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끝 유교수 16





난 이제 못해- 진짜 이러다 죽을 수도 있어-, 죽기 전에 놓아줄게-, 아 왜이래- 나 더이상 못해-, 해보지도 않았잖아-, 아 그마안-! 이 개새ㄲ-, 개새끼라는 내 말에 그가 멍멍- 소리를 내며 그대로 내 입술을 물었다. 그는 내가 죽기 전까지 괴롭히다 정말 죽을 것 같은 순간에 나를 놔줬다. 자신의 의지로 나를 놓은 것이 아닌 제발 이제 그만 하자는 내 손에 밀려난 것 뿐이었다. 내가 이것조차 밀어내지 않았으면 아마 그는 끝까지 날 괴롭혀 왔을 것이 안봐도 뻔했다. 


몇 번이나 소리를 지른 건지 그를 부르는 내 목소리는 걸걸하게 잠겨 나오지도 않고, 그가 나를 잡고 있던 손을 놓자마자 그대로 욕실에 주저 앉았다. 내가 무릎을 욕실 타일에 박기 전, 다행히도 그가 내 허리를 안아 나를 들어 올렸고, 무릎이 깨지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다리가 떨려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다. 자기 팔을 잡고는 내가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자, 그는 나를 몰아 세우던 아까와는 다른 천사표 얼굴을 장착 하고는 내 얼굴 곳곳에 쪽쪽거리며 가볍게 입을 맞췄다. 


씻겨준다는 말대로 그가 나를 씻겨서는 샤워 가운을 입힌 채, 나를 침대까지 데려다놨다. 침대에 눕자마자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잠이 든 것이 아니라 정말 쓰러진 게 맞았다. 정신을 잃은 것 같기도 하고. 그가 씻으러 간다는 말 따위는 내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죽은 듯이 자다가도 인기척에 눈을 떠보면 그는 수건으로 젖어 있는 내 머리 한 웅큼씩 잡아 두 손으로 조심스레 비비며 말리고 있었다. 




" 제발 자- " 

" 깼어? 미안 더 자- " 

" 제발- " 

" 응 알았어- " 



제발 나 좀 그만 만지고 자라는 내 말에도 대답으로는 알았다며 내 말 뜻을 알아 들은게 맞기는 한건 지, 그는 계속 내 머리를 말려줬고, 나는 그냥 포기한 채 다시 잠들었다. 


여주야-, 나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몸을 조금이라도 뒤척일 때마다 내 팔다리가 여기에 붙어있다고 알려주기라도 하듯 온 몸이 쑤셔 왔다. 허벅지는 말도 할 것 없고, 팔이며 다리며 그냥 내 몸에 붙어있기만 한 것 같았다. 안그래도 체력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사람의 체력이 단 1 프로도 없다면 지금 내 모습과 같지 않을까 생각했다. 침대에 누워서 눈만 뜨고 숨만 쉬고 있을 뿐이지 시체나 다름없었다. 

엎드려서는 눈만 꿈뻑거리자, 그가 내 앞을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준다. 그제야 내 시야에 그가 들어 온다. 그는 누워있는 내 볼을 손등으로 쓸었다. 그 부드러움에 다시 잠이라도 들려고 하면 여주야- 하고 나를 불러 깨웠다. 



" 여주야 " 

" 나 못해... " 

" 뭘? " 

" 못 해... " 


" 알았어 안 해- "




그가 나를 부를 때마다 못해라는 말이 자동적으로 입 밖으로 나왔다. 아씨. 얼마나 나를 괴롭혔으면 내 입에서 자동적으로 못한다는 말이 나오냐. 무엇을 못 한다는 건지 주어도 없이 내뱉은 말이었지만 그는 단번에 알아차리고는 알았어 안해-, 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근데 잠깐만 일어나봐-, 일어나보라며 그가 엎드려 있는 날 돌려 눕혔다. 그 조금의 움직임에도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나를 똑바로 눕힌 그가 내 한 쪽 팔을 잡고는 손으로 부드럽게 쓸었다. 그 느낌에 몸을 비틀며 그가 잡고 있는 팔을 빼려고 하자, 내 팔에 제 얼굴을 묻고는 가볍게 입술을 붙였다. 내 움직임이 멈추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든다. 




" 차에서 영양제 가져왔는데 이거 하나만 맞자 " 

" 싫어- " 

" 맞으면서 자... 응? 안그럼 너 일어나지도 못해 " 



그는 내가 대답할 때 까지 기다렸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뗀 그가 나를 안아서는 침대에 똑바로 눕혀 준다. 그리고는 내 팔에 링거 바늘을 꽂아 넣었다. 잠깐 따끔한 정도였지만, 그 아픔에 인상을 쓰자,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얼른 더 자-, 그렇게 다시 눈을 감았다. 




어느정도 지났을까. 아까보다는 몸이 훨씬 나아졌다. 누군가가 정신차리라며 깨우지 않아도 나 스스로 눈을 뜰 수 있는 정도면 많이 좋아진 거다. 잠을 자서인 것도 있지만, 결국은 죽어가는 나무에 꽂힌 영양제 마냥 내 팔에 꽂힌 링거가 내 체력에 크게 보탬이 되었다고나 할까. 영양제를 맞자며 잠깐 눈을 뜨고 있었을 때 만해도 바깥이 어두워서 인지 걷어져 있던 커튼이 쳐져 있다. 방 안은 어두웠지만, 커튼 틈 사이로 밝은 빛이 조금씩 새어 나오는 걸 봐서는 아침이기는 한가 보다. 


