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화 - 











W.겨울안개









마음만으로도 죄를 짓는 기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태어나 여태껏 살아오면서 왕위를 이은 형님을 보필하는 것이 천직이라 여겼건만. 어느샌가 골칫덩이가 되질 않나, 이제 와선 형님의 사람이 되어야 마땅할 이를 마음에 품게 되었다. 이 마음을 멈춰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육신의 변화는 놀라웠고, 해방감은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신체가 평안해지자 자연스럽게 이끌리는 마음이 못내 불편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스스로 찾아가 자신의 불경을 고백해야만 했다. 감히 형님의 것이 탐이나 괴롭노라고. 이렇게 고하여 형님께서 죽으라면 응당 그리 해야겠다 생각한 것이다.





“저하. 세훈 대군 입시옵나이다.”





나인의 목소리가 동궁전 안을 울렸다. 세훈은 주먹을 말아 쥐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긴장감이 극에 달해 두통마저 따를 지경이었다.





“들라 하옵신다.”





이윽고 장지문 안쪽에서 내관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인들은 문을 열어 길을 터주었다. 문턱을 넘어가는 일이 이렇게나 힘이 들었던가. 세훈은 무거운 걸음을 옮겨 세자 앞에 섰다.





“형님.”





늘 어린양을 피우던 때는 언제고, 이제는 장성한 어른이 되어 경수의 앞에 선다. 경수는 늘 세훈을 마치 아이를 대하듯 어여삐 여겼다. 능력이 개화한 후로 한시도 편할 날이 없었던 아우를 있는 힘을 다해 아껴주었다. 경수는 잔뜩 쌓아 올린 궤를 책상 아래로 치우며 세훈을 향해 웃어 보였고, 그에 세훈의 죄책감은 더 커졌다.





“격조하셨습니까.”





딱딱한 말투를 써도, 경수의 눈은 아이를 보는 듯 포근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세훈이 자리에 앉자 뒤따라 들어온 시종이 찻상과 화로를 가져와 둘의 곁에 놓았고, 세훈은 손을 뻗어 경수의 찻잔에 찻물을 먼저 따라냈다.





“형님께서… 신전을 봉쇄하였다고 들었습니다만, 혹여 민석 도령께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니지요? 어쩐지 난연 궁 또한 봉쇄되었다 들어서… 자꾸만 불길한 생각이 듭니다.”

‘신전 앞을 보지 않았더냐. 후안무치한 자들에게서 도령을 보호하기 위함이니 염려 말 거라. 난연 궁은 대군이 고뿔에 들었다 하여 출입을 자제하라 이른 것이지 봉쇄하라 명한 적은 없구나.’





세훈의 말에 경수는 글로써 답했다. 세훈은 경수가 내민 하얀 종이 위의 글씨를 읽고선 씁쓸히 미소 지었다. 조반을 들기 전부터 신전의 봉쇄에 대해 떠들어대는 시종들의 말을 듣고선 심란해졌었다. 형님께서 나에게 화가 난 것은 아닐까 하고. 그 생각이 커지고 커져 이런 자리에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아… 그러십니까.”

‘너의 몸이 평안해진 것 같아서 참으로 다행이야. 그러니 그것을 들은 신료들이 신전에 모여든 게지. 신경 쓸 것 없다. 좋은 때를 노려 다시 출입을 허할 터이니.’





세훈은 아무 말도 없이 차를 홀짝였고, 경수는 자신이 쓴 종이를 화로에 던져 넣고 불쏘시개로 푹푹 찔러가며 뒤적였다. 세훈은 종이가 모두 까만 재로 돌아갈 때까지 뜸을 들이는 모양이 꽤나 불안정해 보였지만, 곧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형님.”





맑은 얼굴은 어릴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수려했다. 그 입에서 어떤 말이 튀어나올까 기대하는 경수의 얼굴에 미소가 걸려있었다.





“살면서 욕심을 부려본 적도 없습니다. 다만 아프고 괴로워서… 그래서 심술은 내었지요. 지금 와선 후회하고 있습니다.”





찻잔이 달그락거리며 받침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걱정이 번진 얼굴의 경수는 찻잔의 온기를 품은 손을 뻗어 떨고 있는 세훈의 손을 쥐었다.





