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무스!”

 

휴식시간이 생기면 으레 그러 하듯, 리무스는 도서관에서 홀로 독서를 위해 시간을 보내려는 참이었다. 별안간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주위를 휘둘러 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도서관의 책장과 책장 사이에 주저 앉은 체로 주변을 살폈지만 별 다른 낌새는 없었다. 잠시 고개를 갸웃하면서 초콜릿을 찾기 위해 주머니를 뒤적거릴 때, 자신의 손에 가볍게 들려 있던 책이 갑자기 공중으로 스르르 빠져나가는 것을 목격했다.

보통 사람이면 굉장히 놀라워 할 일이었으나, 리무스는 공중에 둥둥 떠올라 제멋대로 팔랑팔랑 넘어가는 낡은 책을 뚫어져라 바라보고는 쓴 웃음을 지었다.

 

“제임스- 그리고 시리우스도 있는 거지?”

 

나무라는 듯 하면서도 결국은 웃음을 참지 못한 리무스의 목소리에 갑자기 천이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책장과 책장사이의 좁은 공간 에서 둥그스름한 덩어리 두 개가 불쑥 튀어나왔다. 하나하나 헤집어 놓지 않고서야 절대로 그런 식으론 엉킬 것 같지 않을 법한 검정색 곱슬 머리, 마찬가지로 짙은 검정색이었지만 올곧게 쭉쭉 내 뻗은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고는 부대끼고 있는, 두 사람의 얼굴이었다.

 

“쳇, 내가 말했잖아. 리무스는 이런거 무덤덤하다니까.”

“그거야 네가 책을 뽑아 들었으니까 그렇지. 그냥 등 뒤에서 놀라게 하자고 했잖아.”

 

투닥거리는 두 목소리에 리무스는 주위를 둘러보며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장소가 도서관인 것을 망각하고 떠드는 목소리에 핀스 부인이 가볍게 눈치를 준 것이었다. 리무스가 눈치를 보는 것과는 다르게 두 사람은 한동안 어깨를 투닥거리며 칭얼거리듯 실랑이를 벌였다. 익숙한 모습에 리무스는 그저 가볍게 웃을 뿐이었다. 자신의 친구들은 늘 이런 식이었다.

 

“책 그만 읽고 나가자, 리무스. 너 맨날 그렇게 칙칙하게 있으니까 얼굴이 희뿌연거야.”

“칙칙하게라니. 내 유일한 취미를.”

“칙칙하지! 여긴 어둡고 곰팡이 냄새밖에 안 나잖아!”

 

떼를 쓰듯 우기는 제임스의 목소리에 리무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제임스는 이내 보지도 않으면서 팔랑팔랑 넘겼던 책이 지겨운 듯 도로 덮어 리무스에게 건넸다. 그러나 그 책이 리무스의 손에 다시 되돌아가기 전 중간에서 낚아 챈 것은 시리우스였다. 시리우스는 자신의 손에 돌아오지 않은 책을 보며 얼떨떨하게 바라보는 리무스를 힐끗 보고는 낡은 책의 표지로 시선을 옮겼다. 닳아 헤진 북커퍼에 음각으로 파여진 영문자를 보고는,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귀티나 보이는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칙칙하네.”

“……너네 둘이 책이면 뭔들 안 그렇겠어?”

 

한숨을 쉬며 책을 뺐으려는 리무스를 살짝 피하며 시리우스는 다시 책 표지를 훑어 보았다. 몇 번이나 책을 되찾고자 하는 리무스의 노력이 있었으나 시리우스는 요리조리 피해 가며 책장을 대충대충 넘겨 볼 뿐이었다.

 

“늑대 인간? 어차피 수업 때 배울 내용을 뭐하러 여기까지 와서 뒤져보고 있냐.”

“그냥 예습하고 싶어서라고 생각해 줄래?”

“예습은 무슨. 어차피 뻔한 내용이지. 어둠의 생물의 흉포함과 잔혹성에 관한 책이라면 블랙가에도 넘치니까 하나 빌려다 줄까?”

 

아마도 아무렇지 않은 듯, 아무 생각 없이 툭 내뱉었던 한마디에 리무스는 몸을 굳혔다. 그러나 그 작은 움직임의 변화를 시리우스와 제임스는 알지 못했다.

괜히 얼굴 가득 불만을 담고 툴툴거리는 시리우스를 보며 제임스는 시리우스의 손에서 책을 빼앗아 은근 슬쩍 다시 리무스에게로 넘겨 주었다. 떨떠름하고도 어색한 기분을 감추며, 리무스는 이제야 자신의 손에 다시 넘어온 책을 슬며시 펼쳤다.

늑대인간. 책을 펴자마자 보인 낡은 서체의 단어에 리무스는 두어번 눈을 깜빡였다. 묵은 종이에서 느껴지는 약간은 눅눅하면서도 거친 감촉과 함께 리무스는 천천히 그 단어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열 번 들어 보아야 한번 보는 것 만 못하다. 언제인가 책에서 들었던 이 한 구절을 리무스 루핀은 나름 적절한 뜻으로 바꾸어 이해할 수 있었다.

경험보다 와 닿는 것은 없다. 어떠한 언어나 말도 책이나 대화를 통해서 짧게 읊어 보일 때엔 그저 단순한 문자일 뿐이었다. 경험에서 비롯되어 각인되어진 그 뜻은 가장 몸소 와 닿는 단어이자, 가장 익숙하기에 뇌 속 끝까지 물들어 있는 저릿한 감각이었다. 리무스는 그 불편한 한 단어가 자신과 기가 막히게 어울리면서, 동시에 끊임 없이 쫓아다닌다고 생각했다.

