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yword: 해군사관학교 1기생/주인공이 진성 게이/성격 더러움/원작 모름/대식가


해군사관학교 1기생이 되었다.

졸업장 따서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게 목표인데,

인생이 개같이 꼬이기 시작했다.

시발, 아무리 생각해도 난 군대랑 안 맞는 것 같아.

  

망나니의 해군학교 생활기

written By. 시쟌

-19-

~가끔은 극기 훈련이 호화 수련회로 변모하는 경우도 있다.~


*

 

‘아, 인생 정말.’

윤은 생각했다.

정말로 생각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도망치는 도중에 월보와 체를 번갈아 쓰느라 무리한 옆구리는 한 번 더 터졌다. 그 와중에 피카피카인지 파지직파지직인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런 이름의 악마의 열매를 먹은 성가신 동기가 쫓아왔다.

아무튼 윤은 나름대로 머리를 써서 필사적으로 도망쳤고 보르살리노는 텐세이의 도움을 받아 생각보다 빠르게 윤이 움직인 곳을 특정해서 움직였으며, 보르살리노가 연락하는 것과 동시에 사카즈키와 텐세이가 30분도 되지 않아 찾아왔다.

이 모든 과정이 조금의 딜레이도 없이 매끄럽게 이뤄진 것이 그간 윤과 그들의 숨바꼭질이 얼마나 쟁쟁했는지, 그 과정에서 얼마나 추적 실력이 늘었는지를 알려주었다.

물론, 윤에게는 그리 즐거운 소식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최악이네.”

“어이구, 말은 잘한다. 말은 잘해!”

“아이씨…, 아프잖아요!!”

“아프라고 때렸다. 이놈아! 옆구리 터질 때는 안 아프디?!”

잔소리를 해대며 퍽퍽 등짝을 때려대는 의원의 손길에 윤이 인상을 쓰고 작게 욕설을 흘리면서도 굳은 얼굴을 한 사카즈키를 힐긋 보았다. 이쪽이 끝나면 저쪽 잔소리가 시작될 것 같았다.

“너! 절대 안정이다, 알았냐!”

“아, 거 피만 오지게 났지 별로 터지지도 않았구만.”

불만스럽게 중얼거리자 의원의 눈을 한층 더 세모꼴로 치켜뜨며 노려보았다. 윤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링거에 항생제까지 놔준 의원이 사카즈키네를 한 차례 흘겨보더니 영 마뜩잖은 표정으로 끌끌 혀를 차며 병실을 나갔다.

‘…피곤하네.’

윤이 눈두덩을 한 차례 문질렀다.

대충 치료만 받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영 일이 꼬였다. 이놈들은 분명히 제파 선생님에게 보고할 거고 그러면 당연히 윗선에 보고가 들어갈 거다. 거기까지 생각한 윤은 머리를 한 차례 쓸어올렸다.

의원에 있는 하나뿐인 입원실은 침묵에 휩싸인 채 링거액이 떨어지는 소리만 났다. 싸구려 침대에 기대어 앉아있던 윤이 한참이나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뺨을 긁적이곤 그들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또 도망쳐서 미안해.”

“…미안하긴 하냐?”

졸지에 예상하지도 못한 추격전을 벌인 터라 조금 날 선 텐세이의 말에 윤이 조금 주눅이 든 낯으로 설핏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사실 좀 그렇잖아? 다친 거 말하기가 좀 가오도 상하고. 상처도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마음대로 안 되네. 미안.”

적막을 깨고 순순히 사과를 건네며 입을 연 윤의 말에 주변이 잠시 조용해졌다. 윤이 평소와는 다르게 퍽 제 또래의 아이처럼 굴었다.

“으음, 그리고 번거롭게 해서 미안한데… 혹시 오늘 일 제파 선생님께 보고하지 않을 순 없을까? 알다시피, 말 전해지면 위에도 올라갈 텐데 그러면 검진이니 뭐니 받아야 하니까.”

윤이 슬쩍 눈치를 살피는 척하더니 곧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살짝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은 언뜻 처연하게까지 보일 정도였다. 윤은 걱정스럽다는 듯 보란 듯이 작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 그런 거 무섭고 싫거든. 나 원래 살던 데는 그런 거 없었고….”

“……”

“앞으로는 사고도 안 치고 졸업할 때까진 너희 발목 안 잡게 훈련도 열심히 받을 테니까 이 일에 관해서는 입 다물어 주면 안 될까? 오늘 같은 일도 없을 거야. 앞으로도 다치면…, 군 병원은 웬만하면 가고 싶지 않아서. 너희가 도와주면 고마울 것 같아.”

윤은 목을 움츠리고 바짝 긴장한 듯 몸을 뻣뻣하게 굳힌 채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소년은 사람에게 호의를 얻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누가 어떻게 하면 자신을 동정하게 할지, 어떻게 하면 상대의 죄책감을 자극하거나 역린을 건드려 분노를 유발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상대가 나를 좋아하고 사랑하게 하며, 매달리게 할 수 있는지, 또 어떻게 하면 쓸모 있는 패가 되어 나를 유용하게 여기는 지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인간은 사랑을 울부짖는 이성 위의 감정에 지배당하는 동물이라고 할지라도, 실상 본심으론 어느 정도 이익과 실리를 추구하는 생물이니, 그 비어버린, 혹은 상대가 원하는 어떤 공간만 채워준다면 사람은 그것에 이름을 붙이기 마련이었다.

