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트윈파파_w. 제철망개



“오빠, 밥 꼭 먹어.”

“응, 알겠어.”

“갔다 올게.”

“잘 갔다 와. 작가님 잘 부탁드려요.”

“네-, 샐리 좀 빌릴게요, 박쌤.”


지민은 샐리를 정희에게 데려다 주고 종일 작업에만 몰두할 계획이었다. 제 오빠가 그림만 그리다가 밥을 거를까, 어린 샐리는 그게 걱정이었다. 샐리에게 점심은 절대 거르지 않겠다며 안심시킨 지민은 정희와 샐리가 타고 있는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서 손을 흔들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샐리야, 안에 뜨거우면 말 해?”

“네.”


생전 처음 와보는 목욕탕이 어색한 샐리는 정희의 손을 꼭 잡고 물이 흥건한 바닥에 발을 디뎠다. 정희는 샐리가 앉을 의자를 씻겨서 앉히고 샤워헤드를 들어 한참이나 수온을 조절했다. 타월에 거품을 내어 샐리의 팔을 조심스럽게 들고 행여 아플까 손끝부터 거품을 묻혔다. 샐리는 언제나 그랬듯 숨 쉬는 인형처럼 정희가 하는 모양을 지켜만 봤다. 정희는 샐리에게 구석구석 거품을 묻혀 씻기고, 수온이 적당한 탕에 샐리와 나란히 앉아 집에서 밥은 뭘 해먹는지, 오빠가 집안일은 잘 하는지, 같은 것들을 물었다. 샐리의 대답에 따르면 박쌤은 생각보다 살림을 잘하는 모양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직업을 가진 사람치고는 생활패턴이 일정한 편이었고 아주 복잡하거나 어려운 레시피가 아니면 어지간한 요리도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샐리는 오빠가 5살까지는 저를 씻겨 줬지만 6살이 되고부터는 혼자 씻어보겠냐고 해서 올 초부터는 쭉 혼자서 샤워를 한다는 얘기를 했다. 아직 머리 감는 것은 어려워서 오빠의 도움을 받고, 샤워는 오빠가 가르쳐 준 순서대로 한다는 얘기를 듣고 정희는 울컥함을 느꼈다. 샐리는 왜 혼자서 샤워를 해야 하는지를 정확히는 아니지만 오빠의 설명으로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럼 샐리는, 목욕탕에 오는 것도 처음이겠네?”

“네.”

“그랬구나….”

“….”




“저기 있잖아, 앞으로 이모가, 목욕탕 올 때는 샐리랑 같이 오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

“진짜요?”

“응, 이모 집에는 남자밖에 없잖아. 이모 심심해서.”

“…좋아요.”

“그럼 앞으로 목욕탕 오기 전에 오빠한테 꼭 전화할게?”

“네. 꼭이요.”


정희는 샐리에게 커다란 바스타월을 둘러서 뽀송하도록 물기를 닦아줬고 혼자서 베이비크림을 척척 바르는 샐리를 보고 탄복을 했다. 정민이는 크림을 바르라고 쥐어주면 온 방바닥에 짜내고 썰매를 탄다며 그 위를 뒹굴고 생발광을 했었는데….


“샐리야, 오빠가 이모랑 샐리 같이 저녁 먹고 와도 괜찮다고 했거든?”

“네.”

“샐리랑, 이모랑, 이모네 아저씨랑, 정민이랑, 넷이서 저녁 먹을까?”

“그럼, 오빠는….”

“오빠는 정민이 아빠랑 같이 있대.”

“그럼 괜찮겠다. 좋아요.”


정희가 매일 같이 입이 닳도록 칭찬하고 보고 싶어 하는 박쌤의 어린 여동생 샐리를 아직 제대로 만난 적이 없는 남준도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얼마나 예쁘면 와이프와 조카가 동시에 빠져서 서로 샐리를 보고 싶어 하는지. 정희는 요즘 거의 매일, 퇴근하고 돌아오는 남준에게 샐리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정민이가 그러는데 오늘은 샐리가 어쩌구, 박쌤이 그러는데 샐리가 어쩌구.

