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 파이크 x 대학생 술루

Husband&Husband, La Vie en Rose의 걔네들 맞습니다.

사귄 지 2년 후 일상물.





 

 

 

그런 날이 있다. 무얼 해도 엉망으로 치닫고, 하나의 일이 끝나기도 전에 다른 일이 닥쳐 허둥지둥 모든 일을 해결하려니 정신이 쏙 빠지는 날이 1-2년에 한 번 쯤 있다. 이번 학기는 원래 목요일이 가장 바빴다. 1교시부터 학부 강의가 있으며 늦은 오후에 대학원 강의도 있고 저녁에는 연구실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발표하는 정기 세미나가 있다. 게다가 오늘은 오전부터 시(市)와 협업하는 프로젝트의 미팅이 예정돼 있었다.

아침 일과는 매일 같다.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린 후 토스터에 빵을 넣고 커피포트를 켠다. 얼굴과 머리단장을 하고 셔츠와 바지만 갈아입은 채 식탁에 앉아 토스트에 버터와 잼을 발라 커피와 함께 먹으며 오늘의 할 일을 떠올린다. 음식을 씹고 카페인을 투여해 뇌를 깨우는 작업이다. 그날의 해야 할 일이 말끔하게 머리에 정리되면 커피를 마저 마시며 전화로 술루를 깨워 짤막한 통화를 하거나 아침 안부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그러니까 오늘은 바쁘고 중요한 날이긴 했지만 평소와 마찬가지의 아침이었다. 새하얀 드레스 셔츠와 회색 정장 바지를 입었다. 커피를 딱 한 모금 마시고 테이블에 내려놓는 순간 중요한 하루의 시작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제기랄.”

엎어진 머그잔에서 나를 향해 쏟아지는 커피를 피하려 벌떡 일어났지만 테이블 다리에 무릎을 부딪치기만 했을 뿐 이미 셔츠와 바지에 큰 갈색 얼룩이 졌다. 옷을 벗어 던지고, 행주로 테이블과 의자, 바닥에 흘린 커피를 대충 훔쳐냈다. 피부까지 커피가 묻은 탓에 몸을 씻고 다시 옷장 앞에 섰다. 밝은 하늘색 바탕에 가는 회색 격자무늬가 있는 셔츠와 감청색 정장을 골랐다. 손목시계를 차며 시간을 확인했다. 느긋하게 오늘 일정을 정리하며 식사를 할 여유가 없었다. 커피에 젖지 않은 토스트 반쪽을 씹고 포트에서 커피를 다시 따라서 조금 마셨다. 양치를 하며 침실로 가 휴대폰을 찾아 드니 충전 케이블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이게 왜 이렇지? 지난 밤 충전 단자를 헐겁게 끼운 모양이었다. 휴대폰의 배터리는 겨우 32%였다.

오늘은 술루도 나와 마찬가지로 1교시 수업이 있는 요일이다. 내 수업이 아닌 점이 아쉽지만. 이번 학기 술루는 내 강의를 듣지 않는다. 가끔 이곳에서 잔 다음날에는 내 차를 타고 함께 등교하지만 우리가 사귄 근 2년 동안 학기 중 평일에 그런 날은 극히 드물었다. 술루는 가족과 함께 사는 본인 집에서 잤고, 버스를 타고 등교했다. 술루에게서 벌써 안부 인사가 도착해 있었다.


「좋은 아침! 크리스가 바쁜 목요일이에요. 오늘은 시청에서 미팅도 있다고 했죠? 바빠서 얼굴 보기도 힘들겠네.」

「지금 막 밖에 나왔는데 날씨가 정말 화창하고 좋아요!」

「웬일로 정류장에 오자마자 버스를 탔어요. 타자마자 앉았고. 오늘 좋은 하루가 될 것 같은 기분이에요. :)」


나는 칫솔을 입에 물고 휴대폰 자판을 두드렸다.


「나는 아침부터 옷에 커피를 엎질렀어. 덕분에 잠이 확 깨버렸지.」


메시지를 보낸 지 몇 초 지나지 않아 답장이 도착했다. 세면대에 치약 거품을 뱉고 입을 헹구며 메시지를 확인했다.


「저런, 어떡해! 뜨거웠겠다. 괜찮아요? 안 데었어?」

「응, 괜찮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


물기가 묻은 손가락으로 답장을 쳐서 보내고, 서둘러 넥타이를 매고 재킷을 입은 후 가방과 차 키를 들고 집을 나왔다. 술루 말대로 햇살이 아름답고 선선해 기분 좋은 날씨였다. 이런 날 교외로 드라이브나 가면 좋으련만! 난 조용한 피아노 음악을 틀고 머릿속으로 아까 미처 하지 못 했던 오늘 일정 정리를 하며 학교로 차를 몰았다.

