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청년

정국X지민

w. 코이 



>>짝사랑 02




피시방을 그만둔 지 벌써 2주가 지났다.

지민은 봉사활동을 끝내고 집에 오자마자 정말이지 버르장머리 없게 사장님께 카톡으로 피시방을 그만두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진짜 죄송스러웠지만, 당분간은 그가 생각나는 그 어떤 일도 하고 싶지 않았다.

저를 예뻐하시던 할머니한테 연락한다고 말씀드리고 연락도 못 드렸다. 할머니를 보면 우주 같은 눈동자가 계속 생각나고 곧고 긴 손가락이 생각날 것만 같아서 마음이 조금 추슬러질 때까지 지민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눈앞에 신기루였던 것을 탐하고 싶어서 욕심내다가 잃어버린 지금의 실망감은 상당했다. 애초에 가지려고 했던 것도 아니었고, 그냥 계속 계속 생각나니까 보고 싶은 게 다였는데, 진짜 허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상처받을 게 불 보듯 뻔한 전개들이 눈앞에 대서사시처럼 펼쳐지자 지민은 가슴 가득 뭉게뭉게 펼쳐졌던 감정들을 싹 갈무리를 했다. 그는 진성 헤테로다. 만약 잘 된다 한들 또 호기심에 이용만 당하다가 끝날 테지. 지민은 두 번 다시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군대는 가는 건 또 어떠하랴. 곧 있으면 군대 간다는데 그게 언제인지도 기약이 없다. 어리고 어린 창창한 애인들이 한순간에 돌아서서 더 멋지고 섹시한 애인을 만나는 걸 수없이 많이 봤다. 하물며 김태형은 어떠하냐. 조금만 안 만나면 마음이 멀어졌다고 헤어지고 다른 여자를 만난다. 마지막 본인의 연애 역시도 입대와 함께 끝이 났다.

사랑이라는 게 그렇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당연히 멀어지는. 지민은 냉정해지기로 했다.

그래. 나는 취직을 해야 해. 보란 듯이 취직해서 울 어무니 조금이라도 덜 울려드려야지. 지민은 현실의 냉정한 세계에 발을 들이며 마음을 고쳐먹고자 했다.

당분간은 동사무소를 전혀 갈 필요가 없을 정도로, 지민의 집에는 각종 서류가 넘쳐났다. 이사를 할지라도 전입신고를 따로 하러 가지 않는 이상 별도로 서류를 떼러 갈 필요성이 없었다. 지민은 한동안 굳게 닫아 놓았던 구직사이트를 오픈시켰다. 올해 안에 기필코 취직을 하고 말게써. 퉁퉁 부은 눈으로 지민은 아랫입술을 다부지게 다물었다.


[지민아 나 오늘 너희 집에서 자도 됨?]


한참을 모니터에 코를 박고 있던 지민은 메시지 울리는 소리에 휴대폰을 봤다. 태형이가 심심한가 보다.

잘됐다 싶어서 지민은 키보드에 있던 손을 떼고 휴대폰을 들었다. 콜.

혼자 했던 연애는 그만두는 것도 혼자서 끝내면 된다. 너무나 간단명료했다.




 

***

 




태형이가 온다고 해서 지민은 편의점에 들려 바구니에 종류별로 맥주를 담았다. 그날 이후로 혹시나 또 예전처럼 펑펑 울어 댈까 봐 술도 한동안 먹지 않았었다. 혼자서는 더 그랬다. 그런데 태형이가 온다고 하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지민은 마지막으로 태형이 마실 콜라까지 바구니에 담았다. 계산하면서 언제나 그렇듯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무뚝뚝하게 바코드를 찍어대던 여학생도 그 미소에 자연히 입가가 올라갔다.

딸랑거리는 문을 나오면서 비닐 안에 든 것들을 의미 없이 내려다봤다. 사놓고 보니 술만 잔뜩 사고 안줏거리는 사지도 않은 걸 알게 됐다. 뭘 시켜 먹지. 태형이가 좋아하는 것들을 생각하면서 걸어갈 때마다 덜렁덜렁 봉지가 흔들거렸다. 야 너 뭐 먹을 거야? 한 손에 봉지를 들고 휴대폰을 바쁘게 누르던 손끝이 멈춘다. 눈앞에 보이는 익숙한 컨버스화 때문이었다.