“그런데, 자꾸만 욕심이 나서… 형님께… 해선 안 되는 이런….”





처음으로 맛본 평온함이 이젠 간절해졌노라. 철면피 같은 심정으로 형님께 감히 불경을 품었노라. 세훈의 목소리가 떨렸고, 경수는 떨고 있는 아우를 보며 안타까워했다.









*









대지가 희붐하게 깨어나는 시각. 경수는 긴급하고도 은밀히 전해진 소식에 발밑의 땅이 꺼지는 느낌을 받았다. 민석이 중태에 빠졌다. 어렸던 날 ‘그 사건’ 이후로 이렇게나 감정이 날뛰는 경험은 처음이다. 마음을 읽혀 당황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소중한 아우에게 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기쁨에 잠을 설칠 정도로 감격했었다. 그러한 일들이 지금 와서는 마치 꿈속에서나 있었던 일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저하. 잠시 누각에라도 다녀오심이 어떠신지요.”





이른 시간부터 깨어있었던 머리가 몽롱하다는 것을 늘 곁에서 자신을 보필하는 내관이라면 어렵지 않게 헤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경수는 그 말에 보던 궤를 내려놓아 보지만, 아직 펼쳐보지도 못한 궤들이 잔뜩 쌓인 채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열어둔 창 너머로 사관 하나가 새로운 궤를 잔뜩 받쳐 들고 동궁전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아침부터 빗발치는 상소는 누군가 사주라도 한 모양인지 모두 똑같은 주제를 담고 있었다.

건국 이래 실로 오랜만에 내려진 신탁과 그 신탁의 주인공인 민석의 대대적인 공표. 상소문은 저마다 그럴듯하게 꾸며댔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는 동일했다. 시기적으로 보았을 때도, 이것은 분명 누군가의 계획적인 소행임이 틀림없었다.

신탁이 있던 날 하늘에서 떨어진 자를 간자로 여기며 갖은 누명을 씌우지 못하던 때는 벌써 잊은 것인지. 지금 신전 앞은 고매하신 ‘민석 도령’에게 잘 보이고 싶은 후안무치한 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세훈 대군이 능력을 개화한 이래로 가장 강력한 위용을 과시했다는 것이 그 계기가 된듯하였다.

적장자이나 어린 나이에 말을 잃어버린 반푼이 세자 경수. 마찬가지로 정실의 자식이나, 능력이 개화했음에도 육신이 허약하고 자칫 폭군이 될지도 모르는 성정을 가진 세훈 대군. 그리고 자유자재로 능력을 발휘하나 출신이 천하여 감히 왕위에 올릴 수 없다며 지탄받는 백현 대군까지. 백성들은 이 셋을 일컬어 ‘망국의 징조’라고 칭하고 있었다. 이는 엄연히 왕실에 대한 모독. 불경죄로 엄히 다스림이 마땅하지만, 저자의 광대는 물론 코흘리개 아이들까지 모두 옥에 가두어 벌을 할 순 없는 노릇이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신탁과 함께 등장한 민석은 판도를 뒤집을만한 절호의 기회였다. 신께서 인정한 자. 이 땅 위에 그 누구보다 신에게 가까이 닿아있는 자. 존재만으로도 신성한 자. 백성들은 그런 인물을 원하는 것이다. 아무리 망국의 징조라 하여도 이런 수식어가 붙는 존재가 함께한다면 이 나라는 앞으로도 천세를 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믿음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경수는 민석에 대한 일을 이런 식으로 밝히고 싶지 않았다. 후에 좋은 날, 좋은 때가 도래하였을 때 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왕이라함은 한 나라를 이끌어 갈 하늘 아래 유일한 지존으로 그 위에는 누구도 존재해선 아니 될 터였다. 민석은 이를 완벽이 부정하는 존재가 될 것이다. 지고하신 왕보다 더 높이 하늘에 닿아있으며, 어쩌면 하늘 그 자체일 수도 있는 존재. 이는 왕권의 존엄을 뒤흔들만한 새로운 권력의 중심이 될 가능성을 배제 할 수 없음이라.

하지만 이 모든 사건의 중심인 민석이 새벽부터 갑작스레 중태에 빠져 생사의 기로에 놓여 있다. 이는 금강위를 통해 곧장 세자인 경수에게 가장 먼저 전해졌는데, 경수는 이 점을 참으로 다행이라 여겼다. 궁 안에서 민석의 존재가 눈엣가시라 여기는 이들도 적지 않을 터. 이번 사건은 누군가의 음해에 의한 것임이 분명했다.

