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님 체면은 지켜드리는 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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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가까이 일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그렇고 그런 일 하는 걸 2차 나간다는 말로 퉁치더라. 처음엔 이해찬, 아니 이동혁이라는 사람한테 그런 취급 받았다는 사실이 너무 분하고 억울해서 눈물까지 나왔는데 여기서 계속 지내면서 알게 됐다. 같이 일하는 언니들과 손님으로 오는 조직 사람들에게 2차는 당연한 수순 같은 거라는 걸.

내가 살아온 환경과는 아예 다른 세상이었다. 볼 꼴 못 볼 꼴 다 보면서 자랐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같이 지내면서 그런 일들을 점점 당연시 여기는 내가 싫었지만 그래도 계속 정신 승리를 이어 나갔다. 내가 아니면 되는 거라고, 스스로 당당해도 된다고 나를 자꾸 세뇌했다.

사실 나를 찾는 손님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2차 요청도 몇 번이나 받았고 곤란한 상황도 많았지만 절대 굽히지 않았다. 이 또한 화정 언니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지만. 나는 고고한 꽃봉오리라도 되는 양 꺾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이동혁은 그런 나를 대단한 신성 모시듯 대했고. 정말 숭배라도 할 기세처럼.

여기 사람들의 말을 빌리자면 밑바닥 인생이었다. 그들은 본인들을 그렇게 칭했다. 밑바닥 인생. 막말로 밑바닥 인생은 밑바닥 인생끼리 만난다고, 조직 폭력배는 화류계 여성을, 화류계 여성은 조직 폭력배들을 만나는 게 순리 같았다. 이동혁이 지금껏 만났던 여자들도 같은 부류였겠지. 그러니 그 눈에 내가 얼마나 신기하게 비칠까. 바라보면 닳을까, 닿으면 깨질까 애지중지 하는 게 느껴졌다. 내가 입맛이 없는 날이면 한식 일식 가리지 않고 고급 도시락을 사 왔고, 시무룩한 날이면 이상한 표정을 지어서라도 나를 웃게 했다. 내가 아무리 벽을 쳐도 다 웃으며 받아줬다, 이동혁은.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벽이 허물어졌다. 친하게 지내다 보니 마음의 거리도 가까워졌고, 곧 그를 의지하게 되더라. 서로에게 이끌리는 게 어쩌면 당연했다. 그도 그렇지만 나도 그저 그런 인생이니까.




여기서 지낸 지 얼마나 지났을까. 계절이 두 번 정도 바뀐 것 같다. 지하에 있어서 잘은 모르지만 출퇴근 하며 걷는 길에 내음이 바뀌는 걸로 알 수 있었다.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일만 했지만. 처음이니까 실수해도 된다는 화정 언니의 말과 달리, 내 손이 닿는 장부는 티끌이라도 남기지 않았다. 그런 내가 기특했을까.


"휴가?"

"응, 너무 일만 했잖아."

"그래도... 자리 비우면 카운터는 누가,"

"오늘은 내가 보면 되지. 가까운 곳 여행이라도 다녀와."

"괜찮은데.."

"나 악덕 고용주 아니야. 얼른."


예상치 못한 휴가가 주어졌다. 온전히 나만을 위해 주어진 시간. 어색함에 몸서리를 치다 생각해 보니 이런 게 처음이었다. 어디를 가야 할지, 뭘 해야 할지 떠오르는 게 없어서 머리가 새하얘졌다. 높으신 분들은 1분 1초가 귀해서 시간 허비하는 법이 없다던데, 나는 고작 하루 뭐할지 하는 고민으로 몇 시간을 흘려보냈다. 가만히 집에 짱 박혀있는데 나를 찾는 소리가 들린다. 이 시간에 누구지? 웬만해서 밝은 시간에 날 찾아오는 이는 없는데.



"어? 웬일이야?"


"너 휴가라며."

"그걸 어떻게..."


이동혁이었다. 하긴 여기까지 나를 먼저 찾아올 사람은 동혁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못 보던 차림이다. 항상 각 잡힌 수트나 검정색 가죽 자켓 입고 와서 이런 모습은 처음 본다. 이렇게 제 나이처럼 입으니까 왠지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잖아.

평범, 우리와는 거리가 먼 말이지만 말이다.


"마담한테 들었지. 근데 여기서 뭐 하고 있어."

"...고민 중이었어. 오늘 하루 뭐 하면서 보낼지.."

"고민하다가 날 새겠네. 나가자."

"어? 지금?"

"응. 우리 오늘은 좀 다르게 지내보자."


어떻게? 묻는 내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동혁은 손을 잡아 왔다. 태어나서 이렇게 즉흥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게 처음인 것 같은데,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손을 잡고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서점? 뭔가 동혁과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라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왜 웃는데ㅋㅋㅋ"

"뭔가 매칭이 안 되잖아..ㅋㅋ 오빠랑 서점."

"왜 이래. 나 알고 보면 지적인 면도 있는 남자야."

