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매번 생각하는 거지만 알파들은 경우가 없고 재수가 없다.

항상 자신이 주인공인 삶만 살아와서 그런지 배려나 예의 같은 건 싸가지랑 다 같이 싸서 버린 것 같았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공간에 들어오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운 적이 없는지 매번 요란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밀어드리며 나에게 환영 혹은 반가움을 강요했다. 자신들은 그런 적 없다고 하더라도 나에겐 그렇게 폭력적으로 느껴왔었다.

내 명의로 된 내 공간이라는 이 클럽은 그들의 침범을 거부 할 수 없는 아이러니한 공간이었다. 공공재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유일하게 내 공간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내방에서만 유일하게 마음을 놓고 지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방 밖으로 잘 나가지 않게 되었다. 

가끔 하우스키퍼가 와서 공동공간을 정리하는 듯했고, 텐도씨가 부지런히 먹을 걸 채워주셨고, 이사님은 말도 없이 쳐들어와 강제로 나에게 바깥 공기를 마실 수 있게 끌고 나갔다. 후타쿠치는 내가 필요한 거나 클럽 안에 필요한 게 있으면 만들어주거나 어디서 사서 왔고, 미야는 쓸데없이 자주 찾아와 재롱이란 이름으로 행패를 부렸다. 

나는 한명이었다.

저 많은 알파들을 전부 상대해주다간 체력이고 정신이고 남아나질 않았다. 이미 극심한 스트레스와 충격적인 일들이 너무 잦았었고 몸이고 마음이고 피폐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체력이 떨어지니 당연히 의지도 떨어지고 의지가 없어지니 뭘 하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무기력만 나에게 남았다. 그러니 더더욱 나갈 일이 없었다.

방 안에서 누워서 체력을 채워두지 않으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를 저 침략자들에게 함락될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너무 게으르게 있어서 이러면 안된다는 생각이 잠깐은 들었지만 그 순간이었다. 그 생각을 이어갈 정신력조차 별로 없었다. 오늘도 그런 날들 중 하나였다.

한량같이 좋아하던 프로그램을 보다가, 배가 고프면 있는걸 좀 꺼내먹다가, 핸드폰으로 쇼츠 좀 보다가, 지난번 읽다가 만 소설 몇 장 좀 읽다가 나른해진 눈을 감고 잠깐 졸던 그런 평소와 다름 없던 생활 중이었다.


보통 클럽 안은 항상 고요한 상태였다. 이 넓은 집안에 나 혼자 있으니 소음이 생길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뭔가 우당탕하며 물건들이 깨지며 떨어지는 큰 소리가 날 일이 없단 말이다. 내가 뭘 하지 않았으니까 당연히 나선 안될 소음이었다.

얕은 수면에 부유하던 눈꺼풀이 번쩍 떠지고 몸을 일으켜 바깥의 소리에 집중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다시 이어지는 뭔가 후드득 떨어지는 소리에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복도는 언제나처럼 고요했는데 이질적인 소리는 내 방의 정문에 있는 또 다른 방안에서 들렸다. 뭔가 급박하게 뒤적거리며 헤집는 소리.

너무나도 수상한 낌새였다. 알파 중 하나일까? 아님 도둑인가? 조마조마하면서도 왜인지 모르게 긴장은 되지 않았다. 나태함에 잡아먹혀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건 지도 모르지만 모르겠다. 그냥 내 촉이 그랬다. 


부드럽게 돌아가는 문고리 손끝으로 문을 살짝 밀치니 기름이 잘 먹은 고급 문은 끼익 거리는 잡음도 내지 않은 채 스무스하게 방안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틈이 점점 벌어지며 시야각이 넓어지고 불을 켜지 않아 바깥의 노을 빛에 붉어진 방 내부가 천천히 들어왔다. 이 방은 처음 들어가 본다.

그리고 가장 먼 시야 끝에 걸리는 인영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사람은 팔을 높게 들더니 자신의 허벅지에 무언갈 박아 넣었다. 조금 의외의 광경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충격적인 현장에 뒤늦게 느껴지는 알싸한 페로몬의 향기에 급하게 코를 막았다. 방안 전체를 휘몰아치며 자욱했던 페로몬은 공기의 흐름이 생기자 나에게로 밀려들어 왔다. 나도 모르게 한발짝 뒷걸음을 친 것 같았다.

