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돌이켜 생각하면 황시목 이 또라이와의 ‘사고’는 우연과 우연이 겹쳐 만들어진 장난 같은 것이었다.

(1) 은수가 황시목 시보의 훌륭한 인품에 감탄하며 그놈을 손절했고,

(2) 어느 날 갑자기 은수의 아버지에게 오명을 씌우고 끈질기게 도망치던 놈이 방콕에서 검거되어 검찰 조사가 시작되었고,

(3) 그래서 때마침 시보 기간이 끝나고 독립한 초짜 황시목 검사가 그 사건을 담당한 팀에 손을 보태려 조인 한 거지. 영은수 대신.




“부장님, 부장님! 영은수입니다!”


서부지검 형사3부 강원철 부장검사 사무실 앞에서 울려 퍼지는 똑똑, 아니 쾅쾅, 에 가까운 분노의 노크소리. 원철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듯 눈 한번 질끈 감았다 뜨고, 제 방에서 조사계획을 보고하던 특별조사팀에 해산령을 내렸다. 이제 곧 엄청나게 시끄러워질 거야. 니들은 그냥 가서 일이나 마저 해. 슬슬 눈치 보던 특별조사팀이 부장실 문을 열고 원철의 방에서 우르르 빠져나오는 그 잠깐마저 못 기다리던 은수가, 방에서 나오는 이들을 거슬러 헤쳐가며 진입을 시도한다. 그러다 유난히 두툼한 어깨에 턱 가로막혔다. 고상한 전문용어로 어깨빵. 눈이 저절로 흰자위로 돌아갔다. 뵈는 게 없었다는 뜻이다.


“......”


그리고 은수와 부딪힌 상대는 황시목이었다. 요즘의 영은수는 건드리면 곧바로 물어뜯는 독이 바짝오른 독사 모드라 지검장 조차 눈치를 살필 정도로 서부지검 모두가 은수 앞에서 몸을 사리는데, 이 새끼는 이번에도 예외였지. 황시목이 무감한 얼굴로 까딱 숙이며 사과의 인사를 전했지만 역시나 진심따위는 느껴지지 않는 태도. 마음같아선 한판 시원하게 쏴대고 싶지만 일단 이 자리의 목적은 쟤가 아니니까. 씨근덕대며 노려보던 은수는 다시 시선을 거두고 원철에게 직진한다.


“부장님. 왜 저는 특별조사팀에 못 들어갑니까?!”

“영검사.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저희 아버지 사건이잖아요! 제가 하고 싶습니다. 하게 해주세요.”


여전히 닫히지 않은 부장실 문. 가장 늦게 방을 빠져나오던 시목은 손을 뻗어 문고리를 쥐고 닫으려다 멈칫거렸다. 이제는 거의 울먹임으로 변한 은수의 갈라진 목소리가 귓가에 걸려서.


“알만한 놈이, 쯧. 너는 장관님과 특수관계인이라서 안돼 영검사. ...네 맘은 알겠다만, 이번 일은 안 나서는 게 오히려 돕는 거야. 선배랑 동료들을 믿어봐. 철저하게 진상파악 할 테니.”

“섀도우로 그냥 조사만 참여하게 해주세요 부장님. 외부로 절대 노출되지 않겠습니다. 네?! 조사 업데이트만이라도, 아니, 진술만이라도 듣게 해주시면-”

“영은수야. 정신차려! ...우리도 다들 영장관님 오명 벗겨드리고 싶다! 억울한 거 꼭 풀어드리고 싶어. 누구보다 더.”

“......”

“네가 여기 있어서 법무부에서 그 피의자 다른 관할로 넘기려고 한 거, 차장님이랑 검사장님이 나서서 우리 쪽으로 가지고 오느라 애 많이 쓰셨다. 그만큼 의지가 있으시다고.”

“부장님, 하지만,”


달칵, 뒤늦게 부장실 문 닫히는 소리에 둘의 시선이 잠깐 거기로 붙었다가 떨어졌다. 누가 들었대도 상관 없어. 이미 우리집 사정은 술자리 공공재 안주 수준인데. 무릎 위에 올린 손을 허옇게 꼭 쥐었다 펴낸 은수가 이제는 애원을 한다. 부장님. 우려하시는 부분 다 알고 있어요. 그래도, 제발, 조사만 하는 정도는 허락해 주실 수 있으시잖아요. 그러나 팔짱을 굳게 끼고 소파에 몸을 묻은 원철은 요지부동. 네가 누굴 찾아가서 들이받아도 결과는 똑같다, 영검사. 그만 포기하고 기다려.


