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고현 배경이지만 츰삼 제외하고는 표준어로 썼습니다. 어색한 사투리 주의.



 


문을 열고 자연스럽게 안까지 성큼성큼 들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를 따라 현관에 발을 들였다.


남자친구로 추정되는 사람 형제의 생일을 집 비밀번호로 하고 있다고? 이게 무슨 소리지.


잠깐 혼란에 빠졌다가 무심한 얼굴을 보고 깨닫는다.


아, 쌍둥이지.

생일이 같겠네.


사람 헷갈리게 만드는 어법을 구사하네. 조금 기분이 나빴지만 금방 어찌되든 좋아졌다. 그럴 수 있지. 틀린 말 한 것도 아니고.



신발도 벗지 않고 여전히 현관문 앞에 서 있는 나와 달리 남자는 태연하게 집 안으로 들어와서 주변을 쓱 살피더니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집에 왔다. 어. 그러든가." 간단하게 전화를 끊은 남자가 나를 돌아본다.


"츠무 불렀으니까 오면 얘기 해보든가 해라."


내 대답은 필요 없다는 듯 다시 고개를 돌려 식탁까지 걸어간다. 나보다 이 집이 편해보인다. 들고있던 흰 봉투를 식탁 위에 올려놓는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물었다.


"저는 미야 아츠무 씨랑 사귀고 있던… 거죠?"


나를 내려다 보는 저 묘한 얼굴. 도저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가 없다. 지금의 내게는 처음 보는 사람인 탓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틈을 허락하지 않는 게 아닐까.


"그건 츠무한테 직접 물어라."

"…네."


짧지만 갈증을 느끼기엔 충분한 침묵 후에 나온 답이 겨우 저거였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대답했다. 확실히. 이야기 상대로는 다른 쪽이 더 낫겠다.


"밥 거르지 말고."


초면에 내 밥까지 챙기나. 그러다가 다시 깨닫는다. 우리 초면 아니지. 적어도 내 자취방 현관 비밀번호를 알고 있을 정도니까 꽤 친한 사이였을 거다.


기억을 잃기 전에는 밥을 걸렀었나?


남자는 내가 끄덕이는 걸 확인하고는 쌀쌀맞게 느껴질 정도로 담백하게 집을 나갔다. 저절로 닫히는 현관문을 잠깐 바라보다가 식탁으로 다가갔다. 바스락 소리를 내며 봉투를 열었다. 커다란 주먹밥이 몇 개 담겨있었다.


저 사람 주먹밥 집 한댔지. 그건가?


조금 더 살펴보려는 찰나 삑삑 거리는 소리와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같은 얼굴. 하지만 이번에는 금발 쪽.


이쪽도 집 안으로 들어오는 모양새가 자연스럽다. 남자는 나를 보고 확 얼굴을 밝히더니 다시 또 금방 아! 하며 내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는 다시 신발을 신고 집을 나갔다. 이번에는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아니라 초인종 소리가 났다.


이게 뭐야.


어이 없기도 하고 웃기기도 해서 키득거리며 문을 열어주니 그 큰 몸을 구기고 조심조심 들어온다.


"그… 내 기억 안나제? 미안타."


거기서 나를 향한 선명한 애정을 느꼈다. 나는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괜찮아요. 우리 무슨 사이였어요?"

"..사귀는 사이였다. 화장실에 있는 파란 칫솔, 여기 있는 남자 옷가지 전부 내 거다."


별다른 치레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날아온 질문에 당황하지 않고 답한다. 나는 괜히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한 번 더 물었다.


"외국 모델이랑 스캔들 나셨던데요."


그러자 남자가 움찔 떨더니 고개를 치켜들고는 다급하게 변명했다.


"아이다, 그건 오해다! 내가 다 설명하려고 했는데…… 네가 사고가 나가. 네 부모님도 오해하셔서…."