경수는 즉시 어의를 신전으로 보냈고, 자신의 호위에게 일러 신전의 출입을 모두 봉쇄하였다. 민석의 용태는 오로지 호위의 입을 통해 경수에게만 전해지도록 수를 쓴 것이다. 이 사건이 누설되어 말하기 좋아하는 자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신전의 신용 또한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날이 밝아 아침이 되자, 세훈 대군의 소식을 들은 권력에 눈먼 자들이 승냥이 떼처럼 몰려와 신전의 봉쇄 조치에 대해 투덜거렸고, 몇몇은 다시 문이 열리길 기다리며 시종들을 시켜 자리를 지키도록 이르기도 했다. 호위는 그런 이들의 눈을 피해 보고하길, 중독의 증상으로 해독약을 찾는 중이라 하였다. 경수는 이 말을 들은 즉시 난연 궁에도 사람을 보내어 출입을 봉쇄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신시(15시~17시)가 다 되어서 아우인 세훈이 찾아왔다. 애처롭게 떨리는 세훈의 눈을 보며, 경수는 미래를 예감했다. 저 입에서 민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면 모두 사실대로 털어놓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자신의 아우는 전혀 다른 걱정을 하고 있었다.

민석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곧 왕위를 잇는다는 뜻. 아우는 그 자리에 오를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나, 본의 아니게 그리되었다는 것을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하고 우물쭈물하며 불안한 속내를 드러냈다. 하등 쓸모없는 걱정이었으나, 이날까지 살아오는 동안 왕위라곤 생각도 해본 적 없는 아우는 그것이 아주 큰 불경이라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지도 모른다.

조금의 거짓을 보태어 아우를 속이면서 양심의 가책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세훈이 알기 전에 민석을 살려내면 그만인 문제였다. 아직 적이 누군지 알 수 없었고, 여린 아우를 걱정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허울뿐인 자리. 경수는 애초에 세자의 자리에 세훈이 올랐다면, 저리 마음 아파할 일도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만 커졌다.









*









‘밤새 방안을 지키던 무녀 또한 같은 증세를 보이며, 각혈과 손톱 밑이 거뭇한 것으로 보건데 흡인에 의한 중독이라 진단하였습니다만, 아직 해독약을 찾지 못해 고전 하고있는 것으로…’





벌써 해가 가시고 어둠이 내렸다. 민석이 벌써 사경을 헤맨 지 하루가 다 되어 가는데도 해독약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금강위의 증언에 따르자면, 늘 조금 열어두고 자던 창마저 닫혀있던 상태였으며 최초 발견했을 때엔 방안에서 단내가 났다는 증언까지 확보되었다. 틀림없이 계획된 범죄. 전날 민석은 난연 궁의 붉은 화원에 들렸고 돌아왔을 땐 상당히 지쳐있는 상태였다는 사실까지 돌이켜보면, 이 모든 정황들은 오직 한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이렇듯 보기 좋은 증거들을 남기면서까지 민석을 해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경수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이 모든 것이 혹시 아우인 세훈을 해하기 위함이라 한다면, 아구가 맞을 것이다. 멍청한 범죄의 끝으로 참형이라도 내려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무나 찝찝하다. 허술하게 맞춰지는 조각들이 모두 거짓인 것 같았다.





“세자저하 듭시옵니다.”





난연 궁을 봉쇄한 병사들을 지나 안으로 들자, 먼저 달려간 내관이 경수의 방문을 알렸다. 그러자 안쪽에서 웅성거리던 나인들이 허리를 숙이며 문을 열어왔다. 이윽고 불 꺼진 붉은 화원 안에서 백현이 초조한 얼굴로 경수를 향해 달려 나왔다.





“저하! 민석 도령은…!! 민석 도령은 어찌 되었습니까?! 무사한 것입니까?!”





그의 범행에 조금 확신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대군. 저하의 앞이옵니다. 무례를 삼가시기 바랍니다.”





내관의 목소리에 입을 합 다문 백현이 천천히 손을 모아 허리를 숙였다.





