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진심은 항상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다






싸하게 내려앉은 정적.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워 말없이 두 눈만 깜빡였다. 왜 몰랐을까? 이제노 머리 위의 온도가 100도라는 건, 이제노가 단순히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는 사실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이제노의 온도가 100도인 이유. 그건 이제노가 거짓말을 못하는 착한 아이여서도 아니고,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나 정직함 때문인 것도 아니다. 이제노는 말 그대로 '거짓말의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해 여태까지 거짓말을 치지 않은 것뿐이었다. 그야말로 지극히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고. 이제노는 거짓말을 쳐가면서까지 자기 자신을 숨길 생각이 없었고. 항상 뒤로 숨기보단 당당히 앞으로 나오는 게 더 익숙한 사람이었다.




"누가 누구한테 할 소리? 시비는 지금 네가 나한테 털고 있는 게 시비지."

"싸가지 갖다 버린 김에 기억력도 나란히 갖다 버렸나. 네가 방금 여주한테 어떻게 말했는지 그대로 다시 되돌려 줘?"

"요즘은 당한 대로 돌려주는 걸 시비 건다고 하나? 되게 신기하네."

"별것도 아닌 걸로 신기해할 시간에 여주한테 사과나 하지 그래."

"미안한데 쟤가 먼저 지랄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안 나왔어."




한치의 양보도 없는 싸움. 나재민과 이제노가 한마디씩 주고받을 때마다 주위의 공기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필요 이상으로 과열된 상황에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아니, 여기서 이러는 거 다른 애가 보기라도 하면 어떡해? 물론 이제노랑 나는 누가 본다 한들 꿀릴 게 없지만… 나재민은 학교 대표 모델이기도 하고, 소문으로 퍼진 이미지가 워낙 강해서 자칫하다간 한 방에 골로 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야, 나재민. 그만해."

"실컷 사람 엿 먹여놓고 이제 와서 뭘 그만두래. 너 지금 나랑 말장난하냐?"

"넌 진짜 대가리가 안 돌아가냐?"

"뭐?"

"여기서 더 해봤자 좆되는 거 너밖에 없으니까 그만하라고, 미친 새끼야."




내 코가 석자인 와중에 나재민 걱정을 먼저 하다니. 내가 생각해도 미친 게 분명했지만, 지금은 이게 상황을 일단락 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이 구도로 싸우는 게 다른 사람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나재민, 김여주, 이제노 삼각관계로 얼토당토않는 소문이 퍼질 가능성도 적지 않았고… 우리 셋 다 피곤한 학교생활을 하게 될 게 뻔했으니까. 물론 이번 일로 인해 나재민의 본모습이 까발려진다면 그것만큼 좋은 일이 없겠지만. 아무리 나재민이 싫고 짜증 나도 이딴 일로 허무하게 좆되는 꼴을 보고 싶은 건 아니었다.


이건 동정도, 배려도 뭣도 아니다. 그저 사소한 싸움 하나로 여태까지 힘들게 쌓아 왔을 모든 것들이 무너지는 게 꼴 보기 싫을 뿐이다.




"아무리 거짓말로 쌓아 올린 이미지고 커리어라 해도."

"……."

"그거 다 네가 노력해서 얻은 것들 아니야?"

"……."

"그 모든 걸 이딴 사소한 싸움 하나에 다 날려 먹겠다고? 야, 정신 차려."

"……."

"너 자존심 존나 센 건 알겠는데, 상황 봐가면서 자존심 지켜야지."




조용히 내 말을 듣고 있던 나재민이 마지막 말에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처음엔 누가 보든 말든 나 줘패려고 주먹 쥔 줄 알았는데. 나재민은 그저 작게 심호흡하며 열이 오른 몸을 진정시킬 뿐이었다. 좀 싸가지 없게 말하긴 했어도 내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걸까. 아까까지만 해도 불같던 나재민의 기세가 조금씩 수그러들었다.




"여주야. 쟤한테 사과 안 받아도 되겠어?"

"응. 어차피 하라고 해도 안 할 게 뻔하고. 나도 쟤 엿 먹인 게 좀 있어서…."

"아, 그렇구나. 그럼 됐어."




