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휴, 00님. 그걸 왜 00님이 해요! 이리 줘요."


 종종 쓰레기통을 비운다. 사실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나는 건강한 성인 남성이고, 걸어 다닐 수 있는 튼튼한 두 다리 뿐만 아니라, 뭔가를 잡을 수 있는 큰 두 손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 지금 깜짝 놀라 ‘하지 말라’는 투로 말씀하시는 여사님의 의도는 그런 게 아니다.


 내가 일하는 곳 중 하나는 건물 두 개를 통째로 사용한다. 때문에 건물을 청소해주시는 분들이 계신다. 오해하지 마라. 건물이 더럽다거나, 쓰레기통이 자주 넘친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니까. 


 다만, 나는 이따금 내가 업무 상 자주 사용하는 층의 쓰레기통이나 휴지통이 얼마나 찼는지, 뽑아 쓰는 티슈가 얼마나 남았는지, 혹은 두루마리 휴지가 얇아져서 교체가 필요하지는 않는가 생각 날 때 한 번쯤 확인하는 편이다.


 "아, 그냥 보여서 했어요."


 가볍게 웃으며 이야기한다. ‘보여서 했다’고. 그분들의 일을 빼앗고 싶거나, 혹은 고깝게 생각해서 한 행동은 아니다. 자주는 아니고 아주 이따금 운동 삼아 건물 안을 걷다 보면 그게 가끔 보일 때가 있다. 그러면 조용히 비운다. 아무도 모르게 하려는 의도는 없다. 물론, ‘내가 이런 사람이야’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일도 아니다. 다만 ‘보여서 했을 뿐’이다.


 대학생 때의 일이었다. 1학년 1학기는 같은 고향 출신 선배와 함께 기숙사를 썼었는데, 한 학기가 다 지나고 여름방학이 되자 그 형은 ‘너도 다른 선배와 살아봐야 하지 않겠냐’며 다른 선배와 살 것을 권했다. 서로가 싫어서가 아니라 또 다른 사람과의 새로운 생활을 위해 우리는 각자 다른 방을 쓰기로 했다. 


 "00아, 이번에 복학하는 선배가 있는데 진짜 좋은 분이야. 우리 그 분이랑 방 써보지 않을래?"


 동아리 활동으로 만난 선배는 자기가 잘 아는 형이 이번에 복학을 한다며 같은 방을 쓰자고 했다. 어차피 3인 1실이고, 그 선배는 참 좋은 형이었다. ‘그런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 말하는 분이라면 분명 괜찮은 분이겠지’ 생각하면서 ‘좋다’고 말했다. 


 아직도 기억난다. 네이트 온 메신저에서 처음 만난 선배는 나에게 ‘00인 어떤 음식 좋아해?’라고 물었고, ‘저는 치킨 좋아해요’라고 말하자 ‘치킨 좋아하는 사람 치고 나쁜 사람 없는데, 00인 좋은 사람이구나’ 선배는 그렇게 말했지.


 선배는 그렇게 말했다. 내가 다니던 학교 기숙사에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다. 보통 학번 순으로 소위 ‘왕고’ 선배, 그다음 학번인 사람이 ‘투고’ 그리고 당시 나 같이 군대를 아직 다녀오지 않은 1, 2학년 정도 되는 학번이 ‘막내’였는데, 보통 방의 빨래나 청소를 투고가 막내에게 가르쳐 주고 하는 식이었다. 방 청소는 물론이고, 빨래도 어느 정도 할 줄 알았던 나는 그래도 비교적 가르치기 쉬운 막내였다. 스스로 이렇게 말하기 뭐하지만, 거의 가르칠 것이 없던 막내였던 거지.


 그래도 뭐, 막내라인들 사이에서 불만이 없었던 것은 밤 11시쯤 출출할 시간이 되면 치킨 같은 것들을 투고 형이 시키고, 왕고 형의 카드가 그 손에 들렸기 때문이다. 덕분에 1학년 그 기간 동안 몸이 엄청나게 불어서 살을 아직도 1학년 1학기 때의 ‘나름’ 호리호리 하던 그때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먹을 땐 정말 즐거웠다. 돌아보면 왕고 형들도 그래봤자 이십 대 중반 정도였는데, 매번 돈이 어디서 나왔을까 생각하면 ‘그게 다 후배들 사랑하는 마음이었구나’ 생각한다.


