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막 쓰는 썰

* 나이차이 7살




윙은 요 며칠새 자기를 괴롭힌 일련의 단어들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음. 지난 번에 웬수같은 친구놈들이 윙과 녤을 연애한다고 놀려댔을 때부터 윙을 잠 못 들게 만들었던 단어들이었고, 그 단어들은 예전에 녤이 술에 많이 취했던 날 윙에게 보여준 그 때의 행동과 맞물렸음. 윙은 더 이상 그 날을 기억하고 싶지 않았음. 녤이 윙에게 보여줬던 그 날의 표정만 생각해도 배가 찌르르 아파왔기 때문임. 그래서 안 그래도 애써 지우려고 해 흐릿한 기억을 더욱 머리에서 떨쳐내려고 애썼음. 자꾸만 머리를 털어냈음. 


- 안 어지럽나, 머 자꾸 그리 머리를 흔드노.

- 아, 깜짝이야!


윙이 파드닥거리면서 놀라는 바람에 녤이 더 놀라서 하마터면 들고 있던 팝콘을 그대로 윙 머리에 엎을 뻔함. 겨우겨우 팝콘 붙잡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서는 쓰읍, 소리를 내면서 윙을 혼내는 척함. 

오늘은 윙이 예전에 약속했던 영화를 보기로 한 날이었음. 예정했던 것보다 많이 미루어지긴 했지만 윙이 간신히 기억해낸 덕분에 보기로 했던 영화가 스크린에서 내려가기 전에 여차저차 볼 수 있게 되었음. 거의 끝물이라 심야밖에 시간이 없긴 했지만 다행히 금요일이라 녤도 흔쾌히 오케이해서 온 거였음. 영화관은 심야인데도 제법 사람이 있어서 북적였음. 


- 팝콘 다 엎을 뻔 했다.

- 미안, 딴 생각을 하다가.

- 무슨 생각에 정신이 팔렸는데?


윙이 있는 힘을 다해 고개를 저으면서 입을 꾹 다물었음. 녤은 싱겁게, 한 마디 하더니 콜라나 빨리 가져가라고 내밈. 그러고보니 팔 안쪽에는 팝콘을 끼고 양손에 콜라를 하나씩 든게 위태로워보여서 윙이 얼른 정신차리고 콜라를 가지고 옴. 팝콘도 가져오려고 했는데 됐다, 하면서 녤이 거절하는 바람에 딸랑 콜라만 가져옴. 


- 몇 관이었제?

- 8관, 아직 시간 좀 있어.


극장 앞에 대기용으로 마련된 의자에 둘이 털썩 앉음. 윙은 벌써부터 팝콘을 옴뇸뇸 집어먹기 시작함. 달달한 캐러멜 팝콘은 윙이 좋아하는 거라 자꾸 손이 갔음. 녤은 윙이 팝콘통의 위를 앉은 자리에서 거진 다 긁어먹는 것을 보다가 윙 쪽으로 고개를 기울임. 윙이 잉? 하는 사이에 윙 귓가에다가 돼지야, 하고 속삭이는 바람에 윙이 못나게 얼굴을 구기며 녤 어깨에 팝콘을 툭툭 던짐. 녤이 큭큭 웃다가 팝콘통을 윙한테 넘김. 윙이 짜증을 팍 냄.


- 아, 안 먹어, 안 먹어!

- 마, 들고 있어봐라. 


녤이 허리를 숙이길래 뭐가 있나 싶어 윙이 고분고분 팝콘을 양손으로 들었음. 녤의 손이 뻗어진 곳은 윙의 스니커즈 쪽이었음. 삐뚤빼뚤한 리본으로 대충 매어져 있던 끈이 어느새 한쪽으로 풀려 있었음. 


- 하이간, 손이 안 가는 데가 없다.


녤이 말로는 투정을 부리면서도 윙의 스니커즈 끈을 묶는 손은 제법 세심했음. 끈을 한 번 돌려 얌전히 리본을 묶는데 윙이 매었던 것 보다 훨씬 그럴듯 했음. 항상 녤은 이런 식이었음. 먹는 것도 윙한테 양보하고, 챙기는 것도 윙을 제일 먼저 챙기고. 제 일보다는 윙의 일이 더 중요한 것 처럼 굴었음. 그러다가 또 애써 지우려고 했던 기억들이 떠올라서 푸르르 고개를 털었음. 윙은 녤의 뒤통수를 내려보다가 툭 말을 던짐.


