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에 이미 올려놓은 본편(따로 써놓진 않았지만 가을편과 겨울편)에 이어지는 봄편입니다.

그나저나 저 뒷이야기를 써버리는 바람에 다들 엔딩을 짐작하시겠군요...(...)






나이를 먹지 않는 마녀들에게도 시간은 평등하게 흘러갔다. 한때는 언덕을 온통 뒤덮던 눈은 차츰 드물어지다 길 옆에 쌓인 하얀 흔적이 되었다. 너무도 여려 보여서 도무지 눈을 헤치고 나올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연둣빛 새싹들이 벌판을 점점이 수놓았다. 길 양 옆으로는 이른 꽃들이 피기 시작했다. 벽난로에 불을 지피지 않아도 집안에 훈기가 돌았다. 겨울이 가고 있었다.

스티브는 긴 겨울의 끝을 반기며 두꺼운 외투들을 정리했다. 토니는 흔들의자 위에 도사리고 앉은 채 스티브가 하는 양을 구경하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마녀가 왜 옷을 정리하는 귀찮은 작업을 해야 하는지를 두고 귀찮게 딴죽을 걸었을 테지만(토니의 주장에 의하면 옷은 마법으로 만들어 입는 것이지 실제로 가지고 있다 갈아입는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일리가 있긴 했다) 오늘은 조용하기만 했다. 또 가라앉은 건가. 스티브는 토니가 못 듣게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이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처음에는 그리 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티브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인지도 짐작가는 곳이 없었다. 어쨌든 토니는 조금씩, 하지만 확실하게 우울해졌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면 2층에 하루 종일 처박혀 나오려고 하지 않았고, 식사를 하라고 억지로 끌어다 식탁에 앉히면 먹는 둥 마는 둥 하다가 금방 일어나서 도망쳐 버리는 것이었다.

물론 스티브는 이유를 물었다. 하지만 별 성과는 없었다. 처음 토니는 자신이 우울하다는 것 자체를 부정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을 지경이 되자 그는 잔뜩 풀이 죽은 얼굴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자기도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정말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뭔가 숨기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모른다는데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렇다고 그냥 내버려두자니 그토록 명랑하고 말이 많던 토니가 축 늘어진 모양이 마음에 걸린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었다. 스티브까지 우울해질 지경이었다.

오늘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외투를 옷걸이에 걸다 슬쩍 돌아보니 토니는 창 밖을 바라보며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스티브도 창 밖으로 힐끔 시선을 던졌으나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딱히 재미있거나 특이한 것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평소와 다른 점조차 없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물론 토니가 새싹이 다 돋으면 죽는 특이한 병에 걸려 있다면야 또 모르겠지만, 적어도 스티브가 아는 한 그런 병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당연히 토니가 그런 병을 앓고 있지도 않았다.

“토니. 저녁에 새우튀김 어때?”

스티브는 자신의 목소리가 최대한 자연스럽게 들리기를 기대하며 그렇게 물었다. 토니는 새우튀김을 좋아했다. 원래부터 좋아했는지 아니면 스티브와 처음 만났던 날 먹은 추억(?)의 메뉴여서인지는 확실치 않았으나, 어지간히 기분이 안 좋을 때도 새우튀김으로 유혹하면 군말 없이 식탁에 앉곤 했다. 토니는 꿈에서 깨어난 사람마냥 움찔 놀라더니 그제야 스티브를 돌아보았다. 스티브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 다시 한 번 말했다. 새우튀김? 다행히도 토니는 그 단어에 반응했다.

“먹을 거야!”

“그래. 뺏어가지 않을 테니 좀 진정하고.”

스티브는 목에 와락 매달리는 토니를 익숙하게 안아올렸다. 물론 그 상태로는 절대로 새우튀김을 만들 수 없겠지만(적어도 스티브는 여전히 손을 사용해서 음식을 만들었다) 어차피 먹는 것은 저녁이 될 테니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더구나 바로 눈앞에 보이는 토니는 보는 사람까지 기분이 좋아질 만큼 정말 행복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물어봐야 의미가 없다는 것을 지난 며칠 동안 뼈저리게 확인한 데다, 모처럼 좋은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스티브는 목까지 올라오는 요즘 왜 그렇게 우울하냐는 질문을 꾹 눌러 삼켰다.

“스티브. 난 스티브가 정말 좋아.”

토니가 마치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귓가에 속삭였다. 스티브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토니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편이었고 좋아한다는 말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스티브는 그 말을 똑같이 되돌려주는 것을 좋아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토니의 얼굴 위에 퍼지는 웃음을 보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최근의 토니를 보고 있으면 그에게 무엇인가 힘든 일이 있는데 자신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곤 했다.

