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준이 유하의 귀에 가까이 다가와서 속삭이듯이 말했다.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너야. 내가 좋아한 남자….”

“뭐?”

놀란 유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거절해야 해. 그럼 그때 우리 서로 짝사랑했던 거네. 이게 뭐야? 도대체.

하지만 나는 지금 한결이뿐이야. 미안해.

유하가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달싹였다.

태준이 유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취해서 빨개진 유하의 뺨을 살짝 손으로 어루만졌다.

어…. 이거 뭔가 이상한데….

유하가 싸한 느낌에 몸을 빼려고 하기도 전에 태준이 유하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키스가 이어졌다.

어… 안돼. 이러면.

놀란 유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밀쳐내려고 했지만 술에 취한데다가 너무 놀라서 몸이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안 돼.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태준이 유하의 목에 팔을 휘감고 더 진하게 키스했다.

미쳤어. 안 돼. 여긴….

유하는 키스 하는 도중 익숙한 차가 골목에서 들어오는 걸 보았다. 한결의 차였다.

운전석에 앉은 서슬퍼런 눈빛의 한결과 마주쳤다.

어떻게 하지. 봤다면 어떻게 해?

너무 무서워서 몸이 덜덜 떨렸다.

태준은 키스를 끝내고 아쉬운 듯 유하를 보았다.

끼익!

날카로운 타이어 소리와 함께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의 한결이 태준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퍽!”

한결이 태준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주먹을 맞은 태준이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씨발, 누구한테 손을 대는 거야!”

화난 한결을 보고 당황한 유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몸을 떨었다.

크…큰일이다. 한결이 화 많이 났나 봐. 충분히 오해할만한 상황이잖아. 이제 어떻게 하지.

너무 무서워.

“선배!”

한결이 유하를 잔뜩 원망하는 듯 째려보다가 가까이 다가왔다. 뺨이 부들부들 떨렸다. 꽉 깨문 입술에 붉은 피가 스며 나왔다.

짝!

유하의 뺨을 세게 때렸다.

“윽!”

유하는 한결에게 뺨을 맞고 고개가 돌아갔다. 입가에 피가 흐르고 고통으로 붉어진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뭐야? 나는 또 왜 때려? 설마. 나랑 태준이 사이 오해하는 건가. 일방적으로 당한 건데….

강한결, 나를 못 믿는 거야. 설마 내가 바람이라도 핀 줄 아는 거야.

유하는 한결이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무너져내렸다.

야…. 강하결. 나를 그 정도로밖에 보지 않은 거야. 실망이다.

참혹한 절망감에 몸이 떨렸다. 아득히 깊은 수렁으로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선배, 내가 모를 줄 알았어요? 너무 해요. 태준 선배랑 저 양다리 맞았네요. 흑….”

한결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무슨 양다리란 말인가. 방금 상황은…. 정말 오해야. 이건 일방적인 거란 말이야.

유하는 입을 우물거렸다. 바닥에 쓰러진 태준이 보였다.

이건 오해야. 오해. 바로잡아야 해.

유하는 그런데 너무 억울하고 분하니깐 말이 제대로 안 나왔다. 한결에게 뺨을 맞은 충격에 머릿속 사고가 완전히 정지되어버렸다. 혀가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침조차 삼킬 수 없었다.

한결이 유하의 손목을 거칠게 붙잡고 집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유하는 멍하니 질질 끌려갔다.

“말 좀 해 보라고요! 왜 아무 말이 없어요. 그동안 나…가지고 놀았어요? 선배 그런 사람이었냐고요!”

눈을 부라리며 한결이 유하를 쳐다보았다. 흰자위 붉은 핏발이 가득 섰다.

유하를 거칠게 소파에 집어 던졌다.

눈물이 너무 많이 나와서 시야가 흐렸다. 울고 있는 한결의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어째서 맞은 사람은 난데 그런 너를 보는 게 더 가슴이 아플까?

변명을 하려다가 유하는 문득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아픈 뺨을 손으로 문질렀다. 입 안에서 쌉쌀한 피맛이 났다.

그래….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헤어지자.

어쩌면 서로에게 좋을지도 몰라.

한결이 어느새 유하 앞에 섰다.

“선배가 나한테 이러면 정말 안 돼요. 바람 피우면 안 된다고요. 뭐라고 변명이라도 해요. 미안하다고 말하며 무릎 꿇고 빌기라도 하란 말이에요! 그래야…내가….”

