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정조작 / 오타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거, 받아주세요!”

 

붉은 리본과 꽃으로 장식된 검은 상자가 눈앞에 내밀어졌다. 상자를 건네는 여자의 붉게 달아오른 얼굴에는 간절함이 잔뜩 묻어있었다. 그러나 선뜻 받을 수 없는 선물에 목구멍 안으로 침음을 삼키며 거절했다.

 

“미안하지만, 난….”

“알아요! 그래도 받아주세요. 부담 갖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드리고 싶어서 드리는 거니까….”

 

당차게 말하면서도 상자를 내민 손은 안쓰러울 정도로 파르르 떨리고 있어 하는 수 없이 상자를 받아들었다.

 

“…고맙다.”

 

경직되고 터질 듯 붉었던 얼굴은 상자가 무사히 나의 코트 안자락으로 들어간 것까지 확인한 순간 한결 편안한 빛이 되었다. 감동에 젖어 눈을 반짝이는 여자가 활짝 웃었다.

 

“그럼 맛있게 드세요!”

 

허리까지 굽혀 인사를 한 여자가 종종 걸음으로 항상 서 있는 꽃가게로 사라졌다. 여자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본 뒤 천사의 몫으로 가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자연스럽게 스쳐 지나가는 길거리에는 방금과 같은 자신이 겪은 풍경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성에게 수줍게 상자를 내미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나치며 다이루크는 생각을 작게 입 밖으로 꺼냈다.

 

“밸런타인…인건가.”

 

 

 

 

5년 전 대륙 전체에 큰 인기를 끈 소설이 하나 있었다. 독특한 세계관이 등장하는 소설은 내용자체는 흔한 사랑이야기를 다룬 통속소설이었으나, 듣도 보도 못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기계문명과 티바트와는 너무나도 다른 문화가 등장한 다는게 달랐다. 그리고 사람들은 낯설지만 흥미로운 소설 속 세계관에 크게 열광하였으며, 책은 그 인기를 등에 업고 단시간에 전 대륙을 뒤흔들 정도로 팔려나갔다. 후에는 읽은 사람보다 안 읽은 사람이 더 희귀해지는 현상이 생기기도 했다.

 

‘밸런타인’은 그 소설 속에 등장하는 기념일이었다. 호감이 있는 상대에게 ‘초콜릿’ 이라는 것을 선물하며 마음을 전하는 1년의 단 한번뿐인 날. 읽어본 적은 없으나, 측근들이 말하길 소설에는 밸런타인을 제외하고도 많은 기념일이 등장한다고 했다.

 

그러나 유독 이 밸런타인이 티바트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데에는 특별한 두가지 이유가 있다고 했다. 바로 소설 속 비중과 초콜릿 때문이었다. 우선 책속에서 묘사되는 초콜릿은 짙은 갈색의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리는 달콤한 과자 같은 것이었는데, 이것이 티바트의 초콜릿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티바트의 초콜릿은 꽤나 고급품에 속하는 음식이었다. 그럼에도 소설이 유행함에 따라, 그리고 소설 속 주인공들이 이 밸런타인을 통해 무려 사랑을 확인했다는 스토리적으로 아주 중요한 사건 덕에 일부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2월 14일이 되면 소설 속 밸런타인을 따라하는 문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밸런타인을 챙기기 시작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자 이것의 시장가치를 파악한 장사꾼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덕분에 초콜릿은 단순화된 재료와 조리법으로 개량되어 훨씬 낮은 가격으로 판매되었고, 이전보다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간식이 되었다. 동시에 일부 사람들에게서만 유행했던 밸런타인은, 작년부터 대다수의 사람들이 챙기는 기념일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물론 다이루크는 그 흐름 속에서 제외된 사람이었다. 다이루크는 그 희귀하다는 ‘소설을 안 읽은 사람’ 중 하나였고, 아쉽게도 그의 연인 역시 그와 마찬가지였으므로 밸런타인같은 것은 챙기지 않았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나, 알 사람은 이미 다 아는 연인도 있기 때문에 밸런타인과는 연이 없을 줄 알았던 다이루크는 품 안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초콜릿상자에 조금 난감한 기분을 느껴야했다.

 

연인, 그러니까 케이아가 이런 일로 화를 낼 성격은 절대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괜히 알 수 없는 찝찝함에 다이루크는 잠시 상자가 있을 위치를 손으로 더듬어보았다. 그리고 흘긋 주변을 둘러보았다. 길가 곳곳에서 초콜릿을 파는 장사꾼들이 호객행위를 하는 중이었다. 하나 살까? 문득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다이루크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놀림이나 당하겠지….”

 

초콜릿을 건네면 고맙다는 말보다 너도 이런 걸 챙기냐며 히죽히죽 웃어댈 얼굴이 떠올랐다. 사랑하는 연인이긴 하나 자신을 놀릴 때의 그 얼굴은 참을 수 없을 만큼 얄미웠기 때문에 다이루크는 고민을 접어두고 시간을 확인하였다. 천사의 몫은 술집치고 일찍 문을 여는 편이었는데 오늘은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조금 늦어버렸다.

 

다이루크는 무의식중에 멈춰버린 발걸음을 다시 옮기기 시작했다.

 

 

 

 

“자네도 받았어?”

“아내가 아침에 안겨주지 뭐야.”

“부럽다, 부러워. 나는 그런 거 챙겨주는 짝을 언제쯤 만날 수 있으려나.”

 

푸하하, 하는 웃음소리가 크게 울렸다. 밸런타인이 되면 천사의 몫은 평소보다 조금 한적해졌다. 다들 이런 날까지 칙칙한 술집을 찾기보다는 다른 곳으로 놀러나가는 편을 선호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만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다이루크는 그 극소수의 사람들이 모인 조용한 술집에서, 손님들이 떠드는 잡담을 더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이른 시간에 모여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손님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자넨 단 거 못 먹지 않나?”

“그렇지. 그래서 나중에 딸아이한테 하나씩 주려고. 애들은 단거 좋아하니까. 아내도 그걸 알고 준거야.”

 

‘처음부터 이건 애가 차지할 거였어. 난 들러리였던 거지.’ 어깨를 으쓱하며 한탄하는 말에 술집에 다시금 큰 웃음소리가 퍼졌다.

 

이렇다 할 정보성이 없는 평범한 대화가 유달리 귀를 기울이게 되는 건, 날이 무척 평화롭고 한가롭기 때문일 것이다. 남자들의 입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초콜릿과 아이에 대한 자랑에 다이루크가 잠시 생각에 잠기듯 잔을 정리하던 손이 멈췄다.

 

지금은 그다지 단 것을 선호하지 않는 편이 되었으나, 생각해보면 자신도 어렸을 때는 꽤나 단 것을 좋아했었던 게 떠올랐다. 그 중 초콜릿을 가장 좋아했었던 것도.

 

남들에겐 어떨지 몰라도 다이루크에게는 초콜릿은 흔한 간식이었다. 없다면 그것을 대신할 것들은 얼마든지 넘쳐났으니 먹지 못하다고 아쉽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랬던 자신이 어느 순간부터 아델린에게 크게 잔소리를 들을 정도로 초콜릿을 찾기 시작했었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일을 위해 벗어둔 옷과 그 옆에 나란히 놓인 선물 받은 초콜릿 상자로 향했다. 날일이 없을 텐데도 상자 속의 초콜릿의 단 향이 갑자기 코끝을 스치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없는 입안에도 조금씩 단 맛이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돌연 잊고 살았던 오래전의 기억이 몽글 피어올랐다. 단 한사람에 의해 혀가 아릿할 정도로 달콤한 맛이 중독되었던 그 때가.

 

 

-

 

 

내 삶에는 특별한 재미가 없어. 반복되는 일상도 지겨워.

 

혹자는 이제 고작 8살 먹은 꼬마가 하기에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이루크는 자신이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을 떨쳐낼 수 없었다. 어쩌면 부족함 없이, 대부분의 것들을 넘치게 갖고 자란 부잣집 도련님의 배부른 투정이라고 치부될지 몰라도 어쨌든 다이루크는 그랬다.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주변에서 알아서 다 챙겨주고, 기초 소양을 가르치기 위해 찾아오는 교사들의 입바른 칭찬을 매일같이 듣는 생활을 보내다 보면 누구나 같은 생각을 할 것이라고 다이루크는 장담했다.

 

오늘 하루도 비슷하게 시작했다. 다른 점이라면 출장을 떠난 아버지가 아직 돌아오지 않아 아침식사를 혼자 외롭게 했다는 것과 그나마 오늘은 일주일 수업 중 가장 재미있는 검술수업이 있다는 것뿐이었다.

 

 

 

 

오후의 햇살은 뜨거웠다. 이마는 한참 전부터 땀방울이 맺히기가 무섭게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고, 입에서는 가쁜 숨이 삼켜지기도 전에 내뱉어지고 있었다. 끊임없이 움직인 팔은 몹시 고단했지만 이제 서서히 손에 익어가는 검의 감각이 가슴을 설레게 해 고통마저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그저 달콤한 말밖에 할 줄 모르는 다른 선생들과 달리, 입에 쓴 소리와 사정을 봐주지 않는 혹독한 훈련을 시키는 검술 선생이 있는 이 시간은 다이루크에게 몇 없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빨리 끝내고 싶어서 남몰래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버티는 다른 수업과는 달리 검술 수업은 끝나는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안타까울 정도였다. 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 지루해지니까. 되도록이면 그 시간이 최대한 늦게 왔으면 좋겠다고 항상, 그리고 지금 이순간도 간절하게 바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흐르는 시간을 잡을 수는 없었다.