언젠가는 얘기해 주겠지. 스티브는 그렇게 생각하며 품에 안긴 토니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날 저녁 토니는 새우튀김을 양껏 먹고는 먼저 식탁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이 집에서 식사와 관련된 일은 스티브가 전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게 무슨 문제가 될 일은 아니었으나, 평소의 토니라면 설거지를 하는 스티브의 등 뒤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늘어놓았을 터였다. 스티브는 토니에게 뭔가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그 다음으로는 제발 우울증에 사로잡혀 2층에 처박힌 것만 아니기를 빌었다.

그릇이 많지는 않았으나 기름이 묻어 있어 작업이 번거로웠고, 덕분에 씻어야 할 양에 비해서는 시간이 제법 오래 걸렸다. 스티브는 씻은 그릇들을 엎어 두고는 곧장 거실로 나왔다. 흔들의자 앞 - 없다. 화장실 - 없다. 그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노려보았다. 역시 저기란 말인가. 2층은 그가 생각하기에 최선의 가능성과 최악의 가능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곳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계단을 밟고 올라섰다. 문은 빠끔히 열려 있었다. 스티브는 문틈으로 머리를 집어넣고는 안쪽을 살폈다. 2층 - 없다.

어딜 간 거지?

문득 스티브는 집 안에 당연히 있는 공간임에도 그가 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곳이 하나 있음을 깨달았다. 바로 스티브 자신의 방이었다. 그러고 보니 닫고 나온 적이 없는데 방문이 닫혀 있다. 스티브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발길을 떼어 놓았다.

연인이 되었다고는 해도 두 사람 - 아니, 마녀 하나와 까마귀 한 마리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 은 아직 같은 방을 쓰지 않았다. 토니는 방을 함께 쓰자고 제의하지 않았고, 스티브는 말하기가 난감했다. 인간형 까마귀를 성적인 대상으로 보게 되었다는 것만도 곤란할 일인데 아무 말도 없는 토니를 자기 방으로 불러들이기가 어쩐지 어색했던 것이다. 결국 한 방에서 잤던 것은 토니가 로키에게 끌려갔다 돌아왔던 그 날 하루뿐이었다. 덕분에 스티브도 토니가 자기 방에 들어갔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토니가 절대 들어와선 안 된다거나 그 이후로 한 번도 발걸음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사람에겐 항상 익숙한 자리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조용히 방문을 열고 보니 과연 이불이 침대 위에서 부자연스럽게 부풀어올라 있었다. 정말 여기 있었나. 스티브는 안으로 들어와 불을 켰다. 이불 자락 사이로 갈색 머리카락이 빠끔히 튀어나와 있었다. 시시때때로 저 틈 사이로 눈까지 슬쩍 내놓고 스티브의 동태를 살피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스티브는 짐짓 모른 척 침대 쪽으로 다가가 불시에 두 팔로 이불째 토니를 포획했다. 힉 하고 놀라는 소리가 들리고 이불 한 겹 사이로 따끈따끈한 토니의 체온이 전해졌다. 졸지에 보쌈을 당하는 신부 신세가 된 토니가 이불에서 나가려고 발버둥을 쳤다. 출구가 어디인지도 찾지 못하는 것 같아 스티브는 웃으며 바나나 껍질 까듯 한쪽 구석에서 자락을 벗겨내고 머리만 꺼내 놓았다. 용을 썼던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토니는 짐짓 눈에 힘을 주어 스티브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그래?”

“도로 나가. 다시 해야 되잖아.”

뭘 다시 해야 한다는 건지는 짐작이 가지 않았으나 토니가 단호해 보였기 때문에 스티브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토니를 침대 위에 다시 내려 주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등 뒤로 문을 닫았다. 완전히 닫지는 않았다. 그는 실처럼 가느다랗게 틈 사이를 열어두고는 안쪽에서 토니가 뭘 하고 있는지 들여다보았다. 토니는 그를 칭칭 휘감은 이불 속에서 재빠르게 빠져나와 이불을 다시 원래대로 침대 위에 반듯이 폈다. 그리고는 마법으로 이불의 중간쯤을 들어올려 이불 속에 둥글고 깊은 굴을 팠다. 마치 동굴을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 같았다. 만족스러울 때까지 형태를 다듬은 뒤 그 안에 토니가 기어들어가는 것으로 작업(?)이 종료되었다. 됐어, 이제 들어와. 스티브는 웃음을 참으며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토니도 아예 이불 밖으로 머리만 쏙 내민 채 스티브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자, 이제 어떻게 하면 맞게 하는 건가?”

