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사실은 사랑이라는 감정 없이도 색을 볼 수 있는데, 우리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겪고 나서야 색을 찾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게 아닐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당신의 의견을 검증할 수 있는 자료가 미흡하고, 어쨌든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색을 얻는 방법은 사랑뿐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표본 오차를 논하기에는 너무 많은 증언들이 아닐까요?”

“저는 이 부분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어요.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사회로부터 이런 ‘지식’을 주입받아왔어요. 사실은 그게 아닐 가능성이 있는데도 불구하고요.”


슬슬 한여름으로 접어드는, 해가 쨍쨍한 날이었다. 웬일로 두 사람 다 늦잠을 자는 바람에, 그날은 드물게 아침이 아닌 브런치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버터와 메이플 시럽을 얹은 팬케이크에 커피를 곁들인, 그들이 사는 저택에서는 흔하지 않은 메뉴가 테이블 위에 올라와있었으나,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이런저런 이야기가 테이블 주위를 꽉 채웠다.

그 중에서 오늘의 메인이 되는 화제는 다름 아닌 색을 얻는 과정이었다. 색을 얻는 과정에 사랑이라는 요소가 꼭 들어가야 하는 것인가, 라는 의문을 제시한 쪽은 당연히도 다이나다. 대화는 다이나가 그녀의 생각을 피력하고, 매드해터가 거기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보태면서 한 이론을 검증하는 구도로 흘러갔다.

매드해터는 나이프로 팬케이크를 자르면서 그녀에게 계속 해보란 눈짓을 했다.


“유감스럽게도 선생님 말씀대로 이를 증명할 자료가 미흡해요. 관찰 실험을 시도하려 했던 학자들은 꽤 있었습니다만, 옛날과 다르게 지금은 수치로 논하는 시대니까, 좀 더 객관적인 자료가 필요하죠. 자연히 시간, 자본, 윤리 면에서 해결되지 못한 부분이 생기고요.”

“호오, 확실히 그렇군요. 인간을 상대로 하는 실험이란 대부분 비슷한 문제를 지니고 있지요.”

“그렇다고 인간이 아닌 개체에 적용할 수도 없는 노릇이죠. 그 부분은 인간 입장에선 같은 인간보다 더 미지의 영역이니까요. 인간이 타 종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는 한…….”


다이나가 들고 있던 스푼으로 커피를 저었다. 다소 신경질적인 태도였다. 잔 안에서 스푼이 만들어낸 소용돌이 속으로 각설탕이 사르르 녹아들었다.


“좋아요. 꼭 사랑이라는 요소가 필요하다는 걸 전제로 둬보자고요. 그렇다면 이런 관점은 어떠세요? 사랑은 주관적이라 사람마다 색을 찾아가는 과정이 다르다 한다면, 억지로 그 과정을 조정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이를테면 최면술로 ‘나는 격렬한 사랑을 하고 있다!’고 암시를 준다든가.”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 같군요. 하지만 색을 찾는 조건은 타인에 대한 사랑입니다, 아가씨. ‘불특정한 요소’는 매우 위험한 것이죠. 특히 인간을 상대로 실험을 할 때는요. 사랑의 신이 지닌 화살도, 처음 보는 상대이면 누구나 사랑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예기치 못한 사태가 벌어지지 않나요?”


시종일관 흥미진진하다는 얼굴을 하던 매드해터가 눈을 날카롭게 떴다.


“제 소견으로는 ‘누구’를 사랑하고 있는지도 지정해야 제대로 된 암시가 걸리고 성공률도 높아질 겁니다.”


다이나는 말없이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커피 스푼을 내려놓았다.


“그러네요. 확실히… 학계에 내보긴 좋은 의견이었지만.”

“뭣하면 직접 시도해보는 방법도 있습니다. 적어도 스스로 책임을 질 수 있겠지요.”

“글쎄요. 제가 낸 의견이지만, 직접 하고 싶진 않았어요.”


그녀는 나오는 한숨을 참으며 커피잔에 입을 대었다. 뜨뜻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지만, 오히려 목이 껄끄러워지는 느낌이었다. 다행히 카페인이 몸에 돌수록 머릿속이 맑아졌다.