 

“동작 그만. 오늘은 여기까지.”

 

머리 위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고, 다이루크는 못내 아쉬운 한숨을 뱉으며 휘두르던 검을 멈추고 검술 선생을 바라보았다. 근엄한 분위기를 풍기는 중년의 남성은 다이루크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꿰뚫어보듯 훑어보더니 이내 시원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날이 발전해 나가는 군요. 역시 재능이 있습니다. 물론 아직 걸음마 수준이긴 하지만 이대로만 하다보면 분명 무언가 성과는 있겠지요.”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솔직한 감상과 함께 검술 선생은 짧은 목례를 끝으로 미련 없이 돌아섰다. 가식 없는 점이 마음에 들었지만 이렇게 할 말만 하고 수업이 끝나면 곧바로 사라지는 그의 단호함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불어오는 바람이 땀을 훔치고 열기를 식혔다.

 

연무장 겸용으로 쓰이는 마당에는 이제 다이루크 혼자만이 남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미련 흘러넘치는 눈을 하고 아까보다 조금은 느슨한 동작으로 검을 몇 번 더 휘둘러보았다. 붕붕,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기분이 좋아 다시금 몸에 열기가 돌기 시작할 때였다.

 

“앗, 차거.”

 

자세를 다시 바로 잡고 검을 내리치려는데, 이마 정중앙에 톡 하고 떨어진 물방울이 떨어졌다. 고개를 쳐들자 방금까지 푸르다 못해 시리던 하늘이 어둑해져있었다. 먹을 잔뜩 머금은 구름이 빠르게 하늘을 덮었고, 한 방울 떨어지던 빗방울들이 투둑, 둔탁한 소리를 내며 빠르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내 하늘에서부터 귀가 따가울 정도로 요란한 장대비가 쏟아졌다.

 

“도련님, 다이루크 도련님!”

 

멀리서 저를 찾는 아델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쏟아지는 빗줄기와 손 안의 검을 번갈아 본 후 애타게 찾는 목소리를 향해 힘없는 발걸음을 옮겼다. 요즘 느끼는 유일한 즐거움이 진짜로 끝이 나는 순간이었다.

 

 

 

 

“지나가는 소나기일줄 알았는데, 큰일이네요.”

 

‘하필 클립스 어르신이 돌아오시는 날에 이런 큰 비가….’ 비에 젖은 다이루크를 씻기고 옷까지 입힌 후 창밖을 확인한 아델린의 얼굴에 근심이 한가득 이었다. 소파에 앉아 다리를 흔들며 책을 읽던 다이루크가 그 목소리를 따라 창밖을 보았다. 억세게 내리는 빗줄기가 창문을 사정없이 두들기고 있었다. 창문 너머 멀리 보이는 언덕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 오늘 오실까?”

“글쎄요…. 날씨가 이래서 장담할 수가 없네요. 아쉬우세요?”

 

아버지를 기다리는 어린 소년을 바라보는 눈빛이 따스했다. 다이루크는 고개를 저었다.

 

“못 오시면 어쩔 수 없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지만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기운 없는 목소리였다. 그에 아델린이 애틋한 얼굴로 위로해왔다.

 

“클립스 어르신은 도련님을 많이 사랑하시니까, 만약 오늘 못 오시더라도 내일은 반드시 돌아오실 거예요.”

“응. 알아.”

 

아델린의 손이 나의 뒷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그 기분 좋은 손길에 잠시 눈을 감고 있는데 아래층에서 큰 소리가 났다.

 

“주인님이 오신다!”

 

우렁찬 남자의 목소리에 다이루크가 소파에서 뛰어내려 창밖에 섰다. 남자의 말대로 멀리서 한 무리의 마차와 말들이 저택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오셨다.”

“오셨네요. 얼른 어르신을 맞이하러 가볼까요?”

 

고개를 끄덕이며 아델린이 내미는 손을 잡고 1층으로 향했다. 저택의 사용인은 이미 재빠르게 현관 앞에서 자신들의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 역시 그 끝에 서 아버지를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빗줄기와 함께, 아버지와 수하들이 들어왔다.

 

“어서오십시….”

“인사는 됐고, 거기 자네 이리로 와서 이 아이를….”

 

다급한 목소리로 인사를 막은 아버지가 가장 근처의 남자를 불러 품안에 자루를 넘겼다. 얼결에 자루를 받아든 남자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루, 아니 자세히 보니 자루 비슷한 낡은 로브 속의 무언가를 살폈다. 로브의 모자 속을 본 남자의 얼굴이 당황함으로 굳어져있었다. 호기심에 까치발을 들어 확인해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보일 위치가 아니었다, 그러는 사이 설명을 바라는 남자의 눈빛에 아버지가 조금 화가 난 듯도 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는 길에 데려온 아이야. 세상에 이 날씨에 저 차림으로 내내 비를 맞고 있었던 것 같아. 내가 다가가자마자 쓰러졌는데 그대로 버려두고 올 수도 없어서 데려왔네. 그러니까 얼른 몸을 녹일 수 있도록 목욕이라도….”

“아, 네!”

 

자초지정을 들은 남자가 서둘러 근처에 있는 하녀 몇몇을 데리고 욕실로 사라졌다. 욕실로 향하는 방향 쪽에 있던 내 앞을 그들이 스쳐지나갔다. 남자와 하녀들이 지나간 자리에 진한 물비린내가 났다. 기회를 노려 안을 보려던 것은 실패했지만 로브 사이로 빠져나온 앙상한 다리는 볼 수 있었다. 신발조차 신지 못한 상처투성이의 발은 강렬한 자극이었다.

 

잠시 넋을 놓고 서있는데 아버지가 먼저 내게 다가왔다.

 

“잘 있었니? 다이루크.”

“아버지.”

 

다정한 목소리에 습관처럼 굳어진 움직임으로 아버지의 목에 팔을 감아 안았다. 등 뒤에서 ‘옷이….’ 하는 아델린의 마른 비명이 들렸지만 부자의 재회 인사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크게 숨을 들이 쉬자 아까 맡았던 물비린내와 아버지의 몸에서 항상 나는 향기가 뒤섞여 맡아졌다.

 

눈을 감고 그 향을 즐기는데 아버지의 두터운 손이 내 뺨을 쓰다듬었다. 눈을 뜨고 나와 같은 붉은 눈을 마주보았다. 애정이 가득한 눈에는 어딘가 애틋한 감정이 녹아있었다. 방금 그 아이 때문인 걸까? 아버지의 슬픈 눈에 조용히 더 세게 아버지의 목을 끌어안았다. 내 등을 안은 아버지의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오랜 포옹으로 젖어버린 옷을 다시금 갈아입고 아버지의 방으로 향했다. 노크를 하자 들어오라는 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졌다. 방 문을 열자 어느새 편한 옷차림으로 갈아입은 아버지가 의자에 앉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니?”

“아까 그 애요.”

 

허벅지를 톡톡 치는 손을 따라 그곳에 엉덩이를 걸쳐 앉으며 말했다. 아버지의 눈이 의문을 띄었다.

 

“그 애 어떻게 하실 거예요?”

“흠, 부모를 찾아주는 게 최선이겠지만…. 안타깝지만 그게 쉽지는 않을 것 같구나. 아무래도 그 아이의 부모는 몹쓸 사람들이었던 모양이야.”

 

내가 고개를 가로 기울이자 아버지가 자세한 설명을 하는 것이 내키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이의 몸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단다. 비단 비를 맞아서만이 아니라 겉모습이…. 아무튼 이런 날씨에 애를 그 허허벌판에 혼자 두고 찾지도 않고 방치해 뒀으니 굳이 길게 말할 필요도 없지. 그런데도 애가 쓰러지면서 아비를 찾더구나. 안됐어.”

 

씁쓸한 목소리였다. 지금쯤 욕실에서 나와 2층의 빈 방 어딘가로 옮겨졌을, 얼굴도 모르는 아이가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그럼 여기서 같이 살게 되는 건가요?”

“그 아이가 그러고 싶다면. 마침 몇 달 전 아들을 장가보내고 적적해 하던 요나스에게 맡기면 어떨까 싶구나.”

“그렇구나.”

“혹시 내 결정이 맘에 들지 않는 거니?”

 

내심 나의 눈치를 보는 듯 한 기색의 아버지에게 고개를 저었다. 마음에 들고 안 들고 따질게 있을까. 아버지의 처사는 옳은 일이었다.

 

로브 사이로 삐져나온 앙상한 다리 때문이었을까. 나 역시도 그 아이가 이 곳에서 잘 지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이런 것을 흔히 동정심이라고 하는 거겠지. 짙은 물비린내가 아직도 나는 것 같았다.

 

“아니요.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중이예요.”

“그게 궁금해서 온 거였니?”

“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아버지가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착하구나. 만약 그 아이가 이곳에 머물게 된다면 잘 보살펴주렴.”

“걱정 마세요.”

 

나의 대답에 아버지의 대견하다는 웃음소리가 귓가에 퍼졌다. 그 웃음을 한 귀로 흘리며 문밖을 주시했다. 어디에 있는지 조차 모르는 존재에 대한 동정과 호기심이 이유를 알 수 없이 커져만 갔다.