몸을 옆으로 돌아 누웠다. 으흐- 움직일 때마다 앓는 소리가 난다. 내가 일어난 것을 알았는지 책상에 앉아 뭘 보고 있던 그가 마치 내가 일어나기 만을 기다리던 사람처럼 자리에서 튀어나듯 일어난다. 




" 일어났어? 몸은 좀 어때? " 

" 몇 시에요? " 

" 지금 8시 반. 조금 더 자도 돼- " 

" 이거 얼마나 더 있어야 돼? " 

" 한 10분 정도. 이제 정신이 좀 들어? " 



고개를 끄덕였다. 링거가 꽂혀있는 팔을 살짝 들었다. 그러자 그가 왜? 불편하면 지금 빼줄까? 하고 묻는다. 이거 진짜 오바야-, 이거 아니었으면 일어나지도 못했을 것 같은데?, 그렇게 걱정되면 적당히 했으면 됐잖아-, 난 적당히 했어-, 적당히? 지금 적당히 라고 그랬어?


누워있던 몸을 살짝 일으켜서는 침대 옆에 있는 테이블을 살폈다. 언제 치웠는지 주위가 깔끔하다. 테이블 서랍을 열어서는 그 안에 있는 상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상자 끝을 뒤집어 탈탈 터니 그 안에서 내용물 딱 2개가 바닥에 떨어진다. 아-, 어제 기억이 다시 머릿속에 되살아 나는 것 같아서 온 몸이 떨린다. 다시 침대에 누워 그 상자를 그 앞에 내밀었다. 



" 거기 아래에 뭐라고 적혀있는지 읽어봐요 " 

" Ultra thin? " 

" 아니 그거 말고- " 

" 10개입 이거 말하는 건가? " 

" 10개가 한 상자에 들어있다고 해서 한 번에 쓰라는 게 아니에요. 10개의 반은 5개인데, 지금 2개 남았잖아요- 이게 적당히야? 적당히는 어느정도 평균에서 웃돌아야지- " 

" 적당히 하려고 했어- " 

" 아까는 적당히 했다며 " 



그가 할 말이 없는지 입을 다문다. 들고 있던 것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는 미안- 다음부터는 노력해볼게- 란다. 다음? 다음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침대에 누워 골골거리는 나를 보고 그가 어땠을지 안봐도 눈에 훤하다. 자기도 많은 생각을 했겠지.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말투와 금방이라도 줄 수만 있다면 제 체력을 다 나한테 줄 것 같은 표정에 더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링거 바늘이 꽂혀 있는 내 팔을 조심스럽게 만지던 그가 내 볼을 제 손등으로 쓸었다. 뭐 좀 마실래?, 응-, 조금만 기다려-, 올 때 내 폰도- 그리고 가방도-, 알았어-, 내 말 한마디에 나가는 그를 보고는 잠깐이나마 눈을 감았다. 집에서 우리 엄마도 안 해주는 건데. 아 이 얼마만에 누려보는 호사야. 침대에 누워서도 혼자 낄낄거렸다.



마실 것을 들고 온다는 그는 트레이 위에 냉장고에 있는 마실 거란 마실 것을 다 들고 온 듯 했다. 네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일단 다 챙겨와봤어. 뭐 이런건가. 침대 헤드에 기대 앉아서는 그가 가져온 것을 하나씩 훑었다. 물은 그렇다쳐도 오렌지 쥬스에 포도 쥬스에 내가 좋아한다고 한 바나나 우유에다가 같은 브랜드 딸기 우유에 저건 또 뭐야? 녹즙?, 아- 저걸 보니 괜히 머리가 지끈거린다. 



" 장사하세요? 물만 가져오지 " 

" 뭐 마실래? " 

" 바나나 우유 " 



그는 그럴 줄 알았다며 슬쩍 웃고는 컵에 바나나 우유를 따라 내 앞에 내민다. 폰은요?, 여기-, 무슨 내 생활 패턴에 이미 셋팅된 로봇 마냥 내 말 한마디에 뚝딱이다. 편하기는 하네. 핸드폰을 들고는 어제 온 연락 카톡을 보가 문득 스치는 생각에 그를 쳐다봤다. 



" 아 근데- 오늘 미국 가는 날 아니에요? 몇 시 비행기야? " 

" 밤 11시 반. 미룰까? " 

" 이유도 없이 가는 날을 왜 미뤄? " 

" 이유가 왜 없어? " 

" 그 이유가 설마 나는 아니겠지? "

" ... " 



그가 말이 없다. 나때문인가 보네. 다 떨어져가는 약을 보고는 링거 바늘을 빼려고 하자, 자기가 하겠다며 내 손을 잡는다. 잡지말라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는 링거 바늘을 뺐다. 내가 좀만 잘못 다뤄도 깨지는 유리도 아니고, 별로 아프지도 않은 내 행동에 그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밴드나 줘요-, 어-, 그가 밴드를 까서는 직접 내 팔에 붙여주려고 한다. 


됐어요. 줘요- 내가 할게-, 그의 손에 들린 밴드마저 빼앗아 붙였다. 갑자기 차가워진 내 행동에 그가 또 안절부절이다. 이제 일어 나야겠다 싶어 내 몸을 덮고 있는 이불을 걷어냈을 뿐인데 그가 내 손을 잡는다.



