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목격자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을 때, 우린 그야말로 만신창이었다. 그나마 그녀는 카디건에 가려지지 않은 부분만 젖었지만,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난리였다. 물에 빠진 생쥐가 형님이라 부르며 달려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복슬복슬하던 머리카락은 뺨에 찰싹 달라붙었고 코와 턱에는 굵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사용인이 미리 준비해둔 슬리퍼는 걸음마다 물 자국을 만들어댔다. 우리가 지나간 자리마다 홍해만 한 웅덩이가 생겼지만, 다행히 다들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런 것에 관심을 둘 겨를이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꼴이지?”



우리를 맞이한 집주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빗줄기 사이를 뛰어다니느라 지친 우리는 그의 말에 대꾸할 기력이 없었다. 세상이 무너지든, 지구가 망하든 일단 한숨 돌릴 자리가 필요했다. 벽에 등을 대고 앉자 그나마 캄캄했던 눈앞이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젠장, 이렇게 될 줄 알았지. 그녀를 믿는 것이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자 어지럽던 시야는 조금씩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정신과 육체가 분리된 것처럼 차갑기만 하던 손에 감각이 생기고 주변 소리가 들렸다.



“젠장. 여기가 어디였더라.”



사고가 가능해지자 나는 하나씩 상황을 정리했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더라. 차에서 내려 이곳까지 뛰어왔고, 슬리퍼를 신고, 사용인에게 우리 검사님의 서재를 안내받았었지. 그러면 여기는 검사님의 방이겠구나. 검사님의 방이라고? 빌어먹을 지구온난화. 그래도 무사히 도착은 했네. 헌데 왜 이리 조용하지?

보통 손님이 이 꼴이면 타박이든 한숨이든 어떤 반응이 들리기 마련이었다. 문득 든 생각에 나는 고개를 들어 이리저리 돌아보았다. 그리고 반대편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찾았다. 죽은 듯이 바닥에 엎어져 있는 그녀와 그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남자는 제 앞의 부랑자를 몇 번 손으로 툭툭 건드리더니 이마를 짚었다.



“드디어 정신을 놨구나.”

“말 걸지 마. 힘들어 죽을 것 같아.”



나는 두 사람 가까이 가기 위해 벽에 손을 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기증이 몰려왔지만 심하지 않아 금세 사라졌다. 그들이 만담할 동안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빗줄기를 뚫고도 무사한 게 용하다.”



그의 서재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재해석된 왕궁이었다. 고풍스럽고 우아하면서도 곳곳에 현대적인 느낌이 물씬 풍겼다. 뻐꾸기 우는 시계와 공기청정기 소음의 조합이라니. 문을 제외한 벽면에는 책장이 가득하고 방 가운데쯤에는 세련된 소파 네 채와 고전적인 테이블 하나가 놓여있었다. 그 뒤로는 흑색에 가까운 서재 책상과 벽 전체를 차지한 커다란 창문이 보였다. 창가에는 화분 대신 티백과 간식이 담긴 철 바구니가 보였다. 동그란 사탕을 담아 파는 분홍색 바구니를 티백 통으로 쓰다니. 사내는 외모와 달리 꽤 서민적인 사람이었다.

나는 멀뚱히 서 있다 안고 있던 나무 상자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한참 대화하던 집주인이 피식 미소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이거 받으세요. 마시면 훨씬 괜찮아질 겁니다.”



검사가 내민 진회색 머그잔에서 진한 커피 향이 났다.