 

 

 

 

사실 조금은 신선한 충격이었을지도 모른다. 세상 밖에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존재할 것이고 폭풍우와 함께 찾아온 그 아이도 그 중 하나일 텐데, 눈으로 직접 본 참담함이 잊혀 지지가 않아서였던 것 같다. 밤새 조금 짙은 피부색을 가진 마른 다리와 까지고 터진 상처가 난 발이 아른거렸다.

 

눈을 뜨자마자 준비를 서두르고 식당을 찾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평소답지 않게 요란하게 발을 구르며 계단을 내려와 식당에 도착하자마자 눈동자만 굴려 주변을 살폈다. 가장 안쪽 상석에는 먼저 온 아버지가 앉아있었고, 그 바로 옆인 내 자리는 텅 빈 채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없었다.

 

왠지 모를 허탈감이 들었다. 한껏 부풀었다 돌연 톡 터져버린 비눗방울마냥 허무했다. 조절 되지 않는 얼굴 근육을 애써 풀며 자리에 가 앉았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고 태연하게 포크를 들어 아무거나 집히는 것을 입에 밀어 넣었다. 그 때,


“그 애라면 아파서 방에 있단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나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저도 모르게 포크를 내려놓고 되물었다.

 

“아파요?”

“비를 맞은 탓에 새벽 내내 고열에 시달렸다더구나. 일찍 의원을 불러 진료를 받고 약을 지었단다.”

 

고열이라니, 저절로 고개가 지나쳐온 계단 쪽을 향했다.

 

“발소리가 크길래 무슨 일인가 했더니, 많이 궁금했나 보구나.”

“많이 아프대요?”

 

속내를 들켜 머쓱한 기분을 감추며 애꿎은 음식을 콕콕 찔렀다. 내 질문에 아버지가 잠시 고민을 하는 듯 턱에 손을 가져다댔다.

 

“의원이 다녀갔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지어준 약을 잘 먹고 푹 쉬기만 한다면 분명 나을 테니, 곧 만날 수 있을 거야.”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애정이 묻어나는 눈빛이 나를 향해 있었다.

 

“이제 그만 식사나 하자꾸나. 이러다 애써 준비한 게 다 식겠어.”

“네.”

 

허공에서 방황하던 포크를 움직이며 본격적으로 식사를 이어나갔다. 어제 미처 다 나누지 못한 대화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머릿속 한구석을 차지하는 호기심은 2층의 빈방을 헤아리고 있었다.

 

 

 

 

“여긴가?”

 

식사시간 내내 고민했던 아이가 있을 방으로 추정되는 방문 앞에 섰다. 2층에 있는 내 방을 제외해도 빈방은 많았다. 착각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밤사이에 들렸던 바쁘게 오갔던 발소리는 아이의 상태를 보살피던 사용인들의 것이었을 것이다. 잠결에 들었던 발소리와 오늘 아침 방을 나설 때 언뜻 보았던 오고가는 하녀들의 모습으로 찍어낸 방은 내 방과 빈방 하나를 두고 떨어져있는 방이었다.

 

곧바로 문을 열기보다는 나무문에 귀를 대고 소리를 듣기로 했다. 숨을 죽이고 문 안쪽에서 들릴 작은 소리하나 놓치지 않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거기서 뭐하세요, 도련님?”

 

들려야할 곳에서는 안 나고 들리지 말아야할 곳에서 난 소리에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아델린이 서있었다. 의아한 얼굴을 한 그녀의 손에는 작은 대야가 하나 들려있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물수건이 있을 거라고 추측되는 대야를 확인하자, 시선이 절로 문 쪽을 향했다. 이곳이 맞았던 모양이었다.

 

“여기에 걔가 있는 거야?”

“어제 어르신이 데려오신 아이라면 맞아요.”

“그렇구나.”

“무슨 일 있으세요?”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데….”

 

천천히 몸을 돌려 문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조금 간절한 눈으로 아델린을 바라보았다.

 

“나 들어가 봐도 돼?”

 

아델린은 내가 가끔 보이는 천진한 아이 같은 모습을 좋아했다. 무리한 부탁을 할 때 마다 통했던 방법을 사용한 나는 기대감에 쿵덕거리는 가슴을 숨기며 표정 연기를 멈추지 않았다. 나를 내려다보던 아델린이 얼굴이 미소가 번졌다. 성공했구나. 싶은 순간,

 

“그건 안 됩니다.”

“어째서.”

 

올라가려던 광대가 푹 꺼졌다. 간절한 눈빛을 지우고 약간 불만스러운 얼굴을 해보이자 아델린이 단호하게 말했다.

 

“어르신의 명령이에요. 혹시나 옮아서 도련님까지 아프면 큰일이니까요.”

“아주 잠시만인데 안될까.”

“안돼요.”

 

고개까지 저으며 말하는 아델린의 완고함에 한숨이 튀어나왔다.

 

“도련님답지 않게 애교까지 부리시고…. 대신 아이가 나으면 제가 어르신보다 도련님께 가장 먼저 알려드릴 테니 그걸로 참아주세요.”

 

썩 맘에 차는 제안은 아니었지만 별 수 없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니 아델린이 습관처럼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곧 있으면 레니부인이 오실 시간이네요. 얼른 가서 준비해야지요.”

 

역사를 가르치는 레니부인을 언급하는 아델린에 다이루크의 미간이 살풋 찡그려졌다. 라겐펜더를 드나드는 여러 교사 중 가장 열의가 넘치는 교사가 바로 레니부인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열의에 비해 수업자체가 따분한 내용을 다루는 과목이기 때문에 다이루크는 벌써부터 지루함에 몸서리가 쳐졌다.

 

아버지가 돌아오고, 아버지가 데려온 낯선 손님에 잠시 들떴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래, 이게 내 일상이었지. 앞으로 몇 분 후 있을 예정된 수업시간을 떠올리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아델린을 지나쳐 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수업 열심히 들으세요!”

 

웃음기가 섞인 아델린의 목소리가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

 

 

“밝을 때가 안 된다면 어두울 때를 노리면 돼.”

 

모두가 잠들 시간까지 버티느라 따끔거리는 눈을 부비며 침대에 내려왔다.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도록 문고리를 돌려 열자 컴컴한 복도가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복도 양 끝까지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 한 후 발소리를 죽여 목적지를 향했다.

 

멀지 않은 거리니 문 앞에 도착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아침때와 마찬가지로 귀를 기울여 문 안쪽의 소리를 들었다. 그 어떠한 말소리도 움직임도 들리지 않았다. 다른 하녀들이라든가 하는 사람이 없는 확률이 높아졌다. 용기를 얻은 손이 과감히 문고리를 잡았다.

 

조금씩 두근거리는 가슴 속 심장소리와 반대로 방 문은 그 흔한 끼익, 거리는 소리조차 내지 않고 매끄럽게 열렸다. 2층 방의 창문의 크기는 다 같을 텐데도 유달리 달빛이 잘 드는 방이었다. 그래서 더욱 낯선 느낌이 물씬 풍겼다. 사물의 윤곽이 어스름하게 보이는 방 안은 당연하지만, 사용하지 않는 방치고는 있을게 다 있었다. 오랫동안 빈 방들이었기에 혹시나 했지만 꾸준히 관리를 했었던 것 같았다.

 

오랫동안 주인이 없었던 방을, 심지어 이 시간에 들어선 다는 것에 약간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눈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대충 방 전체를 둘러보는 것이 끝나자 시선은 곧장 한곳으로 향했다. 이곳에 찾아오기로 마음을 먹게 한 원인이 누워있을 침대를 향해. 소리가 나지 않도록 문을 닫고 아이가 누워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이불에 묻힌 작은 몸이 달빛을 받아 은은한 빛을 발하는 착각이 일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아이에게로 다가갈수록 이상하게 심장소리가 커졌다. 그리고 이윽고,

“사람이 맞기는 했네.”

 

그토록 궁금했던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몽환적인 달빛으로 가득 찬 방안, 창문 아래 침대에는 작은 아이가 누워있었다. 밝은 달빛이 환하게 비춘 얼굴은 상상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앙상한 다리만 보고 여윈 얼굴을 상상했건만 잠든 아이는 아직 어린아이답게 통통한 볼을 가지고 있었다. 모르는 사이에 바짝 긴장해 들어가 있던 몸에 힘이 조금 느슨해졌고 고동소리도 잦아들었다.

 

안정감을 찾은 심장에 조금 더 가까이 아이에게 다가갔다. 자세히 들여다 본 아이의 얼굴에는 얼마 전에 생긴 것 같은 잔 생채기가 있었다. 상처는 약을 바른 듯 약간 번들거렸고 크게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왠지 아파 보여 안쓰러운 마음이 들던 차였다.

 

“으응….”

 

아이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흠칫 놀라 주변을 살폈지만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다시 아이를 보는데 땀을 심하게 흘려 이마에 달라붙은 밤하늘을 닮은 검푸른 색의 앞머리가 눈에 띄었다. 아버지 말로는 약을 먹었으니 괜찮아질 거라고 했는데, 아이의 상태는 한눈에 봐도 썩 좋지 못했다.

 

작은 입이 벌어지고 다물릴 때마다 힘겨운 쌕쌕 소리를 내었다. 허벅지 어디 즈음에서 움찔거리던 손을 조심히 들어 답답하게 들러붙은 앞머리에 가져다대었다. 더워 보이니까 걷어주기 위해 내민 손이 이마에 닿는 순간이었다.

 

“뜨거워.”

 

손끝으로 후끈한 열기가 끼쳤다. 손을 떼어낼 정도는 아니었지만 책 속에서 보았던 끓어오른다는 표현이 이때 쓰는 거라는 것은 확실히 알았다.

