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시나브로


시나브로 라는 말이 있다.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뭐 그런 뜻인데 사람의 감정이라는 참 '시나브로' 였다. 쌓이는 줄도 모른채 자신도 모르는 사이 조금씩 축척되어 어느샌가 문득 돌아보면 커져있곤 했다. 김남준도 그랬다. 솔직히 이렇게 될거라고 생각해보지 않았다. 달리 김석진을 좋아해보려고 노력한 적도 없었고. 그런데 그냥 자연스럽게,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김남준이 김석진을 처음본 건 엠티에서가 아니었다. 학기초였는데, 아는형이 과방 사물함에 버리다시피 방치해둔 전공책을 물려준다고 해서 생전 들어가보지도 않았던 과방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학기초답게 기합이 빳빳이 들어간 신입생들이 와글거리며 앉아있다가 김남준이 문열고 들어가자마자 완전히 굳어서 다들 일어나 구십도로 인사를 했다. 누군가는 그 장면을 기특하게 보겠지만, 적어도 남준은 그런 기합들어간 분위기를 싫어했다. 억지로 만든 수직상하관계 같은거. 그런거 불편해서 웬만하면 과행사도 잘 안가고 오히려 편하게 함께 뭔가를 이뤄가는 동아리 안에서의 관계를 더 좋아했다. 수직관계라기보다 수평관계이며 상호간에 자유롭게 교류할 수 있는 곳. 꼭 자신이 회장이라서가 아니라도 그런 편한 분위기 때문에 동아리에 애착이 더 많았다.


애들이 인사하니까 대충 고개 주억거리며 들어간 김남준은 사물함을 뒤져 형이 말한 전공책만 챙겨 가방에 넣었다. 남준이 잠깐 그거 찾는사이에도 누가 시킨것도 아닌데 입 꾹 다물고 눈치보던 신입생들은 남준이 문열고 나가려고 하니까 또 기립하고 일어나서 구십도로 인사를 했다. 저런 인사는 대체 누가 하라고 시키는걸까. 똑같이 불편한 마음에 뒤도 안돌아보고 나오려고 하는데 김남준이 문고리를 잡기도 전에 문은 저쪽에서 먼저 당겨졌다. 열린 문틈으로 비친 실루엣이 딱봐도 신입생처럼 보였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얼굴이었는데 앞도 안보고 들어오려다가 김남준과 어깨를 부딪쳤다.


'아 미안' 


곧장 튀어나온 말이었는데 그애가 미안하다고 하자마자 안에있던 다른 신입생들이 난리를 쳤다. 석진이형 이분 선배님이야. 우리보다 몇학번 더 많아... 어쩌고 저쩌고. 그말에 남자애는 점점 눈이 동그랗게 커지며 화들짝 놀라더니 아, 선배님? 아, 죄송. 죄송합니다 하더니 고개를 숙이려다 김남준 가슴팍에 퍽! 머리를 박고. 아 저, 정말로 죄송합니다.. 제가 일부러 이러는게 아니라요.. 하며 자기가 들이박은 남준의 가슴팍을 더듬더듬 손으로 만지면서 사과했다. 울망거리는 눈동자는 무슨 대역죄인이라도 된것처럼 당장 무릎꿇으라면 무릎도 꿇을 기세였다. 김남준은 별로 기분나쁘지도 않았고, 그때 수업시간이 임박해있어서 더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바빠서 그냥 괜찮다고 뿌리치고 나왔는데 그 뒷모습이 차가웠던것인지 남자애는 얼음이 되었다. 건물을 빠져나가는데 잔뜩 쫄은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왔다. 


선배님 선배님 정말 죄송함니다아아


그때 좀 웃겨서 피식 웃었던가... 별로 기억에 남은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다시 보니 얼굴이 기억났다. 마지못해 형들 손에 끌려갔던 엠티였는데 그때 그애가 저 앞에 보였고, 그애의 이름이 김석진이라는 것도 알게되었다. 마지못해 끌려나왔다는데 그런것치고 김석진은 즐거워보였다. 옆에 서있던 애들이 대부분 쭈뼛거리며 뭘해야할지 몰랐던거에 비하면 김석진은 1초도 고민안하고 혼자 흥에 겨워 춤을 추는데 그게 김남준 눈에는 굉장히 인상깊었던 거다. 행복한 사람을 곁에 두면 자신도 행복해진다. 남준은 자신의 주변을 좋은 사람들로 채우고 싶었다. '너 우리 동아리 들어올래?' 했던 건 그래서 나온 말일지도 모른다.  


