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빨간 사춘기 - Dejavu

제이님 :)

민윤기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18




에엣취. 여주가 크게 재채기를 했다. 함께 밥을 먹던 승완과 호석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감기 걸렸냐는 물음에 여주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여기 먼지가 많나 봐.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둘은 여주의 대답에 별 의심 않고 다시 젓가락질을 했다.

잔병치레가 원래도 많긴 했지만 이번 감기는 평소보다 심한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심해지는 체질이라 하루만 지나면 금방 친구들에게 들키고 말겠지만, 일단은 숨기고 싶었다. 왜 감기에 걸렸는지 이유라도 물으면 거짓말이 힘들 것 같았다. 비를 맞아서라고 말하면 왜 비를 맞았냐고 물을 거고. 여주는 이틀 전 태형과 있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할게 뻔했다.

태형은 고백 이후 당장 도망치고 싶었던 여주의 마음을 이해했다. 넋이 나간 표정의 여주를 잠시 두고 왕복 십 분 거리의 편의점을 삼분 만에 다녀와 우산을 건넨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여주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은 태형이 제게 우산을 넘기는 걸 물끄러미 보다 우산을 버리고 냅다 도망쳤다. 비를 쫄딱 맞았고, 감기는 그래서 걸렸다.



"어? 태형이랑 지민이다."

"..."

"이리로 오라 할까?"



켁. 사레가 걸린 여주가 물을 급히 찾았다. 호석이 둘에게 손을 흔드는 동안 승완이 물을 건넸다. 고마워. 여주가 물을 받아마시며 눈으로는 태형을 쫓았다. 지민이 앞장서서 오려다가 주춤거리는 태형을 돌아봤다. 멀어서 대화가 들리지는 않았지만 안 들어도 뻔했다.



"태형이 밥 안 먹는대요."

"왜? 너네 풀강 아니냐?"

"맞아요."

"배고플 텐데."

"그러니까요."



여주. 넌 어디 가. 식판을 들고 일어서려던 여주가 멈칫했다. 승완의 눈빛이 무언가 눈치챈 것 같아 더욱 도망치고 싶었다. 나 밥 다 먹었어, 너네는 지민이랑 마저 먹구 와. 여주가 의자를 집어넣으며 말했다.



"뭐 별로 먹은 것 같지도 않구만."



호석이 여주의 식판을 내다보며 불만스러운 말투로 중얼거렸다. 진짜 다 먹었어, 갈 거야. 여주가 단호하게 말하고 퇴식구로 향했다. 그리고 뛰다시피 식당을 빠져나갔다. 빨리 나온 덕분에 끄트머리에서 태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야! 김태형!"

"..."





"나 밥 다 먹었어. 나 때문에 안 먹는 거라면 집어치워."

"그게 아니라,"

"떽!"



정말 밥 생각이 없어서 그런 거였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밥은 먹고 다녀. 여주가 어색하게 태형의 팔을 두어 번 두드리고는 재빠르게 식당 복도를 도망쳐 나왔다. 태형은 점점 작아지는 여주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나 때문에 밥 안 먹는 게 누군데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오후 수업이 같은 과학관 건물에서 진행된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일부러 피하는 건지 태형과는 마주치지 않았다. 윤기는 학교를 눈 씻고 뒤져도 찾을 수 없었다. 도대체 술래가 누군지 알 수가 없는 숨바꼭질을 오래도록 하는 것 같았다.

헤어진 기간이 길어질수록 여주가 버티기 힘들었던 건, 윤기의 행방을 알 수 없다는 거였다. 정해진 요일에 출근하던 실험실도 이제는 뒤죽박죽인 것 같았다. 석진에게 묻고 싶어도 물을 수 없었고 어렴풋이 짐작하는 거였다. 여주는 마지막 교시인 세포생물학을 들으러 가면서 윤기가 있을지도 모르는 윤교수님 실험실 쪽을 흘끔거렸다.

교수님이 열성적인 강의를 펼쳐도 여주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자꾸만 뭐 하고 있을지 모르겠는 윤기가 떠올랐고, 저를 피해 다니는 태형이 생각났다. 옆에서 저를 툭툭 치는 승완이 아니었다면, 아마 수업 시간 내내 다른 생각만 했을 거다.


