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피엔딩 이후 현대+수육 AU.






집에 돌아왔을 때, 거실에 묘한 장식물이 달려 있었다. 세모 지붕을 단 집을 형상화한 물건은 자그마한 상자를 열과 행을 맞추어 모아둔 듯한 모양새였다. 조그마한 상자들에는 1부터 24까지의 숫자가 적혀 있고, 지붕 아래 빈 곳에는 꼬마전구를 단 트리와 크리스마스 리스, 가로등과 썰매 모형이 놓여 있었고, 그 뒤로는 눈 내리는 밤 풍경을 조악하게 흉내 낸 배경지가 붙어 있었다. 모양은 조잡했지만, 이와 비슷한 물건을 리츠카는 매대에서 자주 봤다. 어드밴트 캘린더였다.

선물 받은 적도 없고, 직접 사 온 적도 없으니 오베론이 가져왔을 터다. 크리스마스 같은 기념일에는 콧방귀도 뀌지 않을 것 같은 남자가.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다 보면 천성도 어느 정도 바뀌는 걸까. 리츠카는 살짝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1번 상자를 열어보았다. 워낙 조그마한 상자라 초콜릿이나 사탕 따위가 들어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상자는 텅 비어 있었다. 어라. 리츠카는 아무 날짜나 골라 상자를 열었지만, 여는 것마다 상자는 비어 있었다.


"아직 날짜도 안 됐는데 왜 열어?"

"이거 산 거 아냐?"


목욕 중이었는지, 축축한 머리를 대강 수건으로 닦아내며 걸어 나온 오베론이 퉁명스럽게 핀잔을 줬다. 물론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하루에 하나씩 열어보는 게 어드밴트 캘린더의 묘미라지만, 상자가 있으면 내용물을 확인하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이다. 리츠카는 캘린더 옆구리를 가볍게 쳐서 통째로 흔들어 보았다. 상자가 부딪치며 덜컥거리는 소리만 낼 뿐, 내용물이 흔들리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아무것도 안 들었네. 오베론이 만들었어?"

"그래. 특별히 만들어 봤어. 고맙지?"


안타깝게도 내용물이 없는 어드밴트 캘린더는 속 없는 찐빵이다. 차라리 직접 만드는 모습을 보여줬다면 재미있었을 텐데. 설마 매일매일 하나씩 선물을 채워달라는 시위는 아니겠지? 오베론 보티건이라면 그러지 못할 이유도 없다. 리츠카는 빈 캘린더를 몇 번 더 흔들어 보다가 문득 지나간 추억을 떠올리고는 물었다.


"먼지 들어 있는 거 아니지?"

"먼지가 좋으면 그렇게 하고? 그보다 그거 요긴한 재료 아니었어?"

"그때 오베론이 준 건 다른 데에 못 써먹는 거였대도."


차라리 진짜 '허영의 먼지'를 100개, 아니 500개쯤 선물했으면 좋아했겠지만, 그가 밸런타인데이 답례랍시고 선물해 준 건 서번트 성장에 써먹을 수 있는 재료가 아니라, 그냥 먼지를 본떠 만든 무언가였다. 공예 상자는 예뻐서 먼지를 털어내고 보석함처럼 써먹었지만……. 리츠카는 여전히 제 서랍 안에 들어 있는 작은 상자를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웃었다. 오베론은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가볍게 상자를 툭 쳤다.


"뭐, 너한텐 안타깝게도 먼지는 아니야. 그걸 그렇게까지 좋아할 줄 알았으면 하나쯤 준비할 걸 그랬네."

"안 좋아한다니까? 상자는 예뻐서 좋았지만."

"선물은 매일 식탁에 둘 테니까 가져가."


남자는 저 할 말만 하고 돌아서서 다시 욕실 쪽으로 걸어갔다. 그래도 선물을 주긴 주는구나? 리츠카는 조금 쑥스러워져 괜히 텅 빈 캘린더를 만지작거렸다. 상자를 일일이 풀로 붙여 만들었는지, 어떤 부분은 종이가 덜 붙어 살짝 팔랑거렸다. 어쩐지 밤마다 잠도 늦게 자고 거실에서 뭐에 그렇게 열중하는지 궁금했는데, 저 몰래 크리스마스 선물을 만들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 남자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귀여운 부분이 있었다. 본인에게 말하면 어깨를 부들부들 떨면서 화내겠지만. 리츠카는 그 모습을 혼자 상상하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



"아, 진짜 있네."


12월 1일, 수요일. 퇴근한 리츠카는 식탁에 놓인 작은 상자를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하긴 선물을 준다고 했으니 당연히 주겠지만, 이런 일이 크리스마스 이브까지 매일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자 낯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뭐가 들었을까. 리츠카는 상자를 들어 귀 옆에 대고 흔들어 보았다. 작은 물건이 상자 안에서 바스락대는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매일매일 주는 선물이라면 큰 건 아니겠지. 초콜릿, 젤리, 사탕. 아니면 핸드크림 같은 사소한 화장품이나 귀여운 크리스마스 오너먼트?

기대감에 부풀어 상자를 열자 머리띠가 하나 나왔다. 나뭇가지 같은 두 개의 뿔, 조그만 산타 모자. 루돌프를 모티브로 한 귀여운 머리띠였다. 평소에 패션 아이템으로 하고 다니기보다는 크리스마스 파티 때 코스프레용으로 쓸 것 같은 머리띠였다.

