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수는 할 말이 생각났다며 손뼉을 쳤다.


“서희 양이 지훈 군의 중학교, 고등학교 후배라면서요?”


진혁의 고개가 서희 쪽으로 움직였다. 아무래도 지훈을 알아 그런 듯했다. 서희는 자신 말고도 한 명이 더 있다며 '윤'을 언급했다. 교수는 오늘 강의실에서 모든 남학생들을 집중 시킨 윤을 떠올리며 다시금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세 사람은 중학교 때도 지금처럼 친했나요?”


서희는 흘러내리는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면서 미소 지었다. 처음 교수실을 들어왔을 때보다 한결 편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땐 서로 친해질까 봐 걱정했던 사이였습니다.”


서희 옆에서 피식- 소리가 작게 들렸다.


“아니 그럼 언제, 어떻게 친해진 건가요?”


교수는 흥미진진한 무협 영화를 보듯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서희는 중학생 때 자신과 윤이 학교 선배들에게 끌려가 매섭게 혼나고 있었는데 갑자기 지훈이 짜잔-하고 나타나 도와주었고, 그 뒤로 자연스레 친해지게 되었다고, 7년의 시간을 7초로 요약했다. 부연 설명으로 고3 여름 방학 때 윤과 함께 지훈에게 수학 과외를 받았는데, 그땐 지훈이 꽤 좋은 선생님이었다면서 장난스레 어깨를 들썩였다.


“세 사람의 인연이 아주 깊군요!”


교수는 감탄하며 웃다가 진혁에게 물었다.


“진혁 군도 지훈 군을 아나요?”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같은 과 후배라서 어울릴 기회가 종종 있었습니다.”

“아니 그런데, 왜 지훈 군이 서희 양과 진혁 군을 소개해 주지 않았나요? 같이 볼 기회가 없었나요?”


진혁은 교수의 질문처럼 왜 기회가 없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때 서희가 가볍게 구부린 손으로 진혁을 가리키며, 자신이 입학했을 당시에는 진혁 선배가 입대해서 마주칠 일이 없었다고, 윤에게 들은 대로 전했다. 교수는 바로 이해됐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혁도 교수를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불쑥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입대했던 때를 이 친구가 어떻게 알지? 아... 지훈이에게 들었겠군. 진혁은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행동을 멈췄다. 나를... 알고 있었군. 어떤... 나를.


교수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편한 음색으로 물었다.


“서희 양은 혹시 진로를 어느 쪽으로 생각하고 있나요? 박 교수한테 듣기로는 현재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하던데.”

“네, Insight 학원 수학과에서 조교로 있습니다. 지훈 선배 후임으로 우연히 들어간 곳인데, 일을 할수록 재밌고 또 적성에도 잘 맞아서 계속하려고 합니다.”


교수는 공중에 손가락을 튕겨서 소릴 내더니, 자신도 그 학원의 명성을 익히 들었다면서 반색했다.


“그래서 서희 양이 경제 수학 못지않게 수학과 수업도 열심히 들은 거군요.”


서희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숙이자, 교수는 껄껄 소리 내어 웃었다.


“지훈 군의 후임으로 들어간 거면, 혹시 지훈 군이 제대하면 조교 자리를 비워줘야 하는 건가요?”


교수의 질문에 서희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요즘은... 지훈 선배가 군 생활을 좀 오래오래 했으면 합니다.”


서희 옆에서 또 피식하는 소리가 들렸다. 교수는 손뼉을 치며 웃다가 찔끔 나온 눈물을 손등으로 닦았다.


“아르바이트하느라 바쁜데도 불구하고,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는 모습이 몹시 기특하네요. 박 교수가 칭찬한 이유를 알겠어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서희는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진혁은 고개 돌리고 천천히 서희를 보았다. 서희의 왼쪽 볼에 띄어진 보조개가 그의 눈으로 훅 들어왔다.


“진혁 군은?”