자신의 허벅지에 뭘 박아넣던 인영이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갑작스럽게 뭘 느꼈는지 고개를 들어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호기심에 죽을 놈이 나였다.



"너... 너 지금 뭐 해?"


이건 당연한 의문이자 궁금증이었다.


"아무것도."


태평하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하는 시라부를 보니 기가 찼다. 바지는 반쯤 다 내려가 있고 허벅지엔 방금 거칠게 찔러넣은 주사 자국 때문에 피가 고여있었다. 그리고 숨길 수 없는 이 지독한 페로몬은 뭔데? 변명할 수 없는 꼴을 하고 지금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 이걸 어떻게 믿으라는 건지 모르겠다.


"너 방금 허벅지에 뭐 한 거냐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제서야 서둘러서 바지를 올려 입는다. 보통은 속옷 차림을 부끄러워하며 숨기는 모양새일 테지만 시라부는 자신의 난도질 된 허벅지를 숨기는 꼴이었다.

얼핏보니 붉은 점 같은 주사 자국들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너 설마...?"

"아니라고."


의료적인 지식은 나에겐 하나도 없다. 경험에 의한 지식이라면 보통 주사는 근육주사와 혈관주사로 나뉘어 있었고 그게 대부분이었다. 저렇게 허벅지 안쪽에 꼽는 주사는 없었다. 그리고 나도 저 비슷한 위치에 주사 자국이 있었던 적이 있었다.

베타테스터로 왔을 때, 첫 시술을 받았을 때였다. 귀밑과 겨드랑이 아랫배 허벅지 안쪽. 향낭이 있다는 위치에 맞았는 건지 빨간 자국이 남아있었다. 지금은 다 아물어 남아있진 않지만 확실했다. 그리고 지금 시라부의 페로몬의 농도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에서 확신을 얻었다. 


"너 이 페로몬은 뭔데? 러트야?"

"아... 어..."


이건 또 솔직하게 말한다. 웃긴 놈이다.


"억제제는 어쩌고 무식하게 그래?"

"하필 다 떨어졌더라고."

"그럼 나한테 달라고 하면 되잖아? 입 뒀다가 뭐해?"

"그냥... 너 불편할까 봐."


불편하고 자시고 그런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지 않나? 아무리 원수라고 해도 억제제는 형질을 가진 인류에겐 필수품이었다. 특히 오메가에겐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었기에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언제든 줄 수 있는 물품이었다. 내가 아무리 시라부를 미워한다고 해도 이런 도움을 주지 않을 만큼 옹졸하진 않았다. 만약 나를 그런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면 더더욱 너에게 실망하게 될 것 같았다.


"진짜 그렇게 생각해서 말을 안 한 거라고?"

"어..."


여전히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어물쩍 대답을 하는 시라부를 보니 기가 찼다. 내가 불편하고 말고를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면 나에게 숨기는 것을 다 말을 해야 했었다. 기회는 여러 번 준 것 같은데 이 새끼는 아직도 나에게 말해준 게 없었다. 애초에 나를 불편하게 만든 사람은 너였다. 네가 시작을 하지 않았어도 원인을 제공한 건 너였다.

조금씩 천천히 목석같이 서 있는 그에게 다가갔다. 여전히 시선은 바닥에 꽂힌 채 얌전히 그대로 서 있었다.


시라부와 나의 사이는 손 한 뼘 만큼 가까워졌지만 의외로 그는 피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나는 오메가였다. 러트사이클에 홍수처럼 터져 나온 알파의 페로몬은 황홀할 정도로 자극적이고 아찔했다.

반발짝 더 다가서니 그제야 슬슬 뒤로 몸을 뺀다. 그럼 나도 반발짝 따라갔다. 이윽고 그의 등이 벽에 닿았다. 더는 도망갈 공간이 없었다.

부드럽게 시라부의 허벅지 안쪽으로 손을 올리자 몸이 뻣뻣해지는 감촉이 여과 없이 느껴졌다. 


"왜 더 도망 안 가?"


위로 올려다보던 내 시선을 겨우 마주하던 시라부가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노을 진 창가에 들어오는 풍광 때문인지 그의 뺨이 붉게 물이든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더더욱 그의 몸에 내 몸을 밀착했다. 파고들 틈이 없을 정도로.


"네 비밀을 알고 싶다고 하면 알려줄 거야?"


허벅지 안쪽을 살살 긁던 손을 그대로 움켜쥐자 고장 난 기계처럼 덜컥거린다.

