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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오공주의 아들 딸

 

 

 

엄마는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오공주라는 아주 올드한 네임의 모임을 만들었다. 뭐 나한테는 그랬다. 함께 공부를 하고 책을 읽으며 지식과 교양을 쌓는 아주 건전한 친구들이었다고. 눈치를 안드로메다에 팔아버린 나는 그 말을 철썩 같이 믿고 자랐는데, 어느 정도 머리가 크고 나서야 엄마의 거짓부렁이라는 걸 알았다. 심지어 스스로 깨달은 것도 아니야. 오공주 중 선희 이모의 아들, 그러니까 김종대가 알려준 것이다. 너는 그 말을 믿니? 하고. 김종대가 원래 좀 한 눈치 한다. 내가 성인이 되고 난 뒤의 일이었다. 어쩐지 물놀이 갔을 때 본 수미 이모 등에 있던 문신이 예사롭지 않았어.

모임의 기본 성질이 어떻다 한들, 어쨌든 엄마는 자식들이 다 큰 지금까지도 오공주 이모들과 끈끈한 우정을 자랑하고 있다. 내가 그들과 뗄 래야 뗄 수 없는 자이로 자란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부랄 친구나 영혼의 반 쪽이라는 표현은 좀 과분하고, 인연을 이어오는 오랜 동창이나 친척같은 느낌? 외동인 날 걱정한 엄마는 나와 오공주의 자식들을 붙여놓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다. 반 이상은 성공이라고 말하고 싶다.


“늘 먹던 걸로.”

“여기가 별 네 개짜리 레스토랑인 줄 아니?”

“알면서 또 그런다.”


어느새 번듯한 직장인으로 자란 김종대가 아침부터 들려 커피를 강요했다. 늘 먹던 거. 그래 아아메. 가장 큰 테이크아웃 잔에 가득 담아 건넸다. 저거는 돈도 많이 벌면서 음료 값은 죽어도 안낸다. 가끔 사주는 밥이나 술로 퉁치곤 하는데, 딱히 계산은 해본 적 없다. 그래도 아마 내 손해가 더 크지 않을까. 김종대가 출장 갈 때마다 사주던 갖가지 면세품은 모른 척 해보겠다.

사람 사는 게 어떻게 다 똑같겠냐만은, 김종대와 나는 정말 짜고 친 고스톱처럼 정 반대의 삶을 살았다. 서른도 안됐으면서 온갖 일을 다 겪어온 김종대와 달리 내 인생의 고난이라고는 취업 하나? 그거 밖에 생각나는 게 없다. 남초과라는 걸 알면서도 나름의 포부를 가지고 진학한 기계공학과, 억지로 살아남아 취업했더니 따라오는 여성차별과 성희롱으로 인해 얻은 스트레스. 1년의 직장생활 동안 나는 작은 질병들을 수두룩하게 얻었다. 바빠서 병원에 갈 시간도 없어 병을 키우기도 했다. 결국 더 이상은 못해먹겠다고 울고불고 생 지랄을 떨어 동네에 작은 카페를 차렸다. 하나 다행인 건 돈 쓸 시간이 없어서 차곡차곡 모은 게 꽤 된단 거다. 뭐 그래봤자 스물일곱의 내게 빚이 뒤따라오는 건 당연하다만.


“돈 내 새끼야.”

“나 다음 주에 홍콩 출장 간다.”

“오빠 여주 가방 사쥬떼용.”

“…씨발.”

“미안.”


알랑방구 뀐다고 혀 짧은 소리 좀 냈더니 인상이 한 순간에 돌아간다. 초면인 사람은 벌써 지렸겠다, 시끼야…. 뭐 가방은 농담이고 립스틱 하나 정도는 떨어지지 않을까. 김종대는 굉장히 솔직하고 직설적인 성격의 소유자다. 직장인 시절 거절하는 법을 몰라서 남의 일을 다 떠맡는 나를 보고 속이 터져 뒤져버리겠다며 킹콩처럼 제 가슴을 두드리곤 했다. 그렇게 솔직한 김종대는 가끔 말했다. 우리 가족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다고, 아주 오랫동안 기억할 것이라고.

아빠가 좋아하는 술, 담배와 엄마를 위한 비싼 선물을 사올 것이 눈에 선하다. 나도, 나도 립스틱 하나만 사달라고오! 매번 면세점을 털어대는데 자신을 위한 건 거의 사지 않는 녀석은 출국하기 전날 연락을 할 것이다. 그리고 똑같이 말하겠지.


뭐 필요한데. 넘버 찍어 보내.

작년에는 어디더라. 미국인가 호주인가 가면서 내가 노래 노래를 부르던 맥칠리를 사왔다.(당시 한국에서 씨가 마른 상태였다) 네가 그거 바른다고 수지가 되겠냐. 아주 같잖다는 표정으로 던지다 시피 건넸지만 그딴 거 귀에 안 들어 왔다.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되지, 흐흥!


“어머니 필요하신 거 있나 여쭤봐.”

“네가 물어보면 되지 왜 맨날 나한테 시켜.”

“어머니가 나한테 잘도 말해주시겠다. 좀 떠보라고, 지난번처럼 김종대가 시켰다고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치지 말고.”

“나 집에 잘 가지도 않는데…….”

“자랑이냐?”


오공주의 아들딸들은 자신의 어머니가 아니면 전부 이모라고 불렀는데 김종대는 단 한명, 우리 엄마를 예외로 뒀다. 자기 엄마는 엄마고 우리 엄마는 어머니다.

스무 살이 되면서부터 자취를 시작했고, 엄마랑은 가끔 생사확인 정도만 한다. 처음에는 하나있는 딸랑구 혼자 내보낸다고 눈물을 찍어내던 엄마는 이제 내가 본가에서 3일 이상 머무르면 귀찮다는 표정부터 지으신다. 김종대가 시켜서 하긴 하겠는데 네가 웬일?ㅋ 이런 반응을 보이시겠지. 눈에 훤하고요.


“나 간다.”

“엉, 빨리 꺼져.”


우리 매장 마수걸이는 맨날 지가 하면서 돈도 안내는 호랑말코야.

 

 

 

 

“누나.”

“어서오세… 어머 종인아!!”


들고 있던 행주를 던져버리고 버선발로 달려 나갔다. 우리 종인이가 친히 누나의 가게까지 왔구나. 뭐줄까 말만해 뭐줄까!! 겉만 보면 다 큰 어른 같지만 속은 아직도 소년 같은 종인이는 손가락으로 아랫입술을 짓누르며 뜸을 들였다.


“초코라떼?”

“딱 기다려. 금방 해줄게.”

“알바는? 오늘 쉬는 날이야?”

“볼일 있어서 늦게 온대.”


우리 종인이 줄 거니까 초코 파우더를 두 배로 넣겠다. 어릴 때부터 동생이 있었으면 했던 나는 엄빠에게 만들어(?) 달라 조른 적도 많았고, 그게 힘들면 어디서 데려오기라도 해 달라 했다. 말도 안 되는 생떼였으니 이루어 졌을 리 없다. 오공주의 아들 딸 중에 나보다 어린 사람은 단 둘인데 그 중 하나가 종인이다. 준면이 오빠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어린 동생. 지금은 저렇게 키도 크고 까맣… 아니 구리 빛에 인중도 파르라니 하지만 나한테는 그저 애기 같다. 스무 살이면 애기 맞잖아.


“학교는 다닐만해?”

“음 글쎄… 근데 지루해. 빨리 1학년 끝내고 군대나 가야지.”


세상에 종인이가 군대라니. 제일 꿀 빠는 보직이 뭔지 찾아봐야겠다. 종인이는 무조건 그쪽으로.

준면이 오빠는 매일같이 바빴기 때문에 종인이는 나를 제 친누나처럼 따르곤 했다. 지금도 학교 가는 길에 잠깐 누나 얼굴 보러 온 거라고 예쁜 소리를 하길래 어이구 내 새끼 궁뎅이를 툭툭 두드렸다. 성희롱 아니에요, 누나가 동생 예쁘다 해주는 겁니다.


“그… 다 잘 계시지? 이모한테는 다녀왔고?”

“응. 엄마 잘 있대.”


조심스럽게 꺼낸 말에 종인이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어보였다.

김형제네 명숙이 이모, 이모는 종인이를 낳다 돌아가셨다. 어린 아들 젖 한번 물리지 못하고 뭐가 그렇게 급해서 떠났냐며 엄마는 일주일간 밥숟가락도 들지 못했다. 매우 어릴 적의 일이지만 더 이상 명숙이 이모가 세상에 없다는 충격 때문인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지난주는 명숙이 이모의 생일이었다. 내가 죽으면 바다에 뿌려줄래. 지나가며 했던 말이 유언이 될 거라고 누가 생각했을까. 이모의 유골이 뿌려진 동해안, 김 형제의 아버지는 자신과 아들들이 쉽게 갈 수 있도록 근처에 별장을 마련했다. 마침 엄마를 통해서 김 형제들이 하루 자고 왔다더라는 말을 들은 찰나였다.


“내 새끼 수업 늦겠다. 어서 가.”

“응, 누나 나중에 나 맛있는 거 사줘.”

“당연하지. 뭐든 말만해.”


나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그 말을 못해서 얼굴을 내비추었을 종인이를 생각하니 괜스레 코끝이 찡했다. 착한 우리 애기….

어릴 때부터 심성이 고왔다. 착한 우리 종인이는 저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형들이,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변백현이나 변백현, 또는 변백현 등이 까까를 빼앗아먹어도 빼액 울기는커녕 형 다 머거! 하며 건네주곤 했는데 변백현은 그걸 1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좋다고 먹었다. 그 옆에서 박찬열은 한입만을 외쳤고 멀리서 지켜보던 준면이 오빠는 새 걸 사와 건네곤 했다. 나름의 캐릭터가 정확했어. 나? 나는 종인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준면이 오빠가 새로 사온 걸 얻어먹었다. 제일 나쁜 년은 나였던 거 같다. 김종대는….


“장사 할 생각이 있긴 하냐?”

“아씨 놀랬잖아, 도둑인 줄.”


어김없이 새로운 아침이 밝았다. 악몽을 꿔서 잠을 제대로 못 잤더니 하품이 찍찍 나오는 게 잠시 졸았나보다. 똑같이 하루의 시작으로 들린 김종대가 안쪽 준비대에서 부스럭 소리를 내고 있었다.


“뭐하는데.”

“커피 내리지. 한잔 줘?”

“지가 사장인 줄. 나는 샷 추가해서 한잔.”


