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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키워드 : 택언유연, 바보



보고가 끝났다. 초겨울의 짧은 해는 이미 뉘엿뉘엿 넘어간 후다. 이택언은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걸쳤다. 유연을 데려다주기 위해서였다. 일이 늦게 끝나는 날에는 이택언이 유연을 바래다준다. 그렇게 하자고 약속한 적은 없지만, 어느새인가 습관처럼 몸에 배었다. 마치 언제인가부터 두 사람이 휴가 기간을 맞추게 된 것처럼, 또 Souvenir의 신메뉴 첫 시식을 당연히 유연이 하게 된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유연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조금 늦게 알았다. 오늘의 유연은 그의 지적에 너무 깐깐하시다고 투덜거리지도, 열심히 했으니 보상으로 푸딩을 달라고 당당히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저 보고를 하던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무언가 망설이는 듯, 입술에 힘이 들어간 채로.

그러고 보면 보고할 때도 무언가 달랐던 것 같다. 자주 심호흡을 했고, 어깨가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단순히 긴장해서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다른 이유가 있는 모양이다. 이택언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이만큼 함께 지냈으니 슬슬 그를 신뢰해줄 때도 된 것 같은데, 유연은 종종 이렇게 그에게 기대는 것을 망설이곤 했다. 그이의 천성이 그렇다는 것을 잘 알고, 사랑스럽다고 생각하지만, 때때로 언짢았다. 이것은 그가 기다림에 능한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무슨 일입니까?”

 

그렇게 물으며 제게 다가오는 이택언을 유연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숨기지 않았으니 그이가 눈치채지 못할 것이라 여긴 것은 아니다. 이택언은 때때로 놀라울 만큼 세심한 관찰력을 보여주고는 했다. 본디 꼼꼼한 사람이라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상대가 저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유연은 생각했다. 이택언은 유연의 작은 표정 하나, 행동 하나 놓치지 않으니까. 그토록 주의깊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새삼 깨달을 때마다 유연은 푹 잠기는 기분이 들었다. 숨이 멎을 것 같은 달콤함과 온 몸을 덮는 다정함.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에게서 받는 애정이 이토록 잠잠하다는 것은 조금 신기하게까지 느껴졌다. 보통은 거대한 파도나 강렬한 폭풍, 그런 압도적인 모양을 예상하게 되니까.

하지만. 유연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굳이 이 말을 해야 할까? 기실 그에게는 이것을 정리된 언어로 표현할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이택언은 납득하지 않을 것이다. 자칫했다간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드는 것은 아닐까. 그런 걱정을 하며 유연은 무언가 말할 듯 말 듯 입술을 조금 달싹거리다, 이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을 보고, 이택언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힘있게 뚜벅뚜벅 유연에게 걸어가 그 앞에 섰다. 조금은 섭섭한 마음을 내보일 생각이었는데, 저를 올려다보는 커다란 갈색 눈망울을 마주하니 또 그런 마음은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그는 그저 유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다가, 동그란 뺨을 부드럽게 감싸쥐었다. 그리고 약간의 장난기를 담아 말했다.

 

"뭘 멍하니 서서 한숨을 쉽니까, 바보."

 

살짝 처져 있던 유연의 눈썹이 새초롬히 치켜올라갔다. 이택언은 그 다음을 예상했다. 발끈해서 바보 아니라고 화를 내거나, 잔뜩 토라져 입술을 비죽거리거나. 그는 다른 손으로 제 입가를 매만졌다. 그이와 함께 있을 때마다 입꼬리가 제멋대로 움직이는 탓에 생긴 버릇이었다. 그러느라 유연이 예상과 다르게 제 뺨을 감싼 그의 손을 잡아 내렸을 때, 그는 조금 늦게 반응하고 말았다.

 

"이택언 씨."

 

그 목소리는 어떤 복선처럼 들렸고, 그는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다. 미소를 지으려던 입꼬리는 더 올라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멎었다. 유연은 이택언의 손을 놓아주고 한 걸음 물러섰다. 결연한 눈빛으로 저를 마주보는 그이를 보자, 이택언은 의식적으로 등을 긴장시켰다. 원래도 곧은 자세가 더욱 단단해졌다. 그가 한 말이, 어쩌면 행동이, 어떤 계기가 된 것일까? 한 마디 꺼내는 것도 무척 망설이던 유연은, 이번에는 머뭇거리지 않고 그에게 말했다.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

 

아직 이택언의 업무가 끝나지 않았으므로, 이야기는 조금 미뤄지게 되었다. 이택언은 유연에게 VIP 라운지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화예의 최고층에 있는 VIP 라운지는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었고, 아주 넓었다. 전면창으로 시야를 탁 터놓아 연모시의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찬란하고, 아름답고, 조금은 쓸쓸한.