너 무슨 일 있었지. 승완의 쪽지에 여주가 눈만 도륵 굴렸다. 승완이 다 안다는 눈빛으로 한 번 더 여주를 보챘다. 쪽지에 다 담을 내용은 아니었지만 최대한 간추려 있었던 이야기를 적었다.


태형이가 나 좋아한대. 승완은 여주의 답장에도 놀라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래서 뭐라고 했어? 승완이 교수님의 눈치를 보며 쪽지를 건넸다. 수업에 집중하던 호석이 의아한 눈빛을 둘에게 보냈다. 나중에 말해주겠다는 입 모양을 보이고 나서야 다시 답장을 쓸 수 있었다. 여주는 펜을 깨물기도 하고 발끝을 바닥에 밀어내기도 하면서 한참을 망설였다.

태형에게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우정으로 승화시키는 능력이 통하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 그간 거절해왔던 방법 이외의 다른 것을 알지 못했다. 여주는 늘 이게 최선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게 최선일 거였다. 마음이 올곧게 윤기를 향해 있었으니까.


윤기가 연락하면 나 받아줄까? 동문서답이었지만 승완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당연하지. 그 오빠 너 아니면 안 돼. 여주는 꽤 오랜 시간 승완의 답장을 내려다봤다. 민윤기는 유여주가 아니면 안 된다는 말은 수십 번을 곱씹어도 알알할 정도로 심장을 쥐어짜 냈다. 수업이 끝나면 당장 윤기의 실험실에 쳐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오빠

어디야?

잠깐 만날 수 있을까



수업이 끝나기 십 분 전 보냈던 카톡 옆에는 아직 1이 붙어있었다. 석진에게 연락해 볼까 하다가 혹시 몰라 윤교수님 실험실 근처로 향했다. 슬쩍 안을 들여다보고 윤기가 없으면 그때 연락해도 늦지 않을 것 같았다. 승완과 호석의 응원을 받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여주는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사람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전정국이 왜 여기 있지? 의아함이 들자마자 실험실 안쪽에서 누군가 나왔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여주는 실험실에서 나온 남자의 얼굴을 기억하려 애썼다. 그 남자가 정국과 친한, 그러니까 윤기의 직속 선배 지환이라는 걸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시간 되지? 형이랑 밥 좀 먹으려고 왔지."

"어. 이제 곧 끝나. 민윤기한테 잠깐 일만 좀 시키고."



와. 윤기 실험실에 있나 봐. 여주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직속 선배가 전정국이랑 밥을 먹으러 가니까 곧 윤기도 퇴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차올랐다.



"근데 언제까지 이래야 하냐? 민윤기 조지는 것도 한두 번이지. 솔직히 걔가 인턴들 중에 제일 잘해. 별것도 아닌 걸로 트집 잡는 것도 힘들어. 걔 여자친구랑 헤어졌다며. 그럼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냐?"

"좀만 더 괴롭혀줘. 유여주랑 완전히 헤어질 때까지만."

"미친놈. 그럼 대장균 배지 열 개 더 만들라고 말하고 올게. 뭐 먹으러 갈지 생각해놔."

"엉야."



이어지는 말에 발이 바닥에 묶인 기분이었다. 지환이 다시 실험실로 들어가고 정국은 쌓인 박스에 대충 걸터 앉아 핸드폰을 꺼냈다. 내가 이해한 게 맞는 건가? 여주는 십 톤짜리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윤기의 직속 선배와 친한 전정국. 자꾸만 실험실에서 일이 생겼던 윤기. 그리고 둘이 나눈 대화.

정국을 향해 끓어오르는 분노보다 몰랐던 사실을 마주한 충격이 더 컸다. 당장이라도 정국에게 뛰어가 머리채를 잡고 발길질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누나? 왜 그래요?"



뚝뚝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훔치며 도망치듯 나온 복도에서 태형을 만났다. 갑작스레 마주친 여주가 울고 있으니 태형의 얼굴에도 당황스러움이 번졌다.



"전정국이, 정, 전정국이, 괴롭, 윤기를."

"누나. 괜찮아요? 누나, 울지 말고."

"괴롭, 괴롭혔어. 괴롭혀달래. 나 때문에…. 윤기가, 나 때문에."



