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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3학년으로 복학한 경영학과 조유리는 새벽같이 일어나 공들여서 꾸안꾸 메이크업을 하고 고심끝에 귀여움을 살려줄 양털 플리스를 걸쳤다. 유리는 따뜻한 봄볕에 콧노래를 부르며 일반물리학 수업을 듣기 위해 공학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리고 강의실에 들어서자마자 유리를 보고 반갑게 인사하는 혜원에게 달려갔다.


언니이 너무 보고 싶었잖아요. 하고 안기면 혜원은 아닌 척 좋아죽으면서 유리의 턱을 긁어주었다. 저번 주에도 봐놓고 뭘 보고 싶었대. 오늘 유리 귀여운 거 입었네. 하고 배를 슥슥 만지며 볼에 뽀뽀를 쪽쪽하는 혜원에 유리는 배만 만지지 말고 다른데도 좀 만져봐요. 볼에만 하지 말고 입술에도 좀 해줘봐봐요 언니. 같이 응큼한 생각을 속으로 삼켰다. 


수포자인 유리는 지난주 오티 수업을 듣고 심각하게 드롭을 고민했지만 오늘 혜원의 그루밍을 받으며 애매하게 C-같은 걸 받는 한이 있어도 어떻게든 버텨보겠다고 다짐했다. 언니 오늘 점심 뭐 먹을까요? 대게무러갈까요? 유리는 매주 수업이 끝나고 점심까지 먹는 코스를 암묵적인 약속으로 만들기 위해 작업을 치느라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온 누군가 유리 옆에 서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조유리 오랜만이다?"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 유리는 나뭇가지 소리에도 퍼드득 놀라는 초식동물처럼 흠칫 몸을 떨며 고개를 돌렸다.  



"허......"



그곳엔 완연히 성숙해진 모습의 김민주가 있었다. 







Feel good 上

김민주 조유리







혜원은 학교커뮤니티에서 모집한 토익 스터디에서 만났다. 스터디 내 최고득점자인 유리는 1월부터 개강 전까지 스터디를 하면서 혜원을 무급 과외 수준으로 도와주었다. 스터디룸 앞에서 처음 만난 혜원에게 후광이 비췄던 탓이다. 방학때마다 강남의 토익학원을 등록해도 600을 넘지 못하던 혜원이 석 달 만에 800을 넘는 쾌거를 이루었다. 성적 발표날 유리의 두손을 꼭 붙잡고 점수를 확인했을 때 둘은 소리를 치며 껴안았고 혜원은 두손으로 유리의 얼굴을 잡고 양 볼에 뽀뽀를 퍼부었다. 성취감에 고양된 혜원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유리는 한동안 새빨개진 얼굴을 숨기느라 진땀을 뺐다. 


새내기때 음주가무에 심취한 대가로 강제로 5학년이 된 혜원은 이제 전공 몇 개만 재수강하면 졸업이었다. 그 얘길 들은 유리는 어떻게든 혜원과 가까워지고 싶어서 전기공학과인 혜원의 시간표를 훔쳐보고 그나마 제일 저학년 강의인 일반물리학을 신청했다. 그리고 오티날 강의실에서 눈이 휘둥그레져서 저를 쳐다보는 혜원에 표정관리를 실패하고 세상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하하 우연이네요. 졸업 전에 이 교수님 강의 꼭 한번 들어보고 싶었거든요. "

"어...이 수업 3년째 외부강사인데...;"

"아..........어......제가 물리를 좋아해가지고요..."



너두 참 별일이다. 야 어쨌든 너 있어서 너무 다행이다. 아무튼 1학년 전공에 홀로 수업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마냥 반가운 혜원이었다. 혜원은 자상하고 스킨십을 좋아하는 전형적인 헤녀였다. 유리는 그걸 알면서도 혜원과 가까워지고 싶었다. 유리는 벽장 속에서 텅 빈 가슴을 안고 사는 외로운 레즈였고 혜원은 미인이었으니까. 그리고 혜원은 유리를 아주 귀엽게 여겼다. 가끔은 정말로 개 취급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좀 그랬지만 어쨌든 혜원이 자신을 아낀다는 걸 알았다. 이미 헤녀지옥에서 닳고 닳은 유리에게 그런 희망고문은 업계 포상이었다. 유리는 디나이얼 강국에서 레즈로 태어난 자신의 숙명을 받아들인 지 오래였다.


유리는 어릴 때부터 헤녀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산책하는 강아지 주변에 여자들이 모여드는 것처럼 여중 여고를 나온 유리에게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뼈레즈인 유리에겐 그 모든 게 고문이어서 하루는 엄마에게 날 왜 이렇게 귀엽게 낳았냐고 엉엉 울기도 했다. 그 와중에 남자들한테 고백도 너무 많이 받아서 좆같은 헤테로민국을 저주했다. 그래도 머리가 좀 크고 나니 예쁜 여자들에게 둘러싸여서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 대리만족도 되는 거 같고....그래서 고1때 김민주가 유리를 아웃팅하기 전까진 열남자 제쳐두고 여자들 틈에서 귀염받는걸 즐겼다. 






