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한, 건……. 남이 먼저 손대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거야.”

“……그러세요?”

그런 것 치고는 본인은 서슴없이 사람에게 닿고 있는데요. 태형은 따지고 싶은 충동이 올라왔지만, 조용히 내리눌렀다. 따져 봤자 얻을 이익보다 감정의 손실이 더 큰 건 굳이 실행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은 도대체 내게 무엇을 원하는 걸까. 손이 떨어진 자리를 보며 태형이 엉거주춤 일어났던 몸을 의자에 붙였다.

“……그래.”

석진의 수긍에 태형이 찻잔을 들었다. 의뭉스러운 시선에서 간신히 고개를 돌린 석진의 시야로 쌓여 있는 책이 들어왔다. 

정식으로 즉위하지 않은 세자빈은 대외 행사는 물론, 국사에도 참견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바깥 외출이 자유로운 것도 아니다. 왕실의 안전을 위해서도, 태형 개인의 안전을 위해서도 너무한 처사라고 생각하면서도 시원하게 해결할 수 없어 석진도 답답한 부분이었다. 왕세자씩이나 돼서 그런 것도 해결해 주지 못하다니 얼마나 한심한가.

그 넘치는 시간을 태형이 독서로 해결하고 있다는 건 이미 양 비서에게 들어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 부분도 빨리 해결해 주어야겠지, 석진이 조용히 자신이 해야 할 일 목록을 추가하였다.

“저하, 그래도 몸이 편찮으셔 보이시니 검사를 받아 보세요.”

“…….”

“피하시지 마시고 제 이야기 좀 들어 주세요, 저하.”

끈질기기도 하지. 석진은 그제야 태형을 똑바로 마주 봤다. 의사가 온다고 해도 해결하지 못할 병증이었다. 그렇다고 계속 걱정을 받고 있을 수도, 언제까지고 태형이 궁금해하는 점을 함묵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고민 끝에 석진이 탑처럼 쌓여 있는 책 사이에서 한 권을 꺼내 들었다.

“궁 안에는 다양한 책이 있어서 독서 하는 재미가 있겠지.”

“저하, 말을 돌리시지 마시고.”

“돌리는 게 아니야. 아까 내가 왜 이러는 건지, 또 내가 왜 그랬는지 궁금하다고 했잖아.”

태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씀하시고 싶지 않으셨던 거 아닌가, 싶어서.

“이거, 읽었어?”

톡톡, 낡은 책 표지에 손가락이 부딪혀 소리가 났다. 석진의 손바닥 아래에 놓인 책이 무엇인지 확인한 태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내용인지는 기억해?”

“아마도, 건국 신화였어요.”

겹겹이 쌓여 있는 책 속에서 석진이 꺼내 든 책은 얼마 전 묘하게 태형의 시선이 꽂혔던 책이었다. 책등에 책의 제목조차 적혀 있지 않았던 그 책은 읽은 지 이미 수일이 지난 후였다. 그저 그런 건국 신화라 깊게 기억하지 않았지만, 독특한 점이 있기는 했다.

“제가 아는 건국 신화랑 조금 다른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래? 그러면 다시 읽어 봐.”

“네?”

뚱딴지같은 소리에 태형이 미간을 좁혔지만, 석진은 미소를 지었다.

“다시 찾아왔을 때 무슨 내용이었는지 확인할 거야.”

“저하.”

“궁금한 건 남에게 물어보기 전에 먼저 스스로 찾아봐야 하는 법이지. 어른이니까, 알지?”

석진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 간다니. 태형이 눈에 힘을 주고 쏘아보자 석진이 핸드폰 시계를 확인시켜 주었다.

“이십 분 넘었어.”

“…….”

시간이 그렇게 된 줄 몰랐던 태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차도 한 잔 다 마셨고.”

“…….”

서로의 찻잔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이젠 가 봐야 할 시간이야.”

석진의 말대로였다. 그러나 마음 같아서는 시간을 붙잡아 놓고, 석진도 붙들어 놓고서 머릿속이 개운해질 때까지 늘어지고 싶었다.

“너무 오래 비우면 늦게 돌아오게 될 거라서.”

하나, 이리 말하는 사람을 억지로 붙잡을 수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시무룩해하지 말고.”

“안 그래요.”

얼굴에 다 티가 나는 줄도 모르고 발뺌하는 태형 때문에 석진이 웃으며 낡은 책을 흘겼다.