진혁은 빠르게 몸을 바로 했다.


“아, 네.”

“진혁 군은 어느 쪽으로 진로를 결정했나요?

“저는... 아직 고민 중입니다. 정확히는 계획이 없습니다.”


교수는 안경을 올리면서 진혁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진혁 군의 집안이 건설회사 쪽이라고 들은 듯한데.”

“네, 맞습니다.”

“그런데 아직 계획이 없다는 건, 진로를 건설 쪽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거네요.”


진혁은 손끝으로 눈썹을 긁적이며 짧게 웃었다.


“건설은 저랑 맞지 않는 분야여서 일찌감치 마음을 접었습니다.”


교수는 ‘오호라’라면서 몸을 뒤로했다.


“부모님과도 상의했나요?”

“그것도 아직...”


교수는 진혁을 보면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희는 커피를 마시려다 말고 흘깃 진혁을 보았다. 윤이 말해준 진혁은 색이 선명한 사람이었다. 부족함 없고, 못하는 게 없는. 하지만 지금 희미하게 미소 짓는 진혁은 선명한 색과는 거리가 있었다. 마치 내면에 물과 불이 공존하는 것 같은, 그래서 어느 쪽으로도 넘어가지 못하고 아슬아슬하게 흔들리는 것 같은. 불현듯 진혁의 깊은 눈매에서 ‘다자이 오사무’ 소설 <인간실격>의 첫 문장이 떠올랐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


윤은 아르바이트 가는 지하철 안에서 계속 사랑 타령을 했다. ‘사랑’이 아니라 ‘과제’라고 몇 번을 정정해 줬는데도, 윤은 각인된 아기 오리처럼 굴었다.


“그래서 진혁 선배 휴대폰 번호 받았어? 둘이 언제 만나기로 했어?”

“......”

“솔직히 말하면, 비록 두 명이 다섯 명분을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라 해도, 난 네가 몹시 부럽다.”


서희는 한일자로 입을 다물고 도리질했다. 말린다고 말려질 인사가 아니니 포기하는 편이 나았다.


“서희야.”


윤은 뜬금없을 만큼 잔잔하게 서희의 이름을 불렀다. 목을 옆으로 꺾고 인중을 긁으며 부르는 걸 보니, 자신에게로 와 꽃이 되어 달란 의미는 아닌 듯했다.


“있지, 너...”


윤은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지,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너, 그 뒤로 태호 선배 생각은 안 해?”

“뭐?”


서희는 헛헛하게 웃었다.


“할 게... 없지. 함께 한 시간이 짧았잖아. 그렇다 할 미련도 없고.”


영화 한 편 보지 않은 사이였다. 미련을 언급하는 게 더 민망한 일이었다.


“그렇군, 하긴 그렇지.”


윤은 지훈에게 들은 이야기를 꺼낼까 말까 고민하다 입을 닫았다.


“너는.”


대답만 하던 서희가 고개 돌리고 되물었다. 윤은 턱 괴고 ‘음’소리를 냈다. 다른 사람의 질문이라면 잊은 지 오래라고 거짓말 했겠지만, 서희에겐 그리할 필요가 없었다. 윤은 아무렇지 않은 그러나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난... 가끔 생각해. 도영이도 나처럼 힘들어했을까, 하고.”


마음 변해 떠난 이에게 바라는 기대는 모두 헛된 것임을 알면서도, 윤은 집으로 가는 길에 이따금 뒤를 돌아봤다.


“도영이랑 아홉 살 때 처음 만나서, 열다섯 살에 처음 사귀고, 스무 살에 첫 키스하고. 그래서 언젠가는 도영이랑 결혼 하겠지, 했어. 언제나 우리 집 앞에 도영이가 서 있던 것처럼, 도영이랑 나는 변함없이 그렇게 지낼 줄 알았어.”


윤은 마지막 말을 하기 전에 긴 틈을 두었다.


“아마도... 어려서 그랬을지도. 아니면 어리석어서 그랬을지도.”


