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다는 것은 로키에게 단순히 취미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어두컴컴한 방에 갇혀 몇 시간이고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려야 했던 유년시절, 벌벌 떨던 그가 근처 책장의 먼지 쌓인 책에 손을 댄 것은 어쩔 수 없고도 당연한 일이었다. 퀴퀴하고 습한 종이 냄새가 얼굴로 훅 날아들었지만 그래도 로키는 그 안에 쓰인 글자를 곱씹고 곱씹으며 손으로 덧그렸고 팠다. 


그러면 시간이 꾸역꾸역 흘러갔다. 어린 로키는 몸을 잔뜩 웅크리고 못질이 되어 열리지 않는 창문 아래에서 책을 끌어안았다. 낮에는 햇빛에, 밤에는 달빛에 의지에 글을 읽었고 문장 속으로 도피했다. 그렇게 그는 글에 익숙해졌다. 좁은 방으로 돌아가지 않게 되었을 때에도 문득 느껴지는 철렁함에 책을 움켜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책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던 것은 단연코 그 방에 있을 적이었다. 여기저기 얻어맞아 터진 얼굴이 아플 때도 있었고, 손이 퉁퉁 붓거나 칼에 베여 종이를 제대로 넘기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좁은 방에서 그의 곁에 있어 주는 것이라고는 책뿐이었다. 그래서 로키는 누렇게 변색된 책을 안고, 읽으며 버텼다. 가끔은 얼굴을 파묻고 울기도 했다. 아주 가끔이다. 운 것을 들키면 더욱 끔찍한 일이 일어났으므로. 


그리고 기다렸다. 문이 열리기를, 부디 그가 얼른 화를 풀기를.



“…….”



좋지 못한 어린 시절은 회상할 적마다 입이 쓰다. 로키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에 옛날의 꿈을 꿨다. 그 방. 자신이 그의 심기를 건드리면 언제나 처박히고는 했던 방에 갇힌 꿈이었다. 무의식이 어떻게 작용했는지는 몰라도 꿈속에서는 방의 풍경이 실제보다 늘 어둡고 음습했다. 그래도 제법 빛이 들어오던 창문은 손바닥만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크기로, 품에 안고 읽었던 책은 글자라고는 없는 빈 페이지로 변해 등장했다. 마치 희망이 보이지 않는 이것이 그의 진실된 기억이었다는 것처럼.


그러면 로키는 그저 그곳에 무릎을 안은 채 가만히 있어야 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벽이 서서히 좁아져 저를 뭉갤 것만 같았기에. 그리고 어둠이 목을 졸라와 숨이 가쁠 때쯤이 되어서야 희미하게 복도의 나뭇바닥이 삐걱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그가 걸어오는 소리. 그 특유의 발을 질질 끄는 발소리가.


삐이걱. 삐이걱- 규칙적으로 나무판이 눌렸다가 떼지는 소리가 문 너머에 멈추면.... 마침내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고막을 쑤셨다.


‘쓸모없는 것.’


동시에 문고리가 철컥이며 돌아갔다. 로키는 입을 틀어막은 채 눈을 질끈 감아야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피하기 위해서.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서.




“…….”


로키는 침대에 누운 자세에서 손을 허공에 들어 올렸다. 공중을 멍하니 헤매던 손이 쫙 펼쳐지자 손가락 사이로 햇빛이 부서져 내렸다. 쏟아지는 빛이 눈을 시리게 만든다. 눈을 가늘게 뜨면 빛을 받아 도드라지는 손등과 손가락의 희미한 흉이 선명하게 잡혔다. 가뜩이나 씁쓸하던 입안이 한층 써졌다. 로키가 손을 내리고 옆으로 누웠다.


그렇게 한참을 뭉그적거리던 그는 몸을 굴려 침대의 양 끝을 다섯 번은 왕복한 뒤에야 간신히 이불 위에서 빠져나왔다. 휑한 주방까지 터벅터벅 걸어간 로키는 멍한 정신을 깨우기 위해서라도 카페인을 속에 집어넣기로 결심했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커피 머신은 이렇게 쏠쏠하게 써먹을 데가 있었다. 사용하지 않을 때가 더 많기는 했지만. 캡슐 커피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근처 카페의 무뚝뚝한 바리스타가 갓 내린 핸드드립만은 못했던 것이다. 거기다 카페에서 파는 페이스트리를 곁들이면 커피의 맛은 배가 되었다. 로키는 맛있는 걸 좋아했다. 이왕 먹는 거라면 맛있게 먹는 게 좋았다.


그래서 이 커피 머신은 딱 두 가지 경우에만 돌아갔다. 잔뜩 취한 다음 날 뭐라도 부어넣어 살아나야 할 때와, 오늘처럼 악몽을 꿔 아침부터 기분을 잡쳤을 때.


