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후. 촛불을 불자 누구보다 따뜻한 목소리가 들렸다. 생일 축하해. 매년 생일마다 하는 이벤트지만 올해는 좀 특별했다. 레터링 케이크에 적힌 축하로도 모자랐는지 이민형은 거실을 온통 파티룸으로 만들었다. 열심히 꾸민 것 같은데 그에 비해 소득은 없어 보이는 조잡한 장식품들과 천장을 날아다니는 자유로운 풍선들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났다. 나를 감동시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또 얼마나 최선을 다했을지, 이민형의 고생이 눈에 훤했다.


"오늘도 하루종일 이것만 한 거야?"

"아냐. 진짜 아냐. 이번엔 진짜 5시간 안에 끝냈어."

"이제 이런 거 안 해줘도 된다니까. 나 진짜 안 서운해."

"그래도 네 생일이잖아. 1년에 한 번 있는 아주 아주 특별한 날. 발렌타인데이기도 하고."


이민형은 웃으며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Happy birthday, and happy valentine.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다정했다. 어떻게 발렌타인데이에 태어날 수가 있지? 그저 365일 중 하루에 사람이 태어난 것뿐인데 이민형은 엄청 놀라운 일인 것처럼 말했다.


"진짜 로맨틱하지 않아? 네 존재 자체가 사랑인 거 같잖아."


로맨틱, 사랑, 그리고 발렌타인. 그 세 단어를 합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그래봤자 단 하루였지만 나는 이민형의 목을 끌어안으며 생각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사랑해 여주야. 그리고 생일 축하해."


나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겠다던 이민형이 내 모든 것을 원하고 있어서. 그 좁은 생각의 틈까지 용서하지 않을 만큼 나를 사랑해서. 그래서 노력 중이었다. 365일 중 단 하루, 그 하루에도 니가 생각나지 않기를. 지금처럼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내가 유일하게 너를 생각하는 오늘은,







밴쿠버의 겨울은 생각보다 포근했다. 영하 25도까지 내려가는 토론토와 달리 밴쿠버의 날씨는 한겨울에도 영상을 웃돌았다. 내가 추위를 싫어하는 걸 알고 일부러 골랐나 싶을 만큼 밴쿠버는 나와 잘 맞는 도시였다. 단 한 가지만 제외하고. 온화한 기후 탓에 눈 대신 비가 많이 내리는 건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지금도 창밖에는 비가 내렸다. 이민형이 우산을 가져갔었나.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하다가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우산이 필요하면 연락하겠지. 평소와 달리 잠잠한 핸드폰을 잠깐 응시하다 시선을 옮겼다. 거실에 붙어있는 커다란 달력이었다. 상단에 가장 크게 쓰여 있는 2021년. 벌써 2021년이라니. 시간은 참 빠르게도 흘렀다.


올해는 우리가 함께 보낸 여덟 번째 겨울이었다. 그 동안 나는 대학교에 입학했으며, 학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고, 날 걱정하는 이민형과 다투기도 했다. 생활비와 주거 문제까지 해결해주는 이민형에게 내 욕심으로 다니는 대학교 학비까지 맡길 순 없었다. 감당하기 힘든 학비 때문에 4년 만에 졸업할 것을 6년이나 다녀야 했지만 내겐 마땅히 그래야 할 일이었다.


이민형은 그런 게 싫다고 했다. 남들처럼 똑같이 선을 긋는 일. 내게는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마크라 불리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그렇게 부르는데도. 나만 부를 수 있는 이민형이라는 이름이 그의 애칭이 되었을 때쯤, 우리는 키스를 하고 가끔은 섹스도 했다. 이민형은 내 세상의 전부였고, 내 세상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이민형의 소개로 면접을 보러 다녔다. Mark Lee. 인맥으로 채용되는 일이 다분한 사회에서 나는 그 이름 덕을 톡톡히 봤다. 좋은 조건의 회사에 파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입사한 것은 분명 나의 능력 때문만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첫 단추를 잘 꿰더라도 내가 증명하지 못하면 도태되는 사회였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 바쁜 일상을 보냈다. 정신 차려 보니, 어느새 나는 내 몫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많이 늦네..."


