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월 -일.


밥 생각이 없다던 여주는 볼이 터질 듯 입 안 가득 욱여넣고 버겁게도 꼭꼭 씹었다. 정국이 숟가락을 쥘 생각도 못 하고 가만히 쳐다보기만 할 만큼 먹방 그 자체를 보여 주고 있었다. 

‘맛있게도 먹네.’ 

그 모습이 어이없는 정국이 픽 웃음을 터트리면, 여주가 곧장 왜 웃느냐는 듯 노려봤다. 


“아냐. 먹어.” 


미안하다며 살짝 눈짓한 정국은 그제야 한 숟가락을 떴다. 그의 눈치를 좀 보던 여주가 내내 열심히 씹은 걸 꿀꺽 삼켜 낸 후 물 한 모금을 마셨다.

‘이 사람은 왜 부추무침을 안 넣어 먹지. 넣어야 맛있는데.’ 

자기도 모르게 시답잖은 생각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뒤늦게 아차 한 여주가 생각을 떨치려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는 섞박지 하나를 씹었다. 아삭, 경쾌한 소리에 흘깃 고개를 든 정국이 웃을 듯 말 듯 입술을 씰룩이니 여주는 얼굴을 붉혔다. 정국은 팅팅 부은 눈으로 민망해하는 여주가 좀 귀여운 것 같기도 했다. 이제야 딱 그 나이 때 애처럼 보여서 한결 편한 마음으로 말을 걸었다.


“밥 먹고 뭐 할 거야?”

“그쪽이 그게 왜 궁금한데요?”

“어렸을 때 말 안 듣는다는 소리 많이 들었지.”

“별로.”

“…살아났네.”

“나 언제 죽었어요?”


‘세상에 불만이 많은 앤가.’ 

정국은 여주를 보며 그 생각밖에 안 들었다. 혹시라도 또 죽네 어쩌네 할까 봐 뭘 좀 더 묻고 싶어도, 여주는 반항기 넘치는 표정으로 그게 왜 궁금하냐며 툭툭 받아쳤다. 그 모습이 완전히 컨디션을 회복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가, 또 엄청나게 방어적인 것 같기도 했다. 당최 속을 알 수가 없어 정국은 결국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지가 알아서 하겠지. 괜히 끼어들었다가 귀찮은 일 생길라.’ 

밥만 먹으면 병원비든 뭐든 정산이 다 끝이 날 테니 딱 여기까지만 함께할 생각이었다. 그 순간, 식사를 마친 여주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테이블 위로 팔을 올려 턱을 괴었다. 


“저기요.” 


예상치 못하게 여주가 먼저 말을 걸어 놀란 탓인지, 정국은 큼큼 헛기침과 함께 한 박자 늦게 눈을 맞췄다.


“내 이름하고 나이 말고 또 뭐 봤어요?”

“뭘 더 봐야 하나?”

“아뇨. 그냥 단순한 질문인데.”

“사진, 주소, 주민 번호.”

“주소? 말해 봐요.”

“뭘 말해 봐. 기억 안 나.”


접수할 때 잠깐 보고 쓴 게 다인데 그걸 지금 어떻게 말하라는 건지 몰랐다. 정국이 기억 안 난다고 하는데도 여주는 의심스러운 표정을 거두지 않았다. 


“진짜 기억 안 나. 아, 너 서울 사는 거. 그거 하나 안다.” 


이어지는 정국의 말에 여주는 테이블 위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한쪽 눈을 찡그렸다.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태연한 척했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여주는 분명 방금까지 정국을 무슨 도둑놈 취급했으면서 이제 와 상관없다며 슬쩍 발을 뺐다. 정국은 어이없어 웃음을 터트렸다. 곧 자기도 여주와 똑같은 자세로 턱을 괴고는, 눈을 살짝 내리깔아 여주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왜 상관없는데?”

“못 외웠다면서요.”

“외웠으면?”

“찾아오게요?”

“내가 널 찾아갈까 봐 경계하는 거야?”

“경계는 아니고….”

“나 너한테 관심 없어.”


관심이 없다는 말에 여주가 소리 내 웃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눈이 감길 듯 환히 웃는 모습에 정국은 조금 얼떨떨해 눈을 깜빡였다. 웃을 줄도 알고, 곧 죽을 것처럼 있을 때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빤히 보는데, 뒤늦게 시선을 눈치챈 여주가 멋쩍은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아주 잠시였지만 둘 사이에 흐른 침묵을 견디다 못해 결국 정국이 먼저 지갑을 챙겨 들었다. 


“다 먹었으면 가자.” 


얼추 다 비운 여주의 그릇을 보고 한 말이었다. 여주는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정국의 음식을 멍하니 보다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저렇게 안 먹었는지 의문이었다. 혹시 자기가 너무 빨리 먹어서 그러나 싶어 조금 미안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그 순간, 카운터에 다다라 카드를 내밀던 정국이 여주를 흘깃 돌아보았다.


“난 별로 생각이 없어서.”

“네?”

“너 때문에 남긴 거 아니라고.”

“아….”


‘뭐야. 생각 없으면서 왜 먹자고 했어. 남 이사 밥을 먹든 말든 신경 끌 것이지. 오지랖은.’ 

여주는 왜 심술이 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내 귀찮고 짜증 나는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생판 모르는 사람을 병원까지 데려다주고 밥도 챙겨 주는 정국이 이상했다. 인간 자체가 조금 모순덩어리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였나. 계산을 마치고 카드를 지갑 안에 넣는 정국의 뒷모습을 빤히 보던 여주가, 지갑을 닫기 전에 홱 낚아채 재빨리 몇 발짝 멀어졌다. 정국은 그런 여주를 뒤따라갈 생각도 하지 않고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며 어이없는 듯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사이 여주는 정국의 신분증을 꺼내 들고 이름이며 나이며 주소까지 꼼꼼하게 눈에 담았다. 정국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손버릇도 안 좋네.”

“손버릇도?”

“말버릇도 별로잖아.”

“참 나, 자기는.”


신분증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은 여주가 몸을 홱 돌려 정국에게 지갑을 건넸다. 어차피 오늘이 지나면 안 볼 사람이라 신경을 끄려고 했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한 마음이 들어서 공평하게 정보 좀 담겠다는데 손버릇이 안 좋다고 하니 기분이 상해 버렸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정곡을 찔렸다는 표현이 더 맞았다. 여주가 지갑을 받아 주머니에 콕 찔러 넣는 정국을 멍하니 보다가 뒤늦게 큼큼 헛기침했다.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여주는 고맙다는 말을 한 번 더 할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아무런 말 없이 몸을 돌렸다. 살려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아무렴 어떠냐는 부정적인 생각이 함께였다. 그 순간 따라오는 기척 하나 없이 담담하게 뱉은 정국의 목소리에 여주가 걸음을 우뚝 멈췄다. 


“내일 뭐 해?” 


정국의 그 한마디에 흘깃 고개를 돌린 여주가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해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정국이 한 번 더 물었다.


“내일 뭐 하냐니까.”

“아무 계획 없어.”

“반말하네.”

“응. 너 서른밖에 안 먹었더라? 난 또 나보다 열 살쯤 많은 줄 알았지. 너무 당연하게 반말하길래.”

“존댓말 해 줘?”

“아니. 그냥 나도 반말할래.”


정국은 진심으로 웃음이 터져 버렸다. 뭐 하는 사람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서른여섯 먹은 줄 알았다는 말은 아닐 테고, 반말이 못마땅한 것으로 이해했다. 여주에게 의외로 당돌한 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정국은 어이가 없다 못해 계속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그러니까 점점 더 썩어 가는 여주 표정 때문에 더 웃겼다. 기분이 상한 듯한 여주에도 정국이 좀처럼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여전히 입꼬리를 올린 채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서, 마주 선 여주를 살며시 내려다보았다. 올려다보는 것도 싫은지 정국의 목 어디쯤을 보며 세상 짜증 나는 표정을 하는 여주를 보고 있자니, 불쑥 그런 말이 튀어 나갔다.


