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 작업물이 아닙니다. (수위X)

지인분의 요청으로 일전에 작업한 연성교환 작업물을 업로드합니다.



아커만 그레이스는 어떤 골목에 서 있었다.

마라톤 시작점에 선 듯, 계속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게임의 세이브 위치에 선 듯 어느 순간 갑자기 정신을 차린 그레이스는 어떤 골목에 서 있었고, 어떤 우는 아이를 보았다. 그는 자신이 <또다시 살아났다>... 그러니까 ‘살아나고 말았다’는 사실을 조금 더 느끼고, 확신하고 싶었지만, 아이의 발밑에 우울이 무척 가깝게 들러붙어 있었으므로 우선은 애를 달래야겠다고 생각했다.

 

공기가 눅눅하고, 하늘은 어둡다. 비가 그친 직후였음에도 들이마시는 숨이 개운한 대신 약간 알싸한 걸 보면 조만간 또 장대비가 쏟아질 것 같다. 그전까지 아이를 어디든 건물에 데려다주어야겠다. 그레이스는 짧은 머리를 슥슥 넘기며 아이의 호감을 얻을 수 있을 만한 주제를 고심했다. 과정에서 그는 후드티 주머니에 두 손을 넣었고, 바스락거리는 비닐 포장에 꽁꽁 둘러싸인 사탕을 발견했다. 그레이스는 처음엔 그저 잘됐다, 라고 생각했다. 그는 사탕을 흔들며 자신과 함께 대로변으로 나가자고 우는 아이를 구슬렸다. 필시 무언가를 잊었을 테니 경찰이든 큰 가게에 데려다주면 부모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탕 덕분인지, 그의선량한 심성을 알아본 것인지 아이는 비닐째로 사탕을 입에 넣으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순조롭게 아이의 손을 잡은 그레이스는 우울을 피해 천천히 좁은 골목길에서 빠져나왔다. 왜 사탕이 주머니에 들어있는지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코너를 꺾어 차가 씽씽 달리는 도로를 코앞에 두고 있었을 때였다. 그레이스는 일순 벼락을 맞은 것처럼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한 손으로는 아이를 꼭 움켜쥐고, 다른 한 손으로 열심히 후드티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자잘한 쓰레기, 그리고 아주 작은 하리보 젤리 봉지가 손에서 밀려 나와 한들한들 떨어져 내렸다. 애의 손을 잡고 마구 달렸다. 아니, 아예 품에 안고 달렸다. 신기인 만큼 민첩한 발이 주특기였으므로 경찰서까지는 금방이었다. 애를 경찰서에 맡긴 그레이스는 시간을 확인하고 얼른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저번과 달라, 저번과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애는 사탕을 입에 문 채 멀어져 가는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그레이스가 ‘1번지’로 향하려는 차, 어떤 골목 안쪽에서 기이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장난스러우면서, 몹시 진중하고, 또 한없이 가벼운 듯하다가, 딴에는 아주 절망스러울 그런 비명. 그레이스는 긴박하다 느끼는 와중에도 작게 웃으며 그곳으로 달려갔다. 후드티 주머니에 든 사탕과 쓰레기가 누구의 것이었는지 깨달아서 다행이다. 욕을 내뱉으며 주머니 속의 쓰레기를 마구 버리던 비나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간다. 아마 지금쯤 뭔가를 잊어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그러면, 그건 ‘사탕 두 개’였다고 알려주어야지.

 

그런데 사탕 하나가 어디로 갔지…?

아커만 그레이스는 여전히 탈라사 비나의 생츄어리였다.

 

 

 

 

 

막이 내리면 다시 만납시다


@Rolly_Write

 

 





 

11월 4일이었다.