반대 손을 그의 목덜미에 올려 아래로 이끌자 천천히 내려와 내 시선과 높이가 같아졌다. 뜨거운 체온과 숨결이 가까워졌다. 도망가고 싶단 욕망과 이대로 휩쓸리고 싶단 욕망이 그의 눈에 그렁했다.


"괜찮아. 내가 하고 싶어."


진정되지 않은 러트사이클의 알파를 도발하기엔 충분했는지 내 뒤통수로 단단히 받쳐오는 시라부의 커다란 손이 느껴졌다. 교차되어 맞물린 입술 사이로 축축하고 끈적거리는 소리가 흩어졌다.

은밀하게 내 페로몬을 풀어내자 숨을 갈급하게 쉬던 시라부는 내 목덜미에 코를 박더니 정신을 차리질 못했다.

어느새 시라부의 팔이 내 허리를 휘감아 꽉 껴안고 있었다.


"이러지 마..."


겨우 한다는 말이 저거였다.

하는 수 없이 허벅지 안쪽을 꽉 쥐고 있던 손에 더 힘을 주자 내 손의 악력을 튕겨내듯이 형체를 더 크게 드러내고 있었다. 폭발의 직전일 텐데도 참고 있는 그가 가상했다. 부푼 그 아래의 형체를 따라 손을 움직이자 허리가 찔끔거리며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정말 하지 마?"


내 목에 코를 박고 여전히 몽롱한 그는 미동도 없었다. 그러나 곧 한계인지 숨소리가 점차 거칠어지고 체온이 뜨겁다고 느낄 정도로 올라가 있었다.

조금 더 괴롭히다가도 참아낸다면 그만둘 생각이었다. 반응도 되돌아와야 재밌는 거니까. 계속 이런 지지부진한 상태면 나는 재미가 없잖아. 한참 주물떡 거리던 손을 떼어내자 뻣뻣했던 허벅지의 근육이 슬쩍 풀어지는 게 느껴지자 어이가 없었다. 그 정도로 거부할 정도냐? 은근히 자존심 상하네.

흥미가 떨어진 내가 몸을 떼어내려고 하자 오히려 시라부가 힘을 더 꽉 주며 놓아주질 않았다.


"뭐야. 어쩌라고. 놔줘."


놓아달란 말에도 미동이 없이 여전히 내 어깨에 얼굴을 처박고 헐떡거리고 있었다. 아. 너도 재미없는 놈이었네. 내 얼굴을 보지 않아도 표정이 어떨지 보였다. 바디필로우 취급인가.

몇번더 벗어나려고 버둥거렸지만 어림도 없었다. 좀 지쳤다.

자기도 좀 진정이 되면 풀어주겠지 싶어 그냥 시라부의 가슴팍에 고개를 기대었다. 언젠간 풀어주겠지 싶어서. 내 작은 움직임에도 꼼실거리며 반응하던 놈이 가슴팍에 기대자마자 화들짝 놀라더니 드디어 처박았던 고개를 들어 올린다.

오...

노을 때문은 아닌 모양이었다. 붉게 달아온 뺨과 눈가가 아주 볼만했다.


"네가 먼저 시작한 거야."

"뭐..."


그 뒤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대로 시라부에게 입술을 잡아먹혔기 때문이었다.




38.



나는 클럽에 있는 다른 알파들에 비해 각성이 늦은 편이었다. 아니 내가 안 하려고 억지로 참아낸 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베타 집안에서 태어난 알파였다.

평범한 베타들처럼 나고 자라왔다. 내 부모님도 베타였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다 베타였다. 그래서 나는 내 형질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었고 그렇게 될 거라고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가끔 잘나가는 알파들의 소식을 접할 때면 운 좋게 태어난 금수저라며 욕을 한 두 번 한 게 다였을 정도로 평범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니로!"

"아! 누나!"


내 이름은 니로가 아니라 후타쿠치다. 그러나 누나는 아직 한자를 다 알지는 못했고 내가 적어준 이름을 '니로'라고 읽은 뒤부턴 나를 그렇게 불렀다. 처음엔 이상했지만 계속 듣다 보니 누나와 나 사이의 특별한 애칭 같아서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부른다면 징그러울 것 같은데 누나가 부르니까 꽤 나쁘지 않았다.