" 내가 또 뭘 잘못했어? " 

" 네? "  

" 아니 갑자기 이러니까... 혹시 어제 내가 너무 몰아세워서 그런 거라면 나도 잘못했다 생각해 " 

" 잘못한 거 없어요. 아! 근데 나 때문에 비행기를 미룬다면 그건 잘못이겠지? " 

" 응... " 



침대에서 일어나자 그의 시선이 나를 따라온다. 그의 시선에 입고 있는 샤워가운을 더 여미고, 욕실로 가려는데, 여주야- 하고 부른다. 그 부름에 뒤로 돌았다. 왜요? 



" 어제 일 말이야- 네 생각은 어떤가 해서... " 

" 내 생각이요? 뭔 생각? " 

" 네가 저번에 그랬잖아. 요즘은 서로 자고도 안 맞는다 싶으면 없던 일로 하고 그런다고 " 

" 그래서 뭐. 없던 일로 하고 싶다고? " 

" 아니 전혀! 그럴리가 없잖아 " 



내 물음에 침대에 앉아있던 그의 몸이 반쯤 일어났다가 다시 앉았다. 그 모습이 웃겨 웃으니 그가 애꿎은 입술만 씹어댈 뿐이다. 


" 말이 그렇다는 거지. 저희가 뭐 잤다고 해서 그 다음날 없던 일로 하고, 서로 얼굴 안 보고 그럴 수 있는 사이에요? " 

" 아니 " 

" 아- 미국에서 안 돌아 온다면 그럴 수도 있겠네- " 

" 2주 후에 돌아오는 비행기 이미 끊어놨어- 그럴 일 없어 " 

" 그러니까요. 안 맞는다고 해도 없던 일로 할 수도 없지만, 좋았어요 나도- " 

" 어? " 

" 다 들어 놓고 왜 못들은 척 해? 그러니까 수술 잘 하고 와요. 기다릴테니까- 나 좀 씻어도 되죠? 집에서 옷만 갈아입고 결혼식 바로 가야 될 것 같아서- " 


" 응. 내가 씻겨줄까? " 

" 제발- " 

" 알았어- " 




내 말 한마디에 금방 배시시 웃어댄다. 뭐 좀 만들어 놓을게 씻고 나와-, 고개만 끄덕이고 욕실로 들어왔다. 세면대 앞에 섰는데 어제 그와 이 곳에서 했던 것이 머릿 속을 스쳐 지나간다. 세면대 끝을 잡고는 낑낑 거리던 것, 내가 넘어지려고 할 때마다 날 일으켜 세워주던 것도... 평상시에 이런 야한 생각 하는 애 아니었잖아 너. 정신차리자. 손으로 머리를 두드렸다. 한 번 머릿속에서 재생 된 영상은 쉽게 끝날 줄 몰랐다. 



" 미쳤네 " 




찬물 샤워라도 해야겠다. 생각을 지워보려고 입고 있던 샤워가운을 벗고는 씻으려고 하는데, 얼핏 거울에 비춰진 내 몸이 평상시랑 다르다. 샤워를 하러 들어가려던 걸음이 다시 거울 앞에 섰다. 나보다 더 미친놈이 여기 있었네. 내가 몇 번 개새끼라고 불렀다고 진짜 자기가 개새끼라도 되는 줄 아나. 얼마나 물어댔는지 목부터 쇄골 언저리까지 연한 살 쪽은 이미 푸르스름하게 멍이 들어있었고, 붉게 물든 자국이 내 몸에 새겨 있는게 한 두 곳이 아니었다. 그걸 보자 헛웃음이 나왔다. 내 머릿속에 참고 있던 무언가가 지지직 거리며 끊어져가고 있었다. 아마 인내심 아닐까. 



" 아 진짜- 유태오!!!!! " 





뒤끝 유교수




찬물 샤워를 하고 샤워 가운을 입고 나왔다. 그러고보니 내가 입을 옷이랑 속옷이 없지 싶어 샤워가운만 걸친 채로 나왔다. 욕실 문을 열자마자 내 옷이며 속옷이 단정하게 침대 위에 올려져 있다. 그냥 곱게 개놓기만 한 건가 싶어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아봤는데 그것도 아니다. 그 옷을 들고는 거실로 나왔다. 


부엌에서 한창 뭘 만들고 있던 그가 내가 나오자 고개만 빼꼼히 내밀어 말한다. 다 씻었어? 뭐 좀 먹자- 



" 이거 빨아 놨어요? 언제? " 

" 아침에 너 잘 때- 건조기 돌려놔서 바로 입어도 돼 " 

" 서비스 너무 좋네. 여기 " 

" 그럼 또 이용해- " 

" 생각해보고 " 



스크램블 에그 했는데 괜찮아?, 응-, 빵을 굽는 그를 보고는 거실 한 쪽 편에서 그를 등지고 서서 입고 있던 샤워가운을 벗었다. 그리고는 그가 빨아 놓은 속옷이며 옷을 입는데 식탁 있는 쪽으로 나오던 그가 나체 상태로 옷을 갈아 입는 나를 보고는 케켁- 거리며 헛기침을 내뱉는다. 



" 갑자기 사레 들렸어요? 할 거 다 해놓고 이렇게 볼려니까 부끄러워? " 

" 아니 " 

" 또 귀 빨개요 지금 " 


" 나 좀 그만 놀리고- 얼른 앉아서 먹어 " 



그가 피곤하다는 듯 고개를 뒤로 젖혔다 일으킨다. 자리에 앉아서 그가 구운 토스트를 하나 들자, 그가 잼을 발라주겠다며 들고 간다. 