크리스마스니까 루돌프? 뻔한 발상이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오베론 보티건이 동네를 돌아다니며 루돌프 머리띠를 골랐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여전히 툭하면 툴툴거리고 불만이 많지만, 그런 것치고는 현대 생활에 잘 적응한 것 같아 안심이 됐다. 아무리 현대 지식을 미리 공부했다지만 상대는 서번트. 그것도 일반적인 존재도 아닌 전혀 엉뚱한 곳에서 온, 나락의 벌레다. 허상의 이야기가 난무하는 평범한 현대 세계에 적응할 수 있을까, 리츠카는 무척 걱정했었다. 어디 드라마나 소설, 영화뿐이랴. 당장 그들이 겪은 일도 세간에서는 없던 일이 될 것이다. 필요할 때는 영웅으로 추켜세우다가 모든 게 끝나고 나면 없던 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을, 다른 누구도 아닌 오베론이 견딜 수 있을까.

걱정이 무색하게 오베론은 칼데아의 '사후 처리'를 무심하게 넘겼다. 칼데아의 모든 이야기가, 후지마루 리츠카가 인류 최후의 마스터로서 해낸 모든 위업이 윤색되고 주체가 바뀌어 사라지는 것을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리츠카의 인생은 더 나아갈 수 없다는 걸 이해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범인류사란 원래 이런 것이라고 포기해 버린 것인지, 그녀로서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둘이 함께 보내는 첫 번째 크리스마스가 이렇게 흘러가는 건 좋은 신호였다. 리츠카는 조심스럽게 루돌프 머리띠를 써 보았다. 아직 크리스마스는 한 달 가까이 남았는데, 성탄절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내가 줬지만 진짜 바보 같다, 야."

"귀엽지 않아?"


오베론은 코웃음을 쳤다. 그게 할 말이 없을 때 남자가 흔히 하는 행동이라는 걸, 리츠카는 잘 알고 있었다.




***



12월 2일. 리츠카는 그림을 한 장 받았다. 푸른 빛줄기가 한 점에서 사방으로 흩어지는 모양을 그린 그림이었는데, 어린아이가 그린 것처럼 솜씨가 조잡한 것은 둘째 치고, 생김새가 이상해서 통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선물이래. 리츠카의 질문에 오베론은 '선물이 무슨 뜻인지 물어보는 건 멋없는 짓이다'라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이상해 보여도 일단 선물은 선물이니, 그녀는 문제의 그림을 조그만 액자에 넣어 두었다.

12월 3일. 리츠카는 그날도 조잡한 그림을 받았다.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긴 머리의 여자를 그린 그림이었다. 백번 양보해도 리츠카 본인을 그린 그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가상의 티타니아를 그렸다고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오베론이 그런 식으로 저를 불편하게 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그림을 정말 못 그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딱히 잘 그리려는 욕망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한 것은, 그렇다고 아주 막 그린 건 아니라는 점이었다. 어딘가에 원본이 있고, 그 원본을 아주 무성의하게 따라 그린 것 같은, 진짜를 적당히 흉내 낸 저급한 모작 같은 분위기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의미람. 리츠카는 제가 선물을 여는 걸 지그시 쳐다보는 오베론을 힐끔거리며 눈을 깜박였다. 정답을 알려달라는 신호였지만, 그는 대단한 거라도 주었다는 듯 기세등등한 표정을 짓고는 방 안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이상해 보여도 연인이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다. 리츠카는 두 번째 그림도 액자에 끼워 놓았다.

오베론의 어드밴트 캘린더는 중구난방이었다. 리츠카는 순서대로 유리로 만들어진 작은 말 장식품과 메이드복, 손바닥만 한 모형 배. 손잡이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칼날이 긴 칼을 몇 개 대충 그린 그림을 받았다.

메이드복을 받았을 때, 리츠카는 오베론이 설마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그렇고 그런' 것을 원하는지 의심했다. 싫은 건 아니지만, 왜 하필 메이드복이지? 아닌 척했지만 사실 이런 쪽에 페티시가 있나? 입는 것까지야 이럭저럭 할 수 있지만, 주인님♥이라고 부른다거나, 모에모에 큥~♥ 같은 걸 하면서 양손으로 하트를 만든다거나 하는 건 곤란한데……. 리츠카는 저녁도 대충 먹고 메이드복을 펼쳐놓은 채 고민하다가 진지하게 물었다. 이거 입어줬으면 좋겠어? 오베론은 대꾸했다. 아, 천하의 마스터 머릿속에는 그런 생각뿐이구나? 리츠카는 그의 결 좋은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려 주었다.

다음날에는 휴대용 손난로를 받았다.

그 다음에는 저녁이 아니라 아침에, 출근 전에 슈마이가 들어간 도시락을 받았다.

또 그 다음에는 퇴근하자 향신료가 들어간 따뜻한 와인을 받았다.

직접 만든 부적―엉터리로 그림을 그린―. 영양제. 일영사전. 손안에 들어갈 정도로 자그마한 금색 양 열쇠고리. 마슈와 함께 찍었던 사진. 엄지손가락만 한 붉은 보석이 달린 펜던트. 현금 1만엔. 백화점에서 사 온, 택도 뜯지 않은 목도리와 장갑 세트. 집 근처 유명한 디저트 가게의 케이크. 정교하게 만들어진 자전거 모형. 닭고기와 마늘, 크림소스가 들어간 전골 요리. 당근 모양 인형과 생당근.