커피가 내려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로키는 슬쩍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거실이 보이고, 거실 너머 열린 침실 문 사이로 침대 끄트머리가 보인다. 거실에는 가구가 딱 네 개 있었는데, 소파와 테이블과 책장과 티비였다. 모두 디자인이 달라 아주 이상한 조합이었다. 뭐. 그런 걸 염두에 두고 고른 건 아니었으니까. 로키는 따끈하게 김이 오르는 컵을 들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시선을 책장으로 돌렸다.


그나마 가구 중에서 제일 공을 들인 것이 저거였다. 티비는 그냥 매장에서 보이는 제일 큰 걸 샀고(배송이 오자마자 그는 이 집에 두기에는 75인치짜리 티비가 너무 컸음을 깨달았다) 소파도 가구점에서 제일 큰 걸 샀다. 직원은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가죽과 컬러를 늘어놓고 로키가 모든 것을 한 번은 만져보게 시켰는데, 간신히 무난한 검은 소파로 결정을 냈다. 그리고 그쯤 되자 슬슬 무료함이 차오른 로키는 테이블은 아무거나 달라고 말했다. 커다란 걸로.



“그냥 제일 큰 걸로 줘요. 아, 티비보다는 안 커야 됩니다.”

“오, 그러세요? 혹시 TV 사이즈가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모호한 말에 직원이 친절하게 되물었고 로키는 눈을 좁히며 “거의 벽 만할 텐데” 라고 말했다. 직원의 입술이 일그러지려다 말았다.


“음, 손님. 벽 만하다는 게-?”



하지만 로키는 직원의 물음을 한 귀로 흘리며 다른 생각에 빠졌다. 그래. TV. 엄청 컸지. 정말로 벽 만해서 진열되어 있던 다른 것들보다 제일 먼저 눈이 가는 사이즈였다. 그리고 가격 때문에 무시했던 다른 TV로 잽싸게 눈을 돌리도록 하는 상품이기도 했다. 그러나 로키는 돈이 많았고, 저 대형 TV는 그가 처리하던 일에 비유하자면 중간급 간부의 목숨 값에도 못 미쳤다. 말한 바 있지만 이쪽 인물들의 목숨은 아주 비쌌다.


그리하여 로키는 흔쾌히 저 TV를 사기로 했다. 크면… 좋지. 뭐든. 그는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걸 달라고 했을 때 옆에 서 있던 직원이 아주 해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 기억난다. 손님의 키와 덩치를 생각하면 저게 딱이라는 둥, 아니, 덩치가 크다는 말은 아니다, 아주 슬림하시고 멋지시다라는 둥… 로키를 계속 추켜세우며 보이는 모든 것에 찬사를 늘어놓으려 했다.


계산을 하는 동안에도 귀에 걸린 그의 입꼬리는 내려오질 않았는데, 손님을 향한 지극한 서비스 정신이라기보다는 이 한 건으로 치솟을 자신의 보너스를 계산하느라 행복해 죽겠다는 그런 얼굴이었다.


닉이라는 명찰을 달았던 그 남자 직원은 로키가 “영수증은 필요 없습니다” 까지 말하자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


“역시 큰 게 좋죠. 뭘 좀 아시는군요.”


그 말을 들은 로키는 살짝 웃으며 대꾸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무렴. 크면 클수록 좋지. 뭐든.


닉은 정말로 감동한 얼굴로 당장 내일 배송이 될 것이며 기사가 첫 번째로 고객님의 자택에 방문해 설치를 할 것이다 최고의 서비스를 약속한다 하는 구구절절한 설명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더 했다.


아무튼, 그런 일이 있었다. 그리고 가구 가게에서도 로키가 대충 둘러본 뒤 “여기서 제일 큰 소파로 줘요.” 라고 말하자 직원의 얼굴에 비슷한 환희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지금은 곤란의 빛이 비치고 있었지만.


“고객님?”

“아.”


로키가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벽 만한 테이블을 달라는 제 요청에 곤란해 하는 직원을 보며 말을 쉽게 바꾸었다.


“소파보다 조금 작은 걸로요.”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최고급 대리석을 이용한 게 마침 딱 좋게 어제 들어왔거든요.”


대리석? 아니 그런 건 필요 없는데. 그냥 대충 유리판으로다가-


그러나 직원은 이미 몸을 휙 돌려 허둥지둥 걷고 있었다. 우수 고객이 마음을 돌리기 전에 팔아버리겠다는 의지가 잽싼 걸음에서 묻어났다. 그를 불러 세우려던 로키는 어깨를 으쓱해야 했다. 괜찮은가. 음, 괜찮겠지.


별일 있겠느냐는 마음이 된 로키는 매장을 꽉 채우고 있는 가구를 찬찬히 구경했다. 높낮이와 디자인이 다른 책상들의 진열 옆으로 사이드 테이블에 간접 조명들까지 여러 가구가 수두룩했다. 감흥 없이 휙휙 빠르게 넘어가던 로키의 시선이 멎은 것은 우뚝 서 있는 책장 하나를 보았을 때였다.



“…….”



