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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잠시만... 너무 아파요.”




셰익스피어 희곡을 필사하던 하선이 얼굴을 찌푸리며 점필을 놓았다. 손목을 탈탈 털고 뻐근한 목과 어깨를 몇 번 돌려대면서도 표정은 그대로다. 이안은 의자 뒤로 돌아가 하선의 어깨를 주물러 보았다.




“얼마나 뭉쳤으면 어깨가 돌덩이네. 글씨를 왜 이렇게 온 힘으로 써?”

“오타날까 봐 긴장돼서요... 하나라도 틀리면 그 문단 전체 다시 다 쓰게 하시잖아요.”

“어이구, 내 탓이야? 이 나이 먹도록 글씨도 제대로 못 배웠는데 그럼 그냥 두리? 나라도 채찍질해야지.”




웃으며 점판을 들추고 하선이 쓰던 종이를 꺼내 훑었다. 이안은 전문가였다. 종이에 남은 속도감과 필압만 보고도 쓰는 이의 성격을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다 똑같은 점을 찍는 것처럼 보여도 점자에도 사람마다 필체가 있다.

기계인쇄한 듯 또박또박 힘주어 눌러 쓴 정갈한 글씨. 모든 점마다 종이를 찢을 듯 깊이 뚫어 새긴다. 하선은 차분하지만, 긴장도가 높다.




“열심히 따라와주는 건 고마운데 요령도 좀 있어야겠다. 모든 단어를 다 이렇게 이쁘게 쓰려니까 안 아프고 배겨? 잠시만.”




서랍장 하나를 연 이안이 스포츠테이프를 꺼내왔다. 




“근육 테이핑해줄게. 계속 통증 있고 불편할 때 좋아. 옷 벗어 볼래?”

“네...?”

“생각보다 길게 붙여야 해서. 체육 시간에나 쓰려나 했는데 글씨 쓰다 꺼내게 될 줄은 몰랐네. 얼른 해 줄 테니까 잠깐만 벗어 봐. 엄청 편해져서 깜짝 놀랄 걸?”




이안의 부드러운 재촉에 하선이 셔츠 단추를 풀었다.

드러난 몸의 선은 가늘고 고왔지만 예상보다 훨씬 균형 잡혀 있었다. 얼굴이 창백한 편이긴 했으나 몸은 비현실적이어 보일 만큼 더 희었다.

통증 부위를 확인하려 목과 어깨에 손을 대던 이안은 등을 보고는 흠칫했다. 고운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붉고 험한 흉터.




충격적이었던 영상 속 그 상처다...




애써 눈을 돌린 후 테이프를 뜯었다. 자세히 보니 몸 전체가 자잘한 흉으로 얼룩져 있다. 마치 상아색 종이 곳곳에 흰 물감이 튄 듯 산발적으로 흩어진 흉터들. 




“...다 아버지 짓이니?”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견갑골의 흉터를 가리키며 물었다. 길죽한 테이프가 붙은 하선의 목이 앞으로 가만히 주억거렸다. 




“아주 가끔은... 엄마도요. 때린 적은 없지만... 화를 내면 뭘 자꾸 집어던져서 물건들에 맞은 적은 있어요.”




회전의자를 빙글 돌려 이안을 향한 하선은 쇄골이 잘 보이도록 목을 옆으로 젖혔다.




“영어를 거의 못할 때라... 잘 못 알아듣겠어서 가만히 있었는데 갑자기 뭔가 날아왔었어요. 쇄골이 부서졌었는데 혹시 아직도 흉이 있을까요? 이젠 만지면 아무것도 안 느껴져서요.”

“...몇 살 때?”

“처음 왔을 때요. 여섯 살...?”




미친 놈의 집구석.

이안은 나지막이 욕설을 뇌까렸다.




“...하선아.”




이안이 나지막이 부르는 [하선아]. 하선은 모국의 말을 전부 잊어버렸지만 이안이 이렇게 불러줄 때면 맘이 편안해져 무척 좋았다. 다정한 말투. 나의 편인 사람들만이 불러주는 내 이름, ‘하선’.




“몸에 있는 상처들, 전부 사진 찍어두자.”

“네...?”

“당장 너희 부모를 신고하자는 거 아냐. 재혁이한테도 얘기 들었어. 하지만 그날이 언제가 되더라도, 어떤 방식이 되더라도... 증거는 준비돼 있어야 해. 병원에서 치료받은 적은 있고?”




잠시 굳어졌던 하선이 조용히 도리질했다.




“아주 크게 다쳤을 때 말고는... 없는 것 같아요. 그나마도 어디서 떨어지거나 넘어졌다고 말하고 치료받았어요. 지금 이것도...”

“...그래.”




잠시 돌아선 이안은 서성이며 숨을 골랐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지만 흥분해 하선을 겁먹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런 자들에게 고용되어 급여를 받는 위치라는 사실조차 굴욕적일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이 아이는 대체 어떻게 살아왔길래 이런 엄청난 이야기를 이토록 차분하게 말로 옮기는가...