예전부터 딸을 가지고 싶었던 정희만큼이나 남준도, 이미 아들 같은 정민이가 있으니 딸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은 해왔으나 두 사람 사이에서는 이뤄지지 않았다. 남준도 정희도, 큰 문제는 없다고 했다. 그런데도 두 사람 사이에는 좀처럼 아이가 생기지 않았고 정희는 아무래도 자신의 탓이라며 아이를 원한다면 이혼을 해도 괜찮다고 했지만 오랜 연인사이에서 부부가 된 둘은 헤어지지 않았고 정민이를 함께 키우는 것을 택했다. 남준은 태어날 때 우렁차게 울어본 이후로 정희가 이혼을 제안했을 때만큼 울었던 적이 없었다. 군대에서 첫 휴가를 나왔을 때도 조금 감격스러웠을 뿐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아이가 생기지 않는 정도의 문제는 남준에게 정희와 헤어질 만큼의 문제는 아니었다.


샐리를 데리고 목욕탕에 가기로 했다는 정희에게 저녁자리를 먼저 제안한 것은 남준이었다. 사랑하는 아내를 들뜨게 하고 웃게 만드는 샐리라는 존재에게 예의를 갖춰서 첫 인사를 나누고 싶었다. 남준은 아침부터 정민이와 놀아주다가 낮잠을 재우고 빨래를 돌렸다. 정민이의 크레파스는 정민이가 부러뜨린 것 보다 남준이 부러뜨린 것이 훨씬 많았다. 정국은 오전 내내 촬영이 잡혀 있었고 저녁에는 지민과 단 둘만 보기로 했다니 굳이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 어지간한 시간이 되어 정민이를 깨우고 외출 준비를 했다. 잠투정이 심한 정민이지만 샐리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는 말에 짜증 한 번 없이 벌떡 일어나 왼쪽 신발에 오른발부터 꿰어 신으려는 것을 겨우 말리고 세수부터 시켰다.


“정민아, 뭐 먹을까.”

“움…, 샐리가 먹고 싶은 거.”

“샐리가 먹고 싶은 거 정민이도 먹을 거야?”

“응, 먹을 거야.”


지가 좋아하는 것 아니면 죽어도 입에 안 넣겠다던 전정민 어디 갔어.




*




“정국씨 오늘 텐션 되게 좋네.”

“그래요? 추가 촬영은요?”

“음, 이 정도면 B컷도 건질 거 많아서, 추가 없어도 되겠는데?”

“그럼 퇴근 하겠슴다!!”

“헐, 정국씨 요새 진짜 꿀 발라 논 데 있나봐.”

“오늘 의상 리턴 없는 거죠?”

“어어, 필요 없대.”

“잘 입겠슴다~!”


오늘은 기괴한 컨셉의 촬영이 아니어서 정국은 세팅한 그대로 촬영장을 벗어났다. 실내 촬영이라 메이크업이 무너지지도 않았고 의상도 과하지 않았다. 레스토랑의 예약시간을 한 번 더 확인하고 약속장소에 도착한 정국은 창문으로 비치는 제 모습을 다시 점검했다. 머리 ok, 얼굴 ok, 기럭지 ok, 갑빠 ok.



음식취향이 비슷해서 레스토랑을 고르는 것도 그다지 고민하지 않았다. 정민이와 샐리를 데리고 놀러갔던 어린이날, 소고기 보다 돼지고기가 좋다는 지민의 말이 떠올라 정희와 남준이 갔었던 삼겹살에 와인을 서빙해주는 곳을 예약했다. 단둘이서만 만나는 건 처음인데 고기부터 구워먹는 건 우악스럽게 보이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뭐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곳이라면 상관없다고 먼저 말을 꺼낸 건 지민이었다. 정국은 지민의 반응으로 지민도 분명히 저에게 호감이 있는 거라고, 착각이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물론 비슷한 처지끼리 서로 동정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에도 없는 사람이 만나자는 걸 매번 허락할 리가 없다. 처음 봤을 때부터 눈에 꽂힌 외모에 서로 만나는 상대가 없는 것도 알았겠다, 정국은 더 이상 꺼리낄 게 없었다. 남은 건 직진뿐.