지민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제 눈앞에서 멈춰있는 컨버스화가 제가 아는 컨버스화가 맞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천천히 눈앞에 보이는 얼굴을 보면서도 현실감각이 없었다. 이게 진짜인지 아니면, 아직도 환각처럼 보이는 건지 눈을 깜빡이면서도 정신이 멍했다.

정확히 2주. 2주만인 것 같았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전정국. 전정국이었다.


“형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본 정국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참으로도 반듯하고 잘생겼다. 이마에 용모단정을 박고 다니는 것 마냥 깨끗하고 맑은 것이 딱 그랬다. 지민은 놀랍기 전에 당황했다. 얘는 날 언제 봤다고 형형 소리가 나올까 싶었다. 별로 딱히 얘기도 나눈 적이 없었고, 접점도 없었다. 갑자기 아는 척하는데 너무 놀라서 발걸음을 뒤로 물렀다.

못 봤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비켜서 걸어가면 그만이다.


“......”


뭐야……. 고개를 푹 숙이고 돌아가려다가 또다시 앞을 가로막는 컨버스화에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눈알만 도록도록 굴렀다. 실제로 대화도 길게 나누어 보지 않아서 저번처럼 얼굴도 기억 못 할 거라 생각했다.


“지민이 형 아니에요?”


그러니까 네가 왜 날 아는 척하니…. 지민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천천히 고개를 들면서 입꼬리를 어색하게 올렸다. 하하하. 안녕.


“오랜만이네. 요...?”


한 번도 편하게 말도 해본 적이 없어서 지민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다가온 정국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반말을 했다가 끝에 어색하게 존대를 붙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까만 눈동자가 살며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숨이 막힌다.


“왜 저 보고 그냥 가려고 해요?”


 뭔가 화가 난 눈 같으면서도 까만 눈이 더 깊게 젖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걱정하는 사람의 눈 같기도 하고 담뿍 원망이 서려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복잡 미묘한 시선이 엉겨 붙는 게 부담스러워 지민은 눈동자를 도록도록 굴렸다. 만화였다면 미간으로 땀방울이 삐질삐질 나올 것 같은 모양새였다.


“아…. 못 봤어.”

“눈 마주쳤는데.”


그래 맞다. 거짓말이다. 지민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저도 모르게 민망해서 그의 어깨를 팡 하고 살짝 때렸다. 널따란 어깨는 한 번도 흔들림 없이 견고하게 서서 지민을 내려다봤다. 입을 가리고 웃다가 웃음기 없는 얼굴에 어색하게 올렸던 입꼬리를 내렸다. 아하하. 미치겠네.


“그! 그나저나 여긴 어쩐 일이야. 요? 너도 이 동네 살아. 요?”

“아니요.”


제가 생각해도 지금 말을 더듬는 모양새가 참 병신 같았다. 식어버리는 맥주잔처럼 땀을 한 바가지 흘렸다. 여기서 당장에 벗어나지 않으면 수치 사로 죽고야 말 것이다.

한걸음 뒤로 물러서 지민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이만. 이라고 토해내고 싶은데 저 새까만 두 개의 눈알이 단 한마디도 뱉어낼 수 없게 만들었다. 어찌나 끈질기게 쏘아보는지 온몸이 올가미에 동동 묶인 것처럼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저 형 찾으러 온 거예요. 요기 집 맞죠?”


턱 끝으로 집을 가리키자 지민은 입이 떡 벌어진다. 뭐지 얘? 시선을 계속 도망 다니면서 어떻게 피해야 할지 몰라서 전전긍긍하던 지민이 그제야 까만 눈동자를 오롯이 쳐다봤다. 동글동글 까만 눈동자가 꼭 심술이 난 어린아이 같았다. 삐졌어? 왜?