토니는 새침한 얼굴로 이불 한쪽을 들어올리더니 안쪽으로 들어오라는 듯 고갯짓을 해 보였다. 스티브는 어떻게 하면 이불 동굴을 망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지 고민하다 그냥 한쪽 끝을 들추고는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토니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스티브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제야 스티브는 그 행동에 관련된 이야기를 책에서 읽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구애행위라는 서술을 읽고 2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무슨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향하는 다리마냥 바라보았던 것도 기억났다. 이제 와서는 그야말로 먼 예전처럼만 느껴지는 기억이었다. 물론 모르고 들어오긴 했으나, 지금이라면 알고 있었더라도 기쁘게 들어갔을 테니까.

이럴 때 보통의 까마귀라면 어떻게 반응할까? 스티브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까마귀가 아닌 인간 스티브 로저스로서 토니에게 해줘야 할 말이 떠올랐다. 그는 토니의 허리를 잡고 좀 더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고는 그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토니. 오늘부턴 이 방에서 자게.”

토니는 이게 꿈이라면 깨어나지 않고 이대로 영원히 자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표정을 보며 스티브는 아릿한 죄책감을 느꼈다. 혹시 토니는 이제까지 스티브가 그를 자기 방으로 부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부르지 않으니까 우울해졌던 것이 아닐까? 물론 스티브가 왜 기분이 좋지 않은지 물었을 때 ‘네가 날 네 방에 들여 주지 않잖아’라고 직접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토니는 자신이 까마귀라는 이유로 스티브가 그와 교제하는 것을 주저했던 - 물론 그 외에도 감정이 무르익기를 기다렸다든가 이유는 많지만 토니는 아직도 그것만이 이유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 것을 기억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피차 이러고 싶었는데 공연히 눈치보느라 시간만 끌었군. 스티브는 토니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진작 이렇게 하는 건데. 어쨌든 이제부터라도 정상적인(?) 연인다운 과정을 밟아가게 되었으니 이것으로 괜찮을지도 모른다. 조금 더 빨랐으면 좋았겠지만 더 늦어지지 않은 것이 어디인가. 그는 이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진 것은 그 뒤로도 몇 주가 더 흐른 다음이었다. 처음 며칠 동안 토니는 언제 우울했냐는 듯 밝게 행동했고, 밤이 되어 스티브의 침대에 기어들 때면 세상을 다 가진 사람 같은 얼굴이었다. 최초에는 슬금슬금 스티브의 눈치를 살피기도 했으나 스티브가 모른 척 당연한 일인 것처럼 행동하자 차츰 그런 행동도 줄었다. 다시 말해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 며칠이 지나고부터 토니는 다시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스티브도 비교적 빨리 알아차렸는데, 한 번 그런 일이 있었기에 토니의 상태를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빠른 깨달음이 빠른 해결책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이전에도 지금도 스티브는 토니가 우울해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토니를 떠보았으나(“토니, 혹시 나한테 뭔가 바라는 게 있나?”) 토니는 전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을 뿐이었다.

결국 스티브는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는 옛 속담을 몸소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 바꿔 말하면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다른 사람의 조언을 구하기로 했다는 뜻이다. 그가 제일 먼저 고려한 사람은 당연히 토니의 전 마스터인 페퍼였다. 그녀는 토니와 300년의 세월을 함께 했으니 당연히 토니의 상태에 대해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문제는 토니였다. 당연하지만 토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본인을 데려가 옆에 앉혀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토니는 페퍼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어지간히도 싫어했으니까. 덕분에 스티브는 어떻게 하면 토니를 떼어놓고 혼자 나갈 수 있을지 고민하느라 페퍼를 찾아가기로 결심하고서도 며칠 동안 날짜만 보냈다.

“스티브. 어디 가?”

“물건 좀 사러 갈까 하는데.”

“……나도 갈래.”

이번에는 정말로 장을 보러 갈 생각이긴 했으나, 어쨌든 스티브는 속으로 혀를 찼다. 최근 토니는 하루 종일 스티브의 옆에 붙어 있고 싶어했다. 스티브가 하는 일을 방해하지는 않았으나, 집안 어디에 있건 토니의 시선이 따라붙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바깥에 나갈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스티브는 토니가 쇼핑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나 - 더구나 오늘 사야 할 물건이란 식재료였다! - 이럴 때면 당연하다는 듯 따라나서는 것이었다. 어쨌든 거절할 이유도 없었으므로 스티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토니는 당연하다는 듯 그의 옆에 달라붙었다. 오늘도 과히 표정이 좋진 않았다.