*





중학교 때부터 쭉 반장을 도맡았던 유리는 학생회에서 선배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다. 그래서 유리는 또래에 비해 친한 언니들이 많았다. 깜찍한 외모는 물론이고 붙임성이 좋고 제법 진중한 면도 있어서 유리는 언니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때 유리 별명은 언니킬러였다. 언니들은 유리가 우는 시늉만 해도 껌뻑 죽었다. 그게 다 작고 소중한 소동물을 대하는 그런 마음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그래도 예쁜 언니들의 헹가래 속에서 유리는 행복한 레즈였다. 


그런 유리가 가장 좋아하는 언니는 두학년 선배인 예나였다. 아마 첫사랑이라 할 수 있겠다. 간부수련회에서 처음 만난 예나는 처음부터 유리와 죽이 잘맞아서 급속도로 친해졌다. 둘이 하도 붙어 다녀서 나중엔 진지하게 둘이 사귀냐는 질문을 조심스레 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럴 때면 예나는 장난스럽게 코를 슥 닦으며 으쓱했고 그걸 본 유리는 아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여 같이 속에도 없는 말을 하면서 실실 웃었다. 결정적으로 둘이 그러다 결혼하겠다며 놀리는 친구에게 유리랑은 연애만 할 거라는 예나를 보고 저건 시발 구라면 무기징역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시발 구라였다. 


예나를 따라 가입한 토론 동아리의 세번째 주제는 동성 결혼 합법화였다. 유리는 예나와 함께 찬성팀에 들어 팀원들과 카페에서 의견을 나누다가 누군가 인터넷에서 봤다며 스윙스랑 아이린 중에 누구랑 사귈 거냐는 질문이 나왔다. 에이~스윙스는 에바죠. 저는 아이린. 하고 가슴 속 깊이 우러나오는 진담을 농담처럼 말하는 유리에 팀원들도 다 같이 웃으며 공감했다. 그 와중에 예나는 살 빼면 스윙스 봐줄 만 하지 않나?아이린은 그래도 여자잖아. 나는 스윙스ㅎㅎㅎ라며 수줍게 웃었고 유리는 텅 빈 가슴을 채워가던 무언가 와르르 무너지는걸 느껴야 했다. 그리고 그때 맞은편에 앉아서 아, 그래도 돈까스는 좀; 하고 썩은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근데 애당초 이게 찬성과 반대를 논할 일인가요? 라고 시니컬하게 말하던 게 김민주였다. 






*





"야 그러니까 내가......."



유리는 하도 쥐어 뜯어서 가루가 날리는 휴짓조각을 뚫어져라 보면서 입을 달싹였다. 



"하......아니다."



벌써 몇번째 하는 되새김질인지 민주는 욕지기가 끓어올라 티 내지 않으려 애를 썼다. 



"야 나 집에 간다. "



민주가 가방을 메고 일어서 나가는 시늉을 하자 유리가 급하게 한호흡으로 말을 뱉었다. 



"ㅇ, 야! 나예나언니좋아해!"



민주는 순간 제가 뭘 들었는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잠시 스치는 알 수 없는 불쾌감과는 별개로 좋다는 그 말이 호불호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팥보다 슈크림이 좋아 같은 것과는 결이 다르리라.



"......너 레즈야?"

".....어."



멋쩍게 웃으며 턱을 긁는 유리를 보며 민주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짧게 답했다. 그렇구나. 한동안 눈치 보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이어가던 유리는 별다른 기복 없이 리액션하는 민주의 태도를 수용의 의미로 받아들였고 집에 가기 전 역시 넌 좋은 친구라고 가볍게 포옹도 해주고 기분 좋게 귀가했다.  






*






"존나 더러워 조유리. 그동안 옷 갈아입는 거 보면서 무슨 생각했냐?"

"지 귀엽다고 애들이 껴안고 뽀뽀할 때마다 졸라 즐겼겠네. "



3반 반장이 레즈라는 소문은 삽시간에 번졌다. 들리는 말로는 혜수가 나불대고 다녔다는데. 3반 정혜수는 평소 민주와 붙어 다녔고, 유리와는 조금 데면데면한 사이였다. 어쨌든 그 소문을 유리빼고 전교생이 다 알았다. 그건 은근한 따돌림을 유리가 눈치채기까지 생각보다 시간이 걸려서였다. 이에 약이 오른 정혜수를 포함한 몇 명이 유리를 대놓고 저격했다. 수치스러운 조롱이 일방적으로 쏟아질 때 유리는 목까지 시뻘게져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 있었다. 그때 유리의 시선에 걸린 민주는 무감한 얼굴로 폰을 만지다 고개를 들어 유리와 눈을 맞춘다. 이내 민주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서서히 숨통을 조여오는 포식자와 같은 그 눈을 마주 보며 유리는 손을 떨었다. 유리의 인생에 처음 겪는 강렬한 배신이었다.