첫인상부터 범상치 않았던 것처럼 김석진은 보고 있으면 재밌었다. 몇살 차이 안 나는 형으로 이런말하기 뭐하지만 요즘애들 같지 않았다. 순수하다고 해야할지. 어딘가 톡톡 튀는 부분이 있는데 거기다 춤을 좋아하니 딱 우리 동아리 체질인거다. 예상했던대로 막상 데려와놓으니 형누나들 사이에 끼어 놀기도 잘 놀았다. 근데 애가 놀기만 잘 하는게 아니라, 형누나들 연습하는거 구경한다고 뒤에 앉아서 쳐다보는 그 얼굴이 안어울리게 엄청 진지한거다. 김남준은 뒤에 서서 애들 춤추는걸 봐주다보면 거울을 통해 의자에 앉아 구경하고있는 김석진의 얼굴이 보였다. 반짝이는 눈동자가 보였고 리듬을 타는 어깨와 박자를 맞추는 손가락.. 그런것들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원래 당춤신에서 무조건 3개월은 견습이었다. 그냥 연습하는거 구경이나 하고 청소하고 바닥닦고 심부름이나 하는 그런 존재. 그런데 들어오자마자 춤을 배우게 된건 김석진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생각했던것보다 훨씬 성실하게 연습하고 또 결과물도 좋아서 모두를 놀라게했다. 말랐지만 섬세한 굴곡을 가진 몸선은 춤을 출때 극대화되었다. 다른애들이 김석진 춤추는걸 보고 슬쩍 옆에와서 '쟤 생각보다 쫌 추네?' 하면 김남준은 괜히 자기일도 아닌데 어깨가 으쓱해지곤 했다.   


잘 배우니까 더 가르쳐주고 싶었고, 춤도 노래도 좋아하는게 보여서 이것저것 들려주고 싶었다. 김남준은 종종 김석진을 학교근처에 있는 자기집으로 데려가 소장하고있는 춤영상들도 보여주고 좋아하는 노래도 틀어주고 그랬다. 커다란 모니터 앞에 앉아있는 김석진 머리에 김남준은 블루투스 헤드폰을 씌워주었다. 금방 영상에 빠져들어 몰입하고있는 김석진의 옆모습을 김남준은 한번씩 물끄러미 쳐다보곤 했다. 


그렇다고 김석진이 단점 하나 없는놈이 아닐텐데, 이상하게 김남준 눈에는 좋게만 비췄다. 앞에서 형들을 따라 열심히 안무를 배우는 성실함도, 단체 안무에서 혼자 틀릴때마다 어정쩡하게 웃으며 쭈그리가 되는것도, 밥먹을때 당근이랑 오이를 다 가려내고 편식하는것도, 술마시면 제일 먼저 흥이 올라서 춤추자고 엉덩이 들썩거리는것도. 


'왜?' 라는 이유가 있을까? 그냥 그런 사소한 것들이 새벽에 눈이 쌓이듯 조용히 겹쳐졌다. 그냥 착하고 귀여운 동생이라고 생각했는데 계속해서 눈길이 갔고 보다보니 어느샌가 그 마음이 부정할 수 없이 커져있었다. 애쓴적 없이 그냥 좋아졌다고.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81. 롱디가 이런 건가요

 

김석진은 시차때문에 맨날 전화를 못받았다. 언제는 아쉬워서 손도 못놓고 쪼물딱거리면서 입만 열면 바람피지 말라고 그렇게 노래를 부르더니 막상 떠나오니 연습하느라 바쁘다고 전화도 잘 못받았다. 여기가 낮이면 거기는 밤, 여기가 밤이면 거기는 낮. 연습할때엔 핸드폰이 가방속에 들어있었고 연습 끝나고나면 배고파서 형들이랑 뭐 먹거나 아니면 뻗어서 자거나 하니까.. 그렇다고 김태형이 하루종일 불나게 핸드폰 붙잡고 김석진 전화받을때까지 집착하며 전화거는 성격도 아니라서 둘은 전화보다 카톡으로 대화할때가 더 많았다. 