떨리는 눈가, 굽힌 어깨, 필사적으로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를 살폈다. 내 침묵이 길어질 수록 초조해하면서도 눈을 피하지는 않는다. 고개를 끄덕이자 "믿어주는 기가!" 하면서 나를 와락 껴안았다. 반사적으로 밀치자 몸을 굳히며 확 떨어진다.


"아, 아.. 미안타."


고개를 저으면서 어깨부터 팔꿈치까지 한번 주욱 쓸어내려봤다. 별다른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는 몸이 어색하다. 낯설되 낯설지 않은 감각들. 그리고 어쩐지 모를 찝찝함.


평정을 회복한 심장이 평소와 다를 것 없는 고동으로 있는 듯 없는 듯 제 존재를 주장하는 걸 확인하고 그를 올려다봤다.


데일 것처럼 선명한 감정이 거북했다. 기억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상황이니만큼 이 문제를 확실히 해두는 게 좋겠지.


"솔직히 불편해요. 기억이 없으니까. 별다른 감정이 드는 것도 아니고…. 애인으로 대할 수는 없어요."


버려진 희극 각본에 적힌 무의미한 활자를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저 남자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사랑하는 연인이 기억을 잃는다니. 사랑을 모르는 지금의 자아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글나. 개안타. 내가 니 다시 꼬시면 되지. 기회만 도."


금방 돌아온 대답을 듣고 조금 놀랐다. 좀 더 무리하게 들러붙으려나 했는데. 다시 남자와 눈이 맞았다. 눈꼬리와 입술을 동시에 휘면서 웃는 얼굴은 연예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수려하다.


고양잇과 동물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눈동자가 도르륵 굴러가는 걸 따라 시선을 돌렸다. 식탁 위에 머리 검은 미야가 두고 간 흰 봉지가 중력에 의해 아가리를 잔뜩 벌린 채 축 쳐져있었다.


남자가 자연스럽게 그것의 입을 잡아 더욱 열고 내용물을 확인했다. 커다란 손에 들린 커다란 주먹밥. 포장에는 미야 오니기리라는 상표가 떡하니 붙어있었다.


그 찰나, 남자의 눈에 살벌한 감정이 스치는 걸 놓치지 않았다.


"사무가 사다주고 갔나."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눈빛과 말투. 조금 놀라 텀을 두었다가 작은 고개짓으로 긍정을 표했다.


남자는 감정을 가라앉히려는 것처럼 크게 심호흡을 하다가 다시 방금 전과 같은 표정, 말투로 돌아와 웃으면서 말했다.


"배고프면 지금 물까."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있네.


노력 없이 그가 읽혔다.




.   .   .   .




어쩌다보니 그와 식탁에 마주 앉아 주먹밥을 같이 나눠먹었다. 내게는 두손으로 들기도 버거운 사이즈의 주먹밥이 남자의 앞에서는 몇 입만에 사라졌다.


지금 당장 자신을 남자친구로 대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한 그는 어색함에 주먹밥 포장지만 만지작거리던 나를 유쾌한 말솜씨로 능수능란하게 녹여냈다. 즐거운 식사시간이었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우린 어떤 연애를 했는지. 그런 얘기들도 들었다. 스물 몇의 나는 지금과 정말 변한 게 없었고, 동시에 지금의 내게서는 상상도 못할만한 모습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이곳저곳으로 튀던 옛날 이야기가 이번에는 고등학교 체육대회 시점에 정착했다. 저명한 예언자가 하는 이야기를 듣는 기분으로 경청하다가 문득 떠오른 의문을 틈 사이에 끼워넣었다.


"우리 고등학교 때부터 사귄 거예요?"


물컵을 잡은 손이 가볍게 움찔하는 걸 목격했다. 물을 삼키느라 움직인 울대뼈를 바라보면서 덧붙였다.


"친구가 저희 키스하는 거 봤다던데."


포식자를 연상시키는 눈동자에 스치는 알 수 없는 빛. 잘빠진 눈썹 한쪽을 까딱한 그가 모든 게 착각이었다는 것처럼 씩 웃으면서 긍정했다.