부적은 이해할 수 있다. 영양제도. 일영사전은 영문을 모르겠지만, 영어 공부 좀 하라는 놀림이려니 생각했다. 양 열쇠고리는 귀여웠고, 마슈와 같이 찍은 사진은…… 뭐지? 심지어 제 앨범에 들어있는 사진을 복사한 사진이었다. 이 사진이 특별히 마음에 들었나? 물어도 오베론은 지금까지 쭉 그랬듯 대답하지 않았다.

선물 이야기를 계속하자. 펜던트. 이건 마음에 들었다. 현금. 돈 싫어하는 사람은 없지만, 여자친구한테 크리스마스 선물로 현금을? 목도리와 장갑 세트. 유용하다. 케이크는 맛있었고, 자전거 모형은…… 뭘까. 전골 요리는 맛있었고, 당근은…… 달리 쓸 곳이 없어서 생으로 씹어먹었다. 당근을 우적우적 씹어먹으며, 리츠카는 어드밴트 캘린더의 본질을 생각했다. 크리스마스를 기대하면서 하나하나 풀어보는 게 어드밴트 캘린더라면, 이건 완전히 실패한 달력이었다. 리츠카는 크리스마스 당일을 기대하기보다는 도대체 내일은 또 무슨 이상한 선물을 줄지, 공통점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선물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12월 23일, 금요일. 리츠카가 주말을 앞두고 퇴근했을 때, 오베론은 식탁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요새는 선물만 던져놓고 슬그머니 나와서 반응을 구경하더니만, 무슨 일인지 오늘은 식탁에 아무것도 없고 오베론이 빈손으로 서 있었다. 리츠카는 외투를 벗고 가방을 내려놓은 뒤 주위를 둘러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은 선물 없어?"

"당연히 있지. 이리 와서 무릎 꿇어 봐."


오베론이 바닥을 가볍게 발로 찼다. 리츠카는 의아해하면서도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고 보니 크리스마스는 원래 종교 기념일이지. 설마 머리에 기름이라도 붓는 건 아니겠지? 오베론은 종교를 믿지 않고, 기독교도라고 해서 크리스마스에 머리에 기름을 붓진 않지만, 종교적 지식이 전혀 없는 리츠카로서는 '그럴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살짝 불안한 기분으로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는데, 얌전히 앉은 그녀를 빤히 쳐다보던 오베론이 대뜸 그녀의 무릎을 베고 모로 누웠다.

사락거리는 머리카락이 옷감 너머 피부를 간지럽혔다. 리츠카는 뻔뻔한 고양이처럼 제 무릎을 베고 누운 남자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우뚝하게 솟은 콧대와 날카로운 턱선, 어두운 밤을 닮은 새카만 머리카락과 그와 대비되는 백자같이 새하얀 피부가 잘 만든 도자기 인형 같았다. 누구나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잘생긴 남자였으나, 리츠카에게는 매일 보는 얼굴이었다. 물론 잘생긴 건 어제 보고 오늘 또 봐도 좋은 법이라지만…….


"이게 선물이야?"

"어."

"오베론의 무거운 머리를 받치고 있는 게 나한테 선물이라고?"


지금까지 그래왔듯,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설마 선물은 나야♥ 같은 온몸이 간지러워지는 말을 오베론 보티건이 할 리는 없고. 무릎베개에 다른 의미가 있던가, 싶었으나 무릎베개가 그냥 무릎베개지, 뭐 그리 특별한 게 있을까.

그러나 오베론이 직접 만든 어드밴트 캘린더의 의미를, 언제는 알기 쉬웠던가. 리츠카는 이해를 포기하고 그냥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남자의 잘난 얼굴을 쳐다보았다. 뭐가 그리 불만인지 오베론은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로 연신 뭐라고 꿍얼대고 있었다. 뭐가 또 그리 불만일까, 생각하다가 리츠카는 그냥 그의 이마를 쓸어주었다. 그의 불만을 하나하나 다 들어주었다가는 날이 새고도 모자란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일은 바다에 갈 거야."

"어? 갑자기? 그게 이브 선물이야?"

"그런 셈이지."


수영도 못하고, 바다도 싫어하는 벌레의 왕이 무슨 일일까. 칼데아에서 나오고 나니 마음이 달라지기라도 했을까. 리츠카는 룰루하와, 아니 하와토리아에서 보냈던 여름을 떠올리고 웃음을 터트렸다. 엉망진창이긴 했어도 즐거운 여름이었다. 그때 오베론 입장에선 난데없는 재앙을 불러일으킨 셈이었겠지만.

그때 그 여름옷, 아직 갖고 있을까. 영락없이 집 근처 바닷가에 산책 나온 음침한 학생 꼴에 얼마나 웃어댔는지. 그날 입었던 여름옷은 마술 예장이라 칼데아에 두고 올 수밖에 없었지만, 모양은 아직 기억하고 있다. 여름이었으면 옷을 맞춰 입고 백사장을 걸었겠지. 더우면 겉옷을 벗어 던지고 수영하고, 오베론은 파라솔 밑 그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그녀를 지켜보고 있을 터다. 한 번도 겪은 적 없는 장면이 이미 경험한 기억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다음 여름에도 바다 가자, 응?"