적당히 남들 하는 만큼 살아온 나와 달리 김종대는 인생을 참 알차게도 살았다. 커피머신이나 그라인더 사용하는 법 따위 알려준 적 없다. 생긴 건 모태 이과 같이 생겼다만 컴퓨터도 잘 다루지 못하는 녀석은 대학을 다니던 때 아르바이트를 통해 커피 내리는 법을 배웠다. 한국은 아니었고…… 있다, 저기 산 넘고 바다 건너 어딘가가. 그렇게 열심히 살던 게 버릇이 돼서 그런지 김종대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한다.


“주말 아침인데 그렇게 밖에 나오고 싶었니. 부지런한 놈.”

“네가 게으른 거겠지.”

“아으 몰라… 나 피곤해. 슬기 오면 바로 퇴근하려고.”

“어제 뭐했는데.”


꿈을 자주 꾼다. 꿈은 실제와 거리가 먼 가상의 내용이기도 했고, 아예 기억이 나지 않기도 했고, 있었던 일이 다시 재생되기도 했다. 어제 내 잠자리를 엉망으로 만든 악몽은 내가 잠시 등한시했던 끔찍한 과거였다. 신경 쓸 데가 많아서 잠깐 잊었던 것뿐인데 그렇게도 각인이 되고 싶었나, 그새 꿈에 나오고 지랄이래. 그 꿈에서 나는 내가 아닌 김종대로 나왔다.


“내가 뭘 했겠어. 집에서 잤지.”

“다크서클 봐라. 야동이라도 봤냐.”


씨발 김종대 네 얘기라고! 너 옛날 일에 관한 꿈, 그걸 네가 아닌 내가 꿨다고. 안 좋은 기억을 되새겨주는 취미는 없다. 그저 ‘친한 친구’라고 하기에 2% 부족한 김종대는 나에게 꽤 의미가 크다. 가족 같기도 하고, 동료애 비슷한 것도 있고. 그래서 나의 악몽이자 김종대의 악몽이기도 한 그 일을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그냥 악몽. 한마디만 하고 입을 다물었다.

바에 앉아 테이블에 얼굴을 기댔다. 시원해서 눈 감길 거 같아. 양쪽 뺨을 번갈아 테이블에 문지르며 더위를 쫓았다. 그러다 시선에 닿은 김종대의 손이 매우 바쁘다. 휴대폰을 보면서 실실 웃는 게 영 이상하기도 하고.


“여자 생겼어?”

“내가 그럴 여유가 어디 있냐.”

“지금 존나 잉여같은데요.”

“너니까 이러고 있는 거고.”

“…….”

“알잖아. 나 누구 만나기 힘든 거.”


말을 꺼낸 내가 잘못이다. 또 다른 말을 덧붙이기 전에 늬예 늬예, 못들은 척 테이블에 이마를 박았다.

김종대는 저런 말, 그러니까 가볍지 않은 말을 엄청 대수롭지 않게 꺼내곤 한다. 원체 솔직해서 저런 거 다 아는데도 간혹 적응이 안 된다. 자신의 아버지를 그 사람이라 칭하며 가능하기만 하다면 피를 다 뽑아버리고 싶다는 말을 하는 놈이다. 자주 말했다. 나 같은 놈한테 연애는 사치가 아니겠냐고, 일만 하고 싶다고.


“청하야. 엄마랑 케이크 만들었대. 사진 볼래?”


김종대가 열심히 살아가는 가장 큰 이유가 되는 이유다. 동생 청하. 김종대가 보여준 사진 속 청하는 치즈케이크 한 판을 들고 웃고 있었다. 어쩐지 눈에서 꿀이 떨어지더라.


“청하도 다 컸다.”

“그치. 언제 이만큼 자랐냐.”


타지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는 청하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걸 알면 뒷목을 잡고 넘어가겠지. 언니한테만 말해주는 거야, 라며 입술에 검지를 올리던 청하가 생각난다.


“라이터 좀.”


스트로우를 씹다 제 주머니에 마땅히 있어야할게 없자 김종대가 손을 내밀었다. 나 금연 중이라고 몇 번을 말해야 저 새끼가 알아듣지? 흐음.


“없다니까 글쎄.”

“오래 버틴다? 포기했을 줄 알았는데.”

“어째 금연 실패를 종용하는 말투입니다만.”

“내가 아는 김여주는 끈기 그딴 거 몰라서.”


사실이라 더 할 말이 없다. 끄응…. 잠이 부족해서 지끈거리는 이마를 붙잡고 비상용으로 사둔 토치를 건넸다. 뭐 라이터 비슷한 거는 맞으니까 알아서 쓰겠지.


“이게 뭐냐 진짜.”

“필요 없으면 다시 내놓으시던가요. 야, 입구 안 돼! 뒤쪽으로 가.”

“알거든.”


노란색 토치를 달칵이며 김종대가 뒷문으로 향했다. 나보다 작던, 깡말라서 지켜주어야 할 것 같던 김종대가 언제 저만큼 컸지.

 


 




01. 20년 전에는

 


 

갓 미성년자 딱지를 뗀 어렸던 스무 살, 자취한다는 말을 꺼낸 게 잘못이었는지 친구들은 물론이고 옛 남자친구들은 나의 소중한 방에 자주 찾아왔다. 막차 시간을 놓쳐서, 잠시 머물 곳이 필요해서, 혹은 다른 관계를 원해서. 이유는 다양했고 속에 있는 말을 솔직히 하지 못하는 성격의 나는 등신처럼 모든 걸 받아줬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이가 드니 이제는 다른 쪽으로 난리다. 내가 일하는 카페는 주위 지인들의 지나가는 정거장 용도로 자주 활용되기 시작했는데, (제일 자주 오는 게 김종대다)


“헐 오빠 살이 쪽 빠졌어.”

“그게 바로 보여? 아무래도 일이 바빠서.”

“그 살 내가 좀 빠져야 하는데.”


바쁜 몸의 준면이 오빠가 웬일로 얼굴을 보였다. 김종대를 ‘바쁘다’고 한다면 준면이 오빠는 ‘일 중독’ 수준이라 같은 집에 사는 종인이도 얼굴을 보기 힘들다고 들었다. 그놈의 회사는 사람 밥도 안 먹이고 일 시키냐, 대표 아들이라는 걸 다들 모르는 게 아니냐고 물었더니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다 아니까 더 열심히 해야지.”


너무 모범적인 대답이군요. 부족한 열량을 채워주기 위해 녹차 프라푸치노에 휘핑과 초코칩을 잔뜩 쌓아 내밀었다. 오빠는 고맙다고 받아들이며 들고 있던 쇼핑백을 건넸다.


“이게 뭔데?”

“어머니가 너 갖다 주라 하시던데.”


열어보니 이건 필시 우리 엄마의 손길이다. 또 오공주들끼리 만나서 수다 떨다 전해 주셨나보다. 내가 집에 잘 가지를 않으니 종종 이렇게 다른 사람을 통해서 필요한 걸 전해주곤 한다.


“일 있어서 금방 가봐야겠다.”

“바쁜 사람 붙잡는 취미 없어요. 빨리 가봐.”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일만 한다는 귀한 몸인데 얼른 보내드려야지. 또 올게, 하며 아쉬운 얼굴의 오빠가 테이크아웃 잔을 흔들었다.

 

 

 

 

오공주의 아들딸과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이렇게 좋은 관계를 유지해온 건 아니었다. 아무리 엄마들끼리 친자매보다 끈끈한 사이라지만 나와 그들은 어디까지나 남이고, 오공주의 자식들 중 딸이라고는 나와 청하뿐이라서 사춘기 때는 모든 남자를 멀리하기도 했다. 그냥 남자라는 성별 자체가 불편했다. 여중/여고를 다녀서 낯설어 지기도 했고. 한참 엄마를 따라 모임에 나가는 게 귀찮기도 했으니 중딩에서 성인이 되는 중간, 공백기가 길었다. 뭐, 성인이 되니까 어떻게 다시 가까워지긴 하더라.

그중 김종대와 가장 친하게 지내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걸 친하다는 무난한 단어로 표현하기엔 모자란 감이 있는데… 모태 이과감성인 내게 따로 대체할 단어가 생각나질 않는다.

미안하게도 김종대에게 가지는 감정은 동정심이 제일 컸다. 집이 싫어 도망치듯 결혼했다는 선희 이모의 전 남편은 최악의 남자였는데, 가장의 역할을 제대로 못함은 물론이고 술을 마시든 마시지 않았든 가족들을 때리는 일이 하루걸러 하루 꼴로 일어나곤 했다. 엄마는 나에게 굳이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지는 않았지만 어느 날 얼굴에 큰 상처를 가지고 우리 집을 찾아왔던 선희 이모와 김종대를 기억한다. 가정폭력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였다. 당시 선희 이모의 뱃속에는 청하까지 있었는데 말이다.


‘여주야, 종대오빠 알지? 선희 이모 아들 종대.’

‘웅! 종대 알오!’

‘종대 말고, 종대 오빠.’

‘왜에?’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동갑내기 친구들이 모두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여덟 살, 김종대는 학교에 가지 못했으니까. 그 때문에 나는 김종대를 동갑 혹은 동생으로 인식하고 절대 오빠라 부르지 않았었다. 여덟 살의 김종대는 일곱 살의 나보다 더 작기도 했다. 또래 아이들에 비해 한참이나 작은 키에 삐쩍 마른 몸.

그렇게 1년을 우리 집에서 숨어 살았다. 내가 여덟 살, 김종대가 아홉 살 때가 되어서야 초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는데 다시 원래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건 남자(김종대는 그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부르면 화를 내기도 했다)가 사체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난 뒤였다. 만취한 상태로 몸을 가누지 못해 강에 떨어졌을 거란 추측이 유력했다.

어른들은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았기 때문에 자세히 어떠한 이야기를 했는지 알 수 없지만 김종대는 어린 아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눈으로 말했었다.


‘그딴 인간이 숨 쉬는 공기도 아까워. 잘 죽었어.’


아홉 살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어릴 적에도 눈치라고는 쥐뿔도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절대 김종대에게 내가 자신을 동정하는 티를 내선 안 된다. 나이가 들면서 그 생각은 동정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바뀌었다. 어린 나이에, 그것도 형제가 없는 내게 김종대의 존재는 매우 컸다. 그래서 선희 이모와 김종대가 다시 원래의 집으로 돌아갈 때 엉엉 울었다. 죤대 우리 집에서 살면 안 돼? 엄마의 치마를 붙잡고 눈물 콧물을 쏟아대는 날 보고 엄마는 또 말했다.


‘여주야, 종대 오빠라니까….’


집안의 사정으로 어린 나이부터 어른스러웠던, 그 모습이 마음 한켠을 아프게 만들었던 김종대는 티슈로 내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넌 종대라고 불러도 돼.’

‘진짜? 오빠라구 안 해도 돼?’

‘응. 우리 친구잖아.’


최초의 친구였다.