그이는 불안할 때마다 발 밑의 도시를 내려다본다고 했던가. 라운지의 불을 꺼버리고, 유연은 창가로 걸어갔다. 사람도 차도 다 아주 자그맣게 보이고, 그저 멀게만 느껴졌다. 불안이 해소되기는커녕 혼자가 된 기분만 든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유리창에 콩, 하고 이마를 댔다. 차갑고 딱딱한 감촉에 복잡한 머릿속이 잠깐은 맑아지는 듯했다.

 

"불도 안 켜고 뭐 하고 있습니까."

 

뚜벅뚜벅, 걸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걸음걸이. 유연은 대답을 하지도, 그이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이내 이택언이 유연의 옆에 도착했다.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지자, 그제서야 유연은 꾸물꾸물 고개를 들었다. 어두운 와중에도 도시의 불빛이 충분한 광원이 되어, 유리창에 꾹 눌렸던 유연의 이마가 빨개진 것이 보였다.

이택언은 손을 들어 유연의 이마를 덮었다. 차가운 이마가 그의 체온으로 곧 데워졌다. 고마워요, 하고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쩐지 시무룩한 표정으로, 유연은 제 이마에서 이택언의 손을 내리고는 깍지껴 마주 잡았다. 손 크기도 손가락 굵기도 제법 차이가 나서, 마치 어린애가 어른의 깍지를 낀 듯한 모양이 되었다.

 

"대표님 따라서 해봤는데, 저한텐 별 효과가 없나 봐요."

 

'대표님'. 이택언은 아까 유연의 호명을 떠올렸다. 남은 일을 서둘러 처리하면서, 계속 곱씹어 생각했던 부분이다. 어째서 위화감을 느꼈나. 그리고 깨달았다. 유연은 평소에 그를 '대표님'이라고 부른다. 이름을 부르는 것은 드문 일이다.

거기까지 다다르자 이택언은 직감적으로, 유연이 '화예 대표 이택언'이 아니라 이택언 개인을 불렀다는 것을 알았다. 유연은 종종 그런 시도를 해왔던 것이다. ‘화예 대표 이택언’과 ‘Souvenir 셰프 이택언’을 분리하려는 시도. 기실 그는 그것을 분리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 늘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이택언은 이택언이다. 이 당연한 명제에 무슨 의문점이 있겠는가?

그러나 유연이 그것을 원한다면, 이택언은 얼마든지 응할 의향이 있다.

 

"전에도 말했듯,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이택언은 유연과 맞잡은 쪽 팔에 힘을 주어 끌어당겼다. 유연은 별다른 저항 없이 순순히 끌려와 그의 품에 안겼다. 품에 쏙 들어오는 따끈한 몸을 뒤에서 끌어안자, 이택언은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넘치는 충족감을 느꼈다. 그리고 제가 사실은 허전해하고 있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분명 혼자인 것이 당연한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혼자로는 부족함을 느낀다. 애틋한 마음이 피어올라, 그는 유연을 더욱 꼭 끌어안으며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에 코를 박았다. 익숙하고 달콤한 향이 났다.

 

"하지만 전 이택언이 아닌걸요."

 

그렇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이택언은 빠르게 낭만적인 상념에서 깨어났다. 다시 '이택언'이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그는 다시 처음처럼 언짢아졌다. 유연을 품에서 천천히 밀어낸 이택언이, 그이의 어깨를 잡고 돌려 세웠다. 유연은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바라보았다. 우습게도,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다시 괜찮아졌다. 가지가지 하는군, 속으로 스스로에게 핀잔을 주면서도 그는 그런 자신이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고민에 차서 살짝 찌푸려진 유연의 미간을 다정하게 펴 주며 이택언이 말했다.

 

"해보기 전엔 모르는 거죠. 원래 그렇게 바보같은 소릴 하는 사람이었나?"