"하? 왜 굳이 덥고 습기 찬 날씨에 물가에 가야 하는데? 네가 멍청한 얼굴로 수영하는 걸 쳐다보는 건 한 번으로 족하거든?"

"내가 수영하는 거 본 적 없으면서!"


지켜본다고 말만 했지, 실제로 본 적은 없다. 수영복 자랑을 한 적은 있었지만. 리츠카는 오베론의 머리를 붙잡고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뜨리며, 그가 '바다에 간다'라고 말할 때까지 남자의 머리통을 흔들어 댔다. 꿋꿋이 무릎을 벤 채 누워있던 오베론이 견디지 못하고 가겠다고 소리를 지른 뒤 투덜거렸다.


"지독한 계집애 같으니라고."

"아무렴, 나락까지 갔는데."


회심의 대답을 날리자 오베론이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리츠카는 또 까르륵 웃음을 터트렸다.




***



12월 24일. 성탄 전야.

겨울 바다는 크리스마스 분위기와는 동떨어져 있었다. 붉은색과 초록색으로 꾸며진 화려한 장식도, 흥겨운 캐럴도, 쉴 새 없이 반짝이는 꼬마전구도 없었다. 집에서 멀지 않은 바닷가는 더는 쓰이지 않는 항구로, 해수욕장도 관광지도 아니어서 주말을 맞아 사람들이 놀러 올 만한 곳은 아니었다. 리츠카는 오베론이 선물한 목도리와 장갑을 하고, 역시 그가 준 손난로를 주머니에 넣고 주물럭거리면서, 다른 손으로는 오베론과 깍지를 낀 채 나란히 걸었다. 파도가 규칙적으로 모래사장을 휩쓸며 철썩이는 소리를 냈다. 겨울바람이 매섭게 윙윙거렸다. 성탄 전야, 데이트를 할 만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런데 바다는 왜 온 거야?"


오베론은 여전히 수영을 할 줄 모른다. 벌레가 물에 빠지고 싶겠냐면서, 수육한 뒤에도 수영을 배우려 하지 않았다. 물도 질색이고, 추운 날씨도 질색하면서―이 남자가 좋아하는 계절이 있기나 하겠냐마는― 굳이 바다에 온 이유가 뭘까. 이벤트라도 준비했나 기대했지만, 오가는 이 하나 없이 텅 빈 바다는 파도 소리만 울릴 뿐 한없이 적막했다.

오베론은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는 것처럼 사선 위를 흘끔 쳐다보다가 뇌까리듯 대답했다.


"달리 갈 만한 곳이 없잖아. 하루 만에 해외를 갈 수도 없고, 히말라야에 오르자니 말도 안 되고, 그렇다고 죽을 것도 아니잖아?"

"브리튼에는 크리스마스에 등산하는 문화라도 있어?"


크리스마스 기념 히말라야산맥 등정이라니, 생전 처음 들어보는 문화다. 이런 추운 날씨에는 히말라야가 아니라 동네 뒷산도 올라가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등산도 모자라 죽으라니.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동반자살하는 문화가 대체 어디 있나. 엉뚱한 대답에 리츠카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오베론은 이번에도 속 시원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뭐 어때. 바다. 크리스마스잖아."


아무 상관도 없는데. 리츠카는 입을 비죽이며 오베론과 발을 맞춰 걸었다. 바닷바람은 차갑고 따끔거렸고, 밀려드는 파도는 소금기를 머금고 왔다. 인적 없는 백사장에 두 쌍의 발자국을 남기며, 리츠카는 하염없이 걸어갔다. 데이트라고 하기엔 이상한, 선물이라고 하기엔 기묘한 산책이었다.

백사장을 한 바퀴 빙 돌아 주차장으로 되돌아가는 길, 하늘이 점점 회색빛으로 물들더니 이내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도쿄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함박눈이었다. 리츠카는 가만히 멈추어 서서 손을 뻗어 눈송이를 쥐었다. 새하얀 얼음덩어리가 장갑을 살짝 적시고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그저 눈이 내린다는 것만으로 바다는 이전보다 몇 배는 더 아름다워졌다. 금세 쌓이기 시작한 눈을 바라보며 리츠카는 해바라기처럼 활짝 웃었다.


"오베론, 눈 올 거 알고 있었어?"

"아니."


함박눈이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큼지막한 눈송이가 쏟아져 내렸다. 마치 바깥에서 맞는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것처럼. 그는 영상으로만 보았던 이야기를 더듬어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런 걸 아마 기적이라고 부르는 거려나."

"오베론, 감상적이네~."


드문 일이긴 하지만 아예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하기야 칼데아에서는 눈을 볼 일이 없었다. 밖을 보면 새하얀 풍경뿐이지만, 그건 백지화된 지구일 뿐이지 아름다운 설원 같은 게 아니니까. 브리튼에서도 눈은 내리지 않았다. 숨을 죽이고 때를 기다리면서도 눈을 볼 일은 없었겠지. 그는 가을 숲의 왕이었으니까.

화이트 크리스마스 이브라. 어드밴트 캘린더의 마지막으로는 썩 나쁘지 않다. 눈이 쌓이기 시작한 모래사장에 새롭게 발자국을 새기며, 그녀는 작게 콧노래를 부르며 걸었다.

아, 예고 없이 내리는 이런 눈을 기적이라고 부른 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리츠카는 희미한 기억을 넘겨보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어 흐린 생각을 털어냈다.