매드해터는 의문 가득한 얼굴이었다.


“아가씨는 색을 찾으려면 무슨 짓이든 할 것처럼 말하지 않으셨나요?”


그런가? 다이나는 마음속으로 자신에게 질문했다. 물론 그렇다. 색을 알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한 모든 일을 해볼 자신이 있었다. 또, 그렇게 할 터였다.

하지만 이것은 다른 문제다. 사람에 워낙 회의적인 그녀는 특정 누군가를 열렬히 애정 하는 행위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자연스레 사람을 믿고 좋아할 날이 오리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쥐고 있는 의심의 끈을 놓지 못한다.


“사랑을 못해서 색도 모르는 저이지만, 그런 식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건 제 자존심이 용납지 않아요.”


다이나는 고개를 완전히 들지 않고, 눈동자만 움직여 매드해터를 바라보았다. 도전적인 눈빛이었다.


“이기적인가요?”

“후후, 그 정도 이기심도 없는 게 과연 사람일까요?”


해터가 웃으며 되물었다.

돌려서 표현했을 뿐, 그는 질책하지 않았다. 다이나는 말없이 그를 탐색하듯 보았다. 그는 신사라면 응당 갖춰야할 배려 이상을 보여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남에게는 보이지 않는 선을 그어놓고 살았다. 그러나 본인 스스로 선을 그은 주제에, 가끔씩 제멋대로 선을 넘나들었다. 지금이 바로 그 때였다. 다이나는 매드해터라는 사람의 이미지에 ‘이상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떼기를 반복했다.


“……아무튼요.”


매드해터에게서 시선을 거둔 다이나가 짧게 말했다. 그리고 잔에 든 커피를 다 마셔버렸다.


“커피를 좀 더 가져오라고 할까요?”

“아니요, 더 마시면 밤에 잠을 못 잘 것 같아요.”

“저런. 그건 안 될 말이죠.”


매드해터는 테이블에 놓인 벨로 뻗던 손을 거둬들였다.


“그러고 보니 아가씨, 며칠 뒤가 하츠 군이 초대한 파티입니다만.”

“아.”


그랬지, 다이나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그녀는 조금 소란스럽게 식기를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가지런히 했다.


“며칠간은 파티가 열리는 곳에서 머물러야하니, 혹시 필요한 것은 없나요? 지금 당장은 생각이 나지 않을 수도 있으니 천천히 생각해보시길.”

“필요한 것이라 하시면…….”


다이나는 머릿속으로 제 방에 있는 물건과 트렁크에서 꺼내길 잊은 짐들 가운데서 뭐가 필요할지 추려보았다. 필기구, 종이묶음, 다음 학기까지 읽어두려 했던 책, 세면이나 화장도구에 여벌옷 정도면 충분하다. 겨우 며칠일 뿐이니 딱히 모자란 것은 없을 듯하다.


“특별히 없는 것 같습니다.”

“정말인가요?”


해터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이 시기에는 말이죠, 딱딱한 나무열매로부터 사람을 보호해주고, 시원한 그늘도 만들어주며, 스타일까지 챙길 수 있는 물건이 필요하답니다. 안 그런가요?”


그게 뭐지, 마찬가지로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쉬운 문제였다. 답을 하려 매드해터를 보자 그는 ‘무언가’를 말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입 꼬리를 한껏 끌어올린 채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다이나는 그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았다.


“모자 말씀이지요?”

“그럼요, 모자가 있었죠!”


매드해터가 환하게 웃었다. 색을 전혀 볼 수 없는 다이나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화색이 돈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확실히… 모자는 없어요. 쓸 일이 별로 없었으니까요.”

“후후, 그러시다면 더더욱 아가씨께는…….”

“예?”

“휴가에 어울리는 새 모자가 필요하겠군요!”


말을 마친 그가 손가락을 튕겨 딱, 하고 소리를 내자, 식당 안에 거센 바람이 불었다. 방향을 알 수 없는 이상한 바람이 머리칼을 어지럽힌다. 도저히 눈을 뜨고 있기 어려워 다이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거센 바람소리는 금세 잦아들었다. 매드해터가 말했다.


