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내리다.


13.

습한 계절. 하늘을 뚫고 쏟아지는 비는 숲의 무성한 나무마저 뚫고 들어와 석진을 적시고, 그 눈앞의 태형도 적셨다. 주륵주륵 흐르는 그것은, 석진이 흘리는 것이 눈물인지 비인지 알 수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비든 눈물이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태형이 다 젖은 석진의 볼을 닦아 주며 말했다. 


"듣는 것밖에 할 수 없어 죄송합니다."

"듣는 것만으로도 큰일이 아닙니까."

"당신께 들은 이야기는 곧 보옥입니다. 머릿속에 넣어두고 그 문을 굳게 잠가 보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태형의 말에 석진이 싱긋하며 쓰게 웃었다. 보옥이라. 석진에겐 지금 이 시각이 보옥이었다. 그래서 지금의 감각을 기억하기 위해 살며시 눈을 감았다. 주위 가득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볼을 타고 흐르는 빗방울의 차가움. 방울방울 사이를 타고 불어오는 미적지근한 여름 바람. 그것과 함께 코를 스쳐 들어오는 묵직한 숲 향. 마지막으로, 자신의 볼을 쓰다듬는 당신의 뜨거운 온기. 석진은 찰나의 시간을 감각으로 기억하며 느리게 눈을 올려 떴다. 시야가 트이자마자 담기는 태형의 모습에 석진이 안도하며 입을 열었다.


"…옛 무덤 주인은 어느 때 사람인가. 성도 이름도 알 수 없어라."

"……."

"길가의 한 무더기 흙더미 되어."

"…해마다 봄 풀만 자라나누나."


태형이 시의 뒤를 이어주자, 석진은 다시 눈을 내려 감으며 제 볼을 쓰다듬는 그의 손을 쥐어 잡았다. 빗물로 차가워진 볼에 뜨거운 손이 닿으니, 석진은 마치 데일 것만 같아 작은 숨을 내뱉었다.


"참으로 불쌍하신 저의 가족들이지요. 성도 이름도 모르게 여기 묻혀있으니 말입니다."

"……."

"저는……."

"말씀 하시지요."

"무언가를 잃는 것이 익숙한 사람입니다."

"그러하셨습니까."

"하지만 계속해서 무언가를 잃어도, 익숙해지지는 않았습니다."

"……."

"그러니 부디, 제가 선비님을 잃지 않게 해주세요."


꽤 덤덤히 내뱉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그 한마디 한마디가 태형의 뇌리에 간절하게 박혔다. 살면서 타인의 이야기에 이렇듯 아팠던 적은 없었는데. 가슴 부근이 아려오는 느낌에 태형은 석진을 끌어 안았다. 축축이 젖은 비단이 들러붙는 게 영 거슬렸지만, 개의치 않는다. 태형은 두 팔에 들어오고도 남는 가늘은 몸을 힘 주어 안으며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잃지 않으실 겁니다."

"…선비님을 말입니까."

"저를 포함한 그 어느 것도, 잃으실 일이 없을 겁니다."

"……."

"제가 그리 해드리겠습니다. 저의 보잘 것 없는 모든 걸 걸고. 반드시 그리 해드리겠습니다."


태형의 말에 석진이 눈을 뜨니 반짝, 칠흑에 별이 박힌다. 반드시 그리 해주겠다는 그의 다짐에, 석진이 태형의 귓가에 대고 더운 숨을 끼치며 물었다.


"그 말씀이 정녕 참이시겠지요."

"아아, 정말이지……."


태형이 슬쩍 웃더니 고개를 꺾어 석진의 입술에 내리며 말했다.


"거짓은 싫어하는 편입니다."

"그렇다면 제게, 약조를 하신 겁니다."


빗물을 맞아서인가. 입술을 매끈히 휘며 웃는 석진의 모습이 보석처럼 영롱하다. 그렇다면 당신의 붉은 입술은 분명 홍옥이겠지. 석진이 제 목에 매달림과 동시에 태형이 그의 입술을 갈라 들어갔다. 빗물에 식은 입술의 온도가 평소보다도 더욱 뜨겁게 느껴진다. 뜨거운 숨과 뜨거운 혀. 미끈한 살덩이가 얽히자 둘의 호흡이 금세 가빠진다. 