그래도 평판이 좋았던 유리는 곁을 지켜주는 친구들이 있었고 그 덕에 견딜만 했다. 이후에 괜찮다며 다독이면서도 은근히 거리를 두는 예나의 반응이 더 충격적이어서 아직도 가끔 그 꿈을 꾼다. 뿐만 아니라 알게 모르게 수군거리는 것을 모른 척 해야 했고 가끔은 대놓고 꼽주는 애들에 의해 수모를 당했다. 


하루는 기가 죽어 눈치만 보는 유리를 보다 못한 친구들이 유리를 시내로 이끌었다. 한바탕 먹고 놀다가 유리가 제일 좋아하는 마지막 코스인 코노에서 용철을 만났다. 용철은 학기 초에 유리에게 차인 뒤 그럼 친구로 지내자며 번호를 교환한 옆학교 남학생이었다. 그때까지 유리는 남자에게 철벽을 치는 편이었는데 용철은 몇 번 얘기하다 보니 애가 진중한 게 말도 좀 통하고 정말 친구처럼 편하게 해줘서 그럭저럭 카톡을 주고받고 있었다. 하필 친구들이 동전바꾸러가서 혼자뿐이고 실제로 용철을 만난 건 이번이 두 번째라 좀 어색했다. 그래서 슬쩍 자리를 옮기는데 용철이 한발 빨랐다. 반갑게 인사하는 용철에 유리도 하는 수없이 어색하게 웃으며 안부를 물었다. 그때 민주의 친구들이 삼삼오오 오락실로 들어왔다. 



"헐 조유리다. "



유리를 보고 콕 집어 삿대질을 하는 혜수를 애써 무시하고 용철과 뻘쭘하게 서 있는데 시비를 걸려고 드릉드릉 하는 소리가 들렸다. 



"용철이랑 둘이 여기서 뭐 해?"



아씨...둘이 아는 사이였어? 하긴 용철은 이름이 좀 좆같은 거에 비해 잘생기고 수더분한 성격때문에 발이 넓었다. 



"니가 좋아한다는 우리학교 애가 조유리였어?"

"어? 어..."

"조유리 웃긴다. 너 그거 사람 기만하는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걔 레즈야. 우리학교애들 다 알잖아."



입을 꾹 다물고 신발끝을 보고 있던 유리가 고개를 들어 혜수를 노려보았다. 



"와 눈을 왜 그렇게 떠? 누가 들으면 없는 말 한 줄 알겠네." 



그때 민주는 뭘하고 있었더라. 어깨 너머로 보이는 민주는 무표정하게 유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원망감에 눈물이 비죽비죽 솟아오르는데 유리와 혜수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상황 파악을 끝낸 용철이 유리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나 유리랑 한 달 전부터 사귀고 있었어. 유리가 나한테 고백했거든. "



순간 자신을 감싸는 크고 따뜻한 손이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자신을 애써 도와주려는 용철이 고마웠고 방관하는 민주가 너무나 밉고 힘들어서 유리는 용철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소리를 삼켰다. 그 모습에 당황한 혜수는 허, 저거 연기하는 거 봐. 야 너 속고 있는 거야 같은 소리를 했고 그때 민주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만해. 다른 데 가자." 



그날 이후 용철이와 사귄다는 얘기가 돌면서 조유리가 레즈라는 소문은 조금 사그라들었다. 나중엔 혜수가 근거없이 루머를 퍼뜨린다고 욕을 뒤집어쓰기까지 했다. 이상한 것은 소문의 근원임에 분명한 민주가 아니라 혜수가 뭇매를 맞았다는 점이다. 소문이 퍼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민주가 어떤 실수를 한거라면 유리에게 사과했을 것이다. 그날의 웃음도 저를 향한 비웃음이 분명했기에 유리는 민주가 배후임을 확신했다. 

 

어쨌든 웃는 민주를 본 그날 이후로 유리는 핸드폰에 저장된 민주의 번호를 지웠다. 유리는 여자에게 매우 관대한 편이었지만 선을 넘으면 단호하게 끊을줄도 알았다. 그래서 민주를 찾아가 따지고 드는 일도 없었다. 처음엔 도대체 왜 그랬는지 묻고 싶었지만 이내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했고 그냥 사람 하나 잃은셈 치기로 했다. 그리고 다시는 커밍아웃을 하지 않기로 했다.




















어? 민주야, 너도 이 수업 들어? 혜원에 안겨 멍하니 올려보던 유리는 반갑지 않은 제 동창에게 반갑게 인사하는 혜원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혜원은 지난 2월 신편입생 오티에서 김민주를 만났다. 딱히 학과 생활에 관심을 두지 않는 혜원이었지만 매년 학과 오티만은 필참했는데, 그것은 전기공의 퀴퀴한 남자들 틈에서 몇 안 되는 귀한 여자후배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극남초과에서 여자의 입지, 그것도 미모의 20대 여성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익히 알고 있는 혜원이었기에.


