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일주일 하고도 하루. 193시간 1분 1초. 남자를 못 본 시간이다. 첫날에야 그러려니 했지만 이틀이 지나고 사흘째 되었을 때 이상한 아쉬움이 들어 뽀삐와 산책 시간을 조금 더 늘렸다. 혹시 뽀삐와 산책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타이밍이 엇갈렸던 게 아닌가 싶어서. 그러나 안타깝게도 가게 앞에서 뽀삐와 나를 기다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까까 사 먹으라며 친히 천 원짜리 지폐까지 쥐여주며 다녀오라 인사까지 해준 남자를 못 본 지 8일째. 처음으로 야간 자율 학습을 째고 아직 해도 지지 않는 늦은 오후 가게를 방문 했다. 밤에 올 때는 카운터에 아무도 없어서 몰랐는데, 꽤 오랜만에 보는 사장님이 있었다. 


"어이고, 이게 누구야. 도시 아파트 107동 아니여."

"아, 네... 잘 지내셨어요?"

"그라믄. 오늘 저녁은 짜장면인갑네. 뭐 드릴까? 늘 먹던 거?"


그래도 며칠 만에 조우한 사장님이라 제법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외식하러 이곳에 들렀던 나를 기억하던 사장님은 익숙하게 우리 가족이 자주 먹는 메뉴로 준비하면 되냐는 듯 물었고 나는 괜히 카운터 앞에서 손만 꼼지락 대며 눈동자를 굴렸다. 치익 치익 주방에서 나는 소리와 카운터에서 흘러드는 라디오 소리가 겹쳐 들렸다.


"저.. 사장님 뭐 하나만 여쭤봐도 돼요?"

"엉? 그럼 그럼."

"여기 알바생은.... 몇 시쯤 출근해요?"


우물 쭈물 거리는 나를 가만히 기다려 주시던 사장님은 조심스레 물은 내 질문에 그게 무슨 소리인지,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두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우리 알바생 없는디?"

"....?"

"주방에 한 두 명이랑, 나 혼자여. 내가 다 배달혀."


그리고 나온 답은 꽤 충격적이었다. 분명 홍콩반점에서 일한다고 했는데. 사장님이 모르는 알바생이 있을 수 있나? 그게 말이 되냐고, 남자가 나한테 거짓말을 했다는 거잖아. 여기 알바생이 아니면 어떻게 그렇게 밤 늦게까지 가게에 자유롭게 드나 들며 메뉴를 턱턱 주문하는지. 그 남자의 인상착의를 기억해내며 사장님께 다시 한번 그에 대해 물으려 했을 때였다. 

저 멀리서 익숙한 배기음이 들리니 나와 사장님은 동시에 고개를 출입구 쪽으로 돌렸다. 


"싸장님~ 여기 쟁반 하나요."

"어, 왔냐."


파블로프의 개도 아니고 무슨 오토바이 배기음만 들리면 반사적으로 쳐다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금방 현실을 깨닫고 자각하는 것도 수 십번. 오토바이에서 내려 헬멧을 안장에 올려두고 반점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역시나 남자가 아니었다. 어쩌면 내 또래 같기도 한 앳된 남자였다. 

나를 스쳐 지나가는 그 짧은 사이 미약하게 아빠에게서 나는 담배 냄새가 났다. 어린 놈이 벌써 담배에 손을 대다니. 익숙하게 메뉴를 시키고 의자를 끌어 앉아 뒤통수를 빤히 쳐다봤다. 


"....아."


남자 애는 지 뒤통수가 따가웠던 건지, 물과 단무지가 테이블 위로 올라오고 난 후 스테인리스 컵에 물을 가득 따라 담아 원샷을 하고는 입가에 묻은 물기를 대충 닦으며 고개를 뒤로 돌렸다. 정통으로 눈이 마주치면 살벌한 삼백안에 나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냈다. 어깨까지 볼품 없이 들썩 이면서. 주춤 거리며 뒤로 물러나면 남자애는 별 다른 말 없이 슬쩍 나를 위아래로 훑더니 곧바로 나온 쟁반짜장에 눈을 돌렸다. 잘 먹겠습니다. 그려, 맛있게 먹어. 남자애와 사장님은 막역한 사이 인 듯 편하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병풍 처럼 카운터 앞에 쫄아 있는 내가 낄 틈은 당연하게도 없었다. 다행히도 사장님은 짧게 대화를 마친 후 카운터로 돌아와 내게 속삭였다.