유하를 마주 보고 어깨를 잡아서 거칠게 흔들었다. 슬픔과 불안이 교차된 한결의 까만 눈동자가 떨렸다.

“…….”

말 못 하겠어. 너무 가슴이 아파서 못하겠어. 그래도 해야 해.

모두를 위한 일이야. 나 하나만 빠지면 다 원래대로야.

한결의 시선을 회피하며 유하가 주먹을 꼭 쥐었다.

입가에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슥 닦았다. 비릿한 피 냄새가 났다.

처연하게 한결의 눈을 바라보았다.

“내가 본 그대로야. 헤어지자.”

“네? 지금 뭐라고 했어요?”

한결의 까만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상상하지도 못한 단어를 들었다는 듯 얼굴이 충격으로 일그러졌다.

“헤어져.”

미안해. 우리 그만 여기서 끝내자. 한결아….

이 이상은 아닌 것 같아.

왜…. 어째서 너는 쉽고 편한 길을 놔두고 험한 길을 걸으려고 하는 거야.

인생 쉽게 살자.

그냥 나 하나 빠지면 된다면…. 그래서 네가 안 아플 수만 있다면 그걸로 됐어.

유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게…. 그 말이 그렇게 쉬워요. 바람핀 사람이 사과도 안 하고 그래요? 참…. 선배 그렇게 책임감 없는 사람이었어요?”

“…….”

유하는 고개를 떨구며 바닥만 쳐다보았다.

한결아…. 잠시야. 헤어지고 아픈 거 잠깐이야.

어처구니가 없어서 한결은 멍하니 유하를 바라보았다. 텅 빈 눈동자에 생기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 대신 지독한 배신감과 증오가 자리 잡았다.

절망한 한결은 그 자리에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 버렸다.

눈물이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유하는 그 모습을 도저히 볼 용기가 나지 않아서 방으로 들어왔다.

너무 많이 울어서 눈물이 더이상 나오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꼬여 버릴 줄은 전혀 몰랐다. 그래도…. 어쨌든 한결이 이별을 억지라도 받아들인 것 같다.

그 따뜻하고 순수했던 마음에 비수를 꽂은 것 같아서 유하는 속이 쓰렸다.

어쩔 수 없어. 어떤 식으로든 헤어져야 했어.

평생 한결이에게 개새끼로 남겠지.

그냥…. 잊어버려. 한결아.

너라면 분명히 나보다 훨씬 좋은 사람 만나서 남들에게 축복받으며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야.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땐 내가 널 먼저 찾아갈게.

이번처럼 애태우고 구박하고 힘들게 하지 않을게.

넌…나한테 너무 과분한 사람이야. 내가 너무 욕심부렸어.

유하는 벽에 기대어 주저앉아 흐느꼈다.

 

 

한결은 방 침대에 걸터앉았다. 창으로 보이는 밤하늘은 별빛 하나 없이 캄캄했다.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했다. 그동안 태준과의 관계를 의심했지만 자신만 최선을 다해서 노력해서 잘하면 유하는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철썩같이 믿었다.

마치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성적을 받는 우등생처럼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하려고 했다.

모든 게 자신의 착각이었다.

두 사람이 다른 곳도 아니고 자신의 집 앞에서 키스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한결은 차 안에서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이런 일을 미리 예감한 걸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카페를 그만두라고 잔소리했지만 유하는 절대로 그만두지 않았다.

몇 가지 의심스런 정황이 있었지만 진실을 따져 묻기에 너무나 두려웠다. 유하가 자신이 아닌 태준을 선택하고 떠나버릴까 무서웠다. 늘 유하 앞에만 서면 한결은 한없이 작아졌다.

한결은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주면 유하도 언젠가는 시간이 좀 걸려도 그렇게 해줄꺼라고 믿었다. 며칠 전부터 유하의 낌새가 너무 이상했다. 불안하고 초조했다.

유하에게 무슨 일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마음속으로 태준과 한결 두 사람을 저울질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한결은 유하가 자신을 처음부터 좋아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일방적인 구애로 만들어진 관계였다. 그래서 늘 유하가 떠나가 버릴까 두려웠다. 마음을 얻기 너무 힘들었기에 어쩌면 더 집착하고 바랐는지 몰랐다.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욕심을 부렸다. 여행을 가자는 게 아직도 시기상조였는지 몰랐다.