듣자 하니 올해 인문대에서 공대 3학년으로 편입한 민주는 졸업하려면 1, 2학년 전필도 이수해야 한다는 것 같았다. 와 그래서 전공만 21학점을 듣는다고? 빡세겠다. 근데 둘은 어떻게 아는 사이야? 중고등학교 동창이에요. 


유리는 고등학교 졸업 후 4년 만에 마주한 김민주가 생글생글 웃으며 혜원과 대화하는 이 상황이 몹시도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그때까지 입도 뻥끗 못 하고 있던 유리는 마지막에 민주가 던진 직구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근데 언니, 유리랑 사귀어요?








*






유리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짐을 챙기는 민주의 손목을 덥석 잡고 다급히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아우, 야 아프다고. 공학관 뒤편 주차장으로 이어진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끌려간 민주가 인상을 쓰며 유리의 손을 뿌리쳤다. 앞만 보고 가던 유리는 그제야 멈춰서 벌게진 손목을 부여잡은 민주를 팩 돌아보았다. 유리는 거칠어진 호흡을 정리하려 애쓰며 민주를 노려보았다. 



"너 미쳤니?" 

"뭐가." 

"몰라서 물어?"

"몰라서 묻는데."

"거기서 사귀냐는 말이 왜 나오는데?"

"아니면 말지, 뭘 그렇게 흥분해?"



민주가 짜증스런 얼굴로 따박따박 받아치자 유리는 끓어오르는 화를 짓누르기 위해 심호흡했다.



"야, 너어는 그게 지금....."

"아니라면 다행이네."

"뭐?" 

"난 니가 그 버릇 못고친줄 알고 내심 걱정했지." 



뭐라고? 유리가 어이가 없어 거칠게 머리를 쓸어올리는데 멀리서 둘을 찾는 혜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유리 너는 왜 전화도 안 받고..." 



무거운 전공서적이 든 유리와 민주의 가방까지 챙겨 나와 작은 몸을 휘청이던 혜원이 잠시 숨을 고르며 심상찮은 분위기를 파악했다. 



"....둘이 싸웠어?" 

"아니에요."

"아닌 게 아닌데?"

"아, 아니라고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유리가 예민하게 반응하자 혜원이 당황했다. 혜원에게 짜증 한톨 부린 적 없던 유리였다. 아... 언니 죄송해요. 순간적으로 짜증을 냄과 동시에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어 바로 사과했지만 얼어붙은 분위기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잠시 어색하게 서서 곰곰이 생각에 잠긴 혜원이 이내 제 양옆에 두 사람을 놓고 팔짱을 꼈다. 밥 먹으러 가자. 네? 셋이요? 응. 아 저는...아니 셋이 가야돼. 무.조.건 아 언니이... 미안하다며. 네.......민주 너도 괜찮지? 그럼요. 그렇게 셋은 후문 앞 일식집으로 향했다.





*




내가 괜한 짓을 한건가..혜원은 살벌한 분위기의 유리와 민주 사이에서 초밥을 우물거리며 눈을 굴렸다. 여돕여, 연대 같은 단어를 떠올리며 여자끼리 싸워봐야 남자들만 좋은 일이지 같은 마음에서 나온 기묘한 페미니즘적인 정의감에 다짜고짜 둘을 끌고 왔지만 눈치가 보이는 혜원이었다. 



"둘이 사귀냐고 물어본 게 기분 나빴나 봐요."



돈가스를 먹는 둥 마는 둥 찔러대던 유리가 민주의 말소리에 눈에 불을 키고 고개를 쳐올렸다.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 오해해서 미안해."



정말로 실례했다는 듯이 눈썹을 내리며 말하는 민주를 보며 유리가 어물거렸다.



"야, 아니 그게...하..."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혜원이 음식물을 꿀떡 삼키고 물을 한잔 들이켰다. 



"근데 그게 그렇게 기분 나쁠 일이야?"

"네...?아니 그게....."

"너 그렇게 화난 거 처음 봤어."



혜원이 애꿎은 밥알을 젓가락으로 굴려대며 서운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리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유리 그런 줄 몰랐는데 보수적이구나..왠지 좀 섭섭하기까지 하네. 유리는 한동안 입을 내밀고 중얼중얼 거리는 혜원을 달래느라 진땀을 빼야했다. 아, 언니 그런 거 아니에요. 제가 예민했어요. 죄송해요. 네? 아유 아녜요 저 완전 진보에요. 아아 언니이, 오늘 밥 제가 살게요 아니이, 아 진짜.... 야 민주야 내가 예민했다. 미안하다. 내가 니껏까지 사줄게. 봤죠? 화해도 했어요 아아 언니이.