 


강의실로 곧장 출근해 평소와 다름없는 완벽한 강의를 마쳤다. 운이 좋은 날은 사무실로 가는 길에 수업을 마치고 다음 강의실로 이동하는 술루와 마주칠 수 있지만 오늘 그런 운은 내게 허락되지 않았다. 사무실로 돌아가 미팅 자료를 정리하는 잠깐 동안이라도 휴대폰 충전을 했어야 했는데 깜빡 잊었다. 아무런 메시지나 전화가 오지 않은 지금은 휴대폰을 들여다 볼 여유가 없었고, 언제나 아침에 완전히 충전된 상태로 나오던 습관 때문이었다. 준비를 마치고 차에 올라 타 시청으로 출발하기 전 술루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서 휴대폰 화면을 켰을 때에서야 배터리가 얼마 없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아, 어쩐지. 메신저 앱을 열고 나서야 왜 출근길에 오른 이래로 휴대폰이 잠잠했는지 깨달았다. 젖은 손가락 때문에 전송버튼이 제대로 눌리지 않았는지 난 괜찮다는 메시지가 입력창에 떠있었다. 나는 입력창의 글자를 모두 지우고 새로 문장을 입력해 이번에는 제대로 전송을 눌렀다.


「아까 메시지가 제대로 안 갔었네. 난 괜찮아. 이제 미팅하러 시청에 가. 아마 지난번처럼 거기서 점심 먹으면서 일할 것 같네. 수업 잘 듣고 점심 밥 거르지 말고 영양가 있는 거 먹어.」


안전벨트를 매고, 시동을 거는데 술루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 녀석이 또 강의 중에 휴대폰을 보네.


「응, 잘 다녀와요.」


키스를 보내는 이모티콘에 마음이 녹아 잔소리 하려던 생각을 접고 하트 이모티콘 하나를 보낸 후 휴대폰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매달 진행하는 미팅을 목요일 11시에 잡도록 허락한 인간이 도대체 누구야. 나는 과거의 자신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시청의 한 컨퍼런스 룸에 주무부처 공무원들, 나를 비롯한 각 분야의 교수 넷이 모여서 진행하는 미팅은 늘 예정된 시간을 넘기기 일쑤였고 세 번째부터 우리는 아예 샌드위치를 먹으며 일을 진행했다. 오늘도 1시가 가까워졌지만 논의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공무원 한 명이 밖에 나가 사온 샌드위치를 나누어 주었다. 메뉴를 고를 기회는 줘서 감사하다 해야겠지. 내용물이 부실하고 맛도 그다지 좋진 않지만 허기를 면하고 머리에 당을 공급하는 목적은 충분히 달성했다.

내 연구가 행정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것을 보거나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과 함께 일하는 것은 사실 짜릿할 만큼 만족스러웠지만 오늘은 컨디션이 좋지 않은 건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각자의 연구는 슬슬 성과를 드러내고 있고 우리가 처음에 예상한 것보다 일이 잘 풀리고 있단 걸 알았으니 오늘은 이만 마무리하고 보내줬으면 싶은데. 나만의 바람이었는지 미팅은 그로부터 30분이 더 지나서야 정리되었다.

 

사무실에 돌아와 한숨 돌리며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대학원 수업에 들어가기 전까진 한 시간 가량 여유가 있었다. 맛있는 커피 한 잔이 간절했다. 지금 교내 카페에 내려가 커피를 사온 후 수업에 들어가기 전까지 시청에서 논의한 내용을 정리하면 될 것 같았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들어온 사람은 학과장이었다. 시와 진행하는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교수 네 명은 모두 다른 대학 소속이었다. 학과장 M 교수는 이 프로젝트에 관심이 많았다. 내가 우리 학과의 명성을 드높일 기회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오늘 논의한 내용과 진행사항에 대해 물었다. 나는 커피를 포기하고 그에게 내용을 간추려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나눈 지 20분 쯤 지났을 무렵 노크 소리가 들려 학과장에게 눈짓으로 실례한다는 의미를 전하고 방문자에게 들어오라 일렀다. 문이 열리기 전부터 누가 들어오는지 이미 예상한 내 표정에는 기대감과 아쉬움이 뒤섞여 있을 것이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기 전에 언제나 내 몸은 내 연인이 문에 손가락 마디를 부딪쳐 내는 소리의 리듬과 강도를 알아차려 반응했다.

