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왕이 그를 대전으로 불렀다.  단(端)은 자신과 조우한 내관이 혹여나 자신을 못 알아봤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 그저 그런 희망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을 사적인 곳이 아닌 대전으로 오라 한 것은 이미 이 일을 개인의 일탈로 여기지 않음을 짐작게 하였다.



"으흠...."



차디찬 대전 바닥 중앙에 소년이라 부르기엔 넘치기 시작한 왕자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대전의 안팎에는 시중드는 이는 물론 호위를 서는 이도 모두 물려 적막하였다. 대전을 밝히는 초의 반이 타서 없어질 동안 부왕은 높은 단위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가 일어나 걷다가 다시 앉곤 하였다. 그는 단(端)이 먼저  이해가 갈 만한 변명을 꺼내길 기다리는 것 같았다. 



"크흐ㅡ 흐음...."



그러나 왕자는 부왕이 무엇을 알고 있던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해 주는 것처럼 그저 담담히 있었다. 이때의 그의 나이는 지학에 접어든 터라 어린아해의 기운과 성인의 붉은 단심이 한데 섞이어 보였다. 이는 숙이지 않은 고개 위에 얹힌 얼굴에서도 숨겨지지 않고 드러났다.



"... 크흠....내 오늘 너를 오라 한 일을 .. 너도 짐작하고 있는 것 같구나"



대전을 밝힌 초의 굵기가 작지 않음에도 이제 손가락 반 마디 정도만 남아 불빛의 높이가 낮아지자 먼자 말을 꺼낸 것은 성조(星祖)였다.




"보위를 잇지 않을 겁니다. "




"그걸 네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냐!! 내가! 그깟 외인의 핏줄에 나라를 넘겨주려고 대통을 세운줄 아느냐? 선국의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것이다!"




그저 일탈이었다고 변명 한마디면 넘어갈 일을 결국  단(端)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장자를 먼저 보내고 태어난 두 번째 소생이지만 그를 장자로 여기며 애지중지 키워온 아이였다.



"무엇이? 네가 어떻게 내게...! 그렇게 말할 수 있단 말이냐?! 내게 서운한 것이 있느냐 말해보아라. 짐이 비록 황국의 여인을 부인으로 맞았지만 중전에게 소홀히 한 적이 없다." 




왕은 위엄 있지만 다급한 어조 말했다. 이제 어린아이의 티를 벗은 아이는 주변의 영향을 받기 쉬우니 이는 왕의 아들로 태어난 죄일 뿐이었다. 왕은 단(端)이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어 일을 이렇게 꾸몄다고 여겼기에 누르러진 태도로 타이르는 어조로 말하였다. 

명국에서 온 복청 공주가 아들을 소생하였을 때부터 궁의 세력이 이분되어 각자의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을 왕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네가 무엇을 들었고 누가 너를 꾀어 내었는지 모르겠다! 대통을 이어야 하는 것은 장자인 네가 아님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



"........"



" 네가 계속 이리 군다면 신하들이 너를 공격할 것이고 이는 돌이킬 수 없지 않겠느냐"




'분명!  단(端) 이에게 그릇된 방법을 알려준 이가 있음이라! 남색.... 남색이라니 누가 꾸민 계략인지는 몰라도 계략의 꾸밈이 괴이하고 사이하니 결코 선국의 자가 아니다. 필시 저 요사한 오랑캐인 명의 기풍이 분명하다'



얼었던 물이 녹아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그가 건국하여 만인지상에 오른 것을 쉽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권력이라는 것은 그리 녹록한 욕심이 아니었다. 성조(星祖)는 그런 뜻도 없지만 보위를 물려주지 않을 것이라고 운을 떼면 왕자도 놀라 바른길로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였다.




"부왕.... 부왕이 잘못 알고 계신 겁니다. 누구도 저를 꾀어내거나 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그저 그리되었습니다."




"세상 천지에 저절로 그렇게 되는 이는 없다. 천하디 천한 족속 중에서도 업보가 많거나 귀(鬼)에 씌어 음탕한 일을 획책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귀한 아이가 혹여나 귀신에 쓰인것 인가?'