“괜찮으신가요?”

“네?”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을 뿐인데, 다이나는 처음 보는 의자에 앉아있었다. 더군다나 그녀가 있는 곳은 더 이상 식당이 아니었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지금 일어난 일을 의심했다.

다이나가 의자에서 일어서려하자, 언제부터 옆에 있었는지 매드해터가 그녀를 저지했다.


“앗, 의자에 앉아서 기다려주세요. 방이 좀 어지럽답니다.”


아, 예. 그녀는 넋 나간 목소리로 답하곤 의자에 도로 앉았다.

다이나가 있는 방은 넓지 않고 아늑한 분위기였다. 작은 창 대여섯 개가 적당히 햇빛을 조절해주고 있었다. 작은 초상화나 그림 액자, 책이 빼곡한 책장, 종이뭉치가 널려있는 책상이 그의 서재와 비슷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밝은 천으로 만들어진 마네킹 반신, 다양한 디자인의 모자가 전시된 장식장, 벽 한 쪽에 걸린 코르크 판, 핀업 된 스케치와 메모, 모자의 재료가 들었음에 틀림없어 보이는 상자처럼 이 방의 개성을 담은 가구들이 더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저택에 딸린 매드해터의 작업실인 듯했다.


“그런데 뭘 하려고 그러시나요?”

“당연히 아가씨의 모자를 맞추기 위해서죠.”


매드해터가 쌓여있는 상자 중 하나를 뒤지며 말했다. 그는 모자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들을 하나둘 꺼내 늘어놓았다. 여러 종류의 천을 새로 벽에 걸고, 모자장식을 정리하는 데 조금 긴 시간이 흘렀다. 다이나가 작업실을 모두 둘러보고 남은 시간을 무료하게 보내고 있을 무렵, 해터가 체크무늬 천으로 된 둥근 핀 꽂이를 손목에 끼면서 그녀에게 다가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다이나 아가씨! 이제부터 당신만을 위한 특별 맞춤 모자를 만들어드리죠!”


특별히 원하는 디자인이 있으신가요? 그가 묻자, 워낙 그런 쪽에 관심이 없는 다이나는 고개를 저었다.


“디자인은 선생님께 전적으로 맡기고 싶어요. 저보다 선생님께서 아시는 것도 많으실 테니까요.”

“과찬이십니다.”


그가 미미한 웃음을 지었다.


“파티에 가져가실 옷은 주로 무슨 색인지 혹시 아시나요?”

“아니요. 자세히는 몰라요. 뭘 가져갈지 확실하게 정하지도 않았고, 제가 직접 산 옷이 몇 없어서. 한 번 보시겠어요?”

“오, 이런. 아닙니다. 그저 참고일 뿐인데요. 번거로운 데다, 그렇다고 숙녀분의 방을 함부로 뒤질 수야 없는 일이죠. 어느 색에도 무난하게 잘 어울리는 천을 써야겠군요.”

“…그게 무슨 색이죠?”

“하얀색과 검은색이죠! 당신의 세계 속에서도 가장 말끔한 색이리라고 확신합니다.”


매드해터는 돌돌 말려있던 원단 몇 개를 쭉 펼쳤다. 그리고 한동안 고민하더니 그중에서 셋만 남기고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새하얀 원단을 베이스로 한 모자를 만들기로 마음먹은 모양인지 셋 중 두 개는 밝은 색이었다. 하나는 평범한 하얀색. 다른 하나의 원단은 단순히 하얗기만 한 직물이 아니라, 화려한 레이스가 그물을 이루었고 무늬를 따라 자잘한 구멍이 나 있어 통풍이 잘될 법해 보였다. 마지막 원단도 촘촘한 직물이라기보다 망사에 가까운 어두운 천이었다.


“여름휴가용이니 챙이 넓은 것으로 하죠.”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리 말한 매드해터는 제 손을 다이나의 턱과 머리 뒤쪽에 대고, 그녀의 시선을 살짝 옆으로 틀었다.