"쟈는 건너편 중국집 알제?"


이 홍콩반점을 기준으로 신호등을 사이에 두고 최근에 새로 오픈 했던 중국집은 요 근방 아파트를 비롯해서 여러 빌라에서 화제다. 맛도 맛인데 인테리어가 죽인다나 뭐라나. 아빠가 제 친구들과 얼핏 가봤을 때 너무 삐까뻔쩍해서 정신이 없어 음식 맛도 모르겠다며 혹평 아닌 혹평을 했었던 기억이 난다. 상호는 '만리장성' 맛은 홍콩반점이 더 맛있다고 하긴 했지만, 만리장성의 음식을 먹어보지 못 한 나로서는 그게 잘 공감이 되지 않았다. 


"거기 알바생인디."


그 가게의 알바생이면 사장님 입장에서 그리 달갑지 않지 않나? 경쟁 업체에서 일하는 사람이잖아. 나는 아까까지만 해도 있지도 않은 알바생의 근무 시간에 대한 사장님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그대로 재현했다. 


"지네 짜장면이 맛 없다고 여기로 가끔 먹으러 오고 그려."


  무슨 대단한 일인가 했는데 그냥 애사심이 없는 놈이구나. 아예 접시에 코를 박고 짜장면을 흡입 하는 남자의 뒤통수를 힐끔대며 생각했다. 뽀삐 아버지를 보러 온 것 뿐인데 정말 쓸데없는 TMI까지 들어버렸다. 맥이 빠져 허허실실 웃는 사장님을 향해 그렇구나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에고 맞다. 뭐 줄까? 늘 먹던 걸루? 거기 사장님은 잘 계시나 모르겠네."

"저희 아버지는 잘 계세요. 아... 다음에 올게요."

"그려?"

"..요새 사장님 못 뵌 것 같아서 와 봤어요."


그 남자 때문이지만 핑계는 있어야 하니까. 사장님은 티 나는 거짓말에도 감동한 눈을 했다. 그러면서 옆에 놓여 있는 둥근 어항에 가득 담겨 있는 익숙한 사탕을 한 줌 내게 쥐여주었다. 다음에는 부모님이랑 같이 오라며, 서비스는 두둑이 챙겨주겠다는 사장님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두 손에 가득 찬 오렌지 맛 사탕은 매일 먹던 거라 놀라지도 않았고 감흥도 안 났다. 대충 치마 주머니와 교복 재킷 안 밖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무슨 스파이도 아니고."


가게 앞에 놓인 오토바이 뒤에 실린 중국집 배달통에는 크게 만리장성 로고가 박혀 있었다. 딱히 편견 같은 게 있는 건 아니었지만 경쟁업체에서 매출을 올려주고 있는 모양이 제법 웃겨서 그리 중얼 거렸다. 사실 좋아한다는 건 거짓말이고 만리장성에는 부족한 것을 알아내려 홍콩반점에 잠입한 게 아닐까 하는 터무니 없는 상상까지 해봤다.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저으며 자리를 떴다. 집으로는 가지 못했다. 왜 이렇게 일찍 오냐는 엄마의 잔소리가 들릴 게 뻔했기 때문에, 뽀삐와의 산책 시간 까지는 근처 카페에 눌러 앉아 공부를 해야만 할 듯 싶었다. 



"사장님 잘 먹었습니다~ 역시 오늘도 존맛이네요."


꼬깃한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건넨 후 어항에 가득 찬 사탕 하나를 까 입 안으로 쏙 넣는다. 다음에 또 오라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 사장님을 향해 알겠다는 뜻으로 검지와 중지를 붙여 관자놀이 쪽에 댔다가 뗀다. 가게를 빠져나와 받은 거스름 돈을 입고 있는 옷 안에 쑤셔 넣고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어, 형."