" 근데 어디가요? 옷 왜 갈아입었어? " 

" 결혼식. 같이 가자 " 

" 네? 추쌤 결혼식? 짐은 다 쌌어요? 갈 준비 안 해? " 

" 챙길 거 별로 없어. 밤 비행기라 식장 갔다가 가도 충분해 " 

" 그냥 갈 준비 하는게 좋지 않을까? 오늘은? " 

" 왜? 같이 가기 싫어? " 




그게 아니라-, 그가 건넨 토스트를 받아들고도 다시 접시에 내려놓자, 그가 토스트를 들어 내 입에 넣어준다. 한 입을 베어 물자, 그제야 안심하는 표정이다. 





" 진지하게 만나요 우리 " 

" 어? "

" 근데 조건이 있어요. 당분간은 병원에 우리 만나는 거 말 안 했으면 좋겠어 " 


" 왜? " 

" 왜냐면... 일단 병원은 우리 직장이기도 하고, 우리야 당사자들이니까 눈치 봐도 된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이 우리 때문에 눈치 보는 건 싫어서- 우리 연애한다고 하면 일단 효섭이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눈치 볼 테고, 누군가한테는 차별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고- 그러니까 병원에서는 공과사 지켜서 끊고. 비밀로 하는 게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아서 " 

" 그 이유가 다야? "

" 응. 무슨 다른 이유가 있나? 왜? 싫어요? " 



아니- 이유도 꼭 너 같아서-, 나 같은게 뭔데?, 있어- 너 같은 거-, 욕 아냐? 너 같은 거- 뭔가 억양이 기분 나쁜데?, 그럼 지여주 같은 거-, 푸흐- 아니 뭐가 달라?, 그가 웃는 내 앞으로 내가 좋아하는 바나나 우유를 밀어준다. 




" 너 편한대로 해. 난 너만 괜찮으면 돼 " 

" 응. 결혼식 같이 가는 건 상관없는데- 가서도 일단 티내지 말구요. 난 집에 갔다가 바로 결혼식장으로 갈게요- 그럼 식장에서 봐요 " 

" 내가 데려다줄게 " 

" 같이 가면 티나- " 

" 그럼 집까지만이라도 " 



반대 방향이잖아-, 상관없어-, 너무나 단호하게 말하는 그다. 앞에 놓인 접시를 한 쪽으로 밀어 놓고는 팔짱을 끼고, 그를 쳐다봤다. 



" 몇시간 잤어요? "

" 왜...? "

" 잠 한숨도 안잤죠? 나 잘 때도 머리말려주고 그 때가 새벽 5시 였나? 그리고 내 옷 빨래도 해놓고, 나 이거 영양제 놔줄 때가 7시? 그리고 내가 아침에 일어났을 때에도 안 자고 있었잖아 " 

" 가면서 자면 돼 " 

" 솔직히 말해봐요. 왜 안잤어? 누가 옆에 있으면 잠 못자? " 

" 그런 거 아냐 " 

" 그럼? 솔직하게 말하면 나 집까지 데려다주게 해줄게 " 

" 네가 옆에서 자고 있으니까... 잠이 안왔어- 자면서 나도 모르게 또 건드릴까봐- " 



이런 미ㅊ- 후-, 두 손가락으로 머리를 꾹꾹 눌렀다. 이미 어느정도 예상은 하고 있던 말이지만. 또 건드릴까봐? 미친놈아냐. 토스트를 입에 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나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난다. 집까지 데려다줘도 되지?, 안 돼-, 그의 침실에 놔둔 가방을 들고는 신발장 쪽으로 걸어갔다. 그가 차키를 들고는 나를 따라 나온다. 


신발장 앞에서 신발을 신고는 따라오려는 그를 막아 섰다. 



" 나 때문에 못 잔거니까 데려다 주는 거 안 돼- 30분이라도 자고 나와요. 제발. 내 부탁이야 "

" 괜찮다니까... 정말 " 

" 내가 안 괜찮아 " 

" 택시라도 타- 그럼. 내가 택시 잡아줄게 " 

" 나 택시도 못 잡을 정도로 바보 아니니까. 제발 들어가서 자- " 

" 연락해 그럼- "




응- 나 가요-좀이따 봐-, 간다며 그에게 손을 흔들고는 그의 집에서 나와 엘레베이터를 타려고 기다리는데 핸드폰 진동이 울린다. 나오자마자 발신인 유교수로 부터 전화가 온다. 왜 전화야-, 택시 타서 택시 번호 말해줘-, 아직 나 내려가지도 않았어-, 응- 로비 카메라로 다 보여-, 이미 내가 나가는 걸 보고 있다는 그의 말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뒤끝 유교수




집에 들어갈 때에도 결혼식장에 올 때에도 몇 번이고 그의 전화며, 문자를 받았는지 모른다. 아주 안 만났으면 그 전까지 어떻게 연락 안하고 살았나 모르겠네 싶을 정도였다. 결혼식장에 들어와 주위를 살폈다. 언제 온 건지 이익준 교수님과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던 그가 나를 발견하고는 손을 들어 인사를 하려고 한다. 그러지 말라며 손을 내젓자, 반쯤 올라온 그의 손이 내려간다. 일부러 그의 옆이 아닌 이익준 교수님 옆에 앉았다. 그러자 내가 자기 옆에 앉을 줄 알고는 반쯤 의자를 빼주던 그의 표정이 점점 굳는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일찍 오셨네요-, 어. 지여주 왔어? 얼른 앉아, 대충 인사를 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 역시 사람은 밖에서 만나고 그래야 돼. 늘 병원에서만 보다가 이렇게 밖에서 보니까. 아주 달라보이네 " 