***



중구난방이긴 해도 24일 동안 선물은 착실히 받았으니,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외출해서 맛있는 걸 먹고 영화라도 볼 생각이었는데, 오베론은 미리 준비한 게 있다며 리츠카를 반쯤 방에 가둬 두었다. 졸지에 넷플릭스와 함께 침실 안에 갇힌 리츠카는 방문에 귀를 대고 바깥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뭔가 소란스러운 게 요리를 하는 것 같기는 한데, 오베론의 요리 실력은 통 믿을 게 못 됐다. 머리 좋고 인내심 좋은 남자가 그 외의 일에는 그다지 솜씨가 없다는 걸 리츠카는 잘 알고 있었다. 기운만 빼고 비효율적이라며 사 먹는 게 낫다면서 무슨 바람이 불었을까. 크리스마스라는 건 오베론 보티건의 마음도 술렁이게 할 만한 마력이 있는 걸까. 리츠카는 고개를 붕붕 내저었다. 연인들의 날인 밸런타인데이에 먼지 담은 상자를 내미는 남자가 크리스마스에 설렐 리가 없다.

오베론 보티건은 쓸모없는 일은 시작도 하지 않는다. 꿍꿍이가 있는 건 확실한데, 그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 속이 답답했다. 등 뒤에서는 오베론이 멋대로 틀어놓고 간 넷플릭스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었지만, 리츠카는 TV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방 밖의 상황을 확인하려 애썼다.

문 너머로 들리는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발소리를 확인하고, 그러다 침실 서랍에 보관한 어드밴트 캘린더의 내용물을 들여다보았다. 다시 봐도 공통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물건들이다. 루돌프 머리띠나 손난로, 방한용품은 겨울 상품이니까 그렇다 치자. 보석 펜던트야 귀중품이고, 양 열쇠고리나 말 공예품 따위도 크리스마스에 소소하게 선물할 만한 장식품이었다. 하지만 이 무성의한 그림이나 부적은 대체 뭘까. 선물로 주려고 준비했다기엔 대강 그린 기색이 역력했고, 그렇다고 해서 정말 아무 의미도 없이 그녀를 골탕 먹이려는 의도로 준 것 같지는 않았다.

리츠카는 받은 선물들을 침대 위에 쏟아 순서대로 늘어놓았다. 도시락이나 와인 같은 건 먹어버려서 없지만, 대부분 손에 남는 물건들이라 쉽게 정리할 수 있었다. 머리띠랑 이상한 그림, 유리 말이랑…….


"응?"


순서대로 늘어놓으니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혹시 퍼즐인가? 아니면 모아놓으면 어떤 모양이 되는 그림? 리츠카는 침대 위로 올라가 선물을 이 방향 저 방향으로 살펴보았지만, 숨겨진 암호나 그림 같은 건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기시감이 들었다. 공통점이라곤 요만큼도 없는데, 왠지 어딘가에서 본 것만 같은…….

정답을 찾아내기 전에 오베론이 문을 열었다. 요리가 아니라 싸움이라도 거하게 벌이고 온 것처럼 기진맥진해진 남자가 지친 얼굴로 식탁 쪽을 가리켰다. 리츠카는 늘어놓은 물건을 정리하고 그의 뒤를 따라 방을 나섰다.


"와아……."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묘한 냄새가 났다. 맛있는 것 같기도 하고, 완전히 실패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럭저럭 성공했다고 봐줄 만할 것 같기도 하고,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크리스마스 정찬을 만들겠다고 한 거냐고 핀잔을 주고 싶기도 하고 그랬다. 그도 그럴 것이, 식탁 위가 둘만의 식사치고는 지나치게 화려했기 때문이다.

식탁 가운데에는 잘 구워진 칠면조 한 마리가 올망졸망한 오너먼트 장식을 달고 통째로 올라가 있었다. 그 옆에는 빨간색 냄비에 브로콜리와 감자, 당근, 베이컨이 들어간 화이트 스튜가 놓여 있었고, 은빛 사슴 장식을 올린 에그 베네딕트 접시도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브로콜리와 각종 채소를 쌓고 드레싱을 뿌려 트리처럼 만든 샐러드에, 눈사람 장식을 곁들인 몇 조각 잘린 슈톨렌도 있었으며, 트리 모양으로 딸기를 쌓아 올려 만든 커다란 케이크가 화룡점정을 찍었다.

미리 말해두자면 잘 만든 건 절대 아니었다. 재료나 냄새로 결과물을 대강 유추할 수 있을 뿐이지, 모양은 간신히 형태만 잡은 쪽이었다. 어떻게든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려고 트리 모양을 본뜬다거나 트리용 오너먼트로 접시를 장식했지만, 절박한 노력과 빈곤한 실력의 조화로 결과물이 더 안쓰러워 보였다. 리츠카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멍하니 식탁을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진짜 열심히 한 것 같은데, 할 수 있는 최대한이 아니라 200%의 노력을 한 것 같은데, 빈말로도 멋지다고, 맛있겠다고 칭찬하기 민망한 모양새였다.


"우리 둘이 먹는데 이걸 다 만들었어?"

"슈톨렌은 산 거야."


냉장고에서 반죽을 본 적도 없으니 아마 그렇겠지. 그러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척 보기에도 대여섯 명은 모여야 없어질 양이었다. 도시락으로 칠면조 샌드위치, 샐러드, 케이크 좀 잘라서 가져가고, 슈톨렌은 나누어 먹으면 되려나? 반사적으로 남은 음식을 처리할 방도를 생각하며, 리츠카는 떨떠름한 기분으로 식탁에 앉았다.