 

“많이 아픈 걸까….”

 

이름도 모르는 아이에게 왜 이렇게 신경이 쓰는 것인지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다만 처음 아버지의 품에 낡은 자루마냥 들려있던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눈앞에서 짙은 물비린내를 남기며 사라진 그 순간부터 계속 신경 쓰이고 보고 싶었다. 동정심과 호기심이 뒤섞인 관심.

 

야밤에 벌이는 일탈로 그 호기심을 해소하면 끝날까 싶었는데, 여전히 아이에게 꽂힌 눈길을 거두기 힘들었다. 고열에 시달리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끙끙 앓는 얼굴을 향해 나직하게 속삭였다.

 

“아프지 마.”

 

고열에 시달리는 아이에게 전해질리 없는 위로겠지만 진심을 담아 말했다. 앞머리를 치워주려다가 이마까지 짚어버린 손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던 차였다. 슬슬 손을 떼려는 그 순간, 유난히 긴 속눈썹이 들썩거렸다. 그리고 아차 하는 순간 아이의 눈꺼풀이 천천히 열렸다.

 

“아.”

 

창문으로 새어나오는 달빛과 같은 색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은 채로 잘게 떨리고 있었다. 위치상 나를 보는 것도 같으면서 그 너머의 무언가를 보는 것처럼 아득했다. 아이의 눈에는 슬픔이 가득 차있었다. 왜 저런 눈을 하는 거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처음 느껴보는 깊고 어두운 감정에 약간의 충격에 빠져 아무것도 못하고 몸이 잠시 굳어버렸다.

 

“아버지….”

 

굳어버린 몸을 깨운 것은 아이의 목소리였다. 쉬어버린 음성은 무척이나 연약했다. 꺼질 것 같은 한숨 같았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말을 걸었다.

 

“괜찮아…?”

그 때였다. 몽롱했던 눈동자가 내 목소리에 반응한 듯 나를 보았다. 방금 전과 달리 또렷한 시선으로, 그 순간 공간을 메운 공기가 잠시 사라진 것 같이 숨이 삼켜졌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슬픈 눈동자는 애정을 갈구하는 듯 허덕이고 있었다. 나보다도 어려보이는 아이의 눈에서 저런 감정이 나올 수 있는 것일까, 아까의 충격이 우습게 느껴질 만큼의 강한 충격이 뒤통수를 가격했다.

 

멈춰버린 호흡이 다시 돌아온 것은 금방이었다. 곧바로 차오르는 눈물 덕에 다시금 눈동자가 일렁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여태껏 본적 없는 예쁜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가 금세 흐려졌다. 허용범위를 넘어선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흘렀다. 그와 동시에 열려있던 눈꺼풀이 닫히며 눈동자가 모습을 감추어버리고 말았다.

 

진한 여운을 남기는 찰나의 순간이었다. 달빛을 닮은 눈동자가 모습을 감추자 방안을 밝히던 달빛도 구름에 가려져 사그라들었다. 이제는 완연히 깜깜한 어둠에 잠긴 방안은 고요해졌다. 그러나 적막한 방안과 달리 잠잠해졌던 고동소리만이 조금씩 고개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쾅쾅, 심장에서 시작된 북소리를 닮은 요란한 소리가 귓가에 퍼져나갔다. 이상하게, 정말 이상하게 심장이 조이듯 아파왔다.

 

 

-

 

 

아버지가 저택에 있는 날이면, 매일 같이 아무렇지 않게 드나들던 서재 문이 오늘따라 거대해보였다. 방금까지도 아침 식사를 함께 나누었던 아버지의 얼굴을 보는 것뿐이건만, 왜 이렇게 망설여지는지 모르겠다. 다이루크는 문 앞에 서서 지난밤의 여파를 고스란히 간직한 심장부근을 한손으로 부여잡았다.

 

깊게 심호흡을 했다. 잠시 뒤 다시 평소처럼 당당하게 고개를 쳐든 다이루크가 서재 문을 두들겼다. 허락을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문 안으로 들어섰다.

 

 

-

 

 

“좋은 아침이에요.”

“그래, 잘 잤니?”

“네.”

 

흔한 아침 인사를 나눈 후 자리에 앉자 자연스럽게 식사가 시작 되었다. 아침 식사시간의 대화는 주로 간밤의 안부와 오늘 있을 일정에 대한 것들이었다. 짧은 대화가 몇 번 오갔다. 그 때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식당 쪽으로 다가오는 두 개의 발소리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갔다.

 

그곳에는 언제나 같은 모습의 아델린이 공손한 자세로 서있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건가 싶어 바라보는데 아델린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그녀를 따라 그곳에 눈을 두니 치맛자락 옆으로 검푸른 머리카락이 빼꼼 튀어나와있었다. 설마, 저절로 눈이 커지기 시작한 것을 느꼈다.

 

“나와서 인사하세요.”

 

다정한 목소리가 달래듯 말하자, 치마 뒤에 숨은 무언가가 우물쭈물 하다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었다. 쥐고 있던 포크가 손에서 떨어져 나가 식탁에 떨어져 잠시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드디어 나았구나.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혹시 낫지 않는 건가 싶어 걱정이 됐었는데, 다행이었다.

 

그리고 약간의 배신감을 느끼며 아델린을 쳐다보았다. 깨어나면 내게 가장 먼저 알린다며, 원망 가득한 내 눈빛을 본 그녀가 조금 난감한 얼굴로 웃어보였다. 살짝 기분이 상했지만 아델린의 옆에서 애매한 자세로 서있는 아이를 보자 그런 생각도 금세 사라졌다.

 

말끔한 차림의 아이는 여전히 핼쑥하긴 했지만 그날 밤 보았던 모습보다 훨씬 건강해진 모습으로 나와 아버지 앞에 서있었다. 불안한 듯 한시도 쉬지 않는 두 손이 계속 꼼지락 거리고 있었다. 푹 수그린 머리 덕에 얼굴 대신 정수리만이 보였다. 머리카락 사이로 살짝 드러난 귓바퀴는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얼굴이 보고 싶어 눈을 가늘게 뜨고 아이를 주시하는데 순간, 아이의 눈과 마주친 것 같았다. 그러나 재빨리 다시 바닥을 향하는 시선 덕에 착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기가 움직이는 소리가 멈추자 식당은 정말이지 조용해졌다. 그 침묵을 깬 것은 아버지였다.

 

“몸은 좀 어떠니?”

 

친절한 목소리에 아이가 다급하게 고개를 쳐들고 말했다.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잘게 떨렸고 말을 꽤나 더듬었다. 작은 아이의 목소리는 그 몸집만큼이나 작고 또 안쓰러울 정도로 연약했다.

 

“보, 보살펴주신 덕분에 많이 괜찮아졌습니다. 감사합니다. 크, 클립스 어르신….”

 

잔뜩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저렇게 떨 필요가 없는데, 불안한 시선과 붉게 달아오른 아이의 얼굴에 달라붙은 시선이 좀처럼 떨어지지 못했다. 어쩐지 당장 달려가 달달 떨리는 손을 잡아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이리로 와서 앉으렴.”

 

인내심을 가지고 충동을 꾹 참았다. 그 사이 아버지가 아이에게 자리를 권했다. 아버지의 또 다른 옆자리이자 나의 맞은편을 가리키며 말하는 아버지에 아이가 놀라 되물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아이를 불렀다. ‘이리로.’ 하는 목소리에 아이가 쭈뼛쭈뼛 마련된 자리로 가 앉았다. 아이가 자리에 완전히 엉덩이를 붙이자 기다렸다는 듯 아이를 위한 음식이 차려지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누워만 있던 환자를 배려해 나와 아버지의 것과는 조금 다른 소화에 편한 음식들 위주였다. 아이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떨림은 조금 잦아든 모양새였다. 아버지가 그런 아이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니?”

“…케이아, 입니다.”

 

케이아, 아버지를 바라보며 떠듬떠듬 말하는 케이아의 이름을 속으로 계속 곱씹었다. 아버지의 질문은 계속 되었다.

 

“그래, 이런 질문이 너에겐 굉장히 무례할 수도 있겠지만. 물어보지 않을 수 가 없다는 점을 이해해줬으면 좋겠구나.”

“괜, 찮아요. 뭐든 물어보세요.”

“부모님이 어디 계시는지 아니?”

 

아버지의 질문에 케이아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케이아가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말로 하는 대답보다 훨씬 정확한 대답이었고, 조금 못됐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속으로 약간의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였다. 하얀 이에 깨물린 입술이 아파보였기에 들떴던 마음이 한순간에 가라앉아버렸다. 입술을 깨무는 것을 그만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케이아를 바라보는데 고민하듯 턱을 쓰다듬던 아버지가 또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럼 갈 곳은 있니?”

 

또다시 대답 대신 고개가 저어졌다. 케이아의 얼굴이 조금 우울해졌다. 식탁 위가 조용했다. 케이아는 잠시 무언가 고민하듯 시선을 좀처럼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그러나 이내 무언가 결심하듯 고개를 쳐들었다. 하도 씹어 대서 살짝 부푼 아랫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잠깐 뻐끔거리며 뜸을 들이던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오려던 차였다.

 

“크, 클립….”

“케이아, 내 아들이 되는 건 어떠니?”

 

질끈 눈을 감고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려던 케이아가 아버지의 발언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드디어 나왔다. 속으로 안도를 하며 아버지와 케이아를 번갈아 보았다. 케이아의 눈이 당혹스러운 빛을 띠었다. 동그랗게 떠진 눈매가 살짝 떨렸다.