김석진의 요구사항은 딱 하나였는데. 가서 여자들 구경하지말고 예쁜 풍경사진을 많이 찍어서 보내달라고했다. 놀러가면 어디를 놀러갔는지, 뭐 맛있는걸 먹으러가면 뭘 먹었는지, 잠은 어디서잤는지 호텔은 어땠는지 등등. 처음에 김태형은 질색을 했다. 김태형네 가족 내력이 그랬다. 가족끼리 어디 놀러가도 사진한장 찍을까 말까. 풍경사진이야 여행오면 기념으로 찍기는 해도 누나들조차 셀카를 거의 안찍었다. 누나들도 설레발 안치고 미국와서 셀카 한장 안 찍는데 내가 나서서 사진을 찍어..? 김태형은 진짜 싫다고 했지만 김석진이 하도 떼쓰니까, 결국엔 어쩔 수 없었다. 


어디가서 관광객처럼 사진찍고 이러는거 가오 떨어진다고 생각하지만 김석진이 뭐 구경했는지 궁금하다고, 자기도 사진으로 보여달라고 하니까.. 아기새 먹이먹이는 어미새의 마음으로 새로운걸 구경하러 갈때마다 누나들 몰래 슬쩍 품안의 핸드폰을 꺼냈다. 최대한 소리 안나게 주변 사진 한장씩 찍어두고 뭐 먹으러가서도 핸드폰 보는척하면서 음식사진 찍고. 처음엔 풍경이랑 음식사진만 보냈는데 김석진이 '김태형 보고시퍼어 니얼굴도 보여줘어' 해서 쪽팔림을 머금고 누나들 몰래 셀카도 찍어 김석진한테 보냈다. 


김석진이 고기 먹다말고 핸드폰 보며 실실 쪼개고있으니까 형들이 뭐냐 누구냐 여친이냐 참견을 했다. 김석진은 좋다고 웃으며 '태형이요' 하더니 김태형이 사자동상 앞에서 사자 콧구멍 찌르며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어딘데 미국?


네 태형이 저번주에 미국갔거든요 


팔자좋네. 누구는 맨날 땀에 쩔어사는데


근데 진짜 좋대요. 맨날 이러케 사진찍어서 보내줘요


동아리 형들은 김석진이 김태형이랑 사귀는 줄은 당연히 몰랐다. 그냥 하도 김석진이 자주 얘기를 하고 몇번 동방건물 앞에서 마주친적있어서 얼결에 소개받기는 했지만 개인적인 친분은 없기도 했고. 근데 친구 사이에 맨날 사진을 보내준다니. 왜 그러지? 염장지를라고? 


노력이 가상하네


네 태형이 착해요. 원래 사진찍은거 싫어하는데 제가 찍어달라니까 일케 찍어줘요 


별로 착하다는 뜻으로 한말이 아닌데 김석진은 묻지도 않은 김태형 얘기를 꺼냈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아있던 김남준이 김석진한테 자기도 보여달라고 손을 뻗었다. 석진은 주머니에 넣으려던 핸드폰을 도로 꺼내 김남준한테 건넸고, 아예 몸을 기울여 이거는 언제 어디서 찍은 사진이고 이거는 언제꺼고 가열차게 설명까지 해주었다. 옆에서 침튀기며 설명을 하던지 말던지 석진의 폰화면을 빤히 쳐다보던 김남준이 한마디했다. 


잘생겼네. 


그말에 석진이 사진 설명하다말고 우리 태형이 잘생겼죠! 하려는데,


뒤에 지나가는 남자가.


김석진은 눈 몇번 꿈뻑거리더니 핸드폰 사진을 한참이나 들여다본다. 포커스가 태형에게 맞춰져있어 뒤에 지나가는 남자 얼굴은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남준에게 내밀었던 폰을 가져와 석진은 혼자 사진을 들여다보며 갸우뚱했다. 아무리 봐도 잘 모르겠는데. 태형이가 훨씬 더 잘생기지 않았나..? 