아주 평범하게, 온실 속 화초같이 자라왔던 나에게 김종대네 일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자주 꾸는 악몽의 정체는 그 남자다. 죽기 얼마 전 어떻게 알았는지 우리 집에 찾아와 모든 물건을 부수고, 깨진 화병의 파편을 들어 박선희 내놔! 소리치던 그 날. 가끔, 잊을 만하면 그날이 꿈에 나온다.

슬기가 출근하자마자 매장을 부탁하고 2층으로 올라왔다. 부유한 처지가 아니라 원래 살던 원룸을 빼고 아예 들어온 참이다.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화장도 지우지 않고 털썩 쓰러져 잠들었다.


남자가 또 꿈에 나왔다. 초록색 도자기 파편을 들고 우리 아빠를 위협하며 선희 이모를 찾는다. 술 냄새를 풍기며 미쳐 날뛰는 남자를 붙잡느라 아빠의 손바닥은 붉게 물들기 시작했고, 이윽고 바닥에는 새빨간 피 웅덩이가 만들어졌다. 아빠의 뒤에 숨은 우리 엄마, 그 뒤의 선희 이모와 김종대가 시선에 들어온다. 쓰러질듯 울고 있는 선희 이모와 김종대는 정반대였다. 어린 김종대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남자를 노려보기만 했다.

이제 와서… 어른이 된 이제 생각해보면 그 때 김종대의 눈은 남자를 죽일 것 같았다. 병신같이 스스로 죽지 않았더라면 몇 년 뒤 아들의 손으로 목숨을 다했을지 모른다. 아이라고 믿을 수 없는 그 눈빛이 한참 뇌리에 박혀있었다.


“……주,”


누가 나를 부른다. 몸이 흔들거리고 20년 전 살던 우리 집의 배경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야, 김여주.”


일 년에 한두 번 꾸던 꿈을 이렇게 단 기간에 여러 번 꾼 적이 있었나. 흔들거리는 몸, 김종대의 목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또 악몽이냐. 강슬기가 너 걱정하던데.”

“…어, 그러게. 아씨 머리야.”


김종대에게 악몽의 정체를 알려주지 않았다. 남자가 나오는 건 모르고 내 기가 허해서 그런 줄 안다. 기가 약한 건 사실이니 따지고 보면 거짓말도 아니야. 어지러운 머리를 털어 정신을 차리고 앉았다.


“너 어떻게 들어왔어?”

“열쇠 나한테 있어.”

“이놈의 아줌마가…….”


도어락을 다는 돈지랄을 하고 싶지 않아서 아직까지 일반 열쇠를 사용한다. 비상용으로 엄마에게 줬는데 또 김종대에게 뭔가를 부탁하며 홀랑 넘겨버린 게 분명하다. 딱히 내 공간이라는 것에 미련이 없어서 그런지 카페는 물론이고 우리 집에 드나드는 사람이 많다. 집 열쇠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많다. 나, 엄마, 청하, 슬기, 종인이……. 김종대에게 주지 않았던 이유는 왜일까. 굳이 열쇠를 주지 않아도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일까.


“너 그러다 얼굴 썩는다. 화장지우고 자.”

“다 잤다. 대낮에 뭘 더 자. 헐 근데 너 한국 언제 왔어?”

“빨리도 묻네. 아침에 도착했거든.”


정신이 없어서 어제까지만 해도 홍콩에 있던 놈이라는 걸 이제 기억해냈다. 김종대의 동선을 감히 예측해보는데 인천에서 바로 우리 본가로, 그리고 자신의 집을 거친 뒤 이리 왔음이 분명하다.

장식용으로 올려둔 지 오래라 먼지가 가득 쌓인 드라이플라워를 매만지던 김종대가 툭, 뭔가를 던졌다.


“이마에 맞을 뻔. 뒤질래.”

“오다 주웠다.”

“뭔… 오!! 종대옵빠아!!”

“개싫다 진짜. 다시 빼앗을까?”


30달러 짜리를 오다 주웠다며 주는 사람 처음 봤네. 면세점에서 샀을 듯한 립이었다. 예쁜 포장 같은 건 애초부터 기대도 안했다. 바로 뚜껑을 열어 컬러를 확인했다. 예뻐, 으음 좋아좋아. 씹치 탈치용으로 급부상중인 입생로랑. 휴대폰 액정을 보며 대충 쓱싹 바르고 입술을 문질러 정리했다.


“어때. 좀 예쁘냐?”

“앞니에 묻었다.”

“입 다물고 말할게.”


좀 묻으면 어때. 선물인 걸.

그 1년 남짓한 과거로 인해 우리 엄마는 김종대에게 제 2의 어머니가 되었다. 새아버지가 있음에도 우리 아빠를 아버지라 부르기도 한다. 새아버지를 부르는 호칭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줄곧 아저씨. 듣는 아저씨 섭섭하시지 않겠냐고 말을 꺼내볼까 하다가 지나친 오지랖인 거 같아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선희 이모가 사모님처럼, 청하가 하고 싶은 공부하면서, 김종대 본인을 유학까지 보내준 사람이 누군데. 쩝.


“이거 주려고 들렸어?”

“어. 다시 회사 나가려면 준비해야지.”

“아아메 마시고 가. 선물 받은 보답은 해야지.”

“앞니에 립스틱부터 닦고 좀 말해라.”


아 거참 잘 보이려고 바른 것도 아닌데. 휴지를 대충 뜯어 앞니를 벅벅 닦고 됐냐? 소리쳤다.


“귀신인 줄 알았네. 나와.”

“존나 자기 집이세요? 알았다.”


외출 준비를 하는 5분 남짓의 짧은 시간, 김종대는 그 마저도 지루한지 현관에 등을 기대고 시계를 힐긋거리고 있다. 잉여라는 개념을 아예 이해하지도 못하고 매 순간을 소중히 하는 놈. 몇 년 전이었다면 이런 것도 안쓰러워 눈썹을 축 늘였을 텐데 지금은 그러하지 않는다. 작은 동정도 김종대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 뭐… 한참 눈칫밥 먹고 커온 놈이라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최대한 숨겨주고 싶다.


아니 솔직히 재수 없잖아 씨발. 사람이 시간낭비도 좀 하고 그렇게 살아야지. 소중한 것을 막 쓰는 게 제일 즐겁다는(ex. 시간, 돈) 어느 트위터리안의 말에 공감한 사람이 몇인데.


“야, 뭘 한다고 그렇게 꾸물거려.”

“아니…… 립스틱이 어디 갔지?”

“뭔데, 평소에 쓰던 거? 까만색인가.”

“아니….”

“그러면.”

“…네가 방금 준거.”

“장난이지?”

“…….”

“등신이군.”


장난이냐는 말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진짜니까 개같네…. 무언의 긍정을 눈치 챈 김종대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등신이라 단정 지었다. 아 그래 솔직히 지금은 진짜 나도 할 말이 없다. 십분 전에 받아놓고 잃어버렸어. 앉아있던 침대를 샅샅이 뒤졌는데도 립스틱은 발견되지 않았다. 소중한… 나의 소중한 친구가 준… 소중한 친구는 좆까. 내 소중한 립이!


“김여주 개그 잘한다.”

“뭐래 시발. 침대 밑에 떨어졌나? 내 폰으로 후레쉬 좀 비춰줄래?”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갈 듯 모션을 취하는 나를 보고 김종대는 더 어이가 없어졌나보다. 뚜욱 떨어지는 뒷덜미를 잡혔다.


“놔줄래? 옷 늘어나거든.”

“거기 없거든.”


하찮다는 듯 바라보는 시선이 익숙하다. 확 뒷목을 놓은 김종대의 손이 툭툭 닿은 건 내 바지 주머니였다. 주머니? 여기는 불편해서 물건 잘 안 넣는단 말이야. 그런데 좀 불룩한ㄱ… 불룩…….


“요깅네.”

“…….”

“어서 아아메를 마시자.”


어이없는 표정을 못 본 척 하고 등을 떠밀었다. 자 나가자- 현관도 잠그고- 계단으로- 계단공포증이라 하던가, 뭐 그런 비슷한 게 있어서 꼭 뭔가를 붙잡고 내려가야 한다. 혼자 내려갈 때는 키가 1미터도 안 되는 어린아이처럼 느릿하게 움직여야 해서 여간 불편한 게 아니거든. 팔짱은 내가 더러워서 싫으므로 어깨에 손을 올려 꽈악 잡았다.

겨우 바닥에 두 다리를 짚었을 때 김종대는 가만히 있는 나의 딱콩을 때렸다.


“시비 트냐?”

“가디건은.”

“…아?”

“열쇠 내놔.”


걸어 다니는 종합병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나는 잔병치레가 엄청나게 잦다. 에어컨 바람을 오래 맞기만 하면 바로 냉방병에 걸려버리기 때문에 한여름에 가디건은 거의 필수, 카페의 실내온도를 내 기준으로 맞추면 슬기와 손님들이 팝스멜팅 녹아내리게 되어버리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내가 또 계단을 오르내리면 한참이 걸리니까 성격 급한 김종대가 낚아채듯 열쇠를 받아들고 두 계단 씩, 세 계단 씩 성큼성큼 오르는 건 당연했다.

츤데레새끼. 딴에 챙겨주기는.


‘나는 어머니랑 아버지한테 평생 효도할 거야.’

‘우리 부모님 말하는 거야?’

‘그래. 그리고,’

‘…….’

‘너한테도 마찬가지고.’

‘와 징그럽다.’

‘진지하게 말할 때는 좀 진지하게 들어라.’


빚을 갚는 심정이라 했다. 아무리 지난 일을 빚이라 생각한대도 자기 앞가림이나 좀 하지… 쯧. 내가 유니폼처럼 착용하는 까만 가디건을 귀신같이 알고 가져올게 분명하다.


 




02. 친구


 

솔직히 친구는 나도 별로 없다. 애초에 친구라는 호칭을 누구에게 붙여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같은 재단의 여중/여고를 다니며 함께 했던 몇 명이 고작이고, 대학은… 썩 좋지 않은 기억이 많다. 추억이 아닌 기억이다. 6년 간 남자라고는 교편을 오래 잡은 아저씨와 할아버지 선생님을 보는 것이 고작이었기에 면역성이 부족해도 한참 부족한 내가 어째서 남초중의 남초과에 가게 되었는지, 지금은 후회가 된다.

처음에는 말로만 듣던 공대 아름이가 된 듯한 기분에 나쁘지 않았다. 신입생 중에 여자라고는 나를 포함해서 단 세 명.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남자 동기와 선배들이 어색하고 불편하긴 하지만 사람 대 사람으로 나쁘지 않게 대했고, 모태 찌질이라 곤란한 일이 생기면 거절을 하지 못하고 실실 웃곤 했다.