- 여자들한테 인기 많겠다. 


녤이 고개를 휙 들었음. 자기한테 한 얘기냐고 묻는 듯한 시선에 윙이 허둥거렸음. 윙도 자기가 왜 그렇게 말을 해놨는지 모를 일임. 그러고보니 녤이 여자들이랑 어울리는 걸 보진 못했음. 갑자기 궁금해졌음. 녤은 여자들한테 어떤 식으로 하는지. 윙한테 하는 거랑 똑같이 하는 건지. 그렇게 되면 윙이 말했던 것처럼 정말로 여자들한테 인기 많을 텐데. 윙이 또 삼천포로 생각을 빠뜨렸다가 녤의 따가운 시선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변명을 하듯 주절거림.


- 아니, 그냥, 나한테 하는 거 보면, 되게 잘 챙기잖아.

- ... 너니까 챙기지, 마. 

- 왜? 

- 어?

- 왜 나라서 그런 건데?


윙의 물음에 녤이 자못 당황한 것 같이 보였음. 그런데 그것보다 더 놀란 건 그 질문을 해버린 윙 자신이었음. 아무래도 제 입이 제 말을 안 듣고 맘대로 움직이는 것 같았음. 이건 다 빌어먹을 친구놈들 때문이고, 그 놈들이 했던 농담에 이상하게 얽혀드는 녤의 행동때문이라고 책임회피를 했지만 이미 뱉어진 말을 주울 수는 없었음. 긴장이 됐음. 대답을 하려는 녤의 입술이 열리는 게 너무 느렸음.


- ... 너같이 손 가게 만드는 애가 또 있겠나.


녤은 조금 뜸을 들이긴 했지만 별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며 윙의 머리를 습관처럼 흩뜨림. 8관 입장하세요, 영화관 직원이 외치는 바람에 다시 팝콘을 가져가는 녤의 얼굴을 제대로 보진 못했음. 콜라 가져가! 넬이 자리에 놓고 간 콜라를 윙이 대신 들고 극장 안으로 들어감.




*



영화에 집중이 안됐음. 어두운 곳에서 스크린만 보고 있으려니 자꾸 딴 생각이 드는 이유 때문이었음. 영화가 지루하게 흘러갈 땐 더했음. 녤이 바로 옆에 앉아있기 때문인지도 몰랐음. 스크린의 불빛에 비치는 녤의 옆얼굴을 흘긋 보다가 눈이 마주칠까 얼른 앞을 보고 다시 팝콘을 우걱우걱 씹었음. 

손이 많이 가니까. 단지 그 이유만으로 녤의 모든 행동을 설명하기엔 부족했음. 친구들 말대로 혈육도 아닌 이웃 사이에 녤과 윙만큼 친해지기란 쉽지는 않은 거긴 했음. 윙은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진짜로 녤이 말한 정도의 가벼운 이유로는 설명하긴 어려웠음. 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음. 녤이 윙을 하나하나 챙겨주던 행동들, 윙 동기들에게서 왕자님이라고 불릴 만큼 데리러 오던 일들, 윙이 홧김에 데리러 오지 말라고 했을 때 비쳤던 상처받은 눈, 그리고 녤이 술에 취했던 그 날.


[ 좋아서 미쳐불겄다... 우짜노.. ]


헉. 보이지 않게 기억 저편에 구겨넣었던 게 갑자기 팟 하고 떠올라서 윙이 혼자서 놀람. 윙이 몸살의 열과 함께 모두 날려버린 줄만 알았던 그 날, 녤이 유난히 윙에게 차가웠던 그 날의 기억이었음. 잊어버릴 리가 없지만 윙이 본능적으로 잊어버리고 싶어했던 기억이었음. 녤과 윙의 사이에 미묘한 파장을 일으키는 감정을 실은, 그 말. 