레스토랑에는 지민이 먼저 와 있었다. 항상 반듯한 셔츠만 입던 지민이 오늘은 어째 목이 제법 파인 줄무늬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것도 정국의 눈에는 신선해 보였다. 애들이 없으니 조금 풀어져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조금 놔준 듯 보였다. 정국이 앉자마자 미리 부탁해놓은 고기와 적당한 쓴맛이 도는 레드와인이 나왔다. 보통의 고깃집처럼 자욱한 연기도 없었고 왁자지껄한 소음도 없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서버가 구워주는 삼겹살과 와인을 마시면서 어색했던 분위기도 말랑해지고 있었다. 괜히 심각하게 얘기를 꺼내면 서로가 부담스러울까봐, 술김에 던지는 농담처럼 조금씩 과거를 내보였다.


“돌 되기 전이었나, 갑자기 나가버렸어요.”

“아….”

“그땐 살림도 빠듯했고, 저 학교도 다니고 있어서 어쩔 줄을 몰랐어요.”

“대학생이었겠네요….”


정국은 자의로(?) 사고를 친 게 아니었다. 수능이 끝난 입시 막바지 무렵, 합격이 결정되고 자취하는 친구의 집에 모여 어른들 몰래 술을 마시다보니 어느새 취해서 정신을 잃었고, 깨어보니 모텔 같은 곳에서 좀 전까지 같이 술을 마시던 같은 반 여자애가 옆에 나란히 누워있었다. 물론 옷가지는 하나도 걸쳐져 있지 않았다. 종종 친구들과 술, 담배는 했어도 양아치로 찍히고 싶지는 않았고 혹시 임신을 하면 수술을 하든 키우든 책임을 지겠다는 약속까지 했더랬다. 여자애는 그 약속을 받고서도 아마 임신은 하지 않았을 거라고 그로부터 반 년 도 더 연락이 없다가 임신이라는 게 조금 티가 날 정도로 약하게 부른 배를 안고 정국을 덜컥 찾아왔다. 자기도 임신인 줄 몰랐다고, 그냥 생리불순 인줄 알았는데 임신이었다고. 

급한 대로 엄마와 누나와 셋이 살던 정국의 집에 살림을 차렸다. 남들은 엠티니 뭐니 놀러 다니느라 바쁠 때, 정국은 강의가 끝나면 곧장 집으로 돌아와서 정민이의 분유를 타고 기저귀를 갈았다. 학교에서 수군거리는 것도 익숙해졌고 나름 생명에 대한 책임을 졌다는 것에 뿌듯함도 느꼈다. 몸은 힘들었어도 나는 부끄러운 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고, 육아에 적극적이지 않은 정민이의 엄마를 다독여가며, 사랑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어쨌든 둘 사이에서 나온 정민이를 키우다 보면 정도 들고 그렇게 열심히 살면 될 거라고 정국은 정민이의 돌잔치도 혼자서 준비했다.


“돌잔치도 못해주고, 힘들어서 시설에 맡길까 했는데 누나가 그러지 말랬어요. 나중에 후회한다고.”

“….”

“나랑 똑같이 생긴 내새끼 나중에 나 찾아오면 그때 무슨 낯짝으로 볼 거냐고, 누나가 막 때렸어요.”

“….”

“정민이 말트기 시작했을 때 이혼 서류 왔길래, 만나지도 않고 바로 도장 찍었죠.”

“아….”

“뭐, 그랬어요.”





“잘 키웠어요, 정민이.”

“네…?”

“형님, 누님도 도와주셨잖아요. 정민이도 저렇게 잘 컸고….”

“…잘 큰건 샐리가 훨씬 잘 컸죠!”

“하하….”







***


본격 삼겹살 장려픽


제철망개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