*





어쩌다 셋이 앉아서 밥까지 먹고 김민주 밥까지 사먹이게 된 건지. 유리는 후문에서 10분 거리인 자취방으로 귀가하는 길에 오늘 있었던 일들을 돌이켜보며 입술을 짓이겼다. 얼결에 민주한테 사과까지 하고 -대체 내가 왜?!- 혜원의 부탁에 못 이겨 다음부터 웃으며 보기로 했다. 그래 뭐 생각해보면 그렇게 쫄릴 것도 없었다. 아까 저를 보수적이라고 한 혜원의 언행으로 미루어보아 적어도 이 언니는 퀴어에 거부감이 없다. 그러니 그 여우 같은 김민주가 아웃팅을 해도 최악은 면할 수 있다. 그리고 내심 핑크빛 기대감도 드는 유리였다. 이런 은근한 감정이 독이 되는걸 뻔히 알지만 어쩌겠어? 아파도 사랑인걸. 그리고 뭐 아웃팅 당해도 아니라고 잡아떼면 그만이다. 명분은 차고 넘쳤다. 김민주 덕분에 고등학교 때부터 꾸준히 남자만 만났으니까.

 

유리에게 가장 아픈 기억으로 남은 열일곱의 초여름. 결과적으로 용철과는 사귀지 않았다. 눈치가 빠르고 속이 깊은 용철은 유리가 무리해서 자신을 만나는걸 원치 않았다. 좋은 사람이었고 그가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랐다. 그래도 한번 겪은 혐오의 눈초리는 사춘기 유리에겐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트라우마였다. 그때부터 유리는 저에게 고백하는 남자를 하나둘 받아주기 시작했다. 


유리는 소위 말하는 전형적인 미인들보다 고백을 많이 받았다. 말랑거리고 유순한 인상에 리액션이 좋아서 이상형이 누구예요? 태연이요 하는 애들은 백이면 백 유리에게 고백했다. 유리와 만났던 남자들은 모두 잘생기고 헌신적이었으며 유리를 진심으로 사랑해주었다. 그게 그리 나쁘진 않았지만 좋지도 않았다. 그때그때 가깝게 지내는 헤녀들에게 당하는 희망고문이 아파도 더 달콤했다. 그래서 유리는 항상 사랑이 고팠다. 바라만 봐도 설레고 내 모든 걸 줘도 아깝지 않은. 텅 빈 유리의 가슴을 가득 채워줄 진정한 사랑. 그게 남자들하고는 되지 않았다. 


그나마 제대로 만났던 남자라 하면 첫경험 상대인 성준을 꼽을 수 있겠다. 갓 스무살이 된 유리가 신환회에서 처음 만난 성준은 같은 과 동기였다. 지금까지 만났던 남자 중에 가장 잘생기고 몸도 좋았으며 성격까지 좋은 팔방미인이었다. 경영대 차은우로 불렸던 그는 유리 특유의 무해한 분위기에 마음을 뺏겨 고백했다. 함께 있으면 즐거웠고, 훌륭한 피지컬 덕에 섹스도 나쁘지 않았다. 


유리의 몸은 민감한 편이었다. 가만히 누워서 애무를 받다 보면 쉽게 흥분했다. 한창 행위가 진행 중일 때 눈을 감고 짝녀를 생각하면서 오르가슴도 몇 번 느꼈다. 그래서 그와 사귀면서 처음으로 헤녀들을 이해했다. 니가 남자였으면 사귀었을 거야 라든지 걸크러쉬 상대랑은 거기도 부빌 수 있다는 그 외국 언니의 말 같은 것들. 그게 가능한 일임을 깨달음과 동시에 그것이 결코 사랑이 아님을 알았다. 


유리는 남자친구에게 한 번도 먼저 키스를 하지 않았다. 그 넓고 다부진 어깨를 끌어안고 싶은 적이 없었고 특히 섹스할 때 먼저 애무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같이 있는 순간이 즐거웠지만 크리스마스엔 짝녀와 함께 있고 싶었다. 로맨틱한 거리를 손잡고 걸으면 내 손을 잡은 이 커다란 손이 작고 부드러운 짝녀의 손이길 바랐다. 바쁠 때면 만나는 시간이 아까웠고 치킨의 닭다리나 파스타의 새우는 저가 먹고 싶었다. 항상 저가 더 아까웠다. 1년 반 정도 만났을 때 남자친구는 유리처럼 텅 비어버린 가슴으로 울면서 이별을 고했다. 유리는 미안하고 또 많이 아쉬웠다. 니가 여자였으면 너를 정말 사랑했을 텐데. 그 후로 헤녀의 희망고문이 인간적인 애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그게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혹시 얘는 진심이지 않을까, 이 정도면 최소 바이인 거 아니야? 이거는 사형감인데, 유리의 마음속에 사랑을 향한 갈망은 콘크리트 바닥에서 피는 꽃처럼 억세게도 피어났다. 끊어지고 잘리고 짓밟히고 그 모진 풍파를 맞아도 유리의 마음속에 뿌리내린 욕망은 자꾸만 고개를 내밀었다. 적당히 거리 두고 적당히 즐기는 법을 배웠다 생각했지만 확인 사살을 당할 때면 그래도 매번 아팠다. 



