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포켓치프는 왜 파란색이에요?"



원래도 다른 사람의 인생에 신경을 써본 적은 거의 없어서 그와 정반대인 사람을 보면 신기하기도 했지만 그러려니 하고 살아왔다. 관심을 갖는 것에 관심을 갖는 것도 요상하고 불필요한 일이다, 하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자신의 일부를 궁금해해도 그 이유까진 신경써보지 않았는데, 이번은 조금 달랐다.



"그걸 왜…."

"아니, 그냥 뭐 내 주변엔 파란색을 쓰는 사람은 잘 없었어서."



은연중에 말을 놓아버린 남자는 흘깃거리는 눈길을 보내며 대답을 기다린다. 뭐, 사람은 다양하니까. "그냥 오늘 기분이 울적해서요." 약간은 귀찮은듯한 말투로 툭 던지니 "블루라 이거야? 재밌네." 하며 킬킬거렸다. 수트를 입은 갑갑함에 불편해하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데 별 것도 아닌 얘기에 대답해주고나 있어야 하다니. 간곡한 부탁을 받지 않았더라면 이 자리에 올 일도 없었을 것이다. 머릿수나 채워준다는 마음으로 참석해달라는 말에 별 수 없지, 하고 찾아온 곳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쓸데없이 말을 걸기 좋아하는 사람과 마주쳐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했던 대답이 거짓인건 아니었다. 요즘 나는, 아니, 언제라고 정확히 짚을 수 없는 예전 언젠가부터 알 수 없는 우울감에 시달리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아주 심각한건 아니어서 가끔 잠이 오지 않을 때 수면제를 처방받는 정도지만, 때론 강한 우울이 나를 덮친다. 바로 오늘처럼. 그런 날엔, 파란색 포켓치프를 꽂는다.



"내 이름은 쿠로오 테츠로."

"……."

"그쪽은?"

"아카아시 케이지입니다."



감정을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상상했던 적이 많았다. 각기 다른 색으로 존재한다면 그걸 보며 내 상태를 조금 더 빠르게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별 생각 없이 꽂았던 파란색 포켓치프는 그런 생각과 맞물려 혼자만의 규칙으로 자리잡게 됐다. 거울을 볼 때마다 내 우울과 마주보고 선 느낌이 들었다. 마음이 조금 나아지면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그것을 빼내기도 했는데, 그럴 때는 조금 후련하기도 했다. 오늘은 무사히 벗어났구나, 하면서.



"궁금해졌는데, 그럼 기분이 좋을 땐 무슨 색을 꽂아요?"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 기분이 좋을 땐 신경을 써보질 않아서. "그럴 땐 정해진게 없습니다." 대답을 듣곤 어쩐지 조금 실망한듯한 표정이다. "어떤 것도 꽂아놓지 않을 때가 제일 편한 때긴 합니다." 이런 설명을 덧붙여줄 필요까진 없는데 이상하게 말이 길어진다. 뭐, 저 사람이 시무룩해하지 않았으면 해서는 아니다. "사람은 각기 신경쓰는 부분이 있는거니까."라는 말을 던지곤 동의를 구하듯 바라보길래 "예, 뭐 그렇죠." 같은 떨떠름한 대답을 해줬다.


이러나 저러나 어떤 반응을 해주고 있는 이유는 묻지 않은 본인 이름까지 친절하게 알려준 사람이 마음에 들어서라기 보단 이 자리가 막바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억지로 뭘 하지 않아도 얼마 안 가 자연스레 멀어질 수 있으니 조금만 있으면 된다는 마음이었을 뿐이다. 한편으로는 이 사람도 꽤나 지루했나보지, 했다.



"내 또래 같은데, 식사나 같이 해요."



