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가벼워졌다. 갖가지 걱정과 고민이 뒤섞여 요동치던 머릿속도 깨끗이 비워졌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 이런 기분일까. 새벽에 미장원 앞 쓰레기봉투를 들고 오는 일 외에는 밖에 나가지를 않으니, 마치 동굴에서 백 일 동안 쑥과 마늘만을 먹어야 했던 곰과 호랑이가 된 것 같기도 하다. 아니, 이백일인가. 삼백일이었던가, 뭐 아무튼. 새하얘진 머릿속에는 무언가 떠올랐다가도 금세 흐리멍덩해지며 사라지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실실거리며 웃는다. 입가가 터져서 피가 맺힌 후에야 나는 언제 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이 리터짜리 페트병에 담긴 생수를 마신다. 하지만 두 모금을 채 삼키지 못하고 물과 위액, 그리고 머리카락을 게워낸다. 몇 번 거칠게 숨을 헐떡이다 끈적한 점액질이 잔뜩 묻은 머리카락 뭉치를 씹지 않고 넘긴다. 속이 끓어오른다. 식도를 굵직한 사포로 긁어낸 듯한 통증이 느껴진다. 나는 그대로 바닥에 엎어져 고통 속에 신음하다 나도 모르게 잠든다.

어느 날은 침과 피가 섞여 진득해진 거품을 물고 눈을 떴다. 바닥은 차가우나 온몸은 땀으로 푹 젖어있다. 거울을 보니 꼬락서니가 이렇게 흉할 수가 없다. 떡진 머리카락은 저들끼리 뭉쳐져 마치 물미역을 뒤집어쓴 듯하고, 얼굴은 찢어질 듯한 건조함이 느껴지면서 겉으로는 기름이 돌아 손가락 끝으로 건드려보기에도 역겨울 수준이다. 땀에 전 몸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떨리기 시작하자 나는 욕실로 느리게 기어간다.

욕실 문을 겨우 열고 몇 번의 기침을 한 후 겨우 몸을 일으켜 물을 틀고 옷을 벗는다. 자연스레 눈이 향한 거울 한 가운데에는 반가운 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흐릿한 정신을 부여잡고 다시 그를 관찰하기 시작한다. 반들반들한 등, 가느다랗고 절도있게 꺾인 다리, 피날레는 멋스럽게 뻗은 두 개의 더듬이. 언제 봐도 아름답고 기품있는 자태로군.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자 그는 쏜살같이 거울 아래쪽으로 몸을 피한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쫓으려 했지만 짙은 색의 타일과 초점이 잘 맞지 않는 두 눈 탓에 그를 놓칠 수 밖에 없었다. 의기소침해진 나는 알맞게 데워진 물줄기에 머리를 들이민다.

그 자리에 쭈그려 앉아 머리를 감던 중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예의도 없이, 빈손으로 온 주제에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이 불쾌했던 걸까. 붉게 달아오른 얼굴은 뜨거운 물 탓인지, 도의를 지키지 못함으로 인한 수치심 탓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하얗고 부드러운 거품을 씻어내고 대충 물기를 제거한 뒤 손가락을 젖은 머리카락 사이사이에 끼워 넣고 거칠게 빗어 내렸다. 머리 뿌리부터 끝까지 거의 뜯어내다시피 손을 놀리고 나니 양손에 꽤 많은 양의 머리카락이 쌓였다. 불이 붙은 듯한 통증에 두피를 가볍게 쓸어 만져보니 울긋불긋 부어오른 모공에서 약간의 피가 묻어나온다.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풍성한 만찬을 손에 쥔 채 그를 불러본다. 이것 보세요. 여기 머리카락이 있어요. 아주 많아요. 그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아직 인간에 가까운 내 모습이 친숙하지 못한 모양이다. 나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 그의 경계심을 풀어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방 전체를 몇 바퀴를 돌고 돌아도 그는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왜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 힘에 부쳐 방구석에 엎어져 머리카락을 씹으며 중얼거린다. 푸석푸석한 머리카락은 식감도 맛도 형편없다. 맛이 없어 보이나... 나는 남은 것을 몽땅 입에 쑤셔 넣고 먼지가 둥둥 떠다니는 물을 들이켜 쓰디쓴 약을 삼키듯 그 검은 덩어리를 겨우 넘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로 게워내고는 몸을 일으키지 못 하고 토사물 위에서 억겁과도 같은 시간-사실 삼십 초 남짓이었을 텐데 말이다-을 버둥거리다 정신을 잃었다.

언젠가부터는 앉아있는 것조차 힘이 달리게 되었다. 엊그제는 몸을 씻던 중 쓰러지면서 뒤통수가 터질 뻔했다. (다시는 서서 씻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쓰레기 봉지를 들고 오기는 커녕 미장원까지 갈 힘조차 없어 내 머리카락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바닥에 누운 채 쉴 새 없이 입을 놀리며 미루고 미룬 원고를 쓰려 했지만 단 삼 분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자판 위에서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자세히 보니 손톱이 죄다 갈라지고 찢어져 피딱지가 앉아있다. 허공에 손을 올리고 손가락 하나하나를 움직여본다. 나뭇가지 같은 손가락 사이로 빛이 일렁이며 들어온다. 심장이 느리게 뛰는 소리가 들린다.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쉬어본다.

들이마시고,

내쉬고,

다시 들이마시고, 

...

나도 모르게 잠에 드는 일이 잦아졌다. 방 한가운데 몸을 웅크리고 누운 나는 새로운 나-바퀴벌레-가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힘없이 눈을 감았다 뜨면 낮이 밤이 되고, 밤이 낮이 된다. 시야가 흐려져 빛의 유무 밖에는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또한 하나의 과정이리라. 발끝을 움찔거리는 것이 낼 수 있는 힘의 전부이기에, 입가에 겨우 닿는 머리카락을 혀로 끌어당겨 그 끄트머리를 씹어가며 정신을 부여잡는다. 모두가-라고 해봤자, 친구 하나 뿐이지만- 나를 무시했지만 나는 보란 듯이 변신할 것이다. 이 곰팡이 핀 단칸방에서의 삶도, 재미없고 유치한-도대체 누가 읽을까 싶은-외서를 번역하는 일도, 동창회에서 이름조차 거론되지 않는 존재로 사는 것도 모두 끝날 것이다.

아, 다시 눈앞이 흐려진다. 잠이 쏟아진다.

이번에는 꽤나 오랜 수면이 될 것 같다.

짧은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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