마치 그동안 쌓아왔던 불안감을 단번에 무너뜨리려는 듯한 입맞춤. 누구 할 것 없이 서로의 것을 조급히 빨아들이니 입술 틈새로 자꾸만 빗물이 스며들어왔다. 그 밍밍한 맛에 석진이 입술을 떼어 태형의 품을 벗어나며 말했다.


"빗물이……."

"…왜 그러십니까."

"수국이라면 좋을 테지요. 아니 그렇습니까."

"저는 지금도 감미입니다."


빗물에 웬 감미. 태형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다시 입을 맞추려 하자, 석진이 더욱 뒤로 몸을 뺀다. 방울 방울. 태형의 속눈썹이 얼마나 짙고 풍성한지 그 끝에 반짝이는 빗방울들이 매달려 있다. 이상한 밤이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데, 휘영청 밝은 달은 보름달. 빗방울마다 달 조각이 담긴 듯 반짝이는 것이 마치 꿈결같아 석진의 눈이 시려왔다. 석진이 태형의 속눈썹, 그 끝에 매달린 달 방울들을 닦아내며 말했다.


"비가 세차지 않습니까."

"……."

"아무리 여름이라해도 이리 비를 맞으면 감기에 걸리고 말지요."

"……."

"본디 몸이 아프게 되면 본인보다도 그 주변인들이 더욱 마음 아픈 법이니, 이만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찌 그리 바른 말만 하십니까."

"그렇습니까. 하지만 사실, 바른 말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석진은 쓰게 웃더니 아버지 무덤가에 꽂힌 자신의 검을 들고, 하얗고 하얀 검집에 집어넣었다. 티끌 없는 백색의 검. 그 위에 쓰인 필체가 유려했다. 석진은 언젠가 아버님께서 붓을 놀렸던 기억을 잠깐 떠올리곤 태형의 팔을 잡아끌어 산을 천천히 내렸다. 

빗물이 흥건한 흙을 조심조심 디디며, 발부리에 걸리는 돌을 요령 있게 피하며, 이따금 살갗을 베는 여린 나뭇가지를 치우며 산을 내렸다. 그 일련의 모든 순간, 잠시라도 쥔 손을 놓는 일 없이 둘은 곧 처소에 당도했다. 석진이 다 젖은 비단신을 벗고 마루에 올라서니, 태형이 말했다.


"안에 윤기 형님이 계실 터인데……."

"설마하니 여즉 계시겠습니까."


석진은 윤기가 없을 것이란 확신을 하며 방문을 열어 재꼈다. 그리고 역시나. 조금 전까지 윤기가 다리에 올려 두었던 거문고만이 방 한켠에 잘 정돈되어 있을 뿐, 방 안엔 아무도 없었다. 태형이 다 젖은 버선을 벗으며 멍하니 말했다.


"…계실 줄 알았습니다."

"그분 눈치가 얼마나 빠르신지 모르셨습니까. 말 한마디에 세상 굴러가는 이야기를 모두 이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습니까."

"위로는 장원급제한 장남, 아래로는 세자빈이신데, 그사이에 끼어 골칫거리 역할을 도맡으셨으니, 그 눈치가 얼마나 매서운지요."


태형은 윤기의 몰랐던 점을 깨달으며 석진이 건네준 면포를 쥐어 머리를 털었다. 정말이지 물에 빠진 생쥐 꼴. 무얼하든 몸놀림이 빠른 석진이 어느새 뽀송한 침의로 갈아 입고 태형에게도 새 침의를 펼쳐 주었다. 


"감기에 들면 아니되실 터인데……."

"이래 봬도 어려서부터 잔병치레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개구리를 닮아 그런가 보지요."


석진이 소리내어 웃자 태형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제 별명을 어찌 알고 계십니까."

"저 어렸을 적, 이판 대감께서 제 아버님께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리 개구리를 닮지는 않았었는데……."

