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 이타카어 혹은 영어

“언어” - 한국어




이번에도 아니었다. 씨발! 내가 미쳐! 윤정한은 허리까지 내려오는 가발을 집어 던지며 욕지거릴 뱉었다. 예쁘게 세팅이 된 검고 윤기 흐르는 머리카락은 뒤엉킨 채 저 구석에 처박혔다. 빌어먹을 습기 때문에 가발과 머리 사이에 자꾸 땀이 찼다. 이런 건 위생상 좋지 않았다. 싱크대에 머리통을 쑤셔 넣고 수도꼭지를 돌리니, 물은 졸졸 나오다가 금방 끊겼다. 옘병! 집세를 받아 처먹었으면 값을 해야 할 거 아니야!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정한은 개의치 않는 얼굴로 싱크대에서 머리통을 빼냈다. 그리고 곧장 1층 로비와 연결된 전화기를 들고 유창하고 우아하게 컴플레인을 걸기 시작했다. 욜라, 올라르싱. 코마 이타스프리카. 그러다 종국엔 노발대발했다. 미친 거 아니야? 개 또라이들아! 그럴 거면 환불을 해주든가! 돈은 돈대로 받아 처먹고! 쓰레기 된 내 돈은 어떻게 책임질 거야?!


- 환불 규정은 없습니다.

“없으면 씨발 좀 만드세요.”


정한은 전화를 끊고 전화선을 뽑아버렸다. 이 답답한 속을 누워서 좀 풀어 볼까 했더니 갑자기 싱크대 수도꼭지에서 유전 터지듯 물이 터져 나왔다. 솨아아-.


“와, 진심 좆같다.”


단전에서 우러난 목소리로 정한은 길게 말을 늘였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죠~ 되는 일 하나 없죠~ 아아~ 박복한 인생~”


수압이 얼마나 좋은지 물이 천장까지 튀었다. 정한은 다 죽어가는 얼굴로 일어나 수도꼭지를 돌려 닫았다. 이제 좀 쉬자. 진심으로 죽을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이번엔 띵동 초인종이 울렸다. 정한은 차라리 죽을까 했다.


“누구세요?”

‘경찰입니다. 이 부근에 총기류 반입 신고가 들어와 순찰 중입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정한은 얼른 다시 가발을 뒤집어썼다. 얇은 모가 이리저리 엉켜 꼭 싸움이라도 한판 한 것 같은 모양새였다.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현관문을 열었다. 방 꼴이 말이 아니었다.


‘욜라.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고 계셨을 텐데 실례합니다. 몇 가지 말씀을 좀 묻겠습니다만.’


덩치가 좋고 까무잡잡한 경찰이 인상 좋게 웃으며 노트를 펼쳐 들었다. 정한은 현관에 기대어 서서 고개를 까딱였다.


‘욜라. 괜찮습니다. 그런데 저 뒤쪽은 누구? 아직 설명을 안 한 것 같아서.’


종이를 넘겨보고 있던 멀끔한 차림의 남자가 눈썹을 올렸다. 응? 나?


‘아. 이쪽은 이타카 검찰청 소속의 조슈아 홍 검사님입니다. 현재 이 사건을 담당하고 계시죠.’

‘조슈아 홍입니다.’

‘…아, 검사…. 오키.’


조슈아 홍은 짧게 자기 신분증을 내보였다. 정한은 알겠다는 듯 뻔뻔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당하게 나가야 한다. 당당하게. 윤정한의 손에 있는 것은 위조 신분증 하나가 전부였다. 그나마도 며칠 전 남자를 뜯어내 얻은 것이었다. 경찰도 난감한데 검사라니. 이 정도 권력을 이겨 먹을 힘은 없었다.


‘소수자를 대상으로 한 악질 범죄는 척결의 대상입니다. 저희는 이번 총기류 반입과 연쇄살인을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고 있는데, 혹시 지난 14일 열두 시 경 귀하께선 무엇을 하고 계셨는지요?’

‘갑자기 훅 들어오시네.’


연쇄살인이 일어나고 있는 줄도 몰랐던 정한은 슬슬 땀이 차기 시작하는 가발을 긁적이며 눈을 위로 치켜떴다. 조슈아 홍 검사는 예리한 눈으로 정한을 관찰했다. 저 수상한 눈깔. 저건 분명 켕기는 게 있는 눈이야. 초임 검사는 근본 없는 열정으로 불타올랐다.


‘데이트 하고 있었어요. 알리바이 증명 가능합니다.’

‘좀 상세하게 말해주시겠어요?’

‘그래요. 제 애인은 민간 건설업체 사장이고요. 애석하게도 나이를 꽤 먹어서 마흔 살이 넘었죠. 그놈 좆은 세우면 죽고 세우면 죽고 하는데 혹시 오해할까 봐 말씀드리는데 제 포지션이 탑입니다. 아무튼, 틈만 나면 나랑 어떻게 좀 해보려는 놈이랑 14일 사거리에 있는 비비로 호텔에서 새벽까지 붙어먹었죠. 체크인 기록도 있을 겁니다. 더 자세히 말씀드리자면 콘돔은 H 브랜드를 사용했는데 전면 돌기에 복숭아 향이었어요. 돌기는 처음이었는데 제 취향은 아니었죠. 혹시 궁금하시다면 더 말씀드릴까요?’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줄줄 나온 거짓말에 윤정한 본인도 놀랐다. 이 문장에서 거짓말이 아닌 건 돌기가 처음이었다는 것뿐이었다. 정한은 말을 끝마친 뒤 태연하게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경찰은 녹음기를 눌러 끄며 말을 더듬었다.