"음, 잘 먹겠습니다!"


두 손을 모아 인사를 하고 포크를 들었다. 식탁이 넘칠 정도로 가득 쌓인 음식, 음료로는 스파클링 와인이 있고, 식탁 곳곳에도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는 장식품들이 올망졸망 놓여 있었다. 진짜 과하네. 인터넷에서 이상한 거라도 본 건가? 크리스마스가 대체 뭐길래 천하의 오베론 보티건이 이렇게 요란스럽게 구는 걸까. 우연히 주말이 겹치긴 했지만, 크리스마스는 원래 휴일도 아니고, 그저 트리를 장식하고 연인끼리, 혹은 친구끼리 선물을 건네는 평범한 날이었다. 영국에서는 더 큰 명절이겠지만, 오베론은 진짜 영국 출신도 아니고 모르간이 다스리던 브리튼 이문대 출신이다. 요정국에 크리스마스 같은 건 없었을 테니, 그가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을 알게 된 건 빨라도 칼데아에 온 이후가 분명했다.

칼데아에서도 이렇게 요란하게 군 적은 없는 것 같은데. 하긴, 오베론이 온 뒤에는 크리스마스를 크게 기념한 적이 별로 없던가? 리츠카는 스튜를 떠먹으며 기억을 더듬었다. 네모가 산타 역할을 맡은 적이 있었고, 그보다 더 전에는 마르타 씨가…….

머릿속 시계가 빠르게 거꾸로 돌았다. 어느 겨울, 다 같이 모여 크리스마스 식탁을 꾸미던 날. 칼데아 주방 식구들이 의기투합해서 화려한 크리스마스 정찬을 차렸다. 제일 먼저 만든 건 달콤한 슈톨렌, 그 다음은 토마토가 들어간 샐러드, 캣이 에그 베네딕트를 만들자고 했고, 스튜를 만들고, 칠면조랑 닭을 구워서 메인 요리를 만들었다. 마지막으로는 딸기가 듬뿍 올라간 케이크. 근심걱정을 잠시 놓아두고 왁자지껄하게 놀았던 즐거운 추억이었다.

페이지가 쉴 새 없이 넘어갔다. 아, 그래. 닭고기가 들어간 크림소스 전골. 게오르기우스 씨가 만들어 줬었지. 카르나 씨가 산타 로드워크를 한다면서 자전거를 타고 따라오라고 했었어. 그보다 전에는 나이팅게일이 선물이 아니라 약을 주겠다면서 주사기 우산을 들고 다녔는데, 그때 부디카가 케이크를 줬었지.

기억의 시계가 빙글빙글 돌았다. 케찰 코아틀과 멕시코로 레이시프트했을 때, 날이 춥다면서 마슈가 방한용품을 챙겨주었다. 특이점을 해결하고 나오던 때에는 드물게도 멕시코에 눈이 내렸고, 케찰 코아틀은 그걸 기적이라고 불렀다. 에레쉬키갈을 다시 만난 크리스마스에는 황금 양 두무지를 만났고, 그때 이슈타르를 설득한답시고 보석이랑 ATM 기기를 줬었지. 그보다 전에는, 메데이아가 손난로를 만들어 주고, 에미야가 도시락을 주고, 어린 잔 얼터가 코타로에게 일영사전을 선물해서 다들 당황했었다. 그 해, 마지막으로는 다 같이 바다를 보러 갔었다. 그게 어린 잔의 소원이었으니까. 그보다 더 전, 그때가 칼데아에서 맞은 첫 번째 크리스마스였다. 알트리아가 별별 이상한 개념 예장을 선물했었지. 흑건이라던가, 우시와카마루에겐 배를 줬고, 맨 처음에는 '마스터는 순록'이라고…….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리츠카는 제가 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모든 일이 끝났을 때도 겨울이었다. 그때 칼데아는 연말연시 같은 건 생각도 못 할 만큼 소란스러웠다. 두 번의 재앙에서 벗어난 세상은 혼란 그 자체였고, 인류 최후의 마스터를 지키기 위해 스태프와 서번트들 모두가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마술협회에서 이번에도 수작질을 부리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만에 하나를 위해 대비했고, 그동안 모아둔 성배 리소스를 몰래 빼돌려 수육을 준비했다. 몇 년 동안 칼데아 안에서만 고립된 생활을 한 터라, 보통의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어색하지 않으려고 수없이 일상생활을 연습했다. 화려한 작별 인사도, 대단한 행사도 없었다. 다시 흘러가기 시작한 세계에, 미래를 걸어갈 마스터에게 축복을 남긴 뒤 영웅들은 사라졌고, 그저 평범한 여자와 남자 한 명만이 남았다.

은퇴 명목으로 받은 돈은 삼대가 놀고먹어도 끄떡없을 만큼 어마어마했지만, 일반적인 생활에 적응하려고 일부러 회사에 취직했다. 칼데아에 들어가기 전까지 쭉 누려왔던 평범한 일상 속에서 리츠카는 종종 깨어나면 다시 칼데아에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고, 세상이 불타고 온 사방이 새하얗게 변해버리는 악몽을 꿨다. 새벽에 홀로 깨서 숨을 죽이고 울기도 했다.

