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이랑이 미워할 줄 모르는 아이였다면, 삐뚤어지지 않았다면, 에서 착안한 이야기이며

형제애의 연랑으로 재미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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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마음에 닿았네


백두대간이 불에 타 아름답던 초원이 까만 재가 되고 상쾌했던 바람은 매캐한 연기와 함께 탄내를 태워 사방으로 흩어져 갈 때 두려움과 무서움으로 도와달라고 외치던 작은 아이는 살리기 위해 떠나보낸 검둥개의 죽음을 제 손으로 거두며 자신의 곁에 있던 생명을 사(死)한 것에, 두 손을 벌벌 떨며 눈물을 펑펑 흘렸다.


“도와줘....”


“...혀엉......”





“형...!!!!!!”


작은 몸집에서 외치는 간절함은 매캐한 잿바람에 먹혀 메아리도 되지 못한 채 뭉개져 갔고, 목이 잠기고 더는 소리를 낼 힘이 없을 때까지 모든 힘을 짜낸 아이는 자신의 부름이면 언제든지 올 거라던 형의 약속을 가슴에 눌러 담은 채 밭은 숨만 내뱉었다. 이명과 함께 멀리서 속삭였다.


오지 않아....

형은.... 안 와...


나를 버렸나...? 두려운 물음에 따라온 말은 널 버렸어. 속삭이는 이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자신의 공포를 형상화한 것이었음을 아이는 이후의 여러 번의 악몽을 꾸면서 깨닫게 된다.


차갑고 딱딱해진 검둥개를 품에 안고 아이는 집으로 걸어갔다. 익숙해야 할 길은 새까맣게 타버려 온전한 게 없었다. 제 눈에는 푸릇한 나무의 이파리와 잔뜩 피운 알록달록한 꽃들, 산뜻하면서도 촉촉한 땅의 기운, 울퉁불퉁, 까끌까끌한 투박한 커다란 고목의 몸통,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가 선명하게 펼쳐지는데 온통 까만색의 풍경이 오히려 분홍빛의 고운 의복을 입고 있는 저를, 불에 그을리긴 했지만, 색이 참으로 이질적이라고 말하는 듯하여 아이는 묵직한 사(死)를 품에 꼭 안으며 스며드는 불안감을 떨쳐내지 못했다.


집 근처에 검둥개의 무덤을 만들어준 아이는 제 모습을 감추며 밖을 나돌지 않았다. 변해버린 산이 무서웠다. 형이 있을 때와 다르게 저를 반기지 않는 것 같아 아귀의 숲에 떨어진 것 같은 불안감이 시도 때도 없이 엄습했다. 일말의 기대감으로 하염없이 기다리던 아이는 까무룩 잠들면 악몽으로 깨곤 했다. 그러곤 춥고, 배고프고, 무섭고, 괴롭고, 슬픈 그 어두운 감정에 자신의 손발이 사라지는 감각을 느끼며 흐느꼈다. 악몽은 늘 속삭였다.


형은 오지 않아.

너를 기억하지 않아.

 

돌아오지 않아.

 

이젠 널 미워하던 어미도 웃어주던 형도 없어.

 

너와 놀아주던 검둥개도 없어.

 

이곳에 넌 이방인이야.


어둠 속에서만 속삭이던 목소리는 악몽이 거듭될수록 입이 보였고, 손이 보였으며, 신이 보이기 시작하며 천천히 형상을 갖춰가더니 그것은 곧 아이, 자신이 되었다.


너의 미련.

 

너의 불안.

 

너의 그림자.

 

그러니 이만 붙잡은 끈을 놔.


자신의 이면을 악몽을 통해 온전히 들여다보게 된 그날, 아이는 처음으로 보금자리였던 곳을 떠났다. 산신으로서 형을 보살폈던 산을, 형과 함께 거닐었던 길을, 형이 사랑했던 풍경을 더듬으며 걷는 아이의 앞에는 참상만이 펼쳐져 있었다. 자신은 형에 비할 바가 못 되고 힘이 없는 반호라는 게 서글퍼지는 순간이었다. 푸르던 들판이, 진달래 가지가 늘어졌던 풀숲이 황량하여 눈물이 났다.