욕심이 결국 화를 자초했다. 유하의 모든 걸 가지고 싶었다.

이제는 자신에게 그럴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타났을까? 막대한 투자를 했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생각한 자신이 바보였다. 한결은 머리카락을 마구 흐트러뜨렸다. 속이 메스꺼웠다. 구역질이 났다.

“우욱.”

화장실에 가서 토를 했다. 너무나 정신적인 충격이 컸다.

이런 현실이 너무 참혹해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비참해. 끔찍해.

한결은 이제 유하와 헤어질 것 생각하니 가슴이 너무 아프고 쓰라렸다. 허무하기도 했다. 이제는 그 아름다운 얼굴이 미웠다. 증오스러웠다.

하지만….

여전히 사랑했다.

어째서 이렇게 뒤통수를 크게 맞았는데 이 마음은 그대로일까?

나는 진짜 멍청이에다가 바보다.

한결의 눈에서 눈물이 계속 흘렀다.

아까는 너무 화가 나서 유하의 그 여린 하얀 뺨을 저도 모르게 때렸다.

얼마나 아팠을까? 입가에 맺힌 핏자국을 보니 그 순간 후회가 물밀듯이 올라왔다.

지금이라도 가서 빌고 싶었다.

떠나지 말라고.

제발 자신을 선택해달라고 추잡하게 빌고 싶었다.

어째서 모든 걸 다 준 자신을 선택하지 않았냐고 사기냐고 꽃뱀이냐고 따지고 싶었다.

아니야….

한결은 고개를 저었다.

다 부질없는 짓 같았다. 오늘처럼 과감한 행동을 보인 걸 보아…. 가망이 없어 보였다.

사귀는 것만 생각했지 헤어지는 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한결이었다.

도대체 이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이였을까? 오만했었다.

저처럼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을 거부하지 못 할꺼란 헛된 자만심이었다.

가슴에 커다란 불덩이가 점점 커져서 온몸을 다 불살라 버리고 있는 것 같았다.

한결은 침대 위로 쓰러지듯 누웠다. 어쩌면 아직 있을지도 모르는 유하에게 비굴하게 무릎 꿇고 잡고만 싶었다.

나는…. 선배 없이 못 살아. 이제 남은 인생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붙잡을 용기도 없어요. 오랜 짝사랑이 이뤄지면 얼마나 기쁜지 잘 알지만 축하는 못 해주겠어요. 나 말고도 다른 사람을 만나 행복할 선배를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프고 질투가 나요.

하지만….

선배가 행복하다면 나도 받아들여야 하는 게 진짜 사랑이지 않을까요?

내가 아니어도 선배가 행복하다면 그걸로 됐어요.

쏴아아아.

한결은 어느새 창밖에 내리는 빗줄기를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이제 나도 소유욕이 많이 줄었네. 철들었나 봐.

한결은 그동안 유하가 마음고생 많이 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툭 하면 떼쓰고 고집부리고 질투하고 괴롭혔다. 마음이 약하다는 걸 알기에 더 짓궂게 굴었다.

나는…. 단지…선배가 너무 좋아서 그랬어요. 우리 둘이 마음만 맞으면 충분히 어떤 난관이든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여전히 나 혼자 짝사랑하는 줄 몰랐어요.

이젠 아닌 줄 알았는데….

선배 눈치 없다고 늘 핀잔주었는데 나도 마찬가지였어요.

눈치 없이 두 사람 사이에 끼여서 미안해요.

정말로 내가 불쌍해서 못 이기는 척 사귄 거였나요?

한결은 유하에게 고백했을 때 들은 말이 생각났다. 장난꾸러기처럼 짓궂게 하던 그 말에 그때는 웃어넘겼다. 아니 그래도 좋았다. 어쨌든 사귀겠다고 답을 들었으니깐.

짧은 기간이었지만 너무 행복했어요.

그 추억으로 평생 살아갈게요.

한결은 당분간은 다른 누군가를 만날 생각이 들지 않을 것 같았다. 그 누구도 유하를 대신할 사람이 없을 것 같았다. 한결은 결국 포기하고 침대에 누워서 새벽까지 잠을 설쳤다.

끊임없는 빗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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