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트위터에 짤막하게 올렸던 구승효 드림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드르륵- 드르륵-

조용한 도서관 책상 위에 올려둔 진동 소리가 거슬려 승효는 얼른 휴대폰을 집어 들고 접힌 폰을 열었다.


[보드게임방에서 할리갈리 내기 중-_-ㅋ]

[정대 후문 OK노래방]

[뭐해? 빨리 와~]

[한유정 삘 받아서 메들리한다 ㅋㅋ]


“......”


과외 구할 때 더 편하게 연락받으려고 마련한 휴대폰인데 정작 동기들의 놀자는 문자 비율이 압도적이다. 흘끗 확인한 시계는 저녁 9시 30분. 20분 뒤에는 도서관 근로도 끝나니까 잠깐 들를까. 톡톡 손끝으로 책상을 두드리다, 서둘러 보던 책과 노트를 정리했다.





“구승효! 승효 왔다!”

“야, 잘 됐다. 니 빨리 유정이 좀 말려봐라.”

“뭐? 뭐라고?”

“한유정 봐봐! 가시나 왜 저렇게 혼자 발광하지?!”


온 공간을 덮은 어지러운 노래방 반주 때문에 대화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승효는 남슬기의 손끝을 보고서야 무슨 뜻인지 겨우 이해했다. You’re still my No.1! 날 찾지 말아줘! 나의 슬픔 가려줘! 보아의 최신곡을 열창하는 한유정의 목소리엔 독기가 가득했다. 왜 저러고 있냐.


“지 혼자 우울한 것만 골라 부르고 저래 청승이다.”

“...많이 취했어?”

“우리 아직 술 한 방울도 안 마셨는데?”


그건 그거대로 놀랍네. 고개를 천천히 젓는 승효를 보던 유정이 더더욱 악을 쓰면서 목청을 높였다. 얼씨구, 눈에 눈물까지 그렁그렁 한데?


“너 우냐?”

“뭐? 한유정 진짜 울어?”


유정은 실컷 부르던 노래를 뚝 끊고 무릎을 세워 끌어안더니 얼굴을 푹 파묻는다. 아까부터 같이 있던 김재우와 남슬기도, 당연히 승효도 맥락을 몰라 서로 쳐다보기만 했다. 어쩐지 가시나가 매 이별 노래만 부르더만. 니 뭔 일 있나? 유정을 다독이던 남슬기가 흔들어봐도 꼼짝도 없이.


“......나 술 마시러 갈래.”


어, 그래, 그러자. 갑자기 벌떡 일어난 유정을 따라 남슬기가 후다닥 가방을 챙겼다. 가만히 지켜보던 승효도 둘을 따라 노래방을 나가고. 다음에 부를 노래를 찾느라 신나게 노래방 책을 뒤적거리던 김재우 혼자 남았다가 뒤늦게 아무도 없는걸 깨닫고 부랴부랴 일어섰다. 야! 시간이 20분 남았는데?! 마무리 노래해야 하는데! 하나되어 불러야 하는데! 






“있잖아. 나는 대학 오면 남자친구가 금방 생길 줄 알았다?”


술을 마시지 않은 승효를 제외하고 셋이서 소주 두 병을 비웠을 때 드디어 유정이 입을 열었다. 집에 무슨 안 좋은 일이 있겠거니 넘겨짚었던 친구들이 의외의 주제에 다들 동작을 멈췄다.


“음. 그, 그렇지. 내도 쌤들이 대학 가면 살 빠지고 남친 생긴다고 캤는데. 둘 다 안 되드라.”

“아냐 나는 정말, 정말로… 곧 고백받는 줄 알았단 말야. 기다리고 있었는데.”

“누구? 누가?”

“임선호 선배.”


컥! 켁! 소주를 털어 넣던 김재우가 사레가 걸렸다. 계란말이를 뒤적이던 남슬기는 젓가락을 놓쳤다. 승효는 받아놓기만 했던 소주잔을 만지작거리다가 입안으로 훅 털어 넣었다.


“유정아 니 임선호 선배랑 썸씽 있었나?!”

