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은… 나랑 연애하는거에요? 아님 날 키우는거에요? 


올라오는 제 감정을 꾹 누르며 쏟아낸 한마디를 끝으로 기욱은 이만 가보겠다며 용훈에게 뒷모습을 보였다. 놀랍게도 기욱이 먼저 저를 등지고 가는 모습이 오랜 기간 기욱을 보면서 처음이었다는 것을 지금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곧 이어 기욱이 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도 이제서야 제대로 된 그 사랑의 크기 만큼 다가와서, 용훈은 그 자리에서 한참을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용훈이 교생 실습을 가게 된 곳은 제 자취집 근처의 한 고등학교였다. 나름 평판도 괜찮은 사립고등학교였는데 마침 운이 좋게 국어과목은 자교 졸업생이 아닌데도 자리가 있어 받아준다길래 냉큼 기회를 잡았더랜다. 잠깐 돌아본 학교 분위기도 좋았고, 학생들도 착해보였다. 그리고 기욱을 그 곳에서 처음 만났다. 

담임선생님이 제 소개를 하는 중에 용훈은 실습 시작 전날까지 외워온 얼굴과 이름을 매칭시키다가 기욱과 눈이 마주쳤다. 제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는 기욱에 용훈은 보조개가 들어가게 방긋 웃었다. 기욱은 쑥스럽다는 듯 뒷목을 벅벅 긁더니 시선을 창문으로 돌렸다. 제게 차례가 넘어오자 용훈은 자신을 소개하면서 길지 않은 기간이지만 소중한 기억을 함께 만들 수 있길 바라면서 친구 같이 지내보자고 말하다가 기욱과 다시 눈이 마주쳤다. 유독 초롱초롱하게 저를 바라보는 것이 괜히 더 귀여워서 생긋 웃었다. 그것에 대답이라도 하는 듯 마주 웃어보였다. 

용훈은 교사라는 일에 큰 뜻이 있진 않았다. 그저 신입생때 처음 연애를 했던 같은 과 누나가 교직 강의의 폐강을 막으려고 했던 칭찬에 낚인게 전부였다. 목소리가 좋고 감성이 좋아서 문학을 잘 가르칠 것 같다고. 사실 틀린 말이 아니긴 했지만. 물론 망한 연애가 되어 한 학기만에 금방 차였고, 당연히 그 누나는 한참 먼저 졸업도 해버렸다. 용훈은 애매하게 남은 교직이수 학점을 수습하려 하다가 자연스레 교생까지 왔다. 

용훈의 타고난 성격 덕인지 학교에 금방 녹아들었다. 학생들도 초반에는 “잘생긴 쌤”이라며 좋아했고 갈수록 "웃긴 쌤"이라며 많은 학생들이 그를 잘 따랐다. 선생님들도 예의 바르고 싹싹하게 사회생활을 잘 하는 그에 빨리 마음을 열었다. 

기욱은 예체능 입시 준비를 하는 학생이라지만 그닥 귀가나 조퇴가 잦지는 않았다. 오히려 일반 입시 준비생처럼 학교에 꽤 긴 기간 있었고, 성적도 준수한 편이었다. 기욱은 첫 면담 때 특히 국어를 좋아한다고 했다. 책을 그닥 좋아하진 않아서 새로운 표현들을 국어 교과서로만 접하게 되는데 그게 너무 재미있다고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기욱이 너무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머리를 쓰다듬을 것처럼 뻗었다. 용훈이 그 손을 황급히 회수하려는데 기욱이 손목을 잡고 제 머리 위로 가져다가 슥슥 스스로 쓰다듬었다. 살짝 고개를 들어 용훈과 눈을 마주치더니 싱긋 웃더니 잡고 있던 용훈의 손목을 놔주었다. 그것이 기욱과 단 둘이 생겼던 첫 번째 기억이었다. 

우연과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 된다고, 기욱의 집은 마침 우연히 용훈이 지내는 곳의 건너편이였다. 귀갓길이 겹치거나, 주말에 편의점에서 만나거나, 동네 산책하는 길에 마주치거나, 그렇게 우연찮은 만남이 쌓여 기욱과 학교 밖에서는 제법 가까워졌다. 