그리고 또다시 유리의 마음속 그것이 혜원을 향해 움트고 있었다.





















조유리가 김민주에게 커밍아웃하고자 한건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1. 김민주는 타인에게 무관심하다.

2. 조유리는 김민주에게 끌리지 않는다.


중학교 때부터 같은 아파트 다른 동에 사는 가까운 이웃사촌이었던 둘은 민주 부모님의 초대로 식사 자리를 가지면서 처음 말을 텄다. 중학교 내내 같은 반인 적이 없던 둘은 가끔 가족 모임에서 만나면 방에 들어가 시간을 같이 보냈다. 시답잖은 수다를 떨곤 했지만 생일은 챙기지 않았다. 종종 등하굣길을 같이 하곤 했지만 노는 무리는 달랐다. 그래도 함께한 세월이 쌓이면서 둘만 아는 모습이 하나둘씩 생겼다. 하지만 허물없는 사이라고 할 순 없었다. 


민주의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웃지 않으면 차가운 외모였지만 식사자리에서 큰 눈을 접어웃으며 다정하게 말을 건네는 민주가 괜찮은 애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순간 민주가 웃는 낯으로 건네는 칭찬에 속알맹이가 없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때부터 민주의 웃음이 의심스러웠다. 웃고 있지만 웃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다정하지만 분명한 선이 있다. 그걸 고등학교 1학년때 같은 반이 되고 나서 확신했다. 


원치 않아도 늘 관심의 중심에 있는 민주였다. 남자들은 어떻게든 민주와 엮이려했고 여자들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민주는 그런 덧없는 관심과 호의를 피곤해했다. 타고나길 처세에 능하고 사람을 다룰 줄 아는 민주가 티를 낸 적은 없지만 유리는 알았다. 민주는 저와 친해지려 부던히 애쓰던 같은 반 여자애들의 이름을 쉽게 기억하지 못했다. 걔가 그런말을 했었나? 이름이 뭐라고? 그런 얘길 하면서도 유리와 관련된 일은 잘 잊지 않았다. 그럴 때면 우리 제법 친한가 싶은 적도 있었다. 그래서 유리는 민주가 저에게 인간적인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유리가 기민하게 분위기를 읽는 타입은 아니지만 저를 향한 호의는 귀신같이 감지했고, 타고나길 사랑받는 법을 알았으니까. 


얼핏 리액션이 커 보이는 민주는 사실 감정 기복이 크지 않았다. 무엇이든 무던하게 웃고 넘길 수 있었고 그 일면에는 다소 염세적인 태도도 깔려있었다. 옆 학교에 걔가 임신을 했대. 언니 남자친구가 다른 남자랑 키스하는걸 봤대. 걔네 엄마가 알고 보니 새엄마래. 어떤 소리를 들어도 적당히 반응해주는 민주였지만 나중에 물어보면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 어느 날 유리가 너는 그런 얘기가 충격적이지 않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때 민주는 피곤하다는 듯 그딴 게 저와 무슨 상관이냐며 원래 인간의 본성은 추악한 거라며 짜증을 냈던 것 같다.


그런 이유에서 민주가 여자로 보이지 않기도 했다. 유리는 기본적으로 자상하고 다정다감한 사람이 좋았다. 거기에 연상이면 금상첨화. 민주는 평상시 사근사근 웃고 다니는 거에 비해 저에겐 좀 틱틱거리는 감이 있었다. 그게 딱히 불만인 적은 없었다. 저도 그게 편했으니까.  


어쨌든 이와 같은 이유에 보태서 동성결혼 찬반 토론에서의 민주의 언행이 유리의 커밍아웃을 종용했다. 유리는 나름대로 신중하게 대상을 고르고 후보를 추렸고, 그게 김민주였다. 오히려 이런 애들이 진짜로 신경 안 쓰니까. 나 그런 거 이해한다고 섣불리 말하는 애들 보단 아예 무관심한 쪽이 낫다는 결론이었다. 그렇게 제 발로 약점을 다 드러내고 나서야 알았다. 발톱을 숨긴 맹수에게 자신을 직접 제물로 갖다 바쳤다는 것을.  







*







용철의 어깨에 기대 눈물을 쏟은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민주를 보게 되었다. 마음고생 하느라 밀린 진도를 따라잡으려 일요일 아침부터 학원 보충수업에 다녀온 유리는 피곤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처음 보는 신발이 눈에 띄었다. 엄마, 누구 왔어?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음식 냄새가 났다. 바닥에 가방을 던져놓고 부엌께로 터덜터덜 걸어와 보니, 척 보아도 고급스러운 한우 세트가 식탁에 놓여있다. 민주엄마가 글쎄 지난번에 일 도와준 게 고맙다고 이런 걸 보냈지 뭐니. 아까 민주가 들고 왔는데 어떻게 그냥 보내니. 같이 먹어야지. 민주 네 방에 있으니까 들어가 봐. 


미친, 김민주가 내 방에 있다고? 