잊어버려, 다시 잊어버려. 윙이 필사적으로 기억을 눌렀음. 생각해선 안됐음. 그 기억을 다시 꺼내면 그로 인해 또 녤과의 관계가 틀어지고 말 거라는 두려움이 기저에 깔려 있었음. 그 기억이 표면에 드러나면 머릿속에서 사이렌이 울렸음. 왜냐면 그 날, 녤이 그 말을 했던 그 날, 녤은 생전 처음 윙을 한 번도 쳐다보지도 않았으니까. 그건 땅 밑에 묻힌 지뢰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음. 언젠간 터질, 절대로 밟아선 안되는 그런 무시무시한 지뢰였음. 그래서 윙은 절대로 건드리고 싶지 않았음. 그런데 자꾸만 불안해졌음. 


윙이 스크린에 멍하니 묶어두던 시선을 녤에게로 돌림. 설마, 그럴 리가. 윙은 애써 부정했음. 윙을 이렇게 혼란스럽게 만드는 모든 것들은 그저 윙의 착각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음. 그럴 게 분명했음. 스크린에 비치는 영화를 눈에 담던 녤이 문득 윙을 바라봄. 눈이 마주쳤고, 윙은 시선을 피할 타이밍을 놓쳐버림. 아. 멍청한 소리를 내고 말았음. 안 봐? 녤이 입을 벙긋거리며 스크린을 가리켰음. 

윙이 건조한 입술을 검지손가락으로 쓸며 푹신한 의자에 기댔음. 조그만 머리통이 터질 것 같아서 짜증이 다 났음. 아예 입술에 일어난 것들을 뜯을 요량으로 손톱을 세우는데 녤의 손이 윙의 손을 붙잡아 내림. 윙이 녤을 휙 쳐다보니 녤이 윙을 향해 고개를 저음. 하지말라는 뜻이었음. 그러더니 녤이 윙의 손을 잡았던 손으로 주머니를 뒤지더니 립밤을 꺼내줌. 

윙은 건네진 립밤을 받아들고는 쳐다보기만 했음. 윙은 항상 입술이 건조해서 겨울만 되면 입술에 피가 나는 게 다반사였음. 지금은 날이 따뜻하긴 했지만 윙이 생각한답시고 조금만 건드려도 일어났음. 그리고 그런 윙을 챙기느라 주머니에 맨날 립밤을 챙기고 다니는 건 녤쪽이었음. 녤이 윙한테 사다 준 립밤만 수십 개였고, 윙은 녤이 건네줄 때마다 받아 주머니에 넣어놓고는 잃어버린 것들이 수십 개였음. 그랬음. 항상 챙기는 건 녤이었고,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건 윙이었음. 윙은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었음. 설마. 


펑! 영화에서 폭발음이 나는 바람에 다시 스크린에 시선을 뺏김. 영화는 벌써 중반을 향해가고 있었음. 윙이 영화를 보기 시작하니 팝콘이 윙 쪽으로 기울었음. 녤이 윙 먹기 편하라고 윙쪽으로 살짝 기울여준 덕분임. 윙은 습관처럼 입술을 물다가 팝콘을 한움큼 집어 먹었음. 집어 먹는 손길은 조금 화가 난 것 같기도 했음.

다행히 영화는 지루한 부분을 지나 클라이막스로 지나고 있었고, 윙은 다른 생각은 않고 잠시간 영화에 집중할 수 있었음. 유일한 여자주인공이 죽음을 맞을 때는 조금 눈물이 나기도 했음. 콜라를 쪼로록 마시고 다시 팝콘에 손을 대는데 툭, 녤의 손이랑 부딪혔음. 녤이 서둘러 손을 뺐고, 윙이 먼저 팝콘을 집었음. 윙이 녤도 먹으라면서 팝콘통을 슥 밀어 녤 쪽으로 향하게 함. 녤은 윙의 손이 멀어진 걸 본 후에야 집어 먹었음.

또 툭, 손이 마주침. 녤이 또 급하게 손을 가져감. 윙이 옆을 보니 녤이 크흠, 하며 윙의 눈을 피해 스크린만 쳐다봄. 팝콘통이 작지도 않은데 자꾸 타이밍이 겹쳐버려 손이 큰 녤에겐 불편하겠다 생각을 했음. 그래서 윙이 팝콘을 크게 집어갔음. 녤이 마음 편히 먹으라고 나름 배려한 거였음. 