“하루만 더 살아 봐. 혹시 아냐. 내일은 좀 다를지.”


의외의 말에 한참을 가만히 눈만 깜빡이던 여주가 고개를 들어 정국과 눈을 맞췄다. ‘네가 뭔 상관이야.’라고 말하고 싶어서 입술을 달싹이다가, 눈이 마주치자마자 씩 웃는 정국을 보고는 꾹 다물었다. 

‘왜 웃어. 왜 자꾸 웃어.’ 

짜증이 나려고 했다. 진짜 웃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언제 봤다고 자꾸 훈수 두고 남의 인생에 참견인 건지 몰랐다. 할 말은 많았지만 굳이 실랑이하고 싶지 않아 답 없이 몸을 홱 돌렸다. 그 순간 한 번 더 들린 정국의 말에, 여주가 이번에는 돌아보지도 못한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내일 나 만날래?”

“….”

“그럼 좀 다르지 않을까? 너의 내일.”


정국은 등을 보이고 서 있는 여주의 앞까지 굳이 다가갔다. 여주가 돌아보지 않으니 손수 마주 보는 수고까지 마다하지 않으며 대답을 기다렸다. 상대가 눈을 내리깔고 한참이나 답이 없는데도 재촉 한 번 하지 않았다. 여주는 자기를 만나면 좀 다르지 않겠냐는 정국의 말을 꽤 오랫동안 곱씹었다. 

여주의 내일. 여주의 내일은 어떨까. 아마 똑같을 거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감는 순간까지 내내 괴로워서 쉴 새 없이 죽고 싶다 생각할 거다. 그러다 때 되면 배고프고 잠이 오는 자기 자신이 미치도록 싫어서 쉼 없이 자책할 거다. 그런 내일이 정국을 만나면 달라질지 누가 아냐고?

여주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정국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들릴 듯 말 듯 아주 작게 잇는 말은, 꽤 오랜 시간을 고민한 것치고는 왜인지 기운 빠지는 답이었다.


“생각해 볼게.”


여주는 고작 그 한마디를 남기고 정국을 스쳐 지나갔다. 정국은 뭘 어떻게 생각해 보겠다는 건지 이해하지 못해 미간을 구겼다. 


“되겠어? 내 번호도 모르는데?” 


정국은 몸만 살짝 틀며 물었다. 그래도 여주는 얼굴 한 번 보이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정국이 그런 여주의 표현을 완곡한 거절이라고 생각할 때쯤, 여주가 다시 한번 멈춰 서서 흘깃 정국을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고 만나고 싶으면 내가 찾아갈게.”

“어딜?”

“너희 집.”

“우리 집 알아?”

“주소 외웠어. 신분증에 있는 주소 맞지?”

“….”

“그렇다고 기다리진 말고.”


여주는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택시를 잡아타고 훌쩍 떠나 버렸다. 생각해 보고 만나고 싶으면 찾아가겠다. 그렇다고 기다리진 말라. 대놓고 까인 것보다 배는 더 오묘한 정국이었다. 졸지에 덩그러니 혼자 남게 된 정국이 픽 웃음을 터트렸다. 

‘거절이네. 사람 애타게 거절하는 재주가 있네.’ 

정국 역시 그냥 툭 던져 본 말이면서 막상 여주가 떠나니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다. 

‘번호라도 물어볼걸.’ 

다시는 못 볼 거라는 것을 직감으로 알아차렸다. 정국이 지갑을 열어 그 안에 있는 신분증을 보고는 주소를 소리 내 한 번 읽어 보았다.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그새 주소를 외웠다고…. 거짓말도 참.”

“….”

“어떡하냐. 나 여기 안 사는데.”






신혼 전쟁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그대로 깊은 잠에 빠진 여주가 새벽녘에야 잠에서 깨어났다. 가장 먼저 불편한 정장을 벗어 버리고 내내 꺼 두었던 핸드폰을 켠 후, 물을 한 잔 마셨다. 속도 좋게 잠들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순식간에 저 밑바닥을 쳤다. 자연스레 씁쓸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곧이어 지잉, 지잉, 지잉, 핸드폰이 켜진 건지 밀린 메시지들이 끊임없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같은 팀원들의 메시지와 누구라고 콕 집어 말하기도 힘든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가 찍혔다. 여주는 뭐부터 손대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천천히 답장하기 시작했다.


[미안해. 잠들었어. 나 괜찮으니까 걱정 말고 당분간 좀 쉬고 있어.]


팀원들에게만 답장하고 핸드폰을 그대로 침대 위로 툭 던졌다. 해결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 순간,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지잉 지잉 누군가에게서 전화가 들어왔다. 새벽 네 시라서 바로 답이 올 거라 생각 못 했다. 당황한 여주가 조금 허둥대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여보세,”

-팀장님! 세상에. 팀장님 맞죠? 오, 주여 감사합니다. 진짜 내가, 내가 정말.

“진정해.”

-진짜 그러시기예요? 사람 피 말려 죽이려고 작정했어요? 전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팀원은 말을 잇다 말고 울컥 눈물을 터트렸다. 이내 엉엉 소리 내며 어디 가서 죽어 버리기라도 한 줄 알고 한숨도 못 잤다며 울음기 가득한 말을 끊임없이 뱉었다. 덩달아 눈물이 날 것 같아 입술을 꼭 깨문 여주는 연신 사과했다.


“정신이 없어서 생각을 못 했어. 미안해. 걱정 많았겠다.” 

-지우 잘 보내 줬으면 이제 기운 차려야지.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리면 어떡해요.

“미안. 머리가 너무 복잡했어.”

-한 달간 미친 사람처럼 살았으면 충분히 했잖아요. 언제까지 그러시려고요.

“….”

-지우가 그걸 원할 것 같아요?

“….”

-장례식 치르자마자 그렇게 사라져 버리면 남아 있는 우린 어떤 심정이겠어요.


여주가 침대 끝에 걸터앉아 이마를 짚었다. 여주는 사실 죽고 싶었다. 그래서 죽으려고 했다. 한 달간 미친 듯이 지우의 흔적을 찾으면서도, 내심 살아 있지는 않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제 눈으로 모든 걸 확인한 순간, 여주는 더는 내일이 기대되지 않았다. 그를 지켜보는 팀원들이 차라리 지우를 찾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할 정도로 모든 걸 놓아 버린 사람처럼 굴었다. 


“차라리 화를 내세요. 그렇게 만든 놈들 다 잡아넣겠다고 화라도 내란 말이에요.” 


여주는 애원하는 팀원들의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근래 그런 생활의 연속이었다. 이제 그만 기운 차리라는 팀원의 한마디에 다시 처지를 실감했다. 지우가 죽었는데 왜 이러고 있는 건지, 갑자기 현실이 들이닥쳤다. 오늘도 살아서 뭘 하는 걸까,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을 애태운 걸까. 마음속이 쉽사리 정리되지 않아 아무런 대답이 나가지 않았다.


-나쁜 생각 하지 말아요.

“뭘.”

-지우 하나로 충분해요. 팀장님까지 우리한테 절망감 안기지 마세요.

“….”

-지민 선배 오늘 떠났어요. 말렸는데… 팀장님 명령이라고 떠났어요.

“….”

-그러니까 정신 차려요. 팀장이나 됐으면 우리 팀 책임지란 말이에요.