"자기도 웃고 있으면서."

"거짓말 하려니까 좀 찔리네ㅋㅋ 아무튼 우리 오늘 또래 애들처럼 지내보자."

"...무슨,"


이해되지 않는 말만 늘여놓는 동혁을 빤히 올려다봤다. 기분 엄청 좋아 보인다. 어째 나보다 본인이 더 들떠 보인다면 기분 탓일까? 그래도 신나서 방방 뜬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까지 덩달아 기분 좋아졌다. 그래, 오늘은 그가 하자는 대로 따라가야지.




어느새 손에는 대학 서적이 들려있고 등 뒤에는 백팩이 달랑거렸다. 정신 차릴 틈 없이 바로 다음 코스로 향했다.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대학 다다랐다. 아... 또래처럼 지내보자는 아이러니한 말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마음 한켠에 캠퍼스 라이프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잠시 잊고 있었을 뿐. 어쩌면 동혁도 나와 같지 않았을까.

우리는 캠퍼스 이곳저곳을 누비며 열심히 대학생 시늉을 했다. 이과생인 척 문과대 건물을 물어보기도 하고, 도강(도둑 강의)도 들었다. 비록 출석부에 우리 이름은 없었지만, 꽤 즐거웠다. 저녁에는 대학가 술집에서 술도 마셨다. 사실 일하는 가게와 사뭇 다른 분위기라 놀랐다. 여기는 술집도 되게 건전하네, 생각하며 낮게 웃었던 것 같다.

캠퍼스 라이프. 그런 말이 있는 이유가 있구나, 느낀 하루다. 처음에는 안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민망하고 죄짓는 느낌까지 들었는데, 역시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한 순간 마음이 동하더라. 다들 캠퍼스 캠퍼스 하는 이유가 있다. 술을 마시고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 기분 좋은 꿈을 꾼 것만 같은 느낌이다. 짧아서 아쉬웠지만 더 길었다면 슬픈 마음도 커졌을 것 같아 이 정도에서 만족하기로 한다.


"오늘 고마웠어."

"아냐 뭘... 갑작스러웠을 텐데 나랑 시간 보내줘서 고마워."

"...사실 이런 자유시간 처음이라 좀 막막했는데.. 진짜 덕분에 행복했어. 오늘 하루 평생 잊지 못할 거야."


"......늦었다. 푹 자고 좋은 꿈 꿔."


나와 똑같은 말투, 표정을 한 그를 뒤로 하고 집으로 들어왔다. 분명 평생 기억에 남을 만한 즐거운 하루인데 마음이 왜 이렇게 쓰라린지 모르겠다. 이불에 파묻힌 채 생각의 가지를 뻗었다. 모른 척 외면하고 지냈던 마음까지 둥둥 떠올랐다. 버려지지 않았다면, 나도 대학에 가고 출석도 불리는 대학생이 됐겠지. 예상보다 자유시간이 주는 파장은 컸다. 여파가 꽤 오래갈 것 같다. 어째 서글퍼 보이던 동혁의 얼굴을 떠올리며 잠이 들었다.







삼류 순정의 법칙







-쿵쿵쿵쿵


요란스러운 소리에 잠에서 깼다. 온 세상이 제일 캄캄한 시간. 이 새벽에 무슨 일이지... 졸린 눈을 비비며 현관으로 나갔다. 누구세요? 나야. 익숙한 목소리에 문고리를 돌링다.



"웬일이야 이 시간에..?"

"그냥, 잠깐 나랑 어디 좀 가자. 따뜻한 거 걸쳐 입고 나와."

"...어?"


"아직 자유시간 안 끝났잖아."





거친 숨을 몰아쉬는 동혁에 괜히 나까지 마음이 급해졌다. 얼른 가디건을 걸쳐 입고 나갔는데, 집 앞에 웬 차가 떡하니 서 있다. 차 없는 거 아는데 이 시간에 이걸 어디서 빌려온 거지? 멍하게 보고 있으면 나를 무작정 차에 밀어 넣는다. 어슴푸레한 공기를 헤치며 차는 달리고 또 달린다.




"바다다...!"


나도 참 단순하지. 우울했던 기분은 어디로 줘버렸는지, 바다를 보니 또 신나서 방방 뛰었다. 바다, 정말 오랜만이야. 그렇게 좋냐며 웃는 동혁의 웃음소리를 배경음 삼아 한참을 뛰어논 것 같다.

하늘이 어둠을 감쳐물 무렵, 동혁이 준비해둔 돗자리에 풀썩 앉았다. 신나게 뛰어노느라 힘을 전부 썼다. 이걸 언제 다 준비했는지, 동혁이 건네는 따뜻한 차를 두 손 가득 쥐었다. 볼멘소리도 빼먹지 않고.


"차 말고 술 마시고 싶은데."

"꼬맹이가 술을 왜 이렇게 좋아해.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더니."

"지도 꼬맹인데 술 좋아하면서."

