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적인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이 있다. 그러나 그 기억이 다시는 꾸고 싶지 않은 악몽과도 같은 기억이라면, 이제는 나름 희미해지려던 기억이 저 깊은 바닷속에서부터 형원의 발목을 잡고 끌어 내렸다. 채형원은 형에 관한 기억이라면 한없이 유약해지는 사람이었다. 앳되어 보이는 어린 날의 형원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서 있다. 형원은 그 어둠 속을 벗어나보려 숨이 차도록 뛰어다녔다. 아무리 달리고 달려도,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도 그 곳은 벗어날 수 없는 곳이라는 걸 뒤늦게야 깨달았다. 그런 형원의 앞에 익숙한 뒷모습이 나타난다. 채지원, 채형원의 친형이었다. 형원은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다시금 그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형, 형. 그렇게 한참을 뛰어 도착한 곳엔 형태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박살 난 자동차가 뒤집어져 있었다. 형원은 마치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심장을 찔린 것만 같았다.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자동차 안에는 다리가 깔려 움직일 수 없는 제 형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안돼, 안돼. 형을 구해야만 했다.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옮겨보려 채형원은 제 다리를 거세게 내려치기 시작했다. 움직여, 움직이라고. 이미 형원의 얼굴은 눈물로 뒤덮여있었다. 자동차의 기름이 흘러나온 곳에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형원은 그제서야 제 몸을 움직일 수가 있었다. 이미 피로 뒤덮여있는 얼굴을 한 형이 형원에게 무언가 속삭인다.


그렇게 자동차는 흔적도 없이 폭발해버렸다. 채형원은, 마지막 형의 말이 무엇인지, 자신에게 무엇을 말하려 한 것인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산산조각 나버린 형의 흔적 앞에 형원은 무릎 꿇고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내가, 내가 형을 끌어들이지만 않았어도. 채형원은 그렇게 한없이 울다 쓰러졌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잠에서 깼다. 눈물인지 땀인지, 혹은 뒤섞여 있을지도 모르는 것들을 대충 입고 있던 옷으로 닦아냈다. 형은 자신에게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그러나 이 잔인한 꿈은 항상 그 답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때마다 형원은 소리내어 울고 싶어졌다. 애석하게도 당장 그의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밀려오는 죄책감과 함께 한없이 우울해지는 그런 새벽. 형원은 이제 온기 조차 남아있지 않은 형의 방으로 향했다. 나는 형을 죽였다. 나는… 나는…, 애써 참아냈던 눈물이 다시금 터져 나온다. 그러니까, 채형원은 형의 앞에서 한 없이 약해지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최근 임창균은 신경안정제를 먹는 횟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악몽을 꾸는 빈도수가 줄어들었다. 단지 그 뿐이었다. 쉬는 시간에 창균은 매점에서 형원을 마주쳤다. 채형원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마치 살아있는 게 아닌 것만 같았다. 사람이 요 며칠 사이에 저렇게 수척해질 수가 있나. 임창균은 채형원에게 다가갔다. 민혁이 창균에게 인사한다. 가까이에서 본 채형원의 몰골은 더 엉망이었다. 혹시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채형원에게 물어보았지만 돌아오는 건 아니야. 그냥. 하는 무미건조한 대답 뿐이었다. 민혁은 마음 쓰지 말라며 창균의 등을 떠밀었다. 채형원이 다 죽어가는 몰골을 하게 된 데에는 그 꿈이 있었다. 요 며칠 새 자꾸 똑같은 꿈을 꿨다. 이제는 너무 많이 마주해서 어느 정도 견뎌낼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 꿈속에서 형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만큼은 버틸 수가 없었다. 잠에 들고 싶지 않았다. 잠에 드는 순간, 자신은 어린 날의 그때로 돌아가게 된다.