그것이 호의인지 적의인지 혹은 욕망이나 죄책감인지, 애정인지, 어떤 이름을 붙이든 그것은 문제가 없었다.

회장은, 그러니까 시윤의 아버지인 정정하게 늙은 남자는 시윤을 자신이 거둔 것 중에 가장 더럽고 하찮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시윤은 골칫덩이에 가까웠고 또한 그 여자 문제 외에는 완벽하게 살아온 남자의 수치스러운 부분이었다. 그는 시윤이 눈에 띄면 얼굴을 구기고 재떨이를 던질 정도로 소년을 재수 없게 여겼지만, 그럼에도 시윤을 버리거나 혹은 미치게 만들거나 어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섬 따위에 버리거나 혹은 정신병원에 가두는 짓을 하진 않았다.

그는 제 반쪽짜리 핏줄도 거둘 정도로 제 피와 유전자를 아주 끔찍할 정도로 귀히 여겼으나, 그건 단순히 제 피가 어딘가에서 멋대로 번식하길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가 원한다면 시윤을 어딘가에 영영 가둬두고 다시는 눈에 띄지 않게 만들어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회장의 할아버지인 선선대가 시작한 그의 기업은 흔히 말하는 깡패 노름으로 시작된 만큼 아직도 뒷세계의 영향력은 꽤 컸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회장은 그러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낳은 자식 중에… 그러니까…, 뻗대고 다니는 귀하게 자란 윤의 형제 중에서 늦둥이 사생아인 윤이 가장 회장을 닮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회장도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고 윤은 그때, 회장이 후계로 지목하고 싶은 놈이 없음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회장은 막내로 태어나 제 위의 형들을 전부 치워버리며 회장 자리를 꿰찬 만큼 기업과 핏줄에 대한 이기적인 애정이 꽤 대단한 남자였다. 그리고 그 근성과 오기를 가장 닮은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윤이었다.

사람은 몇 번이고 실패하면 의욕이 꺾인다곤 하지만, 윤과 회장은 정확히 그 반대였다. 어떻게든 그것을 쟁취해, 자신을 비웃은 이들을 코앞에서 비웃고 짓밟아줘야 바로 직성이 풀렸다.

윤은 머리가 비상했고 동시에 잔혹한 면이 있었으며,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훔쳐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다소 불합리한 상황에서도 필요하다면 고개를 숙이는 걸 잊지 않고 뒤돌아서선 제게 고개 숙이게 한 이의 머리를 언젠가 짓밟아 버릴 날을 꿈꾸는 것이다.

하지만, 귀하게 자란 회장의 다른 자식들은 그러지 못했다. 뭘 하든 포기가 빨랐고 오만했으며, 굴욕과 모욕을 참지 못했고 뭐든지 돈으로 해결하려 들었다. 후계자 수업을 듣는 첫째를 제 기업의 부장급 이상으로 올려주지 않는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윤은 보고 따라 하는 것을 잘했다. 회장은 윤에게 무언가를 내어주는 걸 싫어했고 마찬가지로 뛰어난 능력의 윤을 다른 배다른 늙은 형제들은 내켜 하지 않았으므로, 윤은 그 흔한 학원이나 과외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주어진 것은 교과서뿐이고 용돈이 든 카드와 그리고 모두에게 개방하는 공공 도서관 정도였다.

그럼에도 윤은 주어진 것을 이용할 줄 알았다. 현대 사회에는 인터넷이 있었고 인터넷에는 질문을 올리면 답을 알려줄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공부만 잘한다고 해결이 되는 건 아니었다. 사람을 다루는 법을, 매 상황에서 대처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더러운 세계에서 어린 윤이 살아나는 것은 힘겨운 일이었다.

그래서 어린 윤은, 자신이 보고 배울 상대로 회장을 선택했다. 소년에게 매일 같이 굴욕을 주고 소년을 혐오하며 끔찍하게 여겨도 윤은 회장을 짓밟기 위해 회장을 보고 배우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회장도 알고 있었다.

그는 윤의 고요한 증오심과 분노를 꿰뚫어 보았고 윤의 특출난 재능과 몸을 사리지 않는 근성까지 어렵지 않게 간파했다.

사실 윤이 조금만 그에게 유하게 굴고 고개를 숙였어도 회장은 어느 정도 윤을 인정하고 그를 밀어줬으리라. 그러나 윤은 그러지 않았다. 회장을 짓밟는 것은 윤의 하나의 목표였고 윤은 목표에게 머리를 숙이는 짓거리를 하진 않았으니까.

그래서 윤은 언제고 회장에게 들덤볐고 이를 악물고 버텼으며, 얻어맞은 다음 날엔 뻔뻔하게도 회장 앞에서 여느 때보다 화사하게 웃었다.

회장은 윤을 그 어떤 자식보다도 혹독하게 다뤘고 그러거나 말거나 윤은 그 앞에서 언제든 이죽거리고 웃어 보였다. 다른 놈들이 해내지 못하는 걸 뻔뻔하게 해내서 그 앞에서 속을 긁어대고 그가 가장 싫어하는 짓거리를 해서 그의 눈밖에 났다.

윤은 회장이 인정하는 존재가 되려는 한편, 그의 손아귀에 들어가지 않았다.