로키는 숨을 들이켰다. 본 적 있는 책장이 있었다. 어린 자신이 까치발을 들고 어떻게든 손에 닿지 않는 책을 꺼내보려 노력하던, 어둠 속에서 더욱 높고 무섭게 보이던 그 책장이. 익숙한 옆판과 상부의 무늬가 시야에 박힌다.


환각인가. 로키는 무심하게 손을 들고 눈을 문질렀다. 하지만 거세게 눈가를 문지르고 눈두덩이를 꾹꾹 누른 뒤에도, 흐려졌던 시야가 본래의 또렷함을 되찾은 뒤에도 책장은 거기 서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테이블이 남아 있더군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환한 얼굴로 돌아온 직원이 물었고, 로키는 말없이 손가락으로 책장을 가리켰다. 그리고 들러붙은 듯 굳게 닫혔던 입술을 떼어내 한 음절 한 음절을 또렷하게 발음했다.



“저것도 줘요.”






*





“역시 맛없어.”



로키가 우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캡슐을 두 개나 사용했는데도 양만 늘었지 맛은 좋지 못했다. 슬픈 일이다. 로마의 단골 카페 바리스타에게 이걸 내민다면 차라리 자기네 카페 옆에 스타벅스가 들어오는 것이 낫지 이딴 걸 커피라 부를 수는 없다며 화를 낼 것 같았다. 로키는 머그컵을 대충 쥔 채 거실의 책장 앞으로 다가갔다. 텅 비었던 책장은 그가 서점이 보일 때마다 사들고 나온 책으로 꽉 채워져 있었다. 무심코 손가락으로 책장을 문질렀다. 이걸 산 건 지극히 충동적이었다. 기억의 그림자에게 홀린 것이기도 했다. 그 시절, 그 방에 있던 책장과는 단순히 디자인이 같은 것일 뿐인데.


잘 쓰고 있으니까 됐나. 로키는 어둡게 피어오르려는 상념을 밟아 죽였다. 머그컵 안 짙은 갈색의 물 -이것을 커피라 명명하고 싶지 않았다- 이 찰랑거렸다. 그래도 얼빠진 정신을 돌려놓는 데는 이 맛없는 음료보다 나은 게 없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쓰린 속을 부여잡고 카페가 문을 열기만을 기다렸어야 했는데. 로키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이런. 또 옛날 생각을.


쓰디 쓴 액체를 한 번 더 머금으며 그가 이번에는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TV를 켜 집안에 내린 적막을 거두는 것도 괜찮았지만, 창문을 열고 거리의 소음을 안으로 들이는 것도 제법 좋은 방법이었다. 아침에는 거리의 소음도 제법 들어줄 만 했기 때문이다.


로키는 창문을 활짝 열고 찬 아침 바람을 깊게 들이마셨다. 폐부 깊이, 폐포 하나하나가 시원한 공기로 깨어난다. 밤중에 쌓였던 탁한 기억이 말끔하게 가시는 것만 같다. 후. 느릿하게 숨을 뱉은 로키가 단번에 머그컵을 비웠다. 창틀에 가볍게 빈 컵을 내려놓고는 기지개를 켰다. 좋지 못한 꿈은 잊을 시간이었다.


공원으로 조깅이라도 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로키는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나흘 전 일어났던 사건 때문이었다. 젤라또 가게에서 토르를 만난 게 나흘 전이었다. 나흘이나 지났으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불안해졌다가 짜증이 났다가, 며칠 사이 기분은 아주 최악이었다. 엄청나게 예민한 타깃 때문에 저격 포인트만 네 번을 갈아야 했던 때와 맞먹었다. 저격 총을 그렇게나 여러 번 분해했다가 조립한 건 그날이 최고였다.


내내 로키를 괴롭힌 건 답 없는 의문들이었다. 토르 오딘슨과 나머지 일당이 이탈리아에서 미국까지 올 일이 대체 뭐가 있단 말인가? 비행시간도 만만치 않은데. 이곳에 온 목적이 분명히 있을 거였다. 하지만 로키의 고뇌는 돌고 돌아 매번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알 수 없음.


내가 알아서 뭐 해. 이미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지. 알 방법도 없고.


그의 이마에 주름이 지며 눈썹이 꿈틀거렸다. 매우 올바르고 합당한 생각이었다. 그들의 목적이 자신이 아닌 이상에야 이쪽에서 호들갑을 떨 이유는 없었다. 한 번 본 것으로도 우연이 거듭 겹쳤다고 봐야했다. 그리고 여생을 사는 동안 다시는 마주치지 않을 확률이 더 높았다. 자신이 토르의 소굴인 그쪽, 로마로만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런데 왜 자꾸 불길한 생각이 들까.


로키는 입술을 씹었다. 계속해서 씹었다. 조금만 건조해도 트고 갈라지는 그의 입술은 몇 번 깨물지 않아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붉어진 아랫입술을 혀로 느릿하게 쓸며, 로키는 뒷목을 주물렀다. 기지개로도 어깨에 내려앉은 묵직하면서도 찜찜한 느낌을 온전하게 떨쳐내기 어려웠다. 단순한 피로는 아니었다. 피로를 느낄 일이 없었으므로.