사무실 문을 연 술루는 나와 M 교수에게 공손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M 교수님께서 와 계신지 몰랐어요.”

“응, 파이크 교수님이 시와 진행하는 프로젝트 이야기를 좀 들으러 왔네. 혹시 미리 예정된 면담이나 약속인가?”

“아, 아니에요. 급한 거 아니니 나중에 다시 올게요.”

우리 사이를 모르는 남 앞이지만 아마 내 얼굴은 누가 봐도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고 있나 보다. 내가 몹시 아쉬워 할 때 나를 달래는 술루의 표정이 피어올랐다.

“오늘은 아마 저녁 7시는 돼야 여유가 날 거야. 미안하지만 내일이나 다음 주에 연락하고 다시 오렴.”

“네, 알겠습니다. 오늘 연락드리려 했는데 교수님 전화가 꺼져있었어요.”

“아, 휴대폰 충전이 제대로 안 돼서 꺼졌나 보다. 헛걸음하게 해서 미안하구나.”

이제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려 사무실을 나갈 줄 알았지만 술루는 그러지 않고 내게로 다가왔다. 빙긋 미소 짓는 그의 오른손에는 테이크아웃 커피 두 잔이 담긴 캐리어가 들려있었다. 술루의 의도를 깨닫고 다시 아쉬움이 몰려왔다. 수업하러 가기 전까지 나는 이곳에서 내 연인과 휴식을 취할 수도 있었다.

“이거 파이크 교수님 드리려고 산 거예요.”

“고맙구나. 잘 마실게.”

술루가 커피 잔 하나를 내게 건네고 M 교수에게 다른 커피 잔을 보였다.

“교수님, 커피 드실래요? 따뜻한 아메리카노예요.”

“아냐, 고맙지만 괜찮아.”

“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술루가 사무실을 나가고 나는 커피를 한 모금 음미했다. 고소한 크림이 들은 진한 커피였다. 몇 시간 전부터 미세하게 나를 괴롭히던 두통이 멎고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술루는 내가 부실한 점심을 먹은 것을 알고 일부러 커피를 챙겨와 준 것이다. 아, 내 인생의 빛! 너를 만나기 전에는 내가 삶의 괴로운 순간을 어떻게 버텼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M 교수는 정확히 수업 시간 12분을 남기고 내 사무실을 떠났다.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확인하니 술루의 말대로 꺼져있었다. 어째 오늘 아무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안 오고 잠잠하다 했네. 충전기를 연결하고 수업자료를 챙겼다. 휴대폰의 전원을 켰더니 술루의 지난 메시지 몇 통을 이제야 볼 수 있었다. 미팅 잘 마쳤느냐, 점심은 주더냐, 주차장에 차가 있는 걸 보니 학교에 돌아온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카페에서 커피를 사서 내게로 오겠다는 사랑스러운 메시지들. 몇 시간 동안 연락도 안 된데다 기껏 커피를 사서 여기까지 왔는데 같이 있지도 못하고 나가야 해서 실망했겠지. 술루는 이제 수업이 끝났을 거고 내가 알기로 그애에게 오늘 다른 일정은 없다. 난 앞으로 한참 더 있어야 일이 끝나니 잡아두기도 미안하다. 나와 술루의 소중한 시간을 방해한 M 교수에게 화가 났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걸었다.

 

“이제야 제대로 통화하네. M 교수님 가셨어요?”

예상 밖의 반가워하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응, 기껏 커피 사서 와줬는데 그냥 보내서 미안해.”

“무슨 그런 것까지 미안해하고 그래요. 난 괜찮아요.”

“난 이제 또 강의 들어가. 너는 집에 갈 거니?”

“저녁에 자기 제대로 만나고 갈래요. 퇴근할 때 연락해요.”

“오늘 세미나는 좀 늦게 끝날 것 같은데……”

“과제하면서 기다리면 돼요.”

나는 네가 지금 나에게 심통을 부려도 이해할 텐데 너는 어쩌면 이렇게 이해심이 깊고 나를 생각해주는지.

“배고프면 기다리지 말고 저녁 먼저 먹어.”

“맨날 내 밥 걱정만 해.”

술루의 툴툴대는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잔소리 안 하면 안 챙겨 먹으니 걱정돼서 그렇지. 이제 강의실 가야겠다. 충전해야 하니까 휴대폰은 사무실에 두고 나가.”