좋아하는 마음이 너무 커져서 여주의 말을 이해하는 능력치가 올라간 건지, 아니면 정국의 행동을 이미 알고 있어서 그런 건지 태형은 알지 못했다.



"누나. 누나가 알아야 할 게 있어요."

"..."

"미리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해요."



그러나 답이 어떤 것이든 더 이상 중요치 않았다. 태형이 할 수 있는 건 하나였다.





퍼플웨일 - 너의 손을 놓을 때는 널 안고 있을 때뿐이야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지만 윤기는 건물 밖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카톡 답장도 없었다. 이 상황을 알지 못했더라면 차단한 게 아닐까 걱정했겠지만 여주는 그러지 않았다. 태형에게 들은 이야기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왜 지금에서야 얘기해 주느냐 따질 힘도 없었다. 그간 모든 오해가 정국으로 인해 벌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니 화가 머리끝까지 뻗쳤다.

과학관 앞에 한참이나 쪼그려있던 여주는 다시 모습을 나타낸 정국을 보고 벌떡 일어섰다. 어느 정도 정리된 생각은 여주를 불도저처럼 만들었다. 정렬된 모든 생각의 끝은 정국을 향한 분노였고, 태형을 향한 미안함이었으며 윤기를 향한 사랑이었다.



"뭐야? 여주? 여주 여기 왜 있어? 설마 민윤기 기다려?"

"..."

"밥 먹었어? 나랑 저녁 먹으러 갈래? 마침 밥 먹으러 가려고 했는데."



방금 지환과 밥을 먹고 왔다는 걸 뻔히 아는데도 정국은 여주에게 저녁 데이트를 신청했다. 여주는 잠시 아찔해졌다. 대체 저를 향한 전정국의 마음이 어느 정도일지 가늠이 안 갔다. 그게 아무리 진심이어도 잘못된 방식으로 옭아매는 건 여주를 힘들게 했다. 그 대상이 여주가 아닌 윤기였으니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차오르는 것도 당연했다.



"너는, 너는 어떻게 그렇게 막무가내야?"

"왜? 뭐가. 나 뭐 잘못했어?"

"…진짜로 잘못한 걸 몰라?"

"여주야. 남자들은 돌려 말하면 몰라. 직접 말해줘야 알지. 말해주면 안 그럴게."



어떻게 윤기를 그렇게 괴롭혀!!!! 여주가 빽 소리쳤다. 어둑해진 교정을 지나다니는 몇 없는 사람들이 모두 놀라 여주를 쳐다봤다. 주변을 둘러보던 정국이 조금 당황한 얼굴로 여주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무슨 소리야? 시치미를 떼는 게 여주의 화를 더욱 돋우었다.



"나 아까 다 들었어. 윤기네 선배랑 하는 얘기."

"..."

"태형이한테도 들었어. 내 핸드폰 훔쳐 가서 윤기한테 개소리한 거."

"…나한테 화났겠네."



화가 나는 정도가 아니란 말이야. 여주가 화를 못 이기고 털썩 주저앉았다. 조그만 게 더 조그마해졌다. 여주를 일으키려던 정국이 멈칫할 정도였다. 제 팔에 얼굴을 묻고 소리 내어 우는데 약간의 미안함이 들었다. 이게 다 좋아하는 마음이고 질투에서 비롯한 행동이었는데. 아무도 이해해 주지 못하겠지만.



"여주. 화났어?"

"그럼 화가 나지, 안 나겠어!"



여주가 정국의 손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처음으로 마주한 정국의 당황한 표정이었지만 그걸 신기해할 겨를 따위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죽기 직전까지 때리고 싶었지만 그만큼의 힘이 없는 자기 자신이 미울 뿐이었다. 여주는 누가 쳐다보든 말든 있는 힘껏 소리쳤다.



"유여주."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여주는 딱딱한 목소리에 잔잔히 녹아있는 애정을 느꼈다. 윤기야. 자동 반사처럼 벌떡 일어났다. 거짓말처럼 코앞에 윤기가 있었다. 정국은 맞춰 나타난 윤기를 보곤 헛웃음을 쳤다. 성큼 다가선 윤기가 여주를 제 쪽으로 당기고 정국을 마주 보고 섰다.



"왜 울고 있어. 이 새끼가 울렸어?"