신호음은 그리 길지 않았으니 안장에 올려놓은 헬멧을 반대편 팔에 걸쳐 이리저리 돌리며 통화를 이어 나갔다.


"나 그만둘래."

- 또 우리 동혁이가 병이 도졌나보네.

"들켰어."


형 이라는 친근한 호칭으로 시작된 대화는 종잡을 수 없이 흘러갔다. 들켰다는 말에 상대편은 답이 없었다. 그 대신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짖음이 들렸다. 왕왕! 어어, 동혁이 삼촌이 개소리 잘하지? 아득하니 들리는 그 말은 이상하게 섬뜩했다.  


- 누군데.

"몰라. 웬 여자애."


그러면서 시선은 양 주머니를 빵빵하게 채운 채 코너를 돌고 있는 누군가를 향해 고정 돼 있었다. 


"이름이 김여주였나."


카운터를 지나는 그 짧은 순간에 본 명찰은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상대방은 답이 없다.





홍콩반점의 진실






약 세 시간 정도 흘렀다. 프랜차이즈 카페에는 사람이 가득 차서 조금 더 깊숙한 곳에 위치한 개인 카페로 들어왔다. 에어팟을 가져오지 않아 걱정 했던 것과는 무색하게 금방금방 자리를 떠나는 사람들 덕에 조용히 공부에 집중 할 수 있었다. 남자도 못 만나고, 야자도 빼버렸으니. 더 이상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내면 안 되겠다 싶어 바짝 정신을 차린 것도 한 몫했다. 대충 아홉 시 정도가 되어서야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던 펜을 정리하고 자습서를 덮었다. 혹시 몰라서 음료 하나랑 케이크 하나를 시켜 먹었더니 배가 더부룩했다. 아무래도 오늘 주는 음식은 모두 엄마 아빠의 차지가 될 것만 같다. 


"왜 오늘은 거기서 와?"

"...어..."

"학교는 반대 방향 아니야?"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카운터를 지나가려 했던 나를 익숙한 목소리가 붙잡았다. 분명 이 시간대면 아무도 없어야 할 카운터에는 남자가 의자에 다리를 꼰 채 앉아있었다. 내가 카운터 앞에 우뚝 멈춰서자 의자를 앞뒤로 움직였던 남자는 퍼뜩 일어났다. 다소 오랜만에 마주하는 얼굴이었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아주 조금 눈가가 어두운 것으로 보아 피곤해 보이는 것 빼고는. 

오늘은 어째서 학교 반대 방향에서 오냐는 남자의 말에 쉽사리 대답하지 못 하고 얼 타 있으면 카운터에서 나온 남자는 매일 앉는 자리에 의자를 끌어 착석했다. 


"오늘 뽀삐가 놀러 갔거든."

"..아 그래서.."

"서운해?"


어쩐지, 홍콩반점에 발을 들이기도 전에 가장 먼저 맞아주는 솜뭉치가 안 보였더라니. 뽀삐의 주인은 아무렇지 않아 하는 것 같은데 정작 산책만 시키는 내가 조금은 시무룩 해했다. 급변한 내 표정을 보더니 남자는 서운 하냐며 물었다. 서운하다고, 말할 수 있나? 내가...? 정작 주인은 저 남자인데. 나는 그냥 산책만 시키는 사람이고. 뽀삐가 없는 것 보다도 남자를 만난 게 내겐 더 놀라운 일이었다. 대답으로 목 언저리를 매만지며 머쓱해 하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언제 오는데요?"


그래도 장기 여행이라도 간 건가 하는 궁금증에 그리 물으면 남자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딱 붙이고 목을 젖혔다. 아아.


"난 놀아줄 사람이 없는데, 김뽀삐는 원하는 사람이 너무 많네."


그 말 안에 숨겨진 의중을 파악할 틈도 없이 남자는 젖혀진 고개를 바로 하며 상체까지 앞으로 기울였다. 그리고는 제 앞에 있는 빈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탕탕 두드렸다. 앉으라는 듯이. 그러면서 개구지게도 웃는다. 


"오늘 내가 뽀삐할게."

"네?"

"그러니까 나 좀 놀아줘. 어때?"