"맞다. 니 내랑 고1때부터 사깃다."


들어도 떠오르는 기억은 없다. 이따금 이상한 모습을 보이는 남자를 관찰하면서 물었다. 그때 우리 어땠어요? 남자는 "말도 몬하게 싸웠지. 주변에서 나보고 니 좀 그만 괴롭히라 했다." 라고 답하며 키득키득 웃다가도 "그때보다 최근 이야기가 더 재미날텐데?" 라는 말로 다시 화두를 돌렸다.


모래 알갱이가 손톱 아래에 낀 것처럼 불편한 느낌. 남자를 따라 물을 마시면서 버려진 미야 오니기리 포장지를 바라봤다. 물에 잠긴 것처럼 귀가 먹먹해진다.




.   .   .   .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왜 이 사람이랑 사귀었는지 알 것 같았다. 남자는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잘생겼고.


남자를 문밖으로 돌려보내고 혼자 남아 다시 집을 살폈다. 그와 찍은 사진, 딱 그의 몸에 맞을 법한 사이즈의 옷, 혼자 쓰기에는 많은 식기, 침대 옆 서랍에서 발견된 대량의 콘돔.


놀라울 것 없는 확증보다 책상 위에 올려진 노트북에 더 시선이 갔다. 비밀번호를 입력하라 요구하는 화면을 보며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너무 많은 기능이 추가되어 아직 익숙하지 못한 최신식 핸드폰.


전원을 켜서 다시 미야 쌍둥이를 검색했다. 아직도 미야 아츠무를 쳤을 때 가장 첫페이지에 열애설 기사가 보였다. 사진을 눌러 확대해서 자세히 살폈다. 이제 보니 오해할만하긴 하지만, 키스라고 단정짓긴 어려워보인다.


그 사실을 확인한다고 뭐가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적어도 그 부분에서는 거짓말 친 게 아니구나, 그런 감상 정도.


목구멍 안쪽에 남은 주먹밥의 잔향을 만끽하다가 손가락을 움직여 미야 오니기리를 검색했다. 도쿄에도 분점이 있을 정도로 커다란 주먹밥 집. 본점이 생각보다 이 자취방과 가까웠다.


의자에 몸을 늘어져라 기대면서 생각한다. 그 남자와는 정말 남자친구의 가족, 가족의 연인 정도의 관계였을까. 그렇다면 미야 아츠무가 주먹밥 상표를 보며 왜 그런 반응을 보였을까.


궁금하다.



게다가 어쨌든 내 생각을 해서 주먹밥까지 싸준 건데.

…감사도 표할 겸 한 번 가볼까?



반쯤 충동적으로 내일의 일정을 정한 뒤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삑삑 현관문 소리를 연상시키는 네 자리 숫자. 미야 쌍둥이의 생일.


서랍을 열어 맛이 간 휴대폰의 전원 버튼을 꾹 눌렀다. 켜지다 말고 다시 침잠하기를 반복하는 핸드폰과 사투를 벌이길 몇 번째. 겨우겨우 켜진 화면에 뜬 잠금화면 입력 문구를 확인하고 빠르게 손가락을 놀렸다.


이 시기의 내가 아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비밀번호를 구성하고 있다면, 아마 여덟자리 비밀번호는 내 생일과 남자의 생일이 연달아 나오는 구조일 것이다. 어느 것이 앞에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1005XXXX, XXXX1005 어느쪽도 답은 아니었고


기회는 단 한 번밖에 남지 않았다.




.   .   .   .




집 근처 미야 오니기리 본점 앞에 섰다. 이 시기의 패션 유행을 잘 모르겠어서 그냥 유행 타지 않는 무난한 옷을 챙겨입었지만, 괜히 이상해 보일까봐 신경이 자꾸 옷차림으로 쏠렸다.


이런 건 나답지 않은데.


상념을 지우듯 문을 밀어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딱 한 발자국 들여놓은 순간이었다.


"어머, 여주야! 오랜만이야. 요즘 좀 뜸했잖아."