“다 읽어 둬. 무슨 내용인지 물어볼 거니까.”

“네에…….”

“나중에 보자.”

쿵,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자 태형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미궁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숨기는 게 많은 참 복잡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책으로 손을 뻗었다.

“이십 분만 달라더니 정말 이십 분만 있다가 가시네.”

서운함이 섞인 중얼거림이 방 안을 조용히 울렸다.

 

***

 

잘 움직이지 않으려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석진은 닫은 문으로부터 멀어졌다. 점차 들끓었던 열기가 가라앉았다. 머리가 차분해지자 숨을 크게 들이켠 석진이 생각했다.

‘어째서 그 책이 거기에 있었을까.’ 하고.

낡은 책은 어디로 보나 호기심을 자극하는 외관은 아니었다. 고서인가 싶어 펼쳐 볼 수 있다고 해도 앞의 내용은 잘 알려져 있는 건국 신화와 같았다. 그러니 한두 장 넘겨 보고 금방 흥미가 사라졌을 텐데도 태형은 여전히 책을 곁에 두고 있었다. 내용까지는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태도로 봤을 때 의식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대답해 주세요, 저하.’

모든 것을 모르지만,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하는 이.

잘한 일일까. 석진은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그 책이 여전히 태형에게 있다는 것에 걸어 보기로 했다. 스스로를 비롯하여 모든 사람이 숨겨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의문에 대한 해답을 바로 곁에 두고 있는 것 또한 하늘의 의도일지도 몰랐다.

왕족의 비밀이 낱낱이 적혀 있는, 왕실이 대대로 외부로부터 꽁꽁 숨겨 온 추악한 진실이 기록되어 있는 건국기建國記.

책을 다시 읽으면 어떻게 될까.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게 봐 줄지, 잔뜩 겁을 먹고 피하지는 않을지. 무엇이 되었든 석진은 이미 물을 엎지르고 나온 사람으로서 앞으로 벌어질 일을 겸허히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생각보다 빨리 오셨습니다?”

집무실 창틀에 기대 팔을 괴고 있던 남준이 석진을 발견했다.

“차 한잔 마시는데 한 시간씩 걸리진 않지.”

창을 지나 문을 열고 들어온 석진이 피식 웃었다.

“느긋하게 오실 줄 알았거든요.”

“내가 더 늦어졌다가는 네 퇴궁이 늦어질 테니까 신경 좀 썼다.”

그 말에 남준이 이번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 오늘밤에 퇴궁할 수 있기나 할까요?”

거처가 궁 밖에 있는 남준은 항상 칼퇴를 외치는 사람이었지만, 국본을 보좌하는 입장으로서 9 to 6 근무는 절대로 불가능했다. 더군다나 석진이 발작을 일으키는 날이라면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양 비서와 함께 세자전에서 밤을 지새우는 날도 허다했다. 석진은 그런 남준에게 언제든지 좋은 처소 하나 내줄 수 있다고 했지만, 남준은 꾸준히 거절하고 있었다. 일하는 공간과 쉬는 공간은 분리하고 싶다는 확고한 의지였다. 까닭에 오늘도 잔업과 야근으로 인한 늦은 귀가는 확정이었다.

주상 내외가 자리를 비어 밀려드는 일감 때문에 정시 퇴근은 꿈도 못 꿔 본 게 벌써 며칠째이던가. 거기다가 석진이 농땡이까지 피웠으니 할 말 다 했다.

“퇴궁할 수 있도록 열심히 하면 되겠네.”

“이보다 조금 더 바빠지면 정말로 저하께 별채 하나 얻을까 싶기도 합니다.”

얼씨구. 절대 진심일 리 없는 소리라는 걸 알면서 석진이 맞장구쳤다.

“일하는 곳이랑 자는 곳은 따로 둬야 한다더니 갑자기 왜. 십 년 넘게 들락날락하니까 올해부터는 정 좀 붙일 생각인가?”

“그럴 리가 있겠나요. 제가 정 붙이기에는 아직도 마음에 안 드는 구석들이 너무 많아서 말이에요. 그걸 다 솎아내면 또 모르죠.”

“그건 차차 해 가자. 성격 급해서는 말이야. 적당히도 모르고.”

“너무하시네요, 저하. 절 아직도 중학생으로 보시는 건 아니죠?”

