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 일부 크롭입니다. 아끼는 지인분의 드림을 작업하게 되어 정말 즐거웠습니다. 사랑스러운 커플의 서사를 파고들 수 있다는 건 언제나 행복한 것 같습니다. 그때 그렇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이런 상상은 언제나 즐겁죠. 괴로운 과거로 인해 얻게된 인연이 너무 소중하다면, 괴로움조차 이길 정도로 소중하다면 어떨까요.


가끔 상상하곤 한다. 이능을 가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그것도 아니면, 그때 그 광장에 들르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낡았지만 고풍스러운 이탈리아의 거리에서 우리가 마주쳤다면, 서로의 눈동자를 들여다볼 수나 있었을까?


¶ 오웬의 수첩 中


꽤 명망 있는 학교를 졸업해도, 이 시기에 이능이 있는 새끼 화가를 고용해줄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간간히 정물화나 초상화를 의뢰하는 사람들은 있었으나 그들은 내가 능력을 갖춘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유명하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지.... 나는 짧은 한숨을 토해냈다. 생각이 많아질수록, 그림의 선이 복잡해졌다. 선과 선이 만나서 면이 되고, 명암을 덧대자 종이에서 그림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빠르게 물통을 집어 던져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그림을 진정시켰다. 물감도 많이 남지 않았는데... 이게 몇 번째인지.


[혹시, 그림을... 그만 그려줄 수 있겠니?]


졸업한 지 몇 년이 지났어도, 하루도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살고 싶었다. 그림에 대단한 집착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서. 남들보다 몇 배고 늦춰진 자신을 세상이 받아주지를 않아서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프랑스를 떠났다. 프랑스의 모든 것이 아프고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전부 새로 시작하고 싶어서 이탈리아로 왔다. 그럼에도 결국 붙잡은 게 붓이라니. 엷은 조소가 흩어졌다.


시계로 시선을 옮기자 벌써 3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아, 오늘은 시장에 가야 하는데. 텅 비어있는 냉장고와 푹 젖은 캔버스. 자신의 신세는 이것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었다. 시뇨리아 광장에서는 능력자들을 규탄하는 집회가 며칠이나 이어지는 모양이었으나, .... 어쩔 수 없었다. 돈은 어떻게 건 번다고 해도, 음식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삐걱거리는 의자 음이 발끝을 잡고 늘어진다. 잠시 들르는 것뿐이야. 몇 번이나 마음을 다잡은 후, 간신히 문을 나설 수 있었다.


거리 자체는 한산했으나, 광장은 아주 북적였다. 좋지 않은 방향으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시뇨리아 광장에는 오래 묵은 분노가 자리하고 있었다. 능력자가 생긴 건 건 비교적 최근의 일임에도, 그들의 분노는 준비된 것 같았다.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처럼, 처음 마녀를 처형하는 성직자들처럼 두려움에 가득 차 있었다.


범죄 수로만 따지면 비 능력자들이 저지른 죄가 훨씬 많을 텐데.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차마 뱉어내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연신 능력자들을 괴물이라고 소리쳤다. 거짓말, ...거짓말. 이렇게 주눅 들고 힘없는 괴물이라니. 이렇게 나약하고 당신들을 무시하는 게 고작인 괴물이라니….



해가 시계탑에 걸릴 즈음, 광장에는 발을 디딜 공간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인파가 북적였다. 그들의 적개심과 두려움, 불안함은 무시한다고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웬은 본능적인 불안감을 느꼈다. 당장이라도 무력이 오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아늑한 편은 아니지만, 어서 집으로 가서 몸을 눕히고 싶었다. 잘 벼룬 날처럼 번들거리는 감정이 몰아치는 이곳에서 감정을 통제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으니까.