“하…”


그대로 부장검사실을 벗어나 문 앞에 주저앉으려던 은수가, 옆에 서 있는 인영에 흠칫 놀라 잔뜩 우그러지기 직전의 얼굴을 다시 펴냈다. 뭐야, 황시목. ...그렇게 쳐다보면 어쩌라는 건지.

다 들었다는 듯 저를 꿰뚫는 시목의 시선을 피해 그 자리를 벗어났다. 후배님 눈치가 보여서 마음대로 울지도 못하겠네. 복도를 걸으며 손등으로 대충 눈가를 문질러대는데, 바로 옆도 아니고 멀리 떨어진 뒤도 아닌 애매한 언저리에서 자꾸 은수를 따라붙는 발소리가 신경 쓰여 미치겠다. 네가 요 몇 달 나한테 욕을 안 먹더니 선배 무서운걸 까먹었지. 갑자기 우뚝 멈춰선 은수의 발에 맞추어 시목의 발소리도 멈췄다.


“황시목 검사. 왜 따라와? 할 말 있어?”

“...저도 이쪽 방향으로 가야 해서요.”

“허. 그래, 그럼 너 먼저 가.”


네 짜증유발 패턴에 한두 번 당해보냐 내가. 벽에 기대어 척 버티고 선 은수를 스쳐 앞서간 황시목의 동그란 뒤통수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고. 눈앞에 안 보이니까 좀 낫네. 은수는 그제야 마음껏 온 몸의 힘을 빼고 느리게 걸었다. 

당연히 안된다고 할 줄 알았다. 그래도 뒤에서 조사만 돕는다고 하면 못 이기는 척 허락해줄 0.01%의 가능성에 희망을 걸어봤는데 역시 아닌가. 짜증나. 분해. 속 터져. 우리 가족의 모든 걸 망쳐버린 놈이 내 눈앞에 곧 나타날 텐데 난 만나서 말 조차 걸 수가 없어. 내 손으로 범인을 잡고 그 위에서 이 모든 걸 설계한 진짜 나쁜 놈도 밝히고 싶은데. 젠장! 내가 그렇게 열심히 팔 땐 안 잡히다가 하필 왜 지금, 쯧. 속으로 잔뜩 궁시렁거리며 터덜터덜 꺾어진 곳으로 접어든다. 

콩. 

그렇게 잡생각으로 가득 찬 머리를 모퉁이를 돌자마자 시커먼 무언가에 박을 줄은 몰랐지.


“또 너야?”

“아,”


아? 아아? 진짜 예의를 갖춘 사과네? 죄송합니다. 뒤에 선 은수의 빈정거림에 소리 없이 입 모양만 벙긋 사과하던 황시목. 휴대폰을 귀에 붙이고 열심히 누군가의 말을 듣는 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비켜. 

여전히 붙박이로 선 황시목을 피해 왼쪽 틈으로 그를 지나치려다, 하필 같은 방향으로 몸을 돌려 온 길을 되돌아가려던 황시목에게 또 가로막혔다. 

쿵. 또 부딪혔다. 이번에는 쟤 가슴에, 아까보다 더 세게.


“야!”

“......제가 다시 전화드리겠습니다.”

“너 진짜! 뭔데!”

“......”


종료 버튼을 누른 휴대폰을 손에 쥐고 저를 물끄러미 보는 시목. 안 그래도 뜻대로 잘풀리는거 하나 없어서 서러운데, 이젠 길도 마음대로 못 지나가게 막냐?! 악을 쓰는 은수의 하얀 얼굴이 순식간에 벌게졌다. 속눈썹까지 파르르 떨리다 그 끝에 기어이 물기가 동그랗게 맺혔다. 툭툭 바닥으로 떨어지는 눈물 소리에 은수도 당황했고 시목은 정말 당황했다. 그간 본 황시목의 모습 중 가장 크게 뜬 눈을 끔뻑이면서, 팔을 뻗어 은수의 팔을 조심스럽게 붙잡았으니까.


“괜찮으십니까?”

“너 뭐야! 뭐냐고…! 니가 뭔데!!”

“영은수 선배님.”