팝콘으로 가득했던 윙의 손이 다 비어버릴 무렵, 영화도 클라이맥스에 다다르고 있었음. 액션과 폭발음이 난무했음. 어떻게 끝이 날지 모르는 긴장감이 돌 때 윙이 팝콘통으로 손으로 가져갔고, 세번째 녤과 손이 부딪히고 말았음. 부딪혔다기보단 팝콘을 집으려던 녤의 손이 통으로 쏙 들어가버린 윙의 손을 잡아버린 꼴이 되었음. 그리고 이번엔 녤이 팝콘통을 놓쳐버리고 말았음. 

팝콘이 와르르 쏟아지는 소리는 어지러운 액션 소리에 묻혀버림. 윙이 놀라서 눈만 도루룩 굴리니 녤이 이마를 긁적이며 당황스러워 함. 그러더니 녤이 허둥지둥 일어나서 나가려고 함. 윙이 어디가, 속삭이니 녤이 하나 더 사올게, 하고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앉아 좁은 틈을 헤치고 나가버림. 

혼자 남은 윙은 녤에게 잡혔던 손을 다른 손으로 감쌌음. 영화도 다 끝나가고, 팝콘도 거의 바닥이었기 때문에 굳이 다시 사올 필요는 없었음. 윙이 또 입술을 건드렸음. 설마. 윙은 엔딩으로 향하는 영화를 가만히 보고 있을 수가 없었음. 잠깐 잊고 있던 것들이 봇물 터지듯 터져나와 마음을 어지럽혔음. 설마, 설마.



결국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녤은 돌아오지 않았음. 윙은 불이 켜질 때까지 녤이 나갔던 입구만 쳐다보다가 혼자 극장을 나오는 꼴이 되었음. 빈 콜라컵을 버리는데 녤이 다가옴. 녤이 엄청 미안한 표정으로 양 손에 팝콘을 들고 서 있었음. 아까 먹었던 라지 사이즈의 팝콘통 하나가 아닌, 스몰 사이즈의 가느다란 팝콘통 두개였음. 손이 겹쳐진다던가 할 일 없는, 두 개로 나뉘어진 팝콘.


- 벌써 끝났나. 좀 더 할 줄 알았는데.

- ...안 사도 된다니까 뭘 굳이 가서 사오고 그래. 이걸 누가 먹어.

- 맞나.


녤이 그렇게 말하면서도 윙한테 팝콘 하나를 건네줌. 윙은 받아든 팝콘을 보다가 먼저 앞으로 가는 녤의 뒷모습을 쳐다봄. 언제나 윙이 부러워했던 녤의 넓은 어깨가 눈에 담겼음. 아까 녤에게 잡힌 손을 주먹쥐어보다가 다시 폈음. 고작 손 잡은 것 가지고. 


[ 그냥 이웃집 형이 맨날 전화하고 데려다주고 데리러오고 한다고? 그게 돼? ]

[ 야이씨, 왕자님 온다고 친구를 버리냐? 연애가 먼저야, 우정이 먼저야! ]


그냥 이웃사이밖에 안되냐고 몇 번이나 되묻고, 연애놀음이라며 놀리던 친구들의 목소리가 웅웅 울렸음. 녤을 왕자님이라고 놀리던 것도, 녤이 그렇게 불리는 걸 유난히 싫어하던 윙 자신의 모습도.


[ 좋아서 미쳐불겄다... 우짜노.. ]


다른 생각이 뇌리를 날카롭게 스치고 지나갔음. 이미 그 지뢰가 터진 거라면? 밟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피했던게, 사실은 이미 밟아 터져 버린 건데 그걸 모른 척하고 그 위에 다시 얇은 흙을 덮어놓아 눈가림만 한거라면? 이미 그 터져버린 폭탄의 파편이 살갗을 찢어발겨버렸는데도 시선만 피하고 보지 못한 체 하고 있는것 뿐이라면? 

윙은 가득 들어찬 팝콘을 그 자리에서 놓쳐버리고 말았음. 녤이 놀란 얼굴로 달려오는게 보였지만 걱정스러운 물음에도 뭐라고 대답 하나 하지 못했음. 아아, 그랬구나. 이미 터져버렸던 거였구나. 그랬는데도 모른 척 내가 흙을 덮으니 온몸이 찢어져버린 주제에 아닌 척, 괜찮은 척 숨겨주었던 거구나.

그래서, 그렇게 아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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