그런 내 행동이 예상치 못한 결과로 돌아온 건 어느 학기의 종강파티였다. 술을 입에 대고 싶지도 않은 이상한 날이었는데 선배들의 강요와 회유로 몇 잔을 마신 참이었다. 잠깐 전화를 받으러 나간 나를 따라온 건 이미지가 좋기로 소문난 강민 선배였다. 풀린 눈, 비틀거리며 걷는 다리로 취했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어지는 행동에 눈이 튀어나오다 못해 굴러 떨어질 뻔 했다.


‘선배! 이건 진짜 아니에요, 정신 차리세요….’


취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 이후로 대화를 한 적이 없으니 확실한 이유는 모른다. 문제는 단 둘뿐인 여자 동기 중 한명이 강민 선배를 오랫동안 좋아했고(그걸 왜 나만 몰랐지. 친구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강민 선배가 나에게 키스하는 모습을 사람들이 목격했다. 소문은 빨랐고, 자신의 잘못으로 퍼지는 건 죽어도 싫은 선배가 소문을 덧붙였다.

저년이 꼬리쳐서.

술 취해서 작정하고 덤벼서.

어느 남자가 안 넘어 가냐.

주량의 반도 안마셨는데 내가 취했대. 기억이 말짱하다. 정작 취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본인은 알고 있을 터였다.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고 둘 뿐인 여자 동기와 멀어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아니라 부정하고 싶었다. 선배가 일방적으로 나에게 한 행동이다, 나는 뿌리치려고 했다, 아무리 힘을 줘도 남자를 이기는 건 무리였다, 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과 내에서 선배는 누구보다 좋은 이미지였고, 나는 부탁 따위를 거절하지 않고 모두 들어주는 호구 하나에 불과했다. 병신 같은 성격이 그렇게나 답답할 수가 없었다.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혼자서 학교를 다녀야 했다.

그런데 지금,


“사장님! 전화 왔어요!”


며칠 전 들린 김종대가 개소리를 해댔다. 자신은 아침마다 코코(카페의 이름이다)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마땅히 곁들일 것이 없어서 아쉽다, 그러니 뭐든 만들어 내라. 이 무슨 개소리람. 집에 어머니도 있고 일하시는 아주머니도 있는 새끼가 왜 나를 사서 고생시키려 하냐는 거야. 근데 듣고 보니 납품받는 케이크와 마카롱을 제외하면 마땅히 먹을 게 없는 건 사실이라 한참 머리를 싸매고 있던 중이었다.


“전화? 날 찾아?”


뭔가 좀 떠오르려던 찰나에(구라다) 쩌렁쩌렁 울리는 슬기의 목소리. 코코의 전화는 장식용이나 다름없었기에 당황스러웠다. 누군데 하고 묻자 돌아오는 대답도 당황스러웠다.


“사장님 친구 분이시라는데요?”

“내 친구? 돌은 건가.”


중고딩 친구 몇 명과 오공주의 아들딸을 제외하곤 단언컨대 친구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냥 아는 지인들이라면 모를까…. 그런 나한테 친구라니. 평소 덜렁대는 은지가 휴대폰이라도 잃어버려서, 그래서 내 번호를 몰라서 매장으로 전화한 걸까 하는 생각으로 전화를 받았다.


“네, 전화 바꿨습니다.”

- “어머! 여주니? 여주 맞지?”

“누구세요.”

- “이제 내 목소리도 기억 못하는 거야? 나 연주잖아!”

“네? 그게 누군데요?”


내가 아는 연주라고는 학창시절 노래방 애창곡이었던 여가를 부른 장연주와, 오르페우스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디오니소스님을 외치며 띠링띠링 하프를 연주하는 게 고작인데. 아, 머글 중의 상 머글인 김종대는 나의 드립을 1도 이해하지 못했다. 디오니소스는 술의 신이 아니냐며 술 마시고 싶냐 묻길래 대화를 포기했다.

잠시 생각이 다른 곳으로 빠졌다. 그래서 내 친구를 자처하는 이 사람은 누구야.


- “나 정말 기억 안나? 한국대 기계공학과 고연주.”

“…아?! 아아-”

- “이제 기억나나봐- 오래만이야, 진짜.”

“응. 그런데 네가 웬일이야?”


강민 선배를 좋아하던 동기였다. 고맙게도 이 단순한 머리는 기억력이 나빠서 지나간 일을 쉽게 잊어버린다. 단순하고 머리 나쁜 게 이런 식으로도 도움이 되는 구나, 그래서 물었다. 왜, 네가 무슨 용건으로. 학교에서 강제적 아싸가 되어가는 나를 외면했을 뿐더러 그 뒤에 강민 선배와 사귀기까지 한 네가 왜. 당황한 건지 고연주는 웃음으로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내가 지금도 썩 똘똘하지 못한 건 사실이지만 학생일 때와 똑같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 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나 지금 김종대 먹일 거 생각하는 걸로도 머리 터지겠다고. 막 입이라 뭘 줘도 잘 처먹는 놈이라 열심히 생각해야한다.


- “잘 지내나 해서 해봤지.”


그다지 유쾌한 분위기는 아니라 생각한 건지 슬기가 커피를 내리다 말고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괜찮아, 너 볼일 봐. 입모양만 벙긋거리고 수화기를 고쳐 잡았다.


“저기 용건 없으면 끊으면 안 될까. 나 지금 일이 바빠서.”


오후 세시의 카페는 점심시간의 피크를 끝내고 한참 한가로운 시간이다. 그래도 할 말 없고 어색한 건 사실이잖아. 빨리 이 전화를 끊고 싶어 안달이 난 나에게 고연주는 나중에 한번 얼굴이나 보자는 입 발린 소리와 함께 카페로 찾아오겠다고 했다. 이미 지난 일인데 싫다고 말하는 것도 쫌생이 같아 보일까봐 그냥 알겠다고 하고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사장님, 방금 그 전화 친구 맞아요? 정말?”

“옛날 친구. 지금은 아무생각 없는 사람.”


손님에게 커피를 가져다드린 슬기가 준비대에 기대어 물었다. 뭐 같은 년이라고 말 하려다가 오년 쯤 지난 옛날 일에 너무 과민 반응하는 것 같아 대충 말했다. 옛날 친구임은 사실이니까.


 

 

 

하루의 일과는 늘 단촐 하다. 8시에 출근하고 한참 오픈 준비를 하고 있으면 첫손님으로 김종대가 온다. 요즘 같은 여름이든, 한파가 몰아치는 한겨울이든 늘 똑같이 아이스 아메리카노. 굳이? 뭐 하러? 라는 생각이 들지만 김종대의 모닝커피만은 내가 챙겨주는 게 버릇이 돼서……. 출근시간이 더 빨랐으면 내 기상시간이 당겨지는 것이니 회사가 가까운 것이 다행이다.

어디에나 그렇듯 진상 손님들에게 시달리지만 어쨌든 내 마음대로 우리는 1인 1메뉴다. 큰길에서 한 블럭을 건너야 해도 조용한 점심시간을 원하는 직장인들이 주로 찾고(회사 초 근접의 카페란 전쟁터나 다름없다) 그 덕분에 슬기의 출근 시간은 점심 때로 정해졌다. 그 외에는 고단한 살림과 육아에 지친 엄마들, 혼자 공부를 하려는 학생들 등등 단골이 80%다. 카페가 포화된 시장에서 꾸준히 들러준다는 건 아주 감사한 일이다.

부모님께 고마워해야겠지, 쪼들리며 살아본 적이 없다. 부유하다는 뜻은 아니다. 자식은 나 하나뿐이니 더 여유롭기도 하고…. 그 때문에 작은 손해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자주 찾는 손님들과 살가운 인사를 나누며 낮에 여유가 생기면 나와 슬기는 각자의 볼일을 본다. 은행도 다녀오고, 병원도 가고…. 그래, 내가 잔병치레가 잦아서 그렇다.

그러다 저녁때가 되고 알바생이 오면 나는 퇴근을 하고 대부분 집에서 혼자 저녁을 먹는다. 바깥 음식을 자주 먹으면 트러블도 생기고, 배가 자주 아파서 거의 만들어 먹는다. 혼자 사는 여유랄까, 그런 게 썩 마음에 드는 편이다. 가끔은 집을 찾는 손님도 있다. 김종대라던가, 김종대라던가… 그러고 보니 나 진짜 친구 없네. 중고딩 친구들은 다들 먹고 사느라 바빠서.


[강된장에 나물 어때]

-[알아서 해]


저, 저 새끼 싸가지 없는 대답 좀 보소. 먹고 싶은 게 있다고 말이라도 하면 해줄 텐데 늘 저런 식이다. 아무거나, 너 알아서 등등. 김종대는 음식을 가리지 않고, 나는 입이 짧으니 당연한 듯 싶지만 그래도 의욕이라는 게 있잖아.

김종대의 과거는 수시로 내 머릿속을 헤집는다.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 앙상하던 김종대는 영양실조였다. 임신까지 했지만 가장의 무능력으로 일을 해야 했기에 선희 이모는 이 사실을 몰랐다. 주면 주는 대로 가릴 줄 모르는 지금의 식성은 어릴 때, 그런 좋지 않은 일로 생겼다. 어릴 때라 나는 영양실조가 뭔지 몰랐지만 내 칭구 죤대가 빨리 건강해졌으면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엄마가 과자를 10개주면 김종대에게 7개를 줬다. 어린 애가 과자 준거면 다 준거 아니냐고. 김종대는 먹기가 아깝다고 했다. 한참 들여다보다가 하나를 집어먹더니 티슈에 둘둘 말아 장롱에 집어넣었다.

다 커서 안 사실인데,


“헐 알고 있었어?”

“나를 숫자도 못 세는 등신으로 알았나.”

“아니… 뭐 네가 말을 안 하길래 모르는 줄 알았지.”

“눈칫밥이 몇 년인데.”


양푼이에 밥을 비비던 김종대가 툭 던지듯 말했다.

엄마는 그 눅눅해진 과자를 하나씩 꺼내먹는 김종대를 발견하고 그냥 지나가지 못했다. 그렇다고 큰 걸 통째로 주면 소심한 애가 눈치 보며 거절할 것 같아 그 티슈 속 과자가 바닥나지 않게 늘 채워주었다. 매일 두어 개씩.


“먹어도 먹어도 줄지를 않더라.”

“홀….”

“그걸 네가 몰랐다는 게 더 신기하다 띨빡아.”


카페처럼 우리 집을 막 드나드는 사람은 많고 김종대도 그중 하나다. 언젠가 필요할 것이라며 가져다둔 박스 티와 반바지로 갈아입고 식탁 의자에 무릎을 세워 앉은 모양새가 꼭 우리 엄마 같다. 다리털은 아빠 같고요.


“언제까지 안 들어 갈 거야.”

“일단 내일.”

“아저씨 휴가 가신다고 하지 않았어?”