한 손에 마른 행주를 들고 있는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 반가운 것처럼 말을 뱉고 있으면서도 눈이 살벌하다. 누군지 전혀 감이 안 잡힌다.


어떻게 대해야할지 고민하고 있던 중에 손님의 계산을 이제 막 다 끝낸 오사무와 눈이 맞았다. 그의 눈이 미미하게 커지는 것이 보였다.


오사무는 빠르게 계산대 앞에서 벗어나 이곳으로 걸어왔다. 시야를 다 가리는 넓직한 등과 그 등을 빈틈 없이 감싸고 있는 검은색 티셔츠. 여자의 시선에서 보면 내가 아예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이 가스나 기억 잃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아직 별다른 대화도 안 나눠봤는데. 경계심 묻은 목소리와 무례하게까지 느껴질 수 있는 태도를 여자가 어떻게 받아들이려나 생각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밝고 상냥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아 몰랐네, 기억을 잃었다고? 무슨 큰 사고라도 있었어?" 

"네, 좀."


남의 등 뒤에서 상대와 얼굴도 안 보며 하는 대화라. 꽤 재미있는 경험이다. 떨떠름한 티를 삼키며 대답했지만, 여자는 본인이 물어놓고는 대답따윈 관심이 없었던 것처럼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


"사무 너는 어쩜 나한테 얘기도 안 해줘? 병문안도 못 갔네."


가늘고 긴 손가락이 오사무의 팔뚝을 툭 쳤다. 탓하는 듯 하면서도 애교스러운 몸짓이었다. 그러나 오사무는 몸을 조금 물리더니 손님이 왔다며 다시 안쪽으로 이동했다.


여자의 언행과 오사무의 언행이 전혀 다른 빛깔을 띄고 있어서 둘의 관계를 더 모르겠다. 단순히 직원과 사장의 관계라고 하기에는…


"주문할 거면 하고 빨리 가라."


차갑게까지 들리는 목소리. 주방 안쪽에서 얼굴 없이 날아온 문장을 들으며 근처에 있는 자리에 허리를 내렸다.


주먹밥에 대한 감사인사는 계산할 때 할까. 상황에 맞게 계획을 수정하면서 메뉴판을 집어들었다. 뭐 먹지.


메뉴판 상단을 다 읽을 때까지 옆에서 떠나지 않던 여자가 이번에도 친근한 태도로 아무 거리낌 없이 말을 걸어왔다. 사실상 혼잣말에 가까웠다.


"기억을 잃어서 아까 그런 반응이었구나? 안녕, 나는 네 고등학교 동창이고 사무 와이프인 A야."


명란젓, 참치, 우메보시…. 글자를 읽고 있는데도 의미가 들어오지 않는다. 이 사람이 그 와이프구나. 미야 오니기리에 자주 얼굴을 비춘다는 사모님.


"아… 네. 여주에요."


순식간에 크림빛 종이와 검은색 활자가 된 메뉴판에서 시선을 돌려 여자와 눈을 마주했다. 그녀는 꺄르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우리 원래 반말했어. 반말해."


어째서인지 아까보다 편안한 얼굴, 편안한 태도였다. 고개를 대충 주억이면서 오니기리 두 개를 주문했다. 저번에 오사무가 사주었던 메뉴들로.


여자가 주문을 전달하니 주방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여자의 하늘하늘한 차림새와 다른 사람들의 포스팅을 생각하면 여자는 이곳에서 직원으로 일하는 것 같진 않은데.


"평소엔 사장님이 혼자 다 해?"


그녀가 없는 시간에는 오사무가 주문 받는 것부터 요리, 계산까지 전부 다 하는 건가 싶어서 물어보자 여자가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아니, 잠깐 아르바이트 하는 애가 자리를 비워서 그래."


식사시간을 살짝 빗겨나간 애매한 시간대라서 그런가.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오랫동안 자리를 비울 수 있다니 꽤 널널한 사장님인가보네.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아르바이트생이 계산대 앞에 서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손님 몇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그 모양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으니 여자가 다시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사무가 병문안 갔었어?"