“너는! 너는 참… 좋겠다. 그래.”

“......”

“시보 딱지 떼자마자 특조팀도 가고. 부러워 아주그냥.”


엉뚱한 곳으로 쏘아대는 화살을 시목은 묵묵히 받아주었다. 나도 알아, 황시목은 당연히 아무 잘못이 없는 거. 그냥 오늘 내 눈에 어쩌다가 걸린 사람이 쟤고, 마침 밖으로 꺼내지 않으면 타들어 갈 것 같이 끓는 화가 있었고, 너도 평소에 나한테 딱히 잘하진 않았으니까 그냥 너 잘 걸렸다, 싶은 건데. 되는대로 속에서 뱉어지는 날 선 말들을 그렇게 곧게 서서 다 받아주면. 난 그냥 이유 없이 후배 갈구는 속 좁은 선배가 되는 거고. 

그렇지만 지금은… 지금은 어쭙잖은 말 몇 마디 보다, 내가 뭘 어떻게 퍼부어대도 그저 다 들어주는 게 더 위로가 된단 말이야. 황시목 너처럼. 나한텐 그게 필요해. ...그러니까 좀 견뎌보던가.

대상을 잘못 찾은 분노와 짜증들로 수 분을 바락바락 퍼부어대던 은수의 기세가, 그저 말 없이 느릿하게 눈꺼풀만 깜빡이는 시목을 오래 마주할수록 서서히 접어들었다. 숨을 고르느라 들썩이는 흉곽이 조금씩 안정을 찾으면 여전히 동요 없는 눈으로 은수를 보던 시목이 나지막이 묻는다.


“다 끝내셨습니까?”

“뭐, 뭘!”

“화풀이요.”


아까와는 또 다른 의미로 화르륵 달아오른 은수의 얼굴. 얼굴이 하얗고 동그래서 그런가. 순식간에 색깔이 잘 바뀐다고 시목은 생각했다.


“더 하시려면 다른 곳으로 옮기셔야 할 것 같은데요.”

“......!”


으쓱거리는 시목의 눈썹을 따라 주위를 훑어보면, 복도에서 발광하는 소리에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다들 나와서 영은수와 황시목을 번갈아 쳐다보는 시선들.


“제가 선배님 방으로 갈까요? 아니면 선배님께서-”

“야!”


은수는 여전히 제 팔을 감싸고 있는 그의 팔을 쳐냈다. 있는 힘껏 황시목을 쏘아보다가, 죄 없는 아랫입술만 잔뜩 깨물더니 그대로 그를 지나쳐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저게 진짜, 사람 놀리나. 시목의 손이 닿았던 곳이 뜨거워서 다급하게 문질러야 했다. 걸을 때마다 하나로 단정하게 묶은 은수의 머리가 발걸음 박자에 맞춰 달랑거렸다. 거슬려. 묶은 머리에 붙은 시목의 시선이 무거웠는지, 그것마저 거칠게 풀어낸 은수는 곧 412호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안으로 사라졌다.







식사를 끝낸 식판을 들고 일어서려는데 건너편 대각선 멀리 앉은 은수의 파리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시목은 동작을 멈추고 은수를 관찰했다.


“......”


며칠째 저 모양이다. 생기 잃은 안색에 깜빡이는 것도 잊은 듯한 멍한 눈. 그렇게 상념에 잠기다 갑자기 간헐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형형한 날카로움. 무언가 결단을 내린듯 앙 다물린 입술. 그렇게 금방이라도 무슨 일을 치를 것 같은 텐션을 보이다, 다시 또 추욱 처지는 눈꼬리와 어깨. 아효. 가벼운 한숨이 새었다.

당연히 시목의 잘못은 없었다. 자꾸만 알게 모르게 챙겨주려 드는 사수에게 신경 쓰지 말라는 싸가지를 시전해 싸늘하게 돌아서게 만든 이후로, 때마침 시보가 끝나고 정식 발령이 나서 사무실을 따로 쓰게 되었더니 은수와 부딪힐 일이 더욱 줄었다.