잠시 과거를 회상하다 습관처럼 시계를 확인했다. 오랜만에 같이 저녁을 먹기로 했지만 이미 저녁 시간은 훌쩍 지난 지 오래였다. 와인 하나가 덜렁 놓인 식탁을 바라보다 해동시켜놨던 스테이크를 다시 냉동실에 집어넣었다.


"연락이라도 좀 해주지..."


최근 경영을 배우기 시작한 이민형은 자주 바빴다. 툭하면 전화를 받고 나가기 일쑤였다. 집에서 결혼을 부추기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아마 이민형은 감쪽같이 숨겼다고 생각하겠지만 방문 너머로 들리는 통화 소리까진 어쩌지 못했다.


그래도 이민형이 딴맘을 먹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되려 걱정이 앞섰다. 이렇게 전화를 안 받은 적이 없었는데... 이미 수십 번은 눌러본 통화버튼을 다시 한번 눌렀다. 긴 신호음이 불안하게 이어졌다. 귀에 핸드폰을 대고 가만히 그 소릴 듣고 있는데,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헬렌?"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가끔 옆집 헬렌이 찾아오곤 했다. 과일을 주러 왔다거나 그릇을 빌리러 왔다는 쓸데없는 이유뿐이었지만 사실 빗소리를 싫어해서 그렇다는 걸 알았다. 오늘도 데이빗이 안 들어왔나? 별 생각 없이 문을 열었다가 나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문밖에는 희미하지만 익숙한 사람이 있었다.


"또 보네요.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민형과 똑 닮은 외모를 가진 그녀는 한 십 년 전쯤에 그 남자 집에서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하느님 맙소사. 이미 다 알고 찾아온 건지 그녀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중얼거렸다. 문을 붙잡은 손가락이 벌벌 떨렸다. 다시 닫아야 한다는 걸 알았으나 충격을 받은 탓에 몸이 생각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사진 받아보고 내가 얼마나 기가 막히던지."


그러는 사이 그녀는 우아한 손짓으로 문을 열어젖혔다. 활짝 열린 문은 그 어떠한 것도 막지 못했다. 나를 경멸하는 눈빛과 헐뜯는 말, 그리고 누군가의 무력 행사까지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엄청 고민했어요."


그녀의 옆으로 익숙한 그림자가 졌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어느새 내 앞에 서 있는 김실장을 멍하니 바라보다 나는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이건 꿈이야... 그러나 부정하기도 전에 손목이 휙 붙잡혔다.


"모두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게 가장 좋지 않겠어요?"


김실장이 하얀 손수건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한국 드라마에서 많이 본 광경이었다. 드라마에서는 1초 만에 쓰러지던데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랬으면 좋았을 걸.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 너무 잔인했다.


"마크한테는 한국으로 돌아갔다고 얘기할게요."


내게 모든 사랑을 줬던 이민형에게도, 그리고 그 사랑을 끝내 배신한 나에게도.


"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하면 이해할 거예요. 똑똑한 애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사랑한다고 말해줄 걸. 8년이나 그런 사랑을 받았으면서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그 말 한 번을 제대로 못 해준 게 후회가 됐다. 그러니까 민형아... 약 기운에 생각이 점점 희미해져 갔다. 다음에 다시 만나게 되면 그때는......







모든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 현대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문장을 아빠는 제멋대로 뜯어고쳤다. 모든 것은 폭력으로 정당화시킬 수 있다. 그 믿음 하나로 살아서 지난 날이 그렇게 더러웠나보다. 그리고 지금 그는 그 믿음을 내게서 찾았다.


"얘 사람 만들어놔. 때려서 안 될 거 없으니까."


그 말 한 마디에 나는 온몸에 멍이 들었다. 너무 아파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방에 꼼짝없이 갇혀서 하루가 가는지 이틀이 가는지 모르는 채로 누워있기만 했다. 그러다 점점 멍이 빠질 때쯤엔 같은 일이 또다시 반복됐다. 나는 또 멍이 들었고 피가 났다. 엄마는 상처 위에 착실하게 연고를 발라주고 약을 먹였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내가 그렇게 큰 잘못을 했는지, 수백 번 곱씹어봐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끔찍했다. 아무리 자주 맞아도 맞는 게 괜찮아지진 않았다.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다. 조금만 더 그랬다면 진짜 미쳐버렸을 텐데. 미치기 직전의 나를 구원해준 건 예상 밖의 인물이었다.


"제발 그만 좀 해! 내가 언제까지 참아야 되는데!"