 

이번에는 예상한 반응이 나왔다. 발끈한 유연이 고개를 휘휘 저어 이택언의 손을 물리고는 투덜거렸다.

 

"또 바보 소리! 바보 소리 하는 사람이 바보인 거 몰라요?"

 

이택언은 약간 안심했다. 놀리듯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으며 대꾸했다.

 

"유치하긴. 난 바보 아닙니다. 그리고 바보를 바보라고 하지, 뭐라고 합니까?"

"바보가 아니시면,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도 아시겠네요?"

"언제부터 '바보가 아님'의 의미가 '독심술을 할 수 있음' 이었습니까?"

 

가벼운 대화처럼 들렸지만, 이택언은 유연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조금 다른 것을 알았다. 평소처럼 굴려고 노력하고 있었고 거의 비슷했으나, 늘 유연을 유심히 관찰하는 이택언에게는 보였다. 목소리는 약간 떨리고, 눈빛 역시 어쩐지 필사적인 느낌이 있다. 아무래도 대화를 하는 편이 좋겠다. 유연이 말을 꺼내기 어려워하는 듯 보여서, 이택언은 제가 운을 떼기로 했다. 그는 달래듯 말했다.

 

"무슨 고민을 하고 있든, 당신이 말해주지 않으면 나는 모릅니다. 그러니까, 말해줘요, 유연. 뭐가 문제인지."

 

이택언의 말에 유연은 눈을 깜박였다. 그 부드러운 목소리에 조금 울 것 같고, 동시에 답답했다. 그래, 이택언의 애정은 이런 모양이다. 굳이 자연재해처럼 압도적인 형태를 띨 이유가 없다. 그건 세차고 거세지만, 국소적인 부분에만 영향을 끼치니까.

그러나 아예 세상을 덮어 버린다면? 누군가의 세계를 오롯이, 자신으로 가득 채운다면?

요동 없이 잔잔하면서, 동시에 상상할 수도 없는 거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유연은 계속 그 안에 잠겨 있었다. 물론 이 안이 얼마나 안온하고 따뜻한지, 그는 잘 안다. 많은 위로와 힘을 얻었다. 무심코 안주하고 싶을 만큼.

하지만 유연은 자신을 알았다. 그는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한다. 납득할 수 없는 것에 타협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리고 지금 마음에 앙금처럼 남아 쌓여가는 거리낌을 해결하지 않으면, 언젠가 돌이킬 수 없는 사건으로 돌아올 것이다. 갈등이 무서워 회피하지 말 것. 이것 또한 이택언에게 배운 것이었다. 그이는 좋은 스승이므로, 제자가 가르침에 따르는 것을 기꺼워할 터.

유연은 결심했다. 이택언은 잠잠히 유연을 기다리고 있다. 용기를 내어, 말했다.

 

"왜 자꾸 저를 바보라고 부르세요?"

 

이택언은 허, 하고 한숨을 뱉었다. 오래 망설이기에 심각한 문제인 줄 알았더니, 전혀 예상치 못한 불만이 돌아왔다. 허탈함을 느낀 이택언은 무심코 아까 했던 대답 - 바보를 바보라고 하지, 뭐라고 합니까 -으로 되돌리려다가, 유연의 표정을 보았다. 긴장으로 잔뜩 굳은 표정에, 주먹을 힘주어 꼭 쥐고, 숨 쉬는 것조차 잊은 듯 가슴께는 한껏 부풀어 있다. 이렇게 진지하게 말하는데 차마, 그럴 수는 없다. 이택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일단 유연의 등을 살살 쓸어내렸다.

"자, 숨 쉬어요. 편하게. 이야기는 소파에 앉아서 듣죠."

 

등을 쓰다듬는 따뜻한 손길을 느끼자, 그제서야 유연은 제가 숨을 참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지금 이렇게 다정하게 나오면. 유연의 결심이 자꾸 흔들렸다. 마음 한편에서는 지금이라도 그만두라며 아우성을 친다. 하지만, 방금 이택언은 그이의 입장에서는 어처구니없을 주장을 비웃지 않고 들어 주었다. 뭐, 한숨은 쉬었지만, 그래도 진지한 유연의 태도를 보고, 저도 진지하게 대해 주었다. 유연은 그이의 신뢰와 성실에 솔직함으로 보답해야 했다. 그러고 싶었다.