누나는 항상 나보다 빨랐다. 단지 먼저 태어났단 이유로 모든 면에서 나보다 앞서 나갔다. 그렇게 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어릴 적 신체 차이는 크게 와닿았다. 지금에서야 어린 시절엔 여성체가 남성체보다 성장이 빠르단 것을 알지만 그땐 그게 그렇게 못마땅했었다.

난 아직 유치원을 다니고 있는데 누나는 이미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게 가장 억울했다. 내가 누나랑 가장 친하고 가장 자주 붙어있는 사람인데 왜 나는 같은 공간에서 같이 있을 수 없는지 그게 가장 분했다. 그 숫자가 뭐라고 나와 누나와의 차이를 가차 없이 벌리는 큰 숫자였다.


한동안 아팠다고 하더니 누나의 뺨이 홀쪽 해져서 왔다. 지금은 괜찮다고 웃어주는데 여전히 얼굴빛이 좋지 못했다. 내가 이 놀이터에서 기다린다는 걸 알고 그런지 무리해서 나온 것 같았다. 물론 기다리는 것은 힘들지만 누나가 아프다면 더 쉬었다가 와도 괜찮은데... 누나가 아픈 게 더 싫은데.


"여전히 꼬맹이네. 니로는 언제 커?"


내가 꿍한 표정으로 있자 일부로 짓궂게 놀리는 누나였다. 그러나 그 시절엔 저런 말에 쉽게 반응하기 마련이었다.


"누나니까 당연히 더 크겠지! 나중에 되면 내가 누나보다 더 클걸?!"


까치발을 해 몸을 부풀리자 누나가 가소롭다는 듯 까르륵 웃는다. 사실 난 누나가 저렇게 웃을 때가 좋아서 일부러 더 심통난 척 한 적도 있다. 근데 조금은 억울했다. 내가 우리 기린반에서 제일 큰데...

어린 마음에 입술이 삐죽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앞서가고 있는 누나를 언제쯤 따라잡을 수 있을까? 너무나도 멀고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까치발의 종종걸음으로 누나를 쫄래쫄래 따라다니다 결국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자 누나가 재빠르게 나를 잡아주었는데 뭔가 평소랑 다른 느낌에 낯설었다.

내가 아는 누나가 맞는데 왜... 이런 생소한 느낌이 드는 건지 모르겠다. 누나 얼굴, 누나 목소리 다 맞는데... 이 자극적이고 화려하며 달달하게 느껴지는 꽃향기는 뭘까? 지금 이 계절에 꽃이 어딨다고...?


"누나, 누나 뭔가 이상해."

"응 뭐가?"


바닥에 앉아 놀이터의 흙으로 장난을 치던 누나가 나를 올려다보며 방긋 웃는다. 


"누나한테서 꽃향기가 나."


나무막대로 바닥을 긁던 누나의 손이 멈추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나를 마주했다.


"음... 이거 비밀이야. 니로가 안 지켜주면 더 이상 날 못 만나게 될 지도 몰라."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는데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린다는 것을 그 어린 나이의 나도 느껴질 정도였다. 이건 들켜선 안되는 건데 내가 알아버렸다는 것도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두려워한다는 감각도 여실히 느껴졌다. 누나가 나를 무서워한다. 그래선 안되었다.

겨우 붙들어 따라가고 있는 형태의 관계였는데 이런 일로 멀어지게 할 순 없었다. 그래서 세차게 머리를 끄덕였다. 뭔지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무덤까지 가져갈 비밀이라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누나의 변화에 대해서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걸 아는 유일한 사람이 나란걸 느끼는 순간 말도 못할 희열에 휩싸였다. 천지 분간도 못하는 천둥벌거숭이처럼.


"부모님은 아셔?"

"그런 건 네가 신경 안 써줘도 돼."


지금에서 생각해보면 이미 나는 알파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베타였다면 누나에게서 나는 저 향긋한 향기를 느낄 수 없었을 텐데 나는 정확하게 꽃향기라고 인지를 하고 있었다. 혼란스러웠던 와중에 오간 대화라 누나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나도 그랬으니까.


누나는 어느새 중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나도 곧 중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었다. 누나와 나의 시선 높이는 동일해졌지만 여전히 나는 아직 누나에겐 어린 동생일 뿐이었다. 동생은... 동생일 뿐.

나는 의지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란 말이었다. 나는 누나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는데 될 수 없을 것 같아 그게 너무 마음이 미어졌다. 어린 시절 풋내나는 감정이라고 치부하긴 이 마음은 너무 무거웠다.