쇼핑은 생각보다 금방 끝났다. 토니는 내내 별로 기운이 없었고, 스티브가 사는 물건에 대해 무엇이 좋다거나 그것은 싫다는 식으로 토를 달지도 않았다. 집에 돌아올 때는 몇 발짝 뒤로 처져 있었다. 스티브는 몇 차례 걸음을 늦추어 토니와 보조를 맞춰 보았으나, 그 때마다 토니의 걸음이 더 느려졌기 때문에 결국은 약간 떨어져서 걷게 되었다. 등 뒤에서 토니가 발을 질질 끄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 더해 불규칙하게 다리를 저는 소리도 어렴풋이 들렸다. 그 때 다친 다리는 아직도 제대로 고치지 못했다. 스티브는 심란하기만 했다.

집 앞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스티브는 땅거미가 내려 어슴푸레해진 집 근처에서 무엇인가 노랗게 빛나는 것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저건 마치 - 터벅터벅 발 밑만 보며 걸어오던 토니의 머리가 스티브의 등에 가볍게 부딪혔다. 뭐야, 왜 멈춰? 토니가 스티브의 팔을 잡은 채 등 뒤에서 머리만 내밀었다. 그리고 그 노랗게 빛나는 두 눈과 정통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스티브는 자신의 팔을 잡은 손이 순간 파드득 떨리는 것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토니가 두어 발짝 뒷걸음을 쳤다(절대 손은 놓지 않았기 때문에 스티브도 별 수 없이 한 발짝 물러서야 했다).

“……저, 저거……. 저거 뭐야?”

“내 생각엔 너도 이미 짐작하는 대로…….”

“잠깐, 잠깐만. 아냐, 그럼 안 되는 거지. 내 인생에 그런 일이 두 번이나 일어날 순 없어.”

“한 번 일어난 일은 두 번도 일어날 수 있지.”

“너 지금 나한테 좀 많이 모진 거……으악! 가까이 가지 마!!”

스티브는 조심스레 자신의 팔을 잡은 토니의 손을 떼어놓고는 집 쪽으로 다가갔다. 현관문 근처 움푹 들어간 벽에 등을 의지하다시피 한 채 작은 고양이가 웅크리고 있었다. 스티브는 고양이의 품종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으나, 생김새를 보아서는 원래 작은 고양이라서가 아니라 아직 어린 고양이라 작은 것 같았다. 커다란 것이 성큼 다가오니 겁을 먹을 만도 한데 새끼고양이는 무서운 기색도 없이 스티브를 올려다보며 애교라도 부리듯 울음소리를 냈다. 스티브가 허리를 숙이고 손을 내밀려고 한 순간 어느 샌가 등 뒤로 다가온 토니가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지금 뭐하는 거야.”

“뭐하는 거냐니, 난…….”

“쟨 우리 손을 타면 안 돼. 넌 마녀고 난 패밀리어라고.”

“하지만 토니. 저 고양이는 아직 어린…….”

“쟤가 지금 상자 안에 있어? 누가 주워가라고 팻말이라도 꽂아뒀어? 아니면 사람 말을 할 줄 알아서 자긴 버려졌다고 말하기라도 해? 어미가 금방 다시 올 수도 있고 누구 다른 사람이 주워갈 수도 있어.”

마지막 말만 빼면 확실히 토니의 말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언덕 위에 외따로 떨어진 스티브의 토니의 집까지 고양이를 주우러 올 누군가가 있을 리는 없으니까). 그리고 그 말보다도 인정사정없이 팔을 잡아끄는 토니의 손 때문에 스티브는 고양이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힘으로 밀치고자 한다면 토니의 손 정도는 얼마든지 떼어놓을 수 있겠지만 토니에게 힘을 쓰는 것은 항상 망설여지곤 했다. 고양이는 그들이 집 안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저녁식사 시간은 아주 산만했다. 토니는 뒤에서 누가 쫓아오는 사람마냥 도무지 식사에 집중하지 못했다. 자꾸만 시선이 문간 쪽으로 돌아갔고, 확실하게 확인하지는 못했으나 몇 번은 문 밖으로 나가보기까지 하는 눈치였다. 스티브는 150년 전의 상황을 보는 기분이었다. 태어난 지 채 한 달도 안 된 어린 고양이였다던 클린트가 문 밖에서 울고 있었을 때 토니는 딱 저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까. 설거지가 끝난 후 부엌에서 나온 스티브는 슬금슬금 문 쪽으로 향하는 토니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토니.”

“흐익?! 스, 스티…….”

“뭘 그렇게 놀라.”