"난 너보다 오빠잖아."

"그놈의 오빠."

"하여간, 한 마디도 지는 법이 없어요."


아프지 않게 꿀밤을 놓는 동혁에 입술을 삐죽 거렸더니 가방에서 작은 팩 소주를 꺼내준다. 역시, 뭔가 있을 것 같았어. 흡족해하며 술을 홀짝이고 있으면, 춥지는 않냐며 나를 살뜰하게 챙긴다.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도 영 걱정이 되는지 자기가 입고 있던 자켓을 벗어 무릎에 덮어준다.


"오빠도 춥잖아."

"난 태음인이라 열 많아서 괜찮아."

"열 많은 건 태양인 아니야?"

"그런가."

"......뭐든 달라고 하니까 다 주네."

"네가 달라고 하면 내 목숨도 팔아서 주지."


무섭게 무슨 그런 소릴 하냐며 핀잔을 줬지만 심장은 쿵쿵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무드 없는 사랑 고백이 이리도 로맨틱하게 느껴진다니. 요란스레 뛰는 심장을 가라앉힐 겸, 장난 삼아 별이나 따달라고 했더니 그건 또 안 된단다. 조건부 사랑이야 뭐야. 이유를 물으니 내 눈에 있어서 그건 못 따준단다. 평소 같았으면 질색했을 말인데, 술기운도 오르고 기분이 좋아 픽 웃었다. 그러자 웬일로 짜증을 안 내냐며 의아해한다. 


"그냥. 기분 좋아서."

"아까는 울상이더니 이제는 또 기분 좋다네."


...그게 마음에 쓰여서 새벽같이 차도 구하고 이것저것 준비해서 여기 왔구나. 생각하니 고맙고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자연스럽게 내 얘길 털어놓았다. 아무에게도 하지 못 한 얘기. 나는 고아야. 이야기의 시작이 참 노말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왜 이런 삶을 살고 있는지 괜찮은 척 털어놓았다. 얘기가 끝날 때까지 가만히 들어주던 동혁은 이내 자기 품을 내어준다. 나도 너랑 비슷해. 말하는 목소리에 물기가 어려있다.


"그래서 나는 사랑에 목숨 걸어."


자라온 과정은 비슷한데 결과가 달랐다. 나는 사랑을 포기했는데, 이동혁은 사랑을 갈구했다. 목숨까지 건다고 할 만큼. 동혁도 그걸 느낀 건지 너는 나랑 비슷한데 사랑에 목숨 안 걸더라, 그게 참 신기해. 하고 말했다. 저번부터 느낀 거지만 이동혁은 용기 있는 사람이다. 그에 반해 나는... 

사랑 받고 싶었다. 그 욕구가 너무 커서 쉽게 기대했다가 상처 받고, 결국 지치고 나가떨어지는 것의 반복이었다. 근데 용기 내면, 나도 그깟 사랑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잖아, 이동혁이. 마음에서 무언가 울컥 치밀었다. 잘게 떨리는 입술을 뗐다.


"오빠는 달라고 하면 다 주는 사람이잖아."

"......"

"해달라고 하면,"

“…”

"...사랑도 해주나."


내 말에 동혁의 눈동자가 보기 좋게 요동친다. 여러 감정을 담은 눈동자가 고스란히 나를 담는다. 이내 내 어깨를 감싸 안는 동혁의 품이 너무 따뜻해서 그 품을 비집고 들어갔다. 처음 느끼는 따뜻함. 포옥 안겨 너른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바다. 마치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는 착각마저 일렁인다. 파도 소리만 가득하던 바다에 곧 잔잔한 목소리가 띄워진다.


"우리 도망갈까."


묻는 목소리가 퍽 달콤하다. 우리 둘 다 가진 것도 하나 없는데 어떻게 도망을 가, 하고 물으면 그래도 난 너랑 있으면 행복할 것 같은데. 한다. 그러더니 내가 비싼 거 많이 훔쳐 올게, 덧붙이고. 알 수 없게 진지하다가 또 한없이 장난스러워진다. 지금 이걸 고백이랍시고.. 근데 더 바랄 것 없다고 느끼는 나도 제정신이 아니다. 사랑하면 미친다는 말이 맞나 보다. 답지 않은 생각에 바람 빠진 소리를 내고 있으면, 동혁이 답가를 보내온다. 


"여주야, 나는 너랑 사랑이 하고 싶다."

"......"


"그것도 찐하게."


삼류 소설에 나올 법한 대사도 나에게는 그저 구원처럼 느껴진다. 저 멀리서 동이 터온다.









다음 편에는 새로운 인물이 나올 예정입니다 :) 미리 공지에 올렸던 터라 아는 독자님들은 아실 텐데 성찬이가 또 다른 남주예요! 성찬이가 다른 그룹으로 가게 되면서 멤버 바꿀까 고민도 해봤는데 아무래도 성찬이 염두에 두고 쓴 글이라 그대로 가기로 했어요. 너른 이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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