다소 재미 없는 채형원의 반응에 임창균은 바로 동아리방으로 향했다. 사실 채형원이 하나도 걱정 안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임창균과 채형원은 나름 알고 지낸 지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임창균은 채형원에 대해 더 이상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러니까, 그 멍 자국을 빼고는 말이다. 그렇게 수척해진 채형원은 초면이었다. 각자의 사정. 누구에게나 각자의 사정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사정을 눈치채는 순간 그냥 지나치기는 힘들어진다. 적어도 현재 임창균의 머릿 속에는 온통 채형원 뿐이었다. 동아리방에 도착해 소파에 몸을 던졌다. 채형원을 따라 임창균 또한 기분이 메말라가는 듯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채형원인가 싶어 바로 고개가 따라갔다. 그 곳엔 불청객들이 서 있었다. 누구냐하면, 급식실 양아치들 말이다. 그들이 대충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동아리방에 들어온다. 창균은 뉘었던 몸을 일으킨다. 그들은 심하게 담배냄새를 풍기며 임창균의 앞까지 느릿느릿 걸어왔다. 와, 여기서 또 보네. 누가 들어도 비꼬는 듯한 말투였다. 일전에 제 어깨를 잡았던 빡빡머리가 선반에서 dvd케이스들을 꺼내 바닥에 내동댕이치기 시작했다. 아, 중학교 때 생각나네. 그때도 이런 여름이었는데. 임창균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2대 8가르마, 그러니까 최남석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는 남자가 대놓고 어깨를 찍어 눌렀다. 창균이 그를 못마땅한 얼굴로 쳐다봤다. 최남석은 그 모습이 웃기기라도 하다는 듯이 껌을 씹어대며 되려 어깨에 닿아 있는 손에 잔뜩 힘을 줬다.


“용건이 뭐에요?”

“형원이 여기 안 왔니?”

“알 바 아니잖아요. 당장 나가세요.”

“누가 채형원 후배 아니랄까 봐 말하는 싸가지 하고는.”

“나가라고.”


순식간에 표정을 굳힌 최남석이 창균의 뺨을 내리쳤다. 갑자기 느껴지는 얼얼함에 임창균은 허. 하는 탄식 뿐이었다. 이미 제 양옆에 달라붙어 팔을 결박하고 있는 따까리들 때문에, 창균은 반항 할 수도 없이 그대로 자신의 뺨을 내리치는 손에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입안에서 피가 나는 듯했다. 카악, 퉤. 창균은 그렇게 최남석의 얼굴에 피가 고인 침을 뱉었다. 그렇게 다섯 대 정도를 연달아 더 얻어 맞았다. 창균은 귀가 부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귀 안쪽에선 이명이 들려왔다. 최남석은 임창균의 머리채를 거세게 쥐어 잡았다. 임창균은 절로 인상을 찌푸릴 수 밖에 없었다. 아, 씨발. 담배 냄새. 속에서 찢어진 입술 때문에 차마 말이 나오지도 않았다. 양아치 새끼들. 임창균은 어이가 없어서 웃는 것을 선택했다.


“야, 웃냐? 웃냐고.”


머리채를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너, 진짜 채형원이랑 무슨 관계냐?”


최남석과 그 무리들이 저급한 단어를 주고받더니 자기들끼리 낄낄댄다.


“너네 진짜… 설마 사귀는 거야? 존나 더러워.”


임창균은 눈을 감았다. 당장 제 주변의 이 씨발 새끼들이 뭐라 짓껄이는 지는 몰라도, 왠지 기분이 더러웠다. 눈을 감으면 청각이 더 예민해진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귀를 잘라내고 싶었다. 이제는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한쪽 볼 또한 없앨 수만 있다면 없애고 싶었다.


“그럼 너희 섹스도 했겠네? 남자끼리는 어떻게 ㅎ…”