“다음 주에 가신대. 청하 데리고.”


스물여덟 먹고 가출이 잦다. 쓸데없이, 과할만큼 애늙은이 같은 놈이 새 아버지만큼은 죽어도 인정 못하는 게 웃기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애새끼다. 김종대가 집에 잘 붙어있지 않은 이유는 원체 부지런한 성격은 물론 새아버지를 보는 것이 불편해서도 있다. 유학을 떠난 것도 학업의 의지는 물론 저러한 이유에서였다. 오해는 하지 않기를. 사이가 나쁜 것이 아니다. 그저 저 혼자 일방적으로 불편해하며 집과 멀어지길 바랄 뿐. 오지랖 같으니 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본인이 아니니 내가 쟤 심정을 알아봤자 얼마나 잘 알겠냐 이거야. 괜히 다 아는 척, 이해하는 척하며 훈수를 두고 싶지 않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게 내 생각이다.


“밥 더 있냐?”

“엉. 너 먹을 거는.”


알아서 하라 해놓고 엄청 먹네.

시간 때우기&저녁 먹기. 딱 자신의 볼일만 본 김종대가 처음 입고 왔던 슬랙스와 셔츠로 다시 갈아입었다. 열시가 넘었으니 새아버지가 막 주무실 참이었다.


“문 잘 잠그고.”

“어련히 알아서 합니다.”

“지난번에 문 열려 있었던 거 다 기억한다. 위험의식 이런 건 뭐 팔아먹었냐?”


아 진짜 고나리 오지고요. 기계적으로 알겠다는 대답을 하며 등을 떠밀었다. 제발 꺼져주라!

오공주의 아들딸은 나름의 캐릭터가 다 있다. 가장 뭐 같은 김종대를 겨우 보내고 나니 카톡이 도착했다. 티셔츠를 가슴까지 끌어올리고 벅벅 긁으며 알람이 쏟아지는 톡을 확인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종대 있을 때는 불화자 그딴 거 착용하지 않는다. 답답해 죽어.


-[여주야!!!]

-[오빠 한국 왔지!!!!!]

-[언제 볼까?]

-[카페로 갈까???]

-[너 지금 뭐행??]

-[아 일단 집에 가야겠다8ㅅ8]

-[엄마가 그새 전화해]

[카톡 길게 보내면 손가락 부러져? 나중에 카페로 오던가ㅋㅋㅋ]


그러하다. 종인이와 청하를 제외하면 내가 막내다. 김종대, 박찬열, 변백현은 동갑인데 사실 셋 다 오빠 같지 않아. 입을 삐죽거릴게 뻔하므로 박찬열과 변백현의 앞에서는 오빠라 불러준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신연령은 내가 누나다. 김종대가 보기엔 셋 다 도긴개긴이겠지만.

언제 볼까, 내일 볼까, 꼬치꼬치 캐묻는 변백현이 귀찮아서 대충 알아서 하라 말하고 벌러덩 드러누웠다. 저렇게 구는 건 어쩔 수 없다. 사람 만나는 걸 그렇게도 좋아하는데 일 하느라 한국에 들어오는 시간이 얼마 없거든. 귀국만 했다 하면 있는 시간, 없는 시간 다 쥐어 짜내 자신의 사람들을 만나고 다닌다. 그래서 암묵적인 룰이 생겼다. 변백현이 오면 다 같이 한번은 모일 것.(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종인이와 청하는 제외다) 그 장소는 대부분 둘 중 하나였다. 스웨드 호텔이거나, 영업이 끝난 나의 카페던가.


[어디가고 싶은데?]

-[호텔에서 끝장나는 한식을 먹고 싶어]

[ㅇㅋ]

-[답장 개쟈갑다아]

씹었다. 졸려…….

 

 

 

 

“종대가 웬일일까. 이런 걸 다 놓고 가고.”

“걔도 사람이잖아요. 이런 실수도 가끔 하고 그래야 덜 기계 같지. 아저씨는 안계세요? 인사해야 하는데.”

“잠깐 일 생겨서 나가셨어. 오늘 다 같이 만나니? 준면이랑 종인이도?”

“종인이랑 청하는 나이 차가 많아서 불편해 하구, 준면이 오빠는 잘 모르겠어요. 워낙 바쁘니까.”


한식이 먹고 싶다고 찡얼거리는 변백현으로 인해 바로 다음 날 약속이 잡혔다. 점심 식사의 장소는 스웨드 호텔. 마침 오후 회의에 필요한 자료를 놔두고 왔다며 김종대는 자신의 집에 들려 달라 부탁했다. 웬만한 건 자기가 한다. 그냥 새아버지와 부딪히고 싶지 않아서 나를 보냈음을 예상한다. 그런 아저씨가 마침 집에 안계시네, 하하.

슬기와 알바를 일찍 불러놓은 참이라 바로 호텔로 향했다. 내 주머니는 가난하지만 여긴 자주 온다. 그럴 수밖에 없다. 여기는 김종대의 직장인데다가 그리고,


“해외영업부 김종대 대리 좀 부탁드릴게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심부름 시켜놓고 전화를 안 받네. 망할 놈. 가끔 있었던 일이라 쇼파에 앉아 기다리기로 했다. 김종대가 부탁한 USB는 제대로 챙겼고…… 약속한 시간보다 30분이나 빨리 왔더니 지루하기 짝이 없다. 나름 별 다섯 개짜리 호텔 오느라(변백현 때문이 아니다) 이른 시간부터 때 빼고 광냈더니 피곤이 몰려온다. 푹신한 쇼파, 시원한 온도에 눈을 느리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여기는 로비 한 중간인데 말이다.


“이런데서 넌 잠이 오냐….”


툭 건드리는 느낌에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으에?”

“침 닦아라, 침. 더럽게 진짜.”

“나 얼마나 졸았지?”


시간을 확인하니 20분이 지나있었다. 눈 잠깐 감았다 뜬 거 같은데. 잊을 만하면 꾸는 악몽을 제외해도 늘 깊게 잠들지 못했다. 그냥 내 몸뚱아리가 워낙 예민 보스라 그렇다. 불편한 자세로 잠시 눈을 붙였을 뿐인데 그새 뻐근해진 목을 좌우로 우드득 꺾으며 김종대에게 USB를 건넸다.


“심부름도 해주고, 저녁도 챙겨 먹이는데 뭐 떨어지는 거 없어?”

“되로 주고 말로 받으려 하네.”

“보답. 이자 뭐 이런 거.”


약속시간이 코앞이다. 뷰가 좋은 7층에 자리한 레스토랑으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너 목은 왜 그러는데.”

“몰라… 잠깐 졸았다고 담이 걸렸나. 나 좀 주물러봐.”


김종대의 손이 퉁퉁 내 어깨를 두드리고 뒷목을 주물렀다. 아, 시원하… 아퍼! 오두방정을 떠는 찰나 위에서 내려오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고, 아는 얼굴인지 김종대가 인사를 한다.


“식사하러 가세요?”

“네! 김 대리님 멀리 나가신 거 아니세요?”

“7층에서 약속 있습니다.”


다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가는 참인지 우르르 내린 사람들이 김종대에게 한 마디씩 말을 건넸다. 사람들의 목에 걸린 사원증으로 다 김종대와 같은 해외영업부라는 걸 알았다.


“부장님이 쏘시는데 대리님도 같이 가면 좋았을 걸-”


어느 존예의 여성이 김종대에게 살갑게 말을 붙였다. 회사 내 김종대의 이미지가 어떤지 박찬열에게 들어 아주 자알 알고 있다. 출처는 박찬열의 어느 원나잇 상대. 알고 보니 김종대의 옆 팀 사원이었다더라.

그 존예 여성의 시선은 줄곧 김종대를 향하다 나에게 닿았다. 내가 눈치라고는 개나 준 등신이긴 하다만 저런 적대심 느껴지는 시선을 한두 번 받은 것이 아니므로 이제는 안다. 김종대를 잡아 탄탄대로를 걷고 싶어 하는 수많은 여자. 저 존예 여성도 그중 하나겠지. 예의상 고개를 까딱 거리고 엘리베이터에 먼저 올라탔다.


“식사 맛있게 하세요. 저는 약속 있어서 가보겠습니다.”


매너 있는 척 쩌는 말투로 끝맺음을 한 김종대가 내 옆에 나란히 올라탔다. 그리곤 한 여름이지만 빵빵한 에어컨으로 무리 없이 착용하던 수트의 자켓을 벗어 한 손에 들었다. 타이트한 넥타이를 느슨하게 당기고, 단정히 채운 단추를 푸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배고파서 죽은 귀신이 붙었냐. 그거 잠깐을 못 참고.”

“배고픈 건 사실이라 부정 안하는데, 서두른 건 저 여자 눈빛이 기분 나빠서 그런 거야. 너 설마 저 뜨거운 눈빛의 의미를 모르는 건 아니겠지.”

“내가 김여준가. 척 보면 척.”

“…….”

“신데렐라가 되고 싶은데 만만한 게 나니까.”

“말을 뭐 그렇게…… 하냐.”

“사실인데 뭐.”


본인은 원한 적 없지만 김종대에 대한 소문이 사내에 파다하게 퍼졌다.(고 들었다) 나쁘지 않은 외모에 돈 많은 아버지가 있다 하니 그를 의식하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닐 수밖에. 그 인기가 잠시 주춤했을 때는 김종대가 여자를 너무 만나지 않아서 게이설이 돌았을 때? 귀찮게 굳이 사실을 바로잡으려 하지 않았던 김종대는 소문이 너무 날개 돋힌 듯 퍼지자 그제야 아니라 했다. 뭐 그 이후 여자를 함부로 만나지 않는 신중한 남자의 이미지가 +1 된 게 어이가 없다만.


“둘이 왜 같이 와?”


예약해둔 곳으로 향하자 박찬열이 인사도 없이 대뜸 저런 말부터 꺼냈다. 띠꺼워? 말을 받아주며 자리에 앉아 오늘의 메뉴를 살폈다. 밑반찬으로 오이소박이도 나오네. 조금 있다가 저걸로 변백현이나 괴롭혀 볼까. 멍하니 잡생각을 하며 세 사람이(사실은 변백현 하나가) 떠드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씹새가 나보고 뻐킹 갈릭코리안이라 했다니까?”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떠드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자신의 말을 받아주지 않으면 더 귀찮아 진다. 적당히 맞장구 쳐주면서 ‘나는 네 얘기에 집중하고 있단다’하는 티를 낼 수밖에. 소울리스로 물어본 내 말에 변백현은 네 몸에서 악취가 난다, 완전 홀리쉣 배드 스멜이라고 맞받아 쳐줬다며 기세등등해 했다. 프리티 걸(보이 아니다. 걸 맞음) 소리를 듣고 대판 싸워 깁스를 하던 시절에 비하면 사람 됐구나. 경청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며 식사 준비를 했다.