두 사람은 소파에 앉았다. 이택언이 긍정적인 태도를 보여서일까, 일단 말꼬가 트이고 나면 어떻게든 될 거라는 근거 없는 낙관이 들었다. 조금은 편안해진 마음으로, 유연은 일단 아무렇게나 서두를 꺼내 보았다.

 

"대체 왜 그렇게 바보라고 불러대는 거예요? 바보랑 원수라도 졌어요?"

"원수졌으면 내가 당신과 이러고 있지 않겠죠."

"아니, 그러니까 왜 내가 당연히 바보가 되는 건데요?"

"아까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바보니까-"

"그렇게 얼버무리지 말고 똑바로 설명해 주세요."

 

유연이 이택언의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살면서 별로 당해본 적이 없는 일이라 이택언은 약간 황당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입을 다문 김에, 방금 유연이 한 말을 생각했다. '얼버무리지 말고?' 이택언은 사업가이고, 당연히 명확한 의사 표현을 중시한다. 그런 자신에게 얼버무린다고 하다니,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설명을 요하는 표정으로 이택언은 유연을 바라보았다.

유연은 그 시선을 받다가, 갑자기 발가락을 꼼지락거려 신발을 벗었다. 그리고는 무릎을 접어 당겨 가슴께에 꼭 붙였다. 그렇게 동그란 공처럼 몸을 웅크리고서 고개를 돌려 이택언을 마주보았다. 방어적인 자세인지 편안한 자세인지, 애매한 모양이었다. 이택언은 참을성 있게 보고 있다가, 겉옷을 벗어 유연의 드러난 다리 위에 덮어 주었다. 유연은 그이가 그러도록 내버려 둔 채, 한번 크게 심호흡을 한 후, 차분하게 말했다.

 

"저한테 바보라고 하시는 맥락을 생각해보니까 그렇더라고요. 제가 당신이 하는 말을 눈치 있게 알아듣지 못하거나, 주의력이 부족해 사고를 치거나, 또."

"또?"

 

유연은 민망함을 감추려는 듯 일부러 당당하게 말했다.

 

"제가 귀여울 때요."

 

이택언이 눈을 가늘게 떴다가, 이내 얄밉게 웃었다.

 

"그럼 그게 애칭이라는 것도 알겠군요."

"제가 기분 나쁘다고 하면요?"

 

저도 모르게 날카로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것을 들은 이택언도, 말한 유연도 잠깐 멈칫했지만, 유연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냥 눈치없을 때만 바보라고 하시는 거 아니잖아요. 내가 이택언 씨 마음 몰라줄 때도 바보라고 하잖아요. 독심술은 나도 못 해요. 그런데 왜 설명하지도 않고 바보라고 뭉개고 넘어가요."

"......."

"나 바보 아니에요. 그렇게 얼버무릴 때마다 '그냥 내가 참고 기다리지' 하고 생각하는 거 다 보여요. 그거 무슨 구제불능 취급 같아서 진짜 짜증나거든요? 아, 그래요. 애칭인 거 알죠. 근데 그러면 내가 기분나빠도 좋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냐고요."

 

이 정도 말하고 나니 속이 탁 트이는 것 같아 유연은 웅크렸던 허리를 폈다. 정리된 말로 표현하려 할수록,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으므로, 결국 생각나는 대로 말해 버렸다. 그러다 쏟아낸 것들은 조악하기 그지없었으나, 더할 나위 없는 제 본심이었다.

이택언은 언제나처럼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묵묵히 유연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자 유연은 덜컥 겁을 먹었고, 동시에 그런 자신이 조금 싫어졌다. 신뢰에는 신뢰로 보답해야 하는데, 마치 제가 덜 된 사람이라 그이를 믿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때까지 지켜봐온 이택언은 그럴 사람이 아닌데.

그러나 또, 울컥 치밀어오르는 것이 있다. 믿지 못하는 게 왜? 이 관계에서 유연은 리스크를 떠안고 있었다. 거액 투자자와 약소 제작사 사장, 누가 봐도 체급이 맞지 않는다. 혹시라도 이택언이 이상해져서 어떤 불합리한 걸 강제해도, 유연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걸 단순히 이택언의 인간성 하나에만 의지해서 신뢰할 수 있을까? 젠장, 연쇄살인마도 누군가에게는 ‘그럴 사람이 아닌데’라는 평가를 듣는단 말야!