처음 들었을 땐 무언가 갈라지는 줄로만 알았다. 예를 들면, 어떤 돌덩이라던가. 그래, 돌덩이가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쩌억- 하고 말이다. 임창균이 눈을 떴다. 그 앞에는 뒤통수를 부여 잡은 채 허리를 숙이고 있는 최남석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바로 뒤에 서 있는 채형원. 채형원의 등장에 거기 있던 모두가 숨을 죽였다. 최남석이 별안간 욕을 하며 뒤를 돌아 자신의 뒤통수를 내리친 사람을 확인했다. 최남석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임창균의 모습은 채형원이 보고 있는 그대로였다. 발갛게 부어오른 귀, 그리고 볼. 한쪽 입술은 찢어져 피가 나고 있었다. 임창균은 자신과 눈을 마주친 채형원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한 없이 침착해 보이지만 사실은 한 없이 초점을 잃은 눈동자. 무표정. 그러니까 채형원은 사실 무표정에 가까웠다. 분노를 읽을 수도, 그렇다고 슬픔이 읽히는 것도 아니었다. 채형원은 그대로 최남석의 머리채를 한 손으로 휘어잡고 거칠게 교실 구석 쪽으로 끌고 갔다. 그 모습은 마치… 짐승의 목덜미를 쥔 채 끌고 가는 것 만큼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채형원은 최남석을 그대로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 곳은 임창균이 일전에 책상을 모아둔 곳이었다. 책상들이 넘어지며 최남석을 덮쳤다. 채형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책상들을 걷어내고는 꿇어 앉아 최남석과 눈을 마주했다. 최남석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어있었다. 아니, 나는. 그러니까… 최남석이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쩌억- 하고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그래, 아까 들었던 소리와 상당히 유사했다. 채형원이 최남석의 뺨을 일방적으로 내리치기 시작했다. 한대, 한대 내리꽂을 때마다 들리는 소리가 마치 사람을 때리는 듯한 소리는 이미 넘어선 듯했다. 최남석은 극도의 공포에 몰려있었다. 이미 한 쪽 귀는 들리지 않는 수준이었다. 잘못했다고 말을 하기엔 늦어버렸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최남석의 무리는 공포감에 휩싸여 피떡이 되어 가고 있는 최남석을 구할 생각 조차 하지 않았다. 임창균 또한 마찬가지였다. 낯선 채형원이 무서웠다. 이제는 미세한 움직임 마저 간신히 포착할 수 있었던 최남석을 내버려 두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원은 옆에 있던 책상을 잡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아마 그대로 최남석에게 내리 꽂을 심산이었다. 임창균이 채형원에게 뛰어간다. 채형원의 마른 허리를 끌어안았다.


 형, 사람 죽는다고. 제발 그만해.


채형원은 그대로 책상을 일부러 빗겨나가게 바닥에 내리꽂았다. 최남석은 의식을 잃고 쓰러진 듯했다. 형원의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채형원은 자신의 허리에 둘러진 팔을 쓰다듬어주었다. 채형원의 손은 이미 최남석의 피와 함께 부풀 대로 부풀어 올라있었다. 채형원의 손을 잡아주었다. 임창균의 손 또한 피로 물들었다. 임창균은 채형원의 등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었다. 낯선 채형원이 무서워서 눈물이 났다. 그런 채형원을 만든 게 자신인 것 같아서 죄책감에 더 눈물이 났다. 형원은 창균의 팔을 풀고는 창균을 마주 보고 섰다. 그대로 임창균을 품에 안아주었다. 등을 쓰다듬는 손이 꽤나 다정했다. 그렇게 그들은 한참을 안은 채 서 있었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학생주임이 채형원과 임창균을 떼어 놓았다. 아이들이 소란스럽게 무리 지어 웅성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채형원은 한없이 다정한 얼굴을 하고는 임창균에게 입 모양으로 말했다. 괜찮아.







적당한 반성문을 쓰고 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막상 먼저 시비 걸린 쪽은 본인이었는데, 그 사건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창균 또한 반성문을 적어내야 했다. 최남석을 제외한 그 무리들 또한 똑같은 벌을 받았다.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채형원과 최남석이었다. 그렇게 채형원은 이사장실로 불려갔고, 최남석은 바로 병원으로 이송되었다고 한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다행히 신체에는 큰 이상이 없었고 전치 몇 주면 해결된다고 했다. 설마 잘못될까 봐 무서웠는데, 창균은 마른 가슴을 쓸어 내렸다. 담임이 창균을 불러 오늘은 일찍 조퇴해도 된다는 말을 전했다. 학교 측에서는 그래도 창균이 어느 정도 피해자임은 인지하고 있는 듯했다. 이사장실로 불려간 채형원의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임창균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렇게 창균은 민혁을 찾아서 그의 반으로 향했다.


“너 담배 싫어했나?”