변백현이 카지노에서 2,000달러를 날렸다는 미친 소리를 하던 쯤이었다. 테이블에는 에피타이저로 나온 퓨전 샐러드가 거의 비워진 참이었고,


“가자마자 3천 달러를 땄거든? 아, 오늘 변백현 되는 구나, 예쁜 언니랑 데이트 함 한다! 결심했지!”

“언니 말고 누나 멍청아. 한국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언어가 아예 맛이 갔냐.”


에치!


“언니나 누나나 씨발, 똑같은 시스터 아니냐고.”

“여기 한국인데.”


으에-ㅅ치!


“그래서,”

“…….”

“3천 달러가 어떻게 마이너스 2천이 됐는지는 내일 설명할거냐?”


굳이 막 티내고 싶지는 않았는데… 쩝. 그 뭐라더라, 사랑과 가난과 기침은 숨길 수가 없다고 했던가? 김종대가 일부러 신경 써서 냉방이 약한 자리로 예약한 걸 알고 있어서 참아보려 했지만 터져 나오는 기침은 숨길 수가 없었다. 작지만 선명하게 터지는 기침 소리가 신경 쓰였는지 김종대는 의자에 걸어둔 자신의 자켓을 나에게 던졌다. 건넨 거 아니다, 던진 거라고. 시팔 그냥 주면 어디가 덧나나. 자켓을 입는 건 우스꽝스러울 듯해서 대충 어깨에 걸쳤다.


“어떻게 5천을 꼴아먹었는지, 야 김여주 팔 들어라.”


그게 못마땅했는지 슬쩍 흘겨본 김종대는 장군감 소리 들었던 내 어깨에 올려 진 자켓을 다시 가지고 가 강제적으로 내 팔에 집어넣으며 하던 말을 이었다.


“그 얘기나 하자.”

“아 그치그치! 그래서 일단 블랙잭을 하러 갔거든!”


김종대의 입에서 나온 자신의 친구는 박찬열과 변백현, 단 두 사람에 불과했다. 이때까지 같이 학교를 다니며 인연을 쌓았던 사람들은 그럼 뭐가 되냐고 물었더니 ‘아는 사람’, 혹은 ‘동창’등의 대답이 돌아왔다. 실제로 연락을 잘하는 것도 아닐 뿐더러, 자신의 사람이 아니면 날을 세우고 벽을 만들어 함부로 다가오지 못하게 했기 때문도 있다.


‘준면이 형이랑 김종인은 나이 차이가 나니까 그렇다 치고.’


저 이야기를 하던 날 박찬열은 그렇게 운을 띄웠다.


‘그럼 여주는 뭔데.’


그 옆에서 나는 남는 치킨 다리 하나 때문에 변백현이랑 싸우던 중이었다.


“또 냉방병에 감기에 몸살 핑계 대면 죽는다.”

“안 그럴 거거든!!!!”

“너 지난번에도 그래놓고 나한테 일 땜빵 부탁했다.”

“그 때는 솔직히 술병.”

“강슬기랑 쌍으로 씨발…….”


술병이 제대로 든 나와 슬기를 대신해서 출근한(마침 주말이었다) 김종대가 아르바이트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커피를 존나게 만들었었다.

이야기가 샜다. 박찬열의 질문에 김종대는,


‘쟤는…… 가족이지.’


라고 말했다.

 




 

03.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


 

김여주 8세, 김종대로 인해 생이별이 무엇인지 배웠었다. 엄마는 나에게 종대를 괴롭히는 나쁜 사람이 사라져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거라고, 아주 좋은 일이니 축하를 해줘야 한다고 했지만 어린 애새끼가 뭘 알았을까. 나는 초글링 중의 대왕 초글링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외동이라 김종대를 가족처럼 생각했기 때문에 그딴 거 1도 생각 못했다.

울고불고 생 지랄했던 게 민망하게 김종대와는 금방 재회했다. 잊고 있었는데 나와 김종대는 같은 학교, 같은 학년이었으니까.

2학년 때로 기억한다. 그날은 오공주들끼리 모이는 날이라 엄마는 김종대와 함께 하교하라 일러두었고, 수업이 더 빨리 끝난 내가 2반으로 찾아갔다. 종대는 언제 마치지? 뒷문 근처를 기웃거리며 종례가 끝나기를 기다렸고, 끝나자마자 열린 뒷문에서 바라본 광경은 이러했다.


‘너 아빠도 없다며? 아빠 죽었다며?’

‘거지라서 학교도 늦게 왔대!!’

‘집도 없어서 다른데 들어가서 살… 아야!!!’


뒷문에서 바라보고 있었기에 묵묵히 책가방만 싸는 김종대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쟤들 또 종대오빠 괴롭혀. 뒤쪽에 모여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여자애들의 사이를 가르고 뛰어 들어갔다. 나는 어릴 때부터 간땡이가 크지 못했다. 그런 내가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질렀다. 제일 지랄 맞게 구는 애새끼 하나를 가방으로 후려친 것이다. 달그락! 나무로 된 필통이 요란스럽게 굴었다.


‘너 뭐야!!!!’

‘종대 괴롭히지 마!!!!!’


누가 괴롭히면 울던가, 아니면 때리기라도 하던가! 멀뚱하게 쳐다보는 김종대의 무덤덤한 표정이 나를 더 참을 수 없게 했다. 차마 여자애를 때릴 수는 없었는지 세 명의 못된 남자애들은 팔을 치며들며 나에게 겁을 줬고, 나는 배 째라며 바락바락 더 대들었다. 상황은 여자애들의 이야기를 듣고 달려온 선생님으로 인해 무사히 끝났다. 집으로 가는 길, 뽕따 하나를 가위로 잘라 반씩 나눠먹다 김종대에게 물었다. 너는 왜 가만히 있었냐고.


‘사실이잖아.’

‘뭐어?’

‘아빠 없는 거랑, 돈 없는 거랑, 남의 집에서 사는 거랑. 틀린 말도 아니니까.’


선희 이모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청하, 초딩 김종대 세 사람을 거둔 건 김 형제네 집이었다. 경제적으로 가장 여유가 있었다는 걸 어린 나이지만 알고 있었기에 이상한 점은 느끼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게 아무리 사실이라고 해도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니. 오늘은 내가 봤기에 망정이지 이때까지 내가 없는 곳에서 김종대가 어떤 취급을 당했는지 알 수 없었다. 서러워졌다. 내 친구가 괴롭힘을 당하는 게 너무 서러워서, 그래서 대신 울었다. 아주 눈이 붕어가 되도록 펑펑 울었다. 들고 있던 소다 맛 뽕따를 떨어트리고 그게 흙으로 더러워지는 것도 모르고 엉엉 울었다. 그런 내 옆에서 김종대는 태평하던 아까와 다르게 안절부절 하기 시작했다. 지가 왜 나를 달래주는 거야! 누가 토닥거리면 더 서럽게 울지 않나. 아주 세상 떠나가라 울어대는 나를 보고 김종대는 더 어쩔 줄 몰라 했다. 울지 마아, 여주야 울지 마, 하며.


‘앞으로 너 또 괴롭힘 당하면, 히끅! 나 또 울 거야.’

‘여주야….’

‘흐어어어엉!!!!’


그로부터 한 달 뒤, 선희 이모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옷 중 가장 좋은 것을 입고 학교에 불려가야 했다. 드디어 김종대가 반 아이들과 다툼을 한 것이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조금도 알지 못한 선희 이모는 속상해했지만 나는 기분이 좋았다. 김종대가 작아지는 것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으니까.


 

 

 

“김여주 진짜 악랄해!!”

“에이 오빠- 장난 좀 친 거 가지고. 흐흐.”


밑반찬으로 나온 오이를 가지고 놀렸다는 이유로 변백현의 입술이 있는 힘껏 튀어나왔다. 적당히 달래면 금방 풀어진다. 아니나 다를까, 같이 코코에서 뭐라도 마시자니까 금세 헤벌쭉해졌다. 똑같이 무난한 회사원인 박찬열은 시간이 없어서 금방 돌아가 봤고, 변백현은 차를 가지러 간다며 손가락으로 차키를 돌리며 사라졌다.


“옷 내놔.”

“아, 깜빡했넹.”


김종대의 자켓을 입고 있다는 걸 깜빡했다. 로비 한 가운데 서서 주섬주섬 옷을 벗고 탁탁 털어 건넸다. 그런 내 뒤에서 누군가 기웃거리고 있다는 건 나를 부르는 소리에 알았다.


“여주?”

“……?”

“어머, 나 연주! 여기서 보네!”


아! 고연주! 그다지 반가울 사이도 아닌데, 친한 친구를 의외의 곳에서 발견해 들뜬 사람마냥 신이 나 보였다. 대충 오랜만이다, 하며 고개를 까딱거리고 입을 다물었다. 이만 너 갈길 가보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고연주는 그럴 생각이 없는지 웃는 얼굴을 숨기지 않고 시선을 김종대에게 향했다.


“여주 남자친구? 저 고연주라고 해요. 여주랑 학교 다닐 때 친했어요.”


아주 대 과거를 붙여야 한다. 친했었어요. 김종대, 변백현, 박찬열, 혹은 준면이 오빠 등 가릴 거 없이 남자친구냐는 오해는 종종 받아봤기 때문에 아무 생각이 없었다. 남자친구 아니고 친구야, 라고 말을 꺼내고 싶었지만 혼자 따발총을 쏘는 고연주로 인해서 말문이 막혔다. 들어갈 틈이 없더라고.

그런데 고연주의 말을 들은 김종대의 표정이 의아해졌다.


“학교? 언제요?”

“대학 다닐 때요- 여자동기가 얼마 없었거든요.”


의아할 만도 하지. 내 인간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모두 김종대의 손바닥 위니까. 두 팔을 팔짱끼고 눈썹까지 들썩이며 기억을 더듬던 김종대가 아! 하며 나를 쳐다보고 말했다. 웃는 얼굴과 상반 된 유쾌하지 못한 내용이었다.


“맞지? 강민인가 정민인가 하는 새끼랑 사귀……”

“김종대, 그만.”

“그 새끼가 너 엿 먹였잖아.”


얼굴에 철판을 깔았나. 당사자가 앞에 있는데 아주 천연덕스럽게 말한다. 내가 그만, 하며 이야기를 받아주지 않자 김종대는 얼굴을 찌푸렸다 펴고, 고연주를 쳐다봤다. 표정관리가 안 되는 고연주의 팔에는 호텔의 웨딩 홍보책자가 끼여 있었다. 그를 발견한 김종대가 물었다.


“죄송합니다. 결혼하시나 봐요.”

“…아, 네.”