조각된 몇 개의 기억은 늘 윤을 따라다녔다. 처음 전학 오던 아홉 살의 도영과 유치하면서도 애틋한 고백을 하던 열다섯 살의 도영과 기다려 달라고 하던 스무 살의 도영이.


.

.

.


2년 전.


도영의 생일이었고, 비가 올 거라는 일기예보가 틀렸던, 그래서 윤의 마음이 더 풍족했던 날이었다. 윤은 케이크와 준비한 선물을 가지고 도영의 아파트로 향했다. 아파트에서 자취하는 대학생도 있구나, 하고 신기해하며 윤 자신이 더 좋아했던 도영의 공간이었다.


이번 생일은 다른 때와 달랐다. 더할 나위 없이 특별하고 소중했다. 왜냐하면 스무 살이 된, 드디어 성인이 된 두 사람이 함께 보내는 생일이기 때문이었다. 무언가 신비롭고 아름답고 야릇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도영은 아무 생각 없는 얼굴로 소파에 앉아 TV만 보았다. 물건들은 왜 부서졌고 집은 왜 이리 엉망이 되었느냐는 윤의 물음에 도영은 그냥 화가 나서, 라고만 답했다. 알 수 없는 긴장감과 불편함이 이어지던 순간 도영이 말을 뱉었다.


“나 유학 가.”


윤은 바닥에 떨어진 컵을 들다 말고 눈을 깜빡였다.


“...뭐?”

“유학 간다고.”


윤은 거실 테이블 위에 탁-소리 나게 컵을 내려놓았다.


“무슨 소리야. 도대체 언제.”

“다음 주. 그러니까 이제 여기 오지 마.”


윤은 무심하게 TV 채널을 돌리는 도영을 빤히 쳐다보았다. 뺑소니 사고를 당한 것처럼 모든 게 당황스럽고 믿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중요한 이야길 어떻게 지금... 나랑 상의 한번 없이...”


윤은 하려던 말을 거두고 긴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기가 막혔다. 화도 났다. 무엇보다 앞뒤 없는 통보가 견디기 힘들었다. 윤은 다음 말에 가시를 붙였다.


“내가 깜빡 잊고 있었다. 네가 비밀이 많은 분이라는 걸.”


아홉 살 때도 그랬다. 부모님이 어떤 분이냐, 형제는 몇이냐, 라는 기본적인 질문에도 도영은 말을 아꼈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되었을 때도 이 부분만은 결코 자연스러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도영이 원하지 않았기에 윤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최도영, 네가 말해. 내가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지.”


윤이 다그치는데도 도영은 말없이 TV만 보았다. 윤은 도영에게서 리모컨을 뺏어 TV를 껐다. 어두운 거실에 적막함이 더해졌다.


“내가 지금 너한테 울고불고 하면서 어디로 유학 가는지, 언제 가는지 물어봐야 하는 거야? 아니면, 지금 네 말을 헤어지자는 말로 받아들이고... 내가 여길 나가야 하는 거야?”


도영은 시선도 주지 않은 채 퉁명스럽게 답했다.


“네 마음대로 해.”

“뭐...?”

“네 마음대로,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윤은 선 채로 ‘하...’하고 숨을 뱉었다. 독감처럼 이따금 찾아와 된시름 앓게 하는 이 상황이 지겹고 버거웠다. 윤은 바닥에 내려둔 가방을 챙겨 들었다. 도영은 리모컨을 들어 다시 TV를 켰다. TV 속 개그맨의 농담 소리가 점점 커졌다. 윤은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세차게 열었다. 리모컨을 쥔 도영과 문고리를 잡은 윤의 입에서 나온 한숨은 TV 소리에 묻혀 버렸다. 윤은 문고리를 잡은 채 뒤로 돌았다. 어떤 눈길도 주지 않는 냉담한 도영에게 낫지 않는 상처를 주고 싶었다.