“아 그러니까. 맨날 밤에 문자도 오구… 강남역에 파스타도 먹으러 갔었어. 저번에 포켓볼 가르쳐준다구 당구장 갔을 때도 막, 이렇게 이렇게, 뒤에서 은근슬쩍 붙어 오면서 손도 잡구, 아 몰라.”

“임선호 선배가?”

“나도 눈치라는 게 있잖아? 진짜 느낌이 왔거든.”


그러고 나서 세상 다 산 사람처럼 한숨 푹푹 쉬던 유정은 제 앞의 잔을 들어 한 번에 마셔버렸다. “사장님! 여기 한 병 더 주세요!” 소리치면서 다른 곳을 보는 동안, 승효가 유정의 빈 잔에 물을 부어버렸다. 쟤 저러다가 또 저번처럼 토할 것 같아. 오늘 들은 이야기가 아무리 충격적이더라도 저번 오리엔테이션 때 보다 더 임팩트 있지는 않을 거다.


“저번주 금요일 밤에 씻고 자려는데 문자가 온 거야. 잠깐 나올래? 드라이브하자 하면서.”

“그 선배 차도 있나?”

“응. 나 집에 갈 때 한두 번 얻어 타봤어. 그래서 나는 드디어 고백받나 보다, 나도 남자친구 생긴다,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박성욱 선배도 같이 있다는 거야.” 

“미친, 안 끼는 데가 없노 그 인간은. 그래서? 우쨌는데?”

“약간 기분이 상했어. 단 둘인 줄 알았는데. 그런데 둘만 보자고 말을 죽어도! 못하겠어서. 열심히 둘러댔지 뭐. 시간도 너무 늦었고, 내일 주말이니까 내일 낮에는 시간 어떠냐, 그렇게 보냈는데… 그렇잖아. 낮부터 만나면 더 오래 있을 수 있잖아. 나만 그렇게 생각했나 봐.”

“......”

“아까 박성욱 선배가 떠드는 걸 들었어. C반에 문지혜랑 갔다 왔더라? 그 드라이브.”


그 뒤로 서서히 문자 텀도 길어지고, 씹을 때도 있고. 선배랑 마주쳐도 인사는 다정하게 하는데, 근데 이젠 전처럼 대화는 없이 그냥 스쳐 지나가고… 말하다가 혼자 서러웠는지 또 울기 직전의 유정. 눈물을 삼키고 비장하게 잔을 털어 넣으며 크- 소리를 냈다. 제가 마신 게 물인지도 모르고.


“이럴 땐 어떻게 해야 돼? 응? 나 아직 임선호 선배 좋단 말야.”

“내는 경험이 없어서… 야, 느그가 남자니까 말 좀 해봐라. 우째하면 좋노?”

“아니 그, 뭐. 글쎄…”


남슬기의 살벌한 눈짓에 김재우가 몇 마디 더듬거리긴 했다. 그러다가 승효에게 S.O.S.를 보낸다. 구승효, 너도 뭐라고 말 좀 해봐.


“널 안 좋아하니까 연락 안 하는 거야.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해. 좋아했으면 고백했겠지.”

“......흐앙.”

“야, 구승효 니는 쫌!”


뭐가. 사실인데. 시니컬하게 뱉고 비우는 잔.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해서 안 마시려 했는데 갑자기 술이 달아서 계속 먹히네.


“임선호 선배라면 어떤 사람을 좋아할까?”

“그 선배 생각을 우리가 어떻게 알아.”

“그래도 보편적이라는 게 있잖아. 일반적으로, 보통은, 어떤 여자가 좋은데.”

“뭐. 예쁘면 무슨 짓을 해도 다 용서되긴 하는데,”


유정이는 이미 예뻐! 충분히! 하하! 말 꺼내고 본전도 못 찾은 김재우의 눈물겨운 수습. 도움 되는 말 좀 해라! 남슬기의 등쌀에 못 이겨 몇 마디를 더 붙였다.


“활발하고, 밝고, 귀여운 사람…이 좋지. 구승효는? 너도 말해봐.”

“왜 날 물고 늘어져. 생각 안 해봤어.”

“구라 치시네. 이상형 없는 사람이 어딨냐?”