팀장으로서 팀에 대한 책임을 져라. 결국 죽지 말고 살아서 꼬여 버린 이 일들을 다 해결하라는 뜻이었다. 그것은 과연 분노로부터 나온 말일까. 아니면 여주에게 하루 더 살 이유를 만들어 주기 위해 거짓으로 협박한 것일까. 이유가 뭐가 됐든 여주는 팀원의 말을 듣자마자 곧장 족쇄 하나를 찬 기분이었다. 지우를 잃은 것에 대한 책임, 떠나기 싫다는 애를 억지로 헝가리로 보낸 것에 대한 책임, 그리고 남아 있는 팀원들에 대한 책임. 

주변은 온통 책임지라는 것들뿐이었다. 그런데 여주는 이상하게 그 말이 제발 살아 달라는 말처럼 들렸다. 지우를 잃었는데, 지민 선배도 떠나 버렸는데, 제발 팀장님이라도 옆에 있어 달라 애원하는 것처럼 들렸다. 넘어져 있는 여주에게 일어나라고 소리치면서도, 속으로는 가지 말라고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결국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린 여주가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알았으니까 일단 좀 쉬자.”

-팀장님.

“뭘 그리 닦달해. 너도 좀 쉬라니까. 알지? 이제 일 시작하면 몇 달은 잠도 제대로 못 잘 거야.”

-….

“그러니까 좀만 쉬자. 너무 지친다.”

-죄송해요.


죄송하다는 한마디와 함께 팀원은 또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자신이 뱉는 말 하나하나가 여주에게 짐이 될 걸 알면서도 붙잡는 이기적인 마음 탓이었다. 


“뭐가 죄송해. 네가 잘못한 거 아닐 때는 함부로 머리 조아리지 말라고 했지.” 


애정 섞인 여주의 핀잔에 팀원은 울음을 참으려 애써 보았지만,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는 소리만 터져 나왔다. 가만히 이름을 불러 준 여주가 토닥토닥, 옆에 있지 않아도 느껴지는 토닥임으로 팀원을 달래 주었다.


“잠 좀 자. 자니까 좋다. 머리도 맑아지고.”

-….

“너도 오랜만에 푹 한번 자 봐. 알람 없이.”

-….

“좋아. 애써 힘내지 않아도 눈이 떠지는 거.”






-형. 한 마리 나간다.

“어. 내가 갈게. 넌 자리 지켜.”


팀원의 무전이 들어오기가 무섭게 정국이 좁은 골목길을 내달렸다. 위아래 검은색으로 맞춰 입고 검은 모자까지 쓰니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닿은 골목길로 시커먼 무언가가 쉼 없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정국은 어둠 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길을 찾았다. 한 블록, 두 블록, 오른쪽으로 턴. 또다시 한 블록, 두 블록, 그리고 계단을 내려갔다. 가빠지는 호흡을 가다듬으려 후 후 밭은소리를 뱉고는 곧장 담 하나를 넘었다. 


“윽.” 


돌덩이 하나가 있었는지 순간적으로 발목에 통증이 왔지만 뜀박질은 멈추지 않았다. 불 꺼진 상가 골목으로 들어가 쉼 없이 달리다 보니 낡은 상회 옆 샛길, 사람 한 명 겨우 지나갈 법한 길이 나왔다. 여기서부턴 가로등 불빛이 아예 닿질 않아 말 그대로 한 치 앞도 안 보였지만, 망설임 없이 그 길을 쭉 따라 들어갔다. 막다른 길에서 왼쪽으로 꺾은 순간 드디어 후문으로 도망 나오는 타깃을 마주쳤다. 정국은 자신을 보자마자 도망가려는 타깃의 목을 뒤에서 꽉 끌어안고 바로 경동맥을 압박했다.


-형. 잡았어?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소란스러움을 눈치챈 사람들이 몰리지 못하게, 정국은 이곳으로 오는 내내 빠르게 달리면서도 발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상대를 기절시키는 이 순간까지도 행여 제 숨소리가 섞여 들까 호흡마저 참았다. 마침내 힘을 잃은 상대가 바닥으로 풀썩 쓰러졌다. 곧장 팀원에게 임무를 완수했다고 무전을 보내려는데 순간 뒤에서 낯선 기척이 느껴져 홱 돌아봤다.


“아.”


어디서 나타났는지 칼을 쥔 이가 정국의 허리쯤을 겨냥하고 깊숙이 찔러 왔다. 반사적으로 방어 태세를 갖춘 정국이 자기도 모르게 칼을 움켜쥐고는 참아 내지 못한 신음을 뱉었다. 그와 함께 바닥으로 피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하고, 상대가 좀처럼 힘을 빼지 않아 정국의 손에 더 깊은 상처가 새겨졌다. 

필사적으로 버텨 낸 정국이 상대의 정강이를 세게 걷어찼다. 상대가 주춤해서 균형이 무너진 틈을 타서 손목을 꺾어 칼을 먼저 떨어트렸다. 쨍그랑 소리 내며 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정국은 그 즉시 상대의 허벅지를 차고 하복부에 주먹을 꽂은 뒤 가슴팍을 무릎으로 찍었다. 조금도 쉬지 않고 상대의 팔을 꺾어 시멘트 벽에 밀어붙이고 양손에 수갑을 철컥 채웠다. 정국이 제 피가 뚝뚝 흐르는 수갑을 바라보며 이어 마이크에 손을 가져다 댔다.


“한 놈 더 빠졌잖아. 누가 놓친 주제에 보고도 안 하냐.”

-한 놈? 여긴 아닌데 누가,

“됐고. 오늘 끝나고 전부 남아라.”






여전히 피가 뚝뚝 흐르는 손을 대충 지혈한 정국이 자동차 보닛에 걸터앉아 팀원들을 훑어보았다. 바지며 신발이며 심지어 얼굴까지 피가 묻어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 앞에 줄지어 선 팀원들은 하나같이 뒷짐을 지고서 고개를 숙였다. 은주는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정국의 손을 가만히 바라만 볼 뿐, 너무 무거운 분위기에 차마 다가가서 치료해 주지는 못했다.


“자기가 맡은 타깃이 빠져나가는데 어떻게 한 놈도 모를 수가 있어. 날 덮쳤으니 망정이지. 상대가 민간인이었으면 어쩔 뻔했어. 너희가 어떻게 책임질 건데?”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은 듣고 싶지도 않으니까 할 말 없으면 그냥 닥치고 있어. 난 지금 책임을 어떻게 질 건지 묻고 있는 거야. 오늘 일로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해 봐. 너희 눈에 달린 목숨이 몇 갠데 한눈팔고 싶냐?”

“….”

“아직도 정신 못 차리는 거 보니까 누구 한 명 죽어야 그 버릇 고치겠다.”


보닛 위에서 폴짝 뛰어내린 정국이 허리춤을 잡고 삐져나온 옷을 여미며 다른 한 손으로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다친 손이 불편해 단번에 라이터를 켜지 못하는데도, 움찔거리는 팀원에게 단호하게 고개를 젓고는 기어코 제 손으로 불을 붙였다. 후, 내뿜은 연기가 공중으로 흩어졌다. 


“야.” 


딱히 누군가를 지칭하지 않고 애매하게 뱉은 정국의 말에 남자 팀원들이 일제히 정국을 바라보았다.


“한국 들어와서 일 좀 편해지니까 너희가 하는 일이 애들 장난 같지. 불과 3년 전만 해도 어디서 어떻게 굴러먹었는지 다 잊은 거지?”

“아닙니다.”

“제발 정신 좀 차려라. 3년 전이었으면 나 하나 다치는 걸로 안 끝났어.”

“….”

“지금이니까 여유롭게 담배나 태우고 있지. 3년 전이었으면 벌써 이 앞에 향 피웠다고.”

“….”

“나 먼저 간다.”