‘자꾸 울면 망태 할아범이 잡아간다.’


형의 목소리에 콧물을 훔치며 다시 걸음을 옮긴 아이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몸을 움츠렸다. 형이 있을 때는 분명 사람의 발자취는 없는 곳이었는데 인간이 여기까지 들어온 것인가 싶어 도망가려는 차에 작은 울음소리를 들었다. 사슴이 인간의 덫에 걸려 낑낑대고 있었다. 인간이 나타난 줄 알고 작은 동물이 바르작대어 덫이 사슴의 다리를 더 파고들어 피가 다시 몽글몽글 맺혔다. 이내 산신의 작은 아우임을 안 사슴이 몸을 낮췄다. 아이가 그 덫을 풀어주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단단히 고정된 것을 풀어낸 후 사슴의 눈을 바라보았다.


“잠시 기다려줄래?”


아이의 손에는 약초가 들려있었고, 사슴의 상처에 정성껏 발라주며 제가 아픈 듯 눈을 찡그리며 눈시울을 붉히었다.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훔치고는 저가 상처를 치료해줄 때까지 얌전히 있어 준 사슴에게 고맙다고 말하며 조심히 가라며 인사까지 해주었다. 그 후, 떠나려던 아이는 울음을 멈추고 한 가지 일에 열중했다. 산에 불을 지른 인간들은 산신이 있을 당시에는 오지도 않던 깊은 곳까지 찾아와 덫을 놓았고 아이는 밤이 되면 그 덫을 없애기 시작했다. 그 덫에 자신이 상처 입어도 아이는 시간의 밤낮을 바꿔가며 인간의 자취를 지웠고, 알지도 못하는 지식으로 초목을 살리기 위해 애썼다.


나무와 꽃, 동물들은 자신들을 위해 울어주고 안타까워하는 산신의 작은 아우가 고마웠고, 반호일지라도 천호의 핏줄이라 그 잠재된 힘이 필요했다. 백두대간은 그들 스스로, 버려진 자신들의 새로운 산신으로 천호의 아우를 선택했다.


아이가 산신으로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인간들이 이 숲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아우 산신의 요구에 숲은 산의 입구를 막았다. 어린 몸으로 사용할 수 있는 힘은 미미했지만 아이는 형이 돌아왔을 때를 생각하여 이 숲이 다시 예전처럼 생기를 갖고 푸르러지길 바랐다.

아우 산신의 힘으로 열매를 맺은 나무와 꽃들은 씨앗을 널리 퍼뜨릴 수 있었고, 10년, 50년, 100년이 지나고 나서야 산은 겨우 제 본래의 모습을 찾아갔고, 아이는 어느새 사춘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기쁘니?”


나무의 가지들이 흔들리고 풀들이 살랑이며 바람이 기분 좋게 가로지르고 구름이 높이 떠올랐으며 하늘이 청명했다. 제 형이 산신이었을 적의 백두대간만큼은 못하지만, 숲 내음, 바람의 간질거림, 꽃향기, 따스한 햇볕. 모든 것이 숲을 아름답게 만들고 있었다. 제 손에 들린 진달래를 맛보며 화사하게 웃었다.


숲을 거닐던 아우 산신은 제 허락 없이 산이 열리고 있음을 느꼈다. 단 한 번도 제 의지대로 하지 않은 초목들이 움직이는 것에 이유는 한가지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산이 열린 곳으로 달렸다. 초목이 아우 산신의 길을 열어주었다.


“형!”


검은색과 붉은색이 어우러진 도포를 입은 산을 떠났을 때와 변함없는 모습의 그리운 이가 그의 터전으로 다시 돌아왔다. 아우 산신은 달리는 속도 그대로 제 형의 품으로 안겨들었고, 전 산신은 그를 꽉 안아주었다.


“보, 보고 싶었어.”

“랑아.”

“돌아올 줄 알았어.”