할로윈 데이가 지났음에도 두 사람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할로윈 데이라 살아난 것이다’라는 가장 그럴듯한 주장이 폐기되었음에도 비나는 한동안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며칠 더 두고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평소 잘 알지도 못하는 이론이나 시간 개념을 들이밀면서 아직 할로윈일 수도 있지 않느냐며 불안해했다. 그럴 때마다 그레이스는 침착하게 인내하며 비나를 달래기 위해 애썼다. 다행히 일전의 대화를 잊어먹은 건 아닌지 탐정이잖아요, 탐정. 하면 대개 정리되곤 했다. 애초에 두 사람이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무슨 이유인지, 대관절 뭘 하고 있었는지 정신을 차리면 보통 밤이었고 그게 아니라도 생츄어리가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아 서로를 찾아고 나면 밤이 되어 있었다. 알아낸 규칙이라곤 자정이 되면 다시 죽음으로 돌아간다는 정도였다. 이제 두 사람은 죽음을 맞이하는 게 아니라, 돌아간다고 표현했다. 무엇 하나 영원하지 않은 세계에 사람들이 무뎌진 것처럼 이 또한 서서히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만 반복되는 삶과 죽음>이라는 개념 자체는 도통 익숙해지질 않고 입안에 돋아난 혓바늘처럼 그레이스와 비나의 가장 신경 쓰이는 가슴 한구석을 끈덕지게 괴롭혀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게 바로 4일. 드디어 비나가 ‘할로윈 데이 가설’을 포기하고 안정을 되찾은 오늘. 두 사람은 어쩐 일인지 평소와 같은 야심한 시각이 아니라 사람들이 퇴근할 즈음의 바쁜 거리를 등지고 있었다. 골목이었다. 다시 한두 방울씩 비가 내리기 시작한 하늘 아래, 예상대로 비나가 주머니를 홀랑 뒤집으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신발 뒤축이 헐떡일 정도로 빠르게 달려간 그레이스는 그에게 하나 남은 사탕을 돌려주며 말했다.

 

“탐정이 그렇게 안달복달해도 되는 거예요?”

 

탐정이잖아요, 탐정, 의 연장 선상과 같은 타박이었다. 비나는 나직하게 앓으며 대꾸했다.

 

“하지만~. 그레이스가 늦었잖아요. 늦지 않는다면서요?!”

“미안해요.”

 

싱거울 정도로 순순히 사과한 그레이스가 의아하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아직 저녁인데요. 시간을 보진 않았지만, 퇴근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그래서요~?”

“평소보단, 일찍 찾았….”

“진짜 그렇게 말하네!”

 

당연하게도 비나는 다 알고 있었다는 듯 외쳤다. 그리고 실없이 웃었다. 그레이스도 소리 없이 따라 웃었다. 웃음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그렇다고 해서 깔깔 웃었다는 건 아니고. 계속 은은한 미소를 띤 채로 대화가 이어져 나갔단 뜻이다. 두 사람은 서로를 확인했다.

 

“찾은 건 사탕 맞죠?”

“네에. 그런데~ 이럴 줄 알았어. 막상 찾고 보면 별거 아니라니까요.”

“쓰레기만 있긴 했어요.”

“그러게. 그걸 왜 줍냐고 뭐라 했던 기억이 나요.”

“...그랬구나.”

 

그것까진 그레이스의 기억에 없었다. 이렇듯 두 사람은 아직 생츄어리였고, 선명하게 살아있었다. 그 사실이 약간의 위안이 되었다. 이내 안정을 되찾은 비나가 배를 문지르며 하릴없이 멍때리는 그레이스의 손목을 당겼다.

 

“그레이스.”

“네.”

“처음으로 시간이 많이 생겨서 벙찌는 건 알겠는데요~.”

“네? 네.”

 

딱히 벙쪄있진 않았지만 그레이스는 구태여 부정하지 않았다. 비나가 끄는 대로 끌려가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자각하지 못한 사이 빗방울이 더욱 굵어져 있었다. 어딘가에 들어가야 할 듯싶었다. 비나가 씩 웃으며 말했다.

 

“배고프지 않아요~? 난 그런데.”