아, 역시.

이 사람은 나를 경계하고 있다.


"아니. 저…" 사람, 남자, 사장님 등의 호칭을 떠올리다가 어색하게 덧붙였다. "분 말고 쌍둥이가 왔었어."


"그랬겠지."


묘한 말투. 대체 왜 남편의 쌍둥이와 사귀는 사람을 경계하는 걸까. 하지만 굳이 새까맣게 타들었을지도 모를 뒷면을 뒤집어 보고 싶은 건 아니었다.


음식은 금방 나왔다. 내 앞 앞 사람부터 오사무가 주방에서 직접 나와 다시 계산대를 점했다. 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로 붙임성 좋게 웃는 얼굴. 처음보는 표정이었다.


어색하게만 느껴지는 장지갑에서 대충 지폐 몇 장을 꺼내 건넸다.


"어제 주신 주먹밥 감사해요. 아츠무 씨랑 잘 먹었어요."

"글나."


거스름돈을 지갑에 넣고 봉투 손잡이를 잡는데 옆에서 뾰족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사무가 어제 주먹밥 주고 갔어요?"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생각하는 것 자체도 피곤했다. 무시할까 어쩔까 생각하는 중에 오사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병문안 못 간 대신 좀 줬다. 그러면 안 되나."


그 말에 여자는 "누가 그러면 안 된대?" 라고 답하며 밉지 않게 오사무를 흘겼다. 그녀의 표정과 오사무의 표정. 관계의 저울이 어느쪽으로 기울었는지는 명백했다.




.   .   .   .




묘한 답답함을 느끼면서 털레털레 돌아온 집. 아직 어색하기만 한 식탁 앞에 앉아 방금 포장해온 주먹밥을 먹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전화번호를 하나도 백업하지 못해서 누군지 모르겠다. 아는 사람일까, 스팸일까.


손가락에 묻은 기름을 대충 휴지에 닦고 휴대폰 액정을 밀었다. "여보세요?" 답은 바로 돌아왔다. "낸데." 오사무였다.


무의식적으로 자세를 고쳐 앉으면서 애꿎은 포장지만 구겨댔다.


"니 아까 돈이랑 같이 사진 건넸더라." 사진? 기억 잃기 전에 내가 돈 사이에 사진을 끼워놨나? "니가 와서 받아갈래, 끝나고 내가 가서 건네주까." 바닥에 늘어진 봉투를 손끝으로 툭툭 치면서 답했다. "제가 갈게요. 바쁘실테니까 가게 끝날즈음에요." 오사무는 이번에도 텀 없이 바로 대답했다. "알았다."


검게 변한 액정을 슥슥 문지르다가 다음 주먹밥을 향해 손을 뻗었다.




.   .   .   .




가로등이 하나둘씩 켜질 시간. 미야 오니기리 앞에 도착해 유리에 비친 모습을 점검하려고 섰을 때였다.


여자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다 잘못했어. 미안해. 널 너무 사랑해서 그랬어. 응? 사무야……."


오사무의 목소리도 들렸다.


"사랑? 헛소리 하지 마라. 이딴게 사랑 같나."


부부싸움?

낮에 봤던 저울의 기울기와는 결이 다른 상황이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문 밖에서 서 있었다.


그냥 내일 다시 오겠다고 할까.


"니는 내가 얼마나……"


흐린 말끝이 그대로 얼어붙을 것처럼 차가운 노기가 잔뜩 묻은 목소리. 뒤따라붙은 욕설. 오싹함이 지나고 간 목덜미를 살살 어루만졌다.


"이혼하자. 그때까지, 아니, 앞으로도 내 눈에 띄지 마라."


남의 사생활을 너무 깊게 들어버렸다. 여자는 이제 누구 하나가 죽은 것처럼 통곡하고 있었다.