내 말에 작게 웃은 이제노가 한층 풀어진 얼굴로 내 어깨를 토닥였다. 다정한 손길에 잔뜩 긴장했던 몸이 사르르 풀리는 것 같았다. 나재민은 분을 삭히는 와중에도 그런 이제노의 모습을 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지만. 이제노는 그런 나재민의 반응을 가볍게 무시하며 내 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하긴, 나도 한순간에 휙휙 바뀌는 이제노 태도가 적응이 안 되는데. 오늘 처음 본 나재민은 오죽하겠어. 머쓱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왠지 지금은 나재민의 반응에 태클을 걸고 싶지 않았다.




"후배님! 강의실 앞에 없길래 찾아다녔는데 여기 있었네요."

"… 아, 선배! 죄송해요. 말도 없이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죠."

"아, 괜찮아요! 사실 그렇게 오래된 건 아닌데… 그냥 걱정돼서 찾으러 나온 거라. 별일 없었으면 됐어요."




나재민과 이제노의 싸움을 중재시킨 지 3분도 채 되지 않아 선희 선배가 나타났다. 선희 선배의 뒤에는 못마땅한 표정의 강창현도 같이 따라오고 있었는데, 와꾸 상태를 보아하니 가기 싫다는 거 선희 선배가 억지로 끌고 나온 모양이었다. 원래 강창현 성격이라면 자존심 상해서라도 나 찾으러 안 왔을 게 뻔하니까. 뭘 잘했다고 인상을 써 개새끼야. 선희 선배처럼 예쁜 사람이 찾으러 가자고 말하니까 거절은 못 하겠디? 어이 가출한 얼굴로 강창현을 노려보며 실소를 내뱉었다. 미안한 기색 하나 없는 내 모습에 강창현은 두 배로 열이 받은 모습이었다.




"… 야, 김여주. 너 진짜 조대로 과제 진행할 거야?"

"그럼 조대로 하지 뭐 어떻게 할까?"

"그냥 우리 둘이서 과제 하자. 애초에 이 교양 신청한 것도 나랑 같이 수업 들으려고 신청한 거였잖아."

"미안한데 다른 이성이랑 살 부대끼고 같잖은 연락 주고받으면서 유사 연애하는 교양 과목인 줄 알았으면 신청은 지랄이고 거들떠보지도 않았어."

"……."

"이런 거 다 알면서도 일부러 신청하자고 한 게 누군데 이제 와서 이러지."

"… 여주야."

"내가 너 원하는 대로 다 해주겠다잖아."




그럼 그냥 편하게 즐겨, 창현아. 뒷북쳐서 사람 열받게 하지 말고.


평온한 얼굴로 웃으며 말을 끝마쳤다. 말에도 형태가 있다면, 내가 방금 내뱉은 말은 날이 서 있는 날카로운 식칼 정도겠지. 강창현 옆에 서 있는 선희 선배의 얼굴이 살해 협박 당한 사람처럼 새파랗게 질린 걸 보면. 안 지 얼마 안 된 사람도 있으니까 일부러 살살 말한답시고 웃으면서 지랄한 건데. 남들이 봤을 땐 웃으면서 지랄하나 정색한 상태로 지랄하나 성격 더러운 건 매한가지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조용히 고개를 숙인 나재민이 입을 가린 채 작게 웃었다. 나재민은 내가 강창현을 말로 패는 게 퍽 웃긴 모양이었다.




"오랜만이네, 창현아."

"… 뭐야? 이제노?"




그때. 내 말이 끝나자마자 강창현에게 인사를 건넨 이제노가 웃는 얼굴로 내 앞을 가로막았다. 나를 제 뒤로 숨긴 채 강창현과 마주 본 이제노는 기다렸다는 듯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줄곧 느껴왔던 거지만."

"……."

"넌 정말 한결같구나."

"……."

"진절머리 날 만큼."




겹겹이 포장된 말 속 미처 숨기지 못한 혐오가 바깥으로 흘러넘쳤다. 이제노의 말이 긍정적인 뜻이 아니라는 걸 눈치챈 강창현의 표정이 아까보다 더 처참하게 구겨졌다.




"야. 너 지금 뭐라고…!"

"칭찬이야, 창현아."

"……."

"한결같은 건 좋은 거잖아."

"이 새끼가 지금…."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아."

"……."

"쭉."