 명백하게 단언하는데, 저건 심장에 해로운 웃음이다.





/





뽀삐가 없으니 그냥 내일 오겠다고, 돌아가도 될 것을 발이 묶여버렸다. 정확히 따지고 보면 묶인 게 아니라, 묶은 건가 싶지만. 뭘 어떻게 놀아달란 건지. 내 가방에는 온통 책과 필기구 뿐이었고 이 가게에 유흥이라 하면 구식 라디오와 켜지기는 하는 건지 천장에 작게 달린 검은 화면의 티브이 뿐이었다. 카운터에 맨날 켜져 있던 라디오 마져도 어디론가 사라져 보이지 않았고 하다 못 해 주방에서 주문을 받아 치고 있어야 할 요리사도 없는 듯 잠잠했다. 그러니까 이 홍콩반점에는 남자와 나 둘 뿐이란 거다. 그런 생각을 하니 어쩐지 손바닥에 땀이 나 자꾸만 치마에 문댈 수 밖에 없었다.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내가 너무 정 없었더라고."


치마에 마른 땀이나 닦고 있으면 앞의 남자는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를 해댔다. 정이 없었다면서. 무슨 소린가 싶어 고개를 들어 보면 남자는 제법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뭐야 갑자기? 이번에도 당황한 건 내 쪽이었다. 


"갑자기요?"

"그렇잖아. 난 네 이름 밖에 모르고."


맞는 말이긴 했다. 야자를 끝마치고 가게로 와 남자에게서 뽀삐를 받고 20-30분 산책 후 돌아가면 남자 대신 나를 맞이해주는 건 대부분 덩그러니 놓여있는 포장 용기였다. 간혹 마주쳐도 오늘은 산책 중에 똥을 쌌느니 마느니, 큰 도베르만을 만났느니, 말을 해도 뽀삐에 대해서 하는 게 다였으니. 무엇보다 남자는 내 이름이라도 알지, 난 이 남자의 이름도 모른다. 아는 건 딱 두 가지였다. 스물 다섯이라는 나이.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지만. 또 중국집에서 일하면서 짜장면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 나이 빼고는 조금 쓸데없는 TMI 아니냐고. 생각해보니 조금 억울한 것 같기도 해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제법 크게 주억거렸다.


"다섯 번. 내가 너한테, 네가 나한테 질문할 수 있는 횟수."


코 앞에 들이밀어진 손바닥에 흠칫했다. 맨날 장난기 그득한 얼굴만 보다가 진지한 얼굴을 보니 쫄려서 알겠다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난 왜 긴장 되는데? 침까지 꿀꺽 삼키며 남자 처럼 오른 손가락을 모두 펴올렸다. 


"아, 거짓말 하면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 안 주는 거 알지? 어? 진실만 말해야 돼."


긴장은 개뿔. 이 와중에도 답이 없는 멘트에 금방 딱딱하게 굳어 있던 어깨에 힘이 빠졌다. 아 네네. 대충 답해주고는 먼저 남자의 질문을 기다렸다. 난 이름 부터 물어봐야지. 박봉필, 마동석 이런 것 만 아니면 웃음은 참을 수 있을 거라고 둥실둥실 머릿속으로는 남자에게 물어볼 오만가지 질문을 추렸다.  


"어디서 왔어?"

"....?"

"학교에서 온 거 아니잖아. 어디서 왔냐고."


어디서 왔냐는 그 특별할 것 없는 물음 하나에 왜 등이 싸해진 건지, 또 왜 남자의 눈빛이 일순간 매섭게 스쳐 간 건지. 그 어떤 이유도 알 수가 없다. 알아내려 할 수도 없다. 덧붙인 말을 들어보니 단순한 궁금증 같은데 왜, 팔뚝에 소름이 돋지. 괜히 메마른 입술에 침을 묻혀 다시 한번 잔뜩 굳은 몸을 이완 시키려 했다. 


"..야자를 쨌는데, 갈 데가 없어서... 근처 카페에 있다가.."