남준이 눈을 가늘게 좁히자 석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중학교 때 적당하지 못했다는 건 알고 있어서 다행이네.”

“다 철 없을 때 이야기죠.”

“그때나 지금이나 궁을 싫어하는 건 똑같으면서 말이다.”

“좋아질 것처럼 만들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았거든요.”

“어떤 실마리길래. 나한테도 말해 줘 보지.”

“저하께서 더 잘 알고 계시잖아요.”

팽팽한 줄다리기 같은 대화 속에서 먼저 줄을 느슨하게 잡은 건 석진이었다. 빙빙 에두르기만 하는 대화는 시간 낭비밖에 되지 않아 딱 질색하는 것이었다. 양 비서가 따라 준 차를 한 모금 들이켠 석진이 아, 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까 세자빈이 독서가 취미라는데, 알아?”

“인사드리러 갔을 때 도서실 앞에서 봬서 대충 예상은 했습니다.”

“방으로 가니까 책이 쌓여 있더라.”

“음, 독서에 재미를 들이셔서 그나마 다행이네요.”

“그렇지? 그거라도 재미없었으면 따분하고 지루했겠지.”

석진이 빙긋 웃으며 찻잔을 다시금 입가로 가지고 갔다.

남준은 이야기의 방향이 예상 범주를 벗어나자 머리 위로 물음포를 띄웠다. 그가 생각하던 경우의 수에 들어 있지 않은 주제였다. 세자빈의 독서에 대한 토론이라니. 그래서 책을 더 들이자는 이야기를 하자는 것인가? 남준에게 있어서는 정말이지 아무 영양가도 없는 내용이라 심드렁한 표정을 감춰지지 않았다. 그러나 석진이 정말로 의도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은 남준은 끈덕지게 기다렸다.

그의 기다림이 헛되지 않게 한참 다른 이야기를 늘어놓던 석진이 본론을 꺼냈다.

“그 책들 사이에 그게 끼어 있더라고.”

누가 듣더라도 ‘그게’라는 단어가 의미심장하게 들릴 수 있는 문장이었다.

눈치 빠른 남준과 양 비서는 석진이 다른 부연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음에도 ‘그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두 쌍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독서, 책, 세자빈, 그리고 그것. 석진의 이야기는 쓸데없는 것이 아닌 유기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다급하게 묻는 남준의 말허리를 자른 석진은 환한 미소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어떻게 하긴?”

“…….”

“두고 왔지.”

양 비서와 남준이 기함해서 놀라든 말든 이미 일을 치고 온 사람은 개운한 낯으로 차를 홀짝였다.

양동이에 가득 찬 물을 엎지르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들고 갈 때는 쏟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함에 시다릴 수밖에 없지만, 엎지른 순간에는 될 대로 되라며 차라리 상쾌해지고 마는 이치와 같았다.

태형이 책 속에서 스스로의 의문점에 대한 해답에 닿을지는 미지수였다. 그러나 그걸 다시 읽고도 눈치채지 못한다면 둔하기로는 석진의 인생에서 첫 번째가 되리라.

“그걸 어쩌자고!”

창틀을 짚고 벌떡 일어난 남준은 얼굴을 찡그렸다.

계획이 깡그리 무너져 불만을 터트리는 게 볼만한지 석진은 의자를 뒤로 밀면서 키득키득 웃었다.

“왜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그래.”

“거기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 알면서 그걸 두고 나오셨다니 그러죠!”

“세자빈이 내 행동에 대해서 궁금해했어. 내 입으로는 말하기 힘든 걸 어떡해? 마침 책이 있으니까 빠져나올 구실로 써먹고 좋잖아.”

석진의 태연함에 남준의 얼굴은 펴지지 못했다. 답답한지 이마를 문지르는 그를 보던 석진의 눈동자에 돌연 이채가 돌았다.

“남준아.”

“아무리 그래도 저하, 그건 궁궐 내에서도 기밀인-”

“그래, 기밀이긴 하지. 근데 세자빈도 이제 관계자인데 알아야지 않겠어?”

서늘하게 내려앉은 목소리에 남준이 입을 다물었다.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는 세자빈을 내가 제정신이 아닐 때 나한테로 들이밀어 넣으려는 계획이 어그러지게 됐으니 마음에 안 드는 건가?”

“……저하.”

남준의 눈이 커지자 석진이 피식, 웃었다.

“내 최측근이 그런 무시무시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정말 소름 돋았다, 남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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