼굴을 눈치챈 그녀가 잡고 있던 내 어깨를 확 놓아버리자 나는 힘 없이 복도 벽으로 밀려났다. 여자는 나를 비웃듯 바라보더니 초인종을 눌렀다.


"도영아. 나야."


부연설명없이 나라고만 말했는데 문이 열렸다. 그 덕에 문 뒤에 가려진 나는 문에 찧을 뻔했지만 그 보다도 놀란 건.


"...들어와."


들어오라는 사탄의 목소리였다. 아무나 들이지 않는다는 제집의 문 열어주는 사탄과 그 집에 들어가는 전 여자친구. 자기 공간에 낯선 사람 안 들이는 거 아는데. 혼란스러운 나는 문이 닫히자마자 스르르 주저앉았다.


믿을 수 없었다. 우리 열애설에 관해 할 이야기가 있다며 전 여친을 집으로 부른 사탄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볼에 흐르는 눈물을 훔쳐냈다. 이 꼴을 하고 사탄의 집에 쳐들어가 무슨 상황이냐고 따져 물을 자신이 없었다. 그저 사 온 빵을 문고리에 걸고 일어날 수 밖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렇게 눈물을 줄줄 흘리며 집으로 향한 나는 문을 꼭 잠그고 침대 속으로 파고들었다. 오는 연락도 아무것도 보지 않고 그대로 눈을 꼭 감았다. 무서웠다. 사탄의 마음을 예측할 수 없어서. 그가 만났던 사람과 마음을 얼마나 쏟았는지 알 수 없어서. 그녀의 말대로 그와 함께하면 즐거울 뿐인 나로서는 짐작할 수가 없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야."


늦은 밤까지 입에 물 한 방울 안 대자 엄마는 나를 걱정했다. 세상에 딸이 열애설이 났는데도 왜 먼저 말 안 했냐고 묻지도 않으셨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아빠가 누구냐고 묻자마자 나는 그 작은 소리가 들렸다. 내 남자친구라고 소개하는 사탄의 목소리가. 아 이럴 거면 빵이라도 걸어두고 오지 말걸. 문 앞까지 왔다가 연락도 안 하는 내가 걱정되어 찾아온 게 분명했다. 아니 사탄이라면. 어쩌면 내가 그녀를 만났다는 것도 다 알고 온 걸지도 몰랐다.


"남자친구 왔다는데... 넌 여기 있을래?"


엄마가 내게 물었고 나는 이불 속에서 겨우 응하고 대답했다. 엄마가 한숨을 쉬고 방문을 살짝 열고 나갔다. 밖에서는 엄마, 아빠와 사탄이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도영입니다."

"아니 뭘 이런 걸 다..."

"과일은 뭐 좋아하시는 지 몰라서 여주가 좋아하는 걸로..."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문틈으로 살짝 보자 홍삼 세트를 들고 나타난 사탄이 보였다. 감정이 남아 미워보이는게 정상인데 우리 집에 온다고 또 멀끔하게 온 게 멋있어보이는 나도 비정상이지. 그 때 문틈으로 지켜보던 나와 눈이 마주친 사탄은 여태 방긋방긋 웃던 미소를 지웠다.

얼굴만 봐도 아는 우리 엄마처럼. 사탄도 이제 내 얼굴만 봐도 무슨 상황인지 대충 알게 되었거든.


"저... 기사 나기 전에 찾아뵈었어야 하는데... 여주랑 만나는 거 탐탁치 않아하실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교수일 때 제자인 여주가 착실하고 예뻐서..."


"우리 애가 예쁘긴 한데 착실한 스타일은 아닌데."


이 와중에 엄마는 정확하게 굴었다.


"여주 교수세요?"


아빠는 또 아무것도 모르고 되물어 산타의 진땀을 흘리게 했다.


"아 예. 지금은 아닌데. 아 만나면서 교수직은 내려놨습니다."

"네? 여주때문에 일을 관둬요?"


왜 그러셨어요. 엄마가 말리는 말응 하자 산타는 눈을 똥그랗게 뜨며 일일히 해명하기 바빴다. 왜 저래 둘다 진짜. 나는 방 안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산타 살려.


"지금은 다른 학교에서 교수를 하고 있구요..."

"젊은 사람이 대단하네."

"아 그게. 조교수긴 해도..."


아빠와 이야기를 하다 또 얘기가 딴데로 샜다. 산타는 그런데도 자기를 만나주니 고맙다 뭐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어휴 여주 성격 받아준 거 보면 예수님이네."


엄마의 말에 결국 폭발한 나는 방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예수는 개뿔. 사탄이라고."


씩씩대며 말하자 엄마와 아빠는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고 내 뒤에 있던 사탄은 풉하고 웃었다. 이것 봐. 자기 욕 하는데도 웃는 것 좀 봐.


"사람한테 사탄이 뭐야. 이런."

"아 네 노래 가사 그거 아냐? 왜 여보. 여주 노래."


두 사람은 그제야 내 자작곡을 떠올리며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내 뒤에 있던 사탄은 내 손을 슬며시 잡으며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거 놓으라고. 왜 왔냐고 해야하는데 나는 사탄의 말에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전 괜찮습니다. 사탄이든 산타든. 여주 옆에 있으면서 천사든 악마든 자처할 준비가 되어있거든요."


오 하나님. 내 갈비뼈 원본이 여기에 있네요. 나는 그저 눈을 감았다. 잇쉬와 잇샤가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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