혼나는 것도 아닌데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원래 같았으면 충분히 묻힐 소리였는데, 조용하다 못 해 고요한 가게 덕분에 내 목소리는 제법 잘 들렸다. 아 그랬구나. 난 또. 그 뒤에 자연스럽게 뒤따라올 법한 말을 남자는 하지 않았다. 그냥 정말 단순히 갑작스레 달라진 내 경로를 물을 뿐.


"오케이, 다 물어봐. 성심성의껏 답해줄게."


내 차례 였지만 이상하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름을 물어봐야 하는데, 쉽사리 입술은 헤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대신 죄 없는 아랫입술만 깨물었다. 이름은 뭔지, 뽀삐는 언제부터 키운 건지, 어디서 사는지, 정말 스물 다섯은 맞는지. 짜장면은 왜 싫어하는지, 언제부터 여기서 일 했던 건지. 왜 내게 여기서 일하느냐며 거짓말을 했는지. 머릿속으로 생각한 뻔한 질문들은 벌써 다섯개를 넘겼다. 그러나 정작 밖으로 나온 건 나도 예상치 못 한 질문이었다. 


"...혹시.."

"응. 혹시."

"...결혼..하셨어요?"


스물 다섯에게 열 일곱이 새파랗게 어린 고삐리 같다고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자연스럽게 애 취급을 할 수 있나. 슬하에 자식이 있지 않고서야... 요새는 결혼도 빨리 하는 추세 아닌가.

무의식의 한 편에서 나는 은근히 남자가 나를 대하는 태도에 불만이 있었나보다. 


"....와."


맞다, 아니다 바로 답할 줄 알았던 내 예상과는 다르게 아무 말이 없는 남자를 슬쩍 쳐다봤다. 남자는 처음 보는 표정을 하고 있더라. 그건 상당히 충격 받은 것으로 보이는 분위기 였다. 딱 잘라 대답하지 못 하고 이상한 감탄사만 내뱉던 남자는 멀뚱히 대답을 기다리는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정말 당황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그런 질문 처음 받아봐. 진짜로."


그리고 이젠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마치 뽀삐가 하는 것 같아 풍신한 털이 떠올랐다. 남자는 엄지손가락을 하나 접은 오른 쪽 손은 계속해서 허공에 치켜 올린 채 다른 한 손으로는 허리에 얹고 주위를 맴돌았다. 와. 진짜? 아니 나 그렇게 안 늙었는데? 혼자 또 중얼중얼. 난 늙었다고 한 적 없는데. 어쩐지 왜곡이 되는 것만 같아 수습하려 입을 열기도 전에 불쑥 코 앞에 얼굴이 들이닥쳤다. 


"나 진짜 유부남처럼 보여? 그렇게 늙어 보이는 거야?"


방금까지 접혀 있던 손은 어느새 옆에 있는 테이블을 지탱한 채였다. 너무 가까워서 뒤로 물러 나려 해도 이미 한계 였다. 등받이에는 등이 바짝 닿아 있어서 정면으로 코 앞에서 남자 얼굴을 감상 하게 됐다. 가까이서 본 남자는 스물 다섯 이라고 하기도 뭐한 얼굴이었다. 잡티 하나 없는 피부 하며, 같은 반 동급생들 몇 몇도 인중에는 거뭇하게 수염 자국이 태반인데 남자는 그런 것도 없었다. 부담스럽지 않는 쌍꺼풀 하며 그 사이 미간, 티존은 매끈하게 떨어졌다. 입술은 예상 보다 더 도톰하기 까지 했다. 절로 숨을 참게 돼 얼굴이 잔뜩 붉어졌다. 산소 공급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은 탓이다. 원흉은 코 앞에 있고. 

대답을 기다리 듯 뚫어져라 쳐다보는 남자의 폭룡적인 얼굴을 바라볼 깜냥이 부족했던 나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미간을 지나, 콧대를 내려와, 입술을 스쳐. 


"......"

"왜 대답을 못 해? 와, 나 진짜 아저씨 된 건가 봐..."