강창현의 어깨를 툭툭 친 이제노가 망설임 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마지막에 이제노가 연락하겠다는 뜻으로 나한테 핸드폰 흔든 걸 강창현이 못 봐서 다행이지. 만약 그것까지 봤다면 강창현은 당장 이제노의 뒤를 쫓아가 멱살을 잡고도 남았을 거다. 하마터면 대낮부터 학교에서 사랑과 전쟁 찍을 뻔했네. 쿵쿵대는 심장을 쓸어내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기싸움 2연타에 반쯤 넋이 나가 있는 선희 선배, 혼자서 압력 밥솥마냥 씩씩대고 있는 강창현,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는 나재민까지. 개판 오 분 전인 상황에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 일단 강의실로 돌아가죠. 이제 할 말도 다 끝난 것 같고."

"… 어, 아… 그래요, 후배님."

"강창현 너도 그만 씩씩대고 올라와. 내 의견 번복할 생각 없으니까 나 설득 시킬 생각이면 포기하고."

"아, 씨…."




왼쪽 선희 선배, 오른쪽 강창현. 두 사람의 팔을 나란히 붙잡은 채 계단을 올랐다. 둘 다 다른 데에 정신이 팔려서인지 손에 별로 힘을 안 줬는데도 질질 잘 끌려왔다. 살며시 고개를 돌려 내 뒤를 묵묵히 따라오고 있는 나재민을 바라봤다. 내 시선을 느낀 나재민의 표정이 1초 만에 썩어들어갔다.




"뭘 봐… 아 여주야. 위험한데 앞에 봐야지."

"아, 예. 걱정 감사합니다."




냅다 시비 털려다가 뒤늦게 선희 선배의 존재를 자각한 나재민이 급하게 뒷수습을 했다. 아니, 지킬 앤 하이드야 뭐야? 뜬금없는 나재민의 개그 발사에 웃음 참기 챌린지를 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재민의 밉상 시비가 나쁘지 않게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Charming Liar





강창현이 자취방을 구했을 때.


사랑으로 모든 걸 극복하겠다는 개또라이 같은 마인드로 강창현과의 동거를 생각했던 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과거의 그런 나를 존나 패고 싶음과 동시에, 그때 내 동거 제안을 거절했던 강창현에게 뽀뽀 세례를 하고 싶은 심정이다. 왜냐면 지금 나재민과 데이트를 하러 나가겠다는 말 한마디에 핸드폰이 3초에 한 번씩 번쩍이고 있으니까. 부재중 통화 17통, 읽지 않은 카톡 32개. 일방적으로 데이트를 통보한 지 단 30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지금도 이렇게 끈질기게 지랄하는데, 만약 강창현과 내가 동거라도 하는 상태였으면…….




"어우, 상상도 하기 싫어."




분명 자기 미치는 꼴 보고 싶냐며 3류 인소 대사 몇 번 훑다가 가짜 눈물 흘리면서 무릎 꿇었겠지.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하여간 발전이라곤 없는 새끼.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하던 준비나 마저 했다. 맨날 하나로 묶고 다니던 머리는 긴 웨이브 머리로 변신 시키고, 서울역 노숙자라고 해도 믿을 만큼 후줄근한 패션은 소개팅 선호도 1위 스타일로 탈바꿈 시켰다. 사실 나재민이랑 데이트하는 데에 이렇게까지 엄청난 정성을 기울이려던 건 아니었지만.


기왕 강창현 엿 먹이는 김에 빡세게 한 번 꾸며서 기분 전환도 좀 해 보고 싶었고… 원래 선희 선배와 과제를 했어야 할 나재민에게 미안한 마음도 조금 있었으니.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 하는 느낌으로 선희 선배의 스타일을 카피해 꾸며 봤다. 물론 나재민은 내가 선희 선배 따라 한 거 눈치 채자마자 기분 나빠할 게 뻔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거야말로 내가 가장 바라는 상황이었다.


예쁘게 꾸며서 기분 전환하는 김에 나재민한테 갖고 있던 죄책감도 없애고. 내 죄책감은 없애면서 나재민 기분은 더럽게 만들기. 세상에 이보다 완벽한 1타 3피가 있을까? 싱글벙글 웃으며 나재민에게 짧은 카톡 하나를 남겼다. 학교 앞 사거리에 있는 CGV 건물에서 보자고. 나재민에게 연락을 보내자마자 1이 사라짐과 동시에 빛의 속도로 답장이 날아왔다.