“여긴 어떻게.....”


우선은 그대로 세워두고 있으면 입이 더 댓 발로 나올 것 같아서, 지민은 바로 앞 근처를 가르쳤다. 잠깐 앉을래……. 요? 21살 남자애가 원하는 게 그건 아닌 듯했지만, 어쨌든 지민이 할 수 있는 최선은 하고 있는 터였다.

옆자리에 앉는 그는 오늘따라 되게되게 낯설게 느껴졌다. 이때까지 제가 알던 사람이 맞나 싶다. 지민은 눈치를 살피면서 작게 입술을 오물거렸다.


“신청서 썼을 때 봤어요. 전화하려다가 모르는 번호는 안 받을까 봐.”


아 그렇구나…. 그런데 갑자기 왜? 정말이지 지민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접점이라곤 1도 없었다. 봉사활동 할 때도 내도록 본인만 녀석의 행동을 쫓고 쫓고 쫓았었다. 그가 저에게 한 일이라고는 눈을 마주치고 웃으면서 군대 간다고 이야기한 거 말고는 없었다. 생글생글 이쁘게도 웃으면서 말이지.


“갑자기 피시방에도 안 나타나고, 동사무소에서 안 오길래요. 무슨 일 있는가 하고.”


과거에서 군대 간다고 말했던 올망졸망한 얼굴을 생각하던 지민은 투정처럼 들려오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가만히 땅바닥으로 내리고 있던 시선을 들었다. 알고 있었다. 모든 걸.

지민으로서는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는 말인데, 아무렇지도 않게 조곤조곤 뱉어내는 목소리는 참으로 나직하고 평안했다. 지민을 끊임없이 응시하는 우주 속은 깊고도 깊은 심연 같았다. 그 모든 게 아주 낯설고 묘했다. 딱히 할 말이 없어졌다. 무슨 일이 있다고 해야 하나.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내가 너를 좋아해서 숨었다고 해야 할까. 어쩔까.


“아니 알고 있었어…. 요?”


아 진짜 병신아. 지민은 바보처럼 말을 다듬어대는 제가 짜증 나서 인상을 찡그리고 맥주를 들고 있던 손으로 식은땀을 닦았다. 여름도 아닌데 땀이 멈추지 않고 흘렀다.


“말 놓으면 안 돼요? 지금 말하는 거 디게 이상한데.”


나도 알거든요. 전정국씨. 부끄러움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겨우겨우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걸 다독이고 이제 좀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보려나 했는데, 갑자기 나타나서는 이렇게 불을 확 붙이고 만다. 조금 어이가 없고 화가 나기도 했다. 4살이나 어린 이 녀석이 지금 자신을 가지고 논 건가?

들고 있던 맥주 캔을 만졌다. 차가운 물기가 지민의 손가락을 촉촉하게 적신다. 어장관리야 뭐야. 도대체.

우웅-우웅-

무릎 위에 올려놓았던 휴대폰으로 태형이의 이름이 찍혔다. 도착한 모양이었다. 지민은 여전히 저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진짜 모를 얼굴의 낯선 전정국씨를 물끄러미 보다가 어색하게 웃고는 전화를 받았다. 어 태태.


-야 너 어디야? 왜 집에 없어?

“어 맥주 사러. 나 집 앞이야.”

-그래? 근데 나 왜 못 봤지?


지민은 어색하게 웃으며 슬쩍 정국을 쳐다봤다.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휴대폰 밖으로 태형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무섭게 표정이 변하는 맑고 고운 아니, 그냥 전정국씨의 눈치에 지민의 기분은 더욱 바닥으로 치달았다.

왜 네가 기분이 나쁜 건데요. 왜.


“어, 그래 알았어, 알았다니까 엉 시키고 싶은거 시켜나. 응”


전화를 끊은 지민의 입가에 더 이상 웃음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얘가 나를 가지고 노는 건지 뭘 하는 건지 모르겠다. 머리가 어지럽고 기분이 좋지 않아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저기.”