고연주의 시선이 김종대의 목에 걸려있는 사원증으로 향했다. 별 다섯 개짜리 호텔 웨딩홀에서의 결혼이라. 가장 저렴한 홀을 선택한다고 해도 어마무시한 가격이라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다. 어디 예약부터가 쉬울까.


“나 바빠서 먼저 가봐야겠다. 여주야 다른 얘기는 카페에서 하자.”


김종대로 인해 민망해진 고연주가 다급히 자리를 떠났다. 결혼하나보네. 강민 선배랑은 오래 못가서 헤어졌으니 아닌 거 같고.

민망함에 바삐 움직이는 뒷모습을 보던 김종대가 쯧, 작게 혀를 찼다.


“만나긴 뭘 만나.”

“어제 카페로 전화 왔어. 오랜만이라고 한 번 찾아오겠대.”

“김여주, 내기할까.”

“아, 뭐를.”

“쟤가 너한테 부탁할 거.”


부탁? 그냥 별 이유 없을 거라 생각했다. 말 그대로 오랜만이고, 예전에 친했어서 인맥 관리하는 셈 치고. 염치없는 고연주의 그 들이댐을 받아줄 생각은 없지만 내가 생각한 이유는 딱 그 정도였다. 하지만 김종대는 어딘가 짚이는 부분이 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결혼 한다며.”

“그게 무슨 상관이야.”

“준면이 형 얘기 너 대학 사람들 다 알잖아.”


아! 그제야 김종대가 하는 말의 뜻을 알았다.

대학 시절, 강민 선배와 그런 일이 있고난 뒤 나에 대한 안 좋은 소문들이 많아졌다. 별 상대할 가치도 없는 것들이라 대꾸도 해주지 않고 무시했는데 한 번은 준면이 오빠가 나를 데리러 온 적이 있었다. 내가 있던 건물에서 정문까지는 멀었으므로 나를 위해 건물의 바로 앞까지 마중 나왔는데, 당시 준면이 오빠의 차는 벤츠였다. 20대 중후반 그 나이 대 남자들은 대부분 취업난에 허덕였기에 시선을 끌지 않는 것이 무리였다. 누가 봐도 준수한 외모에, 젊은 나이에 쉽게 가지기 힘든 외제차. 나를 향해 살가운 태도. 시선이 쏠리다 못해 뒤통수에 구멍이 날 뻔했다.

다음 날, 화장실 안에 있다가 고연주와 다른 여자 동기의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있는지 몰랐으므로 필터링 따윈 없었다.

스웨드 호텔 대표이사 아들, 낙하산, 금수저…. 마침 얼마 전 대표의 아들이 본격적으로 회사 일에 뛰어든다는 기사와 사진이 퍼졌기 때문에 알아챈 것이었다. 낙하산 비슷한 건 맞는데… 준면이 오빠가 그 소리 안 들으려고 일을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도 모르고 저렇게 떠들어 댄담. 그리고 그 사실은 며칠 내로 과에 파다하게 퍼졌다. 김여주가 박강민을 버리고 스웨드 호텔의 후계자를 낚았다고.


“웨딩홀 A랑 B에 자리 하나 나면 들어가려고 기다리는 신부들이 널렸어. 연줄 없이 거길 어떻게 들어가? 지인할인도 50%고.”

“헐 그만큼이나?”

“50%나 할인된다 해도 축의금으로 메우는 건 포기해야한다고 봐야지.”


당장 결혼에 대한 이렇다 할 생각은 없지만 나도 평범한 여자이기에 로망은 있다. 대부분의 업체들이 그렇겠지만 특히 스웨드 호텔의 웨딩은 오직 신부만을 위한, 신부에 의한 맞춤형으로 진행된다. 얼마 전 모 S급 여배우의 결혼으로 한차례 더 핫하기도 했다. 공급이 적고 수요가 많을수록 더 가지고 싶어지는 법. 네임드와 적절한 영업수완으로 예비신부들이 식을 올리고 싶은 곳 1위를 줄곧 유지하고 있는데, 문제는 자리가 영 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예약하면 최소 열 몇 달은 기다려야 식을 올릴 수 있으니, 그걸 기다리는 것 또한 여유 있는 이들이나 가능한 것이다. 지인을 통한 빠른 계약과 할인, 김종대는 이것을 고연주가 찾아온 목적이라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갑자기 찾아와서 설마 그런 거 부탁할까?”

“아까 내 사원증 훑는 거 못 봤냐. 눈에 불을 켜고 보더만.”

“알긴 아는뎅….”

“준면이 형 전무로 진급한 기사 지난주에 났어.”


대학에서건 회사에서건 그렇게 사람들에게 데이고 이용당했으면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냐, 박찬열이 지금의 상황을 본다면 분명 그렇게 말할 것이다.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데 빠삭한 박찬열은 나의 이런 등신 같은 모습을 몸서리치게 답답해했다. 그 옆에서 변백현은 그런다. 여주가 착해서 그런 거라고. 그 말이 썩 칭찬으로 들리진 않는다. 좋게 말해 착하다는 거지, 조금만 다른 방향으로 들어보면 호구라는 소리니까. 요즘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 그딴 거 개소리로 치부하지 않나.

김종대는 어떠한가.


“이 띨빡이 누가 챙기냐.”

“그… 뭐라고 거절하지?”

“그걸 질문이라고.”


마빡을 맞았다. 하찮은 눈빛은 덤이다.


“싫은 건 그냥 싫다고 하면 돼.”


나도 잘 알고 있다. 싫어. 그 한마디면 내 의사를 표현하기 충분하다는 걸. 하지만 그냥 어릴 때부터 그랬다. 눈치 없는 성격은 물론이고 내 뜻을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에 서툴렀다. 오랫동안 나를 보아오고, 친하고, 내 성격을 잘 아는 사람들에게는 막말도 쉽게 일삼는데 어정쩡한 관계의 사람들 앞에서는 그게 너무 힘들단 말이야. 그래서 지난 번 회사에서 온갖 일더미를 몰빵 당하고 혹사당하면서도 이렇다 할 반박이나 성질 한 번 내지 못했고, 휴대폰 대리점에서 호갱이 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괜히 휩쓸려서 도와준다는 그딴 말 하지도 마라. 가서 다 엎을 테니까.”

“아 알았다고! 알아서 잘 말할게.”

“…….”

“꼭….”


기어들어가는 목소리… 자신이 없어진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김종대는 나처럼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한다면 한다. 내가 다이어트 겸 노인네 같은 몸에 건강을 불어넣겠다고 헬스를 끊었을 때, 혼자 다니기 심심해서 꼬드겼던 김종대가 운동을 더 열심히 했다. 6개월을 끊어놓고 나는 한 달도 안돼서 포기했지만, 김종대는 6개월은 물론 그 뒤로 연간회원권을 끊었다. 다쳤던 다리를 정상에 가깝게 만든 것도 그의 피나는 노력 때문이었다. 나랑 김종대랑 반씩 섞으면 얼마나 좋겠냐고 주위에서 말했다. 그 말에 나도 공감하는 바가 많아서 고개를 끄덕였는데, 김종대는 딱 잘라 싫다고 했다. 그 마저도 존나 김종대다워서 짜증났다.

김종대라면 준면이 오빠한테 말을 하든, 스스로 웨딩담당부서를 찾아가서 확인을 하든 어떻게든 할 놈이다. 그래서 고연주를 피해야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종대야.”

“…?”

“종대 오빠.”

“미쳤나, 이게….”


얼굴에 쓰여 있다. ‘김여주 왜 저래 개 싫다.’ 그런 김종대의 반응을 한두 번 본 게 아니라 천연덕스럽게 들러붙어 치근덕거렸다.


“오빠 밖에 너무 더워욤!”

“어쩌라고?”

“여주 데려다주면 안 돼욤?”

“…….”

“…….”

“…….”

“씨발. 반응이라도 보여줘, 좀.”


사람 민망하게. 아서라 아서- 어차피 기대도 안했다. 여긴 지하철역까지 끼고 있는 큰 사거리고 카페까지 가는 버스는 4대나 된다. 몇 정거장 걸리는 것도 아니고. 로비의 문을 힘차게 밀고 나가려 할 때였다. 손목시계를 보며 시간을 계산하던 김종대가 내 팔을 잡아 안으로 다시 끌었다.


“5분 뒤에 나와. 차 밑에 있어.”

“올? 진짜?”

“그럼 농담인줄 아냐. USB가져다준 보답.”


김종대가 농담은 잘 안하지.

정확히 5분 뒤 밖으로 나가자 자주 얻어 타서 눈에 익다 못해 내 것이 아닌가 착각까지 드는 김종대의 차가 세워져있었다. 아우디A6 흰색. 조수석에 올라타 벨트를 하고 뒤에 있던 담요를 가지고 와 다리를 덮었다. 고고!


“강슬기 밥은. 너만 맛있는 거 먹고 가면 안 미안하냐.”

“나 악덕사장 아니거든. 초밥 사주고 왔어.”


먹을 걸로 인색하게 구는 성격은 아니다. 가격 차이도 크지 않는데 차라리 돈 좀 더 주고 맛있는 거 먹는 게 좋지. 악속이 없는 한 점심은 슬기와 둘이서 먹는데 근처에서 맛있는 걸 사먹거나, 후다닥 2층의 집으로 올라가 먹을 걸 만들어서 가지고 내려간다. 자고로 먹는 게 제일 중요하다 배웠다.

슬기에게 잘해주고 싶어서라는 이유도 있지만 남의 눈치를 보고 나에 대한 평가를 지나치게 의식하기 때문도 있다. 슬기가 어디 가서 ‘우리 사장은 늘 맛있는 걸 준단다’하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노래 선곡 완전 졸려어.”


김종대와 나의 노래 취향은 정 반대다. 아이돌의 노래나 힙합 위주로 듣는 나에 비해 김종대는 발라드나 락, 추억의 노래 등을 자주 듣곤 했다. 이동시간이 길었다면 내 휴대폰으로 블루투스를 연결 해 멋대로 선곡했을 텐데 가까운 거리라 그냥 내버려뒀다. 김동률의 노래가 작게 흘러나왔다. 한 때 남자들의 노래방 18번이었던 취중진담이. 18번이었으나 어느 하나 제대로 부르는 꼴을 못 보았던 노래다.


“자꾸만 아까부터 했던 말 또 해 미안해-”

“시끄러워.”

“모두 다 말할거야아아아-”


노래 못해서 노래방도 잘 안 간다만 그냥 내 멋대로 흥얼거렸다. 내가 김동률이 된 것 마냥 눈을 지그시 감고 휴대폰을 마이크삼아 시끄럽게 굴었다. 그 직후 김종대의 차가 급격히 흔들렸다.


“아, 씹 저 새끼.”

“뭐야? 뭐야?”

“깜빡이도 안 켜고 쳐 끼어들어서.”