나재민

: 준비 한 번 진짜 존나 오래 걸리네 오후 5:21분


읽고 씹어도 모자랄 판에 왜 이렇게 답장을 빨리 보내나 했더니. 준비 늦게 했다고 빡쳐서 이러는 거였구만.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핸드폰 화면을 껐다. 어차피 기대한 게 없으니 실망할 것도 없었다. 지금 내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하면 왜 이렇게 늦었냐는 말도 안 나올 거다 이 자식아. 딱 봐도 정성 들여서 꾸민 게 티가 나니까.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은 채 CGV 건물로 향했다. 남은 건 나재민의 반응을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나재민은 천하의 비매너남 답게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는 말만 남겨놓고선 어디에 있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이 새끼는 영화 보기 전에 몸풀기로 숨바꼭질이라도 하려는 건가? 지가 어디에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처음엔 나재민의 기상천외한 행동에 짜증만 났는데. 진짜로 욕이 나올 만큼 당황스러운 일은 따로 있었다.




"야, 매표소 앞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 봤어…?"

"당연하지. 얼굴 존나 미친 거 아니냐? 난 무슨 연예인 촬영 온 줄 알았잖아."




영화관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들리는 소리들. 인정하긴 싫지만 이 모든 말들이 가리키는 사람은 내가 아는 나재민이 맞았다. 설마 어디 있다고 말 안 해준 게 이거 때문이었어? 진짜 그게 사실이면 얘는 진짜 미친 새끼다. 혼잣말로 욕을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매표소 근처로 가자마자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는 더 짙어졌고. 그런 사람들의 시선이 고정된 곳은 멀끔한 차림을 한 채 앉아 있는 나재민이었다.




"지각."

"……."

"버릇인가 봐?"




먼저 나를 발견한 나재민이 느릿하게 말을 건넸다.




"… 뭘 버릇이야. 너랑 나랑 지금 둘이서 처음 만난 거거든?"

"둘이 만날 때 아니어도."

"……."

"1학기 때 강의 지각 많이 했었잖아."




비웃음인지 뭔지. 실없이 웃은 나재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1학기 때면 한창 강창현이랑 싸우고 맨날 술 먹었을 때인데. 설마 그때마다 모자 눌러 쓰고 10분 20분씩 지각했던 거 말하는 건가? 쓸데없는 것까지 기억하는 나재민의 기억력에 순식간에 창피함이 몰려왔다. 얘 남한테 관심 없는 거 아니었어? 아니 남이 지각하든 뭘 하든 그런 거 일일이 기억하지 말라고. 벌겋게 달아오른 귀를 고데기 한 머리카락으로 가렸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재민의 두 눈을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맨날 학교에서 캐주얼하게 입고 다니는 것만 봐서 그런가. 오늘 나재민의 모습은 낯설다 못해 놀랍기까지 했다. 솔직히 나랑 데이트하는 게 못마땅하기도 할 테고, 괜히 옷 같은 거 신경 쓰기 싫어서 추리닝만 입고 나왔대도 그냥 그러려니 했을 텐데. 나재민은 세미 정장 차림에 집 한 채 값 정도 되어 보이는 시계까지 야무지게 차고 나온 상태였다. … 인정하긴 싫지만 진짜 잘생기긴 했네. 기껏해야 흰 티에 청자켓 입은 것만 보다가 깔끔한 셔츠에 블레이저 차려입은 걸 보니 정말로 사람이 달라 보이는 것 같았다. 어쩐지 연예인이랑 독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고.




"… 그냥 대충 입고 오지 왜 그렇게 힘줬냐? 어차피 영화만 보고 집 갈 거면서."

"너 진짜 바보냐? 데이트 인증샷 찍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옷도 나올 텐데. 추리닝 입고 데이트한 거 교수님한테 자랑할 일 있어?"

"아… 맞다."

"그리고 그 말은 내가 너한테 해야 되는 말인 거 알지? 너야말로 영화만 보고 집 갈 거면서 왜 그렇게 꾸미고 왔냐?"

"기분 전환하려고 그랬다, 왜."

"그래? 그럼 다음부턴 기분 전환 혼자서 해라. 나 기다리게 하면서까지 기분 전환하지 말고."




주야장천 맞는 말만 하는 나재민의 행동에 영화를 보기도 전 혈압이 먼저 올랐다. 그래… 얼굴이 잘생기면 뭐 하니 재수가 이렇게 없는데… 나재민이 뒤를 돈 사이 살며시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열심히 엿을 날려 줬다. 말없이 표를 뽑고 있던 나재민의 웃는 소리가 귓가를 강타하기 전까지.




"야."

"……."