“…저하를 뵙사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업신여겨지던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여 겉모습만큼은 번듯하게 차리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나 손가락질을 당하는 것을 싫어하여 늘 완벽한 복장과 자세를 유지했건만, 지금의 그는 잔뜩 흐트러진 모양새였다. 무엇이 그를 저리 만들었을까.

두 사람은 곧 화원에 작은 불을 밝혀 화로를 곁에 두고 마주 앉았다. 탁자 위로 붓과 벼루. 그리고 종이가 올라왔으며, 경수를 보필하던 내관이 먹을 준비하여주는 것을 끝으로 둘에게서 뒤로 돌아섰다. 그러자 화원에 시립해있던 모든 시종들이 두 사람을 보지 않으려 눈을 감고 등을 돌렸다.





‘먼저 묻겠네만. 나는 그대에게 민석 도령에 대한 일은 조금도 알리지 않았건만, 그대는 어찌 나에게 도령의 안위를 묻는 것인가.’





경수가 글을 쓴 종이를 백현에게 내밀며 화로를 향해 턱짓했다. 지금부터 오고 가는 대화는 모두 없었던 일이 되어야 했다. 등불을 하나만 걸어놓은 탓에 실내는 어두웠지만, 경수의 두 눈은 요요히 빛나고 있었다.

백현은 받은 종이를 읽고선 경수의 지시대로 화로에 넣어 즉시 태웠다. 말을 잃은 세자와의 밀담은 이렇듯 비밀스럽게 이루어져야만 했다.





‘이미 다 알고 오신듯하니 사실만을 적겠습니다. 실은, 민석 도령께 제 사람 하나를 붙여두었습니다만 그자가 금일 새벽 두통을 호소하며 위험을 알렸습니다. 훈련받은 자라 목숨에는 지장이 없으나, 아직 요양 중에 있습니다. 그자가 이르길. 독의 단 향을 감지했다 하였습니다.’





기다리던 답문을 받은 경수의 표정이 더욱 짙어졌다. 길게 숨을 내뱉고 종이는 또 곧장 화로에서 몸을 태웠다.





‘나 또한 ‘붉은 지옥’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독이라면 이 뜬소문 같은 이야기의 핵심이 아니 더냐.’





줄곧 하고 싶었던 말은 바로 이것이다. 너의 범죄인가 하는 것.





‘억울합니다. 저의 손은 눈처럼 희다는 것을 믿어주십시오.’





답문을 쓰는 백현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이윽고 종이를 건네고 난 다음엔 붓을 내려놓고 맨손에 얼굴을 묻었다. 경수는 그의 행동을 하나하나 유심히 살폈다. 다른 배에서 나왔다고는 하나, 같은 피를 받은 형제. 세훈에게 하는 것만큼의 정은 없었다 하여도 똑같은 아우였기에 그를 의심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세훈의 절망을 눈앞에서 본 경수는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다.





‘눈처럼 희다니 어불성설이구나. 그대의 손에 나의 사람도 몇은 명을 달리했지.’

‘질책하시렵니까.’

‘모든 것이 그대를 범인이라 말하고 있네. 내게 있어서 그대의 말을 믿는 것은 힘든 일임이 자명하지 않은가. 또한, 그대가 내내 숨기고 있던 능력에 대해서도 알고 있네. 이제 또 무엇을 더 숨기고 있는가. 두려운가? 무엇을 위해 도령을 해 하려 했는가?!’





필체가 점점 흐트러졌다. 숨결마저 거칠었다. 휘갈긴 종이를 던지듯 건네자, 백현은 지친 얼굴로 글을 읽었다. 종이를 화로에 던지고 다시 붓을 든 백현이 아-. 하고 소리를 냈다. 자신을 믿어 줄 사람이 있긴 할까. 갑갑해진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아 숨을 몰아쉬며 빈 종이를 자신의 앞으로 당겨왔다.





“아닙니다. 전… 전 아니에요. 저하… 제가 아닙니다!”

“큼!”





백현이 소리를 내자, 뒤돌아서 있던 내관이 헛기침을 뱉었다. 백현은 눈에 띄게 초조해했다. 성마른 한숨을 내쉬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가 다시 등받이에 기대었고 고개를 숙였다가 손으로 얼굴을 쓸고 다리를 떨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귓가와 목덜미가 그의 감정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었다.