“하아… 그래. 신경 쓰지 말자.”



로키는 다짐처럼 읊조리고, 한 번 더 팔을 쭉 폈다. 그리고 고개를 옆으로 당겨 이 이상한- 불길하기까지 한- 느낌을 떨어내려 노력했다. 타박타박 발을 놀려 침실로 들어가기 전, 그가 힐끗 창문과 책장을 다시 보았다. 반쯤 잘린 구름이 창문 밖, 건너편 건물 위로 살짝 보였다. 좋은 날씨였다. 내내 방 안에 처박혀 이미 내용을 아는 책을 뒤적거리기에는 턱없이 아깝고도 좋은 날씨.


잠시 나갔다 오는 것 정도야 괜찮겠지.


로키는 그렇게 생각하며 침실로 들어갔다. 머리를 묶고, 셔츠에 팔을 꿰고, 지갑을 챙겼다. 그래. 저번이 이상했던 거야. 괜히 조바심 낼 필요는 없어. 그쪽에서 나를 알 리가 없으니까. 얼굴과 본명을 감추고 활동한 건 이런 걸 위해서였잖아?


생각하다보니 그간 전전긍긍했던 게 몹시도 멍청했던 것 같았다. 로키는 코를 찡긋하며, 기분 좋게 집에서 나왔다. 책장에 새 책을 채우기 딱 좋을 날씨였다. 그는 가까운 서점에 들르기로 마음먹었다. 안경을 쓴 후덕한 노인이 주인으로 있는 그 서점은 차분하고 고요한 분위기로 마음을 간지럼 태우는 구석이 있었다. 노인은 손님이 들어오든 말든 대개 자신의 독서에 열중했고, 계산을 할 때나 관심을 줬다. 이 또한 로키가 높게 점수로 치는 부분이었다.


무엇보다 그 서점은 센트럴 파크와는 정반대 쪽에 위치해 있었다. 젤라또 가게 근처를 누구들이 점령했다 해도, 서점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뜻이었다. 아주 아주 안전한 곳일 터이다.


로키는 가벼운 걸음으로 움직였다. 아파트 근처에서 몇 번 먹을 것을 내어준 적 있는 주황색 고양이를 발견하자 기분은 더 좋아졌다. 그는 고양이를 보면 운 좋은 일이 일어나고는 했던 것이다. 이탈리아에서도 그랬고, 이곳에서도 그랬다. (의뢰 중 검은 고양이를 봤던 날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특히나 방금 본 치즈 태비 고양이는 성격이 무지막지하게 더럽고 까탈스러워서, 밥을 줘도 하악질하며 신발과 바짓단에 발톱을 휘두르기 일쑤였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지 꼬리를 높이 치켜들고는 낭랑하게 ‘냥-’ 울며 친애의 표시를 하는 거였다.


세상에! 


바지에 달라붙은 고양이털에도 불구하고 로키는 슬쩍 웃었다. 그는 동물을 좋아했다. 이 세상에 쓰레기 같은 인간이 있다면 그건 바로 마피아거나 동물을 학대하거나 어린 아이를 학대하는 부류일 것이다. 오? 물론, 그는 단순한 킬러이므로 저 분류의 맨 앞에 속하지 않았다. 반박은 사양한다.


바지에 깊게도 박혀 잘 털어지지 않는 고양이털을 손으로 잡아 빼면서도 입술이 호를 그렸다. 우아한 초상화에 나올 법한 흐릿하면서도 분명한 미소는 로키가 코너를 돌고, 딱 맞춰 변하는 신호에 따라 횡단보도를 건너고, 마침내 서점에 도착해 부드럽게 문을 밀 때까지 입가에 떠올라 있었다. 따뜻하고 간지러운 책 냄새에 둘러싸여 새로 나왔다는 책을 둘러볼 때까지도, 까슬까슬한 책등을 연인의 피부를 문지르듯 쓸어볼 때까지도 그랬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리기 전까지는, 확실하게 존재했다.



“여기서 이렇게 또 만나네요.”



이런 미친. 그 귀엽지만 성격 더러운 고양이가 애옹거린 것은 행운의 표시가 아니라 사형 선고였군. 로키는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살면서 다시는 조우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겨우겨우 고민에 마침표를 찍은 참이었는데. 저를 비웃듯이 무참히 마침표가 뜯겼다. 고민은 다시 현재 진행형이 되어버렸다……



“오.”



로키는 간신히 한 음절만 토했다. 저번과 다르지 않은, 부드러우며 웃음기를 잔뜩 머금은 목소리가 살랑살랑 날아든다.



“놀라운 우연이에요. 그렇죠?”