“알았어요. 이따 봐요.”

 

 

석박사생 녀석들이 오늘 따라 수업 중에도, 수업이 끝난 후에도 유달리 질문이 많아서 한참을 붙잡혀 있었다. 열정이 넘치는 학생을 가르치는 건 이 직업에 보람을 느끼는 요소 중 하나지만 오늘은 살짝 피로감이 몰려왔다. 하필 이 강의실의 마지막 수업이라 우리를 방해하는 이도 없었다. 학생들의 궁금증을 모두 해결해 주고 나서야 나는 풀려날 수 있었다.

사무실에 들러서 휴대폰을 챙기고 물을 좀 마신 후 화장실도 다녀오니 금방 세미나가 시작할 6시가 가까웠다. 이렇게 하루 종일 정신없이 바쁠 수가 있나. 하필 오늘 발표자인 박사생은 내 연구실 학생 중 누구보다 세미나를 길게 진행하는 S였다. 운이 좋으면 한 시간 안에 끝날 수도 있겠지만… 아마 7시를 훌쩍 넘기겠지.

똑똑한데다 언제나 완벽을 추구하는 아이라 내가 지적할 내용이 별로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사실 그의 발표는 흠 잡을 데 없이 훌륭했다. S가 발표를 1시간 동안 진행하고 이어서 다른 학생들의 질문과 토론이 이어졌다. 그래, 우리 애들은 누구보다 열심이고 학구적이지. 기특하구나. 그런데 얘들아, 내가 지금 좀 허기진데 말이야…….

 

세미나가 마무리 된 시간은 7시 30분이 조금 지나서였다. 오늘의 모든 공식 일정이 끝났군! 사무실로 돌아온 나는 지친 몸을 의자에 반쯤 누이고 술루에게 전화를 걸었다.

“크리스! 이제 다 끝났어요?”

“응, 드디어 자유야.”

“목소리가 완전 지쳤네요.”

술루가 작게 키득거렸다. 내가 제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즐거운가 보다.

“지금 어디니? 뭐 하고 있어?”

“학교 앞 카페예요. 조금 전에 과제를 마쳤어요. 어떻게 우리 일이 끝난 시간이 딱 맞았네요. 크리스, 배 많이 고프죠? 우리 밥 먹으러 가요.”

“아직 안 먹었어?”

“당신이랑 먹으려고 기다렸죠.”

아이고, 이 시간까지. 술루의 대답에 저절로 내 미간이 찌푸려졌다.

“기다리지 말라고 했잖니.”

“괜찮아요. 점심 많이 먹어서 별로 안 고팠거든요. 내가 지금 사무실로 갈까요? 아니면 주차장? 아님 이 근처 식당?”

 

우리는 10분 후 주차장의 내가 늘 차를 세우는 구역에서 만났다. 나는 차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술루를 보자마자 품 안 가득 내 사랑을 끌어안았다. 술루가 내 허리를 마주 안아 주었다. 몸이 나른해진다.

“오늘 하루도 수고 많았어요.”

“응, 너도.”

내가 술루의 어깨에 얼굴을 묻자 술루가 내 등을 쓰다듬고 토닥였다.

학교에서 차로 15분 거리에 있는 우리가 좋아하는 식당으로 향하는 동안 술루가 내게 오늘 힘든 하루였냐고 물었다.

“아침에 문자 답도 제대로 없었고 시청에 간 이후로 연락이 안 돼서 좀 이상하다 생각했어요.”

“미안. 아침에 커피를 엎어서 다시 씻고 옷 갈아입고 정리하고 나니 여유가 별로 없지 뭐니. 양치하는 중에 너랑 메시지를 주고받은 건데 정신이 없어서 전송 안 된 것도 몰랐어. 휴대폰은 밤 동안 충전이 안 되었더라고. 충전기를 제대로 안 꽂은 모양이야. 그 사실을 출근한 동시에 깨끗이 잊었지. 전화나 메시지가 안 울리면 휴대폰을 들여다 볼 일이 별로 없지 않니? 오늘처럼 바쁜 날에는 특히 말이야.”

술루에게 변명처럼 이야기 할수록 오전의 내 자신이 얼간이처럼 느껴져 우리 둘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식당에 자리를 잡고 메뉴를 대충 넘겨본 술루는 결정을 빠르게 내린 것 같았다. 나는 이미 너무나도 잘 아는 메뉴를 인상을 찡그리고 한참 쳐다보았다.