"지금의 선비님을 보고 있는 저도, 믿기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석진이 태형을 눈에 가득 담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정말이지 믿기지 않는 이야기. 이 선비님이, 진검을 장난감처럼 여겨 제 아버님께 혼이 난 그 개구리를 닮은 도련님이란 말이지. 머릿속으로 어린 태형이 팔짝팔짝 뛰는 모양새를 그려 본 석진이 눈을 곱게 휘며 미소지었다. 

그러더니 말캉한 입술로 촉, 촉, 태형의 볼이며 이마에 입을 맞춘다. 작은 입맞춤을 여러군데 남긴 석진이 태형의 눈을 바라보자, 커다란 눈에 비춰진 제 얼굴이 보였다. 실로 오랜만에 마주한 자신의 진실된 웃음에 석진이 나긋한 목소리를 내었다.


"아름다우신 눈입니다. 당신의 눈은, 참으로 아름다우십니다."

"그대 이야기를 하시는 게지요."

"오직 당신만을 위한 이야기입니다. 당신의 눈은, 마치 거울과 같습니다."

"그게 무슨 이야기인지요."

"선비님의 요 투명한 눈은 지난봄, 온기 가득한 햇빛을 비추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여름엔 계곡의 맑은 물을 비추었지요. 그렇다면 가을엔 대공의 청명을, 겨울엔 눈꽃의 순백을 비출 것이니, 그것이 거울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석진은 보송한 침의에 태형의 팔을 꿰며 계속해서 말했다.


"저를 떠나지 않겠다 약조하셨으니, 부디 제게 그 사계의 풍경을 보여주시지요."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그렇다면 우선, 그 산속의 집부터 없애는 것이 맞는 이야기겠지요. 아니 그렇습니까."

"그 또한 전에 약조한 바이니 그리하겠습니다."

"불태우지는 마시고 그저 남겨두세요. 산을 다 태워버릴 수는 없는 일이니."


석진의 말에 태형이 소리 내어 웃었다.


"허면 제게 약조하신 것은 언제 들어주실 생각이십니까."

"그 이야기는, 선비님께서 온전히 한양에 내려오셨을 때 다시 하겠습니다."

"참으로 너무하십니다."

"조선 최고의 예인을 얻으시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 줄 아십니까."


석진은 태형이 입은 침의의 저고리를 잘 메어주고는 꽃님이 미리 깔아놓은 이불에 쏙 들어갔다. 그리고 태형은 방 안을 밝힌 촛불을 모두 끄고 나서야 석진의 옆에 익숙한듯 누웠다. 서로 마주보고 누운 채, 어둠 속에서 시야가 익숙해지길 기다리는 시간. 태형이 어렴풋한 석진의 모습을 바라보며 물었다.


"…한양에 내려오면, 저는 무엇을 하면 좋겠습니까."

"어찌 제게 물으십니까."

"저와 사계를 나누실 당신이니, 묻는 것이 당연하지요."

"글쎄요……."


석진이 태형에게 좀 더 붙으려 몸을 움직이자, 침의와 비단 이불 스치는 소리가 방 안 가득 울린다. 어둠 속에서 서서히 윤곽을 잡아가는 태형의 모습에 석진이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말했다.


"과거를 보세요."

"……."

"혹, 과거를 보는 것이 당신의 청렴에 누가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만, 나랏일은 맘에 들지 않습니다."

"그런 분의 아들이시면서."

"그러니 웃긴 이야기지요."


태형의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석진의 볼을 간질였다. 웃긴 이야기라. 한동안 침묵에 잠겼던 석진이 검지를 들어올려 태형의 이마를 톡, 치며 말했다.


"안타깝습니다."

"무엇이 말입니까."

"이 영민한 머리로 모든 것을 깨우쳐 놓으시고, 그것을 이로운 것에 쓰지 않으시니. 길에서 줍는 엽전 1냥보다도 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저는 못내 안타까운게지요."

"……."

"만일 제가 도련님이라면 지금 당장 과거를 보겠습니다. 그것이 저의 염원이었으니 말입니다."