평소 같았으면 콧방귀를 뀌고 윤기의 신경을 긁었을 정국이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정국이 말이 없으니 윤기가 뒤를 돌아 여주의 얼굴을 살폈다. 얼마나 울었는지 얼굴 전체가 새빨갰다. 뭔데. 왜 울었는데. 윤기가 보챘지만 여주는 울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얼마 만에 마주하는 얼굴인지 가늠도 되질 않았다. 모든 상황을 알고 나니 더 애틋하고 더 미안했다. 그간 홀로 힘들었을 윤기에게 더 이상 투정을 부릴 수 없었다.



"내가 울린 게 아니고,"

"넌 조용히 해."



이 상황을 변명하려던 정국은 날 선 윤기의 말에 헛웃음을 쳤다. 한마디 더 얹으려고 했지만 입을 연 여주에게 온 신경이 쏠려버린 윤기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어떻게 나한테 한마디도 안 할 수가 있어. 나 하나도 몰랐자나. 너 그러는 거 하나도 몰랐자나. 전정국 저 새끼가 괴롭히는지 하나도 몰랐자나!"

"…뭘 들은 건진 모르겠지만 별거 아니었어."

"별거 아니긴 뭐가 아냐!"




"여주. 그래도 나 막 나쁜 마음 먹고 그런 건 아니다."





"넌 씨발 조용히 하라고 했어."



어우. 정국이 두손 드는 시늉을 하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내가 나쁜 말 하지 말랬잖아! 여주가 소리치니 윤기가 정국을 노려보던 시선을 겨우 끊어냈다. 한 대 때려도 시원찮을 새끼였지만 꾹 참은 건 오로지 여주를 위해서였다. 그동안 지환의 괴롭힘을 참아왔던 것도, 혹여나 정국이 나쁜 마음을 먹고 여주를 못살게 굴까봐였고.





"아니, 근데 쟤는 욕먹어도 싸…. 나는 진짜 쟤가 이해가 안 돼. 어떻게 선배 시켜서 괴롭힐 수가 있어. 그런다고 내가 지한테 가는 것도 아닌데!"



왔을 수도 있지. 비아냥대는 정국의 목소리에 결국 윤기의 이성이 끊겼다. 그동안 참아왔던 모든 게 핵폭탄처럼 터졌다. 윤기에게 맞은 정국의 고개가 크게 돌아갔고, 맞았다는 사실에 열받은 정국이 똑같이 주먹을 날렸다. 여주가 온몸을 날려 윤기를 끌어안아 겨우 큰 싸움으로 번지는 걸 막았다.








똑같이 한 대씩 주고받았지만 선빵을 날렸다는 이유로 윤기는 유치장에 들어갔다. 정국은 가벼운 조서만 적으면 집에 가도 된다고 했다. 쇠창살 안에 들어가 괜찮다고 집에 가라는 윤기를 보니 여주는 또 눈물이 차올랐다. 보호자는 집에 가셔도 된다는 경찰의 말이 있었지만 여주는 떠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여주. 정말 안 가?"



조서 작성을 마친 정국이 여주에게 물었다. 너 같으면 가겠냐고. 여주가 정국을 노려봤다. 따가운 시선에 정국이 잠깐 얘기를 하자며 여주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너도 봤잖아. 민윤기가 먼저 때린 거."

"..."

"상황이 어찌 됐든 선빵은 선빵이야. 나 아직도 왼쪽 볼따구 엄청 얼얼해."

"오른쪽 볼따구도 얼얼하게 만들어줄까?"



여주의 화난 표정에 정국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모습조차 귀여워서 그런 건데. 순간적으로 민윤기가 부러워졌다. 민윤기는 유여주의 그 어떤 표정이라도 가질 수 있었다.



"여주. 넌 내가 밉지?"

"응."

"그렇게 바로 인정하면 나 좀 마음 아픈데."

"넌 다섯 배로 아파봐야 돼. 맘 같아서는 나도 때리고 윤기랑 같이 유치장 들어갈 거야."



넌 내가 유치장 들어가게 안 두지. 정국이 말했다. 여주가 아랫입술을 꾹 깨문 채 정국을 올려다봤다. 윤기도 들어가지 않게 해달라 말하고 싶었지만 들어주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미안."

"..."

"나도 내가 이 정도로 쓰레기가 될 줄은 몰랐어. 브레이크가 하나도 없더라."



