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Code White(눈이 오는 날)

 


외래 진료를 보는 오전 일정이 끝나고 점심을 가리키는 정각이 되어도 손등의 고통은 괜찮아질 거라는 기대와 반대로 여전했다. 긁힌 상처에서 나오는 아픔이라기보다는 홧홧하고 따끔따끔 거리는 게 화상을 입은 것 같은 고통이었다. 그런데 이게 또 이상하게 아픔의 정도가 일정한 것이 의사의 소견으로서는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서야 진료실을 나오면서 손등을 확인해보려는데, 뒤쪽에서 누군가 양 어깨를 세게 잡아챘다. 뒤돌아 확인해보니, 김현서였다. 현서가 해맑은 미소를 지은 채 은설에게 말했다.

 

“교수님, 밥 먹으러 갑시다!”

“오늘도 직원식당?”

“당연하지, CS(Cardiovascular Sergery: 흉부외과)가 밖으로 나가서 먹을 시간이 어디 있겠어.”

 

은설은 대게 현서와 점심을 같이 먹는 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 병원 사람들보다 현서와 함께 점심을 먹는 게 제일 편했기 때문이었다. 손등은 나중에 혼자 있을 때나 확인할 요량으로 빼낸 손을 다시 가운에 꼽고서 현서와 나란히 걸었다. 지하 1층에 있는 직원식당에서 밥을 먹을 생각이었다,

 

“헤모쏘락스(혈흉) 환자는 어떻게 됐어?”

“수술 잘 끝났고 지금은 회복중이셔.”

 

응급 처치를 하면서 평온했던 표정과는 반대로 내심 걱정도 됐던지라 조금은 속이 누그러졌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스케줄에 ‘괜히 의사가 됐다’라는 후회감은 항상 마음 한켠에 존재했지만, 이런 희소식을 들을 때마다 느껴지는 뿌듯함은 후회감을 뒤덮을 정도라 계속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원동력이었다. 의사로서의 사명감을 일깨우는 것은 덤이었다. 안도의 숨을 짧게 내뱉은 은설이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바라본 현서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너 때문에 괜히 CS로 와서 이게 무슨 고생이야….”

 

현서는 본래 레지던트 지원자가 제일 많은, 소위 ‘돈이 되는 과’라고 불리는 성형외과에 지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를 그냥 보고 넘어갈 은설이 아니었다. 은설은 현서를 흉부외과에 오도록 꼬여냈다. 정채연 밑에서 일하는 현서를 보기 싫은 건 부가적인 이유였고, 흉부외과 소속이 몇 없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그 꼬임에 보기 좋게 넘어간 현서는 그때의 일을 5분에 1번꼴로 후회하고 있었다. 레지던트가 몇 없었던 탓에 시도때도 없이 부르는 교수들. 살인적인 스케줄. 장시간의 수술. 흉부외과에 온 건 인생 최대의 실수였다.

 

“그래도 나처럼 훌륭한 교수 밑에서 일하고 있잖아.”

“훌륭하긴. 정채연 교수님이 더 훌륭하시지.”

“참나, 그게 뭐 대단하다고. 이름 다루는 것보다 바이탈 다루는 게 더 훌륭하거든!”

 

흉부외과는 바이탈을 다루는 과로 쉽게 말해 환자의 생명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일을 하지만, 성형외과는 다른 축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성형외과를 얕잡아서 뱉은 말은 아니었다. 외형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성형외과 시술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만, 채연이 소속돼있는 과라는 이유 하나로 부정적인 이미지가 덧 씌어져 홧김에 뱉은 말이었다.

 

은설이 입술을 삐죽거리는 채로 한마디 더 하기 위해 입을 여는데, 때마침 도착한 직원식당 입구에 임 교수와 다른 과 교수들이 보였다. 현서가 삿대질을 하고 있는 은설을 지나쳐 임 교수에게 다가갔다.

 

“식사하러 오셨어요?”