"욕할 거면 티 안 나게 하고."

"……."

"꾸밀 거면 너 스타일대로 꾸며라."

"……."

"지금 하나도 안 어울려."




화악. 나재민의 몇 마디에 온 속마음이 다 읽힌 기분이었다. 뭐, 뭐야? 다 알면서 얘기 안 하고 있던 거였어? 작게 욕을 곱씹으며 나재민을 노려봤다. 나재민은 그런 내 행동에도 어깨만 으쓱일 뿐 그 어떠한 말도 얹지 않았다. 원래 내 계획은 선희 선배 따라 한 나 보면서 나재민이 열받아하는 거였는데. 지금은 그냥 내가 나재민한테 당한 거나 다름없잖아. 대놓고 씩씩대며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묶었다. 혹시 몰라서 고무줄 챙겨온 게 천만다행이지. 하마터면 오늘 데이트 끝날 때까지 나재민한테 놀림당할 뻔했네.




"진짜 선희 누나 스타일은 안 어울리는 여자 찾기가 더 힘든데. 그 대단한 걸 너가 해내네."

"야! 나 선희 선배 따라 한 거 아니거든? 내가 선희 선배 따라 한 거면 넌 강창현 따라 한 거게?!"

"내가 그런 덜떨어진 인간을 왜 따라 해? 너 어디 아프냐?"

"아 존나 짜증 나!"




진심으로 어이없다는 나재민의 표정에 순간 확 소리를 질렀다. 물론 진심으로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난 건 아니지만. 그냥 나재민한테 졌다는 사실도 기분이 나빴고, 강창현이 따라 할 가치도 없을 만큼 덜떨어진 인간이라는 게 틀린 말이 아니라는 사실도 기분이 나빴다. 맨날 맞는 말만 하는 개빡치는 새끼. 나재민은 내가 소리를 지르든 말든 태연스러운 얼굴로 팝콘이나 결제하고 있었다. 이젠 시종일관 여유로운 나재민의 태도가 부럽기까지 했다.


그렇게 나재민과 영화 시작을 기다리며 지옥 같은 대기 시간을 버티고 있었을까.




"야, 김여주!"




어디선가 나타난 강창현이 잔뜩 화난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산발이 된 머리, 짝짝이로 신은 슬리퍼, 후줄근한 잠옷 차림. 누가 봐도 급하게 나온 게 티가 나는 모습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수만 가지 생각. 그리고 그 사이로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한 평정심. … 자기는 나 몰래 여자랑 연락하고 술까지 마시면서. 내가 나재민이랑 과제 때문에 영화 한 편 보겠다는 건 용납이 안 돼? 그래서 여기까지 뛰어온 거야? 15분 거리인 우리 집 걸어 오기도 귀찮다고 맨날 나더러 오라던 새끼가?


나는 안다. 강창현의 지금 이 분노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 분노는 그저… 남 주기 아까워서 버리지 못하고 갖고 있던 내가, 자기보다 먼저 더 잘난 사람을 만나 떠날까 봐 무서워서 이러는 거다. '자기보다 먼저', '더 잘난 사람'을 만나는 게 못마땅해서. 애써 외면하고 있던 사실이 피부로 체감될 때마다 비참함은 배가 되어갔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인지 욕보다 헛웃음이 먼저 튀어나왔다. 걸레짝처럼 넝마가 된 관계, 계속해서 욕을 하며 화내고 있는 강창현, 우리 쪽으로 쏠려 있는 사람들의 시선까지. 마음 같아선 지금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제발 꿈이길 바라고 싶은데.




"너 지금 나 열받으라고 일부러 이러는 거지."

"… 하."

"넌 지금 이 상황에 웃음이 나와?!"

"아!"




손목을 잡아채는 힘이 여실히 느껴지는 걸 보면, 안타깝게도 이게 꿈은 아닌가 보다. 우악스러운 손길에 절로 몸이 일으켜졌다. 5분만 있으면 영화 시작인데. 구두 신고 오느라 다리 아파서 더 앉아 있고 싶었는데. 이걸 모조리 강창현이 망치네. 극에 달한 체념 때문인지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강창현을 밀치고 싶은 생각도, 욕을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마음도 없어졌다. … 그냥 이대로 집이나 들어가 버릴까. 뭐라 할 말도 없어 허탈한 표정으로 강창현만 바라봤다.


