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사람.

 

마지막으로 본 ‘미르하’는, 사라지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서서 미소짓고 있었습니다.

떠나가는 세 사람에게 손을 흔들며.

 

-

 

미르하는 세 사람이, 칼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았다. 떠날 사람은 떠났다. 넷 중에 그만이 이 자리에 남았다. 미르하는 자신이 진짜이되 진짜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칼은 이 세계에 속한 이가 아니었다. 있어야 할 곳으로, ‘진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돌아간 그녀를 어찌 원망할 수 있을까. 오히려 기뻐할 것이다. 이곳의 ‘미르하’가 아니라, 그녀의 ‘미르하 레오넬’이 말이다. 셋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미소 짓고 있던 미르하의 표정이 서글프게 일그러졌다. 흔들던 손은 느릿하게 아래로 떨어졌다. 아, 어쩌죠. 벌써 보고 싶어요, 칼. 미르하는 작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 이름을 부르면 칼이 돌아오기라도 할 것처럼.

 

미르하는 힘 빠진 발걸음으로 거리를 걸어 집으로 돌아갔다. 이곳의 자신은, 워커가 불러들인 존재. 그녀가 말했듯이 불러들여진 칼 역시 존재했다. 오이를 미국에서 쫓아낸, 여전히 멋있는 칼이. 하지만 그 사실을 맞춘 그녀가 한가지 간과한 것은, 그 칼이 그와는 결혼한 사이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칼이 그녀의 미르하에게로 돌아가 버린 이상 이곳의 ‘미르하’는 미르하 레아테스였다. 미르하 레오넬이 아니라. 그래서 칼이 이곳에 남길 바랐다. 이곳에 남아, 그와 함께해주길 바랐다. 그렇게 된다면 그는 ‘미르하 레오넬’로 남을 수 있을 테니까.

 

칼이 돌아가도, 이곳의 칼은 남아있다. 자신 역시도. 이 세계는 허상 따위가 아니니까. 적어도 그에게는 말이다. 미르하는 집으로 돌아갔다. 이 세계는 미르하를 남겨놓은 대신, 그의 다른 소원을 들어주었다. 가족의 회사가 도산하지 않은 평화로운 세계. 그의 가족들은 집에 돌아온 그를 반겼으나, 미르하는 가라앉은 기분으로 방으로 들어섰다. 저를 찾아주세요. 단호하면서도 서글픔이 묻어있던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그녀는 이곳의 그녀 역시 자신을 사랑할 것이라고 했지만, 미르하는 두려웠다. 이곳의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까 봐. 그는 여전히 칼을 사랑했고, 이 세계의 그녀 역시 사랑했다. 어떻게 만나지 않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질 것이라고 정정해줄 수 있었다. 자신은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는 이곳의 ‘칼 레오넬’은 어떨까. 미르하는 칼을 믿었다. 이곳의 그녀도 분명 자신을 사랑할 것이라는 말도 믿었다. 그러니, 찾아야겠지. 미르하는 우울한 기분을 애써 떨쳐내고 잠을 청했다.

 

칼의 집 위치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대학 시절부터 그녀와 사귀었고, 결혼한 뒤로는 그대로 신혼집이 되었으니까. 그녀가 이사하지 않았다면 그 위치 그대로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 혼자 살고 있겠지. 남과 결혼한 것이 아니라면. 멀지 않은 위치였기에, 찾아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 생각 이후로 그의 머릿속은 온통 먹구름이 끼어있었다. 그녀가 정말로 다른 사람과 결혼하기라도 했을까 봐. 칼을 찾았는데 다른 남자가 나오기라도 한다면, 그는 자신을 제어할 자신이 없었다.

 

미르하는 한참을 망설이다 며칠이 지나서야 그녀의 집을 찾았다. 똑똑. 두어 번의 노크 소리가 들리고, 얼마 뒤에 그녀의 집 문이 열렸다. 다행히도 나온 사람은 칼 본인이었다. 그가 아는 칼과 조금도 다를 게 없는, 이곳의 칼. 진짜이되 진짜가 아닌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와 다른 점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정도일까. 어느 쪽이든 미르하에게는 유일한 칼이었다. 미르하는 칼을 바라보다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며칠 만에 본 그녀는 티브이 속에서 본 모습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여전히 멋있고, 사랑스러운 사람. 미르하는 칼을 끌어안고 속삭였다.

 

“사랑해요, 칼. 저와 결혼해주세요.”

 

칼은 놀란 눈으로 자신을 끌어안은 미르하를 바라보았다. 요즘 그를 만나는 것이 뜸했긴 하다. 그는 대학원의 일로 바빴고, 자신은 오이 금지법으로 바빴으니까. 하지만 결혼이라니. 칼은 그를 사랑해 마지않았지만, 결혼 얘기를 꺼낸 적은 아직 없었다. 프러포즈한다면, 최소한 현관이 아니라 멋진 레스토랑 같은 곳에서 하고 싶었으니까. 칼은 살짝 한숨을 내쉬며 자신을 끌어안은 애인을 토닥였다. 며칠 안 봤다고 어리광인 걸까. 그렇다기에는 좀 이상한데. 칼은 미르하의 속삭임에 담겨있는 애달픈 감정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달래려 짧게 입술을 맞추고, 울기 직전의 그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미르. 청혼은….”

 

칼이 대답하지 않고 망설이자, 미르하는 간절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설마 거절하는 것은 아니겠지.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그는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까 두려웠다. 평화로운 세계의 대가로 자신이 사랑하는 그녀를 앗아가기라도 했을까 봐, 아주 몹시. 간절하다 못해 애절한 그의 눈빛을 마주한 칼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저렇게 귀여울까. 늘 그랬지만,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결혼한다면 무조건 그와 해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칼은 미르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원래 제가 하려고 했는데 말이죠. 그래서 반지도 주문했는데….”

“네?”

“받아들인다고요, 그 청혼.”

 

받아들인다는 말을 들은 미르하가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이곳의 그녀도, 그를 사랑했다. 감격에 빠진 미르하가 그녀를 다시 한번 꼭 끌어안았다. 칼은 그를 보며 마주 웃음을 지었다. 이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얼떨결에 받은 청혼이긴 했지만, 대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그를 사랑하니 말이다. 미르하는 칼을 바라보다 중얼거리듯 얘기했다. 이곳은 각자의 소원이 이뤄진 세계였다. 그리고, 자신의 소원 역시도. 그것이 진짜의 것이든, 남겨진 가짜의 것이든 이뤄진 세계. 환상 같은 세계지만, 이번에야말로 진실이었다.

 

“칼, 저 소원이 있어요.”

“뭡니까?”

“저는…. 여보가 돌아와야 할 곳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전업주부가 희망인 거라면…. 기꺼이 먹여 살리겠습니다.”

“좋아요. 여보.”

 

여보라는 단어에 칼이 얼굴을 붉혔다. 여보, 여보라. 달콤하고 설레는 단어였다. 그리고 이제부터 익숙해져야 할 단어이기도 했다. 부부가 될 사이니까. 칼이 잠시 생각하다 그에게 다시 한번 입맞춤했다. 입맞춤이 지극히 달았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떠오른 단어를 그대로 입 밖으로 내뱉었다. 망설일 필요 따위는 이제 없었다.

 

“사랑해요, 미르하. 미르하 레오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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꽉 막힌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했지만... 사실 원래는 칼하고 아무사이가 아니게 됐다는 설정으로 하려했는데 그러자니 미르가 너무 안타까워서 그냥 청혼 엔딩으로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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