 

 

***

 

 

 

그레이스와 비나는 반질거리는 새빨간 가죽 의자에 나란히 앉아 햄버거를 먹었다. 창문 밖으로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비를 피할 겸 저녁을 먹으려는 사람들로 햄버거 가게는 인산인해를 이뤘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주문 접수 알림을 들으며 두 사람은 햄버거 포장지에 대고 글을 적었다. 내용은 [우리는 왜 자꾸만 되살아나는가?] [앞으로 뭘 할 것인가?] 였다.

자꾸만 되살아나는 이유를 찾는 건 시간 낭비일 것 같다는 게 공통 의견이었다. 할로윈 때문도 아니고, 주변에 비슷한 케이스가 있는지 수소문해 봐야 드로운이라는 오해만 뒤집어쓸 것 같으니, 그럴 바에는 차라리 이 순간에 충실하자는 것이다. 비나는 콜라 빨대를 입에 물고 흔들며 웅얼거렸다.

 

“나는 또 ‘그런 일’이 반복될 줄 알고, 그걸 막으라고 돌아온 건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고.”

“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단 얘길 하려면 말도 마세요.”

“이젠 야박하게 나오네~?!”

 

비나의 빨대가 휘익 날아갔다. 그래도 창문을 맞고 다시 테이블 위에 떨어진 정도라 그레이스는 태연하게 버려진 빨대를 주워 쟁반 위에 내려놓았다. 원래도 그런 편이었지만 비나의 상태가 유독 고점과 저점을 오가고 있었다. 대체 뭘 잃어버린 건지도 모르겠고~. 비나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다가, 다시 솟아올랐다. 사실 뭘 하고 싶은지도 잘 모르겠는데~.

 

“술이나 마시다가 뭐….”

“마시다가?”

“술이나 마실까?”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 다 알거든요.”

 

그레이스가 갸름한 눈으로 바라보자 비나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런 생각을 안 했다는 건지, 아니면 알지 말라는 건지. 그레이스는 한숨을 푹 내쉬곤 침착하게 주제를 돌이켰다.

 

“그럼 생각해 봐요. 하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게 있어야 말이지.”

“내일 죽는다 가정하고 생각해 봐요. 하고 싶은 거나, 먹고 싶은 거 있잖아요.”

 

그레이스는 전적으로 비나에게 선택권을 넘겨주곤 제 몫의 햄버거를 꿀떡 삼켰다. 비나는 두 손으로 관자놀이를 부여잡고 앓았다. 어린애 장난 같은 만담이었는데, 그는 사뭇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피식 웃고 고개를 돌리자 창문 밖으로 거대한 전광판 광고가 보였다. 우산을 펼쳐 든 사람들과 빗줄기 때문에 화면이 반쯤 가렸고, 또 흐리게 보였지만 색감이 워낙 화려하고 선명해서 그레이스는 그 광고가 어떤 것을 홍보하기 위한 광고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알록, 달록. 전광판 불빛에 눈 흰자가 알록달록해지고 있을 때였다. 비나가 돌연 콧김을 훅 내뱉더니 낙서로 엉망이 된 햄버거 포장지를 구겨버렸다. 그레이스가 물었다.

 

“생각났어요?”

“혹시 모르니까 일단 내 집엘 가봐야겠어요.”

“그리고?”

“글쎄, 쇼핑이나 할까?”

“그럴까요.”

“엥?”

 

누가 들어도 별 생각 없이 한 소리였을 거다. 어느 소설이건, 연극이건 죽었다 살아난 시체가 쇼핑을 하러 갔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다. 복수면 몰라도. 비나의 표정을 보면서 그레이스는 멀거니 눈을 깜빡였다.

 

“해봐요. 쇼핑.”

 

호기로웠으나, 실은 그레이스도 별 생각 없이 한 소리였다.

 

“불안하잖아요. 일상적으로 행동하는 게 불안을 가라앉혀 줄지도 몰라요. 그러다 보면, 익숙해지겠죠.”

“뭐에?”