민혁을 따라 도착한 곳은 형원과 민혁이 자주 오는 옥상이었다.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민혁이 자연스럽게 담배를 꺼내 입에 물려던 찰나, 제 옆에 있는 창균을 보고는 잠시 멈칫했다. 저도 한 대만 주세요. 펴볼래요. 민혁이 창균의 정수리를 아프지 않게 때렸다. 담배에 불이 붙는다. 민혁이 벽에 등을 기대고 그대로 바닥에 앉았다. 임창균은 그런 민혁을 멀뚱멀뚱 쳐다 볼 뿐이었다. 뭐해, 너도 앉아. 나름 그늘이 진 곳이라 그렇게 바닥이 뜨겁지는 않았다. 더운 바람이 불어왔다.


“채형원 걱정 돼서 온 거지?”

“네.”

“너는 좀 괜찮아?”

“전 하나도 안 아파요.”


사실이었다. 볼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가라앉는 게 눈에 보였고 입술 상처 정도는 연고만 몇 번 발라주면 금방 새살이 돋아날 것이었다. 그래 보이네. 민혁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창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둘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하늘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 사이에는 비행기도 지나가고, 학생들이 축구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으며, 잔잔한 바람이 계속 불어왔다.


“걱정 안 해도 돼.”

“그런데 이미 이사장도 알아버렸는 걸요.”

“너 아직도 채형원 몰라? 내일이면 바로 평소처럼 다시 돌아올 거라고, 걔는.”


민혁이 코맹맹이 소리를 따라 하며 형원의 흉내를 낸다. 그 모습이 나름 우스꽝스러워 임창균은 시선을 피했다. 나름 진지했던 분위기가 한 순간 풀어지는 게 느껴졌다. 채형원의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 마당에 제일 먼저 생각난 건 민혁이었다. 어쩌면 채형원을 가장 잘 아는 사람. 그런 민혁의 말을 들으니 창균의 마음이 전보다는 덜 무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어디 가? 이민혁이 임창균의 책가방을 쳐다보고는 물었다. 조퇴하래요. / 개부럽다. / 뭐가 부러워요, 형은 그냥 마음 내킬 때마다 수업 빼먹으면서. 어느덧 짧아진 담배를 마지막으로 깊게 빨아들인 민혁이 연기를 내뿜으며 웃었다. 맞아, 그랬지.


“걱정 하지 말고, 집 가서 상처 관리나 잘 해. 너는.”

“고마워요, 형.”


새삼스럽게 감사는 무슨. 민혁이 오글거린다며 창균에게 핀잔을 주었다. 먼저 간다. 민혁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끼익- 옥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임창균도 천천히 제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채형원과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다. 창균은 휴대폰을 꺼내 들어 무언가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서야 임창균 또한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거 보면 꼭 연락 줘.






톡, 톡. 집에 도착해 대충 씻고 침대에 누워있다가 자연스럽게 잠이 들어버렸나보다. 어느덧 깜깜해진 방에서 창균은 눈을 떴다. 아까부터 들려오는 미세한 소리가 창균의 잠을 깨웠다. 창균은 협탁에 놓인 휴대폰을 집어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10시 26분. 와, 완전 한밤중이네. 임창균은 메세지함을 한번 들어가 보고는 카카오톡도 열어 무언가를 확인했다. 채형원에게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전화번호부에서 채형원의 이름을 찾아 그대로 전화를 걸었다. 뚜, 뚜, 뚜. 하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임창균은 마른세수를 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향해 괜찮다고 말해주던 채형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톡, 톡. 아까부터 들리던 미세한 소리. 임창균은 침대에서 일어나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향했다. 창문 쪽이었다. 커튼을 걷어젖히고 창밖을 확인했다.


그 곳엔 손에 있는 자그마한 돌멩이를 던졌다 받았다 하며 창균에게 인사하고 있는 채형원이 있었다. 채형원! 자기도 모르게 채형원의 이름을 냅다 불렀다. 채형원은 입에 검지 손가락을 올려 쉿- 하는 제스처를 보였다. 임창균은 그대로 최대한 빨리 옷을 갈아입고는 채형원이 있는 1층 마당으로 뛰어 내려갔다.