내 판단이 틀렸음을 알게 되는 것도 얼마 안 가서였다. 이 사람은 오늘 내 포켓치프가 파란색이 아니었더라도 말을 걸었을 것이다. 남다른 자의식 과잉에 심취해 있는 것은 아니다. "저번에 그냥 지나쳤다가 꽤 후회했었거든." 그런 말을 들은 입장에서 다른 생각을 하기란 어렵다.



"나이가?"

"스물 여섯입니다."



사람이 가까워짐에 있어서 나이가 중요한 정보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아직까지도 나이에 관한 질문을 하는 것은 통상적이니 별 수 없다. 명함을 내밀기에 받아들었는데, 회사 이름을 보니 일하다 한 번 쯤 마주쳤어도 이상하지 않을만한 곳이긴 했다. 봤었다는 건 사실인가 보네, 하는 생각으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동안 자리가 마무리 되어 조금 부산스러운 분위기가 되었다.



"뭐 먹을래요?"



권유에 아직 응하지도 않았는데 좋아하는 메뉴를 물어보는 뻔뻔함은 어디서 나오는걸까. 그 해답을 찾기도 전, 될대로 되라는 생각에 사케가 마시고 싶다는 말을 해버렸다. "밥은 아니지만, 좋지." 즐거운 표정으로 혼잣말을 하는 사람의 뒤를 쫓아 걸어간다.


저녁이 되니 확실히 날이 쌀쌀해 얇은 코트를 챙겨오길 잘했단 생각을 했다. 자신이 자주 가는 곳이 있다며 데려가는 술집까지 가는 얼마의 시간 동안 나는 그를 '쿠로오 씨'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는 나를 편하게 '아카아시'라고 불렀다. "케이지…는 좀 아니지?"라는 장난으로 간을 보다가 타협한게 그거였다. 무기력감 때문인지, 나는 모든 상황을 흘러가는대로 놔두고 있었다.


슬슬 추워지는 느낌에 몸을 움츠리려고 싶어질 때 쯤에서야 어느 가게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구석에 위치해 있어서 그런지 저녁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몇 테이블 밖에 차있지 않았다. 시끄러운 것보다 훨씬 낫지, 하며 적당한 자리에 앉았다. 원래 창가 자리를 좋아하나. 혼잣말처럼 물은 말에는 답하지 않았다.



"빈 속에 괜찮겠어요?"

"말을 놓으실거면 놓으시고, 말거면 마세요."



다소 뾰족하게 들릴 수 있는 말투로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넉살 좋게 "그럼 놓아도 되지?" 하기에 어중간한 것보단 그 편이 낫다고 했다. 물론 같이 놓는게 어떠냐는 제안은 거절했다. "그냥, 그게 편해요. 저는 가까운 사람과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 말에 더는 바라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럼 딱히 거리두는 중인건 아니란거네." 의외로 별 걸 다 염려하는 사람이다.


따뜻하게 데워진 사케는 목을 타고 흘러들어가 곧 뱃속을 살살 긁었다.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어서 그런지 순간 머리가 핑, 하는 느낌이 들었지만 뭐 나쁘지 않다.


우리는 시덥잖은 이야기들을 나눴다. 정말 자길 마주친 기억이 한 번도 없냐는 질문을 받았을 땐 원래 주변 상황을 잘 신경 안 쓰는 타입인가 보다는 친절한 후기까지 들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테이블에 상체를 기댔다가 의자에 편하게 등을 맞붙였다가 했다. 퍼프드 폴드 스타일로 접힌 포켓치프가 눈에 들어왔을 땐 어쩐지 그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지만 말해주진 않았다.


뿌옇게 변해버린 창가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형체를 구경했다.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는게 좀 미안하긴 해도 열심히 들어줄 의무는 없다. 멍하니 있다가 말소리가 끊겼다는 걸 알아채고 앞을 바라봤을 때, 그는 가만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날 만날 땐 검정색 포켓치프를 써."

"왜요? 쿠로오 씨 이름 때문입니까."