“...열 두시면 죽었다가 살아나는 거 말예요.”


어쩌면 바람을 말한 것일 수도 있으리라. 사실 그레이스도 반신반의했다.

 

“만약 내일 죽으면... 허무하겠네요. 햄버거가 마지막 식사인 줄도 모르고….”

“하하, 뭐야. 그럴 거면.”

 

비나가 소리 내 웃음 짓더니 이내 뚝 표정을 굳혔다. 그레이스는 그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생츄어리의 심리를 훤히 꿰고 있지만, 이번 것은 받아들이기에 모호한 지점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비나는 어떤 것을 의아해하고 있었다. 비나가 아리송하다는 듯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더라?

 

 

***

 

 

참 이상한 나날이었다. 아이스크림을 먹었고, 쇼핑도 했으며, 쇼핑한 옷가지를 들고 비나의 집으로 가 대청소도 했다. 하루 만에도 가능할 스케줄이었지만 꼬박 나흘이 걸렸다. 햄버거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자정을 맞이한 다음 날엔 아예 만나질 못했고, 그다음 날에도 늦은 밤에 만난 탓에 쇼핑을 하러 갔을 땐 옷 가게 세 곳 중 한 곳이 문을 닫은 후였다. 어찌어찌 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 비나의 집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덕에 나흘 차에야 간신히 그 집에서 만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뽀얀 먼지가 내려앉아 있을 거라고 비나는 예상했다. 썩 깔끔하지 않으리란 것도. 그레이스는 청소 도구를 사서 오겠다고 그에게 약속했고, 다음날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비나의 집 문을 두드렸다. 청소 약속을 까맣게 잊고 새로운 파트너 후보와 구르고 있던 비나는 화들짝 놀라 빗자루를 휘두르며 문밖으로 남자를 쫓아냈다. 덕분에 그레이스는 모르는 남자의 욕을 한 바가지 들어야 했다.

 

대청소는 길지 않았다. 비나가 건드리면 안 된다는 부분은 쏙 빼고 청소했기 때문에 그레이스는 뻘쭘하게 서 있다가 유일하게 허락받은 거실 바닥만 박박 문질러대야 했다. 비나가 들들 볶은 끝에 다음번엔 그레이스가 하고 싶은 일을 해보기로 했다. 그레이스는 한참, 정말 한참을 고민하다 그냥 사람들 틈을 걷고 싶다고 말했다. 비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소가 사람의 마음마저 정리되게 만든 건 아닐 텐데, 요 며칠 사이 두 사람 사이엔 말수가 많이 줄어들었다. 사실 그건 아주 자연스러운 변화였고, 대화가 없다고 해서 어색하거나 냉랭한 기운이 흐르는 것도 아니었다. 청소가 끝난 걸 기념하며 평온한 침묵 속에서 술과 음료를 한 잔씩 마시는 그런 종류일 따름이었다. 원래 둘은 그다지 친한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그저 신경 쓰일 뿐이지. 생츄어리를 끊지 않기도 했고. 비나는 맥주를 단숨에 들이켜며 말했다.

 

“햐, 살겠다.”

 


***

 

 

불안은 어디에서부터 파생되는 것일까.

사람의 부정적인 감정은 대체로 무언가를 확실히 알 수 없기 때문에, 혹은 무언가에 대해 너무 잘 알게 되었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중 불안은 특히나 확신이 없기에 타오르는 감정이다. 명확한 것이 하나 없을 때, 심지어 나 자신조차 믿기 어려울 때, 불안은 뱃속에 똬리를 튼다. 이곳의 사람들이 생츄어리를 맺는 것도 그런 불안을 줄이기 위함이다. 생츄어리를 맺지 않고도 어쨌든 살아갈 수 있는 건 누가 뭐라 해도, 이런 세상일지라도 ‘영원한 건 무엇도 없다’는 영원불멸의 진실이 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영원한 것은 없다는 명제만은 확실한 규칙으로 받아들여지니, 그에 관해서는 불안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렇듯 참으로 변수를 싫어하고, 예측 가능한 미래를 사랑했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모두가 명부를 미리 열람할 수 있는 세계라면 죽음에 대한 불안은 사라질 것이라는 뜻이다. 그래, 처음 죽었을 때 비나와 그레이스는 얼마만큼 그 ‘끝’을 두려워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철학에 먼저 접근한 건 비나였다. 그는 되살아난 일에 대해 유독 심각하게 불안해했고, 덕분에 불안의 감소를 더 빨리 알아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안정은 자연스럽게 생츄어리인 그레이스에게 옮겨갔다. 두 사람은 기이한 안정감을 주고받으며 음료를 홀짝였다. 세상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또 어떤 암시도 받은 바가 없지만 비나는 나직하게 말했다.

