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연아, 잠시만. 잠시만 내 얘기 좀 들어줘.”

금요일 저녁, 야간 자율학습이 시작되기 전 석식 시간이었다. 화요일, 보건실에서 가연이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보인 이후, 하민은 비 오던 날처럼 가연과 함께 하교할 수 없었다. 물론, 평소에도 같이 하교하는 일이 잘 없었던 것은 맞았다. 게다가 화요일 오후 내내 가연에게서 한마디도 더 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하민이 먼저 같이 하교하려 하지 않았던 것도 맞았다. 하지만 수요일에는 자율학습을 마치자 먼저 조퇴한 가연이 없었고, 어제는 보란 듯이 지아와 함께 하교하는 것이었다. 내일이 약속한 데이트 날이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은 아예 자율학습을 가지 않으려는 듯 평소보다 짐이 적었다. 교무실로 향하는 가연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음에도 가연의 목소리는 결국 들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네가 할 말이 있다면 들어는 주겠다는 듯 순순히 돌아서는 가연에 하민은 다급히 말을 골라야 했다.

“그날, 화요일에 말이야. 내가 했던 말 중에 네 기분을 상하게 했던 말이 있다면 혹시 알려줄 수 있을까?”

그 짧은 순간에도, 하민은 지아의 이름을 제외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랬다가는, 지아에게 지고 싶지 않은 자신의 마음을 모두 들켜버릴까 봐. 꿈에서 들었던 날카로운 말이 현실에서도 들려올까 봐. 하민은 그 일만은 피하고 싶었다. 자존심이든 자존감이든, 다 내다 버려야 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뿐이라면 오히려 아무런 손해도 보지 않는 셈이었다. 타인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는 데 있어 그런 것 따위는 아무 쓸모도 없었으니까. 자신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진심을 들킬 바에야 진심을 품을 자아조차 없는 편이 낫다고, 하민은 나름대로 극단적인 생각을 해 보았다.

하지만 가연은 그마저도 인상을 찌푸렸다.

주어진 시간을 모두 활용해 최고의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마저도 사람들이 그렇게 말해대는 ‘진심’이 아니었던 탓인지 차마 닿지 못했다. 한숨을 삼키고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내일 11시에, 나 만나러 나와줄 거지?”

가연은 시선을 돌리고 한숨을 쉬었다가, 자신을 멈춰 세우기 위해 잡았다가 아직 놓지 않은 하민의 손을 뿌리치고 떠나버렸다. 그날 자정이 될 때까지, 가연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늘 그랬듯이, 그러나 조금 더 깊이, 그들의 밤은 조용했다. 하민조차 머리맡에서 휴대전화를 떨어트려 놓지 못할 정도로.

 

어찌 됐건 하민은 그 정도로 가연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약속 시각까지 기다리다가, 오지 않으면 집으로 찾아가면 되니까. 조용한 밤을 채우기 위해 써 내려간 데이트 점검표를 하나씩 지우면서, 하민은 평생에 몇 번 해 본 적 없는 걱정이라는 것을 한번 체험해 보았다. 어쩌면 더는 생소하게 느껴지지 않을 후회도, 조금 곁들여 보았다.

올까, 와줄까. 며칠간 준비한 완벽한 하루가 망가져도 좋았다. 오늘이야 어떻게 되든 좋으니 아직 나에게 마음이 남아 있다고, 이렇게 끝나지는 않을 거라고, 부디 증명해주기를. 그저 그 얼굴을 마주할 수 있게 허락해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니까.

불안이 이성을 잠재우고 생각을 장악했다. 하민은 결국 자신답지 않게 움직이는 손에 문도 제대로 열지 못하고 쿵 소리를 내며 머리를 부딪쳐야 했다.

‘정신 차리자…….’

멈춰선 채 머리로 문을 몇 번 더 쿵, 쿵 두드리다가, 한숨을 쉬고 휴대전화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30분이나 남았는데. 학교 앞 버스 정류장에서 만나기로 했으니까, 가는 데에는 5분도 걸리지 않을 것이었다. 굳이 이렇게 이르게 준비한 이유는, 단지 한참 전부터 계속되던 낯선 걱정 때문이었다. 어차피 안 올 것 같은데, 그냥 지금 집으로 찾아가 버릴까, 하는 생각들 때문에. 하민은 그렇게 현관에서 몇 분 정도 더 주저앉아 있었다.

 

하민과 연애를 시작하고 나서부터, 어쩌면 그 이전에 하민을 좋아하게 되었을 때부터, 가연의 마음이 여유로웠던 적은 없었다. 어쩌면 지아와 단둘이 만났던 날, 그날이 유일할지도.