글쎄. 정말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이런 질문도 처음이고. 보통은 승효에게 좋아하는 스타일을 묻는 사람보다는 냅다 고백하면서 자기를 좋아해 달라고 하는 사람이 많은 편이니까. 하지만 이미 승효에게 집중된 얼굴들 위로 궁금증이 한껏 차올랐다. 갑자기 신중하게 답변을 골라야 할 것 같은 기분.


“...계속 눈이 가고. 보고 있으면 웃을 일이 많은… 사람.”

“뭐고. 웃기는 여자가 이상형인 애는 또 처음 본다!”

“아 뭐야. 사람마다 다르네 정말…”


당연한 진리를 깨닫고 본격적으로 테이블에 콩 머리를 박는 유정을 보는 승효의 속이 이유 없이 뒤틀렸다. 새로 가져다준 소주 뚜껑을 뜯은 것도 승효였다.


“너네가 보기엔 문지혜가 예뻐?”

“글쎄? 잘 모르겠는데.”

“그럼 나보다 몸매가 좋고 섹시해서 그런가? 가슴이 커서?”


아. 그냥 아까부터 마셔서 진작 취할걸. 하필 맨정신에 들어버려서 여운이 길게 남을 것 같냐. 짜증스럽게 귀를 후벼파다가 빠르게 두 잔을 연속으로 비워내는 승효의 미간이 훅 패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유정을 대상으로 더러운 생각만 하는 임선호라면 중간에 망한 게 오히려 너한테 잘 된 일인데. 그걸 말해줄 수도 없고. 바보처럼 아직도 좋다는 타령이나 하는 한유정도 밉다. 

내가 이걸 계속 들어줘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렇게 좋으면 네가 먼저 고백해 보던가. 이렇게 뒤에서 울기만 하면 방법이 생겨?”

“야아, 너무 매정하게 그러지 마.”

“우리가 해결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 그냥 이럴 시간에 가서 고백이라도 해.”


나 먼저 간다. 내일 9시 교양수업이야. 쏘아붙이고 먼저 일어서는 승효의 마음도 결코 시원하지는 않았다.





[잘 들어갔]

[아직 밖에]

[아까는 미안]


“에이씨.”


집에 도착해서도 찜찜한 마음이 이어졌다. 문자창을 켜놓고 텍스트를 썼다 지우길 수차례. 그냥 침대 위로 휴대폰을 던져버리고, 승효도 몸을 던져 누워버렸다. 그냥 보내지 말자. 어차피 한유정이 기다리는 건 내 연락이 아니라 임선호의 연락일 텐데.

뭐? 넘버원 좋아하시네. 아까 노래방에서 잔뜩 악쓰던 유정의 동그란 뒤통수가 떠올랐다. 설마 임선호와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되었을 줄은 전혀 몰랐었다. 뭐, 매일을 학교에서 붙어 다녀도 사생활을 일일이 알기는 어려우니까. 그건 이해하겠는데. 

지금 전혀 납득이 안 되는 건 …왜 그게 내가 화낼 일인지. 

입안이 썼다.

지잉- 하필 그 타이밍에 울리는 진동. 생각 없이 확인한 휴대폰에는 유정의 문자가 떠올랐다.


[승효야 너 말이 맞는 것 같아]

“뭐가.”


저도 모르게 소리로 해버린 대답. 답장을 뭐라고 할까, 고민 중이었는데 이어서 뜨는 텍스트.


[나 고백해 보려고! >_<]

[고마워]

[덕분에 용기를 얻었당 아자자!]


아효. 답장하지 않고 그냥 휴대폰을 덮어버렸다. 팔을 들어 눈 위도 길게 덮어버렸다.






“형.”

“이차방정식은 근의 공식을 알면 편한데, 다른 변형도 많으니까 다양한 문제를 접하는 게 중요해.”

“형, 자꾸 전화 오는데요.”

“...선생님. 형이 아니고.”

“아 쌤. 쌤 전화기 자꾸 울려요! 여친한테 연락 오는 거 아니에요?”