회장은 누구도 믿지 않았다. 수십 년이나 그를 모셔 온 운전기사와 실장도, 하물며 제 씨를 품은 제 자식들까지도. 그리고 마찬가지로 윤 역시, 누구도 믿지 않았다.

믿음이란 한없이 덧없다. 그것은 언제든 돈과 명예, 혹은 타인의 개입과 입장이나 생각, 가치관 등의 변화를 비롯해 외부적 요인에 의해 꺾일 수 있는 것이므로…, 사람을 믿는 것은 곧 세상에서 가장 바보 같은 짓이었다. 약점을 드러내는 것도, 하물며 작은 호불호를 드러내는 것조차도 그 거대한 백 년 묵은 구렁이가 똬리를 틀고 아가리를 벌린 채 독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그곳에서는 멍청한 짓이었다.

그러니까 윤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법을 깨우쳤다.

“사카즈키, 텐세이, 보르살리노. 부탁 좀 해도 될까? 앞으로 이런 식으로 도망도 안 칠 테니까.”

원하는 걸 내어주고 원하는 것을 받는 건 일종의 거래다.

그리고 윤이 파악한 인간관계는 모두 어떠한 거래로 이뤄지고 있다. 수준에 맞는, 혹은 같이 있음으로써 도움이 되는, 필요할 때 의지할 수 있는, 외로움을 달래줄, 어떠한 긍정적인 역할이 부여된 이들이 서로의 필요성에 따라 역할에 어떠한 이름을 붙여 물물교환에 가까운 거래를 한 것이다.

윤은 세 사람이 자신을 꽤 성가시게 생각하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선을 긋지 않는 것은 윤이 그나마 ‘괴물’이라고 불리는 그들을 잘 따라오는, 1기생 중에서는 그나마 쓸만하기 때문이요, 윤이 불편한 상대가 아니며, 또한 제파의 ‘연대책임’ 때문일 거다.

“대신 병원 관련해서만 조금 눈감아줄 수 있을까?”

윤의 말을 들은 세 사람이 잠시 조용해졌다. 보르살리노가 목덜미를 문지르며 설핏 인상을 찡그렸다. 뭔가 거슬리는데, 뭐가 거슬리는지를 명확하게 알 수가 없었다.

‘귀찮아지지 않는다면 나쁘지 않은 제안이지~….’

보르살리노가 생각했다.

병원에 관해서 들킨다고 한들, 몰랐다고 하면 그만이기도 했고 사실 들켜도 그들에게 큰 문제는 없었으니 말이다.

“군 병원은 싫다는 거지?”

“응…, 센고쿠 대장님도 무서우셨고……. 아무래도 감이 좋지 않아서.”

텐세이의 물음에 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룸메이트인 그들이 입을 다물어 준다면, 조금은 편해질 것이다. 물론, 그들을 백 퍼센트 믿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윤은 4년…, 아니 3년하고도 반년이 채 되지 않아서 이 세계에선 없어질 거다.

무사히 졸업하든, 혹은 목적을 이루지 못해서 죽든.

결국 3년 남짓만 잘 어르고 달래면 된다는 말이었다.

“부탁할게…!”

윤이 밉지 않게 짝 소리가 나도록 두 손을 모아 말했다. 좋게 말하면 그 제안은 그리 불편하지 않았고 작은 입막음으론 꽤 이득이 되는 이야기였다.

최소한 이렇게 시간 낭비를 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나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역시 보르 혀…….”

“…이라고 한 번만 더 부르면 제파 선생님께 갈 거야~….”

“오케이!”

양팔을 벌리던 윤이 보르살리노의 말에 냉큼 두 손을 아래로 곱게 모으며 얌전히 대답했다. 보르살리노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보르살리노를 본 텐세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도 상관은 없어. 근데 웬만하면 다치지 않는 게 좋잖아. 너 수혈도 안 된다는 말이잖아.”

“어, 그건 웬만하면 조심해야지. 괜찮아, 무장색도 배웠으니 좀 더 익숙해지면 그런 날붙이에 찔릴 일도 없어지겠지. 좀 더 훈련할게!”

윤은 주먹을 꽉 쥐며 사카즈키를 보았다. 그는 여기에 들어온 뒤 시종일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딱딱한 표정으로 팔짱만 끼고 있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사카즈키가 대련 해줘. 제대로 임할게.”

윤이 슬쩍 살갑게 말을 붙였다. 한참 만에 사카즈키가 입을 열었다.

“멋대로 해라,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상관없다.”

“와아, 정말 고마워. 역시 너희가 최고야!”

불우한 환경에서 남들보다 뛰어나게 자라서 받은 상처가 많은 탓에, 자기방어적이고 합리적이며 또한 이성적이고 타인에게 쉽게 정을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말이다.

윤은 해맑게 웃는 얼굴로 뒷말을 삼키며 순수하게 기쁨을 표했다.

윤은 정말로 세 사람이 마음에 들었다. 쓸데없는 정에 휩쓸리지 않는 만큼 그들은 언제고 윤의 거래에 응해줄 테고 거래에 응하는 방향은 윤이 제시하는, 대개는 합리적인 방향일 확률이 높았으니까.

“앞으로도 잘 부탁해.”

어딘가 만족스럽고 후련해 보이는 윤의 인사에는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

 

“아. 죄송하지만, 선생님 나가 뒈지셨으면…….”