눈물을 펑펑 쏟아내자 곧바로 숲에 비가 내렸다. 여전히 미숙한 아우 산신의 감정에 백두대간이 흔들렸다. 맑은 날 내리는 여우비에 전 산신이 제 아우를 다독였다. 옷이 축축하게 젖어갔다. 눈물을 멈추지 못하는, 품 안에 쏙 들어오지만, 이제는 안아 올리기 힘든 몸집의 들썩거림이 진정될 때까지 계속 토닥였다. 비가 잦아들고 코를 훌쩍이는 소리와 함께 형의 가슴을 슬쩍 밀어내는 손길에 밀려줬더니 전과 다를 바 없는 환한 미소가 그와 시선을 맞춰왔다.


“형 대신해서 숲을 지켰어.”


뿌듯한 미소로 드디어 얼굴을 보여주는 아우에 앳된 모습이 남은 모습을 찬찬히 살피며 두 볼을 감싸 쥐고서 눈물을 닦아 주었다.


“무사했구나, 내 아우.”

“형도 건강해서 다행이야.”


형의 안위를 걱정하는 아우의 마음에 감동한 천호가 아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정한 손길에 아우의 눈가가 붉어졌다.


“꿈이 아니네.”

“많이 컸네.”


말에 담긴 그리움과 슬픔에 마음이 먹먹해진 형이 웃어 보였다. 아우 산신은 기뻐하며 형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전직 산신이 보기에 아직 미흡할지 모르지만, 까만 들판과 먹구름, 어두운 하늘 아래의 꺼진 수많은 생명을 기억하는 아우 산신은 현재의 백두대간을 보여주고 싶었고 자랑하고 싶었다.


“안 물어봐?”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이 있듯 형이 아우에게 물었다. 아우는 저를 곧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제 형의 미안한 얼굴을 보며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전직 산신은 가진 적 없는 아우 산신으로서의 다정함이었다.


“알고 있어.”


따뜻한 말투에 훌쩍 커버린 제 아우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이 산과 똑 닮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여전히 작은 아우의 두 손을 마주 잡으며 죄스러운 마음을 꿀꺽 삼켰다.


“산신이란 자가 제 직무를 유기하고 산을 등졌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돌아올 것을 알았어.”

“너를 버렸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많이, 오래, 외롭긴 했지.”


말 붙일 곳 없고, 제 속을 털 곳 없는 넓은 백두대간의 아우 산신은 그저 버티고 버텼다. 동물들과 착한 요괴들에게 부탁해 형의 소식을 들었다. 약은 요괴들은 그 소식을 빌미로 여우의 은혜를 이용하려 했으나 작은 이야기였기에 자잘한 소원을 빌고 무탈이 지나갔다.


게다가 이름뿐인 산신만 있다는 소리를 듣고 온 약한 요괴에서부터 강한 요괴들이 숲을 망가뜨리고 아우 산신을 위협했지만, 산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내쫓고 도륙하며 숲을 지켜냈다.


“인간 여자에게 반해서 너를 제일로 생각하지 않아서 밉지 않았어?”

“형이 제일 좋지만, 산신으로서 형에겐 나 또한 이들처럼 평등했단 걸 알아.”

“그렇지 않아! 랑아, 너는- 특별했어.”

“특별했지만, 산신으로, 형으로서 지켜야 할 작은 생명이었지.”


형은 이런 아우의 마음이 한때 못마땅해했다. 이기적으로 굴지 않는 이 마음을 자신이 외면했다는 사실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 인간 여자는, 형의 일상의 단조로움을 깬 특별함일 테고.”

“이해하는 거야?”

“아니, 아는 거야. 나의 처음은 모두 형이었으니까.”


형은 눈물을 흘렸다. 끊임없이 재잘대던 아우의 세상을 향한 질문은 제가 줍기 전에 어미로부터 이미 형성되어야 했던 것들이었다. 그 질문들에 답한 건 산신이었던 이연이었고 연이 산신으로서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은 모두 아우, 랑의 세상이 되었다.


“미련하기는, 바보같이.”

“오랜만에 만난 아우에게 욕하는 거야?”