의식지 않은 누군가의 몸짓에 오웬의 품에 안겨있던 종이백이 찢어졌다. 찢어진 종이 사이로 빵과 오렌지, 그리고 한 움큼씩 사뒀던 물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자리에 주저앉다시피 몸을 낮춘 그녀를 비웃듯이 사람들의 발길에 무참히 짓밟혔다. 피처럼 붉은 물감이 픽 터지며 바닥을 어지럽게 퍼져나갔다. 괜히 나왔어, ....정말로 괜히 나왔어. 뭐라도 해보려고 하는 게 아니었는데. 온통 시끄러운 구호가 광장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오웬의 탄식이 이어졌다. 비참했다. 능력자를 규탄하는 사람이나, 두둔하는 사람이나, 다를 게 없었다. 그녀는 겨우 밟히지 않은 오렌지를 품에 두어 개 안아 들고는 고개를 숙였다. 능력의 유무에 달린 게 아닌데, 결국 밟히는 건 힘없는 사람들이잖아.


사람들은 한창 과열된 채, 누군가에게 무력을 행사하기도. 건물을 부수고 불을 지르는 것에도 거리낌 없었다. 그때, 누군가 사람들 사이로 작은 공을 던졌다. 물체는 바닥을 두어 번 돌다 안쪽에서 가느다란 관이, 관에서는 연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비규환의 시작이었다. 연기에 닿은 사람들은 모두 제 피부를 붙잡으며 비명을 질렀고, 사람들은 연기를 피해 도망 다녔다. 하지만 연기의 확산력은 일개 인간이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거대한 음모가 오웬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도망쳐도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녀는 낮게 읊조렸다. 살기 위해 이리저리 도망 다니는 사람도 있었으나, 그녀는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손가락을 베어 물어 바닥에 그림을 그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제어하지 못할 능력으로 이 혼란을 가중하고 싶지는 않았다……. 능력으로 발버둥 쳐봤자 그들이 원하는 상황을 거들어주는 꼴일 테니까. 그녀는 연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어쩌면 고대하던 죽음일 수도 있으니까.


펑,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그녀의 수첩이 하늘로 떠올랐다. 그림이 완성되면 능력을 써버릴까, 연신 미완으로만 남겨두던 스케치들이 허공을 방황했다. 명확한 형태를 가진 것들도, 그렇지 못한 것들도 있었다. 급격하게 체력이 빠져나가자 오웬의 몸이 바닥에 닿을 듯이 비척였다. 새의 형상을 한 동물들이 연신 날갯짓하며 연기를 반대편으로 날려내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아직 능력을 사용하는 것에 미숙한 데다 완성하지 못한 그림이니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주변에는 몸이 비틀려 흉측한 모습을 한 채 죽은 사람이 가득했다. 피부가 벗겨진 사람, 피를 토한 사람, 미라처럼 바싹 마른 사람까지. 지옥이 있다면, 이곳이 분명하다. 그녀의 눈동자에 마지막으로 담긴 모습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갈색 머리칼의 남자였다. 아까부터 주변을 급하게 살피던 사내였다. 붕, 다리가 부유하는 감각을 끝으로 오웬의 세상이 암전됐다.


곱게 접힌 눈꺼풀 사이를 엷은 갈색 눈동자가 비집었다. 여긴, 어디인 거야. 오웬은 마지막으로 봤던 것을 떠올리려 애썼다. 처음 '그것'을 불러냈을 때처럼 머리가 지끈거렸다. 다가오던 연기, 거대한 새, ...그리고 무시무시한 표정의 사내. 결국 능력을 써버렸구나. 한숨을 터트리며 얼굴까지 이불을 덮어쓰던 그녀의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잠깐, 능력을 썼는데도 어떻게 여기 있는 거야? 오웬은 이불을 훅 들춰낸 뒤에서야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사내의 존재를 눈치챘다.


".....아."