"큭큭, 아니. 파란색을 하고 나온 걸 보면 좀 신경쓰일 것 같아서."

"또 만나겠노라고 약속한 적은 없는데요."

"지금 하면 되지."



막무가내인 사람이다. 기가 차단 생각에 아무 말을 않고 있는데도 전혀 신경쓰지 않고 언제 시간이 괜찮냐는 둥 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대단하다.



"저한테 관심이 있으신 건 알겠는데─."

"알면 됐어. 제가 아무데나 시간 낭비하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 * *



글쎄. 딱히 누굴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다는 마음으로 지낸지 꽤 됐다. 나 아닌 다른 사람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마음이 닳고, 애타고, 별 것도 아닌 일에 기뻐했다가 또 언제 그랬냐는듯 곤두박질 치는 일은 이제 정말 그만하고 싶었던게 한참 전이다.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다른 것들을 버텨내는 과정을 하기엔 나는 너무나도 건조해져버린 것이다.


만났으면 좋겠다, 는 말을 하긴 했다. 그 앞에 '가볍게' 혹은 '진지하게' 같은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그저 "만났으면 좋겠다." 딱 그 말 하나였다. 군더더기 없는 대사에 얼굴 붉힐 나이는 아니라 그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을 뿐이다. 그는 내게 닥달하지 않았다.



"그냥 그 날 처럼, 같이 밥이나 먹자는 말에 알았다고만 하면 돼."



그런 말이나 했다. 그래요? 그 정도야, 뭐. 그 한마디로 어정쩡하고 애매모호한 만남이 시작됐더랬다. '그냥 그 날 처럼' 만나 밥을 먹고, 때론 술을 마셨다. 관계가 특별한 방향으로 진전된 것처럼 구는 일은 없었다. 주말이 되면 가끔 영화를 보러 갔다. 딱히 영화 티켓을 모아두진 않았다. 그건 그도 마찬가지인듯 했다.


대부분의 약속 장소는 내 집과 가까운 곳이었다. 일종의 배려라기 보단 그저 그가 자주 다녔던 곳이 이쪽에 많다는 이유에서라곤 하는데, 그 속을 내가 알 리 없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기도 하고.


첫 날 말했던 검은색의 포켓치프를 쓸 일은 잘 없었다. 굳이 그런 차림새를 고수해야 할 이유는 없었으므로 당연했다. 평범한 사복을 입으면서 알게된 것은 있었다. 대단한 것은 아니고, 그는 자켓이나 코트 종류의 옷을 좋아한다는 거였다. 나는 늘 그보다는 편한 차림이었기에 나란히 서있을 때면 그와 나의 스타일이 대조적으로 느껴졌다.



"생각해 보면 저도 웃기네요."

"뭐가?"

"모르는 사람이랑 이렇게 만난 적이 없었어서."

"지금은 모르는 사람이 아니니까 된 거 아냐?"

"그야 그렇지만."



분명 자신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일임에도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있는 법이다. 나에겐 이것이 그런 류의 일들 중 하나고. 여러가지 생각을 한다. 첫 눈에 반한 것도 아니고, 여러 플러팅에 홀라당 넘어간 것도 아닌데 나는 왜 그와의 약속을 거절하지 않을까.


어느 날은 그게 너무 궁금해져서 잠들기 전 한참을 생각해 보았는데, 겨우 얻은 결론은 '마음이 편해서'였다. 어쨌든 나는, 그와 '연애'를 시작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연락이 신경 쓰이거나 그의 말을 세세하게 곱씹거나 하지 않는다. 좋은 사람 같긴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인 것은 아니다. 연락이 되지 않았을 때면 나에게 사과를 하지만, 나는 사과할 일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사람 성격의 차이일 뿐일까? 아니, 적어도 원래의 나는 누군가를 만날 때 이런 모습이지 않다는 걸 안다. 있어도 없어도 타격을 받지 않는 사람. 그럴 것 같은 사람. 딱 이 정도가 좋다고 생각했다.