지아의 고백에 흔들렸던 것은 그래서였다.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지아를 이용한다든가, 홧김에 한 결정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지아를 의식하지 않았던 것은 맞지만, 아주 가끔, 지아의 생각이 하민으로 가득한 가연의 머릿속을 비집고 나타나기도 했다. 가연이 충분히 흔들릴 만큼. 하민이 가연을 흔드는 것처럼. 그러니까 오늘, 가연이 원래 계획했던 대로 하민과 최악의 하루를 보낸 후에, 깨끗하게 하민을 털어버리고 지아에게 원하던 답을 들려주면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선, 약속 시각보다 20분 일찍 현관문을 열었다. 걷는 시간은 넉넉하게 빼두고, 10분 정도 일찍 도착할 수 있게. 상대를 기다리게 만드는 사람은 최악이니까. 아무리 약속 시각보다 이르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더 늦게 와주면 더 좋고.

 

“안녕, 가연아.”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삼키겠다는 표정을 숨기지도 않고, 하민이 인사를 건넸다.

“……언제부터 기다렸어?”

“나온 지 얼마 안 돼서, 오래 기다리지는 않았어.”

벌써, 가연은 자신의 계획이 조금씩 틀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아니, 어쩌면 ‘벌써’가 아닐지도. 이미 한참 전부터 예정된 일이었을지도.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었다. 무너진 마음을 다시 지어 올리기에는 그 잔해조차 풍랑에 날아간 후였다. 얼마든지 흔들려줄게. 결국, 너와 헤어질 수 있다면.

가연이 하민의 옆에 앉았다. 사람이 많지 않아 조용한 정류장 벤치에서, 하민이 입을 열었다.

“오늘, 특별히 네가 하고 싶은 거 있어? ……나도 몇 개 생각해두긴 했는데, 그래도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좋아서 말이야.”

“……만화 카페나, 보드게임 카페.”

하민이 먼저 물어보지 않았다면 점심 식사 중에 꺼냈을 이야기를 앞당겨왔다. 전자는 혼자만의 시간을 위한 장소인 데다 하민의 선호와는 맞지 않을 것이고, 후자는 하민의 승리욕을 자극하기에 적절했다. 오늘은 하민의 최악을 보는 날이니까. 물론, 처음 계획은 이런 게 아니었던 것 같지만. 가연은 생각을 그만두었다. 자신도 모르게 지아를 응원하고 싶었나 보지. 아니면 하민을 향한 마음이 생각보다 잘 정리되었든가. 이렇게 필사적으로 끝을 위한 생각을 한다는 점이 말이다.

“그럼 우선 점심 먹고, 바로 만화 카페로 가자.”

변화 없는 무표정으로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기울여 눈을 맞추는 하민의 옷깃 사이에서 은빛 반짝임이 일었다.

“하고 왔네, 목걸이.”

“……아.”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는지, 하민은 펜던트를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1주년, 그러니까, 눈이 내리던 작년의 그 날, 하민이 가연에게 선물한 목걸이와 한 쌍이었다. 커플 반지가 없는 대신이라면서. 도넛 모양의 동그란 펜던트가 반지 같으니 괜찮다고 말하던 가연에게 직접 채워주기도 했었는데. ‘뭐, 둘이 같이 골랐다면 더 좋았겠지만…….’하는 웅얼거림까지도, 하민은 똑똑히 기억했다.

“앞으로도 매번 잊지 않고 목걸이 할 테니까, 자주 데이트하자.”

자연스럽게,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하민은 미래를 입에 올렸다. 걱정이 무색하게 일찍 나와준 것도, 목걸이를 발견해 준 것도, 그것만으로 이미 오늘 저녁을 미리 보고 온 것 같았다. 오늘은 가연과의 끝이 아니다. 퉁명스러운 가연의 표정에도 하민은 확신했다.

“……그러든가.”

가연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정류장 벤치에서 나누었던 대화와는 다르게, 버스 안은 어젯밤만큼이나 조용했다. 가연이 창밖을 바라보는 동안, 하민은 가연이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지아의 목소리가 ‘스킨십도 많이 하고.’라며 속삭였다. 손을 잡는다든가-. 허공을 떠도는 목소리가 제법 솔깃했다.

“…….”

하민이 가연의 손을 가져다 자신의 무릎 위에 펼쳐놓았다. 손가락을 하나씩, 가연의 손가락과 교차시키고, 천천히 포개어 꽉 잡았다. 가연은 고개를 돌려 하민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할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도착할 때까지만 잡을게. ……괜찮지?”

“……안 괜찮다고 한 적 없어.”

말로 하지 않아도 불쾌할 수 있잖아-따위의 대답을 생각하다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으로 이어지는 대화는 득이 되지 않으리라. 가연이 직접 그렇게 말했으니, 적어도 가연은 괜찮은 거겠지. 생긋 웃어 보이고 다시 침묵을 유지했다.