정국은 곧장 차에 올라탔다. 수고했다 한마디 해 줄 법하건만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아 굳이 하지 않았다. 하루 이틀 일하는 것도 아닌데 가장 기본적인 마킹을 제대로 못 했으니, 은주만 아니었으면 벌써 이 새끼 저 새끼 소리 지르고도 남았다. 빨리 집에 가서 피 묻은 옷을 벗고 좀 쉬고 싶다 생각하며 시동을 거는 순간, 조수석 문이 열리며 은주가 올라탔다. 정국이 순간적으로 찌푸린 미간을 다시 돌려놓을 새도 없이 은주가 멋쩍은 미소를 띠었다.


“싫어할 거 아는데 오빠 손이….”

“됐어. 뭘 이런 걸 가지고.”

“꽤 깊게 베였던데.”

“내가 알아서 할게.”

“그래도….”

“….”

“알았어. 참 빡빡하게도 군다.”


핸들을 잡고 후 한숨을 내쉬는 정국의 얼굴에 짜증이 가득 담겼다. 바로 표정을 지우고 은주를 가만히 보긴 했지만,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건지 눈빛에 영혼이 하나도 없었다. 서운함과 민망함이 반반 섞인 은주가 입술을 삐죽였다. 그 모습이 조금 신경 쓰인 정국이 태워다 준다며 붙잡았지만, 어이없는 듯 웃음을 터트리는 은주였다. 은주는 그 말이 모두 빈말임을 알고 있었다. 정국이 지금 누구보다도 혼자 있고 싶어 한다는 걸, 그래도 상대가 은주라 그나마 호의를 보인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오빠들하고 같이 가면 돼. 조심히 들어가.” 


은주의 말에 곧장 끄덕이는 정국의 고개만 봐도 그것이 모두 사실임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탁,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침묵이 찾아오니 정국이 제 손을 흘깃 내려다보았다. 병원에 갈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젓는 것. 그것이 은주의 잔소리가 미치는 영향의 전부였다.






정국이 씻고 나오니 어느덧 시간이 열한 시쯤 되었다. 피는 멎었지만 여전히 붉게 물든 상처가 양손에 그대로 남아 쉼 없이 통증을 느끼게 했다. 푹 찔러 보면 피가 담뿍 새어 나올 정도로 당장 치료가 필요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병원에 가야 하나 고민조차 하지 않는 정국이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냈다. 

오늘도 하루가 참 길었다. 당장 쓰러져서 잘 수 있을 만큼 피곤이 극에 달했다. 치익, 맥주 하나를 따니 거품이 차올랐다. 반사적으로 입술을 가져다 대려다가 멈칫하며 그대로 굳었다. 그 덕에 맥주가 줄줄 손등을 흘렀지만 어쩐지 가만히 있기만 했다. 

‘어제 걔. 생각 바뀌면 만나러 온댔는데.’ 

참으로 이상하고 뜬금없는 타이밍에 여주가 떠올라 버렸다. 때마침 나오는 뉴스를 보며 눈만 끔뻑거리다가, 아주 잠깐의 고민 끝에 벌떡 일어나 겉옷을 챙겼다. 기다릴 수도 있으니까 잠깐 다녀올 작정이었다. 허위로 등록한 주민 등록상 주소가 꽤 외진 골목이었다는 게 생각나서 자기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졌다.






정국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골목 어귀 편의점이며 놀이터며 하나하나 샅샅이 뒤져 보았다. 가로등이 있긴 해도 조금 외진 곳이라 그런지, 학생들이 우르르 모여 담배를 피우거나 취객이 쓰러져 자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나도 참, 진짜 왔을 거라고 믿는 거냐.’ 

제 생각에도 어이없었지만 왜인지 멈추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주민 등록상 주소로 되어 있는 집 앞까지 가 보기 위해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 순간, 거짓말처럼 그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 여주를 발견했다. 정국이 믿기지 않아 가만히 멈춰 서서 빤히 보기만 하니 인기척을 느낀 여주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여주는 내내 껴안고 있던 무릎을 놓아주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정국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와, 안 오는 줄 알았네.”

“나 기다렸어?”

“어. 엄청 오래. 밤일하는 거면 미리 말을 해 주지.”

“…밤일이라니.”

“지금 밤이야. 열두 시!”


손목시계를 보여 주며 눈을 댕그랗게 뜬 여주가 자연스레 정국에게 팔짱 끼고 계단 아래로 끌었다. 얼떨떨한 정국이 제 팔을 흘깃 내려다보며 당황하는데도, 여주는 연신 밝은 표정으로 재잘재잘 말했다.


“널 만나면 내일이 달라질지도 모른다며. 나 오늘 온종일 기다리기만 했다고. 네가 말한 내 내일은 기다림이었어?”

“오늘 생각보다 일이 늦게 끝났어. 그러게 번호를 알려 주지 그랬어. 기다리지 말라고 얘기라도 해 줬을 텐데.”

“언제 내 번호 물어봤어?”

“아니.”

“뭐야.”

“알려 줘. 번호.”


정국은 우뚝 멈춰 서서 제 핸드폰을 건넸다. 여주는 답도 없이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하다가 웃음을 터트리며 핸드폰을 다시 정국의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그런데도 민망한 기색 하나 없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는 정국이었다. 그런 정국을 빤히 보던 여주가 순간 무언가 발견하고는 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머리를 갸우뚱해 보였다.


“손 다쳤네.”

“어.”

“아쉽다. 손잡고 싶었는데.”


장난이었다. 홀린 듯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막상 정국을 만나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실없이 툭 던진 말이었다. 그리 말하면서도 주머니에 꼿꼿이 꽂아 넣은 여주의 손이 그 증거였다. 

정국은 왜인지 웃음이 터지려고 해서 붕대를 대충 감아 놓은 손으로 얼굴을 살짝 가렸다. 여주가 이 시간에 어디서 뭘 해야 하느냐 물으려는 찰나, 정국이 여주의 주머니 속으로 손을 불쑥 넣고 조심스레 감싸 바깥으로 빼내었다. 당황한 여주가 잡힌 손을 내려다보며 어버버하는 사이, 정국은 손 마디마디를 간지럽히며 깍지까지 끼고서 계단 아래로 이끌었다.

여주는 맞잡은 손 사이로 쿵쿵 뛰는 박동이 너무 크게 느껴져 얼굴이 달아오르려고 했다. 까끌까끌한 붕대와 달리 보드라운 정국의 손가락이 조금 뜨겁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어느새 계단 끝까지 내려와 손수 조수석 문을 열어 준 정국이 어서 타라며 고갯짓하자, 여주는 어딜 가느냐 묻지도 못하고 얼떨결에 몸을 들였다. 그런데도 여전히 맞잡은 손을 흘깃 보았다. 정국은 손을 놓아야 자신도 운전석에 탈 수 있을 텐데 한참을 가만히 서서 꼭 쥐고 있기만 했다. 그러면서 엄지로 자꾸만 손을 간지럽히며 빤히 보기만 하자 여주가 결국 참지 못하고 입술을 살짝 물었다. 그 모습에 웃음이 터질 것 같은 정국이 고개를 숙였다. 

정국은 여주가 손잡고 싶다고 해맑게 말할 때는 언제고 새삼스럽게 부끄러워하니 영영 놓지 않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마음 가는 대로 할 것 같으면 끝이 없어서 욕망을 억눌렀다. 아쉬운 듯 손 마디마디를 빠져나가며 제 손가락으로 여주의 손바닥을 살며시 간지럽히고 가만히 문을 닫아 줬다. 

그와 동시에 여주는 참았던 숨을 참으로 오랫동안 뱉어 냈다. 제 손바닥을 흘깃 보는데 정국이 운전석에 올라타는 바람에 바로 쏙 숨겨 버렸다. 발개진 볼 만큼 손바닥도 붉어지진 않았을까 확인한 게 바보 같아서 웃음을 터트렸다.