산신이었던 연은 모른다. 랑은 가져본 적이 없고, 욕심내본 적이 없다. 배운 적도 없기에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살려는 의지도 몰랐다. 듣는 것이라곤 원망, 저주, 분노, 미움이었다. 천성이 독하질 못해 이를 아득 물며 반항할 줄 몰랐고 끈질긴 목숨을 끊을 용기도 없는 겁쟁이였다.


“미안하다.”

“많이 늦었지만, 사과받아줄게.”


손을 내밀지는 않았지만 때리지 않았고. 어려운 말을 하며 못마땅해했지만 화내지 않았으며 옆자리를 내주며 내치지 않았다. 연은 랑이 받아보지 못했던 모든 애정과 모든 다정과 모든 사랑을 주었다. 랑에겐 그것이 전부였으니 그를 닮고 싶었던 아우 산신이었다.


“딱 하나, 형처럼 하지 못하는 것이 있어.”

“그게 뭔데.”

“인간.”


랑은 제 볼을 긁적이며 시선을 땅에 두었다. 땅엔 들꽃이 자라 바람이 흔들리고 있었다.


“인간은 아직도 무섭고, 싫어. 그들이 이 백두대간을 불태웠고, 숲의 존재들을 아프게 했거든. 세상이 조금 바뀐 건 알지만, 여전히 난 그들이 고깝진 않아.”

“괜찮아, 충분히 잘하고 있어.”


아우 산신은 여러 번 이 마음을 고쳐 보려 했지만, 깊숙이 자리 잡은 공포를 떼어내기는 힘들었다. 반쪽 여우라서인지 인간의 마음을 완연히 버릴 수도 없어 제 정체성을 비난하며 원망도 했지만, 산신으로서도 온전하지 않으니 딱 걸맞다는 그런 미련없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랑은 제가 산신이 될 자격 조건이 부족함을 알았고, 제가 산을 다스리는 동안 단 한 번도 신들이 찾아온 적도 없었기에 이름뿐인, 백두대간을 위한 허울만 있는 산신임을 알았다. 필요시에는 자신의 힘을 끌어다 썼다. 그것에 제 수명을 깎는 짓임을 앎에도 형과 함께했던 자신의 유일한 추억이자 전부인 터전을 되돌리는 것이 간절한 염원이었다.


그렇게 되돌렸고, 형도 제 옆에 있었다. 그리고 아우 산신이 되돌린 산을 보며 형은 예쁘다고 해주었고 잘하고 있다고 칭찬해주었다. 해가 넘어가며 산이 붉게 물들었다.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고, 헤어질 시간임을 알아 자리를 털고 일어선 랑은 연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이제 가서 보고해.”

“........알고 있었어?”


연은 심장이 철렁거렸다. 내 아우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지, 상처 입은 아이는 어디로 숨어버린 건지, 산신의 자리를 버린 제가 보기에도 어엿한 산신인 랑이 안쓰러워졌다. 칭얼대고, 어리광을 부리고, 징징거리던 아우의 곁을 지키지 못했다는 슬픔이 가슴에 스며들었다.


“언젠가 올 거로 생각했어. 너무 오래 걸렸지만.”

“내가 올 줄 알았어?”

“이 산은 형이 왔기에 열린 거야. 이들은 형을 환영하거든.”


노을을 등진 아우 산신의 얼굴에 음영이 져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연은 실루엣만 봐도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았다. 웃고 있는 게 분명한 랑을 보는데 불안감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또 놀러 와.”

“그래, 또 올게.‘


연이 나가는 길은 반딧불이가 밝혀주었다. 전직 산신이지만 천호였고, 백두대간을 오래오래 다스린 그들의 주인이었다. 아우 산신은 연이 숲을 무사히 나가는 걸 감지하며 오래된 절벽의 고목 나무 아래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충분하지 않을까.”


작은 동물들이 랑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무릎 위로 올라온 다람쥐를 쓰다듬은 어린 산신이 다시금 쓸쓸히, 혹은 애처롭게 물었다.


“조금 오래, 잠들어도 되겠지?”