윤이 널따란 바위에 드러누워 새파란 하늘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정확히 2주 뒤, 윤의 상처가 아물었다는 판단이 서는 것과 동시에 제파는 1기생 전원을 정부 소유의 각기 다른 섬으로 전부 날려버렸다. 2개의 조를 하나로 묶어 8명을 한 팀으로 총 8팀이 나왔다.

0조인 윤의 조와 얽힌 것은, 1기생 내에서도 꽤 성적이 저조한 편인 조였다. 그러니까, 1등 조와 꼴등 조가 엮였다고 보면 되겠다. 그래서인지 팀 분위기도 영 좋지 않았다.

“뭐, 좋게 생각하자고! 그래도 제파 선생님께서 너희에게 해루석을 채우지 않은 건 그나마 다행이잖아.”

텐세이가 분위기를 풀려는 듯 웃는 얼굴로 말했다. 사카즈키는 말없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내 능력을 여기서 쓰는 순간 불바다가 될 거다.”

“뭐어……, 머리를 쓰셨지….”

굳은 얼굴을 한 사카즈키의 싸늘한 말에 텐세이는 사방에 보이는 밀림과도 같은 숲과 정글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보르살리노도 어깨를 으쓱였다.

“마찬가지야~ 이 정도로 빽빽하면…, 번쩍번쩍 열매의 기동성도 기대하기가 힘들달까…….”

기껏해야 빛으로 나무나 자를 수 있을 텐데, 결국 그것도 고도의 열과 같아서 이런 건조한 지역에, 그것도 사방이 온통 나무와 숲으로 뒤덮인 곳에서 불이 붙으면 답이 없었다.

즉, 제파는 해루석을 채우지 않는 대신 그들의 발목을 잡을 섬을 선정하고 동시에 꼴찌 팀을 붙여 놓았다.

다른 팀은 성향에 맡게 배분한 모양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제파는 그들에게 4조를 맡겼다. 4조는 이제야 기초 훈련을 간신히 따라오고 있는 이들이었다. 그나마도 제시간에 끝내는 날이 거의 없어 매일 밤까지 훈련하곤 했다.

주어진 거라곤 3일 분량의 전투 식량과 식수, 그리고 각자 사용할 무기 1개 정도였다. 그리고 이 무인도에서 총 33일을 버티는 것이 이번 훈련 과제였고 말이다.

다만, 몇 가지 부가 과제가 주어졌다.

첫째, 예고 없이 ‘습격자’가 생도를 잡을 예정이니 잡히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

둘째, 이 과제는 팀전이자 개인전이기 때문에 개인 포기가 가능하다. 팀원 전체가 포기하지 않는 이상 시험은 계속 진행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단, 최대한 많은 팀원이 살아남아야 점수가 더 주어진다.

셋째, ‘습격자’를 쓰러뜨려 그들이 가진 단서를 획득해서 섬에 숨겨진 보물을 찾을 것.

물론, 문제가 생겼을 땐 언제든 통신할 수 있도록 비상용 전보 벌레가 하나 주어졌다. 단, 이 시험은 실습 평가로 반영되니 빠른 포기는 감점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말과 함께, 3위까지는 휴가와 용돈이 주어진다고 했다.

아무튼, 결과 그들은 지금 무인도에 있었다.

명백히 짜증 나 보이는 사카즈키와 난감해 보이는 텐세이, 그리고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웃는 얼굴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보르살리노와 그늘진 바위 위에 드러누운 윤까지.

최강과 괴물이라고 불리는 0조와 함께 하게 된 4조는 그야말로 가시방석 그 자체였다. 창백하게 질려서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침울한 얼굴이었다.

여자가 둘, 남자가 둘인 조였다.

윤은 사카즈키를 비롯한 세 사람이 어떻게 할지 대화를 나누는 것에 관심도 없다는 듯 드러누운 채 한참이나 빈둥거렸다. 세 사람도 윤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윤이, 제 할 일은 제대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의원에 갔던 날 이후로 묘하게 거리감이 있다는 것을 사카즈키조차 느끼고 있었던 탓이다. 상황이 달라진 건 없었다. 윤이 조금 부지런해졌다는 것만 빼면 말이다.

그날 이후로 윤은 그들이 깨우지 않아도 일어났고 아침에 말이 없긴 해도 잠투정을 부리진 않았으며, 때로는 먼저 씻을 때도 있었다. 또한, 더는 도망가거나 훈련하기 싫다며 투정을 부리지 않았다. 제파 앞에서는 종종 하기 싫다며 툴툴거리기는 해도 최소한 그들의 앞에선 말이다.

윤은 ‘약속대로’ 세 사람을 귀찮게 하지 않았고 동시에 손이 가지도 않았다. 또한, 어째서인지 윤은 다른 생도들에게도 부러 말을 걸었으며 그들과 밥을 먹거나 친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그들과 거리를 두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윤은 그들과 식사할 때가 제일 많았으니까 말이다.

다만, 그래.

이건 뭐랄까… 거래를 한 기분이었다. 돈을 주고 물건을 산 느낌. 텐세이가 그렇게 생각하며 윤을 바라보았다.

“안녕. 에밀리, 시카, 그리고… 그루너랑 켄지. 맞지?”