씨발 이런 우연은 필요 없어. 로키는 또 생각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달큼한 목소리의 소유자는 로키에게로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책 냄새만 맡아지던 코에 시원하면서도 인상적인 향수 냄새가 더해졌다. 머스크인 듯 나무 향인 듯 무거운 향이었다. 로키는 버티지 못하고 책을 노려보던 것을 포기한 채 뒤로 돌았다. 그리고 살인 청부업자로서 쌓은 그간의 경험을 십분 발휘해…… 가까스로 눈에서 힘을 풀었다.


그의 뒤에서 토르가 싱긋 웃고 있었다.



“오늘은 입에 묻은 게 없으시네요.”

“아… 네.”

“여전히 쌀쌀맞으시고요.”

“…….”



뭐 그럼 내가 여기서 와! 저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하고 손이라도 내밀어야 하나? 로키는 다시금 사납게 눈을 홉뜨고 싶은 것을 참았다.


신이시여. 제가 사람을 좀 죽였다지만, 아니 좀 많이 죽이기는 했다지만 이건 너무하십니다. 저는 죽어도 마땅한 인간들만 죽였다고요. 당신이 해야 하는 일을 대신 해 준거죠. 돈을 받고 해서 그러신 겁니까? 하지만 이 세상은 기브 앤 테이크가 확실해야……


크리스마스에도 떠올리지 않는 하느님을 마음속으로 부르며, 로키가 가만히 토르를 바라보았다. 토르는 아직도 빙글거리고 있다. 본 적 있는 미소다. 저번과 다른 점이 있다면 자켓을 벗고 조금 캐주얼한 복장을 하고 있다는 것 정도일까.


질 좋아 보이는 바지와 더불어 질 좋아 보이는 셔츠. 팔꿈치까지 걷어붙여진 셔츠는 마치 디자이너가 셔츠를 만들 때 이렇게 입어야 한다고 의도한 것만 같았다. 토르는 바지 주머니에 양 손을 찔러 넣고 있었는데, 몹시도 편안한 자세일 것이 분명함에도 웬만한 사람이 잔뜩 힘을 준 것보다 근육이 선명했다. 마치 망치를 휘둘러 사람을 곤죽내기 직전인 것처럼… 긴장으로 탄탄해진 것만 같았다. 주먹을 살짝 쥐기만 해도 두 배로 부풀 것 같은데. 그을린 피부와 근육이 또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로키는 절로 제 팔을 떠올렸다. 희멀겋기만 한 자신의 팔을 생각하자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니지. 자신의 근무 시간이 주로 한밤중에서 새벽인 것을 감안하면 이건 부러워할 일이 아니다....



“풋.”



너무 대놓고 바라보고 있었나. 간지러운 웃음소리가 날아왔고, 로키는 퍼뜩 시선을 내렸다. 아, 저번과 달라지지 않은 게 하나 더 있다.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한 토르의 구두. 이 또한 고양이털과 먼지와 흙이 붙은 제 것과는 차이가 난다. 이 남자와 자신에게 뭔들 비슷한 것이 있겠느냐만은.


아무튼, 지금은 토르 오딘슨과 저의 차이점을 하나하나 고찰할 때가 아니었다. 그런 건 집에서 천장을 바라보며 해도 족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토르 오딘슨이 왜 이곳에 있으며, 왜 자신에게 또 말을 거느냐 하는 거였다. 미소를 보건대 좋지 않은 이유는 아닌 것 같기는 했으나, 확신할 수는 없었다.


로키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고개를 까딱했다. 그리고 옆으로 사라지려고 했다. 좋게 쳐서 토르가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과 친해지는 것을 좋아하는 부류라 해도, 로키는 그와 우정을 나누고픈 마음이 일절 없었다.


하지만 로키가 저를 피하려는 것을 본 토르가 반응을 취했다. 주머니에 잘 들어가 있던 그의 손이 슥 빠져나온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마디 굵은 손가락에는 칼이나 송곳이 들려 있지 않았는데, 로키가 안도하려는 찰나 더 안 좋은 일이 일어났다. 토르가 로키에게로 몸을 붙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거의 밀착하듯 가까워졌다.


로키는 말 그대로 책장과 토르 사이에 끼었다. 그가 얼어붙어 간신히 포커페이스만을 유지하는 동안, 토르는 그대로 손을 뻗어 조금 전까지 로키가 구경하던 책 중 하나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또다시 부드럽게 속삭였다. 가까워진 거리만큼이나 또렷하게 들리는 토르의 목소리에는 온 몸에 소름이 돋도록 하는 힘이 있었다. 등줄기를 따라 서늘함이 흘러내렸다.



“이 책을 유심히 보시던데, 읽어보신 책인가요?”


책의 앞면이 잘 보이도록 든 토르가 물었다.



토르의 말이 맞았다. 유심히 보긴 했다. 제목 때문에. 


«그놈을 죽이고 싶다» 


누구를 떠올리며 본 건 아니고…



“…….”



로키는 침묵을 지켰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저를 향해 계속해서 반짝거리는 웃음을 쏘는 토르의 얼굴을 보는 것뿐이었다. 신이시여. 살려주세요. 마음속 목소리마저 꺼질 듯 희미해졌다.