 

“나는 네가 우리 집에서, 내 아들로서 지냈으면 좋겠는데.”

 

보기 좋은 호선을 그리며 아버지가 따스한 시선으로 케이아를 바라보았다. 말문이 막혀 멍청히 입만 벌리고 있던 케이아의 눈에 서서히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일렁이는 회색 눈동자에 며칠 전 새벽에 보았던 눈물이 떠올랐다. 지끈, 또다시 가슴이 조여 왔다.

 

“고, 고맙습니다….”

 

넘쳐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케이아가 말했다. 발음이 뭉개져 엉망진창이었지만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계속해서 닦아내도 흐르는 것을 멈출 줄 모르는 케이아의 눈물을, 아버지의 손이 훔쳐냈다. 나는 아버지의 손을 축축하게 적신 눈물에 시선을 고정 시켰다. 자리가 가까웠다면 내가 닦아줄 수도 있었는데 묘한 아쉬움이 들었다.

 

“오늘부터 넌 케이아 라겐펜더고 우리의 가족이 되었단다. 앞으로 잘 지내보자꾸나, 케이아.”

 

케이아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게 한참을 우는 케이아를 바라보던 아버지가 케이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눈물을 닦아주던 그 손이었다.

 

“그만 울고, 좀 먹으렴. 겨우 일어났는데 또 쓰러질라.”

“네….”

 

훌쩍이며 눈물을 삼키는 케이아가 힘겹게 차려진 음식을 먹었다. 음식을 씹다가도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삼키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는데 문득 시선이 마주쳤다. 촉촉이 젖은 회색 눈이 곧바로 나를 스치듯 비껴나갔다. 조금 더 보고 싶었는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케이아는 식당에 오래 있지 못했다. 접시를 채 반도 비우지 못했는데 몹시 지친 기색을 눈치 챈 아버지의 배려로 케이아는 먼저 자리에 일어날 수 있었다. 아델린의 손을 잡으며 걸어가는 다리가 잠깐 휘청 거렸다. 진이 다 빠진 모양이었다. 천천히 식당 밖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한참이나 걱정스럽게 바라보는데 아버지의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이제 만족스럽니?”

 

시선을 돌려 아버지를 바라보자 아버지 역시 나를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 대답했다.

 

“네. 부탁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너무 일찍 철이 들어 바라는 것 없던 아들이 비장한 얼굴로 한 부탁이니, 아비로서는 당연히 들어줘야지. 물론 그것과 별개로 나 역시도 이 편이 조금 더 마음이 편하구나.”

 

아버지의 시선이 잠시 빈 케이아의 자리를 향했다. 나 역시 그 빈자리를 보았다.

 

 

-

 

 

케이아가 처음 이곳에 온 날부터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외로워 보이던 그 아이의 가족이 되어주기로 결심했던 그날의 다짐에 비해, 케이아와 거리를 좁히는 일은 생각 이상으로 어려웠다. 어쩐지 나를 어려워하는 케이아는, 내가 먼저 말을 걸기 위해 다가가면 빠르게 눈치를 채고 멀리 달아나기 바빠 보였다.

 

언제가 한번은 붙잡으러 쫓아가려 해봤지만 그럴수록 도망치는 발걸음만 빨라질 뿐이었기에 뒤쫓기를 그만 두고 그저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나를 피해 다니는 케이아에, 나는 여전히 케이아와 제대로 된 말을 섞지도 못했다. 약간의 조바심이 났다. 어째서일까, 이유를 모른 채 바짝 경계를 곤두세우는 케이아의 모습이 내심 서운하면서도 전의를 불태우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섣부르게 나서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 것을 몸소 체험해봤기에 하는 수 없이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케이아를 지켜보기로 했다. 왜 나를 피하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알고 싶었다.

 

매일 매일을 먼발치에서 케이아를 바라보았다. 그러다보니 케이아의 조금 이상한 행동이 눈에 띄었다. 이제는 어엿한 라겐펜더의 일원 중 하나가 되었음에도 케이아는 항상 어딘가 불안해보였다. 적어도 이 집 안에서는 케이아를 불안하게 할 요소가 전혀 보이지 않는데도 말이다.

 

케이아는 종종 궂은 작업을 하는 사용인들 주위를 맴돌며 무언가 할 일을 찾는 듯 보였다. 바쁘게 움직이는 어른들 사이서 작은 몸을 비집고 들어가 수확한 포도바구니를 옮기려고 한다든가 수확을 돕기 위해 위험한 물건에 서슴없이 손을 대려고도 했다. 다행히 주변의 사용인들이 케이아를 얌전히 돌려보냈지만 케이아는 여전히 미련을 보였다.

 

그리고 나는 마치 안달 난 새끼 강아지 같은 모습이 그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하녀들이 빨랫감을 가지고 가는 것을 쫓는 케이아의 뒤를 조용히 밟았다. 바쁜 어른들의 빠른 걸음을 쫓느라 나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한 케이아의 어깨에 그때 처음으로 손을 대어보았다.

 

내 손에 화들짝 놀란 케이아가 눈을 부릅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눈 안에 내 모습이 담겨있었다. 잠시 굳어있던 케이아가 이내 도망가려는 듯 발을 구르려는 게 보였다. 혹여 또다시 놓칠까봐 서둘러 입을 열었다.

 

“하지 마.”

“?”

“아무것도 하지 마.”

 

내 말에 케이아가 도망가려던 것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얼굴에 한가득 의문이 어려 있었다. 나는 그런 케이아의 이해를 돕기 위해 멀어져가는 하녀들과 케이아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네가 굳이 저런 걸 할 필요는 없다는 소리야.”

“….”

 

내 말을 들은 케이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안달복달 난 모습은 사라졌지만 대신 침울해진 케이아는 내 말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나를 지나쳐 왔던 길의 반대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작은 등이 잔뜩 움츠러들어있었다. 잘은 몰랐지만 무언가 잘못된 기분이 들어 케이아를 잡기 위해 다가가는데, 마침 오늘의 오후 수업을 맡은 중년의 남자가 나타나 내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다이루크 도련님.”

“아.”

 

벌써 시간이, 나를 기다리는 교사에게 시선을 주는 사이 케이아가 조금 더 멀어져갔다.

 

“도련님?”

 

정원의 뒤뜰로 향하는 듯 뒷모습이 처량해보였지만 다시금 말을 붙여오는 교사에 의해 더는 붙잡을 수 없었다. 결국 얼마 안가 케이아는 완전히 모습을 감춰버렸고, 나는 잠자코 수업을 들으러 가는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게도 그날의 수업에는 전혀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 날 이후 케이아는 나를 전보다 더 멀리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가족이 모두 모이는 식사시간만큼은 눈 정도는 맞출 수 있었는데, 그날 이후 그것조차 힘들어졌다. 이상하게 케이아에게 다가갈수록 일이 엉망이 되어버리는 것 같아 나 역시도 기분이 울적해졌다.

 

분명 정성들여 만들었을 음식들이 하나도 맛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나왔던 꽤나 즐겨 먹었던 디저트도 그저 단 설탕덩이 같은 맛이었다. 먼저 방으로 돌아간 케이아와 조금 시간차를 두고 식당을 나왔다. 방을 향해 발이 유난히 무거웠다. 그때였다.

 

콰과광, 하는 요란한 소리가 저택 전체를 뒤흔들었다. 지나가던 하녀 몇몇이 깜짝 놀라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이내 쏴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창문을 보니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별안간 예고도 없이 찾아온 폭우에 사용인들이 서둘러 창문을 닫았다. 어둑한 저녁하늘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마치 나의 마음과 같은 색이었다.

 

울적한 기분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아델린에게 이른 잠자리 준비를 부탁했다. 가벼운 세안과 양치를 마친 후 침대에 누웠다. 자기 전에 읽기 위해 머리맡에 두었던 책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장 눈을 감았다.

 

“케이아….”

 

검은 시야에 작은 아이의 얼굴이 그려졌다. 앳된 얼굴에는 항상 어울리지 않는 우울과 불안이 따라붙었다. 잘해주고 싶어서 그런 건데, 달빛이 환했던 밤. 심장에 이상한 울림을 주었던 서글프게 우는 얼굴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다가가고 싶었던 건데. 눈꼬리에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생긴 억울함에 의한 눈물이 살짝 고였다.

 

 

 

 

천둥소리에 눈이 번쩍 떠진 것을 보면 쿨쩍 이며 눈물을 삼키다 어느새 까무룩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천둥소리에 멍멍 해진 귀를 어루만지며 몸을 일으켰다. 몸은 노곤했지만 정신이 또렷해졌다. 창문 밖은 여전히 깜깜했다. 협탁 위에 놓인 아버지가 선물해준 회중시계로 시간을 확인해보았다. 새벽 두시를 앞두고 있는 시간. 한참은 잔 것 같은데 일찍 잠자리에 들어 남들에게는 아직 한밤중일 시간이었다.

 

“이를 어쩐담.”

 

다시 눕는다고 해도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일단 침대를 벗어났다. 책이라도 읽어야 하나 하고 머리맡의 책을 들어 올려 방 안에 마련된 작은 소파로 가져가려다가 그만 두었다. 책이 읽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결국 할 일이 없어져 창밖을 구경하기로 했다. 수정나비조차 날아다니지 않은 거센 비가 내리는 포도밭에는 등불초의 작은 불빛만이 유일한 빛이었다. 그마저도 희미했지만. 멍하니 비가 내리는 밤풍경을 구경하자니 다시금 케이아가 떠올랐다. 케이아가 처음 이 집에 온 날도 이런 날이었는데.