남자는 매일 입고 있는 라이딩 슈트 대신 다소 편안한 옷차림이었다. 폼이 넓은 남색 카디건 안에 흰 티를 받쳐 입었는데, 문제는 그 흰 티가 가벼운 소재 였다는 거다. 넥 라인이 그대로 벌어져 가슴 팍이 훤 했으니, 언뜻언뜻 보이는 판판한 가슴팍에 나는 정말 면역이 없었다. 나 조차도 느껴질 정도로 새빨개진 얼굴을 가라앉힐 틈도 없이, 도망 치듯 아예 눈을 꽉 감아버렸다. 


"하아, 그래... 그렇게 보이면 어쩔 수 없지.."


다음에 만날 땐 아저씨라고 부르겠네...

코 앞에서 느껴졌던 숨결이 멀어지고 아득하니 들리는 중얼 거림을 해석할 틈도 없이 그대로 옆 의자에 놓인 가방을 들고 도망치듯 가게를 나왔다. 이만 가보겠다며 말 하긴 했는데 남자가 들었을 리 만무했다. 

초등학교 때 계주를 몇 번 나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보다 더 숨 차게, 더 빠르게 발을 움직였던 것 같다.



2023

22살이나 먹은 시점에서 더 이상 남자 아이돌의 복근을 봐도, 농밀한 드라마 속 키스신을 보아도, 하다 못 해 십 구금 영화 속 베드신을 눈에 담아도 들어도 괜찮은 지경에 이르렀다. 건축학개론의 납뜩이 강의를 열심히 필독한 탓이려나 싶다. 그래, 정말 남녀 사이에서의 그 어떤 일이든 간에 이제는 면역이 생겼다고 자부했는데. 


"....스파까지 하셔서 총 95,000원이세요."


이건 면역이 생길 래야 생길 수가 없었다. 그 스물 다섯의 김정우에서 지금 서른의 김정우든, 한 손에 들린 뽀삐의 리드 줄이든 지금의 나에겐 온통 낯선 것들 투성이라 어찌 할 바를 모르겠다고. 지금 내 몰골이 어떤지 조차도 확인 할 수 없는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였다. 최종 지불 가격을 고객에게 안내해 드리는 것 뿐. 고객과 직원 그 사이. 5년이 지난 지금, 카운터에는 내가 있고, 그 반대편에는 김정우가 있다.


"고생하셨겠어요."

"......"

"몸무게가 많이 나가서 힘드셨을 텐데."


김정우는 제법 무게가 나가는 뽀삐를 가볍게 안아 들고 카드를 내밀었다. 그와 함께 내뱉어진 어성은 얼핏 들으면 예전과 크게 다를 게 없었으나, 묘하게 낮아진 톤과 사무적이고 감정 없는 어투가 이상하게 심장에 박혔다. 일부러 고개를 올려 얼굴을 쳐다보지 않고 할 일에만 집중하려 했다. 사인, 부탁드립니다. 나 또한 사무적인 태도로 일관할 수 밖에. 긴 손가락이 기기 위에 휘날렸다. 


난 우리가 다신 안 봤으면 좋겠다.

무려 5년이다, 5년. 날 몰라 볼 수도 있잖아. 열 일곱과 스물 두살은 엄연히 다르니까, 일전에 만났던 고등학교 친구한테서는 머리도 바뀌고, 화장도 해서 그런지, 아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는 말까지 들었으니 날 알아보지 못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산책을 꼬박꼬박 시키는데,"


그런데, 만약...

아니, 보더라도 모른 척 해.

나는 그 말 대로 이렇게 필사적으로 모른 척 하고 있고,


"사료보다 간식을 더 좋아해서."


나도 그럴 테니까.

앞의 김정우도 그런 거라면.

허공에서 교차된 시선은 금세 사라졌다. 수고하세요. 미련 없이 카드와 영수증을 받아든 김정우는, 홀연히 가게를 떠났다. 나는 그 어떤 것도,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왼손 네번째 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져 있어서?

...잘 모르겠다.








아...............수능 끝난 기념 선물이랄까...............

+재밌는 포인트라면,, 눈치 채신분들도 계실 듯 한데 

뽀삐 살찐 이유 : 5년 전에 여주가 사줬던 만원 짜리 간식만 찾아서 그럼.. 그래서 사료 안 먹고 그것만 먹어서 돼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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