채형원에게 가까워지자마자 뭐라 할 것도 없이 임창균은 채형원을 안아주었다. 야, 낯부끄럽게. 뭐해. 임창균은 채형원의 말을 그대로 무시했다. 채형원은 코를 긁적이고는 임창균의 등에 팔을 둘렀다.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시끄러운 매미 소리만이 한밤중에 울려 퍼졌다. 임창균은 아무런 생각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저 이렇게 잠깐동안만이라도 채형원을 안아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고개를 들어 채형원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상처투성이였다. 손을 뻗어 얼굴에 난 상처들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채형원은 그런 임창균의 손길을 가만히 받아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제 얼굴에 자리 잡은 상처들이 따갑지가 않았다.


채형원이 데려온 곳은 어떤 언덕이었다. 그러니까, 풀로 뒤덮인 언덕. 이 곳에서는 동네를 내려다 볼 수 있었다. 환하게 켜져있는 불빛과 이미 암전인 곳이 적당히 섞여 꽤나 경치가 괜찮았다. 그들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 앉았다. 밤이라 그런지 확실히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그들의 머리카락을 기분 좋게 간지럽혔다. 임창균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바로 옆에서 채형원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문득 정면에서 마주하니 얼굴에 난 상처들이 전보다 더 눈에 띄기 시작했다. 임창균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다친 곳은 괜찮아?”

“하나도 안 아파. 완전 솜주먹이더라.”

“별 얘기 안 했어, 이사장실에서.”

“거짓말.”

“진짜야. 대충 걔네 집이랑 합의 보고 끝냈어.”

“휴대폰은?”

“잃어버렸나 봐.”


채형원이 이렇게 어이없이 말을 둘러댈 때는 굳이 말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가 담겨있었다. 임창균은 채형원의 뜻대로 굳이 캐묻지 않았다. 그냥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일 뿐이었다. 묻고 싶은 게 참 많았다. 그러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동안 대화가 끊겨 정적이 찾아왔다. 결국 임창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얼굴에 상처. 말 안해 줄거야?”

“말하기 곤란한데.”


그럼 우리 비밀 얘기 하나씩 할래? 전에 채형원이 먼저 임창균에게 했던 말이었다. 허나 이번엔 임창균이 먼저 말을 꺼낸 것이었다. 채형원은 실소를 터뜨리며 대답했다. 그래. 누구 먼저 말 할래? 형 먼저? 아니다, 내가 먼저 말 할게. 그때와 똑같았다. 임창균도 꽤나 우스웠는지 두 입꼬리가 올라간 채였다.


 사실 나는 말이야, 원래 죽을 운명이었어. 거대한 파도같던 그 불길 속에서.






어린 임창균은 꽤나 불행한 삶을 살고 있었다. 원치 않게 창균을 갖게 된 부모가 그 흔한 결혼식 하나 없이 살게 된 단칸방 하나에 그를 방치해뒀기 때문이었다. 창균의 집은 달동네에 위치해 있었다. 밤이면 술에 취한 아저씨들끼리 물건을 깨부수며 싸우는 소리가 귀를 찔렀고, 제 옆집에서는 가끔 관계를 나누는 소리 또한 여과 없이 들려왔다. 그런 소란스러운 곳에서, 임창균은 그 누구의 보살핌 없이 혼자 살아가고 있었다. 임창균에게 돌아오는 것은 단지 무관심 뿐이었다. 적어도 제 어머니가 집을 나가기 전까진 말이다.