김종대의 오른팔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난 또 놀래라. 큰일이었으면 주마등 지나갈 뻔 했네. 사람이 너무 놀라면 소리도 못 지른다고, 나는 내 심장만 붙잡고 숨을 턱 턱 내쉬었다. 장롱면허라 운전대를 잡을 수는 없지만 도로 위의 상황은 조수석에서 다년 간 보아왔기에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어떤 미친 차 하나가 도로를 제멋대로 달리고 있었다. 그렇게 급하면 어제 가시던가요.


“김종대, 오늘도 열일해라.”

“너야 말로.”

“오늘은 바로 집에 들어가고. 엉?”

“…….”

“먼저 가봐.”


거짓말이라도 알겠다고 하면 될 것을… 저 무언이 뜻하는 건 ‘싫어.’

김종대와 나의 성격은 판이하게 다르다. 그건 김종대도, 나도, 우리의 지인들도 모두 알고 있는 부분이 분명하다. 그 사실이 괜찮을 때도, 그 반대일 때도 있는데 이런 상황이 올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빠지게 된다.

나는 상대방에게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성격이 아니다. 나에 관한 일이라면 솔직히 상관없다. 마구 떠벌리고 다녀도 된다. 그만큼 진지하게 생각하는 일이 적다. 하지만 이야기의 중심이 상대방이라면? 주제의 무게에 따라 내 입도 함께 무거워진다. 김종대가 상대방의 고민을 꼬집어 들어주고 그를 함께 대화로 풀어가며 도움을 주는 편이라면, 나는 굳이 그 일을 꺼내어 상기시켜주기보다 입을 다물고, 잠시 머리를 비울 수 있게 만드는 편이다.

그 무거운 분위기를 참기 힘들어 하는 이기심과, 나와 함께 있을 때만큼은 상대방이 편했으면 하는 이타심이 공존한다. 그래서 김종대에게 지금처럼 스쳐 지나가듯 ‘집에 들어가!’라고 하는 것이 고작인데….

어째 멀어지는 기분이 든단 말이지. 정말 그러고 싶지 않은데 한 번 말을 꺼내봐야 하나. 이런 순간이면 끊었다고 생각한 담배가 절실해진다. 참자, 김여주, 참아.

 

 

 

 

김종대가 매번 나에게 혼자 사니까 조심해라, 문 잘 잠그고 다녀라 잔소리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카페 2층에 딸린 작은 나의 집은 카페를 통하지 않고 올라갈 수가 없다. 외부에 계단이 있긴 하지만 높은 담으로 가려져 있고. 그래서 사실 안전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이때까지 험한 일 당한 적 한번 없다는 것이 내가 위험의식이 없는 이유인데… 그래, 사실 내가 생각 없이 살아서 그런 것도 있다. 무언가에 신경을 써야한다는 건 너무 귀찮다. 카페 일만 해도 나에게 벅차다는 핑계를 대고 지금까지 정말 대충 살았다. 정말 대충.


“제발 좀, 어?”

“고오맙습니다.”


의도치 않게 오공주에게는 아들이 많아서 어릴 때부터 주위에 남자가 여럿 있기도 했고, 대학을 남초 of 남초과를 나왔다. 그도 생각이 없는 이유 중 하나다. 그런 나를 늘 못마땅해 하던 김종대가 어디서 창문에 다는 방범장치를 구해왔다. 바깥에서 창문을 열려고 하면 열라 큰 경보음이 울리는 작은 부착형 도구였다. 안에서 여는 것도 달칵, 스위치를 제대로 누르지 않으면 꼼짝도 하지 않는다.

걱정 반, 오늘도 집에 늦게 들어가고자 하는 이유 반이었다. 작은 뇌물이라 이거다.

카페로 다시 돌아와 커피를 내려줬다. 나보다 훨 싹싹해서 서비스업에 적합한 슬기가 손님을 응대하기 때문에 나는 바 안쪽에서 떨어진 재료를 채우고 뒷정리를 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분리수거를 끝내고 온 김종대는 테이블에 앉지 않고 테이크아웃 잔을 들고 돌아다니기만 했다.


“집에 들어가 있을래?”

“박찬열한테 받을 거 있어. 그거만 받으면 집에 갈 거야.”

“누가 뭐랬남.”


선수 치기는. 혼자 내버려둬도 알아서 잘 할 놈이기 때문에 나는 재고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냉장실과 냉동실의 안쪽에 있는 물건까지 모두 꺼내서 재고를 정리하고, 수량을 세고, 선입선출을 하는 건 제일 귀찮은 일 중 하나다. 그렇다고 대충할 부분도 아니고… 아예 자리 잡고 퍼질러 앉아서 목장갑을 고쳐 끼고 일에 집중했다. 차가운 거 계속 만지면 손 시렵단 말이야.

냉동망고를 너무 많이 주문했어. 이건 이번에 건너뛰고, 베이컨? 이건 대체 왜 있는 거야. 내일 까르보나라를 해먹어야겠다. 브런치를 해달라고 귀찮게 구는 김종대 때문에 냉장고에 없던 재료들이 생겼다. 샌드위치나 해줄 생각이다. 손이 많이 가서 귀찮은데, 간단한 걸 만들어야 쟤가 먹지, 아니면 귀찮다고 손도 안 댄다. 은근 이상한 부분에서 애새끼가 된다.


“슬기야, 나 집에 좀 갔다 올게.”

“무슨 일 있어요?”

“아니. 냉동고 터지려고 해서 재료 좀 갖다 두게. 내일 까르보나라 콜?”

“개 콜! 피클 다 익었을 거예요.”


바구니 한 가득 냉동식품을 들고 뒤쪽으로 향하는 나를 향해 슬기가 아, 하고 뭔가 깜빡했다는 듯 말하며 붙잡았다.


“사장님, 아까 어떤 남자 손님이 들어왔는데요.”

“남자? 나 왜 못 봤지?”

“사장님이랑 김 대리님이랑 밖에서 이야기 할 때 들어왔어요.”


슬기는 김종대를 향해 제대로 된 호칭을 정하지 못하고 김종대씨, 종대 오빠 등 이리저리 떠돌다 김 대리로 굳혔다. 슬기와 김종대 둘 다 불만이 없으니 듣기엔 이상해도 아무 말 안했다. 그런데 그 남자 손님이 왜.


“분명 들어오는 걸 봤구요, 아까 현관에 물 쏟은 거 닦고 있었거든요?”

“칠칠맞아, 으구.”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갑자기 감쪽같이 사라졌단 말이에요!”

“너 딴 거 하는 사이에 나가신 거 아니야?”

“그렇겠…죠? 근데 진짜 못 봐가지고…… 조금 무서워서.”


마주 본 슬기와 몇 초간 정적. 그리고 손으로 양 팔을 쓸며 소오름! 동시에 똑같은 말을 내뱉었다. 이 좁은 카페에서 사라질 곳이 어디 있다고.

아주 가끔, 가끔이지만 이상한 진상 손님이 찾아온다. 화장실만 홀랑 쓰고 도망간다던가, 잠시 앉아 에어컨 바람만 쐬고 사라진다던가. 그런 진상 궁상 중 하나이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얼굴 기억해? 나중에 또 오면 말해줘.”

“넹! 알겠어요!”


무슨 일이 있으면 작은 거라도 말해달라고 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들고 있는 냉동식품들이 녹기 전에 집으로 옮겨둬야 하기 때문에 바빴다. 들고 있는 바구니를 앞뒤로 흔들며 계단을 한 걸음씩 올라갔다. 마음 같아서는 여기 엘리베이터라도 있었으면 좋겠어. 무릎이 삐그덕 거린다.

열쇠를 꽂아 돌리는데 철컥 거리며 잠금이 열려야 하는 소리가 안 들린다. 내가 또 문을 안 잠갔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문을 열어 벽에 손을 더듬거렸다. 스위……


치가.

이 근처에 있는데 함부로 누를 수가 없었다. 이 느낌은 뭘까. 등골이 서늘해졌다.


잘 쓰지 않는 단어다. 쎄하다는 거. 하지만 지금은 그 생각 외에 아무 것도 들지 않았다.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고 1초가 1분처럼 느껴졌다.


“스위치가, ㅇ, 어디… 있었더라…….”


아무리 둔해 빠진 나라도, 인간은 인간인지 지금처럼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가끔 감이 발동한다. 순간 든 생각은 시간을 벌어야겠다는 것. 등신처럼 말을 더듬으며 벽을 짚는 척 턱턱 손 부딪히는 소리를 냈다. 눈은 바빴고, 뒤로 한걸음 물러나려는 순간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에 숨어있던 남자가 튀어 나왔다.


……아,

역시 너무 놀라면 말문이 막혀버리고 만다. 도망갈 생각인지 창문에 손을 짚은 남자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쳤다. 얼어버린 나는 들고 있던 바구니를 떨어트리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삐이이이이이이이 - !!!!!!!!!!!!!


“씨발 이거 뭐야.”

“…….”

“씨발!!!!! 이거 뭐냐고!!! 문 안 열어????”


찍 소리도 내지 못하고 뒷걸음질을 치다 주저앉았다. 남자의 손에서 날카롭게 빛나는 칼을 보았기에 두려움은 배가 됐다. 주저앉아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눈만 꿈뻑거리며 내가 한 생각.

경보음 소리가 크구나. 커. 많이 커.

누가 들었을까?

카페에서 들릴까?

하필 신나는 노래들을 플레이리스트로 해서 묻혔을 거 같…….


“김여주???”


딱 거기까지 생각했다. 주저앉아 몸을 뒤로 젖힌 내 시선에 들어온 건 놀란 얼굴의 김종대였다.


“너 지금 무슨….”


눈이 마주쳤다. 눈이 따가워서 손등으로 쓸어 냈더니 닦여 나오는 눈물을 보고… 아, 내가 너무 놀라서 눈을 깜빡이지도 못했구나. 하는 멍청한 생각을 했다. 내 앞을 가로막고 서서 집 안을 쳐다본 김종대가 현관에 놓인 야구배트를 쥐었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야 한다며 변백현이 깜찍한 리본까지 묶어서 선물로 준 것이었다. 장식용으로만 놓아둔지라 먼지가 그득 쌓였다.


“씨발, 왜 안 열려!!!!”


남자는 유리를 깨기 위해 자신의 몸을 여러 번 부딪혔다. 그런다고 강화유리가 깨질까. 한 번 더 단단하게 배트를 다잡은 김종대가 남자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남자가 들고 있는 칼이 무섭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시야가 흐려졌다 선명해지기를 반복했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있음에도 나는 아무 행동을 하고 있지 못하다가,


“김종대 조심해!!!!”


지난날의 모습이 오버랩 되는 순간 정신을 차렸다. 드는 생각은 단 하나다. 누군가 다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

그 누군가가 김종대라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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