“알았어요. 오래 안 잡아.”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자, 정국은 뚫어지게 쳐다보던 시선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대체 얘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여기에 온 건지 아직도 알 수가 없었지만, 지민은 이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맑고 고운 청년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전정국씨는 사실은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였나 보다. 동사무소에 출근 도장 찍으면서 왔다 갔다 했던 것도 알고 있고, 피시방에서 만났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자신에게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괘씸했다. 그럼 이제 와서 이러는 이유는 뭐지? 뭔가 속았다는 기분이 들면서 썩 유쾌하지 않아 기분이 자꾸만 다운됐다. 한없이 한없이 침전하는 불쾌한 기분은 감출 길이 없는데 그렇다고 해서 화낼 필요가 있나 싶다. 앞으로 엮이지 않을 인연을 길게 엿가락 늘어트리듯 늘리고 싶지 않았다. 한때 잠시 신기루처럼 다가왔던 미소년 전정국씨는 여기에서 디 엔드. 안녕이었다.


“형”


어색하게 인사도 없이 집 안으로 들어가려면 지민을 정국이 붙들어 세웠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에 지민의 뒷주머니에 들어가 있던 휴대폰을 빼앗아 손에 들었다. 지민은 그 모습을 보며 입을 쩍 벌렸다. 뭐 하냐 지금?

지잉지잉 하는 소리가 정국의 휴대폰으로 들리고, 넋 놓고 있는 지민의 손에 휴대폰을 쥐여주며 정국은 제 것으로 보이는 휴대폰을 들고 흔들어 보였다.


“형이랑 친해지고 싶어서요. 연락할게요.”


 




***

 




집에 오자마자 덥다고 봉지에서 콜라캔 하나를 따다가 벌컥벌컥 마시던 태형은 답답하게 속사포처럼 랩을 하는 지민의 얘기를 듣다가 입에 들어 있는 콜라를 그대로 바닥으로, 지민에게로 뱉어냈다.


“야이씨. 드럽게.”

“야. 대박 진짜?”


안 그래도 심란해 죽겠는데 콜라로 엉망이 된 옷이랑 얼굴 때문에 짜증이 장난 아닌 지민은 얼굴과 옷에 젖은 콜라를 털어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니까.


“야- 그럼 분명한 거잖아.”


옷을 훌렁 벗고 의자에 걸쳐두었던 티 하나를 아무렇게나 입은 지민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저보다 더 호들갑을 떨어내는 태형을 보며 오히려 감정이 차가워짐을 느꼈다. 답답해서 사 온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미지근하게 식어서 맥주 끝이 썼다.


“야 이건 네가 혹시 게이세요? 라고 안 물어봐도 무조건 기 아니냐?”

“기든 아니든 이제 상관없어.”


알고 있었다. 그 녀석이. 이제 막 성인이 된 꼬꼬마가 저를 갖고 논 거다.


“왜~ 잘생기고 힘도 세고 착하고 좋다며”


착하긴 개뿔. 지민은 그 짧은 시간 동안 잘생기고, 키도 크고, 몸도 좋고 힘도 세고 심정도 참으로 곱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았다. 역시 사람 속은 진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애초에 알고 있었으면 왜 그때 벤치에서 자신을 모른 척했을까. 왜 봉사활동 신청서를 작성했을 때 아는 척을 안 했지? 왜 시선이 얽힐 때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을까.

신뢰가 안되는 시작은 애초에 싹을 잘라 버려야 한다. 군대에서 만났던 그 병장 최우식도 무조건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다정하게 잘해주고 웃어주고 입 맞춰 주고 안아주길래 당연히 사랑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호감은 곧이어 무한한 신뢰로 둔갑해서 사람을 취하게 만든다. 당연히 그도 저처럼 남자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당연히 나를 사랑하고 그 사랑의 끝은 영원할 줄 알았다. 그게 만약 아니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지난 사랑에 예의라도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건 착각이었다. 착각인 걸 떠나서 상도덕 따위도 아예 없었다. 남자끼리니까 그냥 말 그대로 엔조이하고 즐겼으니 됐다고 상대방의 동의는 구하지 않은 채 제멋대로 마침표를 찍은 거다. 지민은 싹수가 아직 한참이나 어린 전정국은 그보다 더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계속 모른 체하고 저를 없는 사람 취급을 하더니, 갑자기 나타나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걱정을 했단다. 퍽이나. 호기심이겠지. 내가 재밌었겠지. 그걸 내가 믿어?