“너한테... 지쳤어.”


도영은 대답 대신 TV 소리를 키웠다. 윤은 숨을 참으며 문고리에서 손을 놓았다. 등 뒤에서 도어록 잠기는 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윤은 참았던 숨을 내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윤은 버스도 타지 않고 무작정 걸었다. 지훈이 데리러 오겠다고 했지만, 윤은 그 제안을 마다하고 혼자서 세 시간이 넘게 걷고 또 걸었다. 그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일기예보가 틀렸다고 좋아한 걸 복수라도 하듯,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비가 매섭게 쏟아졌다. 젖은 옷은 체온을 빼앗고, 처음 신은 하이힐은 발뒤꿈치를 벗겼다. 윤은 어딘지도 모르는 육교 위에 주저앉았다. 추워서, 발이 아파서, 마음이 아파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윤은 자취방이 보이는 골목길에서 걸음을 멈췄다.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선,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누군지 확연히 알 수 있는 낯익은 모습이 보였다. 윤은 안도와 불안이 뒤섞인 숨을 나눠 내쉬었다. 도영이 보여서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가 없었다.


“윤아... 이윤.”


도영은 담벼락에 기댔던 등을 세우고 윤을 불렀다. 늘 그랬듯 ‘윤아, 이윤’ 이렇게 두 번. 윤은 대답 않고 서서 물끄러미 도영을 보았다. 언제부터 기다렸던 건지, 도영의 옷도 윤의 것처럼 흠뻑 젖어 있었다. 순간 와락 눈물이 터져 나왔다. 윤은 허리를 숙이고 두 손으로 무릎을 짚었다. 도대체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화를 내야 하는 건지 용서를 해야 하는 건지... 윤의 입에서 서러운 울음이 터져 나왔다.


“윤아, 이윤, 내가... 잘못했어.”


달려와 윤을 껴안은 도영의 목소리가 세차게 떨렸다.


“윤아... 이윤.”

“하지 마. 내 이름 부르지 마.”


윤은 도영을 밀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는 일과 미안해해야 하는 일만 있는 자신들의 처지가 불쌍했다. 매번 너에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냐고 차마 묻지 못하는 이 상황이 버거웠다. 내뱉어지는 윤의 울음소리가 커졌다.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면 되잖아... 문이 닫히기 전에 잡아주면 되잖아... 기다려 달라고 하면 되잖아...! 그럼 이렇게 엇갈리지 않잖아...!”


스무 살의 사랑은 왜 이토록 막연하고 어렵기만 한지. 도영을 떠날 용기도, 도영에게 떠나라고 할 용기도 없는 윤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주저앉았다.


“기다려.”


도영은 무릎을 굽히고 앉아 두 손으로 윤의 얼굴을 감쌌다.


“기다려, 윤아, 기다려 줘... 윤아. 꼭... 너한테 돌아올게 ”


아홉 살에 처음 만나 열다섯 살에 처음 연인이 된 도영의 간곡한 부탁이었다. 윤은 깊게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윤의 작은 얼굴에서 연이어 눈물이 떨어졌다. 도영은 눈물을 닦아주면서 윤의 이름을 반복해 불렀다. 윤아... 이윤. 윤아... 이윤.


윤은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또다시 눈물이 방울로 떨어졌다. 도영은 두 손으로 윤의 볼을 감쌌다. 숨이 차올랐다. 속으로 외쳐지는 말은 많았지만 어떤 것도 꺼낼 수가 없었다. 도영의 떨리는 입술이 윤에게 조심스럽고 애절하게 닿았다. 아홉 살에 처음 만나 열다섯 살에 처음 연인이 된 두 사람의 첫 입맞춤이었다. 그리하여 때로는 실낱같은 희망이 되기도, 때로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족쇄가 되기도 했던.



평범한 습작생. 더디고 어설픕니다. 빠른 전개를 원하는 분께는 권하지 않습니다.

Mr.imagine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