토르는 로키가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이 책, 읽어보셨습니까?” 라고 다시 말했다.


로키는 떨리는 숨을 가다듬었다. 침착하자. 침착해. 서점의 나른한 분위기에 느려졌던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그를 안정시키는 책 냄새도 지금은 도움이 안 됐다. 토르의 향수 냄새에 묻혀 잘 맡아지지도 않았다.



“안 읽어봤습니다.”



로키는 건조하게 대꾸했다. 나는 너한테 볼일이 없다. 그러니 앞에서 사라졌으면 한다, 라는 속내를 담은 차갑고 쌀쌀맞은 대답이었다. 하지만 토르의 푸른 눈은 짙게 휘어지기만 했다.



“아하. 그럼 오늘부터 읽을 계획?”

“그건, 모르죠. 아직.”

“그렇군요. 흐음… 그래요.”



토르가 책을 든 채 몸을 돌린다. 그가 카운터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확인한 뒤, 로키는 잽싸게 멀리 떨어진 서가로 도망쳤다. 토르가 쓰는 «그놈을 죽이고 싶다»의 그놈이 되어 죽는 건 아니겠지? 그는 제일 구석의 책장 뒤에 숨어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힐끔 고개를 빼자 금발의 뒷모습이 책을 계산하는 모습이 보였다. 서점에는 자신과 토르밖에 없다. 부하들은 또 근처를 배회중인가?


여기에서 저 남자를 또 만나게 되다니. 로키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토르 오딘슨이 언제부터 독서를 취미로 갖게 되었지? 적어도 자신이 아는 바로는 그의 취미사항에 ‘책 읽기’란 없었다. 음. 뭐 그 무지막지하게 큰 집을 생각하면 책으로 가득 찬 방이 하나쯤 있다 해도 놀랍지 않았다. 저 남자가 서재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게 잘 연상되지 않을 뿐. 2만 달러짜리 정보에 의하면 서재보다는 지하실에 자주 갈 것 같지 않은가.


금방이라도 계산하고 나가버릴 줄 알았는데, 토르는 더 살 것이 남았는지 카운터에 책을 올려두고는 근처의 책들을 뒤척이고 있다. 웃음기가 쫙 빠진 진지한 얼굴이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토르의 무표정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분명 본 적이 있다. 저격 렌즈 안에서, 의뢰용 사진에서.


로키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웃는 모습 덕택에 잠시 흐려졌던 -흐려질 뻔했던- 경계심이 단단히 세워졌다. 저 남자는 저런 남자였다. 미치도록 잔인한 마피아. 피가 튀어도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닦아낼 남자. 


느슨하게 올라갔던 입매가 내려오고, 휘어졌던 눈이 제자리를 찾은 토르에게서는 쉽게 다가가지 못할 아우라가 풍겼다. 더욱이 책 표지를 훑는 새파란 눈빛은. 로키가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서늘한 푸른 시선은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을 눈이었다. 담이 약한 일반인이라면 토르의 눈만 봐도 기가 죽어 도망갈 것이다. 로키는 저 남자가 그 아스가르드의 후계자 중 한 사람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책을… 사려 했는데. 로키가 잘 묶였던 머리가 엉망이 되는 것도 개의치 않으며 머리카락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심장은 긴장으로 펄떡펄떡 뛰고, 목은 바싹바싹 마르고, 불길한 생각만이 연신 솟아오른다.


그래. 그 꿈을 꿨을 때부터 눈치 챘어야 했지. 그냥 가만히 집에 박혀 있을 걸. 아니면 젤라또 가게나 갈 걸. 로키는 아침의 일로 입술이 탱탱 부었던 것도 잊고는 재차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가 이렇게나 과민반응을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로키가 비행기를 타고 정든 나라와 안녕을 고하기 전, 그러니까 이탈리아 제일의 살인 청부업자라는 타이틀을 내려놓기 전에 마지막으로 했던 일이 바로 저 책을 무섭게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와 관련된 일이었던 것이다. 정확하게는, 토르 오딘슨이 내밀었던 의뢰라 해야 하겠다.


실패한 건 아니었다. 로키가 누군가. 아무거나 고르지는 않지만 한번 고르면 실수 없이 처리해주는 뛰어난 저격수가 아니었는가. 로키는 아주 손쉽게 -도중에 우여곡절이 있기는 했으나- 토르의 의뢰를 수행했다. 그와 의뢰인은 언제나 중개인을 통해 서면으로 연락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토르가 저를 알 리 없었다. 토르는 그저 실력 좋은 청부업자에게 파일을 넘겼을 뿐이고, 자신은 그것을 수행했을 뿐이고, 성공의 대가로 목돈이 입금되었을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로키는 이 상황이 견딜 수 없도록 초조했다. 대체 왜 토르가 그의 주변에서 얼쩡거리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멀쩡하게 돌아다니는 걸 보면 저쪽이 이긴 것 같긴 한데. 로키는 책장에 등을 대고 팔짱을 꼈다.