아빠가 쥐고 있던 골프채가 날아갔는지 서재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구석에 틀어박혀 벌벌 떨고만 있던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귀를 막은 손 틈새로 격앙된 정성찬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씨발 지겨워 죽겠어. 맞는 소리, 패는 소리 다 듣기 싫다고."

"이, 이 새끼가...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둔탁한 마찰음이 들렸다. 그렇게 애지중지 키우던 정성찬을 설마 때렸을까. 정말 미쳤는지 그 상황에서도 그게 궁금했다. 나는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정성찬의 왼쪽 볼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래. 차라리 날 때려. 누나 말고."

"누나? 난 키워준 은혜도 모르는 버러지 같은 년 네 누나로 들인 적 없다."

"그걸 왜 아빠가 정해? 내가 알아서 해."

"이놈 새끼가,"


정성찬이 맞는 걸 두 번은 참을 생각이 없던 엄마가 울면서 뛰어들었다. 귀한 제 아들에게 손댔다는 이유로 울음소리가 떠나질 않았다. 성찬아. 내 새끼. 정성찬은 제 엄마가 쓰다듬는 손길을 밀어내고 나에게 다가왔다. 쪼그려 앉아있는 내게 손을 내밀고 제대로 걷지 못하는 나를 부축했다.


"미쳤어? 왜 애를 때려. 왜!"


엄마가 처음으로 울부짖었다. 뺨 한 대는 참을 만하던데. 엄마는 그걸 못 참아서 그렇게 무서워하는 남편한테 대들었다. 이런 게 진짜 사랑이구나.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모성애를 눈앞에서 목격하고 나니 내 존재는 전보다 더 보잘것없어졌다. 나는 얼마나 하찮길래 낳아준 사람에게도 버림받은 걸까.


"네가 너무 부러워."

"......"

"부러워서 미칠 것 같아."


누가봐도 열등감에 찌든 말이었다. 그러나 정성찬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내 방까지 데려다줬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건지 도통 속을 모르겠다. 이윽고 정성찬이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며칠째 갇혀있기만 한 이 공간이 지겨워 죽을 것만 같았다. 지금이 몇 월 며칠이더라. 멍하니 천장을 보고 누워있는데 정성찬이 다시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양손에는 연고와 밴드를 들고서.


"약 발라. 흉지기 싫으면."

"......"

"발라줘?"

"...됐어."


내 퉁명스러운 말투에도 정성찬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침대에 걸터앉아 찢어지고 베인 상처들에 연고를 발랐다. 거절하려다가 말았다. 정말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어서. 나는 가만히 누운 채 눈을 감았다.


정성찬의 손길은 투박스러운 엄마의 손길과는 사뭇 달랐다. 그보다 조금 더 섬세하고 연해서 간지럽기까지 했다. 우리가 이런 사이는 아니지 않나?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대체 뭘까. 그것부터 시작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쓸데없는 생각이 도무지 끝나질 않아 나는 결국 눈을 떴다. 형광등을 등진 채 상처 찾기에 여념 없는 정성찬을 바라봤다.


"많이 컸다 너."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마지막으로 봤던 그 여름, 그때도 훌쩍 큰 모습에 놀랐던 것 같은데. 그때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달라진 정성찬은 이제 완전히 앳된 티를 벗었다. 얼핏 듣기론 벌써 회사 일을 배우고 있다고 했다. 김실장과 함께 일한다는 걸 보면 아무래도 진짜 회사 일은 아닌 듯했지만.


"잘 지냈어?"

"응."

"한국엔 언제 들어왔어?"

"4월에."


정성찬 얘기를 귀동냥으로 들은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지금은 4월 말쯤 됐겠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내 방 창문으로 볼 수 있는 네모난 세상에는 그 흔한 나무 한 그루가 없었다. 바로 옆 빌라 사이에 깔린 고급스러운 보도블록과 예쁘게 빛나는 가로등이 전부였다.


"밖에 벚꽃 폈어? 예쁘겠다."

"...이미 다 졌지."

"벌써? 아쉽네."


내 말에 움직이던 손이 멈췄다. 연고 바르는 것에만 집중하던 눈이 나를 향했다. 저 표정은 대체 뭘까. 처음 보는 정성찬의 표정을 읽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그다음 말을 듣고 대충 어떤 의미였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8월이야."