*






단정한 연보랏빛 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민주는 유리의 책상 앞에 서서 노트를 팔랑팔랑 넘기고 있었다. 요란스레 문을 여는 소리에 민주가 돌아보았다. 시선이 교차하고 이내 민주가 들고 있던 게 무엇인지 눈치챈 유리가 사색이 되었다. 



"미친 거 아냐?!"



유리가 방문을 닫고 신경질적으로 걸어와 민주 손에 들린 제 손바닥만 한 다이어리를 가로채려 팔을 뻗었다. 민주는 잽싸게 손을 위로 들어 유리의 손길을 피했다. 



"너 최예나한테 꽤 진심이구나?"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왜 남의 물건에 손을 대?"



유리는 제 것을 잡아채려 허공에 손을 뻗으며 까치발을 들고 폴짝거렸다. 키가 조금 더 컸던 민주는 조금씩 뒷걸음질 치며 웃는 얼굴로 유리를 비스듬히 내려봤다. 



"무슨 인소인줄. "

"뭐라는 거야. 당장 내려놓고 내방에서 꺼져. 아니 우리 집에서 꺼져."



유리가 팔을 허우적거리며 언성을 높이자 민주가 다이어리를 책상에 던지고 푸스스 웃었다.



"유리야, 부모님은 아시니?"



민주가 아무렇게나 던진 다이어리를 황급히 집어 드는데 유리의 귓가로 다정한 말투와 어울리지 않는 뼈있는 말이 날아와 꽂혔다. 



"뭐?"



뒷골이 쎄하게 당겨온다. 유리는 생략된 목적어가 무엇인지 직감했다. 명백한 협박이었다.



"그러니까 목소리 낮춰, 어머니 들으실라."



고저없이 낮게 읊는 민주의 목소리에 왠지 모를 위압감이 서려 있다. 유리는 알 수 없는 긴장감에 혀로 입을 축였다. 날뛰던 호흡이 제자리를 찾아가자 거꾸로 솟구쳤던 피가 도로 몸의 곳곳으로 퍼진다. 흥분이 가라앉자 제 다이어리가 품은 저의 비밀들이 떠올랐다. 수치스럽다. 얼굴이 서서히 달아올랐다.



"너 막 여자끼리 연애하고 그런 것도 찾아 보나봐?"



민주가 팔짱을 끼고 웃으면서 유리에게 다가왔다. 대꾸할 가치도 없다. 유리는 민주를 애써 외면하고 서랍에 다이어리를 쑤셔 넣었다. 상대하지 않으리라 마음 먹었는데. 민주로 인해 겪었던 수치와 모욕감의 잔상이 파노라마처럼 밀려들어 왔다. 시내에서의 해프닝 덕분에 잠잠해졌던 감정의 표면이 다시금 물결치는데 오히려 마음은 차분해졌다. 유리는 길게 한숨을 뱉어내고 민주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너 나한테 왜 그러는데?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어? 그래, 아웃팅한건 그렇다 쳐. 너 같은걸 믿고 함부로 말한 내 잘못이라 치자고. 근데 뻔뻔하게 우리 집에 와서 내 얼굴 보면서 밥 처먹을 생각이 드냐 너는?"

"나는 이해가 안 가. 도대체 최예나가 왜 좋아?"

"지금 그 얘기가 왜 나와? 말 돌리지 마."

"너 그럼 여자랑 키스하면 꼴려?"



차분하게 문장을 고르던 유리는 상상도 못한 말에 할 말을 잃었다. 너무도 뻔뻔하고 평온한 태도로 노골적인 말을 하는 민주에 정신이 피폐해질 지경이었다.



"ㄴ,너는 지금 그런 말이 ..."

"아, 너 남자랑도 안 해봤지. 근데 니가 레즌지 어떻게 알아?"



얘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지. 



"그걸 무슨...그런걸 꼭...해봐야 아냐?"

"그럼 너...."



어쩐지 유리의 눈치를 보며 뜸을 들이는 민주가 도대체 무슨 폭탄을 날릴까 유리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나랑 키스하면 젖겠네?"

"와 미친 말 좀 진짜... 야, 아니, 하 너 지금 그거 성희롱이라는 자각은 하고 말하는 거냐? 그리고 나는 무슨 취향도 없는줄 알아? 너 같은 건 홀딱 벗고 달려들어도 안꼴려."



어쩐지 말리는 기분에 발끈해버렸다.



"왜? 나 존나 예쁜데"

"뭐래."

"예쁘잖아, 솔직히"



....시발 예쁘긴 한데.



"아, 그냥 너는 싫어."

"왜 싫어."

"싫다고."

"그니까 왜 싫냐고"

"아니, 그냥 싫다고!"

"가만 듣다 보니 존나 기분 나쁘네. 솔직히 최예나보다 내가 훨씬 예쁘잖아"



뭐에 핀트가 나갔는지 민주가 팔짱을 풀고 한손으로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올리며 말했다.