아스가르드는 여타의 조직들처럼 많은 것에 손을 댔다. 마약만큼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걸 제외해도 무기 거래, 인신 매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나쁜 짓을 한다고 보면 좋았다. 마약은 안 되고 다른 것들은 허용되는 도덕관이 이상했으나 아무튼 아스가르드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약 만큼은 건드리지 않았다. 토르는 무기 거래 쪽을, 그의 손윗누이인 헬라는 인신 매매 쪽을 전담했다고 했다. 오딘이 두 사람 중 누구를 다음 대 보스로 지목할지도 많은 이들이 주목하는 이슈였다. 로키도 한때는 궁금해했다. 이제는 아니지만.


그래서인지 아스가르드가 치르는 혈전은 거의 대부분이 마약 때문이었다. 마약만큼은 안 된다는 그들과, 돈만 된다면 상관없다는 코사 노스트라, 은드라게타, 사카아르가 마찰을 일으키는 건 당연했다. 차츰 이탈리아 내의 마피아 항쟁은 아스가르드 대 다른 조직의 구도가 되어갔는데, 로키의 마지막 일도 저 싸움과 연관되어 있었다.


토르는 그에게 은드라게타와 사카아르의 오른팔을 죽여 달라고 했다. 보스를 죽이면 혼란이 가중되고 귀찮아지니 적당히 묵직한 직책을 죽이겠다는 이유였다. 의뢰 파일을 받고 로키는 눈썹을 올리고 말았는데, 정확하게 같은 이유로 토르 오딘슨을 죽여 달라는 의뢰 파일을 네 개나 받아본 참이었기 때문이었다.


선택은 그의 몫이었다. 로키는 내키는 대로 움직이는 청부업자였고, 의뢰인들은 자신의 타깃이 죽느냐 죽지 않느냐를 기다려야 했다. 로키는 토르의 파일을 꼼꼼히 한 번 더 읽어보았다. 파스칼레와 토파즈의 사진과 이들이 다음 주 중으로 회동을 하게 되리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같은 자리에서 두 사람이나 죽여 달라는 의뢰라니. 흐음.


로키는 토르의 파일을 책상에 내려놓은 뒤, 토르의 사진이 들은 파일 네 개를 모아들었다. 의자를 뒤로 젖히고 다리를 책상 위에 올리고서 각 파일에서 꺼낸 토르의 사진 넉 장을 손에 쥐었다. 차에서 내리며 카메라 쪽을 응시하는 토르, 선글라스를 쓰고 커피를 마시는 토르, 차에 오르는 토르, 총을 든 토르.



“당신, 평탄한 인생은 아니겠어.”



로키가 차에서 내리는 토르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며 툭 뱉었다. 이 남자는 이토록 많은 이들이 자신의 머리가 부서지기를 고대하는 걸 알기나 할까? 자신에게 들어온 것만 네 건이다. 그렇다는 건 다른 청부업자들에게 일이 들어갔을 확률이 높다는 거였고, 언제 어디서 총알이 그를 노릴지 모른다는 소리였다. 게다가 이 마지막 의뢰 파일은……


어찌 되었든 누굴 죽일지 정하긴 해야 했다. 이것이 마지막 일이 될 것이다. 마지막 일이 끝나고 돈만 입금되면 멀리 뜰 거니까. 어디로 가면 좋을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지만 자유롭고, 평화롭고,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곳으로. 짧게 생각을 정리한 로키는 책상 서랍 구석에서 라이터를 끄집어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토르의 사진에 불을 붙였다. 가장자리부터 시작된 불이 날름거리며 사진을 먹어치웠고, 넉 장의 사진은 까맣게 타들어갔다.



“음?”



재를 치우려던 로키는 채 타지 않은 조각을 발견했다. 토르가 카페에서 차를 마시던 사진의 일부분이었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메뉴판 아니면 간판인 듯한데 ‘미국’이라는 글자가 채 타지 않고 남아 있었다.



“미국. 미국이라.”



로키가 조용히 되뇌었다. 미국도 괜찮지. 총도 가질 수 있고. 로키는 그의 단 두 가지 취미 중 하나인 총 조립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미국도 괜찮지. 그가 씩 웃었다.





……그랬었군. 아련한 회상이 끝나고 로키의 정신은 껄끄러운 서점 안으로 돌아왔다. 남은 것은 찌푸려진 미간과 콧잔등의 주름뿐이었다. 로키는 팔짱을 풀지 않은 채 양 팔을 콱 부여잡았다. 그랬다가 머리를 다시 묶었다. 조금 전 마구 쥐어뜯은 탓에 강풍이라도 맞은 꼴이었기 때문이다. 로키는 머리끈을 대충 번갈아 겹치며 토르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그쪽도 머리를 묶고 있었지? 로마의 젤라또 가게에서 훔쳐보았을 때도 그랬고, 의뢰 파일 속 사진에서도 그랬고, 이곳에서도 그랬고.