"아..."

"엄마가 에어컨을 너무 세게 틀었나 봐. 더위도 못 느낀 걸 보니."


누가 기억을 오려낸 것만 같다. 사실 나는 정말 미친 게 아닐까? 정성찬이 애써 태연한 척 굴어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아아. 8월이구나. 이민형이 태어난 8월. 네가 그렇게나 좋아했던, 수박이 넘쳐나는 8월. 우리가 비를 맞으며 도망쳤던 8월.


민형아. 넌 지금 뭘 하고 있어?


이상했다. 눈물이 나질 않았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땐 이민형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났는데... 그제야 나는 지금이 8월이라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번에도 시간이 그렇게나 빨리 흐른 것이다. 행복했던 8년이 순식간에 사라졌던 것처럼.







정성찬이 한 번 뒤집어엎은 이후로 나를 건드리는 사람은 없었다. 허벅지를 시퍼렇게 채우던 멍이 사라질 때쯤, 나의 네모난 세상 속으로 낙엽 하나가 굴러들어왔다. 무더웠던 여름이 지나고 벌써 가을이 된 것이다. 이번 겨울엔 눈을 밟을 수 있으려나. 고정된 인테리어 창에 찍힌 손바닥 자국이 살려달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반복되는 일상은 무료하고 지루했다. 그 작은 방에 갇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책장에 꽂혀있는 책을 읽는 것뿐이었다. 하루는 쓸모도 없는 자기계발서를, 어느 날은 플라톤의 철학서를, 또 어느 날은 공매도에 관한 경제서를 읽었다. 과거에 읽었던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었다. 구분하지 않고 읽어도 모자랐다. 책장에 꽂혀있던 책을 거의 다 읽어갈 때쯤, 어떻게 알았는지 정성찬이 나를 찾아왔다. 양손에는 책을 이만큼 들고서. 그때 가져왔던 연고만큼이나 반가운 존재였다. 나는 그것들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렀다.


비록 나는 네모난 세상 밖으로 나가지 못했지만 책으로 배운 세상은 충분히 넓었다. 너무 많은 책을 읽어 마치 이 세상을 다 알 것만 같은, 이치에 통달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때, 나는 세상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자의는 아니고 목적이 분명한 타의였다. 그 목적이 무엇인지는 자리에 앉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나재민입니다."


무려 30분이나 늦어놓고 간단한 인사를 건넸다. 쌀쌀한 날씨에 코트를 입은 그는 생각보다 멀끔한 행색이었다. 반듯한 인상에 갈색 생머리가 잘 어울렸다. 단번에 잘생겼다고 말할 수 있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생각했다. 이건 또 몇 억짜리 거래일까. 차에서 내리기 전 신신당부를 하던 엄마를 생각하면 최소 몇백 억은 될 것 같은데. 여러모로 데릭보단 나았다.


"많이 늦으셨네요."

"숙취가 심해서요."

"술 좋아하는 남자는 별론데."


그 말에 나재민이 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처음 본 사람 눈을 그렇게 쳐다보는데 사나운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인상 자체가 부드러워서 그런가보다.


"술을 좋아하진 않아요. 마실 일이 생기는 거지."

"그렇구나."


다소 심심한 내 반응에 나재민이 슬쩍 웃으며 말했다.


"안 믿는 눈친데."

"네. 변명처럼 들려요."

"저 별로 마음에 안 드시나 봐요."

"아뇨. 잘 생겨서 좋은데요."


퍽이나 그런 얼굴이겠다. 아마 나재민이 보는 내 모습은 도살장 끌려온 소와 비슷하지 않을까. 나에게 소중한 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아서 이런 저항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 좋은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메뉴는 제가 마음대로 시켰어요. 하도 안 오셔서."

"잘했어요."


미안하라고 한 말에 난데없는 칭찬이 돌아온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잘했다 못했다 평가를 하는 모습에서 상류층 특유의 태도가 엿보였다. 꼭 예전 정재현을 보는 것 같다. 왜 이렇게 익숙한 느낌이 들지. 직원을 불러 와인을 주문하는 모습에서, 빈 물컵에 물을 따르는 모습에서, 낯설지 않은 분위기가 풍겼다.


"와인은 좋아하시나 봐요."

"뭐. 비슷해요. 오늘 같은 자리에 빠지면 아쉬우니까."