한동안은 편했다. 후련했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영 전 장관과 연루된 뇌물 운반책이 잡히게 되면서 시목의 일상에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특별조사팀 참여도 그런 맥락이었다. 연차로 보나 무엇으로 보나 원래는 은수가 참여했어야 맞는 자리인데, 애초에 참고인과 특수관계인인 영은수는 배제되었고. 밑단에서 자료 분류와 조서 작성부터 받쳐줄 실무 할 저년차가 모자라니 결국 시목이 투입되었다. 누구보다 간절했을 은수는 열람 조차 할 수 없는 자료 접근 권한을 새파란 후배가 가졌으니, 이래저래 화가 많이 났겠다 싶었지.

다만 시목의 예측이 빗나간 건 부장검사실에서부터였나. 은수는 화가 난 게 아니라 절망하고 있었다. 생경하게도. 오히려 저에게 톡톡 쏘아붙이던 발랄하고 고고한 선배 영은수를 보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위로라도 건네야 할까? 이명으로 정신을 잃었을 때 저에게 건네던 손길처럼. 커피 대신 건네주던 지나치게 달아빠진 유자차 처럼. 연락이 안 된다고 또 어디 쓰러지기라도 했나,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지 걱정의 눈빛을 건네던 은수처럼. ...싫어하는 후배의 위로가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답지않게 남의 일로 망설이는 사이 위로의 타이밍과 상황은 한참 어긋났다. 하지만 어쩐지 시목이 가장 잘 하는 방법으로-말없이 듣기-위로보다 더욱 실용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뾰족하고 날 선 말들을 들어주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영은수에게는 그런 말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해 보였고. 그만큼 절박한 것 같아서. 속에 있는걸 저에게라도 털어내지 않으면 폭주할 눈빛이었거든.



비척이며 식판을 들고 일어서는 은수. 시목도 상념을 끝내고 은수의 동작을 따라 한다. 구내식당을 벗어나던 은수는 늘 들어가던 사무실로 향하는 비상계단이 아니라 건물 밖으로 나갔다. 시목도 은수를 따라 지검 밖으로 나왔다. 기분 전환 겸 산책이라도 하려나. 그러기엔 정문 근처만 서성이고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겨울 초입의 노란 햇살을 손으로 가리며 시계를 흘끗거리던 은수는 곧 정문 앞에 서는 택시를 발견하고 그리로 뛰어간다. 뒷좌석에서 지팡이에 의존한 채 힘겹게 내리는 영장관의 팔을 버석한 마른 몸으로 부축하는 은수. 아. 오늘 참고인 조사가 있었지. 뒤늦게 떠오른 특별조사팀의 일정. 잠시 굳어있던 시목의 발은 저도 모르게 영장관을 향해 움직인다.


“자네는?”

“영은수 검사 후배입니다.”


은수를 뒤로 물리고 그 자리에 시목이 자리해 영장관의 미세하게 떨리는 팔을 단단히 부축했다. 잠시 가출했던 어처구니가 돌아오니 기가 막힌다. 네가 왜 나서는데? 야. 황시목. 그의 등을 툭툭 두드려봐도, 늘 그렇듯 딱히 대답도 없는 저 놈의 등짝은 무슨 생각으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빠가 옆에 있으니 성질도 못 부리겠어. 화를 내야 할지, 고마워 해야 할지 치열하게 고민하는 사이, 이미 은수를 지나 조금씩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 그걸 보다 바람빠지는 소리나 냈다.

쟤는 원래 그랬다. 이제 반년쯤 부대껴 봤으니 익숙해질법도 한데, 어떻게 나올지 어느 정도는 예측될 것 같으면서도 전혀 예상 밖의 행동으로 사람을 뜨악하게 흔드는 놈. 몰라. 저 또라이 뜯어 말릴 기력도 없어. 은수의 한숨에 하얗게 피어난 입김이 새파란 허공으로 서서히 흩어졌다.





그 알다가도 모를 놈이 불러일으키는 상반된 양가감정은 며칠 뒤가 정점이었다.

점심 먹을 기분이 아니어서 다들 식사하러 나간 사무실을 지키며 영혼 없이 전날 쓰던 조서 스크롤이나 죽죽 내리고 있을 때였다. 차분한 노크와 함께 황시목이 들어왔다. 이 시간에 왜, 쟤는 점심 먹으러 안 갔나? 또 뭐가 문젠데 쳐들어와.


“오늘 영 전 장관 뇌물수수사건 피의자 심문하는 날 아니야?”

“맞는데요.”

“한창 바쁘실 특조팀께서 왜 왔는데.”