 

케이아를 떠올리자 갑자기 답답해지는 가슴을 느끼며 고개를 붕 저었다. 더 생각해봤자 관계가 바로 좁혀지는 것도 아니고 그만 생각하자며 창문에서 시선을 뗀 다이루크가 방안을 둘러보았다. 부족한 것 하나 없는 넘치는 방이었지만 무료함을 달랠 재미있을 만한 것은 없었다.

 

마음이 허전하니 뱃속마저 허전해진 기분이 들었다. 돌연 들리는 꼬르륵 소리에 한숨과 함께 입맛을 다셨다. 먹는 둥 마는 둥해 반이나 넘게 남겨버린 저녁이 벌써 소화가 된 듯 했다. 텅 빈 배와 심심한 입을 달랠 무언가가 간절해졌다. 배를 문지르던 다이루크가 잠시 문을 응시했다.

 

 

 

 

한 달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는데, 그런 생각을 머릿속으로 하면서 문을 열고 복도를 나왔다. 그때는 케이아를 보러 가기 위해서였지만 지금은 허기진 배를 달래기 위한 탈출이었다. 부엌을 써야하는 일이니, 아델린에게 들키면 잔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서둘러 모든 것을 끝내고 돌아와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서둘렀다간 들킬 수도 있었다. 조심성 많은 발은 이미 진즉에 뒤꿈치가 들어 올려 진 상태였다.

 

한걸음씩 계단을 향해 나아가는데 다시금 큰 천둥이 쳤다. 그 소리에 맞춰 잠깐 발걸음을 멈추고 뜸을 들이는데 복도 어딘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빗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는 않지만 무언가 웅얼거리는 소리, 누군가 깬 건가 싶어 다시 방을 향해 돌아서려는데 아까는 제대로 보지 못한 약한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저 방은….”

 

케이아의 방이었다. 아주 미세하게 벌어진 방문 틈으로 작은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아직 안자고 있는 건가? 호기심이 다이루크의 발걸음을 잡아끌었다. 발소리를 죽여 케이아의 방문 앞에 섰다. 그리고 열린 문을 조금 더 열어 한쪽 눈으로 안을 확인해보니, 침대 협탁에 램프를 켜놓은 케이아가 그 옆에서 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무릎을 그러모아 고개를 박은 케이아는 최대한 흐느낌을 삼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럴수록 들썩이는 어깨가 더욱 심하게 흔들렸다. 번쩍, 하고 창문에서 번개가 번쩍였고 이윽고 지진과 같은 천둥이 울렸다. 천둥은 케이아의 울음소리를 삼켰다가 도로 뱉어내었다. 방금보다 조금 더 큰 흐느낌이 들렸다.

 

결국 보다 못해 문을 열었다. 활짝 열린 문을 케이아는 눈치 채지 못한 듯 보였다. 하지만 그만큼 슬픔에 젖어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다가가는 발걸음을 조금 빨리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 앞에서 서서 케이아의 어깨를 짚었다.

 

흑, 하는 소리와 함께 케이아고 고개를 들었다. 좀처럼 마를 새 없는 눈은 그때처럼 눈동자를 일렁이고 있었고 눈물은 볼을 푹 적시고 있었다. 내 얼굴을 확인한 케이아가 황급히 눈물을 닦아내었다. 덕분에 털어내듯 떨어진 손이 허공에 멈췄다.

 

“미, 미안해요….”

 

젖은 목소리가 작게 사과를 했다. 케이아의 입에서 존댓말이 흘러나왔다. 그게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아 허공에 뜬 손으로 케이아를 다시 붙잡았다.

 

“뭐가 미안해.”

“내가 시끄러워서, 깬 거….”

“천둥 때문이야.”

 

케이아의 눈이 크게 뜨였다. 고여 있던 눈물이 또르르 볼을 타고 흘렀다. 속으로 한숨이 흘러나왔지만 입으로 뱉지는 않았다. 물끄러미 케이아를 마주보았다. 불안해하며 떨리는 시선이 나를 향했다. 다행이도 지금의 케이아는 나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고 있었다. 그래서 말을 했다.

 

“너 때문이 아니고 천둥 때문이야. 그러니까 사과 하지 마.”

 

‘흐으….’ 나의 단호한 말에 케이아가 울음을 삼켰다.

 

“왜 너는 맨날 우는 거야.”

 

뭐가 그렇게 슬픈지, 내 눈에 들어오는 케이아는 언제나 울거나 혹은 울 듯 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게 몹시도 마음이 아팠다. 동정심인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손을 들어 저번의 아버지처럼 케이아의 젖은 뺨을 훔쳐 주었다.

 

“울지 마.”

 

내가 하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던 케이아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작은 움직임이 마음에 들어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와 동시에 안 그래도 동그란 케이아의 눈이 더욱 커졌다. 흡족한 반응이었다. 그래서 케이아의 손을 잡아끌었다.

 

“따라와.”

 

잠깐 버티는가 싶더니 케이아는 순순히 나를 따라 와주었다.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갈 때 조심하라는 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살금살금 걷는 동작 역시 따라했다. 한손을 꽉 잡은 채로 걷는 동안 혼자 방을 나올 때와는 다른 떨림이 심장을 지배했다.

 

운 좋게도 부엌을 향하는 모험이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근처에 있는 램프의 불을 켜 주변을 비춰보았다. 깔끔하게 정리된 부엌의 모습이 드러났다. 대충 램프를 두기 적합한 곳을 찾아 올려둔 뒤 케이아를 돌아보았다.

 

“잠깐 기다려.”

 

잡고 있는 손을 놓기 아쉬웠지만 보다 좋은 것을 주기 위해 힘겹게 놓아주었다. 발판으로 쓰기 적당한 상자를 하나 가져다가 부엌 이곳저곳을 뒤졌다. 부스럭거리고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날 때마다 케이아는 불안한 눈으로 나와 부엌 밖의 상태를 살폈다.

 

“괜찮아. 금방 끝나니까.”

 

그런 케이아에게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주고 손을 더욱 빨리 움직였다. 조리대 위에는 순식간에 여러 재료와 도구들이 올려져있었다. 불을 쉽게 지필 수 있도록 만들어진 도구를 가져다 화로에 불을 붙였다. 그 위에 주전자를 올리고 오늘 쓰고 남은 듯 보이는 우유를 한가득 부었다.

 

우유는 금방 끓어오를 테니 서둘러 손을 움직였다. 찬장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상자를 열자 달큰한 향이 났다. 그 중 하나를 케이아에게 건넸다.

 

“이거 먹고 있어. 초콜릿이야.”

 

어느새 불안한 기색을 지우고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내가 하는 양을 바라보던 케이아가 얼결에 초콜릿을 받아들었다. 어서 먹으라는 듯 먹는 시늉을 해보인 내 모습에 케이아가 머뭇거리며 초콜릿을 물었다. 곧이어 혀에 닿자마자 퍼졌을 단 맛에 케이아의 눈이 반짝였다.

 

“맛있지?”

 

케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입 안에서 다 녹을 때 즘이면 다 완성될 거야.”

 

오물오물 입안에 초콜릿을 굴리는 케이아를 잠시 바라보다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였다. 컵에 초콜릿을 하나씩 넣고 설탕을 뿌렸다. 서서히 끓어오르기 시작한 우유를 조금씩 따라 스푼으로 살살 젓자 컵 안의 내용물이 조금씩 녹아가고 있었다. 하얀 우유가 초콜릿과 섞여 부드러운 갈색으로 변해갔다. 부엌에는 점점 단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자, 이거 마셔. 초콜릿을 우유에 녹인 거야. 따뜻할 때 마셔야 돼.”

 

컵 한 가득 채워진 우유를 케이아에게 쥐어줬다. 나의 짧은 설명을 들은 케이아가 달콤한 우유 냄새를 맡더니 조심스럽게 컵 안에 혀를 대는 게 보였다. 혹시 뜨거운 걸 못 먹을까봐 먼저 완성된 것을 건넨 것이 옳았던 모양이었다. 혀 끝에 닿은 부드러운 맛에 케이아의 눈이 방금과는 다른 느낌으로 반짝였다.

 

“맛있어….”

“그치? 잠 안 올 때마다 종종 마시는데. 이거 마시고 나면 잠 잘 와.”

 

내 말을 귀 기울여 듣던 케이아가 다시 한 모금 우유를 마셨다. 설탕을 넣어 훨씬 더 혀가 아릴만큼 달아진 우유에 케이아의 어깨가 잠깐 부르르 떨렸다. 그런 케이아를 보며 나도 따라 우유를 마셨다. 늘 먹던 익숙한 맛이 지금 이 순간 이상하게 훨씬 맛있게 느껴졌다. 그저 빨리 잠들기 위해 마시던 것에 불과했던 초콜릿 우유에서 특별한 맛이 나는 느낌이었다.

 

나와 케이아는 한동안 말없이 불이 붙여진 화로 앞에서 서서 우유를 홀짝였다. 케이아는 컵 안의 우유를 신기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고 나는 그런 케이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케이아를 한번 보고 우유를 한 모금 마시니 입 안이 얼얼할 정도로 달아졌다. 신기한 일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마시다가 내 컵의 우유가 반 쯤 줄어들었을 때, 케이아에게 제대로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이제 와서 다시 나를 피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어림잡아 짐작했지만 이름을 부르자 케이아는 진짜로 도망치지 않고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가슴을 벅차게 했다.