서 있던 문이 거칠게 열리면서 익숙한 남자가 튀어나왔다. 눈이 맞았다. 살벌했던 인상이 순간적으로 더욱 구겨지는 걸 보면서 불편과 불쾌감을 동시에 느꼈다.


하지만 정의 내리지 못할 표정은 금방 사라졌다.


"일단 따라온나."


그의 뒤를 쫓았다. 가로등 불빛이 벤치와 그 근처에 조경된 수풀을 아름답게 비추고 있는 공원에 도착했다. 시간 탓인지 사람 하나 없이 한적한 장소였다.


오사무는 깨지지 않을 것처럼 단단한 무표정으로 말없이 사진을 건넸다. 받자마자 불빛 아래에 사진을 가져갔다.


나였다. 이나리자키 교복을 입고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 발그레한 뺨과 활짝 피어난 웃음. 행복해보였다.


이걸 왜 돈 사이에 끼워놨을까.


찜찜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그냥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용건이 끝났으니 돌아갈 일만 남았는데, 이상하게도 발이 잘 안 떨어졌다. 어색한 공기 가운데서 사진을 바지 주머니 안에 밀어넣었다.


뚫어버릴 것처럼 강렬한 시선을 느낀다. 이대로 집어 삼켜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압박감이 들었다. 괜히 휴대폰을 한 번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으면서 시선을 피하는데, 그가 예고 없이 팔을 뻗었다.


고소한 향이 밴 두툼한 손이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준다.


숨도 못 쉬고 그를 바라봤다. 이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적어도 쌍둥이 형제의 여자친구에게 아직 이혼서류에 도장도 찍지 않은 유부남이 할 행동은 아니었다.


"기억, 빨리 되찾아라."


그 순간 깨달았다. 지금까지 기억을 되찾으라는 말을 한 사람은 오사무 뿐이라고.


부모도, 심지어는 남자친구라는 미야 아츠무도 기억 잃은 거 괜찮다, 상관 없다고만 했었는데.




.   .   .   .




옷을 벗고 샤워를 하고 잠옷을 입고 침대 위에 누울 동안 내내 오사무에 대해 생각했다. 그와 와이프의 일, 방금 전 공원에서 있었던 일. 곱씹고 곱씹다가 깨달았다.


미야 오니기리 리뷰에 주인 부부 사이 좋다는 말은 없었네.


휴대폰을 열어서 다시 이것저것 검색하기 시작했다. 미야 오사무, 미야 아츠무. 미야 오니기리 공식 인스타그램까지.


이미 대충 살펴본 정보의 틈바구니 속을 의미없이 떠돌다가 손가락을 멈칫했다.


내가 옛날에 만들어둔 계정이 아직 남아 있을까?


시계 초침 소리를 들으며 시간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내다가 다시 손가락을 움직여 계정과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그 긴 시간동안 비밀번호 한 번 바꾸질 않았는지 로그인은 너무나도 손쉬웠다.


친구들과 소소하게 교류하는데 썼던 적이 있던 계정이라 지금까지도 어느정도 흔적은 남아있을 줄 알았지만, 전혀 아니었다. 팔로잉과 팔로워는 모두 0이었고 계정 역시 비공계 계정이 되어있었다.


게시글은 검은 배경으로 딱 하나.


판도라가 버리고 간 상자를 들춰보는 도둑처럼 은밀하게 움직여 게시글을 눌렀다.


나쁜새끼.


내용은 그것 뿐이었다.


날짜는 내가 성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묘한 확신을 가지고 서랍을 열었다. 우습게도 이 순간 휴대폰은 고장나지 않은 것처럼 단번에 전원이 켜졌다.


단 한 번 뿐인 기회.


손가락을 움직여 게시글이 올라온 날짜 여덟자리를 입력했다.


거짓말처럼 잠금이 풀렸다.



가장 먼저 갤러리부터 확인했다. 음식사진, 풍경사진, 그리고 미야 아츠무와 찍은 사진들이 대부분이었다.