“제가 사이즈를 재는 동안 움직이지 말아주세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려던 다이나는 생각보다 단단히 제 턱을 붙잡은 그의 손힘을 느끼고, 대신 입을 열어 대답했다.


“네.”

“감사합니다.”


매드해터가 줄자로 그녀의 머리 사이즈를 재었다.


“평균이군요. 머리가 들어가는 부분은 이 도안으로, 챙은… 그곳은 숲이라서 많이 커질 필요 없겠지만, 이번만 쓰는 것도 아니니 기준을 높게 잡아보도록 할까요.”


다이나의 머리를 한 바퀴 감고 있던 줄자가 사라지자, 다이나는 그제야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의자 옆에 있는 작업 책상에서 매드해터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천을 재단하고, 초크로 선을 긋고, 가위로 자르고, 핀을 꽂는 일련의 작업을 하면서 그가 말했다.


“오늘은 바람이 잘 부는군요. 창문을 열어두길 잘했어요. 녹스 아이스타스가 열리는 곳도 바람이 기가 막히게 잘 분답니다. 이 지역의 좋은 점은 여름에도 마냥 찌는 듯이 덥지만은 않다는 거지요……. 메모와르 쪽은 어땠나요?”

“음, 이곳보다는 더웠죠. 그래도 건물 안은 시원했어요.”

“왜인지는 알 것 같군요. …이 모양 모자의 안쪽 장식은 장미보다 카라가 더 좋겠고. 하얀색 카라, 거기다 노란색 꽃술은 어디든 잘 어울리죠. 오, 메모와르 대학부 건물은, 제가 건축물에 관해 잘 안다고 자신할 순 없지만, 실내를 시원하게 만드는 구조였죠. 벽이 두꺼워서던가요?”

“맞아요. 게다가 주변의 바람 방향을 계산해서 적절하게 통풍이 되도록 설계했다더군요.”


다이나는 도서관 벽에 걸려 있던 학교의 설계도를 떠올렸다. 정확하게는 설계도가 아니라 건축가의 코멘트를 달아놓은 구조도에 가깝고, 학생들은 대외에 학교의 우수함을 자랑하기 위한 안내판이라고 말하던 것이었다.


“그곳 기후에는 적절한 방법이었죠.”

“하긴 대체로 이쪽 지역은 숲이 많아서 상대적으로 덜 더우니까요. 반면에 남쪽의 바다를 끼고 있는 나라들은 오븐에 구운 기름진 칠면조 신세가 되기 딱 좋지요! 개중에서는 이맘때쯤 태풍이 불어 닥친답니다. 아가씨도 아시다시피 굉장히 강력하고 위험한 비바람 덩어리가 말입니다. 저도 예전에 여행하다가 겪은 적이 있는데, 그곳은 유난히 비바람이 잦은 곳이었답니다. 사업차 간 건 아니었지만, 모자 장사가 잘 안 되겠다는 감이 바로 왔죠. 바람이 너무 심해서 모자는 물론이고, 양산도, 우산도 몽땅 바람에 날아 가버리잖아요. 잃어버린 모자를 모두가 새로 산다면 좋겠지만, 너무 자주 잃어버려서 처음부터 모자를 사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죠. 그래도 그곳 바람을 형상화한 모자 아이디어가 조금……. 아, 중요한 건 이게 아니죠! 클로버가 좋을지 월계수 잎이 좋을지 고민 되는군요! 그래서 말인데…… 다음 시즌의 모자가 벌써부터 고민이 된답니다. 사실은 두근거린다고 하는 편이 알맞겠어요. 먼젓번에 아가씨가 주신 아이디어는 참으로 훌륭했습니다. 그만한 모자가 또 나올까요? 동식물에서 모티프를 따오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었어요.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들이라 식상하다고 느낄지 모르겠지만, 식상함을 독창성으로 뒤바꾸는 게 디자이너의 일이죠. 중요한 건 어떤 식으로 이걸 해내느냐, 수수께끼가 따로 없군요!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답니다. 모자란 사람 머리에 씌워져야 모자인 것이라, 그 이상을 벗어나면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이미 디자인의 한계치가 어느 정도는 정해진 물건이란 말이죠. 그래서 대부분의 디자인이 평범한 모자 하나에 갖은 사물을 이것저것 꿰어 붙이는 것들인데 말입니다……. 마치블로우의 동그란 베팅 칩이라든가, 크로노플럼의 자랑스러운 시계라든가, 이미 있는 것들을 모자에 주렁주렁 단다 한들 그것이 독창적인 모자일까요? 뭐, 누군가는 독창적이라 말하겠지요. 제 모자 중에서도 장식을 주렁주렁 달고 있어서 예쁜 녀석들이 분명 있으니까요! 창조란 언제까지고 수수께끼일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신이 되지 않는 한은 영원히, 아니, 신이 되었다 하더라도 신을 뛰어넘는 영역이 더 있으면 어떡하죠?”