‘그대가 아니라는 증좌는 어디에 있는가?’

‘지금 저의 종들이 밖에서 은밀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신다면, 범인을 색출하겠습니다.’

‘범인이 범인을 색출하겠다 하는 것인가.’

“저하!”

“말씀을 삼가십시오. 대군.”





내관이 맡은바 소임을 충실히 수행하자, 백현의 눈가가 붉어졌다. 어차피 자신의 말은 듣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대군이라고는 하나, 출신이 천하여 모두에게 업신여겨졌던 어린 날을 떠올리면 아주 틀린 예상은 아닐 것이다. 고갤 들어 경수의 눈을 마주해보지만, 어두컴컴한 실내에서 보이는 것이라곤 더욱 짙은 어둠뿐이다.





‘증좌를 가져온다 한들 저를 믿어주실 것 같지 않습니다. 세훈 대군을 투기하여 민석 도령을 해하려 했다. 그리 말씀 하고 싶겠지요. 좋은 기회가 되겠군요. 또 이리 당하게 되었습니다. 제 어머니처럼 말이지요. 그렇지만 저는 그리 쉽게 당하고만 있지 않겠습니다.’





경수를 노려보는 눈에 어린 독기가 스몄다. 그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다. 경수는 가만히 백현을 바라보다가 무언가를 쓴 종이를 들었다.





‘눈에 귀(鬼)가 있으니, 마주하는 자는 마음이 어지러질 것이다.’





글을 읽은 백현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경수는 곧장 종이를 태웠다. 천천히 일어나는 그를 따라 백현의 시선이 점차 올라갔다. 검지를 코앞에 대고 조용히 하라는 뜻을 밝힌 경수의 눈썹이 처져있었다. 곧장 다가온 그가 백현의 어깨를 강하게 잡고 또 토닥인다.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인지 의아하게 생각한 백현이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난연 궁의 문이 먼저 열렸다.





“저하께서 나가시고 난 후에는 봉쇄를 철회합니다. 그럼 대군. 평안하시옵소서.”





내관의 말을 끝으로 동궁전의 사람들은 모두 물러났다. 비로소 구름 뒤로 모습을 감추었던 달님이 나타나 조용히 침묵에 잠긴 붉은 화원을 비췄다. 한참이나 세자가 빠져나간 문을 바라보던 백현은 불현듯 생각난 것이 있는지 방으로 달려갔다. 갑작스런 이동에 시종들이 우왕좌왕하며 쫓아갔으나, 백현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소란스럽게 방문을 열어젖히고 서랍을 뒤져 나온 종이를 펼쳤다. 봉쇄가 되기 전 난연 궁의 기둥엔 화살이 하나 날아와 꽂혔었다.





‘화무십일홍. 총명한 눈이 떠지고, 나라를 어지럽히는 요사스런 꽃은 모가지를 떨어트리니. 멸절이라.’





화살엔 종이가 매어져 있었는데,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라 여기며 이러한 짓을 벌인 자를 벌하리라 생각하고 두었던 것이다. 경수가 써 내린 의미를 알 수 없던 문장이 사건의 실마리가 되어 이렇게 맞아떨어졌다.

뒷골이 버석하게 당겨왔다. 고갤 젖히고 천정을 바라보는 눈에 붉은 핏대가 움틀거렸다. 끓어오르는 분노가 울대를 타고 토해내듯 씩씩대는 숨소리로 번져나갔다. 눈앞이 캄캄해질 때까지 온몸에 힘을 주고 떨어댔다. 백현은 주변을 둘러보며 어둠을 응시했다. 빛이 한 자락도 없는 곳에 만연한 어둠이 백현의 시야를 가리려는 듯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하지만 백현은 주먹을 굳게 쥐고 두려움과 같은 어둠을 노려보았다.





“일어나라.”





시립해있던 시종들이 흠칫 놀라 백현을 올려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백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신의 발치를 응시하는 그의 시선이 곧 한 점을 향해 모아졌다.





“너의 주인이 명하노니, 일어나라!”





백현의 고함소리에 어둠 속에서 꿈틀대던 것이 형상을 이루었다. 빛과 어둠을 이루는 것이 무엇인가. 백현은 빛의 심연에서 줄곧 느껴왔던 것을 이끌어냈다. 그것은 백현의 그림자로부터 시작되어 하나의 개체로 형상을 갖춰내기 시작했다. 새로운 능력이 개화했다.