석진이 꿈을 꾸듯 말하는 모양새에 태형의 가슴이 미어졌다. 과거도 볼 수 없게 된 사람. 언젠가 윤기가 제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춤은 조선 최고의 재주꾼이요, 시서화는 물론이고, 거문고까지 완벽한데. 사서오경을 모두 떼었으니, 과거를 본다면 급제 감이지. 진이 이 아이의 유일한 흠은, 양반댁 자제가 아니란 거야."


태형이 조금 착잡해진 모습으로 제 입술을 앙 물자, 이야기의 흐름을 탄 석진이 끊임없이 태형에게 말했다.


"욕심입니다. 그 청렴이란 것이, 도련님의 욕심이란 말입니다."

"……."

"글공부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수두룩하고, 출세하고 싶어도 신분의 한계에 부딪힌 사람이 산을 이룹니다. 본디 그 자격이란 것이 양반들의 특권이온데. 그것을 가지고도 헌신짝마냥 버려버리시니. 이 얼마나 한심한 일인지요."


차라리 그 자격을 제게 주신다면 좋을 텐데요. 하나하나 모두 옳은 말. 석진의 틀림 없는 말에 태형이 심각히 고민하기 시작했다. 과거를 봐야 하나? 그의 말을 듣고 나니 과거를 보지 않는 자신이 아주 중한 잘못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태형을 향해, 석진이 쐐기를 박고야 말았다.


"헌데, 만일 과거를 보지 않으실 생각이시라면……."

"……."

"선비님께선 저를 어찌 감당하실 요량이신지, 감히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앵. 석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 말에 태형의 머리에서 종이 울렸다. 아. 그러고 보니 그렇지. 입에 넣는 것부터 시작해서 피부에 스치는 것, 사소하게 걸치는 장신구 하나하나 최고급품이 아니면 걸치지 않는 석진임을 태형은 잘 알고 있었다. 어쩐지 멍해진 태형을 향해, 석진이 또 한 번 쐐기를 박는다.


"저는 선비님께서 당연히 저를 기적에서 빼주시리라 생각을 했었는데……."


석진이 말 끝을 흐리자 태형의 심장이 철렁한다. 아아. 제발 그 뒤를 말하지 않았으면. 태형이 초조한 침을 삼키려는데, 석진의 눈썹이 팔자로 추욱 처지며 원망어린 목소리를 내었다.


"…모든 것이 제 착각이었나 봅니다."

"아닙니다. 어찌 그런 말을 하십니까."

"물론 저야 제 밥벌이는 물론 선비님의 밥벌이까지 차고 넘치게 하겠지마는……."

"……."

"기적에서 절 빼내는 데에는, 적지 않은 금액이 들어갈 터인데……."

"……."

"게다가 또, 절 빼낸 후엔 어디서 지내실 건지도 궁금합니다. 본가에 들이지는 못하실테고 다른 어딘가에서 지내야 하겠는데, 그것이 과연 어디일지……."


석진은 고민하는 얼굴을 하더니 시선을 올려 태형을 꿰뚫을 듯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씨익. 매끈하게 윤기 흐르는 입술로 웃는다.


"참으로 궁금하지 않습니까."

"아……. 저는……."

"선비님께서는요?"

"아무래도……."


과거를 보아야만 하겠습니다. 마침내 태형이 그리 답하자 석진이 소리내어 웃었다. 태형의 순진무구한 표정하며, 자신의 몇 마디에 수 년의 뜻을 굽힌 모양새하며, 어디 하나 귀엽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석진이 눈꼬리에 맺힌 방울을 닦으며 아직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제 몇마디에 이리 결정하셔도 되는 것인지요."

"그 몇 마디가 전부와 같은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선비님이시라면 장원급제는 따 놓은 당상이지요. 저는 마냥 기대하겠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말이지요."


석진이 졸린 눈을 조금 올려 뜨며 웃었다. 그러더니 비밀 이야기를 하듯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기적에서 저를 빼내는 데엔, 돈이 들지 않으실 겁니다."