파란 어둠이 옅게 깔린 하늘을 보면서 나란히 집에 가는 길이었다. 춘추용 교복을 걸친 기욱은 목 부분이 답답했는지 교문을 나오자마자 넥타이를 빼서 가방에 아무렇게나 쑤셔넣었다. 앞서 퇴근하던 용훈의 뒤를 기욱이 따라와 옆에 붙었다. 가볍게 불어오는 밤 바람이 시원했다. 연습하러 가냐는 용훈의 질문에 기욱은 오늘은 집으로 바로 간다며 기분이 좋은지 웃는 소리를 덧붙였다. 피다 만 꽃봉우리 사이에 듬성듬성 꽃잎들이 살랑거렸다.

쌤 저 궁금한거 있는데.

먼저 말을 꺼내놓고 기욱은 머뭇거렸다. 기욱의 대답을 기다리며 용훈은 무슨 고민일까 제 혼자 생각했다. 아무래도 고2라면 진로 고민인가, 역시 연애상담? 용훈은 괜시리 제가 선생이라도 된 것처럼 조금 마음이 설렜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나온 대답은 용훈을 놀라게 했다. 시는 어떻게 쓰는거에요? 

조금 김이 빠진 용훈은 그래도 실망한 티를 숨기고 성심성의껏 대답해줬다. 저가 문예창작과는 아니지만서도 딱 한번 들었던 창작 수업에서는 꽤 좋은 점수를 받았던 터라 자신있는 분야였다. 정작 물어본 기욱은, 그게 목적이 아니었던 것처럼 반응이 심심했다. 이런 저런 귀에도 들어오지 않는 말들에 고개를 연신 끄덕이다가 용훈과 기욱이 각자 집으로 가기 직전에 건너야하는 횡단보도에 도착했다. 타이밍이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마침 도착하자마자 신호등은 빨갛게 바뀌었다. 

기욱은 정말 이때가 아니면 안될 것 같아서 주먹을 꼭 쥐었고 물었다. 쌤, 저 궁금한거 또 있어요. 여태 말을 너무 많이해서 목이 아팠는지 큼큼, 목을 가다듬던 용훈이 고개를 돌려 기욱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으응? 이번엔 더 진지해보였다. 학교에서 출발했을 때보다 하늘이 더 어두워져 기욱의 얼굴에는 콧대를 따라 그림자가 져 있었다.

뭔데, 기욱아. 쌤이 다 들어줄게.

쌤,  혹시 만나는 사람 있으세요? 

용훈의 말에 기욱은 진짜죠, 라고 대답하더니 이내 여태 정말 궁금했던 것을 털어놓았다. 용훈은 당연히 귀엽다는 것처럼 기욱의 질문에 '어, 너무 사적인데? 쌤은 지금 솔로에요. 빛이 나는 솔로!' 라며 대답을 했다가 멈칫했다. 장난스럽게 학생들이 쌤~첫사랑 얘기해주세요. 같은 수준의 뉘앙스가 아니라는 게 문득 느껴졌다. 용훈은 저가 지금 지나치게 상상의 나래를 펼친건가 무슨 말을 더 해줘야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기욱이 확실하게 다시 질문의 의도를 못 박았다. 사실 주말마다 동네에서 만나는 거보면 아닌거 같긴 했는데, 그래도 확실하게 알고 싶다고. 

너, 무슨….

용훈이 기욱에게 대답하려는데 금새 횡단보도의 불이 바뀌었고 기욱은 아까보다 밝아진 표정으로 그럼 내일 보자며 큰 손을 휙휙 흔들곤 먼저 길 건너로 사라졌다. 그것이 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그날을 시작으로 기욱은 더 용훈에게 노골적으로 제 의도를 보였고, 용훈은 '사제지간 부적절하다'며, 그를 피했다. 그러다가도 금새 같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기욱이 서운한 듯 표정을 지으면 제가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그게 아니라며 변명을 하기에 바빴다. 학교 안, 그리고 학교 근처에서는 절대로 티를 내지 않겠다며 기욱에게 약속을 받아냈지만서도 등하교길 정도는 늘 함께 했다. 

쌤, 교생 끝나면 형이라 불러도 돼요?

안돼요~.

마지막 교생 실습날 함께 귀가하던 기욱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용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 왜요! 기욱이 용훈의 팔을 잡으면서 앞뒤로 흔들며 용훈을 졸랐다. 기욱아, 너랑 나랑 나이가 몇이나 차이나는데…. 아니 쌤이 먼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담서요. 친구처럼 지내보잠서요. 제가 한 번씩은 지나가면서 한 적 있는 말로 반박하니 용훈은 또 할말이 없어졌다. 