“그리고 걔 군대 간대. 조만간”


아 진짜? 지민을 답답하게 쳐다보던 태형이 그 말에는 다소 아쉬운 표정을 했다. 언제?


“곧? 그것까진 몰라.”

“짐나- 그 나이 때 남자들 원래 다 그 나이 때 군대가. 그래서 군대 가는 게 뭐가 문젠데?”


이쯤 되니 태형이도 지민이가 조금 답답해진다. 이해는 간다. 랩 하듯이 다다다 쏘아대서 반은 알아듣고 반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지민이 누군지 알면서 아는 척을 안 했다는 건 팩트. 그런데 그게 왜. 이유는 존나 궁금하긴 한데 그냥 왜 그렇게 했는지 물어보면 되는 거 아닌가. 오해가 있으면 풀고, 섭섭한 게 있으면 말하고. 그리고 당장 내일 군대 가는 것도 아니잖아? 군대 가기 전에 놀다가 기다릴 수 있으면 기다리고 말면 말지 왜?

태형은 바닥에 앉아있던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 기대어 앉아 있는 지민의 곁으로 다가갔다. 맥주 캔을 따는 소리가 청량하게 집 안을 울렸다. 순식간에 캔 하나를 비운 지민이 두 번째 캔을 벌컥벌컥 들이키고 있었다.


“박지민아-”

“왜.”

“지민아 나는 너 진짜 좋아하는 거 알지.”

“어”

“나는 그래서 영원히 네 편인 것도 알지?”


얘가 뭔 소리를 하려고. 지민은 맥주를 마시면서 곁눈질로 태형의 움직이는 입술을 쳐다봤다.


“나 진짜 너 가끔 이럴 때면 진짜 많이 답답해.
지민아. 삼류드라마 주인공도 너보다 안 답답해.
아~~ 걍 마음에 들면 만나고 만나다가 아니면 헤어져 버려.
왜 그르냐. 진짜.”


진짜 왜 행복을 계속 발로 뻥뻥 들고차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좋으면 만나고 싫어지면 헤어지고, 하고 싶은 말은 하고. 싫은 건 싫다고 말하는 게 어려워? 지민아?

그때 그 병장 나부랭이도 만나서 정강이라도 걷어차 주든지 욕을 하든지 있는 대로 성질을 부렸으면 좀 덜 분하고 덜 상처 받았을 텐데. 바보 같은 친구 때문에 태형은 속이 바짝바짝 말랐다.


“지민아.”

“그만해 내 일이야.”

“궁금하면 물어보고 이야기를 해.
혼자서 방구석 좀 파지 말고. 벙어리냐.”


예전이나 지금이나 답답한 박지민. 멍청이 박지민. 태형은 지민의 머리를 마구마구 헝클어트렸다. 지민은 그가 하는 행동을 고스란히 받으면서 침대에 머리를 기댔다. 혀끝에 감도는 맥주가 썼다. 눈을 감으면 휴대폰을 흔들면서 끊임없이 저를 채근하던 시선이 있다.

맑고 곱디고왔던 전정국. 포카리스웨트 전정국.

핸섬이전정국. 존잘남전정국. 천하장사 전정국.

나를 속인 전정국.

전정국. 전정국. 전정국.

 




***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지민의 얼굴을 보고 태형은 대번에 누구에게서 온 연락인지 알 수 있었다. 핸섬이? 눈짓으로 그렇게 말하자 한 손에 휴대폰을 들고서 펜을 돌리며 상념에 빠져있던 지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태형은 그의 손에 쥐어진 휴대폰을 쳐다봤다. 알림 메시지만 읽고서 책상으로 미련 없이 덮어 버리는 손길에 1도 아쉬움이 없어 보였다. 태형은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은 얼굴로 쳐다봤지만, 지민은 애써 모른 채 했다.