“그럼 직원식당을 밥 먹으러 오지. 다른 볼 일이 있나?”

 

삐죽삐죽 날이 선 문장과 다르게 어조와 표정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잠이 오게 만들 정도로 나른하기 짝이 없다. 때문에 별 생각 없이 뱉은 말임은 알 수 있었지만, 말 자체가 달갑지 않았던 까닭에 현서가 화를 식혀내며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 임 교수는 그런 현서를 제치고 은설에게 다가가 오전 때 일을 떠올리며 말했다.

 

“도 교수, 오전에는 고마웠어.”

“해야 마땅한 일을 한 것뿐이에요.”

 

은설이 무미건조하게 대답하자, 임 교수가 엄지를 치켜세우며 장난기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제산대병원 최연소 조교수!”

 

은설은 임 교수의 말대로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비교적 어린 나이에 교수로 승진된 타입이었다. 덕분에 제산대병원에서 최연소로 조교수 타이틀을 달은 유명 인사였다.

 

“지금은 정채연 교수가 제일 어리잖아.”

 

지금은 다른 사람이 그 타이틀을 뺏어갔기 때문에 과거형이지만 말이다.

 

“아 맞아. 최근에 정채연 선생이 교수가 됐다지.”

“하하….”

 

옆에 조용히 있었던 외과 교수와 임 교수의 대화에 은설이 멋쩍게 웃어보였다. 몇 분도 채 안돼서 또 정채연과 비교되니, 기분이 쓰레기통에 처박힌 양 더러웠다. 가만히 있는 사람한테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어물쩍 임 교수를 넘기고 배식을 받기 위해 줄을 섰다. 다행히 임 교수는 은설에게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은설이 배식 판을 들고 수저통에 있는 숟가락을 빼기 위해 손을 뻗는 그 순간, 임 교수의 시선이 은설의 손등으로 향했다. 손등에는 무언가 묻어있었다. 눈이 그다지 좋지 않았던 임 교수는 별 생각 없이 은설에게 말했다.

 

“도 교수, 손등에는 뭘 묻히고 다니는 거야.”

“네?”

“오른쪽 손등에 말이야.”

 

오른쪽 손등은 오전부터 이상한 증세를 보이던 손등이었다. 불길한 예감을 떠안은 채 숟가락을 다시 넣어두고 손등을 확인했다. 임 교수의 말대로 뭐가 묻어있었다. 검은 색으로 뭐라고 적혀있는 것 같은데, 읽어보니 이름이다. 뭐, 이름?

 

이름인 걸 확인하자마자 모든 회로가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정지됐다. 갑자기 몸에 이름이 생긴 이유는 단 한가지뿐이었다. 네임. 뭐라고 변명이라도 해야 하는데,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말들이 입안에서 뒤엉켜 좀처럼 매끄러운 문장을 만들어낼 수 없었다.

 

현서가 어느 한쪽이 망가진 것처럼 덜덜 떨고 있는 은설의 손등을 낚아채고서 제 앞으로 끌고 와 살폈다. 은설과 똑같은 반응으로 동공이 확장된 현서는 그 잠깐 사이에 상황파악을 끝내고 손등을 밑으로 내려 감추었다.

 

“아까 펜으로 뭘 끄적이더니, 손등에 적어두셨나 봐요.”

“…네?”

 

현서는 제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그나마 제일 믿을만한 변명으로 네임이 아니라는 것을 임 교수에게 인식시켰다. 임 교수는 애초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노력은 필요 없었지만 말이다. 이 와중에도 은설은 누가 봐도 수상하게 몸을 덜덜 떨어댔다. 그럴 만도 했다. 은설은 네임이 되기 죽도록 싫었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식사 맛있게 하세요!”

 

이대로 안되겠다 싶었는지, 현서가 은설을 끌고 직원식당 밖으로 나왔다. 은설은 영혼을 잃은 사람처럼 힘없이 현서에게 딸려 나갔다.