녹화가 바로 다음주였다.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여섯명이 소소하게 시작한 술자리는 처음 약속대로 딱 병맥 한병씩 해치우고 파하기로 했다. 정식으로 달리는 건 녹화끝나고 하자며. 그래서 열시도 채 되지 않아 다들 귀가를 서둘렀다. 컨디션 관리가 중요하니까. 잠깐 관계자한테 전화가 걸려와서 급히 전화를 받고 온 남준은 자리에 돌아와보니 테이블 앞에 김석진 혼자 달랑 앉아있었다. 다들 어디갔어? 약간 황당해하며 묻는 남준에게 석진은 머리 긁적이며 형들 다 집갔는데요... 일단 남준은 자리에 앉기는 했다. 남은 잔에 있는 맥주를 비우더니 


'그럼 우리도 가자' 


남준이 먼저 일어나며 말했다. 김석진도 얼른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석진은 뭔지 모르게 평소와 비슷하면서도 묘하게 거리감 느껴지는 남준이 이상했다. 정말 모든게 다 평온한데 그런데 미묘한 느낌이 있었다. 그게 뭔지는 몰라도 석진은 자신의 마음가짐이 달라진 까닭이라고 여겼다. 내가 이상한 꿈을 꿔서. 괜히 남준선배가 날 좋아한다는 착각이 들어서. 그런 것 때문에 선배를 나도 모르게 불편해하고 있는건가보다.


사실 남준이 항상 친절해서 그렇지 사람 자체가 접근성이 낮지는 아니었다. 일단 표정관리에 능숙한 얼굴은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고 그래서 딱 보여주는 만큼밖에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마음의 벽을 치면 아마 누구보다도 친해지기 어려운 사람일 것이다. 석진은 어쨋든 남준을 좋아했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멋진 동아리를 소개해준 선배이고, 또 그안에서 이것저것 잘 할수있게 도와주기도 했고. 아마 남준이 전폭적으로 지지해주지 않았더라면 축제나 방송같은 큰 공연에서 한자리를 얻어내는것이 어려웠을 것이다. 꼭 춤에 어떤 야망이 있는건 아니지만, 그냥.. 그래도 나를 예뻐해주는 선배이니까 석진은 남준이랑 잘 지내고 싶었다. 좋은 선후배로.


남준이 카운터에 서서 계산하는걸 뒤에서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석진은 남준이 계산마치고 돌아서자마자 덥썩 끌어안았다. 선배 우리 이정도면 친한거죠? 친한거 맞죠? 우리 절친할까요?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계속 장난치면서 끌어안고 안놔주니까 김남준은 그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석진아


네?


나 지갑좀 넣자


아, 넵


그제야 석진은 허리를 놓아주었고 김남준은 가방을 열고 지갑을 넣었다. 가방지퍼를 닫고 쳐다보니까 김석진이 '기다려' 명령받은 강아지처럼 말똥말똥 쳐다보며 얌전히 기다리고있었다. 가자, 하니까 쫄랑쫄랑 쫓아오고. 


저번처럼 취한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김석진 혼자 취기에 업된 상태길래 저러다 어디가서 사고칠까봐 김남준은 집앞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김석진은 자기 완전히 멀쩡하다고 혼자 갈 수 있다고 마다했지만 완전 멀쩡하기는 무슨. 김석진은 갑자기 걷다말고 길옆에 주차된 자동차 아래에서 불쑥 튀어나온 검은고양이 한마리를 발견했다. 어? 야옹이. 하더니 갑자기 차도 반대편으로 달려가는 검은고양이를 따라 차도쪽으로 나가려는걸 놀란 김남준이 쫓아와서 뒷덜미를 붙잡았다. 차도잖아! 차를 보고가야지. 남준이 뭐라고 하니까 그제야 김석진이 머쓱한 얼굴로 웃었다. 


죄송해여


.. 너 이제 괜찮다고 하지마. 