그러다 그의 손목에 대롱대롱 걸린 샌드위치 브랜드 봉지로 은수의 눈길이 옮겨졌다. 워. 너 설마 나 걱정해주는 거야?


“황검사님. 나 입맛 없어. 그냥 받은 셈 칠게.”

“이거요? ...이건 제 겁니다.”

“어, 어? 으응, 그래.”


그랬구나. 맛있게 먹어라. 아이씨. 짜증스럽게 앞으로 내려온 머리를 쓸어올렸다. 사실은 쪽팔려서 그랬다. 근데 뭐, 저거 줄 것도 아니면 왜 왔는데?! 샌드위치 산 거 자랑하러?


“이거. 필요하십니까.”

“뭔데?”


시목은 샌드위치가 아니라 다른 손에 든 두툼한 황파일을 내밀었다. 받아서 넘겨보다 헙, 저절로 숨을 삼켰다. 아빠 사건 조사보고서잖아. 아직 언론에 발표되지 않은, 피의자에 대한 미공개 수사내용.


“이걸 왜?”

“제가 선배님께 다른 건으로 문의하러 왔다가 착각해서 잘못 전달드렸다고. 그렇게 생각하시죠.”

“......”


그러니까, 왜, 왜 나한테 이런 기밀자료를 보여주는 건데. 물어봐도 넌 대답 안 하겠지. 마른침을 삼켜내는 은수의 울대가 흔들렸다.

진짜 받아?

이걸 진짜 봐도 돼?!

아 물론 정말 진심으로 궁금하긴 하지. 이 사건이 잘 해결되어서 아빠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질까. 적어도 재심청구는 가능하지 않을까. 우리 엄마는 이제 아빠 신경 안 쓰고 마음 편히 저녁에 드라마 볼 수 있겠지. 나는, 나도… 항상 머릿속 한 부분을 흐리게 지배하던 무거운 안개가 걷혀나가면 가볍게 살 수 있을 텐데.


“2시간 뒤에 다시 찾으러 오겠습니다.”


가만 있는데 뜬금없이 나타나서 ‘어서 빨리 저 선악과를 따먹어’ 하고 속삭이던 뱀한테 당한 이브도 분명 이런 느낌이었겠지?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싶다가도, 머릿속에서 불행했던 과거와 장밋빛 미래가 동시에 얽혀드니까 소주가 몹시 땡기는 그런 거.

은수는 시목이 방을 나가자마자 참았던 숨을 터트리며 마른세수로 두어번 얼굴을 쓸어내렸다. 머리는 생각이 많아져서 터질 것 같은데, 손과 눈은 이미 자료의 첫 장을 넘겨 보느라 바쁘다. 황시목에게 해주고 싶은 게 욕설일까, 고맙다는 인사일까. 그건 잠시 미뤄두기로 하고, 은수는 정신없이 자료를 훑어가기 시작했다.

후배님께서 친히 들이밀고 보라고 하시는데 어떡할까 그럼. 봐야지. 





“미친… 미친놈.”


이거 봐, 이 새끼 발뺌하잖아! 피의자 진술서를 보는 내내 은수는 험한 말을 삼켜야 했다. 윗대가리 보호 하겠답시고, 핵심내용은 쏙쏙 피해서 진술하는 게 분명 누군가의 가이드를 받고 있는 거야. 후우. 끓어오르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깊은 숨을 내뱉어도 소용 없다. 이대로 흘러가면 도마뱀처럼 꼬리 끊기 당할 뿐. 잔챙이만 잡고 진짜 몸통은 놓친다고. 손에서 굴리던 연필을 책상 위로 던져버렸다. 얼굴을 감싸 쥔 손 끝 골무가 딱딱하게 닿았다. 정말 오랜만에 눈물이 찔끔 났다. 이래서는 진범을 놓쳐!

다시, 생각을 해봐 영은수. 그저 도망 다니기 급급했던 피의자가 어떻게 이런 잘 짜여진 각본을 떠올렸을까?

톡, 톡, 책상을 두드리다 멈추는 손. ...결국 피의자 옆에 딱 달라붙어 답변을 코치해줄 사람은 변호사 밖에 없지. 키보드를 두드려 피의자 변호인의 경력을 쉽게 찾아냈다. 대형 로펌 A에서 오래간 근무하다 독립한, 판사 출신. 아. 이제 알겠어. 저 대형 로펌이 독립한 변호사 뒤에 숨어서 지시 하는 거나 마찬가지. 이 바닥에 그런 일은 흔하니까. 그리고 그 로펌 뒤엔 '진짜 몸통’이 있을 것이고. 

