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동으로 가까워질수록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늘어났다. 서지혁은 자신의 옆으로 키작은 여자 두명이 지나가자 빙글 돌아 바쁘게 멀어지는 등을 눈으로 좇다가 따라오던 김재희와 눈이 마주쳤다. 김재희가 이빨을 보이며 위협적이게 웃어보였다.

채굴동 다음으로 가장 사람이 많은 연구동은 해저기지의 여타 다른 건물과는 조금 다른 공기가 흘렀다. 한쪽에선 지구를 한계까지 파고드는 한편 이곳에선 빠른 속도로 수명이 줄어드는 지구의 임박한 장례를 애도하는 경건함이 감돌았다.

해저기지가 환경보전 연구의 최전선임에도 연구는 너무 더디고 작고 드문 승리뿐으로 관련연구자들은 급진적인 희망을 버린 채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죽어가는 환자의 눈곱을 떼어주고 마른 입술을 적셔주는 보호자의 마음을 가질수밖에 없었다. 예정된 행성의 죽음에 그래도 호상이었다 하는 나이든 자식이 스스로에게 하는 위로라도 당당히 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과정이었다.

기지에서 가장 규모가 큰 연구분야는 해양자원이었다. 바다의 모든것은 에너지였다. 심층과 표층의 온도차도, 파도와 해류도 낭비되는 에너지였다. 이곳에선 바다에서 한번에 수십톤씩 퍼올려 먹을 수 있는 새로운 해저생물을 선별하고 인간에게 유리한 생리를 해부하여 약용성분, 생물신소재 등을 추출했고 광물과 석유, 천연가스의 효율성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공법을 개발했다.

바다는 이제 인류에게 여덟번째 신대륙이었다. 미개발된 물이며 거기엔 무한한 개선의 여지가 있었다. 프로메테우스가 훔친 불이 인간을 동물에서 정복자로, 철학자로, 시인으로 만들어 주었듯이 인류는 이제 필사적으로 어두운 바다에서 자신들을 번성하게 할 등불을 찾고 있었다.

지구는 죽고있다. 아무도 그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했다. 지구는 동식물을 세포로 삼는 거대한 생명체였다. 조금 더 느리게, 하루라도 더 건강하게, 지구의 장기가 더이상 제 기능을 포기하지 않도록 하는게 우리네 사명이지만 모두가 그렇게 숭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모두가 슬픔과 무력감에 빠져있을 필요도 없었다.

해저기지가 거시적인 관점에서도 바다에 무시할 수 없는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있지만 누군가는 이것이 좋아지기 전에 잠시 악화되는 것일뿐이라고 확신을 담아 말해주어야 했다. 누군가는 해저기지 주변 해수면 온도가 이미 0.8도 가량 높아졌음에도 이것이 필요악이라고 주장해야 했고 누군가는 이 모든 인류존속과 환경문제에 대해 담담하게, 심지어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개인의 삶에 몰두해야 했다. 또 누군가는 주어진 것과 남은것에 감사하고 즐겨야 한다고 대책없이 낙관해야만 했다.

서지혁은 뒤를 따라오는 김재희를 흘겨보고 업무패드를 꺼내 오늘 업무조에 이지현의 이름이 등록되어 있는 걸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지현에게서 스케줄 변동에 대한 연락은 없었으나 업무조가 바뀌는 건 왕왕 있는 일이었다. 특히 이지현은 흔치않은 다재다능함으로 엔지니어 업무외로도 차출되는 일이 많았다.

무슨일 있냐는 연락을 보내자 중립화장실에서 감전사고가 있었다는 답을 받았다. 서지혁은 고개를 갸우뚱하고 패드를 껐다.

오늘은 차라리 김재희가 일동무로는 적합할지도 몰랐다. 서지혁은 연구동 분위기를 썩 좋아하지 않았고 이지현은 천성적으로 우울함을 아름답게 입는 사람이었으나 동시에 그에게서는 인내심과 더불어 지독한 패배감이 느껴졌다. 서지혁은 연구동과 이지현의 조합이 신해량과의 대화 이후에 하루에 감당하기엔 너무 많은 일이 될 것 같았다.

"중립 화장실에서 감전사고 났다는데 뭐 아는거 있어?" 서지혁이 물었다.

"아~ 거기 디스펜서가 원래 좀 달랑거렸어요. 청소로봇이 떨어지는 디스펜서에 맞아서 부서졌대요. 그거 발견한 사람이 바로 연락안하고 만졌다가 찌르르 한거죠. 바보아니에요?"

두 엔지니어는 인큐베이터 수리 요청이 들어온 연구실에 도착했다. 생체인식과 비밀유지 각서까지 쓴 뒤에 들어갔지만 두시간동안 쩔쩔 매다가 벤트 안쪽에 미묘하게 파라필름이 끼어있는 걸 발견했다. 엔지니어들은 온갖 자재 밑에서 상상도 못한 물건을 발견하곤 하지만 필름이 빨려들어가기에는 조금 이상한 장소였다.