 

점심을 먹기 위해 도착한 식당은 지난주 가연이 지아와 함께 왔던 그 식당이었다. 하민에게는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민이 또래 친구와 가본 식당이라고는 죄다 분식집뿐이었으나, 지아의 조언에 의하면 관계 개선이 필요한 연인에게 분식집에서의 식사는 좋은 선택이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하민은 지아가 들려준 그 날의 일정대로, 지아가 증명해준 실패하지 않을 선택을 따랐다.

자연스러운 발걸음으로 창가 자리를 향해 걸어갔다. 의자를 빼고 가연에게 손짓했으나 가연은 맞은편 의자를 직접 끌어당겨 앉았다. 애써 미소 지으면서, 하민이 자리에 앉았다. 수저와 함께 탁자 서랍에 들어있던 메뉴판을 꺼내 가연에게 건네자 기어코 그 말이 나오고 말았다.

“전에 여기 와 본 적 있어? ……자연스러워 보이길래.”

사실 식사를 이곳에서 해야겠다고 결정한 것은 지아의 조언을 들은 당일 저녁이었기 때문에, 그날 지아와 함께 이곳에 오긴 했다. 그때 한 번뿐이었지만, 그날 이후 자신의 맞은편에 지아 대신 가연을 앉혀두고 매일 머릿속으로 그렸던 덕에 현실에서도 자연스러울 수 있었다. 그러니까 하민은, 이 질문에 적절한 대답까지 이미 외워둔 상태였다.

“아니, 지나가면서 몇 번 주의 깊게 봐서 그런가 봐. 맛있어 보여서, 너랑 한번 와보고 싶었거든.”

사탕발림임을 알지만은, 가연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한참 전부터 유지하던 미소가 한층 부드러워진 하민이 가연이 고른 것과 다른 맛의 함박스테이크를 골라 주문했다.

다행히도, 하민 특유의 천연덕스러움 덕분인지 오랜만에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소소한 대화가 오갔다. 조금 전까지의 무겁던 분위기가 누그러지고, 하민이 다시 대화를 이끌었다.

“네가 주문한 거, 맛있어?”

“응. 맛있네.”

“이것도 먹어볼래? 이건 치즈 맛이야.”

내민 포크로 가연이 시선을 돌리자 하민이 마른 침을 삼켰다. 위험했다. 플랜 B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들뜨는 바람에 던진 무리수였다. 이러한 상황을 의도하고 다른 맛으로 고른 건 맞지만, 음식이 나왔을 때까지만 해도 폐기한 계획이었는데. 가연이 다시 자신의 접시로 시선을 돌리고 아무 말 없이 식사를 이어갔지만, 하민은 이대로 상황이 흘러가게 놔둘 수 없었다. 걱정과는 달리 순조로운 하루였는데, 그래서 너무 들떴던 걸까. 하지만 이렇게 다시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약속에 나와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야,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지 않은가.

“가연아. 나, 이거 계속 들고 있으니까 팔 아픈데, 진짜 안 먹어볼 거야?”

가볍게 포크를 흔들어 보였다. 애써 풀어놓은 분위기가 무용지물이 되려던 찰나, 하민의 목소리에 다시 시선을 돌린 가연이 고민하는 듯하더니 결국 함박스테이크 조각을 받아먹었다. 맛있네, 중얼거리는 가연을 바라보며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하민이 곧 정신을 되찾고 더운 공기를 수습했다.

 

평소에는 나누지 않던 대화로 채워진 식사가, 적어도 겉보기에는 무사히 마무리된 후, 첫 데이트니까 계산은 자신이 하겠다는 말에 ‘그러든가’하는 대답을 들은 하민이 계산을 진행했다.

“네가 가고 싶다고 했던 만화 카페, 어디로 갈지 미리 찾아보고 있을래?”

가연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 계산대 옆 벽에 기댄 채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조용한 곳을 다시 한번 점검해보았다. 조용하고, 영업 중이고, 하민과 자신의 선호 차이를 극대화할 수 있는 곳. 가연은 하민과 자신이 앉았던 자리를 돌아보며 되새겼다. 부드러웠던 식사 분위기와 지아와 앉았던 창가 자리. 지난주와 비교했을 때 현재까지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그러니까, 다음 장소에서 확정을 지어야지. 계산이 끝나고 가연을 부르는 하민에게, 가연은 드물게 위선적인 미소로 대답했다.

“어느 만화 카페로 갈지는 정했어?”

“응. 앞장설게.”

하민은 그래, 하고 대답한 다음, 상상 속에서 연습한 대로 자연스럽게 가연의 손을 잡았다. 둘 중 누구도 자연스럽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가연이 붙잡힌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다시 앞으로 돌린 시선이 의식하지 않도록 고정하고, 가연은 천천히 발을 뻗었다. 흔들렸기 때문일까. 흔들렸던 걸까. 맞닿은 손바닥으로 전해져오는 온기를 떨어트리기 싫었다.