" 그죠? 제가 민폐하객이죠. 오늘 주인공인 두 분이 더 빛나야 하는데... " 


" 여기서 또 뭔 민폐를 떨려고 밑밥을 까는 거야? " 

" 뭔 소리세요. 뭔 민폐를 떨어요. 제가. 제 존재 자체가 빛이나서 민폐인 건데... " 




응-, 내 말은 가뿐히 무시하는 이교수님이 양 옆에 있는 교수님과 나를 번갈아 보신다. 근데 그나저나 둘이 인사도 안 해? 저번에 병원 식당에서 그 난리를 치더니 그러고 화해도 안 한 거야? 나이 먹고들 왜 그래? 덩치만 컸지. 아주 애지. 애야-, 유치원 때 친구들과 싸우면 싸운 친구 손을 맞잡게 하고는 얼른 미안하다고 하세요- 친구들-, 서로에게 사과 하라며 억지로 화해 하게 하는 방법을 알려주던 쌤처럼 이 교수님은 금방이라도 우리 둘의 손을 맞잡게 할 것처럼 화해를 시킨다. 


괜히 목을 한 번 가다듬고는 그에게 인사를 했다.  



" 안녕하세요. 교수님 " 


" 어... 안녕 " 



어. 안녕? 그의 인사에 그를 째려보자 그는 내가 뭘? 이런 표정이다. 표정관리를 하면 뭘해. 평소에 병원에서 하던 존댓말이 반토막이 났는데. 사소한 말 하나에도 난 들키나 싶어 안절부절인데, 그는 태연한 표정을 하고는 계속 나를 바라봤다. 티 내지 말자는 말을 그는 못 알아 들은 거 같기도 하다. 



" 그나저나 너 오늘 가는 날 아냐? 결혼식 못 올 줄 알았는데 " 

" 오늘 밤 11시 반 비행기야 " 

" 그래서 언제 온다고 그랬지? " 

" 2주 뒤에 " 

" 아- 야 간김에 부모님 얼굴도 뵙고 좋겠다 야- " 




아니 근데 잠깐만. 



" 교수님이 그걸 어떻게 아세요? 2주 후에 돌아오신다는 거 " 

" 유교수가 말했으니까 알지 " 

" 저한테 그런 말 없으셨잖아요! " 

"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 



하-, 눈을 감고는 감정적으로 치닫는 마음을 끌어내렸다. 그러니까 교수님은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도 병원 식당에서 말 한마디 안해서 지금 이 사단을 만들었다는 말이네?


아니 교수님이 그 말을 해주셨으면 제가 이렇게까지!, 어? 뭘 이렇게 까지?, 아 아니에요-, 더 이상 말을 하다가는 말실수를 할 것 같아서 내가 먼저 입을 다물었다. 그래 사람이 말을 하면 안 돼. 말을 아껴야지. 말을... 속으로는 평소에 부르지도 않는 찬송가를 부르며, 마음을 다스리고 있는데 누가 내 어깨를 잡는다. 


" 여기 있었어? 안녕하세요. 교수님 " 

" 어 안효섭- 앉아 얼른- " 

" 너 오늘 안 온다며- " 

" 가는 길에 잠깐 들린 거야. 식만 보고 가려고 " 



그래? 앉아-, 의자를 살짝 빼주자 안효섭이 자리에 앉는다. 내 맞은 편에 앉아서 이런 내 행동 하나하나 씹어 먹을 듯한 표정으로 보고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어깨를 으쓱거리니, 입이 바짝바짝 마르는지 제 혀로 입술을 한 번 쓸어댄다. 



" 이야 근데 오늘 좀 빼 입었다? 어디 가는 길이었는데? 

" 가족모임 약속 있어서. 어제는 잘 들어갔냐? 집에 간 거 맞지? " 

" 그럼 내가 어딜가 " 

" 어제 내가 말한 건 생각해 봤냐? 안그래도 오늘 형 만나러 가는데 소개팅 말 해봐줘? " 

" 아 그거- 내가 언제 그런 소리를 했다고- 난 소개팅 관심 없어 " 

" 관심 없기는 네가 어제 울면서- 막 소개팅 시켜달라ㄱ... 아! " 



어머 얘가 헛소리를 지껄이네? 안효섭의 허벅지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러자 안효섭이 자기 다리를 잡고는 끙끙거린다. 어제부터 내가 그렇게 입을 닥치라고 말했는데 말귀를 못 알아 들어. 안효섭의 허벅지를 손으로 꼬집으니 녀석이 물에서 건져 올린 물고기 마냥 튀어 오른다. 

역시 쓸 데 없는 이야기는 제일 잘 들리는 법. 어떻게 들은 건지 안효섭의 소개팅 이야기만 들은 이교수님이 건수 하나를 물었다는 듯 이야기를 한다. 