그래서 김남준이 단호하게 옷자락 잡고 질질 끌어가지고 김석진네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들어가


네에


바로 씻고 자. 내일도 연습있으니까


네에


분명 문열고 안으로 들어가는것까지 보고 돌아섰는데, 엘리베이터 타려고 기다리는 김남준 뒤로 김석진이 슬그머니 쫓아나왔다. 핸드폰을 보고있던 남준은 뜬금없이 등장한 김석진을 보고 놀라서 왜? 하고 물으니 대답없이 웃는다.


혹시 맥주 한잔 더 하실래요?


뭐?


저 딱 한캔만 더 마시고 잘건데 혹시 형도 같이 마실건가해서..


......


슬쩍 김남준 팔을 잡더니 어차피 태형이도 없고 혼자 마시면 심심하니까 같이 마시자고 했다. 마침 일전에 남준이 빌려줬던 마이클잭슨 콘서트 영상이 담긴 dvd도 줘야했고. 남준은 어쩌다보니 김석진의 집에 초대가 되어있었다. 술을 좋아하는 애주가답게 냉장고 안이 각종 맥주캔으로 가득 차있었다. 안주거리도 풀세팅이 되어있고. 그래도 오늘은 딱 한캔만 더 마실거니까 과자 한봉지만 먹자며 테이블 위에 과자를 뜯어 접시에 담고있었는데 김석진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인을 확인한 김석진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태형이었다. 처음엔 반가웠다가 눈앞에 있는 남준을 보고 살짝 표정이 뜨끔해진다. 


누군데? 


반대편에 앉아 멀티로 묶인 캔맥주 포장을 뜯던 남준이 물었다. 석진은 '아 태형인데..' 하더니 저 잠깐 전화좀 받고 올게요. 슬그머니 베란다문을 열고 나갔다. 석진은 태형이 남준을 싫어한다는 걸 알아서 굳이 같이 있다는 얘기는 안해야지 싶었다. 저번에 학식에서 선배가 밥사줘서 먹은것도 김태형은 엄청 싫어했다. 딱히 돈이 없어서 얻어먹었다기보다 그냥 친목같은건데 니가 거지야? 왜 남이 사주는 밥을 얻어먹냐고 성질 냈으니까. 사실은 그거 나말고 다른놈이랑 둘이서 밥먹지 말라는 뜻이었는데 김태형은 그런 속마음을 예쁘게 표현할 줄 몰랐다. 


김석진은 베란다로 나가 통화버튼을 손가락으로 드래그하자마자 '태형아아아아' 하며 애교를 부렸다.


뭐해


나? 집. 방금 들어와써


방금 들어와? 야.. 너 지금 시간이 몇신데. 아주 나 없다고 살판났냐?


왜애 아직 열한시도 안됐는데


열한시도 안됐는데? 아주 좀있으면 외박도 하겠다? 


그니까 한국 빨리와


누군 빨리 안가고싶냐?


왜 못와? 빨리 오면 되잖아


......야



너 나 안보고싶지?


아닌데..? 엄청 보고싶은데


뻥치지마. 너 내생각 하루에 몇분이나 해


니 생각? 맨날맨날 하지


그니까 몇분


음.. 60 곱하기 24가 뭐더라..? 


..........


아무트은! 맨날맨날 보고싶지


.........


너는?


나 뭐


바람 안폈어?


야.. 맞다. 여기 예쁜여자들 겁나 많더라?


그니까.. 바람 안폈냐구


나 여기서도 인기 많다? 어제 누나들이랑 와인마시러 갔는데 여자들이 나보고 귀엽게 생겼대


자기보고 큐트가이라고 했다나 뭐라나.. 듣고있던 김석진이 '씨이! 너 그래서 바람폈어?!' 소리치니까 김태형은 푸스스 웃었다. 


안 폈어 


.......진짜..?


너나 밤늦게까지 돌아다니지마. 너 또 술마셨지. 


... 안 마셧..는데


작작 마셔라 진짜. 술마시고 춤춘다고 밖에서 객기부리지말고. 


오늘은 안췄어..


그래. 잘했어 


........