아직 변성기도 안 끝난 목소리에서 흥미로움이 뚝뚝 묻어났다. 그러게. 휴대폰 꺼 두는 걸 깜빡했네. 승효도 불규칙하게 울리는 진동이 거슬리는 참이었다. 하지만 확인하지 않아도 누구인지는 충분히 알 것 같았다.


“대학생 되면 진짜 여친 생겨요? 여자들은 키 크고 잘 생긴 사람 좋아하죠?”

“몰라. 오늘 자기 전에 여기 한바닥은 꼭 풀고 자. 그래야 안 까먹지. 다음 주에 보자.”

“쌤은 어떻게 고백했어요? 쌤도 cc에요?”


중학생이 벌써 cc를 알아? 승효는 잠시 과외 학생의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보고 픽 웃다가 현관으로 가 신발을 신었다.


“다음에는 여친 사진 보여주세요!”

“시끄러워. 자기 전에 문제 꼭 풀고.”


엘리베이터에서 밀린 문자를 확인했다. 예상대로 전부 한 사람이 보냈다.


[나랑 바다에 해 뜨는 거 보러 갈래? 우울해ㅠㅠ] 그리고 마지막은 한유정의 뜬금없는 일출 타령. 축 처진 눈으로 살짝 불만스럽게 내민 입이 말하는 그 얼굴까지 훤히 보이는 기분. 또 왜. 뭐가 그렇게 우울한데.


피했다고 표현하는 건 좀 우습고, 최대한 자리를 비켜준 것이 맞겠지. 임선호에게 꼭 고백하겠다고 마음먹은 애를 승효 나름의 방식으로 도와주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강의실에서야 원래부터 01학번들과는 멀리 떨어져 앉았는데 더더욱 구석으로 갔고. 과방에는 웬만한 중요한 일이 아니고서는 들어가지 않았다. 과 행사도 한 번도 간 적이 없고. 한유정이 언제 어디서 임선호 눈에 들려고 애쓰는 중일지 모르니까 01 선배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구승효는 한유정 옆에 있으면 안 되지. 게다가 최근에는 단기 과외도 많이 잡아서 승효도 나름대로 바빴고.

그렇게 마주칠 시간을 줄였더니 유정은 저녁마다 문자로 승효에게 연애상담을 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선배한테 답장이 안 왔어. 어제 과방에서 5분 정도 대화했어. 승효야 넌 고백을 받으면 평일이 좋아, 주말이 좋아? 

특별히 대단한 솔루션도 안 주는데 뭘 그렇게 사소한 것까지 물어보는 걸까. 어차피 나는 가을에 군대 가기 전에 해놓아야 할 일들이 산더미라, 네가 고백을 어떻게 할 건지, 성공했는지 관심도 없어. 

아니. 없는 줄 알았어.


[다른 사람이랑 가]


무심하게 꾹 눌러 답장하고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답장 대신 걸려오는 전화.


-구승효 치사해.

“뭐가.”

-됐거든? 나 혼자 갈 거야.”

“야, 너는 겁도 없이 혼자 밤에 어딜 가.”

-바닷가! 해 뜨는 거 볼거야! 원래 대학생 되면 그렇게 충동적이고 낭만적인 추억을 만드는 거랬어.


다들 대학생이 되면, 어른이 되면, 하고 싶은 소소한 바람들을 간직하고 있는 걸까. 그런 건 어떤 여유에서 나오는 건데. 장학금을 노리면서  생활비 벌기에도 빠듯한 승효에게는 그저 다른 세계 이야기일 뿐.

…그래서 가끔은 궁금해. 나와 다른 네 속에 또 어떤 반짝반짝한 것들이 있을지.


“넌 친구가 그렇게 없냐? 남슬기는.”

-아니 그냥, 그냥… 네 생각이 나서. 됐어. 싫음 말아라.


그냥이라는 전혀 설득력 없는 이유가 승효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뭐 어딜 가자는 건데.”





구승효! 저를 보자마자 손 흔드는 유정의 옷차림은 한없이 가벼웠다. 아무리 5월이라도 밤바다는 추울 텐데, 쯧. 혀 차는 소리와 함께 혹시 몰라서 챙겨온 바람막이를 꺼내 밀었다.