* * *



내가 힘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몇 주의 시간이 지났을 때 부터였다. 어느 순간 갑자기 그의 말에 기분이 상해 티를 냈고 사과를 받았다. 그 전까진 정말 마음이 좋지 않았는데, 사과를 받고 나니 갑자기 괴로움이 차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왜 그런 걸로 기분이 상했지? 아니, 일단 왜 그 사람 때문에 기분이 상한거지? 그 날은 파란색 포켓치프를 꽂은 날이었다. TV 폴드로 심플하게 꽂혀있는 그것을 바라보면서 오늘이 이런 날이라 그런가보다, 고 넘겨버렸던 것이 화근이었다.


나는 나의 변화를 냉정하게 알아채지 못한 상태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한참 뒤에야 요즘의 내가 이상하다는 걸 알았다. 나는 많이 예민해져 있었고, 그에게 감정 표현을 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와 동시에 그가 내게 사과하는 일은 늘어났다. 사과를 받을 때마다 괴로웠고,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해져버려서 그 날은 잠에 들기가 힘들었다. 기분 상해해서 미안해요, 라는 말을 하면 그만인지도 모르는데 그걸 하지 못했다.



"오히려 이것저것 표현하는 편이 아카아시를 파악하기에 편해."



어쩌다 사과를 했던 날에 들었던 말이라곤 전부 저런 것들 뿐이었다. 좋은 사람? 그렇게 생각하는게 맞을까? 나는 늘 이것저것 서운해하며 그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었는데, 이제와서 미안한 마음에 '좋은 사람'이란 칭호를 붙여주는거, 조금 웃기지 않으려나. 하지만 말하고 싶었다. 좋은 사람이지 말라고.



"왜?"

"더 미안해지니까요."

"미안한 일 없이 무언가를 알 수는 없는거잖아."



그런 말들에 마음이 동해 넘어간 사람은 몇이나 될까 하다가 쓸데없는 생각은 관두기로 했다. 무색무취한 인생으로 살다 보면 어디 하나 걸리는 것 없고 좋지 않을까 했는데, 기어코 걸려드는 것은 꼭 있는가 보다.



* * *



나는 인정하기로 했다. 내가 겁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어젯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며 한참 동안 내가 할 말을 정리하느라 진땀을 뺐다. 어떻게 말하는 것이 좋을까 했지만 어떻게 말해도 후회가 남을 것 같아 이런저런 말들을 다 빼고 나니 남는 것은 몇 글자 뿐이었다.


우리, 이제 다신 약속 같은거 잡지 말아요.


고작 이 짧은 문장 하나를, 집에서 나와 약속 장소로 가는 시간 내내 되뇌였다. 한 글자라도 빼먹으면 전부를 잊어버리게 될까봐 초조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들고 있던 것들을 전부 바닥에 떨어뜨리게 되는 불상사가 일어날까봐 무던히도 노력했다. 무릎이 까지면, 분명 괜찮냐고 물어봐주길 기대하게 될테니까.


만나기로 한 곳에 도착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하기도 했다. 가끔 초조해 손을 만지작거리긴 했어도. 먼저 도착한게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른다. 차가운 얼굴로 기다리다 나를 발견하자마자 빙그레 웃어버리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이상해지니까. 그런데 내가 기다리고 있어도 그런 모습을 보는건 마찬가지 아니었나.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는 그를 만나 적당한 곳에 들어가기까지 계속 됐다. 차라리 길거리에서 말해버린 후 도망쳐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사람들 소리에 내 말이 조금이나마 묻히면 좋겠다 싶어서.


약속이라는 건 뭘까. '야속'이란 말에 밑받침이 하나 더 들어갔을 뿐인데 이렇게나 중요한 의미가 되어버린다는건 어딘가 이상하다. 우리는 만나기로 했었다. 어떤 모습으로 만나기로 하는건지는 정한 적이 없다.