간헐적으로 온몸이 욱신거리며 아파왔다. 성장통이라고 생각을 했다. 아파서 나뒹구는 동안 신장이 자라긴 했으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내가 거부하고 있던 변화의 반동이었다. 누나는 '알파'라는 소리만 들으면 발작을 하듯이 놀라며 몸을 숨기려 했다.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나도 모르게 아니 사실 은연중 알고 있었다. 내가 그 알파라는 것을. 그래서 억지로 어떻게든 억눌러왔다는 것도.

이건 내가 하고 싶지 않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정말 최악이다.


누나가 아팠다고 했던 그때 왜 그렇게 홀쭉해졌는지 대번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나는 자의로 억지로 몇 년을 미루고 참아냈던 발현이었다. 사실 어떻게 그걸 거부한 건진 모르겠다. 아마 의식 깊숙한 곳에서부터 형질에 대한 거절이 날 몇 년은 더 베타로 살게 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치는 거스를 수 없는 법이었다. 무력하다. 인간은.


몇달내내 나를 괴롭히던 발현통이 잦아들고 정신을 차리게 될 때 쯤 부쩍 자라있었다. 이때까지 자라지 못하게 억눌렸던 그만큼의 성장을 몰아서 한 것처럼. 

나도 이렇게 변한 내가 너무나도 낯선데, 갑자기 안 보이다가 나타난 내 모습에 누나가 어떻게 볼지 상상이 안되었다. 두려움이 내 눈 앞을 가리는 것 같았다. 너무나도 내가 끔찍하면서도 한편으론 베타가 있는 곳에서 유일한 이해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도 조금은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조금 더 지나서 멋진 모습으로 누나를 마주하면 동생이 아니라 이성으로 봐주지 않을까? 그렇다면 너무 좋을 것 같은데...

그러나 내가 간과한 게 있었다.

나는 알파였고, 누난 오메가였다.


형질을 가진 인류에 대한 뉴스나 가십들을 지나치게 등한시한 결과가 이것이었다.


"누, 누구세요?"

"누나?"

"가! 가까이 오지 마세요!"


그저, 그냥 그저 멀리서라도 누나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발걸음이 저절로 놀이터로 향했을 뿐이었다. 늦은 저녁 아무도 없는 놀이터에 누나가 혼자 있으니 양아치 같은 놈들이 나쁜 의도를 가지고 껄떡거리는 것을 보았을 뿐이었고, 그래서 화가 너무 났었다... 그리고... 어떻게 했더라?

근데 왜 누난 이렇게 겁에 질린 모습이야...? 왜 나를 알아보지 못해? 왜 가까이 오지마라고 하는 건데?


"제발...! 제발 부탁이에요! 더 다가오지 마세요!"


다친곳이 없는지 괜찮은 건지, 안위를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내가 누나한테 나쁘게 할 이유가 없잖아? 그리고 가장 충격적인 것은 내가 위해를 가한다고 오해를 받는 것보다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나는 그대로인데, 모습이 좀 변하고 형질이 바뀌었다고 누나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누나를 바로 알아봤는데, 누나에게서 나던 그 향기로운 꽃향기를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는데.


"미안해요. 무섭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이렇게 서로 얼굴을 마주한 것이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3년은 더 참아온 것 같았는데 재회의 기쁨은 하나도 없었다. 애석하게도 그녀는 오메가였고, 나는 알파였으니까. 아마 본능적으로 내가 알파라는 것을 누나가 깨달은 모양이었다. 무서울 법도 했다. 이제는 내 시선이 누나보다 위에 있었다. 언제 이렇게 작아진 걸까. 

내가 손을 펼쳐 보이며 두발짝 물러서자 그제야 움츠렸던 고개를 들곤 살며시 내 눈치를 살핀다. 이런 모습을 보고 싶은 게 아니었다. 재빠르게 주먹을 등 뒤로 숨겼다. 움켜쥔 손톱 끝에서 피가 맺혔지만 그런 아픔보단 누나에게 위협적이게 된 내 존재가 너무 싫었다. 이래서 나도 모르게 형질의 변화를 거부한 거였던 건지도 모르겠다. 이런 미래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내가.


고개를 살짝 까딱거린 누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달려가 버렸다. 내 반대편으로. 저 멀리.

어린 시절 함께 뛰놀며 즐겁게 보내던 시절은 이제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다. 거기서 마무리가 되질 못한 이야기. 그러나 더 이상 현재진행형으론 이어질 수 없는 이야기. 