 “그냥 보여서 했어.”


 그런 일이 있었다. ‘분명히 이쯤 되면 빨래 바구니에 빨래가 좀 쌓였겠지’ 생각하며 들여다보면 웬걸? 전혀 없었다. 문제는, 그게 계속 반복되었다는 것이었다. ‘같이 살자’ 이야기한 그 투고 선배가 하는 줄 알았다. “형, 빨래 제가 해도 되는데요.” 말했는데, 금시초문이라는 듯 "어? 네가 한 게 아니야?"라고 도리어 되묻더라. 알고 보니 빨래는 왕고 형이 돌린 거였다. ‘그냥 보여서 돌렸을 뿐’이라고 말했다.


 “빨래 뭐 누가 하면 어때? 괜찮아. 00이도 앞으로 선배가 되면 후배들만 시키지 말고 보이면 그냥 네가 해주고 그러면 된다.”


 누구나 다 안다. ‘그깟 빨래 누가 하면 좀 어때? 어차피 옷 넣고 세제 넣고 버튼 누르면 세탁기가 다 해주잖아’ 이야기하지만, 정작 ‘왕고’가 되면 ‘그러니까 네가 좀 해줘. 난 바빠’ 이야기하는 선배가 ‘그냥 보여서 했어’라고 말하는 사람보다 더 많다는 것을 기숙사를 굳이 살아보지 않은 사람도 다 안다.


 생각해보면, 그때 물들었다. 선배가 해준 이야기, ‘그러니까 00이 너도 꼭 나중에 선배가 되면 받은 것처럼 후배들에게 잘 해줘. 네가 먼저 보면 그걸 먼저 할 수도 있는 거야. 선배건 후배건 그게 보이는 사람이 하면 되’ 라는 말은 어느 새 내 머리와 가슴을 물들여서 학부시절과 대학원을 다니던 때, 그리고 지금 일을 하는 나에게까지 짙게 물들어 ‘그냥 보여서 하는 사람’이 되었다. 


 "와, 어떻게 매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운동을 하세요? 엄청 부지런하시네."

 "00씨, 저번에 보니까 영어가 굉장히 유창하던데, 어학연수라도 다녀온 거예요?"


 그런 사람들이 있다. 매일 같이 아침에 일어나 조깅을 30분하고 씻은 뒤 회사에 출근하는 동기라던가, 어학연수 한번 다녀온 적도 없는데 외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후배라던가 말이다. 도대체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부지런하고, 다들 능력자들인지. ‘같은 땅을 밟고, 똑같은 공기를 들이마시는 저 사람과 내가 다른 게 뭘까’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 있어서

붉게 읽히는 것일 게다.


저게 혼자서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


대추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장석주. ‘대추 한 알’ -


 대추가 저절로 붉어지지 않는다는데, 어디 대추뿐이겠나? 사람도 똑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늘도 시원하게 뛰고 왔어요’ 이야기하는 그 사람이, 탄성을 자아낼 만큼 영어를 유창하게 뱉어내는 내 동기가 저절로 그런 사람이 되었을 리 없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 아니던가? 그렇기 때문에 대추가 익어간다면, 사람도 똑같다. 우리는 익어간다.


 더 깨어있고 싶은 밤과 일어나기 싫은 아침을 마주하며 억지로 운동화 끈을 묶는 시간이 모여 ‘오늘도 조깅했어요? 대단하네’ 말을 듣는 아침이 되었을 테고, '아휴, 진짜 뭐라는거야?' 이마를 찌푸리며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그 순간이 쌓여 어느새 ‘와, 들린다’가 되고 '언제 그렇게 영어 공부를 했어?' 부러움을 사는 순간이 된다. 대추가 익어가듯 사람도 익어가고, 또 물든다. 아, 표현이 좀 어색하다고? 그래, 맞다. 우리는 보통 이런 모습을 ‘버릇’ 혹은 ‘루틴’이라고 부른다. 여기 이런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흑해의 한 해변에 어떤 금속이든 황금으로 변하게 만드는 마법의 돌이 있었다. 그 돌은 해변의 수많은 자갈 사이에 있는데, 돌을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은 직접 만져봤을 때 조금 더 따스한 온도의 차이를 느끼는 것 뿐이었다.