뒤를 돌아볼 시간 같은 건 없었다. 돌아보는 순간 평온한 현실이 전부 사라질 것만 같았다. 마술도 몬스터도 아무것도 없는 평범한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한다는 보통 사람의 행복 같은 건 영원히 손에 잡히지 않을 머나먼 신기루였다. 잡고 있어도 의심이 갔다. 때때로 해묵은 불안이 치밀어 올랐다. 연약한 두뇌는 지나간 기억을 일부러 외면했다. 고작 즐거웠던 시간의 일부만을 집게로 골라내어 스쳐 가는 이야기로 소비하는 게 전부였다. 겨울 바다를 걸으며 함께 보냈던 여름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처럼. 더 기억해 봤자 괴로울 게 뻔했으니까.

하지만 나쁜 일만 있던 건 아니었어. 그렇지?


"씁, 이까짓 게 뭐 대단하다고 울기까지 해?"


오베론이 특유의 비아냥조로 투덜거리며, 울먹이는 리츠카와 힘겹게 준비한 식탁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에겐 기억조차 없는 날들이었다. 6번의 크리스마스가 지나갈 동안 오베론은 후지마루 리츠카의 존재를 몰랐으니까. 오늘 차린 음식을 만들 때는 칼데아에 있었지만, 사람 많은 곳은 질색이라며 정찬이 완성된 후 음식만 몇 접시 빼내어 방에 틀어박혔었다. 그때는 크리스마스라는 핑계로 말을 걸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사람이 모여드는 게 싫었고, 쓸데없이 소란을 떨며 난리 치는 것도 꼴 보기 싫었고, 세계가 다 망해가는데도 바보처럼 웃고 있는 여자가 보기 싫었다. 불빛을 쫓아가면서도 타 버릴까 두려워 물러나 있기만 했다.

그러니까 그에게는 이 모든 것이 실체 없는 기록에 불과했다. 리츠카가 겪었던, 그러나 그는 모르는 지나간 날들. 추억의 한 페이지를 굳이 어설프게 재현한 건 함께 하지 못한 시간을 이렇게라도 같이 하고 싶다는, 그 시절의 리츠카를 그녀 본인의 회상으로나마 느껴보고 싶다는 꼴사나운 독점욕 때문이었다. 이제 제가 없었던 날들에도 그녀는 분명 그를 떠올릴 테니까. 흘러간 시간마저 갖고 싶은 구질구질한 욕심이었다.

리츠카는 대답하지 않고 눈물을 닦았다. 수육과 함께 저주에서 벗어났음에도 오베론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건 너무 흔해서 놀랄 일도 아니었으니까. 그저 기뻤다. 잊고 지냈던 추억을 꺼내 주어서. 이제야 겨우 숨을 돌리고, 땅에 발을 딛고, 지난했던 날을 추억이라 부르며 펼쳐볼 수 있을 것 같아서.


"고, 마워. 고마워……."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는데, 네가 생각하는 그런 감동적인 이유로 한 거 아니니까 그만 울지?"


제가 없었던 때의 이야기를 하는 게 듣기 싫어서 그랬다. 모르는 이야기를,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추억을 행복하게 곱씹을 걸 생각하면 속이 뒤틀려서 그랬다. 이문대도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 서로의 존재조차 몰랐던 시절, 오베론 보티건이라는 존재가 있지도 않았던 그 어느 날의 후지마루 리츠카가 궁금해서. 어설프게 꾸며서라도 공백을 채우고 싶어서 그랬다.

그러니까 사실은 전부, 그녀가 아니라 그를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바보처럼 착한 여자에겐 그게 배려로 보이는지 몰라도.

훌쩍거리던 리츠카가 겨우 눈물을 그쳤다. 붉어진 눈가를 손등으로 꾹꾹 누른 그녀가 울컥하는 표정으로 식탁을 바라보고, 선물을 모아둔 방을 돌아보았다. 아, 그런 거였구나. 중구난방이라 생각했던 선물의 정체를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때 영상은 언제 다 봤을까. 언제 다 기억했을까. 제겐 없는 추억을 하나씩 더듬으며 크리스마스 선물을 만드는 오베론을 상상하자 웃음이 났다.


"그림은 예장 그린 거야? 그거 혹시 용맥이야?"

"왜, 너무 잘 그려서 놀랐어?"

"너무 오냐오냐해줬네, 내가. 오베론 씨, 나 반 고흐에 호쿠사이, 다 빈치 그림을 보고 살았어."


리츠카가 비로소 웃음을 터트렸다. 언제나 그랬듯 햇살 같은 미소였다. 의식적으로 피해 왔던 서번트들의 이름이 아무렇지 않게 나왔다. 이제야 그녀는 자신이 칼데아를 앨범의 한 페이지로, 언제든 꺼내볼 수 있는 추억의 일부로 둘 수 있음을 알았다. 세계는 구원받았고 자신은 사랑하는 이와 함께, 땅에 발을 딛고 함께 늙어갈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저 불타는 절망만 있는 게 아니라 발걸음마다 꽃이 피어났음을 안다. 그래서 이제는 돌아보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구질구질하게 구는 것도 올해까지야. 나는 다른 서번트 이야기나 듣고 있을 만큼 속이 넓지 않거든?"

"너 속 좁은 걸 내가 모를까 봐? 이건 진짜 다 언제 봤대. 나한테 말해달라고 하지."