정국은 여주를 어느 작은 전망대로 데려왔다. 가로등은 켜져 있지만 시간이 시간인지라 사람이 없었다. 옆에 난 도로로 가끔 한 번씩 차들이 지나다니고, 두어 개 있는 벤치는 텅 비어 쓸쓸한 기운을 뿜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빙 둘린 난간 너머 반짝반짝 빛을 내는 도시의 야경이 눈에 들어왔다. 적당히 높은 턱에 올라가 난간에 살짝 기댄 여주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눈을 꼭 감았다. 

새벽 공기는 참 시원했다. 저 멀리 도심이 보이는데도 이곳은 고요하기 그지없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좀 더 만끽하고자 난간 잡은 두 손을 조심스레 떼는 순간, 화들짝 놀란 정국이 황급히 여주의 허리를 잡았다. 흘깃 뒤돌아본 여주가 뭐 하는 짓이냐는 듯 정국을 보았다. 가로등 불빛 아래 빤히 눈 맞추는 정국의 눈빛이 깊었다. 정국은 여전히 여주의 허리를 꼭 붙들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다 떨어져.”

“내가 바보야? 맥없이 떨어지게.”

“아니. 난… 위험해 보여서.”


조금 멋쩍은 정국이 큼큼 헛기침하며 여주를 놓아주었다. 순간 지탱할 곳을 잃은 여주가 휘청이며 어어 소리를 내다가 정국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하마터면 뒤로 넘어갈 뻔해서 적지 않게 놀랐는지, 여주는 정국을 꼭 안은 채 가쁜 숨을 뱉었다. 


“그렇다고 바로 놓으면 어떡해.” 


원망 섞인 여주의 말에 정국은 얼떨떨해하며 등을 살짝 받쳐 주었다. 숨결이 닿을 듯 가까워진 두 사람이 서로를 빤히 바라보며 얼마간 정적이 흘렀다.


“언제까지 안고 있을 거야?”


눈을 살짝 내리깐 채 담담하게 잇는 정국의 말에 여주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바로 정국을 밀어내고 난간에서 벗어나 괜스레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야경 구경 한 번 하려다가 골로 갈 뻔했네.’ 

픽 웃음을 터트리며 벤치에 털썩 앉은 여주가 정국에게 와서 앉으라는 듯 옆자리를 팡팡 쳤다. 정국은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더니 살짝 떨어진 곳에 앉아 여주 쪽으로 몸을 틀었다. 정국이 한 손으로 밥 먹는 시늉을 하며 여주를 향해 눈짓했다.


“배 안 고파?”

“응.”

“잠은? 안 졸려?”

“응. 너 혹시 배고프고 졸려?”


정국은 고개를 저었다. 분명 아까만 해도 맥주 한 캔 마시고 잠들면 딱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여주를 만난 후부터는 왜인지 잠이 달아나 버렸다. 그날 왜 도로 한복판에서 그러고 있었는지, 병원에서는 왜 그리 서럽게 울었는지, 갑자기 만나러 와야겠다 생각을 바꾼 이유가 무엇인지, 하루 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컨디션이 좋아 보이는지, 묻고 싶은 게 많아서였나. 사람도 없겠다, 지금이 타이밍인 것 같은데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물어보면 되게 싫어할 것 같아.’ 

멍한 표정으로 야경을 감상하는 여주를 보며 정국이 그리 생각했다. 여주는 풍경에 정신이 팔려 정국을 보지도 않고 나지막이 말했다.


“여기 좋다.”

“그래?”

“응. 사람도 없고.”

“사람 없어서 혼자 오면 위험해. 특히 밤에는.”

“너 싸움 잘해?”

“…뭐?”


순간 홱 돌아보며 던진 여주의 질문이 꽤 심각해서 정국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싸움을 잘하냐니. 이걸 대답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랐다. 진심으로 고민돼서 미간을 구겼다. 정국이 그렇게 한참을 실소만 터트리는데도 여주는 표정 변화 하나 없었다. 


“위험하다며. 근데 왜 데려왔나 궁금해서 그러지.” 


감정 하나 섞지 않은 여주의 담담한 말이 이어졌다. 팔짱을 끼며 벤치 등받이에 몸을 기댄 정국이 흠, 소리를 내며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금 여주를 바라보았다.


“싸움 못해. 근데 너 하나 지킬 정도는 되지 않을까.”

“네가 날 왜 지켜. 너나 지켜.”

“원래 말투가 그래?”

“내 말투가 왜?”

“사람 상처 주잖아.”


이번에는 여주가 웃음을 터트렸다. 진심으로 서운해하는 정국을 보며 소리까지 내며 웃었다. 여주는 부드러운 정국의 머리칼을 살살 헝클다가 볼을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상처받았어? 미안.” 


여주가 장난스러운 사과까지 덧붙이니 정국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입꼬리가 올라갈 듯 말 듯 했다. 사람을 가지고 논다고 생각했다. 여주의 머릿속이 궁금했다. 그 순간 손목시계를 흘깃 본 여주가 아쉬운 표정으로 일어나며 정국을 향해 눈짓했다.


“두 시 다 돼 간다. 이제 가자.”

“벌써?”

“응. 내일 출근 안 해?”

“하긴 하는데….”

“나 저기 큰길까지만 좀 태워다 줘.”

“집에 데려다줄게.”

“아냐. 큰길까지만.”


바람이 차가워지고 있었다. 비가 오려는지 조금 축축한 것 같기도 했다. 결국 겉옷을 여민 여주가 어서 일어나라며 고갯짓했다. 정국은 언제 시간이 이렇게 됐나 생각하며 별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정국 역시 아쉽기는 매한가지인 듯 동작이 조금 느려졌다. 

‘잠깐만, 근데 내가 왜 아쉬워하고 있지?’ 

낯선 감정에 혼란스러워할 때쯤, 겉옷 지퍼를 올리지 못해 버벅거리는 여주가 눈에 들어왔다. 정국이 생각할 새도 없이 자연스레 지퍼를 손에 쥐니 살짝 닿은 여주의 손이 부드럽게 스쳤다. 뭐 하는 건가 싶은 여주가 가만히 보고만 있으면, 정국은 담담한 얼굴로 지퍼를 목 끝까지 단번에 끌어 올렸다. 의아한 표정으로 멀뚱멀뚱 눈만 깜빡이던 여주는 미소 띤 채 고맙다 인사했다. 


“이제 가자.” 


여주가 상황을 정리하고 차에 올라타려는 순간, 대뜸 가까이 붙은 정국이 몸을 낮춰 여주를 살며시 안았다. 너무 놀라서 손을 어디에다 둘지 몰라 공중으로 아무렇게나 던진 여주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잔뜩 긴장했다. 정국은 끌어안은 팔에 힘을 줘 여주를 제 품 안 깊숙이 가뒀다. 맞닿아 빠르게 뛰는 심장이 느껴졌다.


“남자 친구 있어?”

“어?”

“없으면 좋겠다.”

“….”

“내일도 나 만날래?”


정국은 여주가 궁금해졌다. 처음에는 그냥 조금 신경이 쓰이는 것뿐이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시선이 가는 게 이상했다. 자기도 모르게 표정 하나하나를 관찰하게 되고, 잡은 손을 놓기가 싫고, 가까이 있을 때 느껴지는 향이 좋았다.

평소에 쉽게 마음을 주는 편이라면 이번에도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정국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연애는 반쯤 포기하고 살았으며, 어느 정도 검증이 되기 전까지는 개인 정보 오픈하는 것을 꺼렸다. 마지막 연애가 언제였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주한테 남자 친구가 없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일도 만나고 싶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이 너무 예뻐 보여서 충동적으로 껴안았는데도 밀어내지 않으니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왜 안 밀어내지? 몸이 굳어서 아무것도 못 하겠는데. 이쯤 되면 날 밀어냈으면 좋겠는데.’ 