그들이 애쓴 산신의 아우에게 긍정의 의사를 비치었다. 잠시간의 그들의 산신은 숲속 깊숙이 들어가 지친 몸을 뉘어 긴 잠을 청했다. 숲이 그의 잠이 편안하고 달콤하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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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길을 열어주었다. 자신들의 주인인 그의 길을 열어주고서 다시 닫혔다. 인간이 닿지 못하게 입구가 보이지 않는 산을 바라보는 연의 불안감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신의 부름을 받지 않은 산신이 있으니 알아 오너라.‘


삼도천을 얼린 죄로 탈의파의 밑에서 병역의 의무를 하고 있던 연에게 주어진 명이었다. 그 산이 제가 다스리던 백두대간이라는 것에 연은 명을 듣고도 며칠을 머뭇거렸다. 그 사이, 낮말을 듣던 새들이 소식을 전달한 줄도 모르고 마음을 결정한 연은 옛 터전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그리운 얼굴을 마주했다.


수많은 사고가 연의 머리를 헤집었다. 그 사고들 끝에 닿은 것은 단 하나의 감정이었다. 미안한 감정이 솟구쳤다. 몸도 마음도 자랐음에도 여전히 제품에 들어오는, 눈물을 펑펑 쏟아내는 어린 아우를 꽉 껴안았다.


살아 있었구나.

연은 제 가슴에서 쿵쾅대는 아우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많이 컸구나.

연은 두 손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을 느꼈다.


그녀를 잡았던 손에서 흩어져가던 온기와 달랐다. 삼도천의 얼얼한 냉기와도 달랐고 그녀의 혼을 만지던 그 차가움과도 달랐다. 연이 살아있는 생명을 이리 가까이 만져본 것은 오랜만이었다. 탈의파의 명으로 지명수배자가 된 요괴들을 처단하고 다닌 연에게는 오로지 아음의 환생을 기다리는 마음뿐이었다. 이성적이고 냉철하기만 한 천호의 따스함은 그녀를 잃어버리고서 사라져버렸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다림 속에 굳어 있던 연의 마음이 예전처럼 기능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잊고 있었던 혈육 덕분이었지만 모든 것이었던 사람을 잃어버리고 그녀를 지키기 위해 가진 것 모두 버렸던 연이 지금 떠올라버린, 그날 자신이 지키던 백두대간에 두고 온 것에 연민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우의 울음소리로 심장에 물기가 가득 찼다.


원망이나 미움이 없는 눈빛에서 느껴지는 것은 전과 다름없는, 잊고 있었던 애정과 사랑이어서 연은 자신의 죄를 덤덤히 고해바쳤다. 공과 사가 분명하고 이타적이지만 냉소적인 산신이었던 연에게는 너무 커버린 아우의 대답들은 저와는 다른 다정함이 묻어난 산신다운 대답이었다. 또 오겠다는 작별 인사와 함께 내세출입국관리사무소 앞에 선 연은 한참을 서성이다 문을 열었다.


“알고 보낸 거지, 할멈.”

“다시 만나니 어떠하더냐.”


사랑이 무어라고 모든 것을 던진 한 여우의 순애보가 안타까웠다. 남은 것이 없었고 마음 둘 곳도 없어진 연은 탈의파가 바라는 대로 시키는 일을 열심히 해내었다. 그 과정에서 굳어진 마음은 도무지 말랑해질 줄 몰라 탈의파는 방법을 고민했고, 선택했으며 그것이 옳았음을 알았다.


“아우가 산신이던데... 어찌 된 일인지 설명이 필요한데.”


백두대간에서 일어났던 일을 전해 들은 연은 자신의 업보에 희생된 아우가 안쓰러웠다. 인간의 간악함에 스러진 숲의 생명이 눈앞에 드리워졌다. 그 속에서 울부짖었을 아우의 모습이 떠올랐다.


“산신은 신이 정하는 것이 아니었나.”

“숲의 주인들이 정한 산신이었다.”


천호의 사랑과 보호를 받았던 숲의 주인들이 살고자 발버둥 쳤고, 100살도 되지 않은 어린 여우를 꾀어내었다는 사실을 탈의파는 알려주지 않았다.


“구미호의 핏줄이긴 하나 산신이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지. 하지만 착한 아이더구나, 제 수명을 깎아가며 숲을 되살려냈다.”