서지혁은 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손가락에 구겨진 필름조각을 들고 일어났다.

"청소 좀 잘 하셔야겠습니다.."

김재희가 키가 큰 연구원과 가까이 붙어있다가 서지혁의 목소리에 뒷짐을 지고 테이블에 기대 앉았다.

"와! 다 고치셨어요?"

"어어, 뭐 애초에 딱히 고장난 건 아니니까."

연구원은 안경을 치켜올리며 서지혁이 들고 있는 필름을 민망한 얼굴로 가져갔다. "이런 일이 종종 생겨요. 그쵸?"

서지혁은 손을 털고 툴박스를 챙기며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예,예. 그런데 다음부터는 이런 실험실 장비는 연구동 관리부에 연락하십쇼. 저희가 이런 기계에 전문가도 아니고 손댔다가 나중에 문제 생기면 곤란하거든요. 엔지니어 총괄은 요청이 들어오면 무조건 업무전달 해서 오늘 오긴왔지만 진짜 고장이라도 났으면 저희도 딱히 해드릴 건 없었을 겁니다."

그는 연구원에게 서명을 받고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김재희와 함께 걸었다. 김재희는 의족이 어느날 느닷없이 바뀐 뒤로 걷는 모양새가 어색하고 왼발을 내딛을 때마다 짤각대는 가벼운 소리가 났다.

한국 엔지니어 신상에 변화가 생기면 파악해두는게 필수이지만 김재희는 정상현을 꼬드겨 사고 치고 다니는 걸 취미로 삼는 탓에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서지혁도 신해량도 어느정도 방관하고 있었다. 그리고 백애영은 사내놈들에게 관심 두지 않았다.

"아까 팀장님이랑요. 무슨 얘기 한거에요?" 김재희가 물었다.

"뭔 얘기. 걍 일 얘기 했어."

"아니던데. 무현쌤 얘기 하던데?"

서지혁은 속으로 욕을 지껄이고 김재희 앞에 우뚝 멈춰섰다.

"알아서 뭐하게."

"형이 보기엔 무현샘 어떤 것 같아요? 제가 볼 땐 착하긴 한데데~ 은근히 사람 다루는 게 익숙한것 같더라구요. 나이가 많아서 그런가?"

 "뭐 많으면 얼마나 많다고... 그냥 좀."

귀찮? 입은 단속했지만 머리는 단속하지 못한 서지혁이 생각했다. 용병으로 일하면서 인질 구출이나 주요 증인 호송 같은 일이 종종 있었고 그중에 용병일에 참견하는 사람이 아주 없던 것도 아니지만 보통은 옆에 앉아있던 사람이 불법개조된 매그넘 총알에 사격당해 머리가 날아가면 입을 다물게 되는 법이다.

애초에 서지혁은 혼자 일하는게 편한 사람이었다. 뒤에서 누가 언제 방아쇠를 당길지 말해줄 필요는 없었고 원하지도 않았다. 특히 도덕적 판단에 대해 타인에게 잔소리 듣고싶지 않았다.

해저기지에 들어오기 위해 속성으로 자격증을 공부 할 땐 이 직업이 소위 말하는 번듯한 직업으로의 전환점이 될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계약날짜를 손으로 꼽고 있을 뿐이다. 그는 길리수트와 본인 몸에서 나는 고약한 냄새에 파묻혀 화장실을 가지 않기 위해 이틀동안 물도 마시지 않고 스코프로만 세상을 보던 그때를 그리워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는 잘 하는 일을 하고 싶었고 그 결과를 바로 눈앞에서 확인하고 싶었다. 엔지니어 일은 너무나 지지부진하고 자국민 보호라는 용병일은 아무런 결과도 없었다. 평화를 유지하는 건 끝도 없고 지루한 일이었다.

"재미없다?"

"흐음. 팀장님은 뭐래요? 무현샘이 한번 하자고 안했대요?"

"뭐? 뜬금없이 그게 뭔 말이야."

"아니 샘이 팀장님 맘에 들어하는 것 같길래 물어나보라고 했죠, 전. 가끔 그런 소문 받아줄때도 있잖아요, 팀장님. 그 중국팀 팀장이랑도 그랬고."

서지혁은 입이 떡 벌어져서 김재희의 빨간 머리통을 내려다봤다. 정수리에 하얀 머리카락이 솟아있었다.

"어? 엘레베이터 왔다. 전 대한도 좀 올라갔다가 가려고요. 형은 다음꺼 타세요~"

서지혁은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을 잡고 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김재희는 잠시 당황하는 기색을 내비쳤으나 곧 어깨를 으쓱이고 콧노래를 흠흠 부르며 점점 밝아지는 엘리베이터 바깥을 내다보는척 서지혁을 무시했다.

FTER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