이안은 방문을 잠근 후 옷을 벗고 드러낸 하선의 상체 곳곳을 핸드폰 카메라로 찍었다. 자세를 바꿀 때마다 매번 허락을 구했다. 혹시 놓친 곳은 없는지 빙 둘러가며 확인한 후 폰을 내려놓자마자 한숨이 쏟아졌다.

그때 머뭇거리던 하선이 돌연 바지 지퍼를 내렸다.




“저기... 선생님...”

“잠깐, 뭐 하니?”

“여기에도... 많아서요. 다 벗어야 해요?”




이안은 얼른 하선의 손을 붙들었다. 




“아냐, 일단 됐어. 속옷 안에도 흉이 있는 거야?”

“네.”

“그래, 그럼 아래쪽은... 재혁이한테 찍어 달라고 부탁할까.”

“네...”




재혁의 이름이 나오자 이 와중에도 미소를 짓는다. 하선이 옷을 도로 갖춰입는 사이 이안은 사진을 모두 모건에게 전송했다. 




“그래... 이제 다시 앉아 볼까?”

“네.”

“아니다... 잠시만.”




목과 어깨, 손목까지 테이핑을 마친 이안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수업을 이어가려 했다. 하지만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정작 하선은 천진하게 눈을 깜박이며 책상을 정돈하고 점필을 쥐는데... 

이안은 일어섰다.




“하선아, 우리 잠깐만 나갔다 오자. 보행 먼저 하자.”

“전... 전 괜찮아요. 그냥 공부할게요.”

“아냐, 정말 미안한데 내가 안 되겠어.”

“......”

“...마음이 아파서.”




이안은 미동도 없이 앉은 하선의 머리를 가만히 가슴에 안아 토닥였다. 언제나 학생들에게 진심이었지만 이토록 마음이 가는 아이는 없었다. 이런 것도 사랑이라고, 이안은 생각했다.  




“케인 잠깐만 들고 딱 한 바퀴만 걷고 오면 안 될까? 10분만. 그 이상 걸으라고 안 할게. 내가 바람 쐬고 싶어서 그래.”

“선생님...”




하선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저는... 케인이 무서워요. 아버지가 그걸로 때려서요...”

“......!”

“아까 찍으신 상처들... 거의 다 케인으로 맞은 거예요.”




재혁에게 한 번 터놓은 후 마른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 솟자 하선은 당황해 눈가를 문질렀다. 




“죄송... 죄송해요. 보행... 꼭 해야 되는데. 그쵸?”




이안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화를 참지 못하고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일어섰다. 뭐라도 던지거나 내리치고 싶었지만 하선이 놀랄까 봐 그럴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래서 케인 들기를 그렇게 싫어했구나. 아니, 싫은 게 아니라 너무 큰 트라우마여서 만질 수 없던 거였어. 그래서 조금만 걸어도 주저앉았던 거야...




“재혁이는... 알고 있어?”

“네...”




독립보행에 꼭 필요한 흰지팡이에 트라우마를 심어 손도 못 대게 만들다니. 도망치지 못하도록 발에 족쇄를 채워두는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이안은 치를 떨며 다시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하선아, 미안하지만 처음부터 모두 다시 얘기해 줘.

 녹음할 테니까.”




마냥 순하디 순하던 이안의 눈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


.


.




“용역들 왔슴다~”




노아는 비디오폰을 보고 피식 웃으며 대문을 열었다.

명목상으로는 파트타임 정원사 1명, 수영장 청소부 2명이지만 모두 낯익고 사랑하는 얼굴들이었다. 얼른 마당으로 나가 함께 들어서는 진과 재혁, 모건을 맞이했다.




-내가 기막힌 아이디어가 하나 있어.

 우리 다 알바생으로 채용하면 되잖아.




이력서를 품고 보무도 당당하게 정식으로 발을 들였던 그날 진이 말했다. 이미 정원사로 일해 본 모건은 물론 추가인력이 필요할 때 재혁과 자신을 부르는 게 어떻겠냐는 얘기였다. 전혀 거절할 이유가 없는, 오히려 꽤 훌륭한 제안이었다. 




“너 같은 돌대가리가 면접을 어떻게 통과했냐.”

“나? 나야 당당히 몸으로 됐지.”




모건이 이죽거리자 진은 노아를 끌어안고 눈가에 쪽 입을 맞췄다.

기겁해 팔을 휘저으며 떼어내도 낄낄 웃어대는 진이 조금도 밉지 않았다. 비록 다른 고용인들의 시선이 신경쓰여 밀어낼 수밖에 없었지만 노아는 이 숨막히는 집에 찾아온 그의 쾌활한 에너지가 너무나 반가웠다. 

마당을 가로질러 현관 앞에 다다를 때쯤에서야 진이 거리를 두며 소리 죽여 물었다.




“CCTV 복구됐어?”

