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락원호] 찰나의 순간


파란 테이블, 붉은 컵라면 두 개, 포장이 벗겨지다 만 단무지 하나. 제 앞에 무성의하게 놓인 것들을 훑어 내리는 남자의 시선이 천천히 제 맞은편 상대방에게 향했다. 언제나처럼 살짝 찌푸려진 미간의 소유자는 바쁘게도 양손을 놀려댔다. 투명한 비닐 포장지가 무참히 벗겨지고 매콤한 분말가루가 공중에 흩날릴 때도 하얀 티셔츠의 남자, 락의 입은 굳게 닫혀있었다.


"야 인마, 배 안 고프냐?"

"… …."

"아직 아무것도 안 먹었을 것 아니야. 겨우 컵라면이라 싫으냐?"

"… …."

"새끼, 설렁탕이라도 시켜줄 걸 그랬나."


온통 검은색의 옷으로 무장한 것만 같은 원호가 더 이상 말하는 것을 멈추고 제 앞에 놓인 것에 집중했다. 얇은 뚜껑을 열자마자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나무젓가락을 뜯는 그의 얼굴에는 잔잔한 기대감이 일렁였다. 하얗게 일어난 그의 입안으로 채 익지도 않은 것 같은 면발들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가끔씩 들려오는 자동차의 경적, 그들의 근처를 지나가는 행인들의 이야기 소리에도 면발을 우물거리는 소리는 어쩐지 락의 귓가를 두드리는 듯했다.

하얗고 둥그런 컵라면 바닥이 하늘을 향하고, 술에 절어있던 속을 풀어내는 사람처럼 입맛을 다시던 원호의 눈에 아직 포장도 뜯지 않은 컵라면이 들어왔다. 아래로 내리깐 시선, 눈썹을 가리는 가느다란 머리카락, 곧은 입매. 마치 사람 같지 않은 그 모습에 질렸다는 듯 원호가 짧게 혀를 찼다. 짧게 다듬어진 그의 투박한 손가락이 테이블 위를 두드렸다.


"너 괜찮은 거 맞냐?"

"… …."

"아이고, 그럼 도대체 문제가 뭐야. 나는 너 굶어 죽일 생각 없다."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원호의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밝아진 화면 속에는 곧 있을 작전을 위해 노트북 앞에서 떠나지 못할 제 팀원들의 심부름이 적혀있었다. 박카스 최대한 많이 부탁드려요. 화이트보드 옆 자그마한 냉장고에 들어있던 갈색 병들이 모두 제 소임을 다한 모양이었다. 새로운 할 일이 생긴 원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울퉁불퉁한 시멘트 바닥 위, 플라스틱 의자가 밀려나는 소리가 제법 시끄러웠다. 희미하게 바랜 검은 가죽 지갑을 들고 다시금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려는 원호의 등 뒤로 작지만 분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매운 건 싫어해서요."

"뭐?"

"… …."


겨우 제대로 된 목소리를 들어보나 싶었던 것도 잠시, 매끈하게 뻗은 락의 입술이 다시금 다물어졌다. 하지만 어정쩡하게 일어선 원호를 올려다보는 락의 두 눈에는 조금의 장난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빤히 저를 바라보는 시선을 온몸으로 느끼던 원호의 표정이 결국 허물어졌다. 낮은 그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호탕하게 깃들었다. 두 눈을 찡그려가며 웃어대는 원호의 얼굴 위로 오후의 햇살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만큼은 거칠게 일어난 그의 얼굴도, 하얗게 말라버린 그의 입술도 생생한 활기를 되찾은 것만 같았다. 내내 아래쪽을 향하고 있던 매끈한 시선이 원호의 얼굴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마치 그의 등 뒤에서부터 쏟아져내려오는 것만 같은 햇살이 락의 얼굴을 적셨다.


"아, 이거 진짜 골 때리는 새끼네…."

"… …."

"알았다. 이번에는 안 매운 걸로 사다 줄 테니까, 먹기나 해. 토 달지 말고."

"… 네."


여전히 웃음기가 남아있는 쾌활한 목소리가 락의 머리칼을 간질였다. 원호의 너른 등이 편의점 유리 문안으로 사라졌다. 팀장에게 심부름을 시킨다며 투덜거리던 원호의 목소리가 자꾸만 들려오는 것 같아 락은 한동안 제 귓가를 만지작거려야만 했다.




마음 가는대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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