근데, 기욱아. 네가 지금 말하는건 친구로 지내잔게 아니지 않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슥 물어보았다. 나름 학창시절 고백이고, 썸이고 경험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지금 저 '고딩'이 무슨 생각으로 제게 자꾸 붙는지 모를 리가 없었고 용훈의 직감은 역시나 적중했다.

당연하죠.

꽤나 당당하고 당연하게 대답하는 기욱에 용훈은 다시 뒷목을 잡고 쓰러질 뻔했다. 기욱아, 쌤이 그랬잖아. 너랑 나는 사제 지간이고…. 아 알아요. 부적절한 관계고, 근데 쌤 교생 실습 끝나면 우리쌤 아니잖아요. 순하고 말을 잘 듣는 자신의 첫 제자라고만 믿었는데 알고보니 호랑이 새끼를 키웠다는게 이런건가 싶었다. 

안되겠다. 기욱아, 너 내 번호 지워.

핸드폰을 잡고 있던 기욱의 손을 잡아 올리고 휴대폰 잠금해제를 시켰다. 손가락을 뻗어 연락처 화면을 켜는 용훈에 다른 손으로 기욱이 제 핸드폰을 바꿔들고 말했다.

저 졸업하면요? 그때 먼저 연락해줄거에요? 나 기다리고 있으면 돼요?

그래그래, 그 때 해줄테니까.

연락 안 해주면 나 쌤 학교 정문가서 드러누울거에요.

당돌한 기욱의 대답에 용훈은 제 머리를 거의 뜯을 것처럼 양손으로 부여잡았다. 자신의 업보였다. 기욱이 다시 한번 더 용훈을 올려보며 대답을 요구했다. 쌤, 그럼 저 졸업식 때 온다는 거로 믿고 저 진짜 지워요. 그러더니 기욱이 정말 미련없이 연락처 삭제를 눌렀다. 

아니, 기욱이 그렇다고 진짜 지우는거야? 

쌤이 지우라면서요. 저 진짜 기다릴게요. 

그때도 형이라 부르지 말랬다고 꼬박 쌤이라 부르고, 연락처 지우랬다고 정말 지울 만큼 저를 사랑한다는 것을 용훈은 그때부터 그냥 어려서 가능한 패기 정도라고만 생각했었다. 물론 말은 저렇게 했지만 행동력 만큼이나 좋은 기억력 덕에 기욱은 용훈의 번호를 외워서 먼저 연락했고, 아무렇지 않게 그의 연락을 받은 용훈은 그렇게 기욱의 졸업까지 함께했다. 

사귄다는 말만 없었지 거의 일주일의 반을 용훈의 집에서 지냈다. 화장실에는 칫솔이 두개가 되었고, 용훈의 큼지막한 침대에 베개는 두개가 되었다. 기욱은 용훈의 집에서 용훈의 큼지막한 티셔츠 하나만 입고 제 집처럼 돌아 다니는 것이 익숙해졌고, 용훈도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 준비를 하는 동안 제 옆에 기욱이 옆에서 수능 공부를 하는것에 익숙해졌다. 쉬는 날이면 함께 영화나, 공연을 보러가기도 했다. 기욱은 여전히 제가 쌤이라 부르고 있고, 용훈은 그런 기욱을 학생이나 아기를 대하듯 하나부터 열까지 챙겨주는 것에 가끔은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것도 자신이 졸업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으로만 알았다. 


형, 나 이제 진짜 졸업했는데.

늦겨울 어느 날 퇴근하려는 용훈의 앞에 기욱이 꽃다발을 들고 나타났다. 오늘 마지막으로 입었을 교복은 어디가고 제법 평소의 취향이라는 조금 달라뵈는 단정한 옷을 입고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용훈은 그런 기욱에게 관성적으로 형이라니 무슨 소리냐며 타박을 하려다가, 어디서 구해왔는지 용훈을 닮은 데이지 꽃다발과 함께 2년을 미룬 고백을 다시 건내는 기욱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더이상 미룰 수 있는 이유가 없었다. 기욱에게 댈 핑계가 아닌, 제 마음에 댈 핑계가 없어졌다. 긴 기간 소중하게 간직해 온 기욱의 진심이란 것을 알기에 용훈은 그 꽃을 받아들었다.


그렇게 졸업을 하고 사귀게 되면 뭐든 달라질 줄 알았다. 달라진 건 호칭 뿐이었다. 이제는 용훈을 형이라고 불러도 혼나지 않았다. 형이라고 할때면 조금 아직은 좀 어색한지 귀가 빨개지는 것을 볼 수 있는건 조금 맘에 들었다. 그치만 그게 전부였다. 