 

“또 무슨 생각을 하기에 그런 표정입니까. 할 말이 남았다면 해요. 듣고 있으니까.”

“음....... 네. 저는 말 끝났어요.”

 

이택언의 담담한 목소리를 듣고서야, 유연은 제가 한껏 인상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른 표정을 풀면서 유연은 이택언 쪽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아까와 같은 살짝 찌푸린 표정이었지만, 어쩐지 조금 상처받은 듯 보였다. 이런. 유연은 그이의 섭섭함을 받아낼 마음의 준비를 했다. 하긴, 제가 왜 ‘화예 대표 이택언’과 ‘Souvenir 셰프 이택언’을 구분하려 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인데. 역시 괜한 말을 꺼냈다는 후회가 들었다. 어떻게 보면 별것도 아닌데, 바보 소리 같은 건. 아무 말도 하지 말걸.

그렇게 지레 체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어진 이택언의 말을 들었을 때 유연은 제 귀를 의심했다.

 

“우선 미안합니다. 당신이 편하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지 못해서. 이런 이야기는 여기서가 아니라 Souvenir에서 하는 편이 나았겠군요. 이택언 개인으로서, 말입니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 깜박이는 유연을 보며, 이택언은 자조하듯 웃었다.

 

“내가 당신 말하는 바를 이해해서 놀랐습니까? 그것도 미안합니다. 말하면 알아들을 사람이라는 확신을 주지 못해서.”

“어, 아니. 그....... 확신을 못한 건 아닌데요, 그랬으면 말도 안 꺼냈고....... 그치만 솔직히, 화내실 줄 알았어요.”

“내가 이런 일로 화내지 않는다는 건 당신도 알 텐데요.”

“그럼 왜 그렇게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어요.”

 

이택언은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확실히 그는 지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유연에 대한 언짢음이 아니라, 그이가 제게 솔직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상황과 입장에 대한 언짢음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감정에 조금, 놀랐다.

이택언은 자신의 소유와 위치에 대해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었고, 한번도 그것에 불만을 가진 적이 없다. 그러나 유연의 솔직한 토로를 들은 순간, 그는 제가 가진 것들이 좀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던 것이다.

이 사소하고 구구절절한 감정의 변화를 굳이 표현해야 할까? 이택언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걸 설명하기보다는, “바보, 신경쓸 것 없습니다.” 하고 넘어가는 쪽을 택해왔다. 하지만. 저를 바라보는 맑은 갈색 눈망울을 보자, 이택언은 그답지 않게 조금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좀 더 편한 사람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을 뿐입니다. 당신을 눈치보게 하지 않을 만큼.”

 

제 입으로 뱉은 문장이지만 대단히, 어설프게 들렸다. 이것저것 다 빠져 엉성한 모양이라 과연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전달은 할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이택언이 후회를 하기도 전에, 유연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 환한 웃음을 보자, 그는 머릿속에서 쓸데없는 고민이 전부 날아가는 걸 느꼈다.

 

“하핫, 이택언 씨도 그런 생각을 해요?”

“......불만 있습니까?”

“아뇨! 아뇨, 그냥 좀 의외라서요. 그런 걱정, 나만 하는 줄 알았거든요.”

 

나도 좀 더 대단한 사람이면 좋겠다. 당신 앞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 그런 생각을 했었노라고 소근소근 고백하는 유연을 보며 이택언은 어떤 환상을 본 듯했다. 어느새 두 사람은 으리으리하고 고급스럽게 꾸며진 라운지가 아니라, 좁고 포근한 이불 속에 있었다. 어두운 이불 속에 야광 별을 은은한 조명으로 놓고, 별 것도 아닌 일로 호들갑을 떨며 즐거워하고, 비밀 이야기를 속닥거리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웃음을 잃은 K도, 그곳에서는 그저 조금 무뚝뚝한 소년일 뿐이다. 기쁜 듯 웃으며 조잘거리는 소녀의 얼굴이, 유연의 얼굴과 겹쳐진다. 그리고 문득 꿈에서 깨어나듯, 깨닫는다.