“감사합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그와 이렇게까지 가까이 마주 본 건 처음이다. 나는 몰래 그를 훑어내리며 살폈다. 가지런히 빗은 머리칼과 두꺼운 검회색 카디건, 반듯하게 다린 하얀 셔츠와 검은 바지, 카디건 소매 사이로 보이는 비싼 손목시계까지 모두 명품이었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볼 법한 모습인데다가 외모도 괜찮은 편이다. 누가 봐도 축복받은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나 엘리트 코스까지 밟은 전형적인 화이트칼라였다. 여전히 온몸으로 ‘나 유능한 검사입니다.’ 라 외치는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조금 특이한 점이라면, 다른 사람보다 손가락이 굵고 길었는데 이상하게 양쪽 손 모두 바깥으로 심하게 휘어있었다. 보통은 잘 사용하는 손만 변형이 오지 않던가. 아주 오랫동안 양손잡이로 살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피아노라도 쳤던가. 그러고 보니 현악기도 손에 변형이 오던가.



“마당은 뒀다가 어디 쓸 건지 모르겠네요. 또 상가 공용 주차장을 이용한 모양입니다.”

“밀회를 들킬 수는 없으니까.”



그녀가 유쾌하게 소리쳤다. 검사는 당당한 외침이 어이없는지 실소를 터뜨렸다. 그래, 저 해맑은 얼굴에 누가 화를 내랴.



“어련할까.”



검사의 목소리는 가볍고 차분하며 격식 있었다. 애매한 표현이긴 하지만, 정말 그러했다. 강박적으로 예의를 차리고 과하게 신사적인 행동을 했다. 하지만 거부감이 들기보단 오히려 흥미로웠다. 게다가 그의 말투와 손짓은 굉장히 호감적이라 무슨 부탁이든 다 들어주고 싶었다. 의도된 행동인지 몸에 밴 습관인지 헷갈린다만, 만약 전자라면 소름 돋을 정도로 사람 심리를 잘 아는 검사일 것이다.

아무튼 그는 내게 다가와 소파 중 한 자리로 안내했다. 그리고는 책상을 바라보던 온풍기를 들고 와 나와 그녀에게 골고루 향하도록 조절했다.



“저 친구는 항상 제 예상을 뛰어넘네요.”

“괴짜잖아요.”

“하하. 참, 갈아입을 옷을 찾아볼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저보단 검사님 친구분이 필요할 거 같아요.”



따뜻한 바람이 몸에 닿자 축축했던 기분이 조금 괜찮아졌다. 소파 위에 퍼진 우리를 살펴보던 검사는 책상 서랍을 열어 두꺼운 수건 두 장을 꺼냈다. 온풍기에다가 그가 머리에 씌운 수건 덕에 물기가 빨리 마르는 것 같았다.



“저 친구를 원망하진 마십시오. 멀리 차를 세우고 돌아온 건 아마 기자들을 피하기 위해서일 겁니다. 아시다시피 요즘 최근 일어난 자살 사건을 방화 사건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그러기 위해선 최초 발견자를 찾아내서 취재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는 짧은 숨을 내쉬더니 그녀에게 다가가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그가 시선을 맞추자 찔리는 구석이 있는지 그녀가 어색하게 웃었다. 변명하려는 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이내 긴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니, 그게.”

“오늘은 마당에 세우라 했잖아. 네가 모세니? 바다 대신 비를 가르려고? 내가 날씨랑 싸우지 말랬지.”

“가능한 한 빨리 만났으면 좋겠다며. 그리고 한 번쯤은 자연과 싸워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기막힌 대답에 그는 잠시 그녀를 노려보더니 다시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리 무모할 줄은…. 제가 선생님을 찾아뵙는 게 훨씬 나은 선택이었던 것 같네요.”

“아니에요. 가끔 이런 경험도 해봐야죠. 영화 속 한 장면 같고 좋았어요.”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저 미소와 목소리가 낯설지 않았다. 어디서 본 적이 있던가. 연예인 중 누군가를 닮긴 했지만, 그보다 더 가까운 위치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다. 언제였지? 어디서였더라.

생각에 빠져 한참 얼굴을 찌푸렸더니 날 바라보는 그의 눈이 점점 동그랗게 변했다. 안절부절못하는 그를 보자 아차 싶어 나는 들고 온 나무상자를 급히 가리키며 화제를 바꾸었다.