 

“나는 네가 여기서는 편하게 웃는 얼굴만 했으면 좋겠어.”

 

흠뻑 젖은 처량한 모습으로 우리 집에 오게 된 케이아가, 항상 우울한 얼굴을 하는 케이아가, 불안한 기색을 숨지지도 못하고 안달 내는 모습이 아닌 지금처럼 편한 얼굴을 한 케이아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꺼냈다.

 

“무언가를 하려고 너무 애쓰지 않아도 돼.”

 

마치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받아 보려는 듯 사용인들의 주변을 맴돌며 일거리를 찾던 케이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렇게라도 해야 이 집에 있을 수 있다고 여겼는지 아등바등 힘겹게 몸부림치던 안쓰러운 작은 아이에게, 진심을 전했다.

 

“그러지 않아도 너는 우리 가족이고, 내 동생이야.”

 

내 말을 끝으로 케이아의 손에 들려있던 컵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카펫이 깔려 컵이 깨지지는 않았으나 둔탁한 소리와 함께 안에 담겨있던 내용물이 빠르게 카펫을 적시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것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시금 눈물이 차오르려는 케이아가 더 중요했다. 들고 있던 컵을 대충 아무 곳에 두고 훌쩍이는 케이아에게 다가갔다.

 

“울지 말라니까.”

 

눈물을 닦아주고 팔을 벌려 케이아의 몸을 끌어안았다. 비슷하지만 약간 작은 키에 마른 몸이 잘게 떨고 있었다.

 

“울리려고 한 말이 아닌데, 미안해.”

 

등을 토닥이며 사과를 하자 어깨에 묻혀있던 케이아가 이마를 비비며 고개를 저었다.

 

“슬퍼서… 우는 거 아니에요, 사과 안 하셔….”

“쓰읍!”

 

웅얼거리는 케이아의 말을 듣다가 잠시 잊은 것이 떠올랐다. 중요한 말이었기 때문에 케이아와 눈을 마주치기 위해 어깨를 잡아채 곧추세웠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눈물이 잔뜩 번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케이아에게 입을 내밀고 말했다.

 

“존댓말 하지 마. 이상해.”

“그치만….”

“가족이잖아. 내가 네 형이고, 그런데 네가 그러면 형제가 아닌 것 같아서 싫어.”

“그럼…?”

 

과장스럽게 진저리를 치자 울음이 멎은 케이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행동 하나하나가 사랑스러워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앞으로 날 다이루크 형이라고 불러. 그리고 편하게 반말해. 자, 따라해 봐. 다이루크 형.”

 

한글자한글자 또박또박 말하며 재촉하자 망설이던 케이아가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입술 바로 앞에서 맴돌다 꺼져버린 너무나 작은 소리라 바로 눈앞에 있는 나조차도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안 들려, 다시 한 번.”

 

눈을 부릅뜨고 부담스러울 정도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순간 단내가 훅 끼쳤지만 기분 좋은 달콤한 향이었다. 내 시선이 부담스러웠던지 케이아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화로와 램프의 불빛 때문일지 모르지만 볼도 조금 붉어진 것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자 움칠거리던 케이아의 입술이 크게 벌어졌다.

 

“다이루크 형.”

 

오랫동안 기다렸던 말이 케이아의 입에서 정확하게 흘러나왔다. 기대만큼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귓가에 똑똑히 들릴 정도의 여린 음성에 꾹 눌러왔던 웃음이 속절없이 터져 나왔다.

 

“응! 케이아. 내가 네 형이야.”

 

케이아의 작은 손을 마주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신이난 내 모습에 부끄러움과 얼떨떨함이 섞인 미묘한 얼굴을 하던 케이아의 입꼬리가 살며시 당겨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이내 활짝 웃는 얼굴이 내 시야를 한가득 채웠다.

 

‘예쁘다….’ 천진하게 웃는 케이아의 얼굴이 반짝 빛나고 있었다. 벅차오름과 동시에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귓불이 뜨끈해지는 것 같았다. 말을 잃고 잠시 케이아의 웃는 얼굴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하하하, 작게 소리내어 웃던 케이아의 웃음소리가 서서히 잦아들 무렵 즈음이 돼서야 케이아의 눈동자 속에서 얼빠진 내 모습이 비치는 것을 본 후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것을 인식하자 뒷목부터 홧홧하게 열이 올라있었다. 조금 당황해버려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반쯤 마셨다 남긴 우유가 든 컵을 케이아에게 쥐어주었다.

 

“이거, 아직 남았으니까 마셔.”

“고마워.”

 

달갑게 내 컵을 받아 마시는 케이아의 얼굴은 행복해보였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내내 이 얼굴이 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우는 얼굴을 보면 가슴이 아릿하게 조여 왔던 것도, 불안해하는 모습에 이상할 정도로 몹시 불편했던 것도 드디어 이해가 갔다.

 

이렇게 환하게 웃을 줄 아는 아이가 내내 그런 표정을 지었다는 게 조금 서글퍼졌다. 케이아에게 있었을 사정은 모르지만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게 만들고 싶었다. 흐려지려는 표정을 지우고 이제는 조금 식어서 미지근해졌을 초콜릿 우유를 열심히 마시는 케이아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다 마시면 얼른 치우자, 안 그러면….”

“도련님!”

“이런….”

 

너무 둘만의 세계에 집중했었나 보다.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리는 음산한 목소리에 뻣뻣하게 고개를 들어올렸다. 대충 던져둔 램프를 이쪽을 향해 들이밀고 있는 아델린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케이아를 뒤에 숨겼다.

 

“왜?”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불까지 쓰시고, 이러면 위험하다고 몇 번이나 말씀 드렸건만.”

 

본격적으로 아델린의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황급히 불을 끈 아델린이 엉망진창이 된 부엌을 보며 머리를 짚었다. 아닌 밤중 생긴 추가 근무가 아찔했을 것이다. 하지만 더한 짓까지 벌인 걸 알면 뒷목을 잡을 텐데. 그래도 모르는 것보다 미리 알려 주는게 나을 것 같아 말했다.

 

“미안해. 아델린. 실수로 컵에 있는 우유 쏟아버렸어.”

“도련님임!”

 

비명아닌 비명을 지르며 아델린이 황급히 바닥을 확인했다. 이를 어째…. 연거푸 우는 소리를 내는 아델린을 뒤로하고 케이아의 손을 잡았다. 그런 내 모습에 아델린이 눈썹을 휘었다.

 

“도련님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평소엔 그렇게 의젓한 분이 가끔 이런 대형사고를…. 게다가 이번엔 케이아 도련님까지 데리고.”

 

‘벌써부터 동생한테 그런 거 가르치면 못써요!’ 주변에 보이는 걸레를 찾아 급하게 젖은 카펫을 문지르는 아델린에게 미안함을 가득 담아 사과했다.

 

“정말 미안해. 너무 어두워서 그만. 이리 줘. 나도 도울게.”

“어떻게 도련님 손을…. 괜찮아요. 어차피 내일 싹 갈아야할 것 같으니까.”

 

한숨을 쉬며 걸레를 놓은 아델린이 허리에 손을 짚었다. 팔자로 눈썹을 늘어뜨린 아델린이 입을 열었다.

 

“아무튼 다음부터는 이러지 마세요. 뭐가 드시고 싶으면 저를 부르라고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매번 이러시면 제 마음도 불편하고 클립스 어르신도 경을 치실 거예요.”

“아델린 피곤하니까…. 그리고 아버지는 화 안낼 것 같은데.”

“이렇게 제 뒤치다꺼리 하게 만드는 게 더 힘들어요. 그리고 위험하게 불을 쓰면 말이 달라지지요.”

“그런가?”

“그래요.”

 

풋, 아델린과 말장난에 가까운 대화를 이어가는데 옆에서 작은 웃음 소리가 들렸다. 우리의 대화를 옆에서 지켜보던 케이아가 낸 소리였다. 나와 아델린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집중되자 케이아가 서둘러 웃음을 갈무리했다. 눈치를 살피려는 케이아의 태도에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표시였다. 내 마음이 전해졌는지 케이아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케이아 도련님도 다이루크 도련님 따라 새벽에 깨있으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얼른 올라가 보세요. 아, 우선 양치부터.”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게. 정리만 부탁해. 그리고 정말 미안해.”

“후…. 다음부터는 꼭 저를 부르세요.”

“알겠어.”

“그럼 두 분 양치는 맡길게요.”

 

응. 고개를 끄덕이며 케이아의 손을 잡고 양치를 하기 위한 용품과 물통을 챙겨 계단을 올랐다. 내려올 때보다는 조금 덜 조심스러운 발걸음이었다. 말없이 계단을 오르는데 내내 조용하던 케이아가 말을 걸어왔다.

 

“있잖아, 형.”

“왜?”

“오늘 먹은 초콜릿…. 다음에 또 먹을 수 있을까.”

 

골똘히 생각에 잠긴 것 같더니, 그 생각을 하는 중이었나 보다. 입안을 메우는 단맛이 퍽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왠지 간질간질해지는 기분이었다. 케이아의 입에서 나온 형 소리와 케이아의 머릿속에 들어있던 귀여운 생각에 절로 나는 웃음을 숨기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언제든지 먹고 싶으면 말해!”

 

맡겨만 달라는 듯 가슴을 치며 말하자 케이아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

 

“고마워.”