하지만 이어지는 정국의 말에 여주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지도 못한 정국의 사과였다. 왜 그랬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게 어찌 변질되었든 간에 여주를 향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알았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여주는 아직 스물하나의 어린 나이였지만 애정을 기반으로 한 수많은 감정의 갈래를 한 번에 느꼈다. 정국과 태형, 그리고 윤기에게. 그건 각각 다른 형태였다.



"미안해. 나는 윤기밖에 없어."

"알아."

"그래서 네가 합의해 줬으면 좋겠어. 난 윤기가 저기 갇혀있는 거 싫어. 우리 윤기는 원래 누구 때리고 그러는 사람 아냐."

"…알아. 그것도."



그리고, 좋아해 줘서 고마워. 여주의 마지막 말에 정국이 내리깔고 있던 눈을 치켜떴다. 여주에게서 들을 줄 몰랐던 말이었다. 그리고 이어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딜 봐도 나쁜 마음을 먹은 스스로를 못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만큼 끝까지 예쁜 사람이었다, 유여주는.




"그러니까 그만큼 매력 있지나 말던가. 욕심났잖아."

"..."

"미안해. 전부 다."



정국의 말에 여주의 마음이 저만치 뚝 떨어졌다. 처음 마주하는 정국의 진심이었다. 여주를 탓하는 게 아닌 자조적인 말투였다.








정국이 합의해주자마자 윤기는 금방 풀려났다. 대학생들의 싸움은 수십 번 봐왔던 경찰관들은 대수롭지 않게 윤기를 내보냈다. 여주가 울먹이며 윤기를 끌어안았다. 윤기가 제 허리를 끌어안은 여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할 말은 많았지만 섣불리 하기엔 어려운 말들뿐이었다.



"전정국이, 끕. 앞으로 안 그럴 거야…. 그 선배두…."



울음이 섞여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윤기가 무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정국과 얘기를 하러 나가서 어떤 말이 오갔을지 대강 예측이 갔다. 고생 많았네. 윤기가 계속해서 여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주를 밖으로 데리고 나온 윤기의 얼굴이 금방 굳었다. 울어서 얼굴이 새빨갛다기에는 조금 이상해서였다. 여주가 계속해서 훌쩍이는데도 윤기는 여주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는 금방 알아챘다.





"너 아프지."

"..."

"너 아픈데. 지금."



내, 내가 아팠나. 여주가 벙찐 얼굴로 윤기를 올려다봤다. 분명 세포생물학 전까지는 기침과 재채기도 했고 몸도 으슬으슬했다. 수업이 끝나고 윤기를 보기 위해 달려간 이후부터는 아프다는 생각은 전혀 하질 못했다. 신기하게도 윤기가 그렇게 말하니 순식간에 열이 몰려왔다. 아. 나 아팠구나. 비를 그렇게 맞고 아팠었지. 그제야 제 상태가 자각이 되었다.



"…까먹었어."

"아픈 걸 까먹었다고?"

"바빴단 말이야."

"얼마나 바쁘면 아픈 걸 까먹어."

"뭐라 하지 마, 나한테."



알았어. 윤기가 희미하게 웃음을 띤 채 여주를 끌어당겼다. 여주는 끌려가면서도 어디서부터 말을 시작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은 수도 없이 넘쳐났는데 시작하기 좋은 말을 찾지 못했다.



"…오빠."

"응."

"나 아픈 거 어떻게 알았어? 아무도 눈치 못 채던데."



내일쯤이면 더 심해져서 다 알았겠지만. 그래도 오늘은 아무도 몰랐단 말이야. 여주가 중얼거렸다. 여주의 손을 잡은 윤기의 손에 힘이 조금 들어갔다. 어떻게 그걸 모르겠냐고 말하고 싶었다. 여주의 흔들리는 시선과 파르르 떨리는 입술, 손끝으로 전해오는 전율. 사랑하니까 그 모든 걸 읽을 수 있는 거였다.



"다 보여."

"..."

"여주야. 나한텐 다 보여."



쏟아내고 싶은 감정들이 소용돌이쳤다. 윤기와 여주가 마주한 시선에 많은 이야기가 얽혔다. 그러나 붉어진 뺨으로 달뜬 숨을 뱉는 여주에게 밀어붙이고 싶지 않았다. 아프지 않은 게 최우선이었다.