바위에 널브러져 있던 윤은 어느새 바위에 앉은 채 한쪽에 서 있는 이들을 보며 웃으며 말을 건넸다. 연신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으로 눈치만 살피고 있던 네 사람이 윤을 보며 살짝 눈을 크게 뜨곤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 기억했구나?”

“응, 첫날 자기소개를 했었잖아. 당연히 기억했지.”

윤이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말했다.

동글동글하게 생긴 주홍색의 단발 여자가 하나, 키가 꽤 큰 갈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질끈 묶은 여자가 하나, 그리고 더벅머리의 남자와 눈초리가 영 좋지 않은 곱슬머리의 남자가 또 하나였다.

“앞으로 한 달 동안 잘 부탁해. 나는 진시윤이고…. 뭐, 윤이라고 부르면 돼. 18살이야.”

“18살?”

“응.”

윤이 또래의 아이처럼 퍽 살갑게 웃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네 사람이 그제야 사카즈키 쪽의 눈치를 살짝 보면서 윤에게로 살짝 다가왔다. 윤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몇 살 인지를 묻더니 힘들지 않냐는 둥, 겨우 1학년인데 이게 무슨 훈련이냐는 둥 불만을 툴툴 내뱉었다.

그에 사카즈키의 표정이 영 불만족스럽게 번져갔지만, 상대의 긴장이 풀리고 있음을 눈치챈 보르살리노가 사카즈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는 것으로 환기를 시켜줬다.

“쟤네가 저렇게 무섭게 보여도 딱히 해를 가하진 않아. 특히 사카즈키가 말이 좀 험하긴 하지만….”

윤이 고개를 까딱이며 사카즈키를 턱 끝으로 가리켰다. 네 사람이 윤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그 딱딱한 인상에 멈칫했다. 사카즈키의 입매가 한층 더 굳었다.

“기본적으로 너무 성실해서 그래. 우리한테 엄격한 만큼 본인에겐 두 배 더 엄격한 놈이니까 그냥 그러려니 해.”

사카즈키의 눈썹이 한 차례 까딱였다.

“…으응.”

“뭐, 형이랑 누나들은 나보다 더 어른이니까 잘할 거야.”

어느새 친근하기 짝이 없는 호칭을 자연스럽게 부르기 시작한 윤은 그들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두드렸다.

“…우리가 방해될까 봐 그렇지.”

“저놈들은 사냥시키고 우리는 서포트하면 되잖아. 누나. 나는 칙칙한 공간에 예쁜 누나들 생겨서 좋은데.”

윤의 너스레에 에밀리와 시카가 웃음을 터뜨렸다. 윤이 호쾌하게 마주 웃으며 연신 그들에게 이런저런 말을 걸었다. 자연스럽게 텐세이와 보르살리노를 대화에 끌어들이더니 이윽고 실없는 질문으로 사카즈키까지 끌어들이곤 슬쩍 입을 열었다.

“그래서, 앞으로 계획 결정한 거 있어?”

“일단 거처를 찾는 것과 식수 확보가 중요하다. 식량은 뭐든 먹으면 그만이지만, 물은 필요하니까.”

사카즈키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 그러면 일단 식수를 찾고… 그 근처에 거처를 찾아보는 건…….”

단발의 에밀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에 윤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조금은 과장될 정도로 감탄사를 흘렸다.

“우와, 누나 천재네. 그것도 괜찮겠다!”

“…큼. 거, 근데 그렇게 되면 다른 짐승도 오지 않겠냐? 왜, 나 옛날에 산골에서 살았는데 물 있는 곳엔 짐승이나 맹수도 자주 들었거든.”

“아앗, 형 말도 맞네…. 그것도 그렇구나…….”

윤이 한 마디 한 마디에 과장된 반응을 돌려주자 주춤거리며 어깨를 움츠리기만 하던 4조가 꽤 적극적으로 의견을 꺼내 들었다. 거기에 텐세이가 적절히 반응하고 보르살리노가 조언하고 사카즈키까지 묵직하게 의견을 내기 시작하자 꽤 그럴듯한 회의 현장이 완성됐다.

무력이 다소 약하더라도 머릿수가 많으니 확실히 다양한 성장 환경에서 겪은 경험에 따라 여러 각도에서 생각하는 의견을 들을 수 있어서 진행이 조금 더 수월했다.

보르살리노는 순식간에 다양한 의견이 오가며 지지부진하던 계획이 착착 짜이기 시작하고 분위기도 꽤 풀어진 것을 보며 흘긋 윤을 보았다. 정작 이 분위기를 만든 윤은 바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채 팔짱을 끼곤 고개를 까딱거리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무섭다면 무섭고 놀랍다면 놀랍고~….’

그리고 거슬린다면 거슬린다.

휙휙 바뀌는 분위기, 말투, 표정과 호칭까지. 삶이 전부 가면이라도 쓴 것처럼 느껴져서 보르살리노는 알면 알수록 윤이 조금 더 꺼려졌다.

“아, 그래도 다 같이 사카즈키한테 붙어 자면 춥진 않겠다. 그렇지? 쟤 인간 난로잖아.”

추위를 이겨내고 거처의 조건에 대해 얘기하는 와중 들려온 윤의 말에 사카즈키가 질색하고 그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윤은 가만히 지켜보다가 분위기가 영 가라앉거나 무거워지면 이렇게 한 마디씩 던졌다.