애기, 학교는 어때?

주말 낮에 나란히 소파에 기대서 드라마를 보다가 용훈이 물었다. 애기라는 저 호칭도 사실 조금 싫었지만, 그래도 용훈이 부르는 애칭이라 생각하면 조금 나았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지면서 기욱이 대답했다. 그냥 그렇지, 뭐. 근데 나는 형이랑 있는게 더 좋아요. 용훈은 말이라도 고맙다며 기욱을 꼭 껴안았다. 기욱은 이런 스킨쉽이 싫었다. 정말 '애기'가 된 것 같아서. 

형.

나긋하게 용훈을 부르자, 티비에 집중하던 시선을 떼고 기욱에 고개를 돌렸다. 드라마에 몰입한 사이 제 코 앞까지 다가와있는 기욱에 용훈은 놀라서 몸을 뒤로 젖혔다. 기욱이 뒤로 누운 용훈의 위로 올라온 모양새가 되었다. 흔들리는 눈빛으로 기욱을 올려보았고, 기욱은 입술만 올려 웃는 얼굴을 하고 뒤로 눕는 용훈에 더 가까이 다가왔다. 뭔가가 맘에 안드는 표정이었는데, 그게 무엇인지 통 알 수가 없었다. 오늘 뭔가 잘못했나 돌아봐도 딱히 떠오르는 상황이 없었다. 

티비에 나오는 두 배우처럼, 기욱은 손을 뻗어 용훈의 볼을 감싸고 제 입술을 맞대려했다. 숨을 꼭 참고 눈을 땡그랗게 뜨고 있던 용훈은 더 가까워지기 전에 기욱의 어깨를 밀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싫은건 아닌데, 어딘가 간지러워지는 제 속에 용훈은 당장 어떻게 마주해야할지 모르겠어서 상황을 피하려 했다. 얼굴이 빨개져있었고, 용훈의 손도 평소보다 더 빨개져 있었다. 어쨌든 제 연인을 갑자기 밀쳐냈으니, 뭐라도 해야할 말을 찾아야 해서 큰 눈을 도록도록 굴리며 기욱의 눈치를 보는데, 기욱은 아무 말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제 짐을 챙겼다.

애기, 가려고…? 

가만 그의 움직임을 보다가, 용훈이 겨우 한마디를 꺼냈다. '애기'라는 말을 들은 기욱은 더이상은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리에 우뚝 멈춰서 용훈을 마주보았다. 상처는 지가 줘놓고서 왜 그렇게 안절부절하는건지, 그 큰 덩치로 제가 서운해할까 걱정하는게 또 느껴져서 기욱은 마음이 약해질 뻔 했다. 하지만 이건 바로 잡아야했다. 

형은… 나랑 연애하는거에요? 아님 날 키우는거에요? 

이 말에 대한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기욱이 뒤를 돌아 용훈을 그 자리에 두고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까지 용훈은 대답할 수 없었다. 연애는 많이 해봤을 지 몰라도, 사랑이라는 진심을 마주하는 것에 있어서 진짜 최악이었다. 나 정말 별로네. 용훈은 티비 전원을 끄고 소파에 그대로 몸을 뉘였다. 재잘재잘 기욱으로 가득 차 있던 집이 너무 조용해져서 더 최악이었다. 


서운함이 단단히 쌓여있었는지 일주일이 되도록 기욱은 연락이 없었다. 기욱의 집도 알고, 생활 패턴도 알았지만 제 잘못도 알고 있어서 섣불리 전화할 수가 없었다. 대신 그 기간동안 기욱에 대해 더 생각했다. 왜 기욱이 졸업하고 온 그날 거절하지 않았는지, 더 거슬러 올라가서 기욱이 저에게 대시하는 걸 알면서도 왜 여전히 그에게 잘해주었는지. 모든 겉치레들을 다 치우고 털어내 보니 제 진심이 그 안에 숨어있었다. 연애는 능숙해도 사랑에는 여전히 기욱보다 한참 서투른 용훈이었다. 그 진심을 찾아내니 당장 기욱이 보고 싶었다. 지금 봐야만 했다.

교수 면담 때문에 꽤 늦게 끝나고 귀가하는 길에 제 집 앞에 있는 화단 옆에 웅크려 있는 인영이 보여 멀리서부터 긴가민가하면서 다가왔다. 자신이 아는 사람 중에 저렇게 큰 사람이 하나 있긴 한데 보고싶다, 같은 생각을 했다가 생각을 털어버리려는듯 머리를 휙휙 저었다. 나 지금 무지 서운하니까, 응. 기욱은 용훈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금방 풀릴 것 같아 생각도 참는 중이었다. 더 가까이 가니 아무래도 아는 사람 같아서, 자신이 생각하지 않으려는 그 사람 같아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 사람 앞에 우뚝 섰다.