로키의 입술이 심술궂게 삐뚤어졌다. 여유롭게 책을 사려던 계획이 와장창 부서지고 말았으니 그의 태도가 삐딱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카운터 쪽으로 나가고 싶지는 않으나, 책을 못 사고 돌아가는 건 더 싫었다. 어쩔 수 없지. 이 근처에서 골라볼까. 구입할 책이 꼭 신간일 필요는 없으니까.


으음. 로키는 근처의 서가에 인문학 책만 빽빽하게 꽂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무 어렵지 않으면서 쉽게 읽히는 책이 있을까. 역시 소설이 읽기 편한데. 토르는 나갔나? 독서를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문에 달렸던 종을 가차 없이 떼어낸 주인이 조금 원망스러워졌다. 소리가 들리면 쉽게 파악할 수 있었을 텐데.


아무거나 대충 빼 낸 로키가 팔락팔락 책장을 넘기려는데, 또 목소리가 들렸다. 머스크 향도 함께 날아왔다.



“생각해 봤는데 말입니다.”



오늘은 정말로 최악의 날이다. 로키는 책을 떨어뜨리지 않은 자신을 칭찬했다. 또 토르다. 또 토르가 저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이다. 대체 언제 여기까지 온 거지? 가까스로 진정되었던 심장이 다시 비명을 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로키의 오감은 매우 민감한 축에 속했다. 거듭된 훈련과 실전의 결과였다. 그런데, 아무리 깊게 생각에 빠졌다 해도 토르가 가까이 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말도 안 됐다. 


저렇게나 존재감을 드러내는 남자가 지척에 오는 걸 몰랐다고? 로키는 이를 굳게 깨물었다. 이것이 실전이었다면, 자신과 토르가 싸우는 중이었다면. 머리가 날아갔거나 목에 칼이 들이밀어진 채 붙잡혔을 것이었다. 머릿속이 순간적으로 새하얘졌다가, 새빨개졌다. 경고의 의미였다.


그러나 토르는 자신의 머리를 날리지도, 목에 칼을 들이밀지도 않았다. 말을 걸었을 뿐. 로키는 덤덤한 눈을 들어 토르를 보았다. 잘생긴 미소가 거기에 있었다. 저를 반기는 것처럼. 조금 전, 이곳에서 훔쳐보았을 때 보였던 굳은 얼굴은 온 데 간 데 없다. 목소리도 얼굴도 달기만 하다.



“이 책, 딱 한 권 밖에 없더라고요. 뺏어가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아서.”


토르가 «그놈을 죽이고 싶다»를 로키 쪽으로 건네며 말했다.


“아하.”


로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는데요. 사려던 건 아니어서.”

“아, 안 사실 겁니까? 이 책?”

“사려고 본 건 아니죠. 그렇게 따지면 여기 있는 책을 다 사야겠군요.”



무심코 날 선 대꾸가 튀어나갔다. 이건 합당했다. 모르는 남자가 계속 주위를 얼쩡거리며 말을 거는 상황에는 누구라도 짜증을 낼 게 분명했다. 만일 모르는 남자가 토르 오딘슨이 아니고, 그 모르는 남자가 말을 건 것이 서점이 아니라 으슥한 골목길이었다면 로키는 단 1초도 고민하지 않고 그놈의 팔을 뒤로 꺾었을 것이다. 손등에 칼을 선물해 구멍을 내줄 수도 있었다. 개수작 부리지 말고 꺼져. 이렇게 말해줄 수도 있었다.


로키의 차가운 답에도 토르는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제 아무리 둔한 사람이어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이렇게나 냉기를 뿜어대는데, 꿈쩍도 않는다. 좀 가라. 로키는 속으로 으르렁거렸다.



“제가 이곳 사람이 아니어서 말이죠.”



토르는 그렇게 말하며 피식거렸다. 무시무시한 제목의 책을 로키가 들고 있는 책 위로 올려놓기까지 했다. 책의 무게는 위태위태한 제 목숨의 무게처럼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았다. 이곳 사람이 아니면 뭐? 나도 여기 사람 아니거든. 유치하지만 그렇게 반박하고 싶어졌다. 로키가 마침내 얼굴을 와그작 구겼다. 토르는 여태 마이웨이다.



“저기요.”

“여행을 왔습니다.”


어쩌라고.


“그리고…… 당신을 만났죠. 우연히. 두 번이나.”


아, 미친. 로키는 뒷걸음질 쳤다. 좋지 않았다. 아주 아주 좋지 않았다. 아침부터 느껴졌던 찜찜함은 이걸 위함이었나?


“우연히 두 번이나 겹치다니 대단하지 않나요?”


전혀.


“제 이름은 토르입니다.”


알아.


“어떠세요? 저랑 커피라도 한 잔 하는 건?”


아니면 저번에 봤던 그 젤라또 가게에서 함께 젤라또라도 먹을까요? 토르는 연신 밝게 말했고 로키의 속만 타들어갔다. 침을 삼키는데, 꼭 염산을 마시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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