"개소리야. 그리고 니 아까부터 언니자 안붙이냐? 예나언니가 니 친구야?"

"지랄. 야, 내가 벗고 달려들어도 안꼴린다고?"

"그래!"

"진짜?"

"어! 니 존나 싫어! 역겹다고! 꺼지라고!"



소리가 샐까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말하느라 목이 자꾸 긁혔다. 유리가 끓어오르는 화를 가라앉히려 애쓰면서 반박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민주가 오묘한 얼굴로 유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한동안 대치 상태로 정적이 감돌았다. 이내 무언가 생각난듯 민주의 입에서 한숨 같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민주는 머리를 한번 쓸어 올리고 유리를 비스듬히 깔아보며 한손을 제 셔츠 단추에 올렸다.  



"너...뭐해."

"확인해보려고."



민주의 도발에 눈에 띄게 당황한 유리 앞으로 민주가 단추를 하나씩 툭툭 풀면서 천천히 다가왔다. 좁은 방에서 순식간에 바짝 좁혀진 거리에 유리가 뒷걸음질 친다. 금세 차가운 벽이 등에 닿는다. 유리는 어느새 세 번째 단추까지 풀린 셔츠 사이로 보이는 하얀 속살을 보지 않으려 애썼다. 방문 바로 옆의 벽에 붙은 유리는 부엌의 소음을 신경쓰며 새되게 말했다.



"너...그만, 그만해."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민주가 고개를 꺾어 유리의 귓가에 속살거렸다. 



레즈 아닐 수도 있잖아.

확인해보자.

도와줄게.



어림도 없다는 듯 빙글빙글 웃으며 한마디씩 끊어 말하는 민주의 낮은 목소리. 얼어붙어 강제로 설득당한다. 장난스러운 얼굴은 금세 낯빛을 바꾸어 서늘해진다. 귓가에 나직이 울리는 숨소리와 옷깃이 스치며 울리는 소리. 모든 것이 유리를 압도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꾹 다문 유리의 입술이 미세하게 요동친다. 체온이 느껴질 정도로 가깝지만 어느 곳 하나 닿지 않았다. 


가까이서 본 민주의 얼굴은 부정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길게 말려 올라간 속눈썹과 유려한 턱선. 가로로 길쭉해서 시원하게 트인 눈을 반만 접어 웃으니 거부할 수 없이 유혹적이다. 민주의 시선이 유리의 눈에서 코, 입술로 끊어지듯 옮겨갔다. 그 노골적인 탐색에 저도 모르게 숨이 막혔다. 가슴을 꿰뚫린 듯 온몸이 뜨거워지고 심장이 방망이질 쳤다.


단추를 풀던 손을 들어 천천히 유리의 뺨에 손바닥을 올렸다. 유리의 몸이 저도 모르게 움찔거리고 의지와 상관없이 굴복하게 된다. 언제든 태세를 바꾸어 자신의 목을 물어뜯고 탐욕스럽게 먹어 치울 것 같았기에. 팽팽하게 당긴 목줄에 속절없이 끌려가는 개처럼 주인의 의지만으로 고개가 꺾였다. 


코끝이 스치면서 눈이 감겼다. 훅 끼치는 샴푸향에 감은 눈앞이 빙빙 돌다 이내 입술이 닿았다. 시릴 것 같은 입술은 데일 듯 뜨거웠다. 발끝이 절로 오므라들고 머금고만 있던 입술을 빨리면서 어깨가 들썩였다. 미끄러지듯 들어온 혀가 느리고 집요하게 도망가는 유리의 혀를 옭아맨다. 유리는 곧 익사할 것처럼 숨이 찼다. 


축축해진 입술이 떨어지고 나서도 유리는 한참이나 눈을 뜨지 못했다. 감은 눈틈으로 눈물이 샜다. 입술을 뗀 민주는 말이 없었다. 엄마의 부름에 민주가 밖으로 나가 도어락 종료음이 들릴때까지도 유리는 눈을 뜨지 못했다. 잘근잘근 짓밟힌 기분이었다. 일방적인 키스때문도, 드러난 제 치부때문도 아니었다. 그 어떤 사랑의 형태도 갖추지 못한 감정이 유리를 더욱 비참하게 했다. 혐오와 원망이 목적지를 망각하고 유리의 심연으로 곤두박질친다. 끔찍해서 잊을 수 없다고 하기엔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욕망으로 채워진, 그래서 더 잊고 싶은 첫키스였다.  


자취방으로 돌아와 뜨거운 물줄기를 맞으며 회상하던 유리는 신경질적으로 샤워볼을 집어던졌다. 몹시도 자존심상하는 경험이었다. 유리는 그날일을 필사적으로 부정해왔다. 얄궂게도 오감은 예리한 면이 있어서 기억의 일부를 머금는다. 연약한 점막을 자극하는 생경한 감각, 코 끝에 감도는 달큰한 체향까지. 유리는 수증기 속에 멀건히 서서 한동안 입술을 매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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