은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라도 찾아야 했다. 어렵게 얻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한창 피의자 심문 중일 시간. 그럼 변호사는 그 옆에 묶여 있을 것이고.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영은수 넌 역시 천재!

은수는 모니터에 들어갈 기세로 바짝 의자를 끌어 앉았다. 뉴스 기사들을 클릭하면서 피의자와 변호사가 내리는 따위가 찍힌 차 사진을 집중적으로 뒤적였다. 




2시간. 은수에게 파일을 건넨 지 정확히 120분이 지난 시점.

시목이 제 사무실을 나와 은수의 방으로 간다. 걷는 동안 무던히도 생각했다. 분명 동정심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원칙을 깬 것은 아니다. 저가 동정 받는 만큼이나 남을 동정하는걸 꺼리는 그였으니까. 무언가를 대가로 요구한 적도 없다. 상대의 요청이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저지른 짓이다.

50m도 안 떨어진 목적지. 답을 찾기엔 짧은 거리. 똑똑, 두드리려는데 동시에 시야에 들어오는, 복도를 꺾어들어 비상구로 들어가는 익숙한 뒷모습. 왜 영은수가 원칙을 무시할 정도로 예외여야 했는지, 시목도 빠르게 사라지는 은수의 뒷모습을 따라 비상구 계단을 내려가면서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위태로워 보였으니까. 영은수의 눈매가.

제가 기밀수사 원칙을 깨고 영은수에게 자료를 공개하는 건 ‘내부적인 문제’ 선에서 그치는 행동이지만, 아마 저 앞뒤 안 가리고 물이든 불이든 뛰어들 선배는 ‘대외적으로’ ‘엄청나게’ 무언가를 저지를 것 같았다. 차라리 은수가 수사 상황 흘러가는 내용이라도 알면 잠자코 기다리지 않을까. 문제가 생기더라도 내부를 수습하는 편이 낫겠다는 나름의 합리적인 판단이었는데. 그러니까 이런 돌발행동을 하지 않도록 하려고, ...아무래도 이번 선택은 틀린 것 같다. 

어디로 가는 걸까. 아래로 끝도 없이 내려가는 은수의 발이 지하주차장으로, 그중에서도 방문자 구역으로 향한다. 

설마…!

무슨 짓을 어떻게 저지를 건지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이성적으로 해결책을 마련할 생각은 하지 않는 거야! 화를 삼키며 손목을 들고 시간을 확인한 시목. 이제는 뛰다시피 주차장을 가로지르는 은수를 따라잡아야 했다. 곧 조사가 끝날 텐데. 조급한 쪽은 시목이었다.


“저, 문의좀 드리려구요. 차 운전석 잠긴 것도 열어주시나요? ...아 제가 차키를 잃어버려서요. ...네, 본인 증명이요? 어, 음… 근데 자동차등록증을 제가, 어, 카센터에 수리를 맡기는 바람에 집에 빼놨는데. ...네. 여기가-”


헉! 조용히 통화 중이던 은수의 휴대폰이 거칠게 들려 올라갔다. 손안이 텅 비는 감각에 돌아보면, 정말 퍼런 불꽃이라도 쏠 기세로 차갑게 노려보고 서 있는 황시목.


“그만 하세요.”

“왜. 싫어. 이대로 두면 진범을 놓쳐. 난 더 알아야겠어.”

“선 넘으셨습니다.”

“네가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선 넘으라고 부추긴 건 너 아냐?”


여전히 시목의 손에 잡힌 휴대폰을 다시 가져오려고 당겨보지만 꿈쩍도 안 해. 미치겠네! 조사 끝나기 전에 빨리 차 문을 따고 뭐라도 건져야 하는데. 초조함에 입술을 짓씹으며 다시 시도해봐도 휴대폰을 도로 가져오지 못했다.


“왜 그렇게 앞뒤 안 가리고 생각 없이 달려들기만 합니까! 평소 선배님답지 않은데요.”

“뭐래. 삼류영화 대사라도 쳐줘?”