계속 이대로 있고 싶은 마음과 제발 떨쳐 주길 바라는 마음이 공존했다. 그 순간, 여주가 정국의 어깨를 살며시 밀어내며 빤히 시선을 맞췄다. 어떤 대답이 나올까 긴장돼 정국이 입을 꾹 다물고 바라보기만 하니, 여주는 픽 터지는 웃음과 함께 눈을 흘겼다.


“너 선수지.”

“아닌데.”

“이런 식으로 여자 몇 명 만났어?”

“진짜 아니야.”


여주는 조금도 믿지 않았다. 그사이 바람이 좀 더 거세져 머리칼이 흩날리기 시작하니 신경 쓰여 묶어 버리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이 전망대에 데려온 여자는 또 몇 명일까.’ 

자꾸만 웃음이 터지려고 해 입술을 씰룩거렸다. 

‘날 언제 봤다고 남자 친구가 없으면 좋겠대. 이제 겨우 두 번 봤으면서.’ 

여주가 꽉 묶은 머리를 대충 손으로 한 번 훑으며 멍하니 서 있는 정국을 장난스레 보았다.


“내일 만나서 뭐 할 건데?”

“맛있는 거 사 줄게.”

“그다음엔?”

“여기 말고 하나 더 있어. 좋은 데. 거기 알려 줄게.”

“너 지금 나 꼬시는 거야?”

“꼬시면 넘어올래?”


여주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연애를 그리 깊게 하는 편도 아니고 사람을 사귀는 데 크게 의미 부여를 하는 것도 아니어서, 그냥 가볍게 한 번 만나 보는 것쯤이야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한두 번 만나 보고 안 맞으면 그만 만나면 되니까. 내일 한 번 더 만나 볼까 말까 그리 진지하지 않은 고민을 이어 갔다. 

그런데 꼬시면 넘어올 거냐는 정국의 마지막 말에 순간 말문이 막혀 버렸다. 정국이 예상치 못하게 손을 잡았을 때도, 대뜸 껴안았을 때도, 이렇게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은 없었다. 살짝 나른해진 눈빛으로, 낮게 깔리다 못해 조금 갈라지는 목소리를 뱉어서 그랬나. 

‘꼬시면 넘어올래?’

정국이 그렇게 말하며 빤한 시선을 보내니 여주는 왜인지 가슴이 울렁거렸다. 정국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제 명함 하나를 꺼내 여주에게 건넸다. 

‘경찰?’ 

여주가 정국의 명함에 적힌 예상치 못한 직업에 놀랄 틈도 없이, 정신 차리지 못하게 훅훅 치고 들어오는 정국이었다.


“나 여자 안 만난 지 5년 됐나? 아무튼 진짜 선수 아니야. 안 믿어도 어쩔 수 없지만.”

“….”

“그리고 내일은 일찍 끝나. 생각 바뀌면 전화해. 저녁 사 줄게.”

“….”

“혹시 내일 안 만나더라도 언제든 생각나면 연락해도 돼.”

“….”

“왜냐하면 난 너 한 번 더 만나고 싶거든.”






신혼 전쟁



침대에 엎드려 누운 여주가 정국의 명함을 앞에 놓고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경찰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직업을 궁금해한 적도 없으면서 괜히 놀라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손은 그래서 다친 건가?’ 

양손 모두 둘둘 감아 놓은 붕대가 떠올랐다. 

‘피 새어 나온 거 보니까 제대로 치료도 안 한 것 같던데.’ 

잠시나마 깡패쯤 되는 게 아닐까 의심했던 게 떠올라 웃음이 터지려 했다. 명함을 손에 쥐고 몸을 홱 돌린 여주가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 발을 까딱였다. 전화해 볼까 말까. 만나 볼까 말까. 이제 선택권이 완전히 제게 넘어오니 왜인지 전화 걸기가 망설여졌다. 이번에 만나면 발을 너무 깊게 들이는 느낌이었다. 스쳐 가는 인연으로 마무리하려면 딱 여기까지가 좋다고 생각했다. 


“꼬시면 넘어올래?” 


그 한마디만 아니었어도 이 명함 따윈 벌써 쓰레기통에 버렸을 거다. 

‘아, 그 말 할 때 순간 진짜 잘생겨 보였어. 아… 자꾸 생각나.’ 

결국 이렇다 할 결정을 내리지 못한 여주가 눈을 꼭 감아 버렸다.






“오빠 결국 병원 안 갔구나.”

“….”

“말도 참 안 듣는다. 소독하고 꿰매야 한다니까.”

“….”

“오빠?”

“어?”


책상 위에 팔을 올려 턱을 괴고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정국이 은주의 부름에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은주는 핸드폰에 뭐가 있기라도 한 건지 오전 내내 화면만 들여다보는 정국이 이해되지 않았다. 


“기다리는 연락 있어?” 


은주의 물음에 정국은 답 없이 고개만 저어 보였다. 좀 더 가까이 간 은주가 정국의 손을 살피며 물었다.


“오늘은 오전만 하고 퇴근이지?”

“응. 일단은.”

“그럼 나랑 병원 가자.”

“병원?”

“오빠 손 말이야.”

“아….”

“병원 안 가면,”

“됐어.”


정국이 별다른 고민 없이 답했다. 은주 역시 그런 반응을 예상한 듯 이번에는 절대 그냥 넘어가 주지 않을 태세로 허리에 손을 얹었다. 


“알아서 잘하면 내가 참견도 안 하지.” 


타이르는 듯한 말투에 정국이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왜 그렇게 자기한테 못되게 굴어. 제때 치료하면 좀 좋아? 오빠 몸 볼 때마다 속상해 죽겠어, 진짜.” 


은주의 잔소리가 이어지는데도 정국은 책상에 풀썩 엎드려 핸드폰만 바라보았다. 은주가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빼앗으려 하는데, 때마침 지잉 지잉 진동이 울리며 메시지가 들어왔다. 곧장 몸을 일으킨 정국이 누구에게서 온 메시지인지 확인하며 눈을 반짝였다. 은주는 그런 정국의 모습이 적응되지 않아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정국은 지갑과 겉옷을 챙겨 들고 그대로 사무실 바깥으로 향했다.


“오빠 어디 가?”

“병원.”


방금까지만 해도 절대 안 간다고 뻐기더니 대뜸 병원이 웬 말인가 싶었다. 은주는 붙잡고 물어보고 싶어도 정국이 금세 사라져 버려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자기가 하도 잔소리해서 질린 걸까 생각했다.

은주가 좀처럼 답을 내리지 못해 머리를 긁적이는 새, 같은 시각 정국은 거의 뛰듯이 걸음을 옮겨 차 문을 삐빅 열었다. 곧바로 시동을 걸면서도 좀 전에 확인한 메시지가 떠올라 픽 웃음을 터트렸다.


-저녁 먹자. 오늘.

-대신 병원 갔다 와. 피 보는 거 질색이거든.

-아 참, 누군지 말을 안 했네.

-나 교동사거리야.






여주는 옷 입고 화장하면서도 내내 고민했다. 이게 잘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뿐이었다. 손수 갈아 만든 토마토 주스를 한 모금 마시며 삐져나온 머리칼을 정리하다가, 제 모습이 적응이 안 돼 미간을 구겼다. 뭘 한다고 화장까지 했는지, 그냥 지워 버릴까 했다. 너무 오버한 것 같아 민망하면서도 왠지 쑥스러운 느낌이었다.

화장대에서 소파로 자리를 옮긴 여주가 티브이 전원을 켰다. 약속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좀 더 여유를 부려도 괜찮았다. 6시, MJ 호텔. 호텔 디너를 먹자는 거 보면 오버하는 건 여주가 아니라 정국 같기도 했다. 살며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채널을 돌렸다. 때마침 언젠가 재밌게 본 적 있는 범죄 영화가 보여서 채널을 멈췄다. 이미 중반쯤을 달리고 있는 모습에 다리를 꼬고 앉아 주스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범죄 영화는 이렇게 만들어야지. 나쁜 놈들 미화 안 하고.”