“하나도 안 추운데? 이걸 또 입으라고?”

“바닷가 가면 바람 엄청 불 거야.”

“그런가? 땡큐떙큐. 역시 구승효랑 가길 잘 했지.”


그렇게 말하고 배시시 웃는 유정의 코 끝이 빨갰다. 또 울었냐. 가려보려고 안경을 쓴 모양인데 그래도 평소보다 부풀어 오른 동그랗고 큰 눈 위 눈두덩이까지 빤히 보였다. 모르는 척해줬다.


서울을 벗어나 본 적이 거의 없는 서울 촌놈들끼리 버스터미널에서 어딜 가야 할지 한참을 토론하다가, 승차권 판매기 앞에서 눈을 감고 콕 찍어 나오는 곳을 고르기로 합의했다. 이런 무계획은 승효에게 스트레스와 불안감 그 자체였지만 그것도 다 대학생의 낭만이라고 누가 우겨서. 그렇게 유정의 손끝에 걸린 곳은 경상북도 영덕. 오, 들어본 적 있어! 여기 대게 파는 곳 아냐? 그럼 바다가 있겠지. 단순한 절차를 통해 나온 결과치고는 나름 만족스러웠다.


심야버스를 타고 도착한 시외터미널 인근은 불빛 하나 없는 깜깜한 어둠 그 자체. 같은 버스를 타고 도착한 몇 안 되던 사람들마저 어딘가로 흩어지고, 으스스한 고요함 탓에 찬 기운 실린 봄의 새벽이 더욱 춥게 느껴졌다.


“야… 좀 무섭다. 바다는 안 보이네?”

“터미널이잖아.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해야 바다가 나오지.”

“아하.”


승효가 준 바람막이를 후다닥 껴입은 유정이 택시를 발견했다. 아저씨한테 바닷가 태워달라고 하자! 택시를 향해 앞장서서 걷다가 승효의 팔을 잡아 끄는 여린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이럴 때 보면 허당 같던 애가 야무지고 대담하기도 하고. 매사에 의심부터 하고 보는 승효는 택시 문을 닫는 순간까지도 바가지 쓰면 어쩌나, 혹시 나쁜 일이라도 당하는 건 아니겠지 실컷 신경을 곤두세우고 걱정만 했다. 정작 무섭다고 쫄아있던 유정은 다시 살아났는데.


“원래 밤바다가 이런 곳이었어?”

“이런 것도 다 낭만이라며.”

“그래도 이건 좀…”


택시에서 내려 마주한 심야의 바다는 흉포했다. 사나운 바람 소리를 따라 쉴 새 없이 밀려오는 위협적인 파도는 청춘의 불확실한 낭만 따위와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간간이 해안 도로를 따라선 가로등마저 없었으면 정말 블랙홀 같은 어둠만 존재했을 것 같다. 이따금 도로를 스쳐 지나가는 차 소리도 모래를 밟으며 점점 바다 쪽으로 걸어갈수록 희미해지고.

볼 것도 없는 검은 배경의 수평선을 유정은 한동안 열심히 바라보았다. 대체 이게 뭐라고, 보고 나면 바뀌는 게 있나. 그렇게 회의적인 상념만 가득 담아 옆에서 바라본 유정의 눈동자 안에도 검은 바다가 들어 있었다.

푸하, 우리 너무 웃긴다! 진짜 해 뜨는 거 보러 여기까지 와버렸어! 갑자기 와락 웃음을 터트리던 유정은 휘몰아치는 바람 때문에 입으로 자꾸 들어오는 머리카락을 걷으면서도 계속 깔깔거렸다.


“으, 근데 너무 춥다.”

“그러게 따뜻하게 입고 왔어야지.”

“5월인데, 이럴 줄 몰랐지.”

“...해 뜨려면 3시간은 남았는데.”

“진짜? 3시간이면, 5시 반쯤? 해가 그렇게 빨리 떠?”

“넌 해 뜨는 거 보러 오겠다면서 그런 것도 안 알아보고.”

“아니 난 그냥 밤에 와서 뜰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면 될 줄 알았지이… 역시 구승효! 우리 과 에이스.”