" 지여주 소개팅 해? 누구랑? " 

" 아뇨- 쟤가 헛소리 한 거에요 " 

" 그래 뭐 굳이 소개팅을 하지 않아도 주변에 보면 어? 많잖아- " 

" 주변? 어디요? " 

" 안효섭도 있고- 그리고 우리 GS도 한 번 봐주고 그래- 지여주가 누구 좋다고 나한테 언질이라도 해주면 내가 산채로 잡아다가 바치지. 그리고 우리 병원 전통알지? 우리 병원에서 만나서 결혼을 하면 그 혼수 걱정은 할 필요도 없어- 이미 냉장고부터 세탁기, 요즘은 그 스타일러? 그것도 최신형으로 쫙- 집만 못해줄 뿐이지 장난 아니지- "

" 그래서 얘랑 결혼 하라고요? " 

" 뭐야 둘이 정분있어? " 

" 좆도 없는데요? 그리고 전 결혼할 생각 없어요 " 

" 결혼할 생각이 왜 없어? 우리는 다 지선생 결혼하면 혼수 뭐 해줄까 생각하고 있는데 "

" 전 결혼으로 묶이는 거 싫어요. 무슨 족쇄 마냥. 사랑하면 그냥 같이 살면 되는 거지. 왜 결혼을 해요. 사람들한테 보여주기 식인 것처럼. 저는 그런 거 싫어요. 혼수로 주실 거면 그냥 사주세요- 저는 세탁기 필요한데 "

" 응- 그냥 손빨래 해. 손 힘 좋아보인다- " 



네-, 그치 역시 빨래는 손빨래가 답이지. 아 지여주 손 진짜 매워- 아오 아파- 교수님 얘 결혼해도 세탁기는 사주지 마세요-, 미쳤나 이게- 살살 쳤거든?, 너한테나 살살이겠지-, 어디봐봐-, 아 보긴 뭘봐-, 안효섭은 내 손도 차갑게 쳐냈다.

식이 시작하려고 하는 지 주변이 분주하다. 입고 있는 블라우스를 제대로 고쳐 입고는 바로 앉았는데, 나를 보던 안효섭이 나를 빤히 본다. 



" 왜? " 

" 잠깐만... " 

" 왜? 너 복수하려고 그러냐? 내 이마 때리려고 그러지? " 

" 내가 너냐? 야 너 여기 목에- " 

" 목? 목에 뭐 " 



안효섭이 내 목을 만지려 손을 뻗었다. 내 목에 뭐가 있지? 목에. 아-, 어제 그가 남겼던 것들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안효섭의 손이 이미 내 목 언저리에 닿았다. 아 아까 파운데이션 몇 번 두드리고 왔는데 이 새끼 눈에 이게 보이나? 괜히 목을 만지작 거렸을 때 였다. 



" 안.효.섭 선생 " 

" 네? " 


" ... " 


 


그가 안효섭 선생-하고 부르는 목소리에 안효섭의 손이 떨어지고, 우리의 시선도 다 그에게 향했다. 아니 무슨 저승사자도 아니고 사람 이름을 저렇게 무섭게 불러. 그의 시선이 정확히 안효섭을 향해 있다. 내 목에 닿아있던 안효섭의 손이 잠깐이지만 떨렸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안효섭은 내 목 언저리에 붙어 있던 머리카락을 소심하게 집어 들었다. 



" 저는 그... 목에 머리카락이 묻어있길래... 떼 주려고- " 

" ... " 

" 한 건데... " 

" 아 고마워- 정말 고마워- " 


안효섭의 손에 들려있는 머리카락 한 올을 잡아들었다. 괜히 민망함에 목만 긁어댔다. 아아- 자 이제 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이제 시작하나봐요- 시작한다-, 식이 시작한다는 사회자의 목소리에 우리 모두 그 쪽으로 몸을 틀었다. 아직 얼어 붙어 있는 안효섭의 고개는 내가 직접 돌려줬다. 





뒤끝 유교수




식이 다 끝날 때쯤, 잠깐 화장실로 나왔다. 손을 씻고 화장실에서 나와 코너를 돌자마자, 언제 따라 나온 건지 벽에 기대 서 있던 그가 내 쪽으로 다가온다. 여기 여자화장실 앞인데. 내가 혹시나 남자 화장실로 잘못 들어왔나 싶어 둘러보니 여자화장실이 맞다. 여기서 뭐하세요?, 뭐하냐는 내 말에 그는 말 없이 따라오라는 듯 손가락만 까딱인다. 혹시나 누가 볼까 싶어 그와 거리를 두고는 그의 뒤를 따랐다. 


한참을 돌아 인적이 드문 비상구쪽 문을 열고 들어 온 그가 내 쪽으로 돌아섰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아까 혹시 효섭이 때문에 그런 거라면 내가 설명을 하려고 하는데 그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 아니 아까는 효섭이가 내 머리카락 때문에- " 


" 나랑 결혼을 왜 안 해? " 

" 네? 잠깐만... 나 지금 헛소리 들은 거 같은데? 결혼? 그건 뭔 소리야- 언제 나한테 프러포즈 했어요? " 

" 결혼 안 한다며. 결혼을 왜 안 해? " 

" 아니 교수님이랑 결혼 안한다고 한 적은 없는데? 결혼 할 생각이 없다고 했지 " 

" 그럼 나랑은 하겠다는 말이야? " 

" 아니- 결혼 할 생각이 없다니까. 교수님만이 아니고 아예 그 누구랑 결혼 할 생각이 없다고요. 그리고 어제 잔 사람한테 그 다음날 결혼 이야기 하는 건 좀 아니지 않아요? 우리 진지하게 만나자고 한 지. 지금 몇 시간이야 5시간 지났나? "



뒷통수를 맞은 것 마냥 정신이 얼얼하다. 내 말에 그의 표정이 인내의 인내를 거듭하는 표정이다. 