 

“그레이스.”

 

그레이스가 대답했다.

 

“네.”

“내일 죽는다 가정하고 생각해 보라고 했잖아요.”

“그랬죠.”

“내일 죽는다 생각했을 때 엄청 먹고 싶은 게 있었는데, 갑자기 기억이 안 나거든요?”

 

고요가 지루해질 즈음, 비나는 발가락으로 리모컨을 끌고 와 TV를 켰다. 뉴스가 끝나고 광고가 시작되고 있었다.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비나가 말을 이었다.

 

“그레이스는 알죠?”

“궁금해요?”

“응. 내일 죽는다 생각하고 다 해보고 있는 거 아니었나?”

 

거대한 피넛 세 마리가 초콜릿을 피해 도망가는 광고가 지나갔다. 비나는 유치하다는 표정으로 헛헛하게 웃었다. 그레이스도 그가 보고 있는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떤 계시나 운명을 믿는 건 아니지만, 때마침 화면에선 일전에 전광판에서 보았던 알록달록한 광고가 막 송출되기 시작한 참이었다. 눈 흰자를 온통 물들였던 그 총천연색. 젤리들이 딸기우유 색의 젤리 숲을 뛰어다니며 노니는 젤리 회사 광고였다. 광고 전면에 둥그런 ‘위니비니’ 로고가 떠올랐다. 그레이스는 대답했다.

 

“젤리를 생각했어요.”

 

그레이스가 음료를 홀짝였다.

 

“나도 비나가 죽을 때 먹었던 걸 같이 먹어볼래요.”

 

비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처음’ 죽던 날, 마지막으로 뭘 하고 있었는지에 관해 특별히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친김에 비나가 말을 이었다.

 

“그레이스가 원하면 그래요. 근데, 그러고 나서요.”

“네.”

“...생츄어리는 그만할까?”

 

그레이스가 비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비나는 왜인지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어쩐지 신경 쓰이는 반응이었기에 급히 변명이 뒤따랐다.

 

“아니~. 그레이스도 느끼고 있잖아요. 그렇지? 나만 느끼고 있는 거 아니죠?”

“무슨 말인지 알아요. 전 그냥….”

 

그레이스가 눈을 내리깔았다. 광고는 다 지나가고, 알 수 없는 드라마가 곧 시작될 거라는 안내가 TV 화면을 가득 채웠다. 그는 그제야 뭔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비나는 상황이 어색해질 걸 예상하고 TV를 켠 게 아닐까. 내가 먼저 말을 꺼냈어야 했는데. 그레이스는 어쩐지 조금 미안해졌다.

 

“왜 하필 내일인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할로윈 데이도 다 끝났고, 내일은 아무 날도 아닌데.”

“나도 그게 불만스러워요. 끝까지 이런 식인 게 꼭….”

“놀아나는 것 같잖아요.”

“역시 그치?”

 

비나가 캔을 와그작 우그러뜨렸다. 신기하게도 그제야 그레이스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그레이스는 음료도 내려놓고 손을 매만지며 말을 골랐다.

 

“이제 더는 불안하지 않죠, 비나?”

“뭐, 네에.”