 

하민은 아까 가연이 자신이 내민 함박스테이크 조각을 받아먹었을 때부터, 가연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만화 카페라는 장소를 고른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일에서는 대체로 눈치가 빠른 편인 하민이었으나, 언제나 가연의 반응만큼은 하민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하민은 줄곧 그 이유를, 가연을 향한 자신의 감정 탓으로 돌리곤 했다.

조금 전 만화 카페에 들어왔을 때부터, 가연의 눈은 쉴 새 없이 반짝였다. 가연이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너도 골라 와.”

하민은 고개를 끄덕이고 한국 웹툰의 단행본이 꽂힌 책장으로 갔다. 공부에 열중하느라 문화생활과는 친하게 지내지 않는 자신이 그나마 친근하게 즐길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더 친근한 소재로 접근하기 위해 왠지 눈길이 가는 책을 집어 들었다.

‘한가연 때문에 내가 이런 것도 다 보고…….’

사실 만화 카페가 가연의 입에서 나왔을 때부터 하민은 가연의 얼굴이나 더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가연이 아니었다면 오지 못했을 곳이니, 가연이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왜 좋아하는지 알아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뭐 골랐어?”

먼저 자리를 잡고 만화를 보던 가연이 하민에게 물었다. 하민이 가연에게 표지를 내밀어 보였다.

“<사랑한다는 한 마디가, 연인에게는>이라는, 웹툰인가 봐.”

가연은 대충 흘겨보다 몇 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자신이 고른 만화로 시선을 돌렸다. 하민은 가연의 맞은편에 앉아서, 낯선 이야기를 펼쳤다. 표현이 부족한 애인에게 서운함을 느끼는 주인공의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에서 애인의 표현이 부족한 이유는 단순히 표현해본 적이 별로 없어서, 쑥스러우니까-같은 변명뿐이었으나, 하민은 자신의 상황이 그보다 복잡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가연은 그 심정을 알 리가 없었으므로, 하민은 가연이 이야기 속 주인공과 같은 마음일까, 하는 생각까지 닿았다. 역시, 지아에게 조언을 구했던 날 깨달았던 것이 정답이었나보다.

두꺼운 1권의 끝 무렵에서, 주인공은 결국 자신의 애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주 조금이더라도, 사랑은 늘 모든 감정을 이겨. 네가 어떤 감정이 들었든, 일단 다 제쳐두고 말을 하란 말이야!’

딱, 세 글자면 괜찮으니까.

이어지는 주인공의 중얼거림이 가연의 목소리로 재생되었다.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려 바라본 가연은 여전히 자신이 골라온 책에 시선을 고정해두고, 벌써 가져온 책 중 세 번째 책을 펼쳐 무서운 속도로 읽어 넘기고 있었다. 옅은 미소로 책을 덮어두고 가연을 감상했다. 역시, 하민은 그걸로 충분했다.

 

하지만 가연은 오늘의 시간이 전혀 충분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조금 전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이번에야말로 자연스럽게 가연과 손을 잡고 있을 때까지만 해도, 드디어 가연의 웃는 표정을 그려 올리며 밤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가득했는데. 하민이 피하고자 했던 그 말이, 결국 가연의 집 앞에서 들려오고 말았다.

“이제 그만하자, 우리.”

1년이 조금 넘는 기간의 연애가 끝을 보였다. 하민은 가연이 먼저 넘어버린 결승선 앞에 서서, 한 발짝을 뻗을지, 가연을 다시 끌어당길지 고민해야 했다. 둘은 아직 버스에서 잡았던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이제야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는데.

하민의 심장에서 무언가가 쿵, 하고 떨어졌다. 진한 울림이 여운으로 남아 자꾸만 하민을 두드렸다.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어떠한 형태로도 정제하지 못한 말이, 하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사랑이 모든 감정을 이긴다더니.

“……사랑해.”

죄책감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단순한 호감에 승리욕이 붙어 타올랐으나 결국 남은 잿더미가 사랑이라면 그걸로 괜찮겠지.

가연이 하민의 셔츠 깃을 잡아당겼다. 1주년 기념 목걸이가 가연의 손가락을 감아왔다. 하민과 눈을 맞춘 가연이 말했다.

“진즉에 좀 말할 것이지.”

“기다렸어?”

“꽤 오래.”

하민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지만, 가연은 시선을 피하지도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어느 순간보다 다정한 목소리로 하민이 물었다.

“괜찮아?”

주어도, 목적어도 없는 문장을 목소리로 듣게 될 줄은 몰랐는데. 피식-웃으며 가연이 말했다.

“……안 괜찮다고 한 적 없어.”

늦지도 이르지도 않은 저녁, 하민과 가연이 입을 맞춘 골목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다만, 가연의 방 창문이 조금 열렸을 뿐.

글러 하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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