여주가 재미있게 본 거의 유일한 범죄 영화였다. 아무래도 매일매일 다양한 범죄를 맞닥뜨리고 살다 보니 그쪽 방면으로는 자연스레 분노가 응축될 수밖에 없는데, 잘생긴 배우들이 나와 슬픈 사연을 얘기하며 극 중 인물의 범죄를 합리화하는 걸 보면 순간적으로 몰입이 딱 깨져 버렸다. 힘없고 죄 없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걸 정당화할 수 있는 사연은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다. 그게 여주의 생각이었다. 그에 상응하듯 마침 영화에서도 형사들이 범죄 조직을 소탕하는 장면이 재생됐다. 죄다 잡혀가서, 세상에 나오지 말고 감방에서 오래오래 살길 바랐다. 단지 영화일 뿐인데 지나치게 이입한 여주가 슬슬 나가려고 생각하며 리모컨을 집었다. 

그 순간, 전원 버튼을 누르려는 여주 앞으로 조직원 하나가 자신을 체포하러 온 형사를 칼로 찌르는 장면이 나타났다. 반응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여러 번 찌르고 달아나는 극 중 배우를 보며, 여주는 손에 든 리모컨을 놓치며 입을 틀어막았다. 19세 관람가를 단 영화는 낭자한 혈흔을 가리지 않고 모두 내보냈다. 여주가 그 모습을 보다 못해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아 화장실로 달려갈 만큼,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정도로 잔인한 장면이었다.

여주는 변기를 부여잡고 얼마 마시지도 않은 토마토 주스를 모두 토해 냈다. 분명 몇 년 전만 해도 재미있게 봤던 것 같은데 왜 이러는 걸까 생각해 보면, 결국 답은 지우였다. 변기 가득 채운 새빨간 이물질이 영화 속 혈흔과 겹쳐 보여 또다시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이제 더 비울 것도 없는데 자꾸 울렁거려 눈물이 찔끔 고였다. 

저걸 재미있다고 본 자신이 역겨웠다. 속도 없이 좋다고 웃고 다닌 나날이 쪽팔렸다. 살짝 고인 눈물은 어느새 한가득 차올라 뚝뚝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간신히 잊고 있었던 현실이 또다시 한꺼번에 덮쳐 왔다. 저항할 수 없는 자책이 시작되었다. 지우가 죽었는데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가 있지. 아직도 예쁜 옷 입고 화장할 여유가 있는 걸까. 쓰러지듯 화장실 벽에 기대 눈을 질끈 감은 여주가 터지는 눈물을 막아 보려 입술을 세게 물었다. 


“이건 진짜 아닌데. 난 이럴 자격 없는데.” 


홀린 듯 작게 중얼거리는데 뚝뚝, 한 번 흐른 눈물이 멈출 생각을 안 했다.






여덟 시가 넘었는데도 여주는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예약 시간을 이미 한참 넘기고, 정국은 1층 카페에 홀로 앉아 손목시계를 봤다. 차가 막히는 건가 싶어 그냥 기다리다가, 혹시 오다 무슨 일이 생겼나 걱정하다가, 자기를 물 먹이는 건가 잠깐 화도 났다가, 이제는 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이미 두 시간이나 지나서 그냥 집에 갈까 했지만, 두 시간이나 기다렸으니 좀 더 있어 보자며 마음을 고쳐먹었다. 병원에서 치료를 마치고 새로 감은 거즈를 보고 있자니 실소가 터져 나왔다.


“누구 엿 먹일 사람으로는 안 보였는데.”


연락을 안 하면 안 했지 일부러 골려 주기 위해 거짓말할 사람 같지는 않았다. 그럼 분명 무슨 일이 생겼거나 마음의 변화가 왔다는 뜻인데, 둘 중 어느 것이라고 해도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정국은 여주가 지금이라도 깜빡 잠들었다거나 길을 잃었다고 하면 기꺼이 속아 줄 의향이 있었다. 정국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전화 한 번 하지 않고 내내 말없이 기다리기만 하다가 문자 하나를 보냈다.

 

[한 시간만 더 기다린다.]






결국 열 시가 되어서야 바깥으로 나온 정국이 흡연 구역 앞에서 담배 하나를 입에 물었다. 연락 한 번 없이 네 시간을 기다리게 할 줄은 몰랐다. 그게 아니고 처음부터 올 생각이 없던 거라면, 얼마를 기다리든 의미 없는 것 같기도 했다. 메시지에 대한 답도 없는 여주에게 서운하기도 하면서 조금 걱정됐다. 

‘또 어디서 쓰러진 건 아니겠지. 전화라도 해 봐야 하나.’ 

전화까지 했다가는 정말 집착하는 사람처럼 보일 것 같아 한참 동안 고민했다. 입에 문 담배는 아직 불붙이지도 못했다. 마침내 긴긴 고민을 마친 후 핸드폰을 꺼내 드는데, 저 멀리에서 터덜터덜 걸어오는 인영이 하나 보였다. 어두워서 실루엣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단번에 여주인 걸 알아차렸다. 정국이 새것 그대로인 담배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지금이 몇 신 줄 아느냐고 물으려다가, 첫 만남 그때처럼 푹 젖어 있는 여주를 본 순간 입을 꾹 다물었다. 여주가 힘없이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안 오면 그냥 가지. 왜 기다려. 지금이 몇 신데.”

“기다린다고 했잖아.”

“손은 왜 다쳤어? 나쁜 놈들이 그랬어?”

“내 손?”

“미안해. 시간 맞춰 오려고 했는데.”

“괜찮아.”


여주는 횡설수설했다. 반쯤 넋이 나가 뱉는 말 하나하나 앞뒤가 맞지 않았다. 처음에는 일일이 반응해 주던 정국이 무언가 이상하다 느껴 여주의 어깨를 토닥였다. 


“너 무슨 일 있어?” 


여주는 정국의 그 한마디에 번뜩 정신을 차리고 그제야 제대로 눈을 맞췄다. 홀린 듯 고개를 젓다 말고 끄덕끄덕, 제발 위로해 달라 애원하는 표정으로 정국을 바라보았다. 정국은 걱정스러운 듯 여주에게 묻기 시작했다.


“밥은 먹었어?”

“아니.”

“디너 끝났는데 어쩌지.”

“너는 왜 화를 안 내? 네 시간이나 늦었는데.”

“화냈으면 좋겠어?”

“응. 욕이라도 해. 나 못됐잖아.”


‘연락 하나 없이 늦게 와 놓고 또 내 할 말만 하고 있잖아. 미안하다고 상황 설명을 해도 모자랄 판에 뻔뻔하게 고개 빳빳이 들고 있잖아. 근데 왜 화를 안 내? 사람들은 다 괜찮다고만 해. 다 내 잘못 아니래. 괜찮으니까 기운 차리래. 이상하게 다들 내 걱정만 해. 난 살아 있는데. 위로받을 자격 없는데.’ 

가만히 서서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자책하던 여주가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정국은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추고는 제 손을 내밀었다. 잡으라는 듯 살짝 까딱이기까지 하니 여주가 영문을 몰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국이 호텔 건물 쪽으로 고개를 살며시 까딱이며 물었다.


“우리 여기 들어갈래?”

“호텔?”

“응.”

“왜?”

“그냥. 너 서 있을 힘도 없어 보여서.”

“….”

“왜. 널 걱정하는 것 같기는 한데 호텔 들어가자고 하니까 갑자기 못돼 보여? 불순한 의도 같고 그래?”

“…아니.”

“거봐. 방법이 뭐가 됐든 마음은 안 변해. 네가 날 못돼 보인다고 말해도 내 마음은 그게 아니니까 상관없어. 그럼 네 마음은 어떤데? 단순히 늦은 거 말고, 지금 네 마음.”