"집에 가자. 데려다줄게."

"응. 나 내일은 다 나아서 올게."



윤기는 저를 향한 여주의 마음을 확신했다. 그러니 우리에겐 서두를 것이 없었다. 여주도 그런 윤기의 마음을 알았다.




죠지 - 다시, 너

꼬옥 틀어주세요





평소였다면 더 심해졌을 감기가 신기하게도 가라앉았다. 말끔하게 나아버려 승완과 호석은 여주가 감기에 걸린 사실조차 몰랐다. 다음 주에 있을 2차 평가 때문에 볼링은 휴강이었지만 가벼워진 몸으로 일찍 일어났다. 예전 같았으면 해가 질 무렵에야 눈을 떴을 정도로 게을렀던 여주에겐 놀라운 일이었다.

수업이 하나도 없었던 여주는 점심을 먹고 느지막이 도서관에 갔다. 오 분 일찍 도착한 승완이 여주의 자리를 맡아놓았다. 호석도 금방 도착할 예정이라고 했다. 승완은 여주가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을 빛내며 물었다.

태형의 고백을 들었던 날과 마찬가지로 짧게 요약하기에는 힘든 날이었다. 여주가 눈을 굴리니 승완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윤기 오빠랑 다시 만나냐구. 그 물음에는 어깨를 으쓱했다. 오늘 얘기하기로 했어. 여주의 소곤대는 말에 승완이 입을 틀어막았다.

저녁 즈음 공부를 마치고 나온 여주는 도서관 앞에 있는 윤기를 보곤 우뚝 섰다. 온종일 연락을 기다렸는데 어떻게 알고 도서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거였다. 승완과 호석이 자동반사로 뒷걸음질 쳤다. 윤기에게 달려가려던 여주가 의아한 얼굴로 뒤를 돌았다. 둘은 빨리 가버리라는 손동작을 했다.




"뭐야! 연락도 없이!"

"여기 있을 것 같아서."

"없으면 어떡하려구."

"있는 거 확인하고 기다렸어."



윤갸…. 여주가 예전처럼 윤기를 끌어안으려다가 멈칫했다. 아직까지 풀어야 할 이야기가 많은 사이였다. 여주가 양팔을 벌리다가 멈추니 윤기가 슬쩍 웃었다. 어제 못한 얘기 할래. 윤기의 말에 여주가 열 번 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윤기가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윤기야, 내가…,"

"미안해."



인적이 드문 도서관 근처 골목이었다. 벽을 타고 내려온 덩굴을 하염없이 쳐다보던 여주가 먼저 말을 꺼내려다가 윤기에게 선수를 뺏겼다. 뭐가…. 여주가 벌써부터 울먹일랑 말랑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전부 다. 네 말 듣지도 않고 전정국 말에 회까닥 돌아버린 거. 더 깊게 생각 못 한 거. …네가 나 싫어할까 봐 계속 기다리기만 한 거."

"내가 너를 왜 싫어해."

"그러니까. 내가 아는 유여주는 그럴 사람이 아닌데. 한번 삐끗하니까 다 무섭더라."

"..."

"…그리고, 애 같다고 한 거. 그게 제일 미안해. 애는 생각 짧은 나였는데."



여주는 처음 듣는 윤기의 속마음에 할 말을 잃었다. 아. 분명 쏟아내고 싶은 얘기도 많았고 할 말도 산더미였는데. 서운했던 부분을 콕콕 짚어내는 윤기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아니야. 나는 석사 같은 거 못해. 애는 나야."

"내가 박사를 따더라도 너보다 못해. 여주야."



뭐라는 거야! 여주가 빽 소리쳤다. 기준이 그게 아니란 소리야. 윤기의 다정한 말에 여주가 입을 꾸욱 다물었다. 그럼 기준이 뭐냐고 묻고 싶었다. 예전에는 나보고 맨날 애 같다고 그러더니. 이제 와서. 크흡. 여주가 콧물을 먹는 소리를 내며 물었다.



"내가 어떻게 애한테 이렇게 매달려. 하루하루가 죽고 싶었는데."

"…윤기 죽으면 안 돼."

"응. 네가 그렇게 말할 것 같아서 안 죽었어."