 

쿵쾅쿵쾅, 케이아의 미소가 지닌 힘은 심장을 아프도록 뛰게 만들었다. 잠시 잠잠했던 심장이 다시금 요란하게 뛰기 시작했다. 가슴부근에서 목을 타고 머리끝까지 오르기 시작하는 뜨뜻한 열기가 몸을 데웠다. 덕분에 마주 잡은 손에 약간 땀이 배어나왔지만, 놓기는 싫었다.

 

내 상태가 이상한 것을 눈치 챈 케이아가 나를 보는 듯 했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이었다.

 

“초콜릿이라면 얼마든지 있으니까, 질릴 때까지 먹게 해줄게.”

 

 

-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다. 그 날 이후 매일 같이 초콜릿과 관련된 간식을 달라며 아델린을 조르곤 했었다. 혼자였다 둘이 된 간식시간에, 초콜릿을 먹으며 행복해하는 케이아의 모습을 보면 내가 먹는 초콜릿 역시 황홀할 정도로 달게만 느껴져서. 그러다보니 초콜릿의 맛에 중독이 된 것도 같았다. 어렸던 시절의 소소한 추억에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바보 같은 때였지….”

“뭐가 바보 같은데?”

 

불쑥 끼어든 목소리에 깊이 빠져있던 상념에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낯익은 목소리에 상자에 꽂혀있던 시선을 돌려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했다. 그곳엔 당연하게도 케이아가 있었다.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를 한 케이아가 톡톡 바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곳에는 모라가 놓여져 있었다.

 

“무슨 생각에 잠겼길래 손님이 계산하는 것도 눈치를 못 채? 난 눈뜨고 잠에 든 줄 알았어.”

“아.”

“내가 대신 받아뒀으니까, 걱정 마. 그나저나 오늘은 손님이 없네? 잘됐다. 분위기 있고 좋은데, 그런 의미로 오후의 죽음 두 잔.”

“한 잔만 마셔.”

“두 잔.”

 

하아, 귀여웠던 어렸을 때 모습은 조금도 남지 않은 얼굴이 생글생글 눈웃음을 지우며 고집을 부렸다. 하는 수 없이 잔을 꺼내 술을 내주자 케이아가 흡족한 얼굴을 했다.

 

“술도 있겠다. 안주는…. 술이 조금 독하니까, 단 게 좋겠어.”

 

안주를 찾는 케이아를 보며 방금 전 기억을 되새기며 옆에 놓인 상자를 들어올렸다.

 

“이거라도 먹을래?”

 

잘 포장된 상자를 들어 올려보이자 케이아의 눈썹이 찡그리며 기겁했다.

 

“도련님, 아무리 분위기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선물 받은 걸 그렇게 막 쓰면 안 돼. 도나양이 알면 슬퍼할 거야.”

 

케이아가 선물을 준 주인을 정확히 언급하며 거절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화를 내기보다는 내 태도에 핀잔을 주는 연인에게 머쓱한 얼굴을 애써 감추며 말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 그냥 갑자기 생각이 나서.”

“됐어. 선물 받은 그건, 꼭 네가 다 먹어.”

“그럼 안주는….”

“이럴 줄 알고 내가 챙겨왔지.”

 

내가 선물해준 코트를 입은 케이아가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서툰 솜씨로 묶인 리본으로 장식된 상자였다. 혹시나 싶었지만 모르는 척 물었다.

 

“뭐지 그건?”

“알면서, 묻기는. 흐음, 내가 만들었다고 해야 하나 말아야하나…. 아무튼 초콜릿이야.”

“뭐?”

 

잘 못 들은 건가 싶어 되묻자 케이아가 어깨를 으쓱하며 바 테이블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포장을 풀어내자 진짜로 안에는 초콜릿이 담겨져 있었다. 누가 두 줄로 정렬된 내용물의 한쪽 끝자리가 비어있긴 했지만. 믿기지 않는 시선으로 그것을 바라보는데 케이아가 방금 받은 술 잔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오늘 안주는 이거고. 자, 이건 너 마셔. 오늘 같은 날에 혼자 마시면 낭만 없잖아.”

“별일이군. 네가 이런 걸 다 만들고. 진짜로 네가 만들었나?”

 

잠자코 술잔을 받아들며 중얼거리자 케이아가 웃었다.

 

“가끔 이러는 것도 나쁘지는 않잖아? 자, 그만 보고 이만 건배나 하자고.”

 

재촉하는 케이아에 하는 수 없이 잔을 들어올렸다. 쨍, 하는 유리잔이 맞부딪히며 나는 낮은 울림과 함께 케이아가 그 독한 술을 한 모금 머금는 것을 보았다. 그와 달리 술이 받지 않는 몸이기에 마셨다가는 곧바로 잠에 들지 몰라 마시는 대신 살짝 혀만 대고 잔을 내려놓았다.

 

“윽.”

 

그럼에도 무척이나 쓴 맛에 저절로 인상이 써졌다. 술 앞에서 진저리 치는 나를 보던 케이아가 초콜릿 하나를 집어 내밀었다.

 

“먹어.”

 

단 것이 당기지는 않았지만, 입 안의 쓴맛을 지우기 위해 사양 않고 받아먹었다. 직접 만들었다는 소리에 맛은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음에도 생각보다 괜찮은 맛이 입안에 맴돌았다. 그런 내 반응을 눈치 챈 케이아가 빙글 웃었다.

 

“맛있지? 하아, 우리 도련님은 언제쯤 술의 진짜 맛을 알려나…. 아직도 어린애 입맛이라 혼자 술을 마셔야 하는 게 가끔 쓸쓸하단 말이지.”

“….”

 

그와 술자리를 가질 때면 종종 듣던 어린애 타령에 순간 울컥해 입 안의 초콜릿을 부서지게 씹었다. 평소라면 무시했을지도 모르지만 방금 전까지 하던 옛 추억 속의 케이아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자신은 기억도 못하는지 뻔뻔하게 말을 잇는 케이아를 조금 서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무른 초콜릿은 너무나도 쉽게 입안에서 뭉그러졌다. 그 덕에 훨씬 더 달아진 입안이 껄끄러웠다.

 

“그러고 보면 아직도 편식하던데, 다이루크 너….”

 

쉬지 않고 재잘거리는 입을 잡고 흔들어버릴까. 고민하던 차에 그의 입을 막아버리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케이아.”

“왜?”

 

내 부름에 잠시 말을 멈춘 케이아에게 손을 까딱였다. 다가오라는 내 손짓에 케이아가 별다른 의문을 가지지 않고 다가왔다.

 

“왜 무슨 할 말 있어?”

 

그 사이에도 말을 흘리는 케이아의 입에서 쌉쌀한 술 향이 났다. 그가 그토록 말하는 어른의 맛이 나는 입이 눈앞에 다가왔다. 술자리만 되면 얼른 어른이 되라며, 어른의 맛을 공유하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케이아였다. 그래서 지금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오늘은 조금 특별한 날이니까.

 

아직 입 안에 남은 초콜릿을 믿고 내려놨던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사람을 가까이 불러놓고 갑자기 마시지도 않는 술을 들이키는 내 모습을 이상하게 바라보던 케이아에게 곧장 내 입을 맞추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이었지만 케이아는 곧바로 나의 입맞춤을 받아주었다.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는 혀를 통해 머금은 술과 초콜릿이 자연스럽게 그에게로 흘러들어갔다.

 

쌉쌀한 술과 달콤한 초콜릿이 뒤섞인 키스였다. 뭉그러진 초콜릿이 완전히 녹아 없어질 때까지, 녹아 없어져 입안에 남은 약간의 단맛마저 사라질 때까지 길게 이어진 키스에 케이아의 목에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조금 더 수월하게 술맛을 나누기 위해 틀어쥔 그의 뒷목이 뻐근해질 때쯤 그를 놔주었다.

 

하아, 하고 크게 한숨을 뱉는 케이아의 입에서 달고 쌉싸래한 향이 났다. 살짝 풀린, 내가 그토록 좋아했고 좋아하는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운이 가득히 남은 케이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네가 말하는 어른의 맛인데, 어때? 만족스럽나?”

“…훌륭해. 그리고….”

 

상기된 얼굴로 감상을 말하는 케이아가 말을 늘였다. 조금 민망하다는 듯 머뭇거리는 그의 반응에 조금은 여유를 가지며 물었다.

 

“그리고?”

“그리고 이렇게 한 번으로는 끝내기에는 부족한 거 같아.”

 

약간은 분하고 억울하다는 감정이 녹아있는 웅얼거림이 들렸다. 굉장히 만족스러운 감상이었다. 케이아의 손이 천천히 초콜릿을 향해 뻗어나가는 것이 보였다. 의도가 다분히 보이는 동작이었다. 새로운 맛에 빠진 아이마냥 솔직한 반응에 웃음이 흘러나왔다. 어렸을 때 모습은 조금도 남지 않았다는 말은 역시 취소해야할 것 같았다.

 

초콜릿 상자를 향해 가는 케이아의 손을 지그시 눌렀다. 그리고 그를 대신 다시 초콜릿을 입에 머금은 채로 나직하게 속삭였다.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훨씬 더 깊고 오랜 키스를 위해, 방금 훨씬 적은 양의 술을 마시고 입을 맞추었다. 그렇게 한참을 뒤엉키는 혀 사이로 아리도록 진한 초콜릿 맛이 퍼져나갔다.

원신계정. 다이케이 위주 글 쓰는 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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