“왜 신이 살피지 못한 거지.”

“숲이 스스로를 닫아 신들의 눈을 가렸다.”


주인을 잃어버린 백두대간은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힘없지만, 천호의 착하고 어린 여우를 선택했으며, 본래의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비록, 산신의 지위를 놓았다는 소식을 바람이 전했으나 그들은 어린 여우의 힘으로 보살핌을 받아 옛 모습을 찾으며 기다렸다.


그들의 바람대로, 아우 산신의 바람대로 백두대간의 주인이 돌아왔다.


연은 밀린 일을 수행하고서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아침, 날이 밝자마자 다시 숲을 찾았다. 굳게 닫혀 있던 길은 산신의 방문에 다시 활짝 입구를 열어주었다. 산신은 아니었지만 연은 숲이 자신을 반기고 있음을 알았다. 랑이 반기는 것 같아 슬쩍 미소를 머금은 연이 아우를 찾아 나섰으나 아우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아 헤어지던 날 느끼던 불안감이 다시금 아지랑이 피어나듯 피어나는 것을 느꼈다.


“내 아우는 어디에 있지?”


전직 산신이 위엄있는 목소리로 산에 외쳤다. 산이 답하듯 출렁거렸지만, 답을 주지 않았다. 연은 백두대간에서 아우의 냄새가 나는 곳곳을 헤집었다. 숲에 짙은 그림자가 졌고, 고요한 적막만이 가득한 곳에서 그는 이제 냄새가 나지 않는 곳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덩굴이 무성한 굴 앞에 섰다. 천호의 기운으로, 전직 산신으로서 연은 숲이 긴장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검을 꺼내 덩굴을 베려던 그의 앞에 사슴이 나타나 가로막았다.


'아직은 안 돼요.'

'힘을 많이 썼어요.'


이번엔 토끼가 나타나 연을 말렸다.


“열어라.”


산신의 분노에 초목이 공포에 떨었다. 결국 길을 내어주었다. 넝쿨이 사라진 동굴로 들어가니 캄캄한 길이 이어졌다. 따라온 반딧불이가 불을 밝혔고, 깊숙한 굴에는 옛 버릇 못 버린 아우가 소동물처럼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미동도 없이 잠들어 있어 연은 숨이 멎었나 싶은 생각까지 했다.


아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좋은 꿈 꾸길 바랐다. 하지만 그것이 하루, 이틀, 사흘, 일주일이 되자 애가 탔다. 깨어나질 않는 아우를 깨어보려고도 했지만, 겨울잠을 자는 여우처럼 도무지 깨어날 줄을 몰랐다. 아우를 안아 든 연이 숲을 나가려 아래로 향했다. 그러나 입구는 열리지 않았다. 산이 의도적으로 길을 막는 것에 연은 힘을 사용해 억지로 입구를 열었다.


산이 울었다. 안 된다는 듯, 강하게 말렸다. 하지만, 주인의 성정을 아는 백두대간은 금세 침묵하며 길을 터주었다. 집으로 데려가 이불보 위에 눕히고는 아는 요괴 의원에게 진찰을 맡겼더니 그냥 잠이 들었다는 말뿐이었다. 기력이 도통 차오르지 않고 떨어지는 것에 관해 물으니 애초에 기력이 약해 해줄 수 있는 처방이 없다 한다.


“깨어나질 않아.”


반인반호라 하더라도 구미호인데 어찌 이리도 유약한 것인지, 어릴 적 잔병치레가 많았던 아우를 떠올리며 연은 튼튼한 제 몸뚱이와 다른 아우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산에 다시 돌려놓거라.”


이해하지 못한 연의 눈동자가 탈의파를 쫓았다.


“산신은 자신이 다스리던 산을 벗어나면 약해진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을 물으러 온 것이 아니었기에 연이 탈의파에게 다른 답을 요구했다.


“백두대간이 정한 산신이 아니더냐, 그곳과 멀어지면 깨어날 시기가 더 늦춰질 뿐이다.”

“그곳에서도 깨어나질 못했어, 그런데도 숲에 두어야 한다는 거야?”