지민의 휴대폰은 그날부터 바빠졌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꼭 문안 인사를 받는 것처럼 지민의 휴대폰에 알알이 존재감을 남기던 전정국은 지민의 꾸준한 무시에도 하루에 한 번의 전화와 하루 세 번의 카톡을 꾸준하게 보냈다. 이따금 문자를 보내는 일도 있었다.

지민은 휴대폰에 시선을 두지 않고 앞에서 숨도 쉬지 않으면서 이야기하는 교수를 쳐다봤다. 쳐다본다고 귀가 열리진 않았다.

제 얼굴을 보면서 방긋방긋 웃으면서 군대에 간다고 말을 했더랬다. 예쁜 여자친구를 소개해달라고도 했다. 아는 척 한 번 하지 않았고, 친한 척 한 번 안 했다. 끊임없이 저를 쫓는 시선을 알았으면서도 표현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냐 전정국.


[형 잘 잤어요? 아침 먹고 나가요. ]


잠을 잘 수 있을 리 없었다. 지민은 깨질 듯한 두통 때문에 잔뜩 인상을 찡그리면서 알람이 울리는 휴대폰을 껐다. 끄자마자 보이는 메시지 알림창에는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한 전정국의 이름이 보인다. 자신이 저장한 것도 아니었다. 그날, 제 휴대폰을 빼앗아 갔던 녀석이 자신의 이름을 한자한자 정확하게 찍어 저장을 했더랬다. 한참을 밀린 메시지들을 쳐다봤다.


[형 점심 먹었어요? 점심 챙겨 먹어요.]

[형 배그해요? 할 줄 모르면 제가 가르쳐 드릴 수 있는데.]

[오늘 미자 할머니께 다녀왔어요. 할머니가 형 찾아요. 보고 싶으신가 봐요.]


그 외에 십여 개의 메시지들을 읽다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머리에 딱따구리가 사는 것 같았다. 두통에 꾹꾹 짓누르며 방금 보았던 무수한 활자들을 기억에서 지우려 애썼다. 아주 쉽게 정리할 수 있는 방법 알고 있었다. 태형의 말대로 그냥 차단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시도를 안 해본 건 아니었다. 하지만 끝내 삭제하시겠습니까? 라는 멘트에는 확신이 없었던 거다. 정녕 전정국을 삭제시킬 확신이 있는가. 지민은 확답할 수 없었다. 한심하고 바보 같았다.

여지없이 휴대폰은 울렸다. 박지민의 인생에 김태형, 엄마 말고 이렇게 자주 전화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루에 한 번, 12시에서 2시 사이 그 언저리쯤 전정국이라는 이름은 마치 지민에게 세뇌를 시키려는 것처럼 1분여를 울리다가 꺼졌다. 지민은 혹시라도 이렇게 신경을 쓰는 자신을 알게 될까 싶어서 수신 거부조차 하지 않았다. 무관심이 최고의 약이라고 언젠가는 제풀에 쓰러질 거라 생각했다.

아이가 호기심에 무작정 이러는 거라고 지민은 마음대로 결론지었다. 그편이 마음이 편했다. 화르륵 타오르는 불길은 빨리 꺼지기 마련이다. 며칠이 지나면 지겹도록 울려대던 것도 사라지겠지. 그때쯤이면 약한 바람에도 흔들리는 낙엽처럼 정처 없이 흔들리는 제 마음도 단단해지겠지 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지민은 싹수 노오란, 저를 가지고 놀았던 전정국에게 그만 휘둘리고 싶었다. 정말이지 그러고 싶은데.


[박지민, 내가 그렇게 잘못했어?]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목이 메어서 물을 마시다가 또다시 들어오는 메시지를 보고 기침을 해댔다. 존대로 조곤조곤 제 하루의 일과나 문안 인사를 했던 것과 완전 다른 메시지였다. 오늘은 태형이가 없어서 등을 두드려줄 사람도 없다.