"저, 발현했어요. 센터에 등록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언젠간 다시 만나러 갈게. 누나.





39.



드디어 찾았다 싶었더니 이 꼴이다.


가장 처음 여주를 찾아가고 싶어서 몇 년을 수소문했는지 모른다. 이사는 주기적으로 해서 따라가기 힘들었고 찾아내었으면 이미 또 주거지를 옮긴 후였다. 매번 뒤꽁무니만 겨우 쫓아가는 게 옛날이나 지금이나 바뀐 게 없었다. 그래도 아예 흔적이 끊긴 게 아닌지라 괜찮았다. 여전히 같은 하늘 아래 여주가 있단 것 만으로도 버틸만했다.

오메가에게 위험한 세상이니 포기하고 지쳐버릴 법도 한데 여주는 그러지 않았다. 열심히 발버둥을 치고 있었고, 그런 그녀에게 빨리 닿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여주의 부모님이 차례차례 돌아가시자 그 이후로 흔적이 아예 끊어져 버렸다.


사무실 책상을 뒤엎고 완성 직전의 시제품을 다 부서트리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뭐냐. 후타쿠치. 이거 니가 만든다고 몇 년이나 붙들고 있었던 거 아냐? 다 작살을 내놨네?"


미야 아츠무의 얄미운 상판대기가 보이자 화가 더 치솟았다. 저 면상을 갈아버린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화풀이가 될 텐데.


"뭐야. 왜 왔어. 꺼져."

"아이고. 무서워라. 우리 막내. 너무 무섭다."


나이로 따지자면 동갑이었다. 저 새끼랑은. 그런데 내가 센터에 늦게 등록해 이미 정해진 알파 무리에 성인이 되어 들어왔기 때문에 막내 취급이었다. 이럴 줄 알았음 그냥 바로 신고를 하는 거였는데. 젠장. 아니지. 그랬더라면 여주랑 더 오랫동안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게 센서라고 안 했나?"

"신경꺼."

"이 작은 게 센서? 이야, 진짜 니 기술 좋네."

"신경 쓰지 말라고."


어딜 어떻게 박았는지 시계의 원형이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아작이 나있었다. 몇년간의 노력의 성과가 곧 완성되기 직전이었는데 분을 이기지 못하고 내 손으로 박살을 낸 것이었다. 오직 백합 향기를 가진 페로몬에만 반응하게 만든 센서. 꽤 섬세하고 어려운 작업인지라 몇 년을 여기에 쏟아부었는지 모른다.


"근데 왜 한가지 종류의 페로몬만 찾노?"

"그게 왜 궁금해."

"취향인가?"

"그렇다면?"

"으. 괜히 물어봤네. 사실 별로 알고 싶지 않다."


몸서리치며 자신의 어깨를 털어내는 미야를 보니 더 배알이 꼴렸다. 이 새낀 뭔데 왜 자꾸 여기 와서 해작질인지 모르겠다. 나랑 친하지도 않았고 더더욱이 나와 왕래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같은 그룹에 묶인 알파. 딱 그 정도의 관계였다.


"내가 니랑 결이 비슷한 놈을 하나 알고 있거든."

"근데?"

"걔도 좀 많이 도라이다."


자기 소개 아닌가?


"시라부 켄지로라고 의사하는 놈 하나 있다."

"뭐가 비슷하냐. 난 기술자야."

"아니. 비슷하다. 오메가에게 집착하는 꼴이 뭔가 우리랑 결이 다르거든."


결이 다르다고?

당연히 나와 알파로 살았던 너와 결이 같을 수가 없다. 나는 오메가에게 너희가 하는 그런 저급하고 저열한 성욕을 가지고 싶지 않다. 그러니 같을 리가 있나. 만약 같다면 그건 정말 기분 나쁠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모든 오메가에게 그런 감정을 느낄 리 없다. 내 유일한 오메가는 여주 하나일 것이기 분명했다.

근데 이런 나랑 비슷한 놈이 있을 리가 있나.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그냥 가라. 피곤하다."

"여튼 이 형아가 하는 말 잘 새겨들어라."


넉살좋게 어깨동무를 해오는데 이젠 뭐라고 할 기력도 안 남아있었다. 그래서 그냥 내버려 뒀다. 혼자 씨부리다 반응이 없으면 제풀에 지쳐 가겠지 싶어서.