뜸을 들이는 내 앞에 있는 사람은, 예전 그 날 창 밖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던 나를 쳐다보고 있던 때와 같이 날 바라보고 있다.



"무슨 생각해?"



나는, 밤새 단어들을 솎아내며 건진 한 문장을 잊어버렸다. 따져봐야 얼마 되지도 않은 시간인데, 분위기 탓인지는 몰라도 쉽사리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뭐 어때, 라고 말하는 내 자신은 어디론가 먼저 도망가버렸나보다.



"우리─"

"응."

"다시는 전화하지 말아요."



그가 그 말을 이해하기도 전에 나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왔다. 전화를 하지 말자, 라니. 바보 같이 말해버렸단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잠시 후 테이블엔 쓸데없이 음료 두 잔이 올라가 있겠지. 그는 그걸 어떻게 할까. 아,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지.


나는 한시라도 빨리 혼자만의 공간에 있고 싶어 택시를 잡아 탔다. 짧은 거리인지라 숨을 돌리기도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택시 안에서 왈칵 하고 울음을 터뜨릴 뻔 했던 것은 그가 입었던 옷들이 떠올라서였다. 파란색 포켓치프. 언젠가부터 당신은 꼭 그 포켓치프를 했어. 그제야 나는, 나만의 생각을 하느라 듣지 못했던 그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만나지 않기로 하는 약속만 안 하면 돼."



아, 그랬었죠. 그리고 당신이 그런 말을 했던 이유는 아마도, 언젠가 내가 도망쳐버릴 걸 알아서였는지도 몰라. 나는 입술을 앙 다문 채로 눈에 담길 시간도 없이 지나가버리는 풍경들을 바라보았다. 택시가 멈춰섰을 땐 잔돈도 받지 않고 내려서는 급한 걸음으로 걸어가 집 안으로 들어섰다.


괜찮았던 때로 돌아가고 싶어져서 그런 말을 한건데 괜찮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 이제와서 어쩌자는거지. 난 당신을 좋아하지 않아요. 하지만 신경이 쓰이기 시작해서, 그래서, 나는 그게 너무 겁나요. 그러기 싫어요. 좋아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증거 같아서. 나는 그저 평소처럼 지내고 싶어. 옅은 우울 위를 걷다가 때론 거기에 빠져 신음하고, 또 겨우 빠져나오기만을 생각하면 됐던 때처럼 말이에요. 좋아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내가 그럴 수 있게 도와줘요.


겨우겨우 정리해 숨겨놓았던 말들이 한꺼번에 엎어졌다. 나는 그것을 주워담지도 못하고 울컥대는 목울대를 누르며 꾸역꾸역 참았다. 울면 정말 그 모든 것들을 인정하는게 될테고, 난 그걸 원하지 않는다. 그때, 핸드폰 알림음이 조용한 집 안에 짧게 울려퍼졌다.


문자 메세지, 1건.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아카아시, 내일 오전 중으로 메일 확인해서 팩스 보내줘.]



무슨 생각을 한거야, 하면서도 맥이 풀리는 이유는 뭘까. 그때 알림음이 한 번 더 울렸다.



[전화하지 않기로 한거 없었던 일로 하는 약속하자고 하면 지킬거야?]



두서 없는 말들이 튀어나올 것 같아 한참을 화면만 보고 있었다. 내가 했던 말에 책임을 다하려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맞다는 걸 알고 있지만 나는 내가 서있는 기로에서 쉽게 발을 떼지 못했다. 처음 부터 지금까지, 정말 흘러가는 대로 떠내려온 것 하나는 바뀌지 않았구나 싶다. 이런 것도 무책임한 것일까. 잘 모르겠다. 하나의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나는 키패드를 하나씩 누르고 있었다.



[겁이 나요.]

[겁내지 않는 건 내가 할게.]



그렇게 말하면, 약속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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