하지만 갑자기 은수를 뒤에서 끌어안는 시목 때문에 말문이 막혔다. 쉬이. 손가락을 세우고 입가에 가져다 대기까지. 하, 진짜, 도대체 뭐…! 그러다 은수도 곧 멀리서 누군가 다가오는 구둣발 소리를 듣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황시목은 오바스럽게 은수의 입까지 가리더니 갑자기 자세를 바꾸고 은수를 기둥에 붙인 채 바짝 다가선다. 코트에서 스며 나오는 은은한 향수 잔향이 이 와중에 왜 후각을 자극하고 난리야. 어쨌든 재수 없게도 ‘삐빅’ 소리가 이 차에서 나는걸 보니, 결국 이 차의 주인인 변호사가 왔나보다. 나 아직 아무것도 못 했는데 젠장.


“......”


영화를 많이 본건 아니지만, 보통은 잠입이 들킬 것 같은 위기상황에 이렇게 대처하던데. 

시목이 한발 다가서자 꿀꺽 침을 삼키며 올려다보는 은수. 아까보다 확연히 가까워진 발소리. 시목은 잠시 주저하다 한 발 더 다가서서 몸끼리 밀착했다. 시목의 코 끝이 올망한 은수의 콧대에 부드럽게 닿는다. 왼손으로 은수의 오른쪽 얼굴을 쓸어보다 살짝 우물쭈물하는 핑크빛 입술 위에 제 입술을 얹었다. "별 씨, 남의 차 옆에서 뭐야." 둘을 발견한 차 주인의 중얼거림에 은수의 눈으로 시선을 옮겼다. 두 눈 꾸욱 감은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눈은 왜 감았는데. 맞붙은 시목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뭐냐. 웃어? 은수의 미간이 더 깊이 패고.

야 차도 떠났고 이만하면 됐잖아. 눈을 뜨고 황시목을 밀어내려는데 어라, 더 깊이 고개까지 틀면서 밀고 오잖아. 놀라서 저도 모르게 꼭 붙였던 입술을 살짝 열었다. 하라는 의미일까. 멈칫하던 시목이 은수의 아랫입술을 다시 한번 베어 물다 조심스럽게 틈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은수의 안에서 움직일수록 달콤한 내음이 온 머릿속으로 뜨끈하게 번졌다. 톡, 톡, 혀 끝을 건드리며 부드럽게 닿아오다 뿌리에 닿도록 깊이 들어가 얽어대고. 어떡하지. 점점 그와 얽히는 숨에, 터질 듯 쿵쾅거리는 심장박동에, 어쩔 줄 모르던 은수가 시목의 팔을 꾹 잡았다. 그 자극에 움찔하던 시목, 좀 더 세게 은수의 안을 괴롭히며 입천장부터 볼 안쪽 여린 곳까지 빈틈없이 침범해 들어온다. 으음…! 가빠지는 호흡에 저도 모르게 소리를 흘린 은수. 그 탄성에 호흡을 불어넣듯 더욱 빠르게 은수의 숨을 삼키는 시목.


"후으, 야, 잠ㄲ, 하…"

"......"


정신없이 서로를 헤집고 빨아당기다가 숨이 막힌 은수가 결국 고개를 홱 돌렸다. 떨어지는 두 입술 사이 반짝이는 실처럼 얇게 늘어지는 가느다란 타액. 아. 어떡해. 미쳤나봐 내가…! 은수의 번들거리는 입술과 턱을 엄지로 쓸어오는 황시목 때문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돌았네. 뭐됐어. 망했다!!!

뺨을 때릴까? 정강이를 걷어 차버려? 그러기엔 나도 같이 열심히 했… 에이씨. 지금 범인 조사고 나발이고, 방금 터진 사고부터 수습이 안 되는데.

바닥만 쏘아보던 은수는 그대로 냅다 뛰어 그 자리를 벗어났다. 비상계단으로 안 들어가고 자동차용 출구로 후다닥 뛰어가는걸 보면 엄청나게 당황하긴 했나 보다.


"......"


졸지에 혼자 남겨진 시목. 아직도 제 손에 꽉 쥐고 있는 영은수의 휴대폰을 보다가 끔뻑, 느릿하게 눈꺼풀을 움직였다. 벌겋게 달아오른 귀 끝을 슥슥 긁는다.

혼란스러운 건 이쪽도 마찬가지. 이번에도 또 영은수에게 예외가 생겼다.

  


잡식에 죠필을 곁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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