왜 왔어요.

기욱의 목소리가 들리자 용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앞으로 무너지듯 기욱을 제 품에 안았다. 기욱아아. 고개를 푹 숙여 기욱의 어깨에 제 얼굴을 묻고 부비적거렸다. 기욱아. 자꾸 제 이름을 부르는 용훈에 기욱은 아직 화가 안 풀렸다는 것을 주장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짧은 대답을 했다. 

왜요. 

그제서야 용훈은 기욱에게서 조금 떨어져 마주보았다. 뭐야, 이 사람 울었어? 눈물이 그렁그렁한 것을 보고 놀란 기욱은 저도 손을 뻗어 그의 빨개진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끝으로 훔쳤다. 왜 울고 그래요, 형. 형 소리에 움찔한 용훈은 자기는 안 울었다며 혀를 빼꼼 내밀어서 입술을 축였다. 일단은 제 가족들이 언제 나올지도 모르는 집 앞에서 얘기하기 보단 근처 놀이터로 가자며 용훈을 이끌었다. 용훈의 손을 꼭 잡은 기욱의 손이 단단했다. 

기욱아, 내가 생각해봤는데.

놀이터 벤치에 나란히 앉아 용훈이 먼저 말을 꺼냈다. 조금 긴장이 되는지 손바닥이 또 새빨개졌다. 자꾸 쥐었다 펼쳤다 하는 손을 가만 보던 기욱이 그 위에 손을 얹었다. 뭐라 말을 해보려다가, 용훈은 제 위에 올려져있던 기욱의 손을 잡아 끌어 다시 그를 품에 안았다. 뭐에요, 형. 이제는 많이 누그러진 기욱의 말에 용훈이 대답했다. 

내 애인…이 너무 좋아서.

처음 듣는 '애인'이라는 말에 이번엔 기욱의 얼굴이 빨개졌다. 생각한 적도 없는 말에 기욱이 당황한 건지 말을 자꾸 더듬었다. 뭐,뭐에요 갑자기…. 나도 사…,사랑해요. 그러고는 제 눈 앞에 있는 용훈의 어깨에 고개를 푹 기댔다. 

앞으로는 잘할게. 미안.

아니에요, 그냥 내가…,

아냐, 그건 내가 잘못한게 맞으니까. 기욱이가 상처받지 않게 잘할게.

조심스럽게 기욱이 용훈의 팔을 풀고 마주보았다. 전에 꺼내 본 적 없는 제 진심을 전한다고 애 쓴 용훈이 귀여웠다. 기욱은 자신이 학생 때 용훈이 그랬던 것처럼 손바닥을 들어서 용훈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고는 모양새가 제법 웃기다 생각했는지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화가 안 풀렸으면 어떡하나 잔뜩 긴장해있던 용훈도 기욱의 표정을 보곤 한시름 놓았는지 마주 웃었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은 점점 내려와 용훈의 뺨에 멈췄다. 직장에서 여전히 힘든지 얼굴이 일주일 새 야윈 것 같았다. 뺨을 만지작거리다가 기욱이 점점 용훈의 가까이 갔다. 이번에는 용훈은 답지 않게 눈을 꼬옥 감고 있었다. 그런 표정에서 '나 마음의 준비 끝났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몸은 저보다 한참 크면서 하는 짓은 또 귀여워서 기욱은 미소를 띈 채로 가볍게 쪽 소리가 나도록 볼에 뽀뽀를 하곤 떨어졌다. 

형, 긴장했네요?

장난기가 가득 섞여있는 목소리에 용훈은 감고 있던 눈을 뜨니 여태 자신이 알고 있던 그 기욱이 돌아와 있었다. 와, 기욱이, 내 마음 갖구 장난친거야? 용훈이 제법 억울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니 기욱은 복수에요, 라고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 이 다음은 집에 가서 해요. 용훈은 호랑이 새끼를 키운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기욱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나 뒤에서 기욱을 꼭 안고 집으로 향했다. 

근데 기욱아, 이 다음은 뭔데? 

뭐든 형이 생각하는거요. 


용훈은 아무래도 호랑이 새끼를 키운게 아니라 애인으로 들인 것 같다고, 금방 제 생각을 고쳐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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