“참, 이 상자를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 후 상자의 포장지를 풀었다. 검사의 상체에 가려 안에 든 것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라벨이 붙은 유리병인 걸 보아 와인 중류가 확실했다. 라벨 표면에는 A4 용지를 잘라 만든 쪽지도 붙어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뭔가를 읽은 그는 부드럽게 미소 짓더니 다시 상자에 집어넣었다. 그리곤 자신의 벗은 카디건과 함께 내가 앉은 곳 맞은편 소파에 두었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그와 시선을 맞췄다.



“일단 우리 서로 뭐 하는 사람인지 알 테니 소개는 생략할까요?”

“그러죠. 아, 참. 외투를 이리 주시겠습니까.”



그는 내가 코트를 벗을 수 있도록 거들었다. 옷을 모두 옷걸이에 건 후 이번엔 등 뒤로 다가왔다. 내가 소파에 앉자 그는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닦았다. 왜 이렇게까지 친절을 베푸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행동보다 더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

검사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특이한 냄새가 났다. 희미하긴 해도 자극적이고 인공적인 향이었다. 그와 어울리는 것 같기도,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한 묘한 냄새에 나는 오감을 날카롭게 곤두세웠다. 나름대로 향수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향은 처음이었다. 나무로 만든 오래된 책장으로 들어가면 이런 냄새가 날까. 무슨 향수를 뿌린 거지. 아, 이건. 나는 다시 벌린 입술을 닫았다.



“대충 마른 거 같네요.”



몸이 개운해지자 나는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바닥에 다리를 뻗고 벽에 상체를 기댄 채 숨만 쉬고 있었다. 이따금 두 손으로 커피를 감싸 쥐고 홀짝홀짝 마셨다. 물기를 닦을 생각이 없는지 수건을 머리에 올려둔 채 머그잔 안을 후후 불어댔다.



“분명히 아침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왜 갑자기 비가 내리는지 모르겠어.”

“라디오에서 비 온다고 그랬잖아. 말 잘하는 것 보니 정신 차렸구나?”

“허, 난 원래부터 멀쩡했네요.”



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말하기가 무섭게 몸을 크게 휘청이더니 동아줄 잡듯 의자 등을 껴안았다. 우린 그녀가 넘어지기라도 할까 봐 본능적으로 몸을 붙잡았다. 그는 불안한지 거의 상체를 껴안듯 받쳐 들고 소파로 내리눌렀다. 앉아, 앉아. 제발 앉아. 주문처럼 웅얼거리는 두 단어에 그녀가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미안. 사실 며칠째 잠을 못 자서 정신이 없어.”



그녀는 커피를 다시 마시더니 오만상을 쓰며 거칠게 탁자에 내려놓았다. 정신이 드니 쓴맛이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우유가 들어간 커피도 쓰다고 못 마시는 사람이 어째 시럽 없이 잘 마신다 했네. 나는 담배케이스에서 각설탕 하나를 꺼내 머그잔에 떨어뜨렸다. 그러자 이번엔 만족스러운 듯 빙그레 웃으며 시원스럽게 음료를 들이켰다.



“연쇄 방화 사건 때문이야? 장난 아닌가 보네.”

“장난 아닌 수준이 아니야. 해결될 때쯤 관련자들 과로로 죄다 병원에 있을걸. 나야 건물 안에 갇힌 신세지만 현장 뛰는 사람들은 전국이 무대잖아. 어휴, 엄청나게 고생이더라. 단서가 없어서 존나 뛰어다닌대.”



존나가 뭐니, 존나가. 검사는 자신의 소매를 걷어 올리더니 그녀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그녀 역시 그를 따라 제 뺨에 손등을 비비며 열을 쟀다. 마치 자신이 건강하다는 걸 증명하고 싶은 듯 몇 번이나 얼굴을 만져대더니 입술을 삐죽거렸다. 아주 자신 있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자, 괜찮아. 봐. 열없지?