리무스 루핀이 길지 않은 해를 살면서 짧았던 시간 내에 가장 익숙하면서도 명확히 이해 할 수 있었던 이 단어는, 우습게도 그 뜻의 사전적 의미를 정확하게 알기도 어려울 아주 아득한 어린 시절에 몸소 겪었던 경험이 그 자체를 완성하고 있는 단 한 단어였다. 그는 어린 시절에 겪은 단 한순간을 알맞은 단어로 점찍어 두고 쉽사리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입에 올리지 않아도 늘 그의 뒤통수에 꼬리표처럼 따라 다니고 있던 불편한 현실이자 진실이었다. 온갖 어둡고 음습한 단어를 모아 둔다 하더라도 불필요한 일이었다. 그는 이미 그 단어를 이해하기 어려울 법 했던 너무 어린 시절, 온 몸으로 받아들인 현실에 대해 필요 이상의 수식어를 붙이지 않았다. 단 한마디로 충분했다.

절망이라. 리무스는 종종, 과연 자신이 고작 십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이런 단어를 함부로 머리에 떠올려도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떠올리기도 했었다. 허나 익숙한 것은 별 도리가 없었다. 그는 백번 들어봐야 한 번 보는 것, 아니, 경험하는 것 그 이상의 기억을 고스란히 그늘 속에 감추어 온 체 홀로 보내야 했던 그 하룻밤의 시간들이야 말로 절망에 가까울 것이라 생각했다. 조용히 입 안에서 굴리는 그 짧막한 단어는 쓰게 느껴졌다. 문득 저녁때 후식으로 챙겨온 초콜릿이 생각나 다시 주머니를 뒤적거릴 때였다.

 

“리무스, 조금 이따가 밤에 호그스미드 가자! 시리우스랑 내가 아까 여기 오기전에 기가막힌 통로 하나 발견했어. 아마 그걸 타고 가면-”

“안돼, 오늘은.”

 

제임스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저도 모르게 단호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재빠르고 칼 같은 한마디에 제임스와 시리우스는 무어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아쉬운 듯 하면서도 걱정스러운 표정의 제임스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조금 화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시리우스는 잠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입을 먼저 뗀 것은 제임스였다.

 

“리무스, 또 아파? 그러고 보니 얼굴이 좋지 않네.”

“그래. 그래서 오늘 난 조용히 음침하게 독서나 즐기다가 잘 거야. 호그스미드는 둘이서 가. 나도 다음에 같이 갈게.”

 

고맙다고 해야 할지, 자신의 두 친구들은 더 이상 그에게 조르지 않고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단 한번 말을 던지고 곧바로 포기하는 모습은 어쩌면 매번 – 하필이면 그 둘이 알아차리지 못할 그 주기에 – 외출을 제의했던 것을 항상 거절했기에 오는 당연한 반응일 수도 있었다. 거절할 것을 알지만 그래도 물어봐 주는 것에 고맙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론 더 붙잡지 않는 것이 서운하기도 했다. 아쉬워 한 들 내색할 수는 없었다.

 

“미안.”

“미안해 할 것 없는데. 다만 네가 새롭게 발굴한 그 비밀통로를 타고 밖으로 나가서 그 야밤에 허니듀크에서 맛볼 수 있는 특제 판형 초콜릿의 따끈한 맛을 경험할 수 없다는게 아쉬울 뿐이야!”

“제임스……그런 건 보통 도둑질이라고 하는 거야.”

 

리무스가 쓰게 웃으며 정정해 줬지만 제임스는 제멋대로 신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도서관 사서 핀스 부인은 이제 정말로 화가 난 듯 성큼성큼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지레 걱정되어 서둘러 친구들의 등을 떠 밀어 도서관을 나오면서 리무스는 창밖을 보았다. 해가 지고 있는 잠깐의 시간 동안 주홍 빛으로 물든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감각이 몸을 타고 흐르자 아까부터 몸을 누르던 피곤함은 배가 되어가고 있었다.

 

“뭐해. 빨리 가자.”

 

멍하니 서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어깨를 툭 친 것은 시리우스였다. 감정이라고는 한 오라기도 담겨져 있을 것 같지 않은 먹먹한 무채색의 눈동자에 리무스는 숨을 삼켰다.

 

“넌 매번 그렇게 아프냐. 뭐 말 못할 피곤한 거라도 있어?”

“아니야. 그런 게 있다면 말했겠지.”

“말이라도 못하면. 아파도 즐길 때 즐기면 좀 좋아? 아픈게 별거라고.”

 

종종 남의 일을 아무렇지 않게 툭툭 내뱉듯 말하는 그였기에 리무스는 화내지 않았다. 그저 말 없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하고는 이미 저 앞에 앞질러서 빨리 오라며 재촉하는 제임스를 향해 서둘러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어둑해지는 하늘의 끄트머리를 바라보며 리무스는 아까부터 머릿속에 맴돌았던 익숙한 단어를 떠올렸다. 그 날 이후로 자신의 모든 시간들을 대변하는 것만 같은 단 한 단어 – 만약, 자신이 단어 몇 가지로 의미를 부여 받고 있다면, 그 반대도 가능할 수 있을까.

잠깐 생각한 뒤에 리무스는 그저 홀로 고개를 저었다. 떠오르는 단어가 없었다. 아무리 듣고 읽기만 한 들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그가 습득하기란 쉽지 않았다. 무리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직 어린 소년인 리무스는 다시 한번 신중하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 반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누군가가 이해해 줄 수 있을까. 만약, 이해해 줄 수 있다면.

절망이 아니라고.

 

– 그럴리 없지.

 

리무스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험한 밤을 한차례 또 넘기기 전에 준비해야 할 것이 많았다.

잡식성 독거 오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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