“….”

“너도 나 걱정돼서 온 거 아니야? 안 가고 계속 기다릴까 봐 왔잖아. 못된 사람이 누굴 걱정해. 너 안 못됐어.”


‘그러니 내가 어떻게 화를 내. 늦은 건 이유가 있겠지. 그래도 결국 왔잖아. 내가 계속 기다릴까 봐 걱정돼서 자기 몸은 생각도 안 하고 왔으면서 왜 못됐다고 얘기하는 거야.’ 

정국은 얼떨떨해하는 여주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뭘 좀 먹일 생각으로 큰길 쪽으로 이끌기 시작하니, 여주가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더 나아가지 못하게 했다. 의아한 정국이 살짝 돌아보자, 여주는 깍지까지 껴서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깍지 낀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정국이 뒤늦게 여주와 눈을 맞췄다. 여주가 나지막이 말했다.


“여기 들어가자며.”

“그건 그냥 한 소리지. 예를 들려고.”

“들어가자.”

“호텔?”

“응.”


무슨 뜻인지 몰라 굳어 버린 정국은 쉽게 답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거렸다. 


“정말 서 있을 힘도 없는 거야?” 


정국이 뒤늦게 조심스레 물어보니, 여주가 고개를 숙이며 힘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이내 한결 나아진 표정으로 정국과 눈을 맞추며 정국의 손바닥을 살살 간질였다. 무슨 말을 할까 싶어 조금 긴장한 채 있는 정국과 달리 여주는 미소 띠는 여유까지 보였다.


“네가 그랬잖아. 꼬시면 넘어올 거냐고.”

“….”

“궁금해. 어떻게 꼬실지.”






호텔 방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여주는 정국의 목을 감싸 안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포갠 입술이 스치듯 닿으며 그 사이로 숨이 오갔다. 머리칼이 말려 들어간 줄도 모르고 심취한 여주가 정신없이 입술을 탐했다. 정국이 여주를 살짝 떼어 내 머리카락을 빼 주면서 살포시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그렇게 급해.” 


정국은 나지막이 뱉은 말과 함께 여주의 허리를 잡고 한 발짝 두 발짝 옮기며 입을 맞췄다 떼었다 했다. 그러다 침대에 여주의 다리가 걸려 멈춰 서면서 그 반동으로 여주가 몸을 휘청였다. 반사적으로 허리를 감싸 안은 정국이 여주를 제 품 안으로 쏙 끌어당겨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빤히 내려다보았다. 여주가 한껏 나른해진 표정으로 눈 맞추자 정국이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그런 표정이면 어떡해?”

“내 표정이 어떤데?”

“이미 넘어온 것 같아.”

“그래서 싫어?”

“아니. 좋아서 아무것도 못 하겠어.”


여주는 침대 끝에 살짝 걸터앉으며 정국의 팔을 끌어당겼다. 그와 함께 자연스레 몸을 뉘니 물 흐르듯 따라온 정국이 침대 위로 팔을 짚어 몸을 지탱했다. 정국은 하얀 시트 위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여주의 머리칼마저 예뻐 보여서 자꾸만 어이없는 웃음이 터졌다. 


“왜 자꾸 웃어?” 


탐탁지 않은 여주의 목소리에 정국이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볼을 쓰다듬어 줬다. 여주는 그런 정국의 손바닥에 쪽 입을 맞추고 배시시 웃어 보였다.


“언제까지 아무것도 못 할 거야?”

“….”

“응?”


여주가 손이며 볼이며 입술이며 계속 입을 맞추는데도 정국은 반응이 없었다. 그저 가만히 내려다보며 여주의 움직임에 따라 시선을 옮길 뿐이었다. 참다못한 여주가 삐죽 입술을 내미니, 정국이 살며시 터지는 웃음과 함께 여주의 머리칼을 쓸었다. 그 손 그대로 여주의 입술을 한 번 훑고 목선을 타고 내려와 셔츠 가장 첫 번째 단추 하나를 벗겨 냈다. 곧 두 번째 단추마저 풀려다 말고 멈칫하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여주를 보았다.


“이래도 되나.”

“뭘?”

“여자 친구도 아닌데 되나 싶어서.”

“만나자는 말 돌려서 하는 거야?”

“아. 그럴까.”

“….”

“우리 만날래?”


정국은 당장이라도 끌어안고 싶으면서 자꾸만 망설여지는 이유를 뒤늦게 깨달았다. 관계의 정의가 확실치 않아서였다. 예상치 못한 말에 되레 당황한 여주가 뭘 그리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나 싶어서 눈만 깜빡이고 있으니, 정국이 여주의 입술에 한 번 목에 한 번 그리고 또 입술에 한 번, 거듭할수록 진해지는 입맞춤과 함께 여주 허리를 쓰다듬었다. 여주는 목에 닿는 느낌이 유달리 자극적이라 눈을 꼭 감고 고개를 뒤로 조금 꺾었다. 더 잘 드러난 여주의 목에 정국이 머금는 듯 입술을 가까이 댔다. 그러면서 몸이 좀 더 붙는 바람이 정국은 은근하게 풀린 눈으로 여주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얼른 대답해 봐.”


정국은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그에 상응하듯 처음으로 대답을 재촉하며 다리를 쓸어내리니 여주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여주는 거절하면 그만할 건지 궁금해서 짓궂은 생각이 들었지만, 금세 장난을 포기하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정국은 여주의 셔츠 단추를 하나둘 빠른 속도로 풀어냈다. 그러면서 여주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무니 “아.” 작은 소리와 함께 자연스레 여주 입술이 벌어졌다. 그 소리에 놀란 정국이 얼굴을 조금 떼고 여주의 상태를 확인했다. 괜찮은 걸 보자마자 그 잠깐을 참지 못하고 전보다 더 붉어진 입술에 다시 입을 맞췄다. 

여주는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하려다 말고 입이 막혀서, 밀물이 닥치는 듯 정신없이 정국을 받아들였다. 처음 겪는 생소한 느낌에 어깨가 자꾸만 움츠러드는데 그러면서도 온몸의 피가 빨리 돌았다. 어찌할지 몰라 입으로는 자꾸 짙은 숨과 앓는 소리가 새어 나갔다. 정국의 입술이 닿는 족족 붉고 뜨거운 도장으로 강하게 눌러 찍는 듯했다. 단지 입 맞추는 것뿐인데 닿는 곳마다 여운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미간에 잔뜩 힘을 준 채 눈을 꼭 감고 있던 여주가 잠시 떨어진 입술이 의아해서 천천히 눈을 떠 보았다. 

마주 닿는 둘의 눈이 풀린 건 같은데, 정국은 그 눈빛 안에 애달아서 끓는 무언가도 함께 있었다. 정국이 제 셔츠 단추를 빠르게 풀면서도 여주에게 단 한 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그거 알아? 너는 가만히 있어도 유혹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

“그래서 넘어왔어?”

“어. 진작.”


‘그러니까 처음 본 여자한테 번호를 알려 줬겠지. 그러니까 미쳐서 너한테 남자 친구가 없으면 좋겠다는 헛소리를 했겠지.’ 

굳이 뒷말을 잇지 않고 진작이라는 한마디에 그간의 감정을 모두 담아낸 정국이 지체 없이 입술을 포갰다. 

‘처음에는 미친 여자인 줄만 알았지, 사람 미친놈 만드는 여자인 줄 알았나.’ 

짧게 스쳐 간 생각들이 꼬리를 물지 못하고 금세 사라져 버릴 만큼 여주의 향이 정국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교동 사거리. 그날 그 길로 들어서길 정말 잘했다.’ 

마지막 생각과 함께 무언가가 뚝 끊어지며, 그때부터는 정국의 눈과 귀와 손끝 그리고 머릿속에 온통 여주만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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