그에게 언제나 회한으로 기억되던 앳된 여자아이의 웃음은 여전히, 어른이 된 유연의 낯에 그대로 남아 있다. 젖살이 덜 빠진 통통한 뺨에도,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맑은 눈에도, 언제나 솔직한 말을 하는 앙증맞은 입에도. 이택언은 고개를 숙여 유연의 이마에 제 이마를 대었다. 힘을 주어 꾹, 눌렀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은, 가슴이 뻐근하고 속이 요동칠 만큼 절절하게, 실감하기 때문이었다. 

철이 든 이후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그런, 사소하고 비밀스러운 행복.

그건 오직 유연만이, 그에게 줄 수 있다는 걸.

 

갑자기 이마를 맞대어 오는 그의 행동을 어리광으로 해석했는지, 유연이 소리내어 웃었다. 평소보다 톤이 약간 높은 것이 기분이 퍽 좋은 것 같다. 그에게는 터무니없이 작게 느껴지는 손이 뻗어와, 뒷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강아지라도 된 기분이다. 분명 이때다, 싶어 냉큼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것이리라. 이택언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만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냥, 그이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유연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위로하듯,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괜찮아요. 그런 면까지 다 합쳐서 이택언인걸요. 내 고민을 말했다면 당신도 나한테, “바보는 바보답게 하면 됩니다.” 라고 말했을 거라는 걸 알아요. 이택언도 유연도, 각자의 입장을 완전히 떠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럴 필요도 없고.”

“......알고는 있군요. 아무튼, 당신이 그렇게 바보 소리를 싫어한다니 앞으로는 하지 않겠습니다.”

“아니, 뭐 그럴 것까지는!”

 

서둘러 만류하는 유연의 목소리에 이택언은 고개를 들었다. 대체 무슨 얼굴로 그런 소릴 하나, 유연의 표정이 궁금해서였다. 과연 유연은 멋쩍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설명을 해보라는 듯 눈썹 한쪽을 까딱 들어올리자, 유연의 눈이 반짝 빛났다. 장난기를 미처 숨기지 못한 채 유연이 변명했다.

 

“그것도 일단은 애칭이고! 또 입에 붙어서 떼기 좀 어려울 거잖아요? 그러니까 차라리.......”

“차라리?”

“나도 이택언 씨를 바보라고 부르는 걸로 하면 어때요?”

 

하. 이택언이 기가 차다는 듯 짧게 웃었다. 예상했던 반응이다. 그이가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하기 전에 유연은 얼른 선수를 쳤다.

 

“설마 나한테 이제껏 바보 소리를 해놓고, 앞으로 안 한다고 하면 끝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죠? 당신도 바보 소릴 좀 들어야 공평하다고요!”

“그냥 나를 바보라고 부르고 싶었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그래요.”

“뭐, 그게 아니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정곡을 찔린 표정을 한 유연이 얼른 이택언의 손을 끌어당겨 잡았다. 다시, 깍지를 낀다. 아까는 어린애와 어른의 손 같았는데, 이제는 그냥 손과 손으로 보였다. 크고 포근한 손과, 작고 섬세한 손. 모양은 달라진 것이 없는데, 신기하게도.

 

“바보는 언제나 행복하고 즐겁잖아요. 그러니까 이택언 씨도, 내 앞에서는 그냥 행복하고 즐거우면 돼요. 그런 거 나쁘지 않잖아요.”

“......글쎄요.”

 

이택언은 습관처럼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러나 그의 큰 손으로도 다 가려지지 않을 만큼, 진하고 멋진 미소가 손가락 사이로 튀어나왔다. 정말이지, 어쩔 수가 없다. 어떤 바보를 마음에 두게 되면, 그 자신까지도 바보가 되어 버리는 모양이니까. 하지만 이택언은 이택언이므로, 그는 이렇게 답했다.

 

“당신 같은 바보가 될 자신은 없어서.”

“뭐라고요?!”

 

초겨울의 쌀쌀한 날씨에도 도시의 야경은 따뜻하게 빛난다. 더이상 따뜻한 이불 속에 숨을 수 없고, 언제나 솔직하게 굴 수도 없지만. 이 도시의 어느 한구석에는, 행복한 바보들이 서로로 인해 웃음지을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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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판에서는 유연이 이택언을 대표님 이라고 부르니까 가능한 연성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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