즐거이 웃음을 터뜨린 매드해터와 달리 어느 시점부터 다이나는 그냥 입을 다물고 앉아 있었다. 매드해터는 부지런히 손을 놀리는 것만큼 제 입도 같이 놀려댔다. 모자 장수가 쉬지도 않고 재잘거렸기 때문에, 그녀는 끊임없는 수다를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해터의 일방적인 수다는 평소에 그들이 하는 일대 일 대화와는 달라서 딱히 끼어들 틈도 없었다. 그녀가 심심하지 않도록 하는 그의 배려일수도 있겠으나, 얌전히 모자만 만들 수는 없는 걸까? 말을 멈추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라도 돋는 걸까? 차라리 신문을 하나 읽으라고 던져주는 게 낫겠어! 이런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다이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으나 구태여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의 모자가게에서 손님들에게 모자를 맞춰줄 때도 이런 식인 게 분명했다. 아무리 나라에서 제일가는 모자장인의 모자를 사기 위해서라지만, 메종 매드니스의 손님들이 이 모든 고난을 참아내려고 애쓰는 걸 생각하니 저절로 동정이 일었다.


“다이나 아가씨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예?”


…누가 누구를 동정한단 말인가. 다이나는 속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다이나는 침대에 쓰러지듯 엎어졌다. 막 저녁 식사를 마친 참이라 이렇게 눕는 건 소화에 별로 좋지 않다. 하지만 그녀는 엄청나게 지쳐서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매드해터의 작업실에서 모자를 맞추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수다를 듣는 것만으로도 이만큼이나 체력이 소모되다니,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도 아니고, 이게 대체 뭐란 말이야.

반면 오후 내내 그의 손과 입은 1초도 쉬지 않았는데도, 매드해터는 멀쩡한 얼굴로 마무리 작업을 해야겠다고 말했다.


“오늘 저녁 식사는 아가씨 혼자 드셔야겠군요.”


저녁 식사를 위해 집사가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 그는 아주 태연하게 다이나를 보내고, 작업실로 도로 들어 가버렸다. 그의 숙련된 손놀림이라면 슬슬 모자를 완성했을 것 같다. 다이나에게 잘 어울릴지 아닐지는 둘째 치고, 이 기세로 모자를 완성한 다음에는 제 방에 찾아와서 또 모자에 관한 수다를 늘어놓는 게 아닐까? 매드해터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등줄기에 소름이 끼쳤다. 미쳤어, 미쳤어! 다이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러다가 문득 여름맞이 파티까지 생각이 미쳤다.


“……후우.”


정말 괜찮을까? 짧은 문장이 강렬하게 머리를 파고든다. 하츠와 크로노, 매드해터가 있긴 하지만, 정말 그걸로 괜찮을까? 아무리 세 사람이 있다고는 해도 늘 함께 붙어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혼자서 사람을 상대해야하는 일도 생기겠지. 분명 그에 관해서는 스스로 격려도 하고, 받기까지 했지만, 걱정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합리적으로 행동하자. 당장 내일도 아닌데 미리 걱정해서 무얼 하겠는가? 그만 생각하자. 그녀는 속으로 단언했다. 너무 피곤해서 이 이상 머리를 굴렸다간 뇌가 터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다이나는 기대와 불안을 누르듯 베개로 얼굴을 덮어버리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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