달달 떨리는 턱으로 말이나 못 하면. 어쨌든 승효의 바람막이 후드를 뒤집어쓰고도 이렇게 추워하는 애를 그냥 둘 수도 없다. 승효는 도로 쪽으로 나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유명 관광지도 아닌 작은 바닷가에 24시간 카페라도 있길 바라는 건 너무 지나친 희망이었지만. 터미널 근처로 가면 PC방이라도 있지 않을까? 택시가 기적적으로 잡힌다면 타고, 아니면 걸어가다 보면 가는 길에 편의점이라도-


“오, 저기! 저기 갈래?”

“뭐? 안 돼.”

“왜! 저기가 제일 가까운데.”


유정이 가리키는 곳은, 아까부터 승효의 눈에 들어왔지만 애써 못 본 듯 외면했던 다 쓰러져가는 건물. OO장. 네온이 온전치 못하게 깜빡이는 간판에 작게 덧붙은 글씨, 무인모텔. 내가 너를 데리고 저길 어떻게 가겠어.


“가보자. 안에서 좀 쉬었다가 시간 맞춰 나오면 되잖아.”

“야 넌 정말…!”

“왜에. 누나 못 믿어? 구승효 혹시 이상한 생각해?”

“...미치겠네.”


승효가 마른 세수로 얼굴을 두어 번 쓰는 사이 유정은 이미 무인모텔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저 엉뚱한 애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농담을 하는데. 혹시나 유정이 진짜 모텔로 들어갈까 봐 말릴 생각에 무작정 뒤를 쫓아 뛰었다. 그러다 기적적으로 모텔 입구에 있는 편의점을 발견했다. 편의점 입구와 모텔 입구 사이쯤 어중간하게 서서 따라오는 승효를 보고 웃는 유정의 표정이 사악했다.


“야. 한유정. 편의점, 편의점으로. 가자.”

“그거 조금 뛰었다고 그렇게 헉헉거려? 너무 공부만 한 거 아냐?”

“말 돌리지 말고.”


유정을 떠밀다시피 편의점으로 집어넣은 승효가 크게 숨을 돌렸다.


다행히 편의점은 충분히 따뜻하고 밝았다. 컵라면으로 적당히 몸을 녹인 유정은 후식으로 먹을 소시지 껍질이 뜯기지 않아 헤매다가 겨우 성공하고는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근데 우리 경영학도답게 SWOT 분석을 해보면,” 여전히 오물거리는 발음으로 부지런히 말하는 유정. 남은 소시지 껍질을 미리 뜯어둔 승효가 커피우유를 홀짝였다.


“모텔을 갔어야 했어. SWOT 상으로는 더 나은 선택이었다니까?”

“어휴.”

“알람 맞춰서 잠도 좀 편하게 자고, 가방도 놔두고. 해 뜨는 거 보고 나면 다시 들러서 씻고 서울 갈 수도 있고.”

“너는 나랑 자고 싶냐?”

“......응?”

“......아.”

“뭐어어?!”

“아니 그게-”


순간적으로 뱉어진 말에 귀 끝까지 당황으로 물드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놀릴 건수 하나 잡았다는 유정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어졌다.


“말이 되게 이상한데?”

“아니, 자는 게 그 자는 게 아니고, 아이씨.”

“이상한 생각하는 거 맞았구나 구승효. 변태야?”

“그런 뜻이 아닌 거 너도 알잖아.”

“어머. 난 모르겠는데? ‘그런 뜻’이 뭔데?”


너 이렇게 곤란해하는 거 처음 본다 야. 재밌는데? 졸업할 때까지 계속 놀려야지. 유정의 빙글거림이 얄미워도 원인 제공을 한 입장에서 발끈 받아칠 수도 없다. 진짜 변태는 네가 그렇게 좋다고 난리 치는 임선호라고, 문득 왜 그 생각이 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도 밖으로 꺼낼 수도 없고.


“일단 나가자. 시간 다 되가.”

“나가서 어디 가게? 모텔 가게?”

“야, 너 진짜! 누가 들으면 오해하잖아.”