다음으로는 메신저 앱. 대화 기록을 나타내는 화면 가장 상단에 미야 아츠무의 이름이 있었다. 한 자릿 수의 미확인 메시지가 있다는 빨간색 알림을 보다가 손가락을 움직여 채팅창을 확인했다.


꽤 연인다운 대화 아래, 아츠무가 며칠에 걸쳐 사과했던 기록이 남아있었다. 아니다, 억울하다, 미안하다…. 열애설 얘기였다.


언제 꺼질지 모르는 고장난 핸드폰으로 대화기록을 일일이 확인하기도 힘드니 대충 살피고 채팅창을 껐다.


그리고는 친구목록에서 오사무를 찾아 그와의 채팅창으로 들어갔다.


뚝뚝 끊기고 텀이 긴 별 것 없는 기록 끝, 가장 최근 내가 보낸 메시지.


다 끝낼래.


사고가 났다는 그 날에.



등골을 타고 무언가가 스쳐지나갔다. 지금까지 흐리멍텅하기만 했던 형태 없는 예감이 점점 또렷해지는 기분.


절묘한 순간에 꺼진 휴대폰을 다시 노력해서 겨우 키고는 망설임 없이 백업 클라우드 앱으로 들어갔다. 비밀번호를 찾는데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미야 쌍둥이의 생일과 내 생일을 더한 게 정답이었다.


대학 과제 파일이나 방금 전 갤러리에서 봤던 사진들 위주로 백업이 되어있었지만, 폴더 두 개 정도를 거치니 '잘못'이라 이름 붙여진 폴더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잘못.


쿵쿵 뛰는 심장 고동을 전신으로 느끼면서 폴더를 열었다.


열지 말았어야 할 판도라의 상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메신저 대화 기록, 같이 찍은 사진, 얼굴 없이 달뜬 목소리만 녹음된 오디오.


미야 오사무와 나의.

기록들.



여자의 살벌했던 눈빛.

아츠무의 묘한 반응.

오사무의 말.

행동.

내 감정.



몇 개의 조각이 부족하지만 충분히 전체적인 그림을 확인할 수 있는 퍼즐판을 앞에 두고 실소했다.


불륜이라고?


내가?



머리를 짚고 벽에 기댔다. 혼란 속, 뇌에서 멋대로 주무른듯한 흐릿하고 제멋대로인 기억조각이 툭툭 튀어나왔다.



여자와 남자가 같이 살고 있는 태가 나는 집 안방. 오사무의 집 안방.


"여긴 싫어…."


뒤틀리는 여체.


"이까지 와서 착한 척 하지 마라."


벗겨지는 작은 천조각.



검게 변한 액정을 보다가 멀쩡한 핸드폰을 손에 들었다.


아츠무, 친구, 부모님과의 대화 기록만이 남아있는 메신저 앱을 열어 오사무를 찾았다.


우리 무슨 사이였어요?


손 안에 있는 핸드폰이 금방 몸을 떨어댔다. 입술을 깨물며 휴대폰을 귀 옆에 가져다댔다.


"뭐 떠올랐나."


너는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구나.








/

구상은 상편 올릴 때부터 이미 끝내놨었는데 손가락이 정말 안 움직여서 이제야 겨우 하편을 내놓았네요. 결국 또 이런 예민한 소재()였습니다.


원래는 여기까지가 중편이었는데, 여기서 마무리 짓는 게 성인글로 가지 않고 마무리 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고 뒷 이야기는 모두의 상상에 맡기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하편으로 변경했어요.


아츠무는 둘의 관계를 어디까지 알고 있을지, 왜 오사무는 A에게 화를 내며 이혼하자고 했는지,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고 나서는 법적 구속력이 없는 아츠무-여주와의 관계에 어떻게 끼어들지, 고등학교 때 사귄 미야는 정말 아츠무가 맞을지 등등 자유롭게 상상해주시면 됩니다!


언젠가는 은근슬쩍 중편으로 제목을 바꾸고 하편을 들고올 수도 있지만요()





옛날 작품에 질척이는 사람

벚뮬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