김석진은 가만히 있더니 '미국 좋아?' 물어봤다. 김태형은 처음 며칠동안은 무조건 좋다고 빡빡 우겨서 김석진을 베알꼴리게 하더니 요즘은 좋기는 좋은데.. 하며 말끝을 흐렸다. 딱히 무어라 설명하기 어렵지만, 사실이었다. 처음엔 마냥 좋았는데 요즘은 좀 이상했다. 눈돌아가게 멋진 야경을 봐도 엄청 큰 쇼핑몰에서 누나들 짐들어주다가 어부지리로 명품 신발이나 티셔츠같은걸 얻게되어도, 무슨 영화에 나왔던 식당이라고 유명한 레스토랑에서 비싼 코스요리를 먹어도. 심지어 누나들 따라 클럽에 가서 쭉빵한 금발 미녀들 구경하며 물좋다 하다가도.. 문득문득 가슴 한구석이 휑했다. 한번도 느껴본적 없는 감정이라 김태형은 그 감정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냥 중요한 걸 깜빡하고 잊어버리고 나온 기분이었다. 그래서 김태형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때마다 주머니나 가방을 뒤져서 내가 뭘 잊고나왔나 뒤져보곤 했다. 


그런 허전함은 김석진이랑 통화할때 배가 되는것 같았다. 하루종일 구경하고 쏘다니다가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열어보면 미국오기 전에 김석진이 찍어준 엄청 못생긴 셀카가 배경화면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거다. 처음엔 웃겼는데 나중엔 그걸 봐도 웃음이 안나왔다. 웃지도 않고 빤히 쳐다보다보면 보고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는데 그놈의 시차. 시차때문에 전화통화도 마음대로 못한다는게 괴로웠다. 생각해보니 미국은 별로 좋은곳이 아닌것 같았다.


왜 처음엔 엄청 좋다더니


있어보니까 좀 별로야


치. 근데 왜 나보고 다음에 같이 가재


내가 언제


쩌어번에


저번 통화할때. 그때 누나들이랑 보드카 나눠마시고 약간 취해있는 상태여서 별의별소리를 다했다. 너랑왔으면 좋았을텐데 혼자있으니 외롭다는둥. 보고싶다는둥.. 김석진이 다음날 카톡으로 자꾸 놀려서 김태형은 그거 다 누나들이 시킨거였어! 라고 둘러댔던 흑역사가 있었다. 괜히 또 닭살스러운 말 하기가 싫었던 김태형은 어제까지는 별로였는데 오늘 가본데는 괜찮았다며 대충 다른핑계를 둘러댔다.



김남준은 유리창밖에 서서 통화하는 뒷모습을 보다가 김석진이 통화를 끝내고 들어오니까 안본척 고개를 돌렸다. 캔맥주를 자기옆에 놓아두니 김석진이 와서 앉았다. '김태형이 뭐래?' 흘리듯 물어보니 쑥스러워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베베 꼬았다. 아 그게.. 태형이는 지금 미국이라 한낮이래요. 거기는 춥고 눈도 왔고.. 그러며 묻지도 않은 김태형 안부를 들려준다. 


남준은 듣는둥 마는둥 대충 고개만 주억거렸다. 석진은 혼자 김태형이 어디를 놀러갔고 어디에서 뭘 봤고 그런 얘기들을 한참이나 떠들다가 정신이 들었다. 엄청 웃긴 얘기였는데 옆에 앉은 남준은 별 감흥이 없는듯 보였다. 그러고보면 남준선배랑 태형이랑 친하지도 않은데. 남준이 말도 없이 술만 마시고 있길래  석진은 너무 나혼자만 얘기했나? 눈치보다가 '이거 과자도 같이 드세요!' 하면서 과자 집어서 남준 입에 불쑥 넣어주려고 했다. 남준은 자기 앞에 내밀어진 과자를 안받아먹고 빤히 쳐다보았다. 둥글게 말린 석진의 손가락부터 마른 손목, 팔꿈치, 어깨. 목이 패인 티셔츠 안으로 도드라지는 쇄골. 가만히 쳐다보던 남준은 석진의 팔을 움켜잡았다.


궁금한게 있는데. 


네?


그날일 기억 안나는거지?


.. 그날이요?


아마 많이 취해서 기억 못할거라고 생각은 하는데 그날 말했었잖아.. 내가 너 좋아한다고


석진은 눈만 크게 뜨고 깜빡거렸다. 


아.. 아 그거..