“아, 아무것도 아냐. 난 절대 밖에 나갈 생각은…….”

“아까 그 고양이가 아무래도 신경쓰여서. 나가볼까 하는데 같이 갈 건가?”

토니는 한 방 맞은 표정을 짓긴 했으나, 순순히 따라왔다. 고양이는 여전히 현관문 근처에 웅크리고 있었다. 두 사람을 발견하자 반가운 듯한 울음소리를 내더니 어쩔 줄을 모르고 선 토니의 다리에 제 몸을 비벼댔다. 토니는 기겁을 하며 펄쩍 뛰었으나 고양이를 쳐내거나 뒤로 물러서지는 않았다. 스티브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양이를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아무래도 어미가 찾으러 오지는 않을 것 같군.”

“…….”

“들어갈까?”

“……봄이……왔으니까 그냥 내버려둬도 얼어죽진 않지 않을까?”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너는 오늘 밤에 한숨도 못 잘 걸.”

토니는 뭔가 반박하려는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으나 한 마디도 하지는 못했다. 스티브는 한 팔에 고양이를 안고 한 팔로는 토니의 손을 잡아당기며 다시 집 안으로 돌아왔다. 바닥에 내려놓자 고양이는 호기심에 찬 눈으로 집 안을 탐색했다. 그 작은 생물은 사람 크기에 맞춰진 집 안에서 동물이라기보다는 무슨 털실 뭉치처럼 보였다. 토니는 그 갈색 얼룩무늬 털뭉치가 거실을 헤집고 다니는 것을 빤히 바라보다 선언하듯 말했다.

“오늘 밤만이야. 내일 아침에는 꼭 보통 사람 주인을 찾아줘야 해.”

스티브는 자신의 휴대전화에 입력되어 있는 몇 안 되는 번호들을 잠시 떠올렸다. 스스로가 마녀임을 알게 된 이래 떠돌아다니면서 살아온 세월들도 잠시 생각했다. 그에게 마녀가 아닌 보통 사람 친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토니라고 딱히 그런 친구가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리고 설령 한두 명쯤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한두 명 중에 고양이를 선뜻 맡아줄 친구가 있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어쨌든 그런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아 가뜩이나 곤두선 토니의 신경을 더 긁어대고 싶지는 않았기에(그러면 토니는 반드시 괴성을 지르다 당장 고양이를 집에서 내보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고, 그것은 셋 모두에게 영 내키지 않는 결론임이 틀림없었다) 스티브는 그냥 그러마고 고개를 끄덕였다. 토니는 그러고도 안심이 되지 않는 듯 분주하게 움직이는 고양이를 한참 동안 눈으로 좇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그들은 전날 밤 스티브가 미리 짐작한 바 있는 결론에 봉착했다. 스티브에게나 토니에게나 보통 사람인 친구 따위는 없었다. 토니는 이럴 줄 알았다면 서른 명쯤 사귀어뒀을 거라면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고양이는 부지런히 토니에게 다가와 애교를 부리며 어떻게든 무릎 위로 올라가려고 애썼다. 토니는 독약이라도 삼키는 사람 같은 얼굴로 피터 - 대체 언제 이름까지 붙여준 건지 모를 일이었다 - 를 쓰다듬어 주었으나 절대 무릎 위에 올려놓거나 그 이상 가까이 가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냥 우리가 기르는 게 어떻겠나?”

“스티브, 내가 몇 번이나 말했지만…….”

“우리가 기르면 피터는 패밀리어가 되겠지. 그러면 안 되나?”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아.”

“이미 클린트도 잘 길러냈으면서 뭘 걱정하는 건지 모르겠군.”

“……넌 이해 못해. 아무튼, 아무튼 난 싫어! 빨리 주인 찾아봐.”

토니가 목소리를 높이자 피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앞발로 토니의 다리를 툭툭 건드렸다. 스티브는 한숨을 쉬며 길거리에 새끼고양이를 데려가 기를 사람을 찾는다는 전단지를 붙이는 것 이외에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지 생각했다. 이런 순간이면 한층 더 부족하게 느껴지는 빈약한 인맥을 머릿속으로 한참 떠올리다 스티브는 콜슨의 이름을 생각해냈다. 콜슨은 마녀들뿐 아니라 보통 사람들을 상대로도 부동산 중개업을 하고 있었다. 그라면 어떻게든 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스티브가 그 이야기를 꺼내자 토니는 지옥에서 부처를 만난 사람마냥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가! 지금 가! 바로! 스티브는 다시금 한숨을 쉬고는 토니와 피터의 배웅을 받으며 콜슨을 만나러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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