"니가 찾는 오메가 위치, 절대 들키지 말아라. 알았제?"

"무슨 소리야."

"모든 알파가 있는 곳은 당연하겠지만 특히 시라부. 금마한테 들키지 마라."


잔뜩 찡그린 미간으로 미야를 힐긋 쳐다봤다. 헤죽거리며 웃고 있는 게 또 놀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진짜 피곤해. 가 빨리."

"알았다~ 형아 간다. 수고."


난장이 된 사무실 중앙에 엉망이 된 내가 혼자 덜렁 남아있었다. 미야가 있을 땐 뱅글뱅글 도는 듯한 어지러움에 정신이 사나웠는데 그래도 가니까 비틀거리던 중심이 확 잡히는 감각이 들었다.

바닥에 떨어진 부품들을 하나씩 줍다가 불쑥 또 짜증이나 손에 있던 부품들을 벽으로 집어던졌다. 너무 보고 싶었다. 누나가.




어디갔지?

내 시계! 내 센서!


자포자기했던 심경을 이겨내고 드디어 완성한 시제품을 사용하려고 했던 날이었는데 사무실에 있어야 할 시계가 없었다. 이 개자식. 미야 아츠무의 짓이 분명했다. 그 자식에게 다이렉트로 연락을 하면 분명 안 받을게 뻔했고, 받는다고 해도 약만 바짝 올릴게 뻔했다. 그래서 그의 매니저에게 연락을 했더니 스나의 호텔에 투숙을 한다고 했다.

진짜 죽여버릴까 싶었다. 그 뺀질거리는 상판대기를 내 언젠간 몽키스패너로 다져버릴 거다. 


그리고 첫 만남, 첫인상을 다 깎아 먹었다. 개새끼 덕분에.

멋지고 성숙한 어른스러운 이성적 매력으로 은근히 다가가며 친분을 쌓은 뒤 내가 예전의 니로였다고 알려주고 싶었었다. 근데 전라의 미야와 그 앞에 얼어있는 누나를 보자 계획은 전부 백지가 되어버렸다.

나도 그냥 내 마음대로 하려고 그래서. 얌전히 있으니까 뒤처지기만 하고 누나를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나였는데 선수를 다 뺏기고 있었다.


그 개자식의 소굴에서 겨우 빼내 왔더니 여전히 누난 날 알아보지 못했다. 꺼내와 준 것은 고맙지만 알파 새끼라서 역겹다는 듯한 표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비쳤다. 이건 좀 다행인 것 같았다. 여전히 알파를 무서워하고 싫어한다는 점이. 내가 알파면서도 아이러니했다.

그래도 지금 이 좋은 인상을 계속 유지하고 싶었으나 나도 페로몬의 노예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밀실에서 미야 아츠무의 페로몬 샤워를 당한 여주의 몸에선 미야 아츠무의 나무 찌꺼기 냄새가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단순히 열받아서, 질투가 나서 그런 게 맞다. 생각을 하고 이성적으로 행동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으니 욱한 것에 더 가깝겠다.

내 페로몬으로 덮어버리고 싶다.

이런 생각으로 지배된 나에겐 뒤의 곤란함을 떠올릴 여유조차 없었다.


내 페로몬을 마주한 여주의 표정이 인식되는 순간 아차 싶어졌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그리고 해명을 하기도 전에 여주는 나에게서 멀어지며 또 예전 그때와 똑같이 멀어졌다. 내가 있는 곳의 반대편으로 그렇게 달려 나가버렸다.

망했다. 시발! 망했다고.


어떻게 사과를 하지. 어떻게 말을 해야...! 진짜 알파 새끼들 때문에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알파 놈들은 의무적으로 개 목줄을 채워서 어디 섬 같은데 격리를 해야 하는 게 훨씬 사회에 이로울 것 같았다.




근데 왜 지금, 이 순간 미야 아츠무의 그 얄미운 낯짝이 떠오르는 걸까?


'모든 알파가 있는 곳은 당연하겠지만 특히 시라부. 금마한테 들키지 마라.'


왜 여주가 시라부의 방에서 저런 야한 목소릴 내고 있는 걸까? 왜 저 새끼의 침대에서 함께 뒹굴고 있는 걸까? 



그 말이 이 뜻이었나? 미야 아츠무 개자식아.



 



* * * 


다음편은 성인물일거 같네요.🤔


먹고싶은 맛이 있는데 아직 메뉴에 없다면 직접 조리하는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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