" 사랑하면 결혼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러면 연애만 하겠다는 거야? " 

" 그렇게 따지면 사랑하는 사람이 결혼 하기 싫다는데 안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결혼이란 게 그렇잖아요. 두 사람만 좋다고 해서 하는 게 아니라 가족 대 가족이 만나는 거잖아. 진짜 둘이 좋으면 결혼 안 해도 행복하게 살 수 있어- 근데 왜 꼭 사회적 제도에 맞춰서 사랑하니까 결혼해야 돼- 이렇게 가는 거야? 난 그런 거 싫어요. 둘이 진짜 좋으면 결혼으로 묶지 않아도 된다고 봐- " 

" 약속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안 돼? 좋아하니까 사랑하니까 할 수 있는 거지 " 

" 그 약속의 무게가 크니까 그런 거잖아. 무슨 손 걸고 엄지손가락으로 도장찍듯이 그렇게 약속하면 되는거에요? 아니잖아. 사람들 다 불러서 이 둘 결혼합니다. 보여주고, 법원가서 도장찍고, 법으로 엮이고 그런거잖아. 그 무게 생각보다 가볍지 않아요. 그래서 망설여지는 거고- " 

" 여주야... " 

" 좋으면 된 거지. 굳이 왜 결혼을 해야 하는지 나는 이해 못해요- 그거잖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 사람이 내 사람이다. 비싼 돈 들여서 확인 받고, 구속하는 거지 뭐야 그게- 결혼 한다고 해봐요. 교수님은 남자라서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는데 여자는 달라요. 그냥 그 날로 묶이는 거야. 결혼하면 시댁이니 뭐니 안챙겨도 될 것 같아요? 아닐 걸? 난 그런 거 지금 당장은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아직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그리고 일단 지금 우리 둘만 좋으면 되는 거에요. 난 그렇게 생각해. 이것보다 지금 더 중요한 건 없지 않아? " 

" 응 "

" 아니 아까부터 계속 이 생각했어요? 내가 결혼 안한다는 그 한마디 때문에? 내가 티내지 말자고 했지! " 

" ... " 

" 그리고 내가 이런 말까지는 안하려고 했는데 " 



목 끝까지 채워져 있던 블라우스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뭐하는 거냐며 그가 내 손을 잡고는 말린다. 그의 손을 뿌리치고는 블라우스 단추를 더 풀었다. 가슴 위쪽까지 풀고는 블라우스를 살짝 끌어내리자, 쇄골 언저리며 울긋불긋하게 새겨진 자국을 보던 그가 침을 꿀꺽 삼킨다.  



" 그럼 이건 왜 그랬는데? 진짜 개세요? 영역표시 이런 건가? 교수님 미국 가 있는 동안 내가 다른 사람 만날까봐. 이런 거 아니야? 이게 구속이에요. 이렇게 해도 불안하니까 결혼이라는 제도로 나를 묶어 놓으려는 거잖아- 안봐도 눈에 다 보여- " 

" 그건 나도 모르게... " 

" 할 말 없죠? 아니 고백이라도 하고 그딴 말을 하던가- 아니 뭐라도 쫌 하고 결혼을 하던가 말던가 해야지- 지금 진지하게 만나자고 한 지 고작 5시간 지났어요- 무슨 외양간 안에 소도 없는데 우유 먼저 짜내라 이런 심보네- 개심보네 개심보! " 

" 그게... " 

" 왜- 그렇게 불안하면 아주 내 몸에 이름을 써놓지 그랬어요? " 

" 그래도 돼? "



아씨- 주먹이 참지 못하고 올라갔다. 그를 때리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얼굴 반반한 그가 아니였다면 이 주먹은 이미 날라 가고도 남았겠지. 부들거리는 주먹을 그가 잡아 내렸다. 잡고 있는 내 손등을 부드럽게 쓸어주기까지 했다. 그의 손을 빼고는 풀었던 단추를 채웠다.


남자새끼들 몇 명 있었던 거? 그건 뭐 이해하는데- 뭐가 그렇게 불안한데요? 내가 뭐 언제 바람이라도 핀 것도 아니고-, 널 안좋아할 남자는 없으니까-, 으-, 오글 거린다며 두 주먹을 쥐었다. 그를 지나쳐 비상구 문을 열기 전, 그가 있는 쪽으로 다시 뒤돌았다. 



" 그럼 뭐해- 내 눈에 차는 남자 몇 명 없어요- 내가 그 때 교수님 부동의 1위 타이틀 준 거 있죠? 그것만으로도 교수님은 일단 프리패스권 가진거랑 똑같으니까- 이러지 좀 마요- 갑자기 이런 말 할 때마다 정신을 못 차리겠어- " 

" ... " 

" 가요. 그만- 사진찍겠다 이제 " 

" ... " 

" 그리고 그 표정관리 좀 잘해요. 누가 보면 초상난 줄 알겠네 " 

" 응 " 

" 여기서 3분정도 있다가 들어와요- 같이 들어가면 좀 그러니까 " 



아 진짜 보통놈이 아냐. 고개를 저으며 그곳을 나왔다. 나를 뒤따라 오려던 그를 두고는 비상구 계단 문을 닫았다. 





뒤끝 유교수




결혼식이 끝나고 몰래 그의 차를 탔다. 혹시나 누가 볼까 싶어 조수석에 앉아 몸을 폴더폰 마냥 숙여서는 결혼식장을 빠져 나갔다. 식장에서 좀 지나 조수석에서 몸을 일으키자, 그가 쳐다본다. 꼭 이렇게 해야해?, 당분간 조심하자고 했잖아요- 그럼- 뭐 동네방네 소문내요?, 이 정도 데려다주는 건 다른 사람도 할 수 있는 일이잖아-, 아니 어디 교수님이 평상시에 마음을 곱게 써서 누구를 데려다 줘봤어야 알지- 그리고 아까도 봐요 이교수님이 혼수 사준다잖아- 난 그렇게 시달리는 거 진짜 싫어-, 그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내가 너무 차갑게 말했나. 가는 내내 그가 말이 없다. 괜히 나 때문인 것 같아 은근슬쩍 먼저 말을 걸었다. 