얼굴이 빨개진 채로 한참을 크게 기침을 했더니 건너편에서 밥을 먹던 사람들이 슬쩍 지민을 쳐다보다 다시 서로의 대화에 집중했다. 눈이 빨개지고 눈물이 다 나왔다. 웬만해서는 그가 읽음을 확인할까 싶어서 한참 읽다가 메시지를 읽곤 했는데 저도 모르게 어플 안으로 들어갔다.


[차단한 것도 아니면서 애태우려고 그러는 건가?]

[화났으면 화났다고 얘기해 주면 안 되나? 이유 다 말해줄 수 있는데.]

[읽고 있는 거 같은데 전화할래. 내가 할까?]


허 참. 어이가 없어서. 넋 놓은 채로 보고 있으니 바로 전정국이라는 화면으로 바뀌면서 손안으로 진동이 느껴졌다. 한참을 망설이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너.


-형은 반말하는 게 좋은가 봐요. 바로 전화 받네요.


하려던 말을 멈추고 바짝 마른 입을 안으로 말았다가 어금니를 꾹 물었다.


“연락하지 마. 나 이제 너 차단할 거야.”

-차단 안 할 거면서 왜 거짓말해요?


제 속에 마치 들어와 가부좌를 틀고 앉은 것처럼 단호한 목소리는 나르시즘에 빠진 것처럼 거만한 것도 아니었고 오만하지도 않았다. 감정을 잘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침착하면서도 단정한 목소리였다. 지민은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목소리로 제 감정을 쥐락펴락 가지고 놀고 있다. 그의 목소리와 숨소리 한 번에 감정이 주체할 수 없이 널뛰기했다.


“나랑 왜 친해지고 싶은데?”

-친해지고 싶은데 이유가 있어요? 아니,
애초에 이유가 뭐겠어요? 하나밖에 없지.


시끌시끌 구내식당 안은 소란스러웠지만, 지민은 귓가에 울리는 그 단정한 목소리에만 집중이 되어서 다른 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너랑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없어.”

-거짓말

“.......”

-거짓말하지 마요. 그럼 왜 그렇게 나를 사슴처럼 그렇게 본 건데요.


사슴. 사슴이라고 한 거 맞나. 얘가. 지민은 가만히 듣고 있는 한쪽 귀가 간지럽고 뜨거워졌다. 분명히 기계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꼭 귓가에 대고 속삭이고 있는 것만 같아서 얼굴이 빨개졌다. 민망해져서 어쩔 줄을 몰랐다. 작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내가 언제.”

-항상 그랬잖아요. 나 다 알아.


다 안단다. 이제 와서. 화가 나서 입술을 깨물었다. 지민의 미간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너 군대 간다며.”

-군대 가면 누구한테 친해지고 싶다고 말도 못 하나?

“.........”

-군대 가면 누구 좋아하지 말란 법도 있어요?


휴대폰을 쥐고 있던 손이 덜덜 떨렸다.


-형. 내 말 듣고 있어요?

“나 남자야. 알고서 그런 소리 해?”


할머니한테 예쁜 애인 소개해 달라고 했던 목소리가 귓가로 웅웅 재생되었다.

전화기 너머에서는 한참을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이내 나직하게 웃는 소리가 났다. 웃겨서 웃는 건지, 어이없어서 코웃음을 치는 건지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해서 알 수가 없었다. 맞은 편에 막 앉아 있던 여학생이 심각한 얼굴로 중얼대던 지민을 흥미롭게 쳐다봤다.

빨개진 얼굴로 지민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당황해서 식판을 들고나오는 것도 잊었다. 부끄러워서 빠르게 구내식당을 나가는 지민의 귓가로 조금 전보다, 좀 더 낮은 울림이 들려왔다. 다리가 풀렸다.


-형은 그럼 제가 뭘로 보여서 그렇게 쳐다봤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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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업임에도 하트랑 댓글 주시는 분들 감사드려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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