“그러면 일단 오늘 할 일로 결론지은 건 일단 식수가 있는지 찾는 거, 그리고 거처로 둘 곳을 찾는 거지?”

“일단 그렇지~….”

“추위는 옷도 있고 혹시 바닷가에 떠내려온 것도 한 번 수집해보고 그것도 안 되면… 뭐, 엄청 커다란 이파리 같은 거 찾아보자고.”

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기지개를 켜며 양팔을 쭉 벌리곤 말했다. 그에 4조가 웃음을 터뜨렸다. 윤이 그들을 내려다보며 말갛게 웃었다.

“아, 그리고 사카즈키 힘 있을 때 그릇 같은 거 만들어두라고 하자.”

“그릇? 그걸 어떻게 만들어?”

“사카즈키가 모래를 녹여서! 뭐, 불순물이 좀 많기는 하겠지만 당장 급하게 쓸 거로 충분하겠지.”

“모래를 녹여서 그릇을…? 도자기라도 빚자는 거냐?”

곱슬 머리카락의 남자, 켄지의 거친 어투에 윤이 고개를 저었다. 사카즈키도 의아한 표정으로 윤을 보았다. 윤은 어깨를 으쓱이곤 마저 말을 이었다.

“유리는 보통 모래에 있는 규사라는 물질로 만들어지거든. 그러니까, 모래를 높은 온도로 녹이면 될 거야. 아니면 사카즈키가 용암을 굳혀서 화성암으로 적당히 모양을 만들어도 되고.”

“…모래가 녹으면 유리가 되는 거야?”

“응, 시카 누나.”

눈을 동그랗게 뜬 키 큰 동기에게 대답을 해준 윤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가볍게 몸을 풀더니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아무튼 이 섬이 너무 넓어서 다 같이 돌아다니면 비효율적이니까 2명씩 어때? 1조 한 명, 4조 한 명 조합으로!”

윤이 보르살리노와 사카즈키를 보았다. 4조만 보내기엔 영 불안하니 반반 나눠서 붙이는 것이 분명했다.

“상관없다.”

사카즈키의 대답에 보르살리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켄지 형은 사카즈키랑 가고… 시카 누나는 보르살리노! 나는 에밀리 누나랑 갈 거니까 텐세이가 그루너 형이랑 가.”

켄지와 그루너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사카즈키는 그냥 봐도 무서웠고 텐세이는 얼굴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윤이 생글생글 웃으며 냉큼 에밀리의 옆에 섰다.

“…크흠, 내, 내가 너랑 가면 안 되냐? 윤.”

영 떨떠름해 보이던 켄지가 슬쩍 윤에게 다가와 속닥거렸다. 윤이 고개를 저으며 에밀리의 뒤에 슬쩍 몸을 숨겼다. 키가 작다곤 한들 170이 넘는 터라 윤이 살짝만 몸을 수그리면 그녀의 뒤에도 충분히 숨을 수 있었다.

“그럼 식용으로 마실만한 물이 있는 곳을 찾아보고 3시간 뒤에 여기서 다시 집합하는 걸로 하자. 그럼 난 이쪽으로 다녀올게~!”

윤이 에밀리의 손을 잡곤 냉큼 몸을 돌렸다. 후다닥 사라지는 윤을 보며 켄지가 고개를 푹 떨구곤 사카즈키의 옆으로 다가갔다.

4명의 팀이 빠르게 사라졌다.

 

*

 

사카즈키는 그의 경망스러운 행동을 뒤로하더라도 무인도에서 보여준 윤의 수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생존을 시작한 지 일주일, 그들은 생각보다는 더 극한의 생활을 하진 않았다. 그리고 그것에 윤의 지분이 많이 있다는 걸 더는 외면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윤은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지식을 발휘했다. 감정적이고 가볍고 어려 보이는 태도에 비해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움직였다.

그날, 텐세이 조가 작은 강을 찾아냈다. 다만, 그 물이 그렇게까지 깨끗하지 않아서 그냥 먹는 것은 어려웠다. 그래도 강 상류에는 적당한 동굴이 있었고 그들은 동굴의 주인으로 보이던 곰을 죽이고 그곳을 차지했다.

윤의 요구대로 사카즈키가 모래를 녹여 유리를 만들어 그것을 부수고 칼 대신 사용했으며, 시간이 지나 사카즈키가 조금 더 세밀하게 제힘을 운용하게 됐을 땐 꽤 그럴듯한 유리 칼이 완성되기도 했다.

윤은 정말로 커다란 나뭇잎을 구해 그것을 이어 붙여서 동굴 앞에 커튼처럼 그것을 길게 늘어뜨렸고 시간이 지나선 무인도에 떨어지기 전 깨우친 람각을 톱 대신으로 이용해 문과 비슷한 것을 만들어 한쪽으론 아예 바람이 통하지도 않게 해버렸다.

사카즈키가 있으니 불은 구하기 쉬웠고 짐승을 죽여 가죽을 뜯어 그것을 이불로 사용했다. 구덩이를 여러 개 파서 거기에 바닷물을 넣고 증류시켜 가운데에 그릇을 두고 떨어지는 물을 받는 것으로 식수를 구하기도 했다.