“저도 그래요. 마치 뭔가 잃어버린 것처럼.”

“아니면, 이미 관 속에 들어온 것처럼.”

 

비나가 하도 가볍게 말해서 그레이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가볍게.

 

“내일 죽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겠죠? 왜인지 모르겠는데 그런 확신이 들었어요. 비나가 먼저 이런 생각을 한 거죠?”

“이걸…. ‘생각’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요.”

“네. 그럼 저는 계속 생츄어리로 있고 싶어요.”

 

비나는 왜냐는 듯 눈썹을 까닥였다. 그리 애틋한 것도 아니고, 서로가 무진 소중한 것도 아니고, 심지어 처음 죽을 때조차 따로따로였는데 대관절 왜? 그레이스는 원체 심성이 무르고 답답하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비나가 한숨을 내쉬며 생각하던 차였다. 그레이스가 입을 열었다.

 

“그냥요.”

 

그건 비나가 자주 하던 말이었다. 그래서 비나는 그레이스 대신 이유를 덧붙여 주었다.

 

“뭐, 생츄어리까지 끊었는데 아무 일도 없으면 쪽팔리니까.”

 

 

***

 

 

비가 쏟아질 것 같다, 생각하기가 무섭게 거센 비가 내렸다. 우산 없는 불쌍한 직장인들이 바쁘게 햄버거 가게로 밀려들 때, 그레이스와 비나는 이미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 감자튀김을 오물거리는 중이었다. 두 사람은 야무지게 밀크셰이크도 시켰고 (비나가 시켰다) 구운 땅콩도 시켰으며 (비나가 시켰다) 애플파이에 (비나가 시켰다), 젤리 한 봉지를 (이건 함께 산 것이다) 끼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감자튀김과 젤리라는 기묘하고 느글거리는 혼종 조합을 먹으며 매장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익숙한 듯 낯선 아이가 엄마 손을 잡고 거리를 지나갔다. 거대한 전광판에 비친 아이의 얼굴이 발그스름했는데, 아마 그의 뺨이 사탕을 물고 있는 것처럼 조금만 불룩했더라면 누구인지 알아챘으리라. 하지만 아이는 입에 아무것도 넣지 않았고, 맑게 조잘거리며 길을 지나쳤다. 아이에겐 엄마가 있었으므로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레이스는 또다시 누군가를 돕는 대신 비나와 함께 앉아 얌전히 폭우가 쏟아지는 걸 지켜보고 있을 수 있었다.

 

 (페어 오너님의 연성 교환 작업물)


비나는 땅콩 껍질을 까며 말했다.

 

“그레이스, 처음 죽었을 때 기억나요?”

 

그레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죽고 나선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그냥 뚝 끊긴 것처럼.”

“나만 그런 거 아니죠?”

“네.”

 

젤리를 낼름 입에 넣었다. 어두운 밤, 전광판은 더욱 환하게 빛을 발했다.

 

“그럼 죽음이란 건 별것도 아니ㄴ.”

 

 

***

 

 

T는 불행한 직장인이었다. 하루 종일 상사에게 깨지는 바람에 점심시간에도 일을 해 오늘 단 한끼도 먹지 못했다. 그런데 설상가상 비까지 내리다니. 우산도 없는데. T는 가장 가까운 햄버거 가게의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다. 사람이 너무 많아 자리가 없을 듯했다. 이렇게까지 불행할 수가 있을까. T가 한숨을 내쉬던 참이었다.

 

“음?”

 

T는 전광판이 정면으로 보이는 창가 자리가 남아있음을 알았다. 그는 아버지를 외치며 얼른 달려가 빨간 가죽 의자에 서류 가방을 올려두고, 비를 맞아 차디찬 몸을 털었다. 그제야 나직하게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방금까지 누가 앉아있던 듯 아직 따끈따끈한 의자가 이보다 고마울 수가 없었다. 남자는 중얼거렸다.

 

정말 잘됐어.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창가 자리가 다 남아있다니. 불행 중 다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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