 

“손등에 그거 뭐야.”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경악을 금치 못하고 벌어진 입새로 불안감이 담긴 탄식 뚝뚝 떨어진다. 지워질까 싶어 반대편 손으로 이름이 새겨진 부위를 문질러보지만, 쉬이 지울 수 없는 문신처럼 지워지기는커녕 마찰 때문에 살갗이 빨갛게 변하기만 했다. 그대로 곧장 화장실로 달려가 휴지에 물을 묻히고 다시금 이름을 닦아냈다. 마찬가지로 부질없는 행위였다. 그제야 상황 파악을 끝낸 은설은 틀어놓은 수도꼭지를 잠그지도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울먹였다.

 

“그 이름…”

“….”

“너 네임이구나.”

 

듣기 싫은 단어가 귀로 날아와 꽂힌다. 아무리 현실을 부정해보아도 이름은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계속해서 느껴지던 고통은 네임의 증상이었나보다. 네임이라는 퍼즐 한 조각이 끼워지자, 완벽하게 딱딱 맞아 떨어졌다.

 

“아니야, 이건 말도 안 돼. 이름이 이렇게 늦게 발현된다고?”

“네임은 대부분 후천적이잖아.”

“이 나이 먹고 무슨 네임이야! 내가 잘못 보는 거 맞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설은 자신이 네임인 것을 부정했다. 이름 따위가 운명을 정해준다는 것이 우스웠으며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현상이었으므로 네임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내가 그 네임이라니. 은설은 자신이 네임이라는 사실에 회의감을 느꼈다.

 

“정명옥….”

 

손등에 적힌 이름을 불러보았다. 소울 메이트이자 평생을 함께해야 할 사람. 은설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건 꿈이야. 눈을 뜨면 분명 우리 집 천장이 보이겠지. 하지만 애석하게도 감았다 뜬 눈으로 본 광경은 여전했다.

 

“이름부터 봐. 이거 우리 엄마세대 이름이야.”

“너, 그 발언 위험해. 정명옥이 뭐 어때서.”

 

심지어 이름도 정명옥이다. 소울 메이트가 엄마뻘 나이라도 된다면 그건 또 크나 큰 낭패였다. 이럴 때 떠오르는 방안은 수술밖에 없었다. 정채연이 전문으로 하는 이름 제거 수술.

 

“언니, 레지던트도 수술은 할 수 있잖아. 이름 제거 수술할 줄 알아? 나 좀 구해줘라 어?”

 

정채연에게 수술을 받긴 싫었다. 네임이라는 사실을 알려야 하는 건 물론이고, 환자의 입장으로 대면해 교수대접을 해주기는 자존심이 상했다.

 

“CS 레지던트한테 이게 무슨 소릴 하는거야.”


은설이 현서의 팔을 붙잡고 되도 않는 소리를 지껄이며 울먹이자, 현서가 그 팔을 매정하게 뿌리쳤다. 현서는 이름 제거 분야와 전혀 상관없는 흉부외과 소속인데다가 수술을 집도 할 수도 없는 전공의였다. 저게 조교수가 레지던트한테 할 소리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은설을 흘겨보던 현서가 이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난 연애할 생각 없어. 지금 일도 바빠 죽겠는데.”

 

일도 바쁜 상태에서 연애까지 한다면 몸이 죽어나갈 것이다. 뿐더러 은설은 비혼주의자였다. 연애보다 일이 좋은 워커홀릭. 은설을 향한 말이었다.

 

“그럼, 이름 제거 수술이 답이지.”

 

은설도 이미 생각했던 방안이다. 이름 제거 수술이 답이긴 하다. 그런데 이름 제거 수술을 받으려면….

 

“정채연 교수님께 여쭤봐. 정채연 교수님이 유명하시잖아!”

 

부작용이 없는 이름 제거 수술을 해낸 정채연에게 받아야 했다. 채연의 이름에 은설은 목 놓아 엉엉 울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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