"…어찌 그렇습니까."

"행수 어르신께선, 제가 원한다면 그저 보내주신다 약조하셨습니다. 게다가 그 상대가 선비님이시라면, 두 손 번쩍 들고 보내주실 듯합니다."

"그것이 사실입니까."

"사실이고 말고요. 제가 선비님께 바라는 것은 재물이 아니니. 그에 대한 것은, 심려치 마세요……."


석진이 얼굴에 띈 미소를 미처 다 지우지 못하고는 눈을 내리감았다. 피곤한 하루였다. 더욱이 세찬 비를 온몸으로 맞아 평소보다 배로 지치는 느낌. 그 묵직한 몽롱함에 눈을 감자마자 졸음이 쏟아져 내린다. 석진은 저를 무겁게 누르는 수마에 빠지며 간신히 목소리를 내었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하고…… 선비님께서도……, 어서 주무시지요……."

"당신께서도 어서 주무세요."

"……."

"……."


새액 새액. 대답으로 들려온 것은 석진의 고른 숨소리였다. 오르락내리락. 규칙적이고 안정된 움직임에 태형의 숨 쉬는 박자도 함께 편안해진다. 태형은 저도 모르게 석진과 같은 박자로 숨을 쉬며 잠든 예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안타까운 사람. 태형은 손가락으로 가늘게 흘러내리는 석진의 머리칼을 쓸며 석진의 잠에 방해되지 않을 만큼의 목소리로 시를 읊었다.


"적막하고 황량한 밭 귀퉁이. 

탐스런 꽃송이에 약한 가지 휘었네. 장마비 그쳐 향기 흩날리고, 훈훈한 바람에 그림자 흔들리네. 

수레 탄 사람 그 누가 보아줄까. 그저 벌 나비만 와서 엿볼 뿐, 천한 땅에 태어난 것 스스로 부끄러워 소외당하는 한을 삼켜 견디네."


접시꽃을 위한 시. 그래. 그야말로 당신은 접시꽃입니다. 탐스럽고 향기로운 꽃이지만, 구석에 피어 아무도 알아주는 이가 없는, 그런 꽃이란 말입니다. 당신의 가문이 스러지지 않았더라면, 높고 높으신 분이 되셨을 터인데 이런 척박한 땅에 계시다니. 

태형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잠든 석진을 바라보았다. 그대의 이야기를 모두 알게 되었으니, 이젠 생각을 해야 할 때였다. 당신에게 무엇을 주어야 하는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 무엇이라도 할 각오는 되어있으니, 걱정은 없다. 다만 당신께 드릴 최고를 위해 고민 할 뿐. 그러려면 역시…….

태형은 내일 본가로 돌아가야겠다 다짐 하며 눈을 감았다. 본가의 가시방석따위 알 게 뭐람. 산속의 애정어린 초가집따위가 다 뭐람. 그래, 청렴따위 지금은 필요치 않았다. 비가 그쳐가는 푸른 새벽, 태형의 세상이 새롭게 정립되기 시작했다. 제 옆에 누운, 귀한 이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 그것만이 오롯한, 자신의 세계.

그렇게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지고 해가 중천에 떠올랐을 때, 석진은 밤새 감았던 눈을 떴다. 정말 오랜만에 발 뻗고 잔 느낌. 하지만 조금 더 이불에 파묻히고 싶은 기분에 습관처럼 태형 쪽으로 몸을 돌려 둥글게 말았다. 

그런데 웬걸. 태형이 있어야 할 자리엔 깔끔하게 정리된 이불만이 있을 뿐, 태형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항상 저보다 늦게 일어나곤 했던 태형이기에 석진은 잠결에 눈만 껌뻑였다. 깜빡깜빡. 석진은 그 후로도 멍하니 누워만 있다, 어느 정도 잠이 깨고 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저 멀리 기방에서 들리는 장단 소리를 보아하니, 이미 다른 사람들은 기예를 닦고 있는 듯 하였다. 


"…꽃님아."