‘…크흠, 그, 그렇군요. 말씀 잘 들었습니다.’

‘또 궁금하신 게 있다면 뭐든지.’

‘아뇨! 이만하면 된 것 같네요. 좋은 시간 보내세요. 욜라!’

‘욜라.’


정한은 태연한 표정으로 경찰과 검사에게 손을 흔들어주기까지 했다. 엘리베이터도 없어서 계단으로 내려가야 하는 낡은 빌라에 구두 또각거리는 소리만 가득했다. 정한은 현관문을 닫고 다시 한번 가발을 내던졌다. 옘병! 내가 제 명에 못 뒤지지! 이젠 정말 끝난 거겠지?

바닥에 늘어져 휙휙 돌아가는 선풍기를 가만히 쳐다보며 정한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도대체 복귀는 언제 되는 걸까?






“이번 일 끝나면 휴가 주시는 거 맞죠? 저 정말 집에 가야 해요.”

“국가를 위해 일하는 놈이 그렇게 믿음이 부족해서 되겠어? 이번 일 처리하면 포상휴가는 톡톡히 줄 거야. 그러니 쓸데없는 일 말고 짐이나 싸.”

“나 진짜 동생 마지막은 봐야 해요. 임종 못 지키면 국가고 뭐고 다 엎어버리고 나도 뒤질 테니까 제발 좆대로 하시라고요.”

“뭐? 좆대로? 윤정한 이 새끼가 입에 걸레를 물었나?”

“물 걸레나 주시고요?”


정한은 쾅 문을 닫고 나갔다. 제대로 빡친 팀장이 물건 집어 던지는 소리가 복도까지 들렸다. 뭐 그딴 건 알 바 아니었다. 정한은 방으로 돌아와 작은 캐리어에 짐을 챙겼다.


그리고 정확히 이틀 뒤 정한은 본사의 전용기를 타고 아무도 모르게 출국했다. 작은 비행기의 목적지는 이타카로스. 축제가 진행되고 있는 열대우림의 나라였다. 이타카로스요? 정한이 두어 번 되물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나라였다. 본사에서는 줄여서 이타카라고 부른다고 했다. 책자고 뭐고 없었다. 정한은 팀장이 준 그 나라 언어를 죽어라 외우며 30시간가량을 비행했다. 입국을 축하한다며 공항 직원이 정한의 목에 꽃다발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정한은 짐가방 하나 달랑 든 채로 아무도 모르는 타국에 버려졌다. 본사의 전용기는 정한을 떨구기가 무섭게 다시 한국으로 튀었다. 정한은 정말 혼자 남은 것이다.


사람들은 다 세뇌당하고 있었다. 이딴 나라가 있는 줄도 모르는 사람이 99퍼센트였다. 이타카의 국왕은 다스릴 백성들을 만들기 위해서 되는 대로 사람들을 수용했다. 아무도 모르는 나라의 백성이 되고 싶은 사람들은 대개 자기 국가에서 버려져 갈 곳 없는 사람들뿐이었다. 이타카는 그렇게 범죄자들의 소굴이 되었다. 그래도 이타카의 국왕은 만족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국왕은 중국의 몇 대 재벌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서 이타카라는 땅덩어리에 단 몇 년 만에 도로를 만들고 삼권분립에 의거한 건물들을 건축했기 때문이다. 망할 줄 알았던 국가는 독립적인 하나의 국가로 성장했다. 민간인은 절대 알 수 없는 이상한 언어를 쓰는 이상한 열대우림의 나라. 어떻게 보면 매력적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근데 이건 개오바라고요.”


정한은 바에 앉아서 술잔을 두드렸다. 빌어먹을 가발이 익숙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징그러웠다. 무음으로 설정해둔 핸드폰이 계속해서 번쩍거렸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누군지 대충 상상이 갔다. 정한은 벌써 세 명의 이상성애자들과 마주했고 결과적으로 셋 다 타겟이 아니었다. 국가의 명령이라는 명목하에 성을 팔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므로 정한은 호텔에서 수면제를 먹이고 튀길 반복했다. 아마 곧 소문이 날 것이다. 여장한 어떤 머저리 같은 새끼가 섹스를 빌미로 호텔에 끌어들인 뒤 지갑을 털어 간다고.


여장한 남자에게 이상한 플레이를 하면서 박히고 싶은 남자라…. 한국에서 나고 자란 정한은 도통 이해할 수가 없는 해괴한 취향이었다. 그래도 뭐 별수가 있나. 실리콘 덩어리로 얼굴을 자유자재로 빚을 수 있다는 타겟에게 바뀌지 않는 설정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빌어먹을 이상성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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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이 넘게 폴더에 잠들어 있던 미공개 글이 안타까워 백업합니다.

재밌게 썼었는데 앞부분 밖에 없어서 슬프네요. 왜 더 써두지 않았니? 과거의 저에게 이렇게 따져 묻고 싶어요. 다시 먹어도 너무 너무 맛있다. 이때 캐해는 전체적으로 플라스틱 비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네요. 이런 윤홍을 좋아했나 봐요.


다들 잘 지내고 계신가요?


오늘이 3월 3일이길래 찾아와 봤어요: )

사실 위에 적은 말은 허울이고요. 폴더 정리하다가 먼지 쌓인 글을 발견해서 읽다가 데리고 왔어요.

잠깐 동안 맛있게 드셨길 바라며, 저는 다시 이만 사라지겠습니다.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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