“난 샐러드 파스타 먹을 건데 당신은요?”

“나는, 음… 로스트 치킨.”

대답을 하면서도 메뉴에서 눈을 떼지 못 하니 술루가 메뉴판에 올라간 내 손을 건드렸다. 술루에게로 시선을 돌리니 내 사랑이 다 안다는 듯한 태도로 슬쩍 미소 짓는다.

“지금 맥주 마시고 싶죠?”

“응.”

“마셔요. 운전은 내가 할게요.”

“아냐, 괜찮아.”

“에이, 괜찮으니 그냥 마셔요. 나는 택시타고 들어가도 되고 아니면 우리집에 차 세웠다가 내일 아침에 내가 자기 출근 할 때 맞춰서 집으로 가서 같이 등교해도 돼요.”

“너 내일 나보다 수업 늦잖아.”

“뭐 어때요. 커피도 마시고 좀 쉬다 들어가면 되지. 난 알아서 할게요. 나 믿고 마셔요.”

“음, 그럴까?”

애인 좋다는 게 뭐겠냐는 술루의 말에 나는 결국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었다. 맥주를 마시기도 전에 벌써 취기가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자신은 평소와 다름없는 평이한 하루를 보냈다던 술루는 나에게 힘들었던 오늘 일을 모조리 말해 보라 했다. 밥을 먹으며 재밌지도 않은 내 이야기에 추임새까지 넣어가며 열심히 경청하는 술루를 보는 것만으로도 피로가 가시고 스트레스가 줄었다. 술루에게 이야기를 하니 고되었던 일들이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고 그저 내가 피곤했던 것이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그렇게 끔찍한 일은 없었잖아? 맥주를 두 잔째 마시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술루가 입을 열었다.

“크리스.”

“응, 아가.”

“기분은 좀 나아졌어요? 있지… 오늘 내가 옆에 있어 줄까요?”

“정말? 네가 그렇게 해 준다면 무척 고마울 거야.”

내 어린 연인이 만족스러운 듯 씨익 웃으며 양손으로 내 뺨을 감싸고 입술에 제 입술을 꾹 누른다. 내 마음에 행복이 넘실거린다. 내일 아침까지 술루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식당에서 굳이 시간을 오래 보낼 필요는 없다. 우리는 남은 맥주와 콜라를 서둘러 비우고 가게를 나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술루는 샤워를 했고 나는 아침에 미처 다 수습하지 못한 잔해들을 정리했다. 방학도 주말도 아닌 날 술루가 내 집에서 자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평소에는 느긋하게 홀로 밤 시간을 즐겼지만 오늘은 술루가 곁에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내일 제출해야 하는 과제를 이미 다 마친 술루가 대견하기까지 했다.

내가 샤워를 마치고 욕실에서 나오니 술루가 홈웨어로 입는 내 티셔츠와 속옷만 입고 거실 소파에 앉아 음악을 듣고 있는 것이 보였다. 술루가 기다렸다는 듯 내 손목을 잡고 침실로 이끌더니 목에 팔을 감고 입을 맞춰 왔다. 나는 기꺼이 입술을 붙이고 샤워 가운을 벗으며 술루를 침대에 눕혔다.

 

“이정도면 하루의 마무리로 꽤 괜찮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사랑을 나눈 후 나란히 누워서 큰 의미 없는 잡담을 하던 중 술루가 말했다.

“이보다 더 완벽할 순 없지.”

너의 온기, 너의 숨결, 내게 조곤조곤 이야기 하는 너의 목소리, 나를 사랑한다 말하며 웃는 너. 네 덕에 내 하루가 따뜻하게 빛나고 내 주위에 평화가 감돈다. 나는 술루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 이마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그거 아니, 히카루? 오늘은 좋은 날이었어.”

술루가 눈을 접어 웃으며 손끝으로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전부 네 덕이야.”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술루가 내 입에 부드럽고 감미로운 키스를 내렸다. 술루의 등을 감싸 안았다.

“너와 함께 시작하는 내일도 좋은 날이 될 거야. 네가 옆에만 있어 주면 언제까지고 그럴 거야.”

“나도 그래요.”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을 네가 알아주기를, 너도 나와 같은 걸 느끼길 이 순간 간절히 바란다. 너도 나로 인해 행복했으면, 나라는 사람이 네게 기쁨이 될 수 있다면.

“우리는 항상 행복할 거예요. 계속 둘이 함께일 테니까.”


아, 오늘은 정말 좋은 날이다.

 



@rabbit5d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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