4조의 켄지와 시카는 어업으로 유명한 섬에서 자란 만큼 수영에 굉장히 능숙했는데, 처음에는 그들이 직접 바다에 들어가 물고기를 잡았고 나중에는 사카즈키와 보르살리노의 도움을 받아 낚싯대를 만들어 낚시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그루너와 텐세이는 요리를 잘했고 에밀리는 의외로 식물에 대한 지식이 많아서 식용 식물과 아닌 걸 구분할 수 있었다. 아무튼 장작을 구하거나 그 외 필요한 걸 구하고 사냥하는 일은 텐세이와 윤을 비롯한 0조가 도맡았다.

햇볕이 잘 드는 온갖 바위 위에 바닷물을 툭툭 뿌렸고 그걸 긁어 소금까지 꽤 두둑하게 모았다. 쌓은 소금 일부를 제외하곤 거기에 생선을 담가 절여두기까지 하니 상할 걱정도 덜었다.

썩어도 강 상류인 터라 짐승도 많이 있었다. 이 섬에는 토착 원숭이와 호랑이가 있었는데, 그 덩치가 엄청나게 크고 힘도 엄청나게 셌다. 주먹으로 바위를 깰 수 있을 정도면 말을 다 했지.

물론, 괴물로 불리는 0조 3인에겐 쨉도 안됐지만 말이다.

어쨌든 덕분에 가죽도 고기도 잔뜩 쌓였다. 윤은 그걸 또 절여서 말리고 소분해서 미끼로 쓰라고 주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일주일쯤 지나니 갈증이나 허기를 겪을 일이 전혀 없어지는 호화로운 생활이 도래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고기도 새고기 육고기 물고기까지 종류별로 먹을 수 있었고 작은 베리 종류의 과일도 먹을 수 있었으며 나중엔 수액이 나오는 나무를 윤이 발견해서 달콤한 수액도 마실 수 있었으며 윤의 대식가 기질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런고로, 그들에게는 극기 훈련이 호화 수련회 느낌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지식 대부분이 윤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너는 아는 게 많군.”

바위에 가죽을 얹고 드러누워 있던 윤이 흘긋 눈을 뜨곤 피식 웃었다.

“그래 보이냐? 어릴 때 무인도 같은 곳에 간 적이 있을 뿐이야. 말도 안 통하는 곳이었는데…, 그래도 눈으로 보고 배운 게 좀 있지.”

“무인도에…? 그 세계에도 섬이 있나?”

“당연하지, 없을 줄 알았어?”

윤이 키득키득 웃으며 대답하곤 널찍한 바위의 중앙에서 옆으로 슬쩍 몸을 비켰다. 사카즈키는 딱 한 사람분의 자리가 더 난 것을 보며 미묘한 낯으로 윤을 내려다봤다.

“누워 봐, 기분 좋다.”

평소라면 해이한 짓거리라고 칼같이 거절했겠으나, 사카즈키는 윤과 이런 무난하고 조용한 대화를 나눈 게 꽤 오랜만인 것을 깨닫고 눕는 대신 그 옆에 걸터앉았다.

“벽창호 같은 놈.”

윤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그를 작게 타박했으나 그외에 더 말을 얹진 않았다.

“왜 저들을 형이라고 부르지?”

“음, 사람이 어리면 좀 얕보게 되는 경향이 있잖아. 너네가 그렇게 딱딱하기만 하니 나라도 애새끼처럼 굴어봐야지, 뭐.”

“우리에겐 첫만남부터 그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땐 귀찮았고…. 사실 지금도 부를 마음은 없어. 형이니 누나니 동생이니……, 호칭이라는 건 결국 사람의 위아래를 구분 짓거든.”

윤은 줄곧 평온하게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뜨며 눈동자를 굴렸다. 사카즈키는 윤을 여전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내가 인정받고 싶거나…, 짓밟아주고 싶은 새끼한텐 그런 말 안 쓰거든.”

“…….”

사카즈키의 눈을 똑바로 마주한 윤이 눈을 초승달처럼 휘며 퍽 해사하게 웃었다. 사카즈키는 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코웃음을 치곤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어린놈이 어렵게도 사는군.”

“인생이 좆같이 어려웠거든. 그리고 너랑 나랑 얼마나 차이 난다고.”

“윤, 너는 언젠가 부모에게 맞아 죽어서 왔다고 했지.”

“…그랬지.”

사카즈키의 묵직한 물음에 윤은 여전히 깍지 낀 손을 뒤통수에 가져다 대고 누운 채 눈을 감고선 대답했다.

“무슨 의미였는지 물어봐도 되나?”

“말 그대로야, 조카 새끼가 내가 게이라는 걸 회자… 아니 아버지 새끼한테 꼰질렀거든. 그래서 얻어맞았어. 야구 배트로.”

윤의 덤덤한 말에 사카즈키가 고개를 돌렸다. 윤이 누운 바위 옆에 세워진 야구 배트를 본 사카즈키는 미간을 좁혔다. 다소 의문이 들었던 탓이다. 왜 하필이면 굳이 야구 배트를 무기로 사용하는지 의아했던 탓이다.

“사실, 평소에도 자주 있었던 일이야. 근데 그날 내가 피한다고 몸 좀 숙이다가 머리를 한 번 맞았는데, 맞은 부위가 좀 나빴는지 영 그렇더라고. 속이 안 좋아서 화장실 가다가 방에서 기절했는데 정신 차리니까 마린포드 앞이었어.”

“…….”

“씨발, 평소대로였으면 그냥 전치 몇 주 선고받고 병원에 입원하는 걸로 끝났을 텐데.”