" 나 데려다 주고 가도 안늦어? " 

" 괜찮아 " 

" 화났어요? " 

" 아니 " 


운전하고 있는 그 쪽으로 바짝 기댔다. 그가 슬쩍 나를 보고는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린다. 왜 그렇게 봐?, 화난 거 같은데?, 아냐-, 그에게 붙어있던 몸을 떼고는 조수석에 다시 기댔다. 



" 아까 결혼 안한다고 해서 그래요? " 

" 아니 " 

" 아니면 아까 효섭이 때문인가? " 

" 그냥 나한테 화가 나서 그래 " 

" 뭐가? " 

" 어제까지만 해도 네가 붙잡아주면 그걸로 됐다 싶었는데 그게 지나니까 계속 너한테 바라게 되고. 너는 네 가치관이 있는 건데 바로 이해 못하는 내가 짜증나기도 하고 " 

" 아까 어떤 생각으로 나한테 물었는지 알아요. 내가 반대 입장이라도 그랬을 거에요. 결혼이란게 사랑하는 사이에 안심시켜주는 것도 있잖아. 그리고 우리 나이가 결혼 생각 안하고 만날 수 있는 나이도 아니구. 근데 난 아직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특히 결혼은 생각해 본 적도 없고- 그리고 우리 아직 아무 것도 안해봤는데 결혼 생각 하는 건 좀 그러니까 잠시... 미루자는 거에요. 지금은 그냥 좋은 것만 생각하고 "

" 알아. 미안해 " 

" 생각 차이니까 미안해할 건 없고- 미국 갔다오면 우리 데이트도 하고 그래요 " 

" 데이트? " 

" 우리 밖에서 만나서 밥 먹고 그런 적 별로 없잖아요. 영화 보러갔던 것도 조금... 설렜어요.. 뭐- " 

 



그의 차가 우리집 앞에 섰다. 안전 벨트를 풀고는 그가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 근데 아까 효섭이가 내 목 만지려니까 왜 그렇게 무섭게 그랬어요? " 

" 나도 모르게 나왔어. 미안해- " 

" 이렇게 말하니까 뭐라고도 못하겠네- 알았어요. 잘 갔다와요. 가서 연락하고 " 

" 응 " 

" 그리고 다음에 오면 그 때는 우리집에서 라면 먹고 가요... 오늘은 시간 때문에 안되니까... " 

" ... " 

" 무튼... " 

" 응 " 


차에서 내리다 말고 다시 그가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지금 내가 한 말을 알아 듣기나 한 거야? 느낌이 쎄해 그에게 물었다. 



" 근데 내가 다음에 라면 먹고 가라고 그랬는데 뭐 할 말 없어요? " 

" 어? 무슨 라면... 좋아해? 다음에 올 때 사가지고 올게- " 

" 에? 그... 라면 먹고 가라는 거... 진짜 라면 먹고 가라고 알아 들은 건 아니죠? 후... 아니에요- 됐어요- 조심히 가요- " 

" 저 여주야... " 

" 왜요? " 

" 보고 싶을거야... 나 없어도 밥 잘 먹구... " 




태어나서 난생 처음 사랑 고백을 하는 애처럼 그가 두 귀를 빨갛게 물들인 채 말을 한다. 그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났다. 차에서 내리기 전 그의 턱을 잡고는 가볍게 입을 맞췄다. 


" 갈게요- 그리고 라면은... 무튼 검색해봐요 " 






Epilogue, 라면 그 뒷 이야기 


비행기를 타고 가는 내내 공항에서도 비행기 안에서도 그의 검색어는 라면 뿐이었다.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라면, 가장 맛있는 라면, 라면에 관련된 검색어 라고는 다 검색해 볼 생각 같았다. 안타깝게도 라면 먹고 갈래? 의 참된 의미는 빼고. 


한국에 라면 종류가 많은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많은 줄은 몰랐다. 여주한테 도시락을 사들고 갈 때에도 여주가 좋아하는 것들은 알았지만, 라면을 먹고 싶다고 한 적은 한 번도 없는데. 갑자기 왜 라면을 먹자고 하는 거지? 요즘 좋아하는 음식이 라면으로 바뀌었나? 근데 왜 나는 몰랐을까. 자책으로까지 이어졌다. 


평소에 보지도 않는 쇼핑몰에 들어가 라면 종류는 일단 장바구니에 다 담고, 그 것을 넘어 라면 맛집까지 검색해 보고 있을 때 였다. 아까부터 도대체 뭘 하는지 그 옆에 앉아있던 현주가 그의 폰을 슬쩍 들여다 봤다. 



" 너 아까부터 도대체 뭘해? " 

" 라면 찾아. 라면 맛있는 거 알아? 종류가 많네 " 

" 라면? 라면을 왜 찾아? 왜? 지선생이 먹고 싶대? " 

" ... " 

" 직접 뭐 먹고 싶냐고 물어 보던가- 한 마디면 될 거 가지고 " 

" 나한테 검색해보라고 그랬어. 라면 맛집도 많네. 다 저장해 놔야 겠다. 직접 만들어 줄까? " 

" 저 미친놈 " 


" I'm so crazy " 








* I'm so crazy 는 머니게임 대사를 그대로 가지고 왔습니다 


꿀잼 창작공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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