“그러니까 몸 챙겨야지. 면담이 금방 끝나도 비 그친 뒤에 돌아가. 난 네 교도소 면회는 갈 수 있어도 병문안은 못 간다.”

“장례식장은?”

“못 하는 말이 없지.”

“당연하지.”



그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저벅, 저벅, 규칙적인 발소리가 바닥을 울렸다. 나는 그의 움직임에 따라 시선을 옮기며 조용히 지켜보았다.



“대화에는 간식이 필요한 법이죠. 혹시 작가님은 못 먹는 것이 있습니까? 달걀, 땅콩, 호두…. 따로 듣긴 했지만 제가 빠뜨린 것이 있나 싶어서요.”

“섬세하시네요.”



내 대답에 그는 창가의 철제 바구니에서 작은 나무 접시 하나를 꺼냈다.



“당연한 겁니다. 제 지인 중에도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 있거든요.”

“저런.”



그는 상자 속 쿠키를 몇 개 골라 담았다. 그리곤 잠시 창문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피식 미소 지었다. 무엇을 본 걸까. 아니면 뭔가를 떠올린 걸까. 아무튼, 그는 그리 웃더니 다시 우리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가 손님 응대를 준비할 동안 책장을 쭉 살폈다. 검사님이 볼만한 책과 교양서적 가운데 두꺼운 스크랩북과 바인더가 보였다. 평범한 일벌레의 공간이구나 싶어 다시 테이블로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아래 놓인 의자를 바라보았다. 아주 두꺼운 법률 관련 서적과 만년필 하나가 있었다. 문제는 그 아래에 있었다. 책 밑에 신문 한 뭉치가 가지런히 접혀있었다. 나는 홀린 듯 손을 뻗어 신문을 꺼냈다. 종이 상태를 보니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언제자 신문이지?



“조간신문이네요.”



오늘 자 조간신문. 1면 표지에는 커다랗게 ‘잔인한 연쇄 방화 살인마인가, 모방범인가.’란 글자가 커다랗게 박혀있었다. 그 아래 사진에는 테이프가 처진 사건 현장 사진이 있었지만, 일부로 잔인한 장면을 비켜 찍은 건지 구도가 애매했다. 하긴 잔인한 사건들이니 사진 중 가장 덜 자극적인 것으로 고른 모양이었다. 부제목과 내용에는 지금까지 나온 조사 결과가 아닌 수사관들을 향한 비판과 악의가 가득했다. 쯧, 쯧, 쯧, 나는 혀를 차며 신문을 접었다.



“말씀하신 대로네요. 벌써 방화범 짓으로 만들려 시동 거는데요? 사건 일어난 지 한 달이 지났는데 아직도 떠들썩하네요.”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게 남의 집 불구경이니까요. 게다가….”



신문 표면을 손가락으로 더듬자 울퉁불퉁한 선이 만져졌다. 누군가 펜으로 줄을 그으며 읽은 모양이었다.



“자극적이잖습니까. 수사 관련자들이 하나같이 쩔쩔맬 정도니 얼마나 재미있겠어요. 그런 일은 더 부풀려야 짜릿하죠.”



그래. 어마무지하게 자극적이지. 사실 사건 자체에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어떤 미친놈이 라이터를 들고 집이란 집마다 불을 지르고 다니는데 이유와 동기를 알 수가 없을 뿐이었다. 하는 짓이 죄다 의문투성이인데다가 파악할 수 없는 범인이니 당연히 잡기 힘들 테고.

차에서 그녀가 한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검사가 내 이야기를 들으려는 이유를 알만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제 제가 왜 선생님을 찾았는지 아시겠나요?”

“네.”



빗속을 뛴 탓인지 목에서 쇳소리가 났다.




YUNSSAEM 맞음 인외 초월자 미스터리 최고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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