노기가 역력한 얼굴이 그림자를 향했다. 분노가 끓어대는 눈이 형상을 노려보았다.





“네겐 눈이 없으렸다. 편리하군. 능력을 숨긴 형제가 있다. 찾아라.”





분노에 찬 손이 떨리며 방향을 지시하듯 밖을 향했다. 갓 태어나 처음 주인의 명을 받은 그림자는 주인의 지시대로 밖을 향해 날아가더니 순식간에 몸을 찢어 제각각 흩어졌다.

익숙지 않은 힘을 사용한 탓인지 현기증이 일어 휘청댔고, 시종들은 놀란 눈으로 백현의 팔과 몸을 붙들었다. 그 손길을 매섭게 쳐낸 것은 백현이었다. 백현은 자신의 두 발로 몸을 지탱해 서야만 했다. 그것이 자신의 숙명이라 여긴 것이다.





“궁에 불을 밝혀라! 한 조각의 어둠도 허락지 않겠다!”





핏발이 선 눈으로 환하게 밝혀지는 궁 안을 둘러보았다. 백현은 자신에게만 그림자가 없음을 확인하고는 비소를 흘렸다.









*









밤이 깊었지만, 신전 앞을 지키는 군은 돌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궁의 법도에 따라 외부인은 모두 퇴궁하여 이제 신전 앞을 소란스럽게 하던 이들도 모두 물러갔건만 봉쇄는 여전한 조처였다. 또다시, 헛걸음을 한 세훈은 떨어지지 않는 발을 천천히 옮겨 처소로 향했다. 낮 동안 조금 울었던 눈이 아직도 부어있는 것이 느껴졌다.

형님이 자신을 아낀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관대할 줄은 몰랐던지라 오히려 더욱 가슴이 갑갑했다. 어둡게 불이 꺼진 신전이 등 뒤로 점점 더 멀어지고, 슬슬 오기가 피어올랐다. 세훈은 처소에 도착하자마자 먹을 갈았다. 답지 않은 짓을 하려니 한숨과 웃음이 동시에 터졌다.

소매를 다른 손으로 걷어쥐고 종이 위에 붓을 세웠다. 붓끝에 검은 먹물이 모여 금방이라도 낙하할 듯했다. 세훈은 붓을 다시 벼루로 가져가 담뿍 머금은 먹을 벼루의 가장자리에 긁어냈다. 막상 시작하려니 망설여졌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은 듯 다시 새하얀 종이 위로 붓을 가져갔다.





‘나비같이 팔랑거리며 다니길 좋아하는 것 같아 보였는데, 갑자기 갇힌 신세가 되었다 하니 염려가 되어 몇 자 적습니다. 처음 근신을 명 받았을 때도 많이 힘들어했다고 들었습니다만, 또 이리되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래서 생각해본 것인데, 혹시 꽃내가 그립다면 제가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형님께선 보호를 위함이라 하셨으니, 밖에선 제가 보호해드리겠습니다. 나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시다면 답신으로 보내주시길 바랍니다. 그러고자 하는 마음이 없더라도, 내내 답을 기다릴 저를 위해 한 글자라도 적어 보내주시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듯합니다. 그럼, 좋은 화원을 미리 봐두고 기다리겠습니다.’





세훈은 직접 쓴 편지를 다시 읽어보며 미소 지었다. 어릴 적 곱게 생겨 꽃 같다는 말을 들은 것도 같은데, 작은 손을 꼭 붙잡고 저에게 화원은 어디 있냐 묻는 민석을 놀려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그의 얼굴엔 기분이 그대로 드러나니, 분명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겨우겨우 좋은 말을 골라 하겠지. 세훈은 웃음을 지우지 못하고 봉투를 봉했다. 서찰을 쓰고 또 그 답을 기다리는 일은 썩 괜찮은 기분이라. 그리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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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작품은 요랑(@xiu_suming), 겨울안개(@mist0221)가 릴레이로 연재합니다.

연재일은 매월 8일과 28일이며, 해당 회차 작성자의 포스타입에 업로드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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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편 – 추후업로드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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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많이 늦었는데요............(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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