그거 저는 꿈인줄 알았는데.. 저 좋아한다고 한거 그거 진짜였어요? 입안에서 만들어진 말이 차마 뱉어지지도 않았다. 석진이 멍하게 쳐다보고 있으니까 남준이 잡고있던 손을 끌어당겨 입술을 부딪쳤다. 인상이 차갑다고해서 입술까지 차갑지는 않았다. 오히려 맞붙은 입술사이에 불이 화르륵 지펴진것처럼 뜨거웠다. 석진은 놀라서 냉큼 입술을 떼어내며 고개를 돌렸다. 손으로 입을 막고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고 있으니까 남준이 옆으로 와서 허리를 끌어안았다. 석진아. 부르는데 눈이 마주치면 또 키스할것같아서 석진은 고개를 떨군채 손바닥안으로 입을 웅얼거렸다. 


아 저.. 저 사귀는 사람 있거든요


.. 누구?


그게... 


.........


태형이.. 김태형이요


순간 태형이랑 사귀는걸 남준선배한테 말해도 될까 망설였지만 이제와서 다른 핑계를 대는것도 이상했다. 겨우 태형이라고 말했는데 그말을 듣고도 남준은 전혀 놀란 표정이 아니었다. 잠잠히 석진의 눈동자만 들여다보더니 


그럴줄 알았어


.. 네?


왠지 그런거 같았어




아까 석진이 과자를 뜯고 안주를 준비하는 사이 남준은 화장실에 갔다. 화장실 어디야? 물어보니 석진은 접시를 꺼내다말고 저쪽이요! 하고 손가락으로 가리켜 알려주기까지 했다. 남준은 세면대에 손을 씻고 고개를 들었는데 거울에 브라운이랑 샐리 칫솔걸이가 붙어있었다. 스물한살짜리 남자애가 자기같이 귀여운 걸 좋아한다. 남준은 어이없으면서도 또 그게 김석진스러워서 혼자 픽 웃었는데.. 근데 가만 생각해보니 혼자 자취한다고 했는데 왜 칫솔이 두개지? 그때도 약간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돌아섰는데 수건걸이에 수건이 없었다. 


남준은 아무 생각없이 수건이 있을법한 거울뒤 선반을 열어보았다. 여는 순간 뭐가 후두둑 떨어지는데 주워들고보니 그게 다 콘돔이었다. 그때 김태형이 사둔 거. 무식하다 할정도로 많이 사놔가지고 어디 수납이란 수납은 다 넣어놓고도 남아서 대충 화장실에도 쑤셔넣어놨던건데.. 적어도 그때는 누군가를 집에 초대할거라고 생각못했고, 지금 이 순간에도 김석진은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원래 집주인은 물건이 어디에 있는 줄 아니까. 왼쪽 선반에 수건이 있고 오른쪽은 비어있다는 걸 알기때문에 오른쪽을 굳이 열어볼 일이 없다. 다만 김남준은 손님이었고, 수건이 오른쪽에 있는지 왼쪽에 있는지 몰랐을 뿐이다.  


일단 남준은 내색없이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사이 테이블에는 접시 몇개에 과자랑 땅콩 아몬드가 담겨있었고 캔맥주도 세팅 완료. 김석진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웃는데, 남준은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때까지는 김석진이랑 뭘 해보고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냥 내가 좋아한다는 걸 깨달은 상태에서 여자친구를 사귀는게 비겁해서 그만 뒀을 뿐이고, 남의 속도 모르고 둘이 다시 사귀면 안되냐는 중 그런 소리를 하길래 어차피 많이 취해서 기억도 못할거니까. 그냥 한번 내가 너 좋아한다고 말해보고 싶었다. 그다음에 아무렇지 않게 굴었던 건 그 이상의 뭔가를 바래서가 아니었다. 지금 이상태로도 좋았다. 


그때까지 김석진은 김남준에게 순백의 존재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내가 감히 가질 수 없는. 무엇보다 남자를 좋아할거란 확신도 없었다. 모든게 불확실한 상황에서 뭔가를 걸고 싶지 않았는데.. 그런데 만약 김석진이 남자를 사귄다면. 남자를 안다면. ... 그럼 나도 조금은 가능성이 있는거 아닐까? 





진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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