자신을 구해줬던 그 남자다.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에 경계가 깃들었다. 빠르게 문의 위치를 파악하고 발끝에 힘을 주던 순간, 낮고 까칠한(한참이나 목을 쓰지 않았는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안심해라. 여긴…. 일종의 안전가택이니까."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 분명함에도 오웬은 그 남자의 목소리가 아주 쓸쓸하게 느껴졌다. 누군가는 무섭다고도 표현할 수 있는 얼굴 속에 엷은 체념이 깃들어 있었다. 오웬은 문득, 아주 뜬금없지만, 그가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체구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고, 생김새도 다르지만. 그가 자신과 닮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왜 저를 구하셨어요?"

".... 구할 수 있는 게 너밖에 없었다."


수도 없이 손에 피를 묻혔을 것처럼 생겼으면서, 무어가 그리 쓸쓸한지. 이런 그가 자신을 해코지한다고? 오웬은 입술을 달싹였다. 긴장감이 풀려서일까 온몸이 욱신거렸다. 오웬은 사뭇 진지하게 물었다. 무조건 '옳은' 답은 없음에도, 그가 괜찮다고 말해준다면, 살아도 된다고 말해준다면 작은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로 그 사람들은 능력자가 미웠을까요? 저는, ....우리는 없어져야 하는 존재일까요?"

"아니."


그 어떤 말보다 빠르게 답한 그가 말을 덧붙였다.


"그저 불안한 거야. 겁먹은 거고. 이 사건으로 이득을 얻을 존재들은 따로 있어."


오웬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과연 그렇구나. 누가 봐도 뒷사정을 잘 알고 있을 법한 사내가 그리 말하자, 수긍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신은요?"


그의 표정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그의 얼굴은 손익과 관계없이, 오롯한 괴로움만을 담고 있었다.


"난, 아마.... 이용당한 쪽이겠지."


그녀는 그에게 더 캐묻고 싶었다. 당신은 뭐 하는 사람이고 왜 그렇게 괴로운 표정을 짓는 것인지. 자신처럼 뭔가를 잃었는지. 체념은 무엇에 대한 것인지. 궁금한 것들투성이었으나 자신이 처음 절망했을 때, 무릎에 얼굴을 묻고 살려달라고 빌었을 때, 모두의 면담을 거절했지만 실은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이 떠올랐다. 오웬은 한참이나 그를 바라봤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여자애가 괜찮다고 말하는 것에 심기가 불편하지는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고민은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있잖아요."


나긋한 목소리가 그의 눈동자를 붙잡았다. 처음으로 두 눈동자가 마주친 순간이었다.


"괜찮을 거예요."


사내는 잠시 놀란 눈치였으나, 곧 눈동자에서 감정을 거두었다. 이런 부류의 일이 아주 익숙한 사람처럼.


"정말로 괜찮을 거예요."


마음이 닿지 않더라도, 이게 설령 자신을 향한 연민일지라도 상관없었다. 오웬은 과거의 자신에게 고해하듯 계속 그에게 괜찮다고, 괜찮을 거라고 속삭였다. 목소리가 물에 흠뻑 젖어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손바닥에 흩어지는 와중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웅얼거렸다. 사내의 흠 하나 없을 것 같은 낯에 곤란함이 깃들었다. 지독한 삶을 살아왔겠지. 대체로 정상적이지 못한 유년기를 보낸 사람들의 깔끔함이(행동과 생각이 군더더기 없다거나, 언제 사라져도 주변에 폐가 되지 않을 것처럼 생활한다거나 하는 부류의) 묻어 있었다. 마치 어릴 적의 자신이 그랬듯이.


물론 지금이라고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번듯한 자리를 얻어도 그는 유년기의 그림자에서 벗어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은 누구 하나 자리를 뜨지 않은 채, 묵묵히 서로의 자리를 지켰다. 마치 그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위로인 것처럼. 오웬의 도톰한 눈가가 티나지 않을 정도로 가라앉을 즈음에서야, 두 사람은 자리를 떴다.


"이름을 안 물어봤네. 이름이 뭐에요? 저는 오웬. 오웬 푸포에요."

"히카르도 바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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