“제 할 일을 다 해서 이제 쉬려는 아이니, 내버려 두어라.”


연이 제 두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탈의파로부터 원하는 답을 들은 연은 다시 아우를 원래 있던 산으로, 같이 지냈던 집으로 데려다 놓았다. 100년도 되지 않은 반인반호가 짊어졌어야 할 산신으로서의 직무에 슬퍼졌다. 하늘에 먹구름이 끼며 산에 비가 내렸다. 이내 천둥 번개가 쳤다.


“감히 내 아우를 이용했나....?”


동물들은 자취를 감추었고, 비로 인해 숲은 본연의 모습들을 처연하게 내려놓았다. 오랜만에 발을 들인 백두대간은 꽃내음, 풀 냄새가 가득했고, 땅은 포근했고, 바람은 부드러웠다. 예뻤고, 푸르렀고, 아름다웠고, 향기로웠다. 아우가 산신임을 알기 전, 연은 이곳의 산신이 이곳을 많이 사랑하고 이곳이 그 산신을 잘 따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우가 산신임을 알았을 때, 안심한 것도 있었다.


힘이 없는 이름뿐인 산신, 주인이 원하는 대로 돌려놓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기에 선택했던 그들이 아우 산신을 보살핀 것은 순전히 주인의 분노를 사는 것이 싫었을 뿐임을 전직 산신은 모른다.


동그랗게 만 채로 몸이 굳어버리는 게 아닌가 싶은 일주일이 지나고, 보름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났다. 연은 세상을 어지럽히는 요괴들을 단죄하면서도 매일 아침, 매일 밤 아우의 곁을 지켰다. 고롱고롱 쉬는 숨을 확인하며, 때론 좋은 꿈을 꾸는지 미소를 그리는 볼을 꾹 눌러보기도 했고, 자라버린 앞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며 어서 일어나라며 매일 제 기력을 조금씩 불어 넣어주었다. 산에 겨울이 오고 눈이 쌓였다. 새하얀 설경을 바라보며 영원히 잠들어버린 어느 설화 속의 공주님처럼 깨지 않은 아우를 6개월이 넘도록 기다리는 형의 마음은 수시로 불안해지고 슬퍼졌다.


아우가 잠든 곳만은 봄인 듯 따스했고, 겨울이 끝나고 진달래꽃이 필 무렵, 겨울잠에서 깨듯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우가 눈을 떴다.


“랑아....”


깨려던 움직임을 다 지켜보고 있던 연이 랑의 볼을 쓰다듬었다. 풋사과처럼 웃어버린 아우가 천천히 눈을 떴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더니 긴 잠으로 잠긴 목에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입 모양은 똑똑히 보았다. 형.


“이제야 일어난 거냐.”

“큼, 크흠, 흠, 얼마나 지났어?”

“계절을 한 바퀴 돌았어.”


생각보다 길게 잠들지 않은 것에 랑은 상체를 일으키며 제 몸을 살폈다. 형의 기운이 제 기력과 함께 감돌았다. 오늘 하루가 아니라 옆을 지켜준 거에 감격하며 붉어진 눈가를 소매로 감추었다.


“예나 지금이나 걱정만 끼치는구나.”

“덕분이야.”


그 속에 약간의 원망과 고마움이 함께 담겨 있어 랑의 코를 살짝 쿵 잡아당겼다. 아프다며 엄살 피우는 아우와 대화하고 있다는 것이 꿈 같았다.


“나와 함께 가자.”


어깨를 쓰다듬으며 연이 제안했다. 이 산을 떠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던 랑은 제 몸 상태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에 이곳을 벗어나면 형의 짐이 될 게 분명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산신으로 말고 아우로서 함께 있어다오.”


힘들었을 랑이 더는 산신의 의무를 지게 할 수 없었다. 숲이 붙들지 못하게 그 계약도 파기하게 할 요량인 연이 아우에게 다시금 간청했다.


“나도 형으로서 너와 함께 있으마.”


외로웠을 아우의 시간을, 홀로 지내야 하는 앞으로의 긴 시간을 같이 있고 싶었고, 있어 주고 싶은 연의 부탁에 랑은 굳혔던 마음을 스르르 녹이고 말았다.