해 뜨는 거 안 볼 거야? 정색을 해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 유정의 장난기를 포기하고 먼저 편의점을 나섰다. 뒤따라 나온 유정이 승효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앞서 달려나갔다. 그래, 계속 우울한 채로 두는 것보다는 무슨 이유든 밝은 이 쪽 한유정이 더 보기 좋네. 위로에는 소질 없는 승효가 오늘 거둔 뜻밖의 성취였다.


희뿌옇게 탁한 회색으로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이 조금씩 밝아졌다. 어느새 바람도, 파도도 잔잔해진 고요한 해변. 서서히 깔리는 새벽의 푸른빛 덕분에 동해 작은 어촌 마을의 한적하고 소박한 풍경도 함께 눈에 들어온다.


와! 저기 봐, 빨갛게 된다. 그러게. 가벼운 몇 마디 주고받는 사이, 해는 수면을 벗어나 올라와버렸다. 옅게 낀 구름 때문에 선명하게 실루엣을 드러내지도 않고. 드라마틱한 장면은 아니었다. 생각보다 싱겁네. 나처럼 실망한 건 아닐까, 하며 바라본 한유정은


“고마워 구승효. 같이 와줘서.”

“......”

“예쁘다.”


예쁘네. 

맞아. 예뻐.






“우울하던 건 나아졌어?”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며 옆자리에서 창밖을 보던 유정에게 툭 던진 질문.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입술만 깨물었다 놓은 유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임선호 선배한테 고백 안 하려고. 승효야.”

“...동문서답이야 왜.”

“고백을 해도 망할까 봐 우울했던 건데, 고백 자체를 안 하기로 했으니까 안 우울해. …임선호 선배는 확실히 날 안 좋아하는 것 같아. 이젠 선배가 먼저 연락하는 일도 거의 없거든.”


그렇게 말하는 유정의 담담한 미소 지은 얼굴이 아래로 떨어졌다. 아. 고백 정말 어렵다. 그냥, 포기.


“야, 노래 듣자. CD 있어?”

“Coldplay 하나밖에 없어.”

“오. 오늘은 김동률 아냐? 구승효 음악 취향이 참 나랑 안 맞지만 들어줄게.”

“그래. 들어줘서 고맙다.”


푸스스 웃으며 이어폰 한 쪽을 건네받은 유정은 몇 트랙 넘기지도 못하고 잠들어버렸다. 

유리창에 기대어 잠든 유정의 유독 심하게 구겨진 미간이 눈에 들어왔다. 잘 때도 뭘 그렇게 인상을 쓰냐. 망설이다가 손가락을 뻗어 톡, 누르니 금세 풀어져서 그건 그것대로 한유정답고. 


Look at the stars,

Look how they shine for you,

And everything you do,

Yeah they were all yellow,


흘러가는 노래. 스쳐가는 창밖 풍경. 그 속에서 잠든 유정만 그대로였다. 


쌤은 어떻게 고백했어요? 과외하던 꼬맹이마저 그렇게 물었었지.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다들 고백에, 연애에 진심인 세상에서 승효 혼자만 겉도는 기분. 소리 내어 뱉자마자 사라질 문장 그게 뭐라고. 고작 그 말 한마디가 매 순간마다 감당할 수없이 벅차오르는 나의 감정을 확실히 묶어두는 효력이 발생한다고 믿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힘들다.

하지만, 그래. 너를 보고 있으면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보인다는 게 어떤 기분일지는 어렴풋이 잡히는 것 같다. 신중하게 고르고 고른 말들을 정제해서 전달했을 때의 뒷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겠지. …어쩌면 이렇게 그저 같은 풍경 속에서 같은 음악을 듣는 것조차 못하게 되는 사이로 되어버릴 수도 있잖아.

그건 좀 싫은데.  


불현듯 울리는 유정의 손에 들린 휴대폰 진동이 승효의 상념을 끝냈다. 

[임선호 선배님] 선명하게 뜨는 발신자. 


“......”


잠깐 망설이던 승효. 깊이 들이마신 숨을 뱉으며 유정을 흔들어 깨웠다. 




잡식에 죠필을 곁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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