눈앞에 있는 강창현이 너무 밉고 원망스럽다. 근데 이 미워하는 감정마저 아직 놓지 못한 사랑에서 비롯된 미움일까 봐. 다 끝나고도 남은, 너덜너덜해진 관계를 놓지 못한 내 미련에서 발현한 원망스러움일까 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두 눈만 내리깔았다. 분노보다 서러움으로 점철된 마음이 욱신거렸다.




"… 놔. 영화 안 보고 집에 갈 테니까."

"… 뭐?"

"너 미치는 꼴 보기 싫어서 그냥 집 갈 거니까 팔 놓으라고."

"……."

"… 제발, 창현아."

"……."

"더 이상 나 쪽팔리게 하지 마."




내 팔을 붙잡고 있던 손에 스르륵 힘이 풀린다. 오늘 예쁘게 화장한 게 아까워서 꾸역꾸역 눈물 참고 있긴 한데. 이게 과연 집 갈 때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출구 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내뱉는 숨소리마다 물기가 서려 있는 느낌이었다.




"야."

"……."

"누구 마음대로 집에 가."

"……."

"아직 과제 하지도 않았는데."




그때.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꺼낸 나재민이 망설임 없이 내 손목을 낚아챘다. 밖으로 나가려는 나를 제지한 나재민은 자신의 등 뒤로 나를 숨기며 굳어진 얼굴로 강창현을 마주했다. 척 봐도 화가 난 것 같은 모습.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나재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기 눈앞에 있는 게 똥인지 된장인지 여자 친구인지도 구별을 못하고."

"… 뭐?"

"애를 물건마냥 이리 들었다 저리 놨다 지랄을 하지 않나."

"야."

"두 귀 멀쩡한 여자 친구한테 귀가 터져라 소리 지르면서 떼까지 쓰는 건 도대체 무슨 심보지?"

"야!!"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강창현이 다시 한번 소리를 질렀다. 조용히 말을 잇고 있던 나재민의 인상이 더더욱 서늘해졌다.




"이, 이 새끼 봐라. 이거 학교에서는 착한 척 존나게 하더니만…! 너 내가 애들한테 소문내서 학교생활 망하게 해 줄 거야. 넌 내가 책임지고…!"

"그래, 해 봐."

"… 뭐?"

"어디 한 번 해 보라고, 병신 새끼야."




강창현 쪽으로 한 발자국 더 다가간 나재민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애들이 과연 행실 개판인 네 말을 믿을까, 아니면 이미지 확실한 내 말을 믿을까?"

"……."

"멍청한 거엔 답도 없다더니. 너가 딱 그 짝이네."

"……."

"무능력한데다 대가리까지 나쁘면 그냥 가만히 있어."

"……."

"너 같은 애들 설치는 꼴 볼 때마다 진짜 죽여 버리고 싶으니까."




말을 끝마친 나재민이 내 쪽으로 손을 들이밀었다. 눈앞에 내밀어진 커다란 손.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자석에 끌려가듯 나재민의 손을 붙잡았다. 나재민의 손은 생각보다 훨씬 크고, 또 그만큼 따뜻했다.


우린 아직도 서로를 싫어하지만. 나재민이 이렇게 화를 내는 이유도 내가 걱정돼서가 아니라 그냥 강창현이라는 인간 자체가 혐오스러워서 그러는 거지만. 지금은 나재민이 내밀어 준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서러움으로 욱신대던 마음이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순간 저번 술자리에서 무언가에 홀린 듯 나재민과 새끼손가락을 엮었던 것이 생각났다. 약속, 이라고 다정하게 말하던 나재민의 목소리 또한.




"김여주가 너 같은 거랑 왜 사귀는지 이해가 안 된다."

"……."

"누가 봐도 김여주가 존나 아까운데."




대놓고 혀를 찬 나재민이 벙쪄 있는 강창현을 내버려 둔 채 상영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강창현을 매도하기 위해, 내 체면을 조금이라도 살려 주기 위해 내뱉었을 거라고 생각한 나재민의 마지막 말은. 화려한 효과음을 배경음으로 삼지도 않았고, 난도질 난 마음을 매서운 바람으로 할퀴지도 않았다. 마주 잡은 손이 급격하게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 아. 작게 탄식하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여태까지 누적된 수치 때문에 눈에 띄는 변화는 없었지만, -99도 근처까지 올라간 온도계가 나재민의 머리 위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 잠깐, 방금 그거….


거짓말이 아니고 나재민 진심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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