석진은 언제나처럼 꽃님을 불렀다. 그러자 바로 벌컥, 창호문을 열고 꽃님이 들어왔다. 아이는 세숫물과 함께 새 면포를 준비하며 말했다.


"오랜만에 푹 주무시는듯 하여 깨우지 않았습니다."

"그 말이 맞는구나. 오랜만에 몸이 개운한 것을 보아하니."

"분명 선비님 덕분이겠지요. 제가 그분께 얼마나 감사한지, 오라버님께선 알고 계십니까."


꽃님의 말에 석진이 웃으며 물에 손을 담갔다. 조금 시원한 물. 석진은 두손을 둥글게 말아 물을 뜨며 세수를 했다. 얼굴에 닿으니 더욱 차갑게 느껴지는 온도. 그 시원함에 정신이 맑아진 석진은 면포로 얼굴을 닦고, 옷을 갈아입었다. 한 겹, 두 겹, 세 겹. 겹쳐지는 비단이 가벼운 것은, 자신의 기분 탓이려나. 마침내 도포만을 남겨두고 모두 환복하자, 꽃님이 물어온다. 


"오라버님. 오늘은 어떤 도포를……." 

"벚꽃잎 분홍이 좋을 듯하구나."

"탁월하십니다."


꽃님은 그리 말하며 석진의 팔에 연분홍빛 도포를 끼워 넣고는 끈까지 잘 여며 주었다. 여름이 만연하건만, 석진이 걸친 분홍빛에 그의 주변은 봄이 돌아온 듯했다. 그렇게 봄을 몰고 온 석진은 손가락에 가락지를 걸고, 귀엔 비단실 엮은 귀걸이를 걸고, 가장 아끼는 사향의 향갑을 가슴에 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손때가 잔뜩 묻어 반질반질해진 하이얀 쥘부채를 들고 방을 나섰다. 

끼이익. 여름이라 습해 그런지 방문에서 뻑뻑한 소리가 들려온다. 석진은 꽃님에게 기름칠을 해놓으라 이야기며 새로운 비단신을 신었다. 새신이라 그런지 조금 딱딱하여 발이 아파왔지만, 석진은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땅을 밟았다. 그때, 석진의 시야에 저 멀리 선 태형이 담겼다. 먼저 일어나 간 줄 알았더니, 아직이었나보다. 석진은 새신이 밤새 내린 빗물에 젖을까, 조심히 걸으며 그에게 다가섰다. 


"본가로 떠나신 줄 알았습니다."

"그리할까 하였는데, 그대를 뵙고 가는 것이 좋을 듯 하여 기다렸습니다."

"방에서 기다리지 않으시고."

"밤새 비가 온 덕에, 밖이 시원해 나왔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석진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태형과 나란히 걸어 기방의 화원으로 향했다. 지난 봄 온갖 꽃으로 흐드러졌던 화원은 이젠 풀이 무성한 곳이 되어 있었다. 언제 이렇게 여름이 되었는지, 계절 지나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어 벅찰 정도였다. 석진은 비가 온 다음 날의 풀향을 깊게 들이 마시며 태형을 바라보았다.


"본가로 돌아가시면, 무엇을 하실 요량이신지요."

"일단 과거를 보겠다, 아버님께 이야기 드릴 생각입니다."

"어머님께서 퍽 좋아하시겠습니다."

"하지만 저를 그 기와채에 가두려 하실테지요."


언제나 그러하셨듯이. 태형이 쓰게 웃었다. 그래. 자신이 본가를 끔찍이도 싫어하는 이유. 그것은 제 어머니 탓이 컸다. 하나뿐인 장남에게 목을 매는 어머니. 태형의 쓴웃음에 석진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제가 선비님의 삶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 아닌지 걱정됩니다."

"그런 말씀 마시지요."

"저만 아니라면 산속에서 편안하실 수 있었을 터인데."

"그대가 아니라면, 그 무엇도 의미가 없습니다." 


태형이 석진의 볼을 손가락으로 쓸며 웃었다.

이어지는 내용이 궁금하세요? 포스트를 구매하고 이어지는 내용을 감상해보세요.

  • 텍스트 13,132 공백 제외
300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