"깨꼬닥."



여주의 뜬금없는 말에 윤기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 유여주. 이제 진짜 유여주 보는 것 같아. 윤기의 얼굴에 안도감과 애정이 묻어났다. 나 원래 유여주였어…. 여주가 웅얼댔다.



"하나도 유여주 안 같았어. 너무 무서웠어."

"내가 화가 나면 좀 무섭긴 해."

"그러니까."

"그래서, 나 진짜 오빠한테 화난 거 있어. 완전."

"뭔데?"





"대체 나를 어떻게 봤으면 전정국네 머저리가 그렇게 괴롭히는데 한 마디 말도 안 해줄 수가 있어?"



아. 윤기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걱정할까 봐 그런 거라는 말은 통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어떻게 해야 여주가 화를 풀어줄까 잠시 고민하던 윤기가 말을 이어갔다.



"진짜 똥개 훈련 장난 아니었어. 내가 돌쇠도 아니고 맨날 물 떠오라고 그러질 않나. 지가 할 일을 다 나한테 시키더라니까."

"..."

"배우는 입장에서 웬만하면 다 받아들이겠는데 걘 좀 아니었어."

"..."





"여주한테 말하면 다 해결해 줬을 텐데. 그치. 내가 말도 안 해가지고 해결도 못했다."




"나 개빡치는데 가서 전정국 한 대만 때려도 돼?"

"안돼. 오빠 어제 유치장에서 나왔잖아."

"아. 맞다."



여주가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문득 윤기가 어떤 화법을 구사했는지 알아차렸다. 단 한 번도 내비치지 않던 윤기의 속마음이었다. 그러니까, 여주를 어리다 생각하고 표현하지 않았던 것들.



"이제 다 말할게. 내가 어떤 하루를 보냈고, 누구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

"다 표현할게. 혼자 참는 거 절대 안 할게."



, 나는. 여주가 말을 더듬었다. 윤기가 이렇게나 달라질 줄 생각도 못 해서였다. 그저 정국이 윤기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궁금해서 화가 났고, 헤아려주지 못한 제 자신에게 화가 났을 뿐이었다. 윤기는 헤어진 기간 동안 어떤 부분에서 여주가 화가 났을지 고민하고 변하려 노력했는데.



"오빠, 나는,"

"너는 그냥 그대로 있어, 여주야.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헤어지자는 말만 안 하면 다 돼."

"오빠만 변한다고 되는 거 아냐. 나도 진짜 안 그래. 나 진짜, 나 진짜 오빠 너 없으면 못 살아."



아. 윤기가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크게 터트렸다. 여주가 귀여워서도 아니었고, 웃겨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설렘이었다. 여주에게 처음 마음을 뺏겼던 그 순간처럼. 윤기가 없으면 못 산다고 말하는 유여주 그 자체를 가만두지 못해 미칠 지경이었다.



"나도 너 없으면 못 살아. 정말로."

"잘 됐다. 나 혼자 그러면 되게 고민되는 일이란 말이야."



어둑했지만 밝은 햇살이 뿜어져 나오는 느낌이었고, 맨정신이었지만 술을 먹은 듯 어지러웠다. 한겨울이어도 바람이 따뜻하게 느껴질 정도였고, 한여름이어도 볼을 살랑이며 간질이는 느낌에 몸을 꼬을 정도였다. 그만큼 말도 안 되게 유여주가 사랑스러웠다.






너무 공감돼서 댓글 가져와봤어용. 제가 썼던 다른 글들에서 나온 악역들에도 방탄이들을 넣었지만, 민특의 정국이는 최대한 사람 사는 모습? 대학 생활의 단면..? 을 보여드리고자 만든 캐릭터거든요. 너무 현실성 있는 악역이라 더 욕을 먹는 것 같아 걱정이 앞서요. 가상의 인물로 넣으려다가 몰입감을 위해 정국이를 선택한 건데, 캐릭터일 뿐이니 너무 욕하지 않아 주셨으면 합니다!




* 하단은 소장용 결제창입니다 *

구매하시면 글이 삭제되어도 열람 가능합니다.

이어지는 내용이 궁금하세요? 포스트를 구매하고 이어지는 내용을 감상해보세요.

  • 텍스트 1 공백 제외
100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