다짜고짜 제 아비가 자신의 뺨을 내리쳤다. 임창균은 그 날 처음으로 폭력이란 것을 당했다. 너무 놀라서 눈물이 나왔다. 이 망할 놈의 여편네, 지만 편하자고 애새끼 냅두고 도망가? 창균은 아비의 말을 듣고 비로소 어머니가 집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차피 무늬만 가족이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전혀 눈물이 나지 않았다. 다만 어린 임창균을 가장 혹사시키는 것은, 아비의 폭력과 착취였다. 나가서 구걸이라도 해와, 밥만 축내지 말고. 그 날도 어김없이 어린 창균은 아비에게 얻어맞고 집 밖으로 쫓겨났다. 갈 곳이 없어서 달동네 주변을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녔다. 어느덧 해가 저물고 저녁이 되었다. 창균은 눈치를 보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비는 얼굴이 벌개진 채로 잠에 들어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여러 개의 술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창균은 세수를 하고 구석에 깔려있는 이불에 몸을 뉘었다. 아버지가 술에 취한 날에는 아무 말 없이 잠에 들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적어도 타는 듯한 냄새에 눈을 뜨기 전까지는 말이다. 순식간에 뜨거워진 공기에 창균이 감겨 있던 눈을 떴다. 이미 주변은 온통 불바다였다. 도와주세요. 콜록콜록. 창균은 비틀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아비가 보이지 않았다. 아빠, 아빠. 콜록콜록. 까만 연기가 눈에 들어오자 눈물이 나서 앞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이미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문은 불에 휩싸여 있었다. 창균은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누군가의 인영을 발견했다. 제 아비가 마당에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살려주세요. 제발. 창균은 엉엉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아비는 창균에게 뭐라 말을 하고 있었다.


 …버려.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 창균은 제 아비가 계속해서 되뇌이는 말을 들으려 온 신경을 집중했다. 사이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와 동시에 끝까지 부여잡고 있던 의식의 끈을 놓아버린 창균의 귀에 비로소 제 아비의 목소리가 정확히 들려왔다.


 그냥 죽어버려.


눈을 떴을 땐 한 병실이었다. 제 옆에는 어떤 남자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창균과 눈이 마주친 남자는 괜찮니? 하고 창균에게 말을 건넸다. 상당히 따뜻한 목소리였다. 창균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사실 본인은 누구보다도 이런 상냥한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남자는 말 없이 그 어린 창균을 안아주었다. 그 와중에도 창균의 귓가에는 그냥 죽어버려. 그냥 죽어버려. 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끝도 없이 창균을 괴롭히는 악몽과의 질긴 인연이 그제서야 시작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입양된 집에서 잘살고 있는 중이야.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임창균의 표정은 무척이나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너무나도 무덤덤해서, 채형원은 그 어떤 반응도 보일 수가 없었다. 오히려 임창균은 속이 후련했다. 그 누구에게도 말 못했던 자신의 상처를 처음으로 세상 밖으로 끄집어냈기 때문에. 혼자만 알고 있는 상처는 곪아 터지기 쉬웠다. 하지만 지금은 그 상처를 함께 치유해 줄 만한 사람이 제 옆에 있었다. 채형원. 채형원은 그저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임창균을 쳐다볼 뿐이었다. 채형원이 손을 뻗어 임창균의 손등 위에 제 손을 겹쳐놓는다. 채형원은 손이 참 크고 예뻤다. 그리고 따뜻했다.


“요즘은 좀 어때? 아직도 계속 약 먹어?”

“많이 나아졌어. 이제는 약도 잘 안 들고 다녀.”


다행이다. 채형원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져 있었다. 임창균이 채형원을 쳐다본다. 이미 임창균을 쳐다보고 있던 채형원과 눈이 마주쳤다. 서로의 등 뒤에 펼쳐진 밤하늘이 참으로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나는… 형원이 입을 열려고 하자 창균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


“나중에 말 하고 싶을 때 말해.”


우리 뭐 불행 배틀 하는 것도 아니고. 임창균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형원이 순식간에 창균의 옆으로 바짝 다가갔다. 코끝이 서로 닿을 만한 거리였다. 온전히 서로가 서로의 눈을 바라본다. 방해물은 없었다. 적당히 날리는 시원한 바람, 시끄럽게 울어대는 매미들. 유난히 더 밝은 달빛. 여름밤이라는 배경 아래 놓인 채형원과 임창균. 저 멀리 그들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 순간 임창균의 휴대폰이 울린다. 벨 소리와 함께 채형원은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난다.


 가자. 데려다줄게.


그런 말을 하는 채형원의 말투가 퍽이나 다정해서, 채형원의 뒤로 수 많은 별들이 쏟아지는 것만 같아서. 창균은 형원이 내민 손을 힘 주어 잡았다. 그러니까, 채형원의 손은 정말이지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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