윤이 짜증 난다는 듯 혀를 차며 꿍얼거렸다. 사카즈키는 말없이 윤을 바라보다가 팔짱을 끼곤 입을 열었다.

“부모가 해적이었나? 아니, 그러니까… 범죄자였나?”

“아니, 세계 굴지의… 욕심 많은 부자 새끼.”

윤이 비웃음을 띤 목소리로 말했다. 사카즈키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타인을 위로하는 법을 잘 몰랐고 윤이 위로를 바랄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에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한 탓이었다.

문득 느껴지는 인기척에 윤이 눈을 뜨곤 미간을 찌푸렸다.

“너네는 왔으면 말을 하지 쥐새끼들처럼 가만히 있냐?”

“한창 진지한 대화 중이길래~…”

“뭐래.”

윤이 어깨를 으쓱이곤 자리에서 일어나 바위에 걸터앉았다. 보르살리노가 자연스럽게 앉더니 텐세이가 맞은편으로 와 아예 바위 아래쪽에 앉아버렸다.

“어디서부터 들었냐?”

“어린놈이 어렵게도 사는군, 부터…?”

“씨발, 다 들었네.”

윤이 눈치 못 챈 자신이 병신이라며 툴툴거렸다. 그런 윤을 보며 긴 검지 끝으로 바위 위에 걸쳐진 거친 가죽 털을 느리게 훑던 보르살리노가 입을 열었다.

“근데~ 용케 야구 배트를 무기로 쓰네~…, 나라면 쳐다보고 싶지도 않을 것 같은데.”

“야, 보르살리노. 나는 지는 게 정말 싫어.”

4조 앞에서 유순하게 구는 것과는 다르게 한껏 음산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와 형형하게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로 흘리는 윤의 말에 보르살리노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하물며 실제로는 나한텐 아무것도 못 하는… 무생물이니 기억이니 트라우마니 하는 것들 따위에 지는 건 더 싫고. 그리고 뭐든… 무섭고 꺼려지는 건, 즐기면 그만 아니냐.”

“그런가?”

텐세이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게 사람 마음대로 되는 거였나?

“싫으면 즐기면 그만이지. 무서우면 익숙해지면 그만이고.”

퍽 덤덤하게 읊조리는 윤의 말에 보르살리노가 낮게 웃었다.

“그래서 윤은 매일 가면을 쓰고 사는 건가~…? 아무것도 들키고 싶지 않아서~?”

웃음기 섞인, 언뜻 떠보는 듯한 보르살리노의 말에 윤이 멈칫하곤 조금 놀란 듯 눈을 살짝 크게 뜨더니 이윽고 꽤 호전적인 표정으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회탈 하나 쓴 놈이나 변검술 쓰는 놈이나 다를 게 있나?”

“…그건 또 뭐야?”

“하회탈? 대충 이렇게 생긴 항상 웃는 가면이야. 변검술은 가면에 손대지 않고 가면을 순식간에 바꾸는… 뭐 일종의 마술쇼 같은 거지.”

윤이 근처에 있는 돌멩이로 바닥에 하회탈을 그려 보이며 말했다. 윤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어렵지 않게 깨달은 보르살리노의 살짝 굳은 시선이 윤에게 닿았다. 윤은 그런 보르살리노를 해맑은 얼굴로 마주 보다가 어깨를 툭 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차일반인 주제에 속 긁지 말자고, 친구.”

일어나며 보르살리노의 귓가에 속닥거리듯 말한 산뜻하게 윤이 허리를 쭉 펴며 기지개를 켜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난 너희가 꽤 마음에 든단 말이야.”

윤이 웃으며 말했다.

“나만큼이나 배배 꼬인 환경에서 자라서 쉽게 정을 안 주는 만큼 남도 잘 안 믿고, 합리적이고 효율적이지. 그러니까 우리 닮은 새끼들끼리 기왕이면 졸업 때까지 무난하게 잘 지내보자고. 병원에서처럼 말이야.”

윤이 그들을 스쳐 지나며 웃는 얼굴로 말을 덧붙이더니 그대로 한쪽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그루너에게로 발랄하게도 뛰어 가버렸다.

“그루너 형! 오늘은 뭔가 고기 들어간 수프가 먹고 싶어!!”

언제 그랬냐는 듯 한 점 티 없이 맑게 웃는 얼굴로 다가간 윤이 그루너의 옆에 털썩 앉았다. 보르살리노가 제 어깨를 꾹 짚고 갔던 윤을 떠올리곤 불쾌한 듯 어깨를 한 차례 털어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윤은 정말, 짜증 나는 망할 애송이야~….”

“으하하하!! 네가 그런 얼굴 하는 건 처음 본다, 보르살리노. 뭐, 윤이 남의 아픈 곳 찌르는 예리한 구석이 있긴 하지. 가드도 높고 아무도 안 믿고….”

“싫어하는 걸 극복하려고 그걸 더 가까이 하다니, 무식하군.”

“……음, 윤도 너한텐 그런 말 듣기 싫을걸.”

텐세이가 슬쩍 덧붙이자 사카즈키가 말없이 그를 노려봤다. 그날도 예상하지 못한 동기의 이야기 하나를 들은, 그리 큰 문제 없는 무난한 하루였다.

 

문제는 8일째가 되던 날 도래했다.

‘습격자’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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