눈치가 없는 건지 모르는 척 하는 건지. 기분 나쁠 만한 대화에도 나재민은 그런 기색이 전혀 없었다.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는 나재민 때문에 조금 곤란해진 건 나였다. 어떻게 하면 거절 멘트를 받아낼 수 있을까. 서로 기분 상하지 않게 성격 차이가 좋을 것 같은데. 고민하는 사이 어느새 다가온 직원이 와인잔 두 개를 놓고 천천히 와인을 따랐다. 달짝지근한 와인향이 코끝에 맴돌았다. 나재민은 와인잔을 빙빙 돌리며 말했다.


"고민이 많아 보이네."

"네?"

"대놓고 까진 못하겠고. 내 입에서 나오게 만들려니까 좀 어렵고."

"......"

"맞죠?"


나재민이 부드럽게 웃었다. 이제껏 웃음 하나로 모든 일을 해결했다 해도 믿을 정도였다. 작정하고 그러는 건가. 의도인지 습관인지 헷갈렸지만 금방 알 수 있었다.


"소용없어요. 나도 작정하고 나온 거니까."

"......"

"이런 자리 딱 질색이거든. 약혼까지 갈 생각으로 나온 거예요. 원하는 게 있어서."


마시려던 와인잔을 그대로 내려놨다. 상대가 이렇게 적극적이면 나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와인을 홀짝이는 나재민을 가만히 바라보다 눈이 마주쳤다. 투명한 와인잔 너머로 보이는 나재민의 까만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다행히, 생각보다 더 괜찮네요."


와인이 입맛에 맞는지 나재민은 향을 끝까지 음미하며 천천히 잔을 내렸다. 직원들이 다가와 주문한 음식들을 세팅하는 동안 우리는 서로 바라보기만 했다. 나재민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도 같았다. 과연 내가 사랑하게 될 사람인지. 그것까진 못하더라도 그 흉내는 낼 수 있는 사람인지. 아무리 명분으로 하는 결혼이라지만 사람인지라 마음도 중요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만나는 사람 있어요?"


직원들이 모두 나가고 다시 고요해진 분위기 속에서 나재민이 물었다. 그 질문에 캐나다에 있을 이민형이 생각났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만날 일은 아마 없을 것 같으니까.


"아뇨."

"아. 없구나. 그럼 그 표정은 나 때문이에요?"


나재민이 난감한 듯 눈썹을 긁었다. 내 표정이 어떻길래. 와인잔에 비치는 내 모습을 바라봤을 때, 나는 내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앉아있다는 걸 깨달았다. 내 삶에서 이민형을 지워야 해서 그런 걸까? 아님 모든 게 아빠 뜻대로 되는 게 분해서?


"그럴 리가요."


여러가지 이유 중에 나재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내 몫의 스테이크를 대신 잘라주고, 부드럽게 대화를 이어가는 나재민은, 온 세상이 부서져 버린 내게 필요해 보였다. 누군가에게 기생하는 짓은 이제 좀 그만하고 싶은데. 몇 년을 돌고 돌아도 같은 걸 보니 팔자인 듯했다.


이제 그만 순응해야겠다. 어차피 내 마음에 꽉 차는 선택을 할 순 없었다. 현실에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가는 법도 배워야 했다. 헤어지는 순간까지 입가에 미소를 달고 있는 나재민. 나쁘지 않았다. 내겐 그 정도면 과분했다.







5초만에 결정된 나재민의 첫인상은 꽤 오래 유지됐다. 다정하고 따뜻하다. 그 느낌 그대로 나재민은 일주일에 세 번, 숙제처럼 해치울 법한 데이트도 괜찮게 이끌었다. 집에 있기 싫은데.. 내일도 만날 수 있어? 내 말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좋았다. 만나서 하는 거라곤 마주 보고 앉아 얘기하는 게 전부인데도 심심하지 않았다. 이런 친구 같은 부부 사이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했다. 건조하지만 외롭지 않으니까.


그러나 그 생각이 무색하게, 나는 나재민과 잤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호텔로 부른 의도를 모르지 않았다. 그날 침대 위의 나재민은 조금 거칠었지만 괜찮았다. 때리진 않았으니까. 다음 날 아침이면 다시 다정해졌으니까. 그렇게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해가 바뀌어서야 나는 호텔 밖을 나올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나쁘지 않았다. 그 집보단 나았다.