좋다고 헤실헤실 웃으면서 남의 이야기 하는 걸 듣고 있으라고? 오베론은 대꾸 대신 코웃음을 쳤다. 후지마루 리츠카는 눈이 부실 만큼 밝고 빛나서, 타인의 어둡고 음험한 질투 같은 건 전혀 모르는 것처럼 굴었다. 나는 내가 없던 네 기억 속에도 나를 끼워 넣고 싶은 건데, 그걸 너만 모르지.

그러나 그 '모름'은 결국 네가 나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강고한 신뢰에서 온다. 오베론은 음침하게 굴고 비아냥대고 툴툴대다가도 끝내 거기서 무너지곤 했다. 나락까지 손을 내밀고야 마는 선함에, 울면서도 다시 일어나고야 마는 결의에, 나락으로 끌고 가겠다고 을러대는 벌레에게 등 뒤를 맡기는 믿음에, 그를 기어코 건져내고야 만― 사랑에.

결국엔 사랑이 이긴다는 동화 같은 낡아빠진 문장에, 충룡(蟲龍)은 끝내 바닥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범인류사의 푸른 하늘 아래에 깃발처럼 나부끼는 머리칼을, 밀밭처럼 빛나는 눈을 다시 한번 만나고 싶어서.

뭐, 좋게 말하면 둘 모두를 위한 선물이었다. 리츠카에게는 추억을 돌아볼 수 있는 용기를 준 것이었다면, 오베론에게는 이 모든 과정이 제가 없던 시절을 향한 작별 인사였다. 잘 가라, 칼데아의 빌어먹을 녀석들. 마술이고 뭐고 이젠 아무 상관도 없으니까 죽을 때까지 만날 일 없겠지! 그 잘난 옛 추억에 나도 적당히 끼워 넣었으니까 꿇리는 일도 없겠네! 아아, 오베론 씨는 그때 없었지. 라고 쫑알거리는 게 어찌나 재수 없었던지. 오베론은 해묵은 원한을 떠올리며 속으로 이를 까득, 갈았다.


"아무튼 추억팔이는 이쯤 하잔 뜻이야. 내년에는……."

"우와, 단둘이 음흉한 짓 하려고?"

"하? 너 진짜 노크나레아나 모르간 같은 정신 나간 여자들한테 이상한 거 배워온 거 아냐?"


새삼스럽게. 리츠카가 까르륵 웃었다.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올랐는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난 오베론이 식탁을 돌아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냥 걸즈 토크 했다니까? 음, 사실 욕도 조금 했어."

"그 망할 여자는 브리튼 때부터 내 방해만……!"

"알았어, 알았어. 놀려서 미안하대도! 하여간, 속 좁아. 쪼잔해."


키득거리며 리츠카가 오베론의 양손을 덥석 붙잡았다. 이제는 이형의 몸 대신 인간의 팔다리가 자리 잡고 있지만, 여전히 충룡의 팔다리를 떠올릴 수 있었다. 더는 그렇게 강하지도, 이형의 힘도 마술도 가지고 있지 않은 순수한 인간의 육체. 이세계에서 멀어져 현실에 안착한, 평온의 상징. 하얗고 긴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그녀는 새삼스럽게 모든 것이 끝났음을 생각했다. 차마 상상하는 것조차 어려웠던 소망. 그래서 두 명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라는 문장으로 끝나는 유치한 동화.


"내년에는 이딴 거 안 할 거니까 기대도 하지 마."

"나도 못 그린 그림이랑 맛없는 요리는 싫네요."

"아, 그래. 후지마루 씨는 남의 정성을 아무렇지도 않게 깎아내리는 썩은 인성의 소유자셨던가?"

"그림에서 전혀 정성이 느껴지지 않았는데요―. 요리는, 응. 고마워."


맛은 둘째 쳐도 고생한 기색은 분명했다. 입에 달고 다니는 '효율적인 행동'대로 전부 사 왔어도 충분했을 텐데, 굳이 끙끙대며 손수 만드는 점이 웃기면서도 좋았다. 제 방에 틀어박혀 남들과 동떨어져 살았던 과거라도 떠올렸을까. 그때 같이 어울릴걸, 하고 생각했을까. 칼데아 시절을 추억했을까. 오베론이 마스터와의 인연 운운하며 콧대를 세우던 칼데아 영령들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요리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는 리츠카는 그도 사실은 그 시절이 즐거웠구나, 싶어 코끝이 알싸해졌다.


"내년에는 외식할 거야."

"으응."

"영화나 보고 쇼핑이나 다니고."

"오베론, 사람 싫어하잖아."

"일 년에 하루는 괜찮아."

"그 다음 해는 집에 있고?"

"훨씬 낫네."


다가올 크리스마스를 생각한다. 몇 번이고 되돌아올 겨울을, 함께 보낼 시간을, 언젠가 서로가 주고받은 선물로만 가득 채울 수 있을 어드밴트 캘린더를, 지나간 추억 위로 새롭게 쌓일 일 년을.

분명 앞으로도 행복할 것이다. 괴로움과 절망 속에서도 행복한 추억이 피어났으니, 평화로운 시간 위에는 무엇이 생겨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리츠카는 가만히 고개를 기울여 연인에게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조금 늦은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 메리 크리스마스."


맞닿은 체온이 따뜻했다. 창밖에서 다시,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언젠가 여신이 말했던, 사람들을 축복하는 순수한 기적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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