“늦은 인사 드립니다, 이랑이라고 합니다.”


난생처음 만나는 신이라 잔뜩 긴장한 랑은 여기까지 오면서 속으로 여러 번 되뇄을 인사를 건넸다. 침을 꿀꺽 삼키며 두 손을 굳게 잡고서 잘게 떨었다. 책상 위의 책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탈의파가 흘긋 쳐다보는 시선에 랑이 어깨를 움츠리자 옆에서 연이 눈빛으로 경고했다.


“이제야 만나는구나.”


안경을 벗으며 책상 앞 소파로 걸음을 옮기자 여우 형제도 그 옆을 차지하고 앉았다.


“맑구나.”


제 옷자락을 그러쥔 어린 여우의 긴장한 모습에 왜 산이 그런 짓을 했는지 가히 짐작이 간 탈의파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에 잔이라도 떨군 듯 떠는 아우의 모습에 연이 다시 무언의 말을 건넸다. 건방진 모습에 찍어 눌러줄 법도 하건만 제 아우 앞이라고 체면을 차리는 것도 있고, 오랜 만난 아우에게 못난 모습을 보이게 하기 싫어할 게 분명해 탈의파는 연에게 눈을 부라렸다.


“애썼다.”

“.....가, 감사합니다.”

“더는 애쓰지 않아도 된다.”


산신의 직무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와닿지 않은 랑이 말을 머뭇거렸다. 탈의파의 손짓 한 번에 백두대간과의 연결 고리가 끊어질 것임을 짐작한 아우 산신의 눈앞에 추억과 애씀, 자신의 노력과 결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왜 애를 울려, 할멈.”

“넌 조용히 입 다물고 있어!”


연의 무례를 참지 못하고 화를 낸 탈의파와의 호통에 눈물이 쏙 들어가 버린 랑이 볼을 타고 흐른 눈물 자국과 눈가에 남은 물기를 닦아내고서 미련 없이 물었다.


“더는 제가 없어도 되는 거지요?”


탈의파는 아이가 품은 마음을 알아 한숨을 푹 쉬었다.


“네 형이 돌아와서가 아니다. 산신이 없어도 충분히 스스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야.”


어찌 자라면 자신보다 다른 것들을 위하는지. 분명 자기애가 강한 연의 손에 자랐음에도 전혀 다른 성정의 아우 산신을 바라보는 탈의파는 한 마디를 더 조언했다.


“필요성으로 너의 존재 여부를 따지지 말렴.”


한껏 자상해진 목소리가 랑을 다시 울렸다. 뒤늦은 깨달음에 연도 아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물론 아주 가끔 관리는 필요하여 너에게 맡기고 싶구나.”

“그렇게 할게요.”


아우 산신은 기꺼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여우 형제는 저들의 새로운 보금자리로 돌아갔다.



어둠 속에서 울부짖었던 어린 여우는, 숲을 되돌리며 외로이 버텼던 아우 산신은 형 여우를 만나 어리광을 부렸고, 예쁘게 웃었다. 봄이 되면 진달래 보러 백두대간을 방문했고, 여름이면 푸름이 그리웠다며 찾아왔고, 가을이면 밤 열매를 따고 은행잎에서 뛰어놀러 왔고, 겨울이면 새하얀 설경을 감상하러 왔다.

 

계절이 다섯 번이 바뀌고, 10번이 바뀌고, 20번이 바뀌고, 50번이 바뀌어도 그들의 발길을 끊이질 않았다. 그들의 옷차림과 머리 모양새가 점점 바뀌어 갔지만 그들은 여전히 사랑스럽게 아이처럼 웃고 뛰어놀며 장난쳤다.

 

고마워라, 산신님들.

변치 말기를, 행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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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하다고 생각되는 설정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포타랑 트윗을 열심히 구독만 하는지라...)

+시즌1을 겨우 다 보고 적어봅니다.

+이런 랑이라면 시즌1의 애정결핍에 잔뜩 삐뚤어진 이랑은 영영 못 볼 듯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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