그날 이후 나재민은 종종 나를 호텔로 데려갔다. 자고 가. 데이트가 끝나도 집에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 약혼 날짜가 잡히고 나서는 거의 그곳에 살다시피 했다. 같이 룸서비스를 시켜 먹고 대화를 나눴다. 잠을 자고 또 같이 아침을 맞이했다. 내 물건이 하나도 없는 그 호텔에서 나는 안정을 느꼈다.


그리고, 다시 2월 14일. 하필 14일. 내 생일이 발렌타인데이라는 걸 알게 된 나재민이 그날 약혼하겠다고 말했단다. 매년 생일마다 이민형과 보냈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지만, 너무 바쁜 탓에 오래 가진 않았다. 다소 형식적이고 간단하다 해도 챙길 것들이 많았다. 약혼식을 가장한 상류층 사교모임이라는 걸 이 바닥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반드시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완벽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나를 죽이기라도 할 것 같던 엄마도 오늘만큼은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안녕하세요. 정여주라고 합니다. 그 인사 한 마디를 몇 번을 하는 건지. 테이블마다 돌아다니며 웃느라 정말 입이 찢어질 지경이었다. 금방 끝난 우리 집과 달리 나재민네 테이블은 끝이 없었다. 옆에 있는 나재민의 손을 꽉 붙잡았다. 이거 대체 언제 끝나? 조금 타이트한 예복 원피스와 보석 박힌 구두가 다소 불편했다. 커다란 다이아 목걸이와 머리 위에 무겁게 꽂힌 헤어장식도. 내 속삭임에 좀만 참으라며 나재민이 내 허릴 감싸 안은 순간이었다.


"정여주?"


익숙한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까만 수트에 어울리지 않는 오렌지빛 머리. 그 모습이 그때 그 생일파티에서 턱시도를 입고 있던 모습과 겹쳐졌다. 스물아홉의 김정우는 열아홉의 김정우보다 서늘한 인상을 풍겼다. 예전의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은 죄다 휘발된 것만 같다. 마치 다른 사람처럼.


"여주야. 오랜만이다."


아무말 없이 날 보고 있는 김정우 대신 옆에 있던 김도영이 다가왔다. 마찬가지로 예상치 못한 만남이었는지 평범한 인사말과 달리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조심스러운 질문에 나재민이 의아한 듯 물었다.


"뭐야. 셋이 아는 사이야?"

"어어... 고등학교 동창."

"진짜? 신기하네. 세상 은근 좁다니까."

"어... 그러게."

"근데 재현이형은 어디 가고 둘만 있어?"


정재현. 이름만 들었을 뿐인데 가슴에 무언가 내려앉았다. 꼭 체한 것 같은 느낌에 잠깐 자리를 피하려 했을 때였다.


"너...,"


어느새 다가온 정재현이 나를 보고 있었다. 살짝 인상을 쓴 채로. 너무 놀라면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던데. 정말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잘난 얼굴과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 진한 눈썹과 콧대까지. 그 얼굴이 진짜인지 훑어보느라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약혼자 옆에 서서 정재현을 바라보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것도 너의 생일이자 나의 생일인, 발렌타인데이에. 현실보다는 꿈에 가까운 장면이었다.


"어 형, 어디 갔다 와?"

"...잠깐 1층에."

"요즘 얼굴 보기 왜 이렇게 힘들어."

"바빠서 그렇지 뭐."


나재민과 얘기하고 있지만 시선은 나를 향했다. 목소리도 여전했다. 너 정말 정재현이구나. 눈물이 차올랐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좀 보고 싶어서 그랬나.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긴 했으니까. 하필 이렇게, 이런 순간에 만난 게 최악이긴 했지만 마냥 설렜다. 그러나 그다음 이어진 말에 눈물이 쏙 들어가고 말았다.


"아, 혹시 둘도 아는 사이야? 재현이형 우리 사촌형인데."

"...뭐?"


최악보다 더 최악이 있을 줄이야. 끔찍할 것 같지 않아? 짝사랑을 죽을 때까지 봐야 하는 거. 내 옆이 아니라 다른 사람 옆에 선 그 사람을 평생 본다는 거 말야. 지옥일 것 같은데. 언젠가 이민형에게 했던 말을 나는 지금 그대로 되돌려받고 있었다. 그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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