대경하여  고개를 들고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단(端)의 모습을 꼼꼼히 살피었다. 붉어진 눈가와 무릎 위에 모았지만 떨리는 손을 보자, 그리하여 보였다.




"네가... 네가?! 아니다. 고칠 수 있다. 나는 선국의 왕이다. 잡귀가 우리의 혈통에 음모를 미친다 하여도 장난질이나 칠 수 있을 뿐이겠지! 여봐라! 상선이 어디 있느냐 가서 흥국 대사를 궁에 들어오라고 하여라! 상선!! 상선!!"




항시 옆을 지키는 상선조차 대전에서 멀리 있게 하였지만 왕은 그것은 잊었는지 다급하게 상선을 찾았다. 




"부왕... 저는 .. 저는 아닙니다. 귀신에 쓰인 것도 누가 그릇된 생각을 심어준 것도 아닙니다.  저는.... 왕이 될 인물이 안됩니다. 강요하신다면 스스로 거세하여 버리겠습니다. 그리할 것입니다."




계속되는 부왕의 호통에 떨리던 몸이 어느새 차분해지었다. 




'무엇이 두려웠던 것이냐? 가지고 있는 것을 이리 다 내려놓으면 되는 것을'



 단(端)은 오늘에서야 결심하였다. 매일이 불안하였고 거짓과 같은 꾸밈을 이제는 그만두어도 된다. 그저 자유롭고 싶었다. 상선이 달려오고 나서야  돌아가 근신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단(端)이 그날 왕에게 크게 혼이 난 후 유폐되듯이 칩거하였다는 소문은 금세 궁에 퍼였지만 부왕은 그로부터도 오래 자신의 아이를 포기하지 않았다.  일이 여기에 이르니 부자간에 골이 깊어지기만 하였다. 


단(端)은 자포자기하여 패악하듯 내시들을 건드렸고 그의 손을 거친 이들은 왕이 보낸 자객에게 조용히 제거되었다. 그렇게 서너해가 지나지 수상하게 사라진 이들이 공론화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단(端)의 처소에 배정받는 것을 꺼리는 내관들이 늘고 그곳에 가면 귀신이 잡아간다는 소문이 상소에 올라올 정도가 되어서야  성조(星祖)는 세자를 복청 공주의 소생인 희(希)로 봉하였다. 



다음 날 밝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영진군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모이지 않았다. 한 번도 세자가 된 적이 없었지만 그는 폐세자로 취급하었다. 그런 군상들의 행태에 그는 출가하고자 하였으나 모친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날부터 그는 회색 옷을 지어 상시 입었다. 




'자유' 그가 원한 것은 그 하나였지만 사실 반푼이도 안 되는 것이었다. 





***





마차가 달리자 처음에는 여럿이 한공간에 갇혀 달리는 것에 어색하였지만 익숙해지자 긴 여독에 영진군은 그만 까무룩 잠에 들었다. 낯선 이들 사이에서 정신을 놓은 일이 생전 없음에도 이렇게 된 것은 줄곧 긴장하였던 것이 한계에 달았기 때문이었다.




"... 하겠습니다!!!!!"




"영진군자가....? 정신이 .. 드십니까?"




 얼마나 시간이 지났던 걸까 영진은 다소 거칠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김장령이 아직도 마차를 몰고 있는 것인지 그를 깨운 것은 두 명의 별장 중 이 씨 성을 가진 이었다. 




"무슨 일이냐?"




"그... 이쯤에서 쉬어가심이 어떠실까요?"




그는 얼굴 가득 당황함과 경악의 감정을 감추지 못한 채였다. 그것을 보니 영진은 낯선 곳에서 발가벗기어져 찬물을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좀 전까지 부왕과 언쟁을 하고 있었다.  몸은 장령이 일으켜 준대로 바로 안았으나 정신은 꿈에서 머물다 생시로 느리게 돌아오고 있었기에 혼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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