“아직인 거 같아. 데이비스 씨가 지금도 별말 없는 거 보면.”

“데이비스 씨는 니기럴... 개새끼 씹새끼 해도 모자랄 판에.”




진은 마당에 침을 탁 뱉었다.




“하선이는?”




재혁의 물음에 노아는 조용히 웃었다.




“너희들 오는 거 아직 몰라. 불러올게.”




반가운 소식을 들은 하선이 날듯이 계단을 내려왔다. 노아는 모건에게 CCTV 원본 저장장치를 건넸고, 이안은 이미 전송해 둔 하선의 사진과 녹음파일들을 모건과 꼼꼼하게 서로 대조했다. 더듬더듬 연인의 품을 찾아 와락 파고드는 하선을 보며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가련한 아이.

널 꼭 이 지옥같은 집구석에서 빼내 주겠어.




.


.


.




“응, CCTV 이상무.”




모두 수영장에 모여 일하며 간간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노아는 잠시 서재에 들러 CCTV 상태를 다시 확인한 후 내려왔다. 한결 마음이 편안해진 이들은 하선에게도 말을 붙이고 이것저것 묻기도 했다.




“그래서 얼마나 보인다고?”

“어둡고 밝은 정도만요. 아, 낮이구나, 밤이구나... 정도.”

“이런 건 안 보이고?”




진이 하선의 눈 앞에서 손가락을 흔들어 보이자 모건이 철썩 손등을 내리쳤다.




“이런 예의없는 새끼를 봤나. 사과해 빨리.”

“미안합니다... 내가 잘 몰라 가지고.”




곧바로 꾸벅 숙여 사과하는 진에게 하선이 빙그레 웃어 주었다. 노아는 ‘사무라이냐’며 허리를 숙이는 인사습관을 트집 잡아 핀잔하던 진이 하선의 앞에서는 납작납작 엎드려 사죄하는 모습이 귀엽기만 했다.




“그럼 어쩌다 다쳐서 안 보이게 됐는지는 물어봐도 돼?”




역시 거침없는 진은 모두가 궁금해했을지언정 대놓고 묻지는 않았을 질문을 툭 던졌다. 대놓고 호기심을 보이지도, 그렇다고 필요 이상으로 조심스러워하지도 않기에 오히려 사람을 쉽게 무장해제시키는 게 그의 매력이기도 했다. 하선 역시 일상적인 질문을 받은 듯 편히 대답했다.




“4층 높이 다락방 창문에서 추락했대요.”

“‘했대요’? 기억이 안 나?”

“네, 너무 어릴 때라... 뒤로 떨어져서 뒤통수를 크게 다쳤는데 후두엽에 시각 중추라는 게 있대요. 이걸 다치면 눈이 멀쩡해도 앞을 못 본다고...”

“그래? 되게 신기하네.”




재혁은 잠시 눈을 감았다. 이미 아는 이야기인데도 아찔하고 맘이 아렸다. 얼마나 많이 다쳤으면, 얼마나 고통스럽고 충격적인 경험이었길래 기억이 통째로 날아가고 없는 것인지... 자꾸 질문을 이어가는 진에게 이안이 덧붙였다.




“빛은 감지하니까 시신경은 확실히 살아있는 거야. 내가 의사가 아니라서 의학적 관점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눈이 맑은 걸 보면 각막이나 망막 같은 데도 안 상한 것 같고... 하선이처럼 뇌나 신경손상으로 시각장애 얻는 경우가 드물진 않아.”

“그럼... 혹시 다시 볼 가능성은? 눈 자체는 멀쩡하다면-"




재혁이 불쑥 끼어들었다. 

하선이 그런 재혁을 쳐다보았다. 아니, 쳐다보듯 ‘본다’.




“글쎄? 지금 눈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단정은 못하지. 그냥 겉보기로 그렇다는 거고, 시력 돌아올 가능성이야말로 전문가 아니면 모르는 거고... 하선아, 그간 다녔던 병원들에선 뭐랬어?”




이안이 묻자 모두의 시선이 하선에게 향했다. 쿠르르...수영장 물이 하수구로 빠져나가며 한동안 굉장한 소음이 났다. 하선은 소리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어요.

 아빠만 내 눈을 봤거든요. 소아과 의사시니까...”




순간 하선을 제외한 모두의 시선이 복잡하게 부딪혔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모두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 갑자기 눈이 멀어버린 아들을 치료하기 위해 전국은커녕 세상 천지를 떠돌아다녀도 모자랄 판에... 혼자서만 아들의 눈을 봐 왔다고?

아무리 뛰어난 의사라 해도 안과 전문의가 아닌데...





🔞BL only/ 가좍들을 위한 싢픽 & 다수를 위한 웹소설/ 허투루 쓰지 않으려 노력해요. 매우 야한 것도 좋아하지만 고운 감정선도 좋아해요. 이야기 흐름에 공감해주시는 게 제일 행복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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