 "뭐? 그런 돌이 세상에 어딨냐? 순진하구먼."


 사람들은 콧방귀를 뀌었지만, 어떤 사람은 그 말을 듣자 가슴이 뛰었다. '그 돌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돌에 대한 일념 하나로 그는 즉시 흑해의 해변으로 달려갔다.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면서 수많은 돌들을 하나하나 만져보기 시작했다. 


 "이건 아니고... 이것도 아니네."


 자갈을 손으로 들어보고 차가우면 바다에 던졌다. 누군가가 그 모습을 봤다면 가여움에 눈물을 흘릴 만큼 노력은 눈물겨웠다. 쉬지도 않고 온종일 그 일을 했다. 한 달, 석 달, 1년도 넘고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는 시간이 흐르자 이제는 숙달이 되어 돌을 집었다 던지는 속도가 빨라졌다. 


 "앗, 이거다! 이거야!"


 그리고 기적처럼 어느 날 마침내 꿈에 그리던 마법의 돌을 집게 되었다. 돌이 뿜어내는 온기가 ‘나는 다른 돌들과 달라요’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기절할 듯 기뻤던 그가 환호성을 지르는 것도 잠시, 돌을 잡아들고 바다에 던져버리던 ‘습관’ 때문에 마법의 돌도 다른 어떤 돌처럼 던져버린 그의 손을 스스로 원망하면서 그는 집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 우화 '버려진 마법의 돌' -



 한 번이라도 해돋이를 본 사람이라면, 해가 뜨는 그 순간을 스케치북에 옮길 때 한 가지 색만을 사용하지는 않을 거다. 해가 지는 저녁노을을 가만히 지켜본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해는 갑자기 뜨거나, 아무런 변화 없이 한 번에 지거나 하지 않는다.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지만, 하늘을 서서히 물들이며 뜨고, 또 진다.


 혹시 새벽 일찍 일어나 해가 뜨는 그때의 하늘이 어떻게 변하는지 볼 자신이 없는 사람이라면, 해 질 녘 쯤 커튼을 걷어내고 잠시 하늘이 어떻게 바뀌는지 지켜봤으면 좋겠다. 단언컨대, 하늘이나 해가 오늘 마음을 바꿔먹지 않는 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바뀌는 장면을 보게 될 것이다. 그제야 ‘아, 진짜 물드는구나’ 생각하며 이 글을 다시 떠올리시겠지.


 어디 해가 뜨고 지는 일 뿐이겠는가? 두터운 외투를 입고 이제는 장갑에 목도리까지 ‘어추!’ 연거푸 외치는 겨울이 어떻게 당신의 볼을 빨갛게 물들였는지를 생각해보라. 모든 변화는 슬그머니 찾아온다. 모든 변화는 수줍다. 마치 거리를 수줍은 봄 처녀로 만든 벚꽃처럼, 어느새 찾아온 새치를 감추기 위해 물들인 어머니의 갈색 머리 같은 가을 낙엽처럼.


 마법의 돌을 휙 던져버린 그 사내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어디 있을까?’ 간절한 가슴으로 찾던 그 돌은 찾는 순간 매정하게 그의 곁을 떠나버렸다. 다리라도 달렸었나? 날개가 돋았나? 아니다. 따뜻한 온기를 느끼기 위해 수백, 수천 번은 더 차가운 돌을 던지는 그 동안 손이 물든 탓이다. 짜디 짠 바닷물 뿐만 아니라 던지는 버릇이 그의 손에 짙게 물든 거지.


 그래, 변화는 갑자기 찾아오는 게 아니다. 어쩌면 자연도, 사람도 모두 서서히 물든다. 좋은 버릇이건 나쁜 버릇이건 천천히 물든다. 하지만, 생각만큼 쉽게 빠지지 않더라. 그러니까 한번 잘 살펴봤으면 좋겠다. 나쁜 버릇이건 좋은 버릇이건 천천히 물들지만, 그걸 다시 빼는 데는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나는 지금 어디에 물들고 있는지, 또 나는 누구를 어떻게 물들이고 있는지 한 번쯤 살펴봤으면 좋겠다